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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할망이 있었다
고혜경, 한겨레출판, 2010년 7월



정원사



 필자는 신화책을 크게 세 종류로 나눈다. 하나는 1차 자료에 해당하는 글이다. 구전 민담과 전설을 수집해서 정리한 책과 [오딧세이아]나 [마하바라타]같이 문학작품으로서의 가공을 거친 책들을 여기에 넣을 수 있다. 두 번째는 신화 이론서다. 이론이 중심 뼈대를 이루고, 1차 자료는 이론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쓰이거나 이론적 뼈대에 살을 붙이는 데 쓰인다. [황금가지]나 [신화학] 같은 책이 대표적인 예가 되겠다.
 그리고 분명히 1차 자료는 아니지만 이론서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책들이 있다. 주제는 있지만 그 주제에 주장이 들어가 있지 않거나, 주장이 희미하거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를 단단하게 쌓는 데 주력하지 않은 경우다. 신화를 소재별로 찾아서 묶은 책, 느슨한 공통 주제만 잡고 자유롭게 연상을 펼친 책, 비교적 가벼운 신화 칼럼이나 에세이 묶음집 같은 것들이 이 범주에 들어간다. 이번에 소개할 [태초에 할망이 있었다]도 이 범주에 들어간다.

 탁 터놓고 말해서, 이 책의 껍데기를 보고 앞부분을 읽었을 때까지 필자는 시비를 걸고 싶어서 손이 근질근질했다. 우선 '우리의 창세여신 설문대할망 이야기'라는 부제부터가 그렇다. 제주도 신화를 너무 쉽게 한반도 전체의 신화로 확대하고, 집어삼키려는 태도로 보여서였다. 이어지는 추천사는 첫머리부터 "이 책은 참여관찰이라는 방법론으로 씌어졌다"는 말로 냉소를 불러 일으켰다. 인류학에서 말하는 참여관찰은 그냥 그곳에 가서 살면서 관찰한다는 정도의 의미가 아니기 때문이다. 서문은 고대 여신에 대한 거창하고 말랑말랑한 이야기로 신경을 긁었다. 주장 자체에 반대해서가 아니라 그 태도가 이미 '믿음'의 영역에 발을 둔 듯 느껴져서였다. 미안하다. 필자가 좀 비뚤어졌다. 신화학은 좋아하지만 신화를 세상 모든 문제의 해답처럼 강변하는 문장을 보면 바로 보는 눈이 비딱해진다.

 여기까지 쓰고 나면 그러니까 지금 이건 씹자고 쓴 리뷰냐 싶어질 테지만, 끝까지 읽고도 가치없는 책이라고 여겼다면 리뷰를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위에서 불평한 부분들은 신화학 분야 전반에서 자주 맞닥뜨리는 문제들이고, 경계해야 한다는 생각에 변함은 없다. 그러나 경계할 부분은 경계할 부분이고, 받아들일 부분은 받아들일 부분. 이전에도 비슷한 태도로 접근했다가 단점 이상의 장점에 탄복한 책이 몇 권이나 있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앞에서 거슬린다고 지적한 부분들에 대해 다시 말을 붙인다. 부제가 책의 내용을 대변하지는 않았다. 저자는 과도한 확대해석으로 달리거나, 민족주의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그저 제주도에도 토막토막으로만 남아있는 설문대할망 전설이 갖고 있는 어떤 가능성에 대해 상상력을 발휘할 뿐, 선을 넘지는 않는다. 이 설화가 워낙 파편적으로 남아 있기 때문에 튼실한 분석을 할 수 없다는 점은 저자도 자인하고 있고, 그 때문에 분석이라기보다는 '재번역'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딱딱하지 않게 써준 덕분에 독자들에게 다가가기는 쉽다. 참여관찰에 대해서는 여전히 동의할 수 없지만... 뭐, 전공자의 예민함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가자. 가장 중요한 것은 저자가 확고하고 지속적으로 이 문제에 애정과 관심을 갖고 있다는 점이 드러나고, 비교신화 면에서 보이는 내공이 결코 얕지 않다는 점이다.

 자, 장광설은 이쯤 해두고 이제 내용 이야기를 해볼까.
 이 책의 뼈대가 된 설문대할망 설화는 크게 세 가지 측면을 지닌다. 하나는 제주도 신화, 또 하나는 거인 신화, 마지막 하나는 여신 신화다.

 제주도는 한국에서 가장 많은 신화와 전설이 보전되어 있는 곳이다. 제주만큼 오랫동안 문화적인 독립성과 완결성을 지킬 수 있었던 지방도 없고, 복잡하고 파괴적인 근현대사를 거치면서 그만큼 구비문화를 보존할 수 있었던 곳도 없었다. 학계가 한 줌이 안되는 문헌신화에서 풍부한 구전신화로 눈을 돌렸을 때 바로 제주도가 빛을 발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예전에 소개한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신화]라는 책도 제주도에서 얻은 내용이 많았다.
 다만 설문대할망이 신화로서 소개된 적은 없다. 줄거리가 잘 잡혀 있지 않고, 짧고 파편적인 설화로, 제주도의 무속과 당신 체계에조차 들어가지 않기 때문이다. [제주도 전설(현용준)]에서도 몇 쪽 차지하지 않는 토막 이야기다.
 영리하게도 저자는 이 점을 역이용했다. 파편이기 때문에 더 자유로이 연상작용을 펼치고 신화소를 비교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저자는 설문대할망 이야기를 기본 뼈대로 하여 한국 신화 전반을 끌어오고, 다시 세계 신화를 끌어와서 보편적인 원형의 문제를 이야기하려 한다. 그러면서도 매번 제주도 자체의 자연과 문화로 되돌아감으로써 이것이 제주에서 출발한 여정임을 상기시킨다.

 두 번째로 설문대할망이 지닌 ‘거인’의 면모는 대단히 중요하다. 이 설화를 제주도를 벗어난 한국신화 전체로 넓혀서 분석할 수 있는 것도, 여성 거인 설화가 큰 여신의 흔적이라는 주장도 여기에 초점을 둔다. 여신에 대한 믿음은 공식적인 문헌신화에서는 밀려났을지 몰라도 무속신화를 통해서 계속 이어진 반면, 한국에서 거인 신화는 설화의 형태가 아니고는 남아있지 않다.
 이 ‘거인’ 면모에 대한 분석은 [한국의 거인설화(권태효)]에 많은 부분을 빚지고 있다. 이 책은 설문대할망을 포함한 한국의 여러 거인설화를 정리하고 어떻게 하여 창조신화가 웃음이 가미된 전설로 변용되었는가를 파고든다. 설화가 본래 신화였다고 볼 수 있는 이유, 거인이 지닌 창조신/풍요와 생산의 신/시조신/악신(惡神)으로서의 본질과 변형에 대해서는 이 책에서 명확하게 정리하고 있다. 또 제주도를 벗어나서도 '마고할미'같은 여성 거인 설화가 흩어져 있다는 점을 통해 설문대할망을 한국 전체와 함께 생각해도 좋을 근거를 제공하기도 한다. 학술서로 나온 만큼 훨씬 딱딱하다는 점에 대해서는 경고해 두어야겠지만, 함께 읽으면 이해를 넓힐 수 있을 만한 추천서다.

 마지막은 ‘여신’이다. 사실 제목이나 부제만 보면 이 부분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할 듯 보이지만 실제로 그렇지는 않다. 특히 설문대할망을 창조여신으로 해석하는 저자의 생각을 뒷받침하는 근거는 빈약한 편이다. 여기에서 근거 부족이란 ‘그랬을 법 하다’고 수긍하게 되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분석에 끌어올 만한 선행연구(혹은 수집된 자료)가 적었다는 이야기다.
 참고문헌만 보아도 세 가지 큰 주제 중에 ‘여신’ 부분이 상대적으로 적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거니와, 그나마 빌려온 논의 중에 한국신화를 다룬 연구가 거의 없다. 땅의 신이 본래 여신이었던 흔적은 어디에나 퍼져 있고, 시대의 변화와 함께 권좌에서 밀려났다고 보는 시각도 꽤 널리 퍼져있다. 그러나 지신/풍요신과 창조신은 다르다. 이전에 리뷰한 [선사시대가 남긴 세계의 모든 문양] 같이 방대한 고고학 증거를 통해서 창조여신이 지신으로 이동하는 과정을 집요하게 논증하려 한 책도 있지만, 현대와 가까워질수록 이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는 적어진다. 특히 한국에서 그 흔적은 그야말로 '흔적'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수준으로 파편적이다. 위에서 언급한 [한국의 거인설화]처럼 여신에만 초점을 맞추어서 집중적으로 남아있는 자료를 정리한 저서도 없다. 그럼에도 설사폭탄으로 오름을 만들어낸 설문대할망이 거대한 창조여신의 흔적이라는 상상은 여전히 매력적이고, 직관적으로 사람을 설득하지만 말이다.

 노파심이 작동해서 무겁게 누르는 리뷰를 해버리고 나니 정작 다루어야 할 책의 성격은 땅속 깊이 묻어버린 듯하여 겸연쩍다. 설문대할망 설화는 그 자체로 재미있고 상상력을 자극하는 이야기고, [태초에 할망이 있었다]는 재미있고 의미있으며 잘 읽히는 책이다. 이 책의 내용과 연관하여 꽤 여러 저서를 언급했지만, 사실 그 중에 이만큼 편하게 추천할 수 있는 책은 없다. 이런 책이 더 나오고, 이 책을 쓴 저자가 직접 후속 연구를 해주기를 바랄 뿐이다.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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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심 11.05.28 08:45 댓글 수정 삭제
    어렸을 때 읽었던 설화(?)를 이렇게 접해서 반갑네요! 정작 설화 자체는 이제 기억이 잘 나지 않아요.. ^^;; 에고고. 돌을 집어던져서 육지와 연결된 다리를 만들려고 했는데 사람들이 약속한 천을 다 준비하지 못하자 화가 나서 그만두었다는 거, 한라산 꼭대기를 던져서 만들어진게 산굼부리라는거, 치마 하나 못만들어 입는 게 속상해서 바다에 걸어들어가 죽었다더라 하는 거.. 가물가물해서 맞는지 모르겠어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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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s 11.05.28 09:43 댓글 수정 삭제
    오 내용을 아시니 더 재미있게 읽으실 듯 :)
  • No Profile
    미로냥 11.05.28 23:30 댓글 수정 삭제
    아니! 저도 어릴 때 읽었는데 할머니가 키가 큰 거 밖에 기억 안 나는데 이럴수가...
    연심님 대단하세요!
  • No Profile
    pena 11.05.30 02:30 댓글 수정 삭제
    항상 한 주제에 대한 책을 소개하면서 곁들이로 더 읽으면 좋을 책까지 소개해줘서 고마워요~ (... 맨 끝은 아시는 분은 다 아시는 오페라스타 톤으로 읽어주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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