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물의 정령

2019.01.07 23:0201.07

#1
줄곧 분주했던 하역장도 이제는 고요하다. 월동 대피가 끝났으니 감독관도 숙소로 돌아가 잠깐 휴식을 취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난데없는 우주선 한 척만 아니었다면. 감독관은 팔짱을 낀 채 도크에 진입하는 우주선을 노려본다. 선수에 지구를 형상화한 표식과 함께 지구 권역 해경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공권력 냄새도 맡을 수 없는 이런 변방에 해경이 무슨 일일까.
시끄러운 안내음이 울리며 파란 조명이 들어와서 도킹이 성공적으로 완료되었음을 알린다. 이어 우주선 출입문이 열리고 회색 근무복을 입은 형사 두 명이 내린다. 지구 권역 해경의 표식이 근무복 가슴주머니에도 부착되어 있다. 둘 중 나이 든 쪽 형사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감독관에게 고개를 까딱 숙여보이며 인사한다.
>다갈 일호 개척지 책임자 되십니까?
익숙하지 않은 억양이다. 수사관은 공무원인데도 태양계 출신은 아닌 듯하다. 감독관은 어린 시절을 목성계에서 보냈기에 태양계 방언을 조금 안다. 불뚝한 태도가 마뜩찮아 감독관은 눈을 가늘게 뜬다.
>그렇습니다.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갑작스럽게 형사 분들이 찾아오시니 괜한 걱정이 드는군요.
감독관이 관리하는 다갈 항성계는 지구 권역에서도 가장 외곽에 위치했고, 사람이 사는 개척지는 하나 뿐이다. 감독관은 행정처리 등의 이 유로 다른 항성계의 관공서를 찾은 적 있지만, 대부분의 개척민은 평생 공무원과 만날 일도 없다. 나이 든 형사가 감독관의 질문에 답한다.
>아, 걱정할 만한 일은 아니고, 우리도 갑자기 지시를 받고 온 거라 경황이 없기는 마찬가진데, 근래 윗선에서 예민한 문제가 좀 있어서 관련 조사를 진행할 예정이니까 협조를 좀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조사라니요? 저희 개척지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설명해주셨으면 합니다만.
지구 권역 행정부는 변경 개척지에 거의 신경 쓰지 않는다. 이름만 지구 권역이고 사실상 외우주라고 봐도 무방한 구역이 많다. 관리하기엔 비용이 많이 든다는 등의 이유로 방치하는 셈이다. 그런 주제에 분리 성향을 보이는 개척지에 대해선 용서가 없다. 감독관은 독립된 세력권을 형성하려던 개척지 몇 곳이 진압당한 역사를 안다. 그러나 다갈 항성계에서의 그런 활동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기에 의아하고 불쾌하다.
>흠, 여기서 바로 얘기하기는 좀 그런데 느긋하게 대화할 장소가 없을까요?
나이 든 형사는 하역장을 훑어보며 말한다. 감독관은 그런 형사를 경계하는 눈초리로 쏘아보다가 대답한다.
>따라오십시오. 공용 회의실이 있습니다.
감독관이 몸을 돌려 걸어가자 두 형사도 군말 없이 따라온다. 조명이 침침한 복도에 접어들자 벽면의 칠은 군데군데 벗겨져 있고 천장엔 전선과 배관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 보인다. 제각기 발걸음만 옮기던 가운데 젊은 형사가 입을 연다.
>여기선 궤도 시설에만 사람이 사는 건가요? 여기 도착하기 전에 위성 개척지 쪽으로 먼저 연락을 시도했는데 아무 응답도 없었어요.
감독관은 젊은 형사를 흘끗 바라본다.
>곧 겨울이라 모두 궤도 시설로 대피했습니다. 겨울엔 위성이 얼어서 사람이 살 수 없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관제 시스템의 자동 응답도 듣지 못하셨습니까?
>아예 통신 채널 자체가 먹통이더라구요. 우리 배엔 궤도 시설의 통신 채널이 저장되어 있지 않아서 본청에 물어봐야 했죠.
감독관은 어깨를 으쓱한다.
>그럼 채널을 잘못 아셨나봅니다. 아무리 별볼일 없는 시골이라지만 연락처 정도는 갱신해두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겨울이 왔는데 위성에 잘못 착륙했다가는 다시 햇빛을 못 보셨을 겁니다.
형사들은 굳이 대답하지 않는다. 어둑한 복도를 지나자 역시 조명의 밝기를 최대한 낮춰 놓은 홀이 나온다. 벽 자체가 색이 바랜 인상을 준다. 마침 맞은편에서 문이 열리고 수증기와 함께 바지만 입은 개척민이 걸어나온다. 문 안쪽은 청색 조명이 밝다. 샤워장인 듯하다. 개척민은 감독관 일행을 보더니 어깨를 으쓱하고 다른 복도로 들어가버린다.
감독관은 홀에 면한 회의실로 형사들을 안내한다. 조명을 켰더니 먼지가 두텁게 쌓인 탁자가 눈에 들어온다. 세 사람이 발을 들이자 바닥에서도 먼지가 뿌옇게 피어오른다. 나이 든 형사는 헛기침을 하고, 젊은 형사는 소매로 얼굴을 가리며 말한다.
>청소를 잘 안 하시나봐요.
>육 년만에 왔으니까요. 지구 시간으로 여름이 대략 여섯 해입니다. 겨울이 여섯 달이고요. 낮과 밤도 똑같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러면 어떤 일로 오셨는지 설명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2
두 형사는 침묵 속에 앉아 기다린다. 시작하려는 찰나 훼방을 받아서 감독관이 자리를 비웠기 때문이다. 감독관은 급하게 달려온 개척민의 귓속말을 듣더니 그들을 회의실에 내버려둔 채 나가버렸다. 금방 돌아오겠다고 했지만 십수 분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다. 젊은 형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 구석구석을 살핀다. 나이 든 형사가 혀를 찬다.
>감시라도 하고 있을까봐 그러나.
>혹시 모르죠.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별 일 아니라는데 거 참, 그냥 형식상 조사만 마무리하고 가면 되네.
>말처럼 쉽게 끝나면 좋겠네요.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문이 벌컥 열린다. 감독관은 베이지색 점프수트 차림의 덩치 큰 남성과 함께 들어온다. 수염이 덥수룩한 개척민은 두 형사를 보고는 역시나 달갑지 않아 하는 눈빛을 보낸다. 집에 경찰을 들이기 싫어하는 건 어디나 똑같으니까. 감독관은 개척민을 소개한다.
>하 반장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마침 형사 분들이 오셨는데 저희 쪽도 신고할 내용이 생겨서 말이죠. 먼저 말씀하시겠습니까?
늙은 형사는 젊은 형사에게 고개를 끄덕여보인다. 젊은 형사는 주머니에서 휴대용 컴퓨터를 꺼내며 얘기를 시작한다.
>혹시 바리 교단이라고 아시나요?
감독관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하 반장은 모르겠다는 듯 멀뚱한 표정이다. 
>사이비 종교 말씀이죠. 들어는 봤습니다.
젊은 형사가 휴대용 컴퓨터를 조작하자 지구 권역의 해도 홀로그램이 탁자 위에 표시된다. 형사는 해도를 회전시키고 확대하며 다갈 항성계와 인접한 몇 항성계가 한 눈에 들어오도록 한다. 
>그냥 사이비 종교라고 하기엔 많이 위험한 놈들이에요. 폭력사태도 불사하는 광신도 집단인 데다가, 지구 권역 밖에서 들여온 무기로 무장을 했거든요. 최근 지구 권역 행정부는 외곽 구역에서 바리 교단의 활동이 매우 활발해진 걸 알았어요. 해경이 놈들의 동향 파악에 매달리고 있어요. 무슨 짓을 꾸미는 건지 알아내려고.
감독관은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는다.
>무장한 광신도 집단? 그게 이 개척지와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저희를 의심하는 겁니까?
>인근 항성계에선 몇 차례 바리 교단의 활동이 확인됐어요. 개척지에 잠입하거나 포교 활동을 하기도 하고, 심한 경우 무력으로 개척지를 점거해버린 경우도 있어요.
>여긴 사이비 교단 같은 건 없습니다. 지난 여름간 찾아온 우주선은 단 두 척인데, 외우주로 향하던 중 연료 보급차 궤도에 머물다 갔을 뿐입니다. 개척민 전원의 인적사항을 파악하고 있고요.
>저희도 어떤 혐의를 들고 온 건 아니에요. 오히려 다갈 개척지가 바리 교단과는 관계 없다는 걸 확인하기 위해 왔다고 생각해주세요.
나이 든 수사관이 끼어든다.
>단정하듯 말하지는 말게, 조 수사관. 책임자 양반, 마침 잘 된 일인 게, 개척민이 모두 궤도 시설로 대피했다면 조사도 빨리 끝날 테고 우리도 금방 떠날 거니까, 선량한 개척민들의 협조를 좀 부탁드리겠소.
그 말에 하 반장이 입을 열려고 하지만 감독관이 손을 들어 제지한다.
>사이비 무장 집단과는 관계 없지만 얄궂게도 안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감독관은 한숨을 푹 쉬고는 말을 잇는다.
>개척민 전원이 대피한 건 아니더군요. 실종자가 있습니다. 조금 전 하 반장 보고를 통해서 알게 됐습니다. 그리고 위성 쪽 관제 시스템과 연락이 안 된 것도 그쪽 잘못이 아니었습니다. 저희와도 통신이 두절됐습니다. 실종자와 통신두절이 무슨 상관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실종자라면?
>월동 대피에서 누락된 개척민이 있다는 뜻입니다. 위성에 남아있거나, 궤도상에서 표류하고 있거나.
나이 든 형사는 등받이에 기댄 몸을 일으키고, 조 수사관은 재빠르게 휴대용 컴퓨터를 조작한다. 홀로그램 해도에서 다갈 항성계를 확대하자 두 태양이 한눈에 들어온다. 시점을 더 확대하니 다갈의 3호 행성과 그 위성 근처에 달아둔 메모가 몇 개 보인다.
>저희가 여기 온 이유는 다갈 항성계에서 외우주로 향하는 암호문이 반복적으로 송신된 걸 포착해서에요.
감독관과 하 반장은 어리둥절한 시선을 교환한다.
>사실입니까? 겨울이 코앞인데 이게 무슨 일인지.

 

#3
다시 하역장으로 돌아온 형사들은 또 다른 개척민들을 소개받는다. 하 반장만큼이나 덩치가 큰 여성과 평범한 체구의 남성이다. 두 개척민은 하 반장처럼 짙은 베이지색 점프수트 차림에 더해 형광 조끼를 걸쳤다. 
개척민들은 우주선을 수리하고 있던 모양이다. 케이크 모양의 우주선 측면에 08이라는 번호판이 보인다. 널리 보급된 형태의 궤도 착륙선인데, 이걸 타고 위성과 궤도 시설을 왕복하는 것일 터이다. 키 작은 남성 쪽이 먼저 인사를 건넨다.
>구포라고 합니다, 구포. 공무원이랑 일하게 될 줄은 몰랐네요. 혹시 저희가 죄라도 지어서 불려온 건가요?
>불려온 건 너만 그렇다, 구포. 가기 싫으면 말아도 되고. 난 소래라고 하오. 
구포는 재빠른 프록시마 억양, 소래는 들어본 적은 없지만 영 이해하기가 어렵지는 않은 변경 억양을 구사한다.
조 수사관은 소래가 내민 손을 덥썩 잡아 악수한다.
>반가워요. 그런데 왜 불려오신 건가요?
조 수사관의 질문에 하 반장이 나선다.
>방금 그 실종자 말여. 찾으러 내려가야 할 것 같아.
구포와 두 형사는 일제히 하 반장을 돌아본다.
>지금 위성에 말인가요?
>곧 겨울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하 반장 대신 소래가 대답한다.
>위성이 행성 그림자로 들어갈 때까지 아직 구백 분 정도가 남았다. 위성까지 가는 시간을 빼면 사백 분 가량이 남지. 개척지를 한 바퀴 순찰하는 시간 정도는 된다.
>그러니까 절 부른 이유가 그 외계인들 찾으려고 위성에 다시 내려가라 하는 건가요?
>가기 싫으면 말아도 된다고 했다. 네 도움이라도 필요할 것 같아서 부른 거다. 네가 없어도 상관 없고.
나이 든 형사가 끼어든다.
>위성의 겨울이 지구 시간으로 여섯 달이라고 하셨소?
감독관이 설명한다.
>다갈 3호 행성은 지구 시간으로 육 년간 쌍성 사이를 지납니다. 그 동안은 삼호 행성의 위성에서도 해가 지지 않습니다. 주기적으로 쌍성과 행성 궤도가 갈라지면서 행성에 밤이 생깁니다. 계절상 겨울이죠. 위성에서의 겨울이란 개척지 위성이 삼호 행성의 겨울 동안 행성 그림자에 가려서 완전한 어둠 속을 지나게 되는 겁니다. 그 기간이 지구 시간으로 육 개월이고, 아주 위험합니다.
소래가 덧붙인다.
>겨울 동안 위성에 거주할 수 없으니 궤도 시설로 대피하는 건데, 한 부부가 안 왔소. 무인 시스템과는 통신 두절이고. 대체 월동 대피하는데 사람이 둘이나 없어도 알아차리지 못 하다니?
>그 양반들이 워낙에 사람을 꺼리니까 그런 거죠. 평소에도 있는지 없는지 유령처럼 숨어 다니는구만.
>누가 누구를 꺼린다고? 구포, 생각을 하고 말해라.
나이 든 형사는 조 수사관을 본다.
>조 수사관.
>네.
>반 년 동안 여기서 죽치고 있을 거 아니면 지금 이 분들 따라 내려가는 게 좋을 것 같네.
>내려가서 조사를 하란 말씀인가요? 어차피 실종자 둘만 빼고 개척민들은 다 궤도에 있잖아요.
>암호문은 위성 쪽에서 외우주로 전송된 건데, 위성 관제 시스템과 통신도 두절되고, 실종자가 있다니 아무래도 미심쩍어서 그러니까 따라가서 뭐 잘못된 거 없는지, 뭐, 정식으로 조사하고 그럴 필요는 없고 그냥 눈으로만 확인하고 오게.
>부장님은요?
>난 여기서 다른 개척민들을 조사하겠네.
>그러실 줄 알았어요.

 

#4
부장과 감독관은 어색한 공기를 발산하며 궤도 시설 안쪽으로 사라져간다. 하 반장이 착륙선 입구를 개방하고 타라는 손짓을 한다. 내부는 넓은 원통형으로, 벽면을 따라 좌석이 배치되어 있고 중앙부엔 화물칸, 그 위에 조종석과 관측창이 위치했다.
>제가 위성 개척지에 내려가는 목적은 미상 신호가 발신된 근원을 찾는 거에요. 실종된 부부가 이 일과 관련이 있는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아요. 그걸 알아내러 가는 거고요. 실종자들이 위성에 남아있는 건 확실한가요?
조 수사관은 좌석 벨트를 착용하며 묻는다. 구포가 하 반장의 눈치를 보며 대답한다.
>달리 어딜 가겠어요? 우주선도 없고, 저 아래서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은 개척지밖에 없거든요. 바위 아니면 얼음 뿐이니까요. 얼음 위를 함부로 돌아다니다간 토착 생물에게 죽을 수도 있고 뭐.
>토착 생물이 있나요?
>좀 이상하긴 한데 뭐가 있긴 있죠. 우린 허깨비라고 불러요. 왜 허깨비라고 하는지는 보시면 알아요.
하 반장이 좌석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은 채 말을 보탠다.
>위험하니까 굳이 찾아볼 필요는 없어. 소래, 출발하지.
소래는 계기반을 내려다보며 버튼을 몇 개 누른다. 덜컹 하는 소리와 함께 착륙선이 흔들린다. 도크의 기계팔이 착륙선을 하역장 밖으로 밀어낸다. 궤도 시설의 중력장을 벗어난 착륙선은 소래가 진행 방향을 정렬한 후 좌표 설정을 마칠 때까지 진공을 떠다닌다.
>이제 갑니다. 가속하는 동안은 계속 흔들릴 거요.
조 수사관은 가속이 시작되기 전 잽싸게 좌석 벨트를 풀고 일어나 부조종석으로 자리를 옮긴다.
>바깥 구경을 좀 하고 싶어서요.
>별로 볼 것도 없소이다. 여긴 삼호 행성 궤도고, 보시다시피 다 행성 그늘이오. 위성은 점점 멀어지고 있으니 충분히 접근하기 전까진 눈에 안 보일 거요.
거대한 가스 행성의 어두운 반구가 관측창의 대부분을 가린다. 다갈의 주 항성이 살짝 고개를 내밀어 지평선에 반사광을 남긴다. 작은 쪽 항성은 3호 행성 그림자에 가려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구포가 뒷좌석에서 질문한다.
>그 사이비라는 놈들이 진짜 여기 올까요? 뭐하러요?
>이유가 없진 않죠. 다갈 항성계는 해경의 눈을 피하기 좋고, 유일한 개척지는 인구가 적은 광산 위성이라 점령하는 데 드는 노력에 비해 가치가 높아요. 외부 세력의 입장에서 봤을 때 말이에요.
>듣던 중 기분나쁜 소리군. 우리가 무장한 사이비 교단이 노리기 좋은 먹잇감이란 것처럼 들리지 않소.
>아주 아니라고는 할 수 없어서 문제죠. 실제로 비슷한 조건의 개척지들이 공격받기도 했으니까요. 그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까 외계로 향하는 통신을 감지했을 때 윗선에서 민감하게 반응한 거기도 하고요.
>해경 양반들, 순찰이라도 하는 것도 아니면서 감청은 하고 있다?
>감청 아니에요. 외계 공역에 뿌린 첩보 위성이 잡아낸 거죠.
구포의 참견.
>처음부터 수상하긴 했어요. 외계인이 이런 데 와서 뭘 하는 건지? 정착해서 잘 살아보겠다고 했다는데 우주 떠돌이 말을 누가 믿나요.
소래는 한숨을 내쉰다.
>구포, 괜한 소리 말라고 했다.
>아니, 지금 와서도 이게 괜한 소립니까? 월동 대피에서 자기들만 쏙 빠져나가고, 외우주로 뭔지도 모를 통신을 보냈다는데요? 어느 모로 봐도 첩자잖아요, 첩자.
>왜 확신하고 말하지? 그걸 알아보러 가는 거잖나.
>뻔한 얘기잖아요. 사실상 잡아들이러 간다고 해야 맞지 않을까요?
하 반장이 헛기침한다.
>구포 너는 늘 주둥아리가 멋대로 놀아서 문제여.
조 수사관이 조심스레 묻는다.
>여러분 계속 외계인이라고 하시는데, 혹시 귀에 기계 단 사람들 얘기인가요?
>오, 아시는군요. 얼마나 못 믿을 족속인지 아시죠, 형사 님도.
>아, 그게.
>저 치 말은 듣지 마시오. 요상한 편견이 있어서 외지인을 싫어한다니까.
>편견이라뇨. 아버지가 늘 하시던 말씀인데. 외계인 놈들 배 탔다가 다시는 못 돌아온 친구가 한둘이 아니라고.
>그래, 말을 말자.
조 수사관은 구포가 더 떠들기 전에 하 반장에게 질문한다.
>그보다 외우주인들은 우주선을 집으로 삼는 사람들인데, 어쩌다 여기 정착하게 됐나요?
>감독님에게 빚이 있다던가.
>채무불이행?
>자세한 건 몰라. 어느 날 들어와서 살게 됐으니까 그러려니 하는 거여.
>얼버무리는 게 수상하네요. 인신매매 가담자는 적발시 최소 무기형인 거 아시죠?
>거 큰일날 소릴. 개척지의 일원으로 잘 받아들여서 집도 주고 일도 같이 하는데 어딜 봐서.
소래가 코웃음친다.
>하.
조 수사관도 외우주인을 몇 차례 마주친 적 있다. 거의 모두가 어릴 때 귀를 통째로 들어내고 생체 기계를 이식해서 출신을 알아보기가 아주 쉽다. 그런 수술을 하는 이유는 무중력 환경에서의 생활을 용이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알려져 있다. 인공중력 기술이 보급되기 전 아주 옛날부터 이어지는 전통이라나.
그들은 상인이자 선장이며, 방랑자이거나 탐험가이며, 도둑 내지는 사기꾼이기도 하다. 지구 권역 행정부는 공식적으로 귀 없는 이들을 차별하지 않지만 구포처럼 생각하는 사람은 아주 많다. 다른 우주에서는 어떤 대접을 받을지 모르는 일이다. 
은하계 사이의 공역을 떠도는 외우주인의 함대가 있다고도 전해진다. 함대의 규모는 떠돌이 행성으로 오인받을 정도로 거대하다고. 우주에서 살기 위해 육신의 많은 부분을 기계나 인공장기로 대체한 사람들이 모여서 공동체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여전히 인공중력을 거부하고, 혜성을 포획하여 경제를 유지하고, 어떤 간섭도 받지 않은 채.
모두 소문으로 들은 얘기다. 인간이 외우주 어디까지 진출했는지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지구 권역은 되려 상당히 고립된 편이다.

 

#5
선체는 덜컹대고, 바람 소리는 흉흉하다. 하 반장은 조 수사관에게 압축 포장된 밀폐형 방한 수트 팩을 건네준 후 자신도 반구형 헬멧을 뒤집어쓴다. 조 수사관은 방한복 팩을 뜯지만 선체가 계속 흔들려서 착용하기가 쉽지 않다. 그 와중에도 구포와 하 반장은 잘만 걸어다닌다.
>문 열 거니까 벨트 조이고 뭐라도 꽉 붙잡고 있어.
하 반장은 조 수사관의 방한복 매무새를 고쳐주고는 돌아서서 구포를 본다. 구포는 출입문의 손잡이를 잡고 섰는데 표정이 영 탐탁치 않다. 방한복 헬멧을 썼더니 자동으로 통신이 연결되어 구포의 목소리가 들린다.
>왜 내가 나가야 하죠......
하 반장은 구포의 어깨를 두드리고는 등을 떠민다.
>니가 조종할래?
>아뇨?!
>나도 동감이여. 그럼 내가 나가 작업하리?
>그건 생각해볼 만한 대안 같네요.
그 대답에 하 반장과 구포는 각자 팔을 꼬고 서서는 바닥만 내려다본다. 그러고 있자니 소래가 조종석에서 욕지거리를 쏟아낸다.
>내가 나갈 테니까 둘 다 집어 치쇼.
하 반장은 기다렸다는 듯 받아친다.
>그럼 내가 운전하면 되겠구만. 구포가 지휘하고.
구포는 하 반장이 조종대를 잡는다는 소리에 펄쩍 뛴다.
>내가 나가요! 나간다고요.
>그래도 다같이 죽긴 싫은 모양이지?
>반장님이야말로 나만 죽는 건 상관없다는 거겠죠.
구포가 방한복 고리에 구명 로프를 연결하고 출입문 잠금을 해제하자 붉은색 비상등이 들어온다. 괜시리 비장한 표정으로 선내를 둘러보다가 조 수사관과 시선이 마주치자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보인다. 하지만 조 수사관에겐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한참 구식인 방한복의 착용감이 익숙치 않아 다리가 붕붕 떠서 옆으로 넘어갈 것 같다.
>열게요.
구포가 손잡이를 잡아당겨 출입문을 열자 새하얀 빛과 얼음 가루가 쏟아져 들어온다. 바람이 들이치며 착륙선이 크게 흔들리지만 구포와 하 반장은 익숙한 듯 균형을 잡고 버틴다. 문 밖은 얼음벽인데 매끄러운 절벽이 끝도 없이 펼쳐져서 거리 가늠이 안 된다.
>구포, 발밑에 환기통이 보일 거다. 좀 더 접근할테니 실수하지 말고.
돌풍에 맞서느라 선체가 덜덜 떨린다. 소래는 착륙선을 아주 천천히 하강시켜 얼음 절벽에 뚫린 환기구 높이에 맞춘다. 성인이 웅크리면 간신히 지날 법한 크기의 사각형 구멍인데, 입구엔 촘촘한 거름망을 씌워 놓았다.
>이럴 줄 알았지.
하 반장은 화물칸에서 소총처럼 보이는 장비를 꺼내 구포에게 던져준다. 구포는 무릎을 꿇고 앉아서 장비를 점검한다.
>그건 뭐죠?
>수압총이오. 여기선 장비로도 쓰고 무기로도 쓰지.
>무기요?
>토착 생물이 있으니까.
>습격이라도 받나요?
>꼭 그렇지는 않지만. 자세한 건 나중에 물어보시오.
구포는 수압총을 환기통의 거름망 가장자리를 따라 겨누고는 발사한다. 눈에 잘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가느다란 초고압 물줄기가 뿜어져 나간다. 깔끔하게 잘린 철제 거름망은 툭 떨어져나와 절벽 밑으로 사라진다. 구포의 뒷걸음질, 도움닫기 후 도약, 그리고 요란한 착지.
>들어왔어요. 관제실 도착하면 연락할게요.
>잘 했어. 경사가 좀 있으니까 조심해. 소래, 우리도 움직이지.
하 반장은 출입문을 밀어 닫고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아 벨트를 조인다. 웅웅대는 추진기 소리가 커지고 선체의 진동은 잦아든다. 관측창이 갑자기 어두워졌는데, 벌써 밤이 왔을까?
>왜 주변이 어둡죠?
>동굴에 들어왔소. 안전관계상 착륙장을 눈이나 비바람이 닿지 않는 곳에 지었으니까.
>벌써 밤이 된 걸까 했네요.
>그랬으면 이미 추락했을 거여.
>아무리 춥다 해도 착륙선이 추락할 정도인가요?
>그냥 추운 게 아니여. 밤이 되면 액체 질소 비가 내려.
>해 지기 전에 이륙 못 하면 겨우내 갇히니까 서둘러야 하오. 

 

#6
통신 채널은 구포의 환기통 탐험 생중계로 시끄럽다가, 어느 순간 조용해진다. 몇 분간 침묵이 이어지자 하 반장이 구포를 연달아 불러본다. 하지만 대답이 없다. 소래는 얼음절벽 속으로 충분히 깊게 들어가면 전파가 닿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하지만, 그렇다 해도 잡음조차 들리지 않는 게 의아하긴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시간은 관제실에 도착하고도 남았을 시간인데 말이여.
소래는 조종석에서 일어나 관측창으로 사방을 살피며 대답한다.
>그냥 통신불량이 아니라 아예 응답이 없는 것도 뭔가 걸립니다. 관제 시스템이 먹통인 것과 관계가 있을지?
>사고라도 생겨서 기절했거나, 아니면 누가 해코지 했거나.
>무슨 뜻입니까?
소래의 말투에 알듯말듯한 신경질이 섞인다.
>그니까, 만에 하나 말이여. 그치들은 외지인이고 항상 다른 개척민과 따로 놀았지. 이번엔 안전 수칙까지 제대로 어겼어. 징계감인 걸 모르는 것도 아니고. 무슨 꿍꿍인지 어찌 아나?
>넘겨짚지 마십시오. 늘 사람들이 먼저 따돌린 게 아닙니까? 이번에도 월동 대피를 하기 싫어서 안 한 건지, 못 한 건지 어떻게 압니까?
>소래 자네야말로 너무 싸고 돌지. 사람들이 외지인을 무서워하는 덴 다 이유가 있다고.
>이유가 아니라 편견일 겁니다. 그 사람들이 일부러 월동 대피도 안 하고 구포를 해칠 동기라도 있습니까?
>경찰 양반 말 못 들었나? 여기서 외계로 뭘 암호를 보냈다잖여. 그게 꿍꿍이가 아니면 뭔데.
결국 조 수사관이 끼어든다.
>저기, 외우주로 암호화된 통신이 전파된 시점은 한참 전이니까 꼭 누가 범인이라고 한정짓기는 어렵지 않을까 하네요. 필시 월동 대피가 시작되기 전일 테니까요.
하 반장의 헛기침.
>한참 전 일이면 한참동안 안 찾아오고 뭘 했어?
조 수사관은 머쓱한 표정으로 무마하려 든다.
>관료 조직의 의사결정이라는 게 원래 그렇죠.
>어쨌든 마냥 구포만 기다릴 수는 없고 뭐라도 해야지.
>동감입니다. 하지만 상황 파악도 안 됐는데 뭘 합니까?
>가만 앉아있으면 상황이 파악되나. 힘으로라도 열어야지.
>제가 아무리 힘이 세도 저 문은 못 엽니다.
>착륙선으론 될 거란 말이여.
소래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러다 엔진이나 선체 상하면 뭘 타고 복귀하려고 그러십니까?
>아니, 그냥 가서 들이받자는 게 아니라, 견인줄로다가 당겨서 사람 지날 정도로만 열면 되잖여.
>들이받자는 생각은 한 적도 없습니다. 착륙선 한 대로 저 문이 움직일 것 같습니까?
>움직일 거에요, 아마도.
소래와 하 반장은 조 수사관을 돌아보지만 조 수사관이 아니라 구포 목소리다. 조 수사관은 어깨를 으쓱한다.
>구포여?
>뭐 하다 이제 나타났나.
>지금 안쪽에 전력이 완전히 끊겼어요. 중계기가 죽어서 통신이 안 됐어요. 문 가까이 오니까 닿나 보네요. 문도 그냥은 못 열겠지만 안에서 잠금만 풀면 착륙선으로 당길 수 있을 거에요.
소래는 조종석에 털썩 앉으면서 돌아본다.
>될 것 같습니까, 반장님?
>해봐야지. 뭐하면 사람 힘으로도 밀 수 있는 문 아니여. 손잡이 달아둔 걸 보면.
>그건 안전봉 아닙니까.

 

#7
얼음 절벽 속을 파서 만든 착륙장. 구포 말마따나 조명도 전혀 없이 어둡다. 조 수사관은 월동 대피로 시설이 비었으니 불은 당연히 꺼놓는 게 아닌가 했지만 개척민들 생각은 그게 아닌 모양이다. 조명은 끌 때 끄더라도 시설 전체의 전력이 완전히 죽은 게 이상하다는 것. 
>관제 시스템이 먹통인 이유도 전력이 죽어서 그랬고 말이지.
>그런데 왜일까요?
소래는 착륙선 화물칸에서 방한복에 부착할 수 있는 조명등을 꺼내 일행에게 하나씩 배분한다. 조 수사관이 궁금한 점을 묻는다.
>원래는 겨울 동안에도 전기가 들어와 있나요?
>발전기는 멈추지만 비축 전력이 있어서 관제실이나 창고 전력 정도만 유지하오. 전지에 충전해 놓고 대피 전에도 거듭 점검했는데.
>고장이나 다른 이유로 방전된 적은요?
>없소.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 한은.
구포가 흐음 하면서 의견을 내놓는다.
>누군가 일부러 고장을 냈다던가요?
>누가 그걸 고장을 내?
>누구겠어요, 뻔하죠. 만약 진짜 외부세력을 불러들일 생각이었으면 관제 시스템을 마비시켜놓는 건 당연하겠죠.
>딜라리움은 다 실어갔고 사람도 한 명 없는데 여기에 누구를 뭐하러 불러들여?
소래의 일축.
>우선 관제실부터 가보자고.
하 반장이 앞서 나가자 일행도 더는 말하지 않고 따라간다. 조 수사관은 여기저기 조명을 비춰보지만 착륙장이 워낙 넓어서 빛이 벽에 닿지 않는다. 게다가 텅 비어서 주위를 분간할 만한 표지물도 없다. 개척민들은 방향을 잘 기억하고 나아가는 건지.
방한 수트는 서너 세대는 묵었을 법한 구식 모델이지만 재료나 만듦새는 훌륭한 편이다. 밀폐형 방한복의 장화는 어떤 재질인지 발소리도 거의 나지 않는다. 어둡고 적막한 착륙장에 소리가 묻히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개척민들은 조 수사관처럼 두리번거리거나 헤매지 않고 똑바로 나아간다. 
>저 앞에 있구만.
한참을 묵묵히 걷던 하 반장이 조 수사관더러 들으라는 듯 조명 각도를 올려 멀리 비춘다. 이제야 맞은편 얼음벽이 보이고, 벽면에는 각자 표지판이 달린 사람용 크기의 문이 여러 개 나 있다. 표지판의 문자는 조 수사관도 익히 아는 지구 권역 표준 문자다. 관제실을 알리는 표지판에 눈에 띈다.
일행은 금속제 튜브 통로를 지나 관제실에 진입하지만 여기도 마찬가지로 어둡다. 관제실 곳곳에 조명을 비춰보는데, 일단 겉보기엔 멀쩡하다. 소래는 구석의 캐비닛에서 비상용 형광봉을 꺼낸다. 방한복의 조명을 꺼도 될 정도로는 밝다.
>누가 건드리거나 한 것 같지 않네요?
구포의 의외라는 듯한 감상에 소래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일부러 관제 시스템을 꺼놓지는 않았나보군. 그렇다면 문제는 왜 예비 전력이 끊어졌나 하는 것이고.
>결국 전력실까지 가야 하는 걸까요......
하 반장은 팔짱을 끼고 인상을 쓴 채 잠시 생각을 정리하더니 지시한다.
>소래가 여기 남어. 컴퓨터는 죽었지만 만에 하나 일 터지면 착륙선이 빨리 떠야 하니까 통신 대기하고.
>반장님과 구포에게 맡겨두라는 겁니까? 실종자들이 어떻게 나올 줄 알고?
>무슨 일 있겠어?
>그럼 만에 하나는 왜 따지십니까. 구포가 대기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저야 상관없어요. 안 걸어도 되고. 그러고보니 형사 님도 같이 가시나요?
>가야죠. 임무니까.
하 반장은 석연찮은 듯 끙 하고 한숨을 쉬더니 마음대로 하라며 허락한다. 소래는 구석 캐비닛에서 형광봉을 몇 개 더 꺼내 던져주고는 일행이 들어온 쪽의 반대편 문을 열고 나간다. 따라나가자 어둡고 좁은 복도가 나온다. 어디서 덜컹대는 소리가 들리길래 형광봉을 비추니 소래가 작은 창고 같은 방에서 수압총 두 정을 들고 나온다.
>두 자루밖에 못 찾았는데 구포는 하나 들고 있으니 나와 반장님이 하나씩 쓰겠소. 수사관 양반은 호신용 무기가 있겠지?
>그럼요. 무기가 필요없다면 제일 좋겠지만요.
>사람만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소. 얼음 조각이 되고 싶진 않을 거 아니오.
영문 모를 소리를 한 소래는 하 반장에게 수압총을 건네주고 복도를 따라 가버린다. 하 반장도 조 수사관에게 고갯짓으로 따라오라는 시늉을 한 후 소래 뒤를 따른다.

 

#8
복도 벽엔 온통 금속성 필름을 씌워 놓았다. 천장과 바닥 타일도 세라믹이나 플라스틱이 아니라 금속제다. 금속 자원이 풍부한 광산 위성이라는 걸 티내려고? 하지만 딜라리움 채굴은 부산물을 거의 생산하지 않는다. 
소래가 간략하게 설명한 계획은 우선 주거 구역을 점검하여 수상한 점이 없는지 확인하고 케이블카를 이용해 작업 구역으로 건너간다는 것이다. 전력실이 작업 구역에 있기 때문에 먼 거리지만 직접 통과해야 한다고. 케이블카는 전력이 없어도 작동할 수 있나 물었더니, 수동차가 있다고 대답하지 뭔가. 시간이 충분할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복도 끝에 다다르자 다른 복도들이 한데 모이는 나지막한 홀이 나온다. 관제실 말고 다른 구역에서도 모두 이 홀로 연결되는 듯하다. 한쪽 벽엔 좌우로 열리는 커다란 철문이 버티고 섰다. 소래는 문가의 조작반을 열고 압력 밸브를 돌려서 수동 조작 상태로 만든다.
>좀 거들어주시오. 
세 사람은 모두 오른쪽 문에 들러붙어 안간힘을 다해 민다. 집채만한 강철 덩어리가 조금씩 움직인다. 정비가 잘 되었는지 걸리는 곳도 없다. 한 사람이 통과할 만큼의 틈이 생기면 충분하다. 
철문 밖으로 나오니 또 광활하고 어두운 공간이 펼쳐진다. 착륙장과 다른 점이라면, 여긴 바닥도 안 보인다는 점이다. 철문 앞의 아주 비좁은 발코니 너머는 온통 허공이다. 절벽 가장자리엔 원통형 수직 통로가 보인다. 승강기인 듯하나 역시 전원이 꺼져 있다.
>여기, 자연 동굴인가요? 얼음절벽 안에 이런 공간이.
>그렇소. 이주 당시 지질학 조사 중에 외부로부터 잘 차단된 공동을 발견해서 거주지를 세웠다는군. 얼음 속에서 토착 생물이 튀어나오는 경우만 아니라면 추위와 열기로부터 안전한 환경이니까. 이 계단을 걸어서 내려가야 하오.
소래가 가리킨 방향에 절벽을 따라 내려가는 가파른 계단 길이 보인다. 얼음벽을 파내고 직접 계단을 새기고 미끄럼 방지용으로 고무 발판을 깔았다.
>그 토착 생물 본 적도 없지만 인상이 점점 안 좋아지네요. 접촉하면 어떻게 되나요?
하 반장은 어둠 속을 응시하며 덧붙인다.
>말 그대로 얼어죽지. 얼음벽 속을 맘대로 드나들어. 원래는 전력장으로 둘러쳐 놓는데 전력이 나갔으니 역장도 사라졌을 거여. 
>얼음을 통과한다고요?
>그런 습성 때문에 허깨비라는 거요. 귀신처럼 아무데서나 튀어나오니까. 금속이나 전력장은 통과 못 하는데 지금은 절벽을 따라 내려가야 하니 완전히 노출된 상황이지. 해도 잘 살피면서 자극하지만 않으면 괜찮을 거요. 혹시 휴대한 무기가 화약이나 레이저를 사용하오?
>안 그런 무기도 있나요.
소래는 수압총을 툭툭 건드려 보이며 답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허깨비를 대상으로 화기를 사용하면 안 되오. 열에 극도로 민감해서 다 죽는 수가 있소.
빛이라고는 방한복의 조명등 뿐이라 공동이 얼마나 깊은지 알기 어렵다. 형광봉도 사용할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다. 사람이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니까 계단도 만들어놨으려니 할 뿐이다. 경사가 들쑥날쑥해서 집중하지 않으면 고꾸라질 위험이 크다.
>사는 곳이 이렇게 깊이 있으면 일할 때 불편하진 않나요?
조 수사관은 참지 못하고 질문하지만 두 개척민은 어깨를 으쓱할 뿐이다. 한참을 침묵 속에 걸어가다가 소래가 돌연 멈춰선다.
>저길 보시오. 허깨비요.
소래가 방한복의 조명등으로 한참 위를 비춘다. 거기에 토착생물이 있다. 어디서부터가 생물이고 어디서부터가 그냥 얼음인지 파악하기 어렵다. 반투명한 사람 머리통 크기의 결정 덩어리가 허공에 돌출되어, 가느다란 결정 기둥으로 얼음벽에 연결되어 있다. 모르고 본다면 위성 특유의 지질학적 구조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신기하게도 생겼네요. 위장하고 있는 건가요?
>그냥 저렇게 생긴 거요. 이주 당시 학자들이 남긴 기록을 보면 성분은 사실상 물이나 다를 바 없다고 하더군. 어떤 지능을 지녔는지 언제 탄생했는지 모르오. 얼음 절벽 속을 유영하다가 가끔 저렇게 밖으로 삐져나오기도 하고, 서로 흡수하기도 하더군.
>얼음 속을 물처럼 헤엄친다는 뜻인가요?
>바로 그거요. 물에서만 다니면 모르겠는데, 온통 얼음밖에 없는 세계에서 벽 속을 헤엄치다가 불쑥 튀어나오니까 놀라서 대응을 잘못 하면 사람이 죽을 수도 있고.
>아주 넓은 공간을 차단해야겠군요. 천장 같은 데서 떨어져내릴 수도 있으니까요.
>머리 위를 주의해서 다니면 좋지.
허깨비를 지나 또 한참을 걸은 끝에 마침내 평지에 내려선다. 소래와 하 반장은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어둠 속에서 방향을 잡아 나아간다. 조 수사관은 혹시 바닥에서 솟아난 허깨비는 없을까 싶어 조명등을 휘둘러댄다.
>밑은 대부분 암반이니까 괜찮소.
잘 보니 바닥은 얼음에 덮여있을 뿐 대부분 바위다. 벽면도 어느 높이를 기준으로 암석층이 주가 된다. 다행히 계단이 끝나는 지점에서 거주 구역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는다. 어둠 속에서 처음으로 돔 형태의 주거 모듈을 포착한 일행은 멈춰서서 주변을 살핀다.
>완전 유령 마을이구만. 여기 어디 숨어든 거 아녀?
>실종자들이 집 안에 있을 수도 있으니 한번 둘러는 봅시다.
소래의 제안에 조 수사관은 난처한 목소리로 반문한다.
>그럴 수 있을까요?
조 수사관의 목소리를 따라 시선을 돌린 소래와 하 반장도 표정이 굳는다. 조명이 닿는 곳마다 온통 허깨비 뿐이다. 거주 구역 전체에 허깨비의 비가 내린 것처럼 토착 생물로 뒤덮여 있다. 다양한 크기의 결정 덩어리들이 주거 모듈 꼭대기에서 흘러내리거나, 바닥에서 버섯처럼 돋아나거나, 혹은 몸을 길게 늘여서 서로 얽혀 있다.
>이게 대체 뭐여.
>전력장이 꺼졌다고 이렇게까지?
>그 망할 놈들 이것까지 합쳐서 책임을 물어야 돼. 집이고 뭐고 겨우내 얼어붙고 나면 어떤 꼴일지 누가 아나.
>다 어디서 온 거죠?
조 수사관에게 대답하기 위해 시선을 돌리던 소래는 갑작스레 수압총을 겨눈다. 조 수사관은 회피 자세를 취하지만 소래가 겨눈 곳은 조 수사관의 머리 위다. 물줄기가 발사되어 낙하 중이던 허깨비에 적중한다. 허깨비는 초고압 물줄기를 그대로 흡수하는 듯 순식간에 몸집이 불어나지만 밀어내는 힘까지 이겨내지는 못한다. 수압에 밀린 토착생물은 저만치 뒤에 철퍽 떨어지더니 곧바로 얼음 바닥 속으로 사라져버린다.
>천장에서 떨어지는 모양이오. 서두르지.


#9
허겁지겁 주거 구역을 벗어나자 공동 안에서 또 벼랑이 나왔는데, 케이블카 승강장이 끄트머리에 설치되어 있다. 지지대에 고정된 강철 케이블이 허공 속으로 뻗어나간다. 원래는 전기로 움직이겠지만 당연히 지금은 멈춘 상태고 월동 대비 때문인지 전동차들도 전부 수납한 듯 보이지 않는다.
소래와 하 반장은 승강장 한구석에서 놀랍게도 페달이 한 쌍 부착된 수동차를 끌어낸다. 조 수사관은 어떻게든 핑계를 대며 빠져나가려 했으나 어림없다. 일행은 번갈아 제비를 뽑고, 안타깝게도 조 수사관이 첫 순번이다.
기름칠도 제대로 안 해서 페달은 삐걱대고 수동차는 균형을 못 잡은 채 사정없이 흔들린다. 하 반장은 요령이 없다며 타박하지만 자리를 일찍 바꿔줄 생각은 없어 보인다. 마침내 휴대용 컴퓨터에 맞춰둔 알람이 울리자 조 수사관은 더는 못 하겠다며 페달에서 발을 떼버린다. 하 반장은 혀를 끌끌 차며 몸을 일으키는데 또 수동차가 기우뚱한다. 이런 와중에 토착생물이 떨어지기라도 하면 볼만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보다 거주 구역도 충분히 깊다고 생각했는데, 그 밑에 이런 구덩이가 또 있네요. 혹시 이 위성은 속이 비었나요?
>실없는 소리여. 헌데 조심은 혀. 여기서부턴 바닥이 없어.
>바닥이 없다뇨.
조 수사관은 수동차 밑 어둠을 내려다보지만 뭐가 보일 리 없다. 프레임에 달아둔 램프는 세 사람 얼굴을 겨우 비출 뿐이다. 조 수사관은 뻐근한 다리를 주무른다.
>대신 바다가 있지.
소래의 답변.
>바다? 이 밑은 물인가요?
>그렇소. 얼음으로 된 지각 밑에 액체 상태의 바다가 존재하는 거야 흔한 일 아니오.
>바닷속에 뭐가 있는지는 또 다른 얘기지만 말여.
>뭐가 있나요?
>있긴 있지만 있어야 뭐가 있겠어. 또 허깨비만 한가득이여, 물 속에도.
>바다 전체가 허깨비의 서식지요. 허깨비라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군. 방금 전에 본 것과는 급이 다르오. 작게는 소행성만하고 크게는 은하왕복선만한 살아있는 빙산들이 바닷속을 멋대로 돌아다니지.
>실제로 본 적은 있나요? 누가 자세히 연구한 사람은? 
>그렇게 큰 걸 실제로 본 적은 없소. 기록 영상은 있지만 딱히 연구 자료라 할만한 건 아니고.
>누가 할 일이 없어서 이런 데까지 와서 연구를 해.
>학자들은 성과를 내려고 무리한 일도 벌이잖아요.
>어쨌든 지금도 레이더를 이용하면 밑에 있는 걸 알 수는 있지. 다행히 그렇게 큰 것들은 수면 위로 타고 올라오지는 못하오. 암반에 몸이 걸려서 찢어지니까.
>그렇다면 고통을 느끼는 걸까요.
>그건 아닐 거요. 작은 것들도 보면 산산조각 나서 흩어졌다가 또 합쳐지기도 하고. 
>작을수록 더 위험할 것 같네요. 똑같이 사람한테 해를 끼칠 수 있다면요.
>주먹만한 것까진 방한복으로 살긴 혀.
하 반장은 쉬지 않고 페달을 밟는데도 숨찬 기색이 없다. 많이 해본 일이라 요령이 좋은 걸까. 그런데 갑자기 채널에 잡음 섞인 목소리가 울린다.
>아, 들리나요?
조 수사관은 순간적으로 어디서 온 통신인지 몰라 당황했으나 곧 구포의 목소리를 기억해낸다.
>구포냐, 무슨 일이지.
>궤도 시설에서 전보가 왔어요. 위성에 신원미상 우주선이 접근중이라네요.
>궤도에서? 관제실에서 궤도와 연락이 되나.
>지금 착륙선이에요. 관제실엔 어차피 전기도 안 들어오잖아요.
>신원미상 우주선? 어디서 왔는지는 알 수 있나요?
>그게, 삼호 행성 궤도에 진입하기 전까지의 경로를 역추적해보면 외우주 방향에서 접근한 걸로 보인다는군요.
하 반장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내뱉는다.
>역시. 구포, 착륙선에 시동 걸어놓고 이륙 대기해.
소래는 하 반장에게 자리를 바꾸자는 손짓을 한다.


#10
머리 위 케이블은 얼음벽에 뚫린 구멍으로 이어진다. 자연 동굴이 아니라 장비를 동원해서 뚫어놓은 통로가 분명해 보인다. 마침내 통로 끝에 도착하자 주거 구역과는 분위기가 딴판이다. 각지게 깎아낸 홀과 통로 사이는 온갖 잡동사니와 장비가 방치되어 있어 혼잡스럽다. 그 한가운데 돔 형태의 구조물이 눈에 띈다.
>여기도 주거 모듈이 있네요? 숙직실 같은 건가요?
>거긴 말이여......
>실종된 부부가 살던 집이오.
소래가 하 반장의 말을 가로챈다.
>실종자들이요? 왜 주거 구역이 아니라 이런 곳에 집이 있죠.
>원래는 주거 구역에서 함께 살았소. 감독과 사람들이 더럽다며 내쫓기 전까지는.
>더러워서가 아니라 위험해서여. 주거 구역 안에서 유독물질을 제조했어.
하 반장이 으르렁댄다. 소래도 지지 않는다.
>생체 기계에 필수적으로 들어가는 유액을 그렇게 부르십니까. 그이들이 몇 번이나 설명하지 않았습니까.
>유독물은 유독물이잖나. 내가 쫓아내자고 결정한 것도 아니고.
>반대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이방인이라는 이유로 시끄럽고 지저분한 작업 구역에서 살도록 내쫓기는데.
냉랭한 분위기. 아무도 입을 열지 않는 가운데 곧 어지간한 대형 우주선 크기의 설비가 등장한다. 수많은 실린더와 너비가 몇 미터는 되는 파이프가 얽혀 있다. 아직 가동 중이기라도 한 듯 배기구에서 증기가 새어나온다. 바로 그게 문제다.
>뭐여, 이게 왜 돌아가?
>작동 중이라면 소음이 더 클 겁니다.
하 반장은 설비 정면의 사출구를, 소래는 조작반을 살핀다.
>무슨 시설이죠?
>정제기요. 딜라리움 정제기. 월동 대피 전에 몇 번이고 점검했으니 시동을 껐던 건 확실합니다. 
>하지만 방금 전까지 돌아간 것 같고요.
>그렇다면 누군가 재가동을 했고, 지금은 꺼졌다는 겁니다. 필시 전력이 부족해서.
>전기가 이래서 다 나갔구만. 전력실 가볼 필요도 없군. 예비 전력으로 정제기를 돌려버렸잖아. 망할 놈들 갖가지 사고는 다 치고 다녔어.
>정제기를 왜 가동했을까요? 정제 딜라리움이 필요해서?
>딜라리움은 전부 궤도로 운송했소. 찌꺼기를 긁어모으면 분량이 어느 정도 나올지 모르지만.
>이거 헛돌거나 불순물 때문에 기계 상했으면 진짜 다 물릴 거여.
조 수사관은 휴대용 컴퓨터를 꺼내 간단한 메모를 작성하며 말한다.
>상황이 수상하게 맞물리니 주의해야 할 것 같아요. 이유 없이 정제기를 가동시킨 일로 일부러 예비 전력을 소모해서 관제 시스템을 마비시킨 거라고 해석될 수 있으니까요.
소래는 못마땅한 표정이지만 별다른 반론은 하지 않는다. 그 때 구포가 또 통신을 보낸다.
>지금 좀 비상인 것 같네요. 실종자들이 공용 채널로 통신하기 시작했어요.
>뭐여? 누구랑?
>상대가 누군지는 모르겠어요. 위성으로 접근하던 미확인 우주선일 것 같긴 한데요. 착륙선에선 공용 채널이 잡히는데 방한복에선 안 될 거에요. 제가 상황을 알려드리죠.
>지금 실종자들 어디 있는지도 알 수 있나?
>아마 표면인 것 같아요. 상대에게 착륙 장소를 알리겠다고 하네요.
하 반장과 소래는 서로를 쳐다보고는 달리기 시작한다. 조 수사관은 목적지도 모르고 따라서 뛴다.
>미확인 우주선이 착륙할 때까지 시간이 얼마나 남았나? 무장했는지 여부는?
>잠시만요. 그런 얘기는 안 했지만 뭔가 거래 얘기를 하네요. 물건으로 대금을 지불하겠다고.
>거래? 무슨 거래?
>첩자 놈들이 무슨 거래를 하겠어. 우릴 다 팔아넘긴 거여. 무장한 광신도들한테.
달리느라 자세히 살펴볼 시간은 없지만 격납고나 정비실이라고 쓰인 듯한 표지판이 스쳐지나간다. 일행이 달리는 방향 저 앞에 지상으로 향하는 승강기가 보인다. 장비와 생산물을 옮기기 위함인지 굉장히 크다.
승강기를 타는 호사를 누릴 수 없기에, 사다리와 계단으로 구성된 비상 통로가 대안이 된다. 조 수사관에겐 어이 없는 상황이지만 두 사람은 아랑곳 않는 듯하다. 사다리를 기어오르다가 주변을 둘러봤더니 승강기 통로 옆으로 광대한 공간이 펼쳐져 있다. 본격적인 채굴 장비 격납고로 보인다. 지하 통로에서 봤던 장비들과는 차원이 다른 거대 기계들이 주기되어 있다.
비상 통로를 한참 더 올랐더니 이번엔 기이한 광경이 눈에 들어온다. 채굴 장비 격납고 위에 또 광활한 공간이 있고, 고층 건물처럼 보이는 물체가 빽빽하게 들어섰다. 정전된 도시와도 같은 느낌인데 도시 치고는 건물 사이가 너무 좁다.
>저긴 뭐죠?
소래는 조 수사관이 뭘 묻는지도 확인 않고 대답한다.
>태양광 패널 격납고요.
>저게 다 태양광 발전기인가요? 패널을 접어서 세워놓은 거군요?
>여름이 지구 기준 육 년이니까. 딜라리움은 발전용으로 쓰기엔 너무 아깝지 않소.
다시 들려오는 구포의 목소리.
>미확인 우주선에서 실종자들을 육안으로 확인했다는 통신을 보냈어요.
하 반장이 욕지거리를 뱉는다.
>이런 제길.
>여기서부터 얼마나 더 걸리나요.
>얼마나 서두르느냐에 따라 다르겠지.


#11
하늘의 절반은 피와 같은 색으로 물들었다. 조 수사관이 본 적 있는 어떤 하늘보다도 붉고 진하다. 시선을 돌리자 나머지 절반은 다갈 3호 행성의 그늘이다. 밤이 가깝다. 한시라도 빨리 이륙하지 않으면 액체 질소 비가 내리는 얼음덩어리 위성에 갇히게 된다.
지상엔 정제 딜라리움 야적장과 화물선 이착륙장을 마련해 놓았다. 그렇다고 해도 그저 암반을 최대한 평평하게 깎아서 조성한 공터일 뿐이다. 가혹한 겨울 날씨 때문에 표면에 설비를 노출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소래 설명으로는 그렇다. 승강기 통로 역시 바위 틈 깊숙한 곳에 숨겨 놓고 차단문을 몇 겹이나 설치한 지경이다.
소래, 하 반장, 조 수사관은 저마다 적당한 크기의 바위 뒤에 숨어서 하역장을 주시한다. 거기 실종된 것으로 알려졌던 외우주인 부부가 있다. 일행이 입은 것과 동일한 방한복을 입었다. 그런데 그들만이 아니라 두세 사람은 충분히 들어갈 만큼 큰 원통형 용기도 보인다. 그리고 마침 미확인 우주선이 착륙하는 중이다. 하 반장은 언제든 무장한 광신도 집단이 몰려나올지 모른다며 수압총을 준비하지만 조 수사관은 조금 다른 낌새를 챈다.
>망원경 있나요?
>헬멧에 확대 기능이 있소.
정체불명 우주선은 길이 삼십 미터 가량의 중형선으로, 윤곽선은 물에 띄우는 배를 연상시킨다. 아무런 표식도 달려있지 않고 선체를 모두 쥐색 도장으로 칠했다. 군데군데 벗겨졌는데, 레이더에 탐지되지 않기 위한 위장용 도색임을 알 수 있다.
>생각했던 그런 게 아닌가봐요.
>뭐가 말이여?
>저런 우주선은 바리 교단에서 쓰는 타입이 아니에요. 한참 구세대 모델인 데다가 도장도 교단 양식이 아니고요.
>그럼 어디서 왔단겨?
>지금 누가 나오니까 잘 보세요.
해치가 열리고, 소총을 든 괴한들이 등장한다. 출처가 통일되지 않은 보호장구를 제멋대로 껴입고 있다. 예상 이하로 기온이 낮아서인지 우주선 밖으로 발을 내딛자마자 노출된 얼굴을 부여잡으며 안으로 달려들어간다. 외우주인 부부 측에선 한 사람이 양손을 들어올려 보이며 천천히 접근한다. 조 수사관은 휴대용 컴퓨터로 우주선 사진을 찍어서 저장된 데이터베이스에 조회해본다.
>보세요, 식별할 만한 표지는 지워놨지만 도난 신고가 된 우주선과 제원이 일치해요. 
>무슨 뜻이오. 사이비 놈들이 아니라는 건가.
>지금까지는 아닐 가능성이 높아요. 바리 교단은 숫제 군대를 움직이니까요. 다른 군소 범죄 집단 소속이겠죠. 우주선도 훔친 걸 테고.
>다른 범죄 집단이라니?
>외우주나 접경 지역엔 치안 공백을 노리는 범법자 집단이 많아요. 밀수, 밀렵, 밀입국 브로커, 밀 재배 등 밀로 시작하는 일이라면 뭐든 가리지를 않아요. 
>결국 댁들이 일을 제대로 안 해서 생긴 놈들이라는......
>우리도 인력이 부족해요. 그보다 여기선 그런 접촉이 한번도 없었나요?
>보시다시피 딱히 영양가 없는 동네라서 말이오.
방한 장구를 갖추고 다시 나온 괴한들은 외우주인 부부와 커다란 통에 접근한다. 부부 중 한 명은 통 근처에서 대기하고, 나머지 한 명이 대화를 시도하는 듯 손짓을 한다. 근거리 통신을 사용하는지 일행의 위치에선 말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지금 제일 가능성 높은 시나리오가 뭘까요?
>저 통에 든 게 정제 딜라리움이고, 저걸로 밀항 비용을 지불하겠다는 것으로 보이오.
>동의. 어딜 도망가려고.
>그런데 개척지에서 나갈 수단으로 왜 굳이 밀항을?
소래와 하 반장은 순간적으로 대답을 못 한다. 조 수사관은 더 묻지 않지만 그 사실을 염두에 둔다. 외우주인과 밀수꾼들은 거래를 본격적으로 진행하려는 듯 통으로 접근한다. 대기하던 외우주인 쪽이 손에서 뭔가를 조작하자 통이 열리며 내용물이 드러난다. 하 반장이 탄식한다.
>저건 허깨비 아녀.
통 안에는 다시 투명한 용기가 들어있고, 그 안에 거대한 허깨비가 보인다. 헌데 이 허깨비는 투명한 물색이 아니라 형형한 보라색으로 빛난다. 피 같은 노을 속에서도 또렷하다. 바로 딜라리움의 색이다.
>허깨비로 대체 무슨 짓을?
>사정은 모르겠지만 일단 막아봐야겠죠?
>동의.
소래는 반대한다.
>막아서 뭘 하겠단 거요.
>책임은 물어야죠. 개척지에 피해를 끼친 건 사실이고, 형사 입장에서 밀항 시도를 그냥 두고볼 수도 없잖아요.
>하지만 어떻게?
조 수사관은 구포에게 공용 통신 채널로 자기 목소리를 중계해달라고 요청한다. 구포는 즉시 조치를 취해 일방 통신을 가능케 해준다. 조 수사관은 최대한 목소리를 깔고 외친다.
>지구 권역 해경에서 알린다. 소속 불명 우주선의 지구 권역 개척지 내 미허가 착륙과 밀항 알선 현장을 포착하였다. 범인은 즉시 무장을 자진해제하고 조치를 기다리도록. 다시 알린다. 소속 불명 우주선과 그 선원들은 즉시 무장해제하고 해경의 조치를 기다리도록.
>뭣 하는겨?
>저놈들은 잡범이에요. 해경 상대로 어떻게 해보겠다는 생각은 안 할 거라고요. 해경이 아니라 누가 자기들을 봤다는 사실만 알아도 내뺄 거에요. 보세요.
조 수사관의 말대로 협상은 즉시 결렬된 듯하다. 괴한들은 허둥대며 우주선으로 퇴각하고 엔진이 달아오른다. 협상 중이던 외우주인은 잽싸게 달려가 우주선 해치를 부여잡고 매달린다. 안에서 누군가 외우주인에게 총을 겨눈다.
>엇.
총성이 울린 후 우주선에 매달렸던 외우주인은 힘없이 돌바닥으로 미끄러 떨어진다. 우주선은 지체 없이 이륙하여 사라지고, 대기하던 외우주인이 총을 맞은 이에게 달려간다.
>구포, 착륙선 몰고 우리 위치 추적해서 날아와. 당장.
소래는 구포를 호출하고는 외우주인 부부에게 달려간다.


#12
젊은 외우주인 청년이 반려자의 머리를 무릎에 뉘인 채 울부짖는다. 총격을 받은 외우주인은 이미 명을 달리한 듯하다. 방한복 흉부에 뚫린 구멍으로 새어나온 피가 얼어붙어 붉은 거품이 되었다. 소래가 지켜보는 가운데 조 수사관이 조심스럽게 다가간다.
>이봐요. 그, 유감이에요.
외우주인 청년은 대답이 없다.
>이렇게 될 줄로 예측한 건 아니었어요.
하 반장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허깨비가 갇혀 있는 투명 용기에 접근한다. 용기 내부에 전력장을 설치하여 허깨비가 벗어나지 못하도록 가둔 듯하다. 가까이서 보니 허깨비는 짐작했던 것보다 더 크다. 온통 밝은 보라색으로 물든 것을 보면 정제 딜라리움을 포화되도록 주입한 것이 분명하다. 
>설마 이걸로 딜라리움을 운반할 줄이야.
>운반만이 아니라 주입할 때 저절로 불순물을 걸렀을 겁니다.
>진짜여? 왜 아무도 그 생각을 못 했지?
>이들이 오래 전에 한 발상이죠. 지금 떠올랐습니다. 실제로 가능할 줄은 몰랐지만.
조 수사관은 외우주인 청년에게서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말한다.
>왜 범법자들과 거래를 하려 했나요? 만약 이 위성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찾는다면, 도움이 될 수도 있어요.
청년은 아주 살짝 고개를 든다.
>이제 밀항 시도 혐의로 연행할 거에요. 그럼 해경 측에 당신의 사정을 증언하세요.
하 반장이 항의한다.
>그 놈은 피해 일으킨 거 전부 변상하기 전까진 어디도 못 가.
>채무를 변제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어요. 꼭 여기서 일해서 갚아야 하는 건 아니죠.
>그건 감독님이 판단할 거여.
하 반장이 뻗대는 사이 외우주인 청년은 방한복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낸다. 스위치 내지는 리모콘처럼 보이는 손가락 크기의 장치다. 그 표정은, 형사 일을 하면서 잊을만 하면 보게 되는 그런 것이다. 조 수사관은 권총을 꺼내 겨누지만 한발 늦는다. 청년이 스위치를 누르자 딜라리움 포화 허깨비를 가두던 전력장이 꺼지고, 투명 용기를 뚫고 나온 얼음 가시가 폭발하듯 모든 방향으로 뻗는다.
잠시 후 아직 살아있음을 확인한 조 수사관은 몸을 일으킨다. 허깨비에게 더 가까이 있던 소래와 하 반장은 그 자리에서 전신이 얼음 가시에 꿰였다. 상처 부위부터 점점 얼어서 사람 모양의 얼음덩어리가 되어간다. 외우주인 청년은 팔에 총을 맞았는데 비명도 지르지 않고 그저 반려자의 시신을 끌어안고 앉아 있다. 보라색 허깨비는 돌바닥을 미끄러지며 얼음층을 찾더니, 녹는 듯 사라져버린다. 그 자취에 온통 딜라리움 진액이 묻는다. 조 수사관은 권총을 조준한 채 외우주인에게 외친다.
>두 손 들고 일어나요.
묵묵부답. 사망한 이와 방한복 헬멧을 맞댄 채 움직이지 않는다. 하늘에 질소 구름이 형성되는 것이 보인다.
>이봐요, 피신해야 돼요.
청년은 조 수사관이 모르는 언어로 중얼거린다. 애도인지 저주인지.
>그럼 맘대로 해요.
조 수사관은 휴대용 컴퓨터를 꺼내 참상의 사진을 찍은 후 아직 노을이 남은 하늘을 주시한다.
>구포 씨, 지금 어디쯤 왔나요? 토착생물 때문에 사고가 있었어요. 사진을 보내줄 테니까 궤도로 전송해줘요.
잠시 대답이 없다.
>구포 씨?
잡음과 함께 구포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수사관 님, 죄송해요!
>뭐가요?
>아직 착륙장에서도 못 나왔어요, 착륙선을 몇 번이나 박아서. 시간 안에 거기까지 못 갈 것 같아요.
>무슨 소리에요. 충분히 가능해요.
>제가 비행을 해봐야 얼마나 잘하겠어요? 능력 밖이에요.
>입다물고 조종에 집중해요.
잠시 침묵이 이어진 후.
>해가 지는 지역엔 곧바로 비가 내려요. 선체에 닿았다간 추락해서 둘 다 죽어요. 전 행성 궤도로 갈게요. 
>아니 그러지 말고!
>죄송해요.
구포는 통신을 끊어버린다. 
>구포 씨? 구포! 야!!!
조 수사관은 먹통이 된 채널에 생각나는 가장 저속한 욕설을 퍼부으며 승강기 통로를 찾아 달려간다. 지금으로썬 그것밖에 대책이 없다. 겨울밤은 지구 시간으로 여섯 달이라고 했다. 지금까지 쓴 휴가를 다 합쳐도 여섯 달이 안 될텐데.

댓글 0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2019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명단 mirror 2019.02.26 0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0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0
2437 단편 빛나는 보석들 바젤 2019.01.30 0
2436 단편 얼굴 가죽들 바젤 2019.01.26 0
2435 단편 국왕의 호위병 바젤 2019.01.23 0
2434 단편 신의 얼굴 바젤 2019.01.15 0
2433 단편 꼬리가 없는 하얀 요호(妖狐) 설화 바보마녀 2019.01.14 0
2432 단편 죄책 김성호 2019.01.10 0
2431 단편 이쪽이세요 김성호 2019.01.10 0
단편 물의 정령 의심주의자 2019.01.07 0
2429 단편 팔카르 로엔다임 노말시티 2019.01.02 0
2428 단편 최후의 다이브 바보마녀 2018.12.23 0
2427 단편 불꽃축제 바젤 2018.12.23 0
2426 단편 KKM 실화추적 : 놀라운 이야기 253화 2049년 11월 방영 희야아범 2018.12.19 0
2425 단편 잘린 머리들 바젤 2018.12.19 0
2424 단편 실종 진정현 2018.12.05 5
2423 단편 벨제붑 노말시티 2018.12.01 0
2422 단편 불광동 수정씨 희야아범 2018.11.17 0
2421 단편 살을 섞다2 노말시티 2018.11.13 0
2420 단편 극지인(polar alien, 劇地人)과 도넛 희야아범 2018.11.09 0
2419 단편 모래바람 속 푸른 레거시 온연두콩 2018.10.27 0
2418 단편 연희 진정현 2018.10.24 3
Prev 1 2 3 4 5 6 7 8 9 10 ... 125 Next
서버에 요청 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