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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으로 태어나 바다코끼리에게 죽게 되다니. 나름 만족스러운 결말이군.”

목수는 기분 좋은 듯이 웃었고 바다코끼리는 뚱한 표정으로 그 말을 받아쳤다.

“난 너를 죽일 생각 따위는 없어. 인간으로 태어나 바다코끼리한테 죽는 것보다는 바다코끼리가 인간에게 죽는 쪽이 더 만족스러울 거야. 인간은 머리뼈는 너무 단단해서 이 상아로도 뚫리지 않고 뇌는 너무 주름져서 씹는 맛이 없지.”

목수는 그 말을 듣고 껑충껑충 뛰어 오르며 해와 달을 찬양했고 바다코끼리는 그를 어이없다는 듯이 흘겨 본 뒤 그들이 처한 상황을 찬찬히 설명했다.

“나와 너 모두에게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굴조개들은 달이지고 해가 뜨면 우리를 죽이기로 했어. 달이 지기까지는 두 시간 정도 밖에 안 남았고. 재판으로 결정된 일이라더군.”

목수는 들고 있던 자로 모래밭에 큰 글씨로 ‘굴조개’를 크게 쓴 후에 그때서야 의아하다는 듯이 바다코끼리에게 큰 소리로 물었다.

“나는 재판을 받은 기억이 없는데. 바다코끼리 형씨도 이 모래밭에 계속 있지 않았나?”

“굴조개란 녀석들은 법정에 원고와 피고 없이 재판을 진행한다는 사실 몰랐는가? 웃긴 건 원고가 우리고 피고가 우리를 발견한 굴조개들 이라는 거지.”

모래사장의 저편 바위 밭에는 달빛 아래서 굴조개들이 기가 막힌 왈츠를 추고 있었고 병사 굴조개들은 뽀얀 속살을 부끄럽다는 듯이 껍질에 감추고 삼지창을 들어 목수에게 더 이상 다가오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다.

“우리가 소송을 제기한 내용은 ‘우리를 먹어 주세요!’라더군. 재판장인 늙은 굴조개는 원고의 편을 들어줬어. 이게 우리가 죽어서 굴조개들의 술안주가 되는 배경이다. 네놈이 모래밭에서 모래집을 만드는 동안 훌라후프를 돌리며 뛰어온 굴조개가 친절하게 말해줬어.”

“죽기 전에 세상에서 가장 훌륭하고 튼튼한 집을 짓고 싶었는데 아쉽게 됐네. 천국에도 단단한 나무와 약간의 수숫대가 있기를! 바다코끼리 형씨는 죽기 전에 해보고 싶던 일이 있는가?”

바다코끼리는 곧 죽을 거라고 해도 흔들리지 않는 목수를 바보 같다는 듯이 혀를 차며 경멸했지만 목수는 웃으며 굴조개들이 추는 왈츠를 따라 추자 흐느끼며 울기 시작했다.

“죽기 전에 마음껏 먹는 게 소원이야. 떠돌이 바다코끼리로 살아오면서 한 번도 맛있는 식사를 해본 적이 없네. 내 바다코끼리생(生)은 기껏해야 비려서 목에 넘기기도 힘든 물범의 뇌나 코딱지를 닮은 삿갓조개들을 양념 없이 먹는 게 전부.”

“나에게는 두 덩어리의 빵, 약간의 버터, 약간의 식초, 약간의 후추가 있어. 우리 둘이 죽기 전에 양껏 먹기엔 충분하지 않은 양이지. 좋은 생각 있나?”

목수는 메고 있던 자루에서 빵과 조미료들을 꺼냈고 바다코끼리는 울음을 그치고 잠시 고민하던 눈치더니 무언가 불현 듯 생각난 듯 목수에게 소리쳤다.

“적은 양식이지만 바위 밭의 굴조개 형제들하고 함께 나누는 게 어떤가? 죽더라도 여러 친구들과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대찬성이야. 당장 바위 밭으로 가자고. 우리와 그들 모두 한번 만난 이상 진정한 친구 아닌가?”

바다코끼리와 목수는 결의에 찬 걸음으로 힘차게 바위 밭을 향해 나아갔고 모래사장의 끝을 지키고 있던 굴조개들은 그들을 저지하려고 했으나 본인들이 들고 있던 삼지창에 연한 흰색 살을 찔려 짧은 생을 마감했다.

병사들이 허무하게 처치된 후 바위 밭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어 갔다. 재판장이었던 늙은 굴조개는 밧줄 자살로 생을 마감했고 훌라후프를 돌리던 친절한 굴조개는 바다코끼리의 배려에 따라 후추가 뿌려지지 않고 목수의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신들린 듯이 왈츠를 추던 치긴 어린 굴조개 무리들도 목수와 바다코끼리의 뱃속에서 황천을 건너게 되었다.

“바다코끼리 형씨. 마지막 식사는 맛있게 하셨소? 빵을 몇 덩어리만 더 가져왔으면 좋았을 것을.”

“불쌍한 굴조개들. 네놈만 아니었어도 굴조개들은 아직도 춤을 추고 있었을 거야. 아직 해가 뜨기 전까지는 꽤 많이 남았는데. 해가 뜬 이후에는 우리들의 고기로 경쾌한 잔치를 열었겠지. 안 그런가?”

목수는 대답하지 않고 들고 있던 자로 모래밭에 사각형을 그려놓고 그 안에 굴 껍질을 던졌다. 바다코끼리는 목수의 어깨를 긴 앞 지느러미로 잡았고 이빨을 목수의 머리에 찔러 넣었다. 목수는 저항하지 않았다. 잠시 후 목수는 쓰러졌고 머리에서는 피와 뇌수가 흘러 나왔고 바다코끼리는 게걸스럽게 뇌수를 삼켰다.

이 해변에는 바다코끼리를 제외하고는 이제 더 이상 아무도 남지 않았다.

‘역시 목수라도 살려둘 걸 그랬나? 그 인간은 굴조개들에게 몹쓸 짓을 했지만 꿈만은 확실한 친구였지.’

바다코끼리는 외로웠다. 그렇지만 굴조개들의 속살과 목수의 뇌가 아직도 입에 가득 차 있어 혼잣말도 할 수 없었다. 바다코끼리는 자신의 이빨을 부러뜨려 자기 자신을 찔렀고 목수의 시체 옆에서 기도하는 자제로 숨을 멈췄다.
부디 인생의 두 철학자들에게 자비가 있기를!

호넷시티

백승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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