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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가 츠츠이 야스타카(筒井康隆)를 처음으로 접한 것은 고려원미디어의 [세계 SF 걸작선](1992)에 실린 단편 {멈추어 선 사람들(佇むひと, 1974)}을 통해서였다. 식량부족이 만성화된 미래의 일본을 배경으로 정부를 비판하는 사람들을 식물로 만들어 길가에 심어버리는 기상천외한 독재정치를 묘사한 작품인데, 아이디어만 보면 디스토피아 호러물에 가깝지만 실제 이야기에서는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씁쓸함과 서글픔이 묻어나온다. 어쩔 수 없이 헤어진 아내를 그리는 남편의 애절한 마음을 보여주는 서정소설인 동시에 ‘나무가 되는 것이 무서워서 아무 말도 못하게 된다면 결국 우리도 나무나 마찬가지가 아닌가’라는 사회비판적인 메시지를 행간에 감춘 풍자소설이기도 한 것이다.
 
 그때는 그냥 ‘기발한 착상이다. 이런 작가도 있었군.’이라는 정도로밖에 인식하지 못했으나 그로부터 수 년 후에 문제의 츠츠이가 일본 청소년 SF의 고전으로 손꼽히는 [시간을 달리는 소녀(時をかける少女, 1967)]를 썼다는 것을 알고는 예상 외로 폭이 넓은 작가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실제로 츠츠이는 실없는 슬랩스틱 개그에서부터 진지한 드라마, 기존의 틀을 깨는 전위소설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한 작가이며, 극작가, 작곡가, 배우로도 활동하는 IQ 178의 천재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들은 만화, TV드라마, 라디오 드라마, 실사영화, 연극, 컴퓨터 게임 등으로 각색되어 꾸준히 팔리고 있으며, 일본 SF의 대중화를 선도한 3대 거장 중의 한 명으로 손꼽히기도 한다.
 
 본서는 츠츠이 야스타카가 자신의 중ㆍ단편들 중에서 특별히 애착을 갖고 있는 작품들을 스스로 선정하여 한데 묶은 ‘뒤죽박죽 걸작 단편집’ 시리즈의 제2탄으로, 2002년 10월 신초사에서 [기울어진 세계]라는 제목으로 발매된 것을 번역한 것이다. (제1탄인 [최후의 끽연자(最後の喫煙者, 2002)] 역시 같은 출판사에서 2008년에 번역 소개한 바 있다.) 7편의 수록작 중 {기울어진 세계}, {최악의 외계인}, {관절화법}은 코믹 SF, {꿈틀꿈틀 장관}은 정치풍자 판타지, {고로하치 항공}은 슬랩스틱 개그, {이판사판 인질극}은 범죄 스릴러, {하늘을 나는 표구사}는 역사와 상상을 교묘하게 엮은 팩션으로 분류할 수 있다. 다루는 내용은 다들 제각각이지만 모두 츠츠이 특유의 골 때리는 발상과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블랙유머로 꽉꽉 채워진 작품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 기울어진 세계(傾いた世界, 1989)
 수도 근해에서 실험운영 중이던 해상도시가 지진과 해일의 충격으로 인해 서서히 기울어지기 시작하지만 몇몇 사람들을 제외한 시민들은 그 사실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다. 점점 경사가 심해지면서 눈에 띄는 징후가 나타나게 된 뒤에도 고집스러운 관료들은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체제 유지에만 급급한다. 사소한 사고와 실수로 인해 위험에 처한 인공 생활권의 종말을 냉소적인 시선으로 그려낸 대재난 SF이지만, 동시에 사람들의 고집과 독선으로 인해 평범하던 일상이 점점 괴이하게 일그러지는 과정을 보여주는 풍자소설이기도 하다. 저자의 여성혐오 성향이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어 다소 짜증나는 면도 있지만 (그릇된 판단을 하다가 자멸하는 인물들이 전부 여성이고, 페미니즘 실현구역으로 기획된 해상도시는 결국 가라앉아버린다.) 애초에 인물들의 이름이 전부 말장난으로 점철되어 있는 우스개 소설인 만큼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을 듯.
 
 ■ 최악의 외계인(最悪の接触, 1978)
 원제를 직역하면 {최악의 접촉(워스트 콘택트)}. 외계인이 등장하는 SF에서는 거의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하는 ‘최초의 접촉(퍼스트 콘택트)’ 클리셰를 비꼰 제목임을 알 수 있다. 주인공은 지구 대표로서 최근 새로이 접촉한 지성종족 ‘맥맥인’의 대표와 동거생활을 하면서 서로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임무를 맡는다. 육체적으로도 별 차이가 없으니 대화에도 큰 문제가 없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일단 직접 만나보니 일이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지구인의 상식과 예절을 철저히 비웃으며 청개구리같은 언행만 일삼는 맥맥인의 습성은 완전히 우리들의 이해를 벗어나 있었던 것이다. 다른 작가의 SF라면 그러한 격차에 어느 정도 논리적인 설명을 붙여서 독자에게 깨달음을 줄지도 모르지만, 이 저자는 그런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맥맥인의 종잡을 수 없는 한바탕 푸닥거리를 접하며 경악과 혼란에 빠져드는 주인공의 심정은 그대로 독자에게도 전해지고, 그 혼란은 이윽고 다른 존재들끼리 소통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실감케 한다.
 
 ■ 꿈틀꿈틀 장관(のたくり大臣, 1988)
 연일 계속되는 협상과 보고 때문에 잠도 못 자고 시달리던 장관과 비서관이 각성제인 줄 알고 수면제를 먹은 뒤 기이한 체험을 한다. 마법처럼 둥실둥실 떠오른 이불을 타고 하늘로 날아올라 이른 아침의 시가지를 굽어보다가 민가로 들어가 방금 숨을 거둔 시체와 대화까지 한다. 어디까지가 꿈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인지 갈피를 잡기 어려운 괴작(怪作). 해석하기에 따라 철야에 지친 장관의 마음이 빚어낸 망상으로도, 딱 부러지는 무언가를 보여주지 못하고 항상 모호한 변명과 어중간한 정책으로 일관하는 일본 정계를 꼬집는 풍자로도, 혹은 진짜로 장관 일행이 여우에게 홀려서 모험을 하는 기담(奇談)으로도 볼 수 있다. 본서의 수록작 중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작품인 것만은 틀림없다.
 
 ■ 고로하치 항공(五郎八航空, 1974)
 무인도 탐방을 하러 갔다가 태풍으로 교통편이 끊기는 바람에 궁지에 몰린 잡지사 기자와 카메라맨이 우연히 소개받은 지방 항공편을 이용하게 된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들 앞에 나타난 것은 애까지 업은 시골 아줌마가 조종하는 고물 프로펠러기였다! 과연 주인공들은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을까? 유유자적한 시골 노인들과 불안감에 몸부림치는 도시 촌놈들의 대조, 아줌마 비행사의 상상을 초월하는 대담한 조종과 그로 인한 소동 등이 유쾌한 폭소를 자아내는 익살극. 하지만 앞쪽에서 보여준 시원시원한 분위기를 단숨에 뒤집어버리는 섬뜩한 마무리는 ‘역시 이 양반이 그냥 넘어갈 리가 없지’라는 혼잣말을 하게 만든다. 100% 완벽한 해피엔딩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떤 슬픔이나 무서움을 느끼기에도 좀 어중간한 마무리 덕분에 오히려 한동안 잊혀지지 않을 인상을 남기는 묘한 작품이다.
 
 ■ 관절화법(関節話法, 1977)
 제목은 ‘간접화법(間接話法)’을 뒤튼 말장난. (‘관절’도 ‘간접’도 일본어 발음은 둘다 칸세츠かんせつ임.) 실생활에서 가끔 관절 상태가 좋지 못해서 수족을 움직일 때마다 뼈마디가 우두둑하는 소리를 내는 경우가 있는데, 이 단편에서는 그것을 외계인의 언어관습과 결합하여 전무후무한 의사소통 방식을 만들어냈다. 관절을 꺾는 소리를 ‘언어’로 사용하는 종족을 상대하기 위해 지구 대사로 파견된 주인공이 일촉즉발의 외교적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온몸의 관절을 총동원하여 필사적으로 설득에 나선다는 눈물과 웃음의 자학 드라마. 사실 주인공의 입장에서 보면 진짜 끔찍한 이야기인데도 불구하고 그가 처한 상황의 부조리함이나 숨쉴 틈을 주지 않는 스피디한 전개 때문에 꽤 재미나게 읽을 수 있다. 조직의 이익을 위해 아무리 무리한 일이라도 목숨걸고 해내야만 하는 공무원의 처절한 비애가 느껴지는 본격 샐러리맨 소설이기도 하다.
 
 ■ 이판사판 인질극(毟りあい, 1975)
 제목을 직역하면 ‘서로 물어뜯기, 서로 상처입히기, 서로 빼앗기’ 등으로 옮길 수 있다. 평범한 샐러리맨인 주인공은 탈옥수가 가족을 인질로 잡고 농성을 시작하자 순식간에 언론의 집중취재 대상이 된다. 하이에나같이 달려드는 기자들과 사람을 은근히 깔보는 듯한 경찰의 태도에 염증을 느낀 주인공은 ‘피해자가 될 바엔 아예 내가 한발 앞서 가해자가 되리라’는 결심을 하고 탈옥수의 가족을 인질로 잡아 ‘눈에는 눈’ 전술로 맞선다. 하지만 두 남자 사이의 신경전이 점점 길어지면서 사태는 점점 통제불능으로 치닫게 된다. 처음에는 가벼운 분위기의 일상물처럼 시작해서 점점 어두침침한 방향으로 빠지는 잔혹극. 주인공이 단순한 복수나 정당방위의 차원을 넘어선 ‘선제공격’을 시작함으로써 점점 정신의 균형을 잃고 다른 이들을 파멸시키면서 자기도 나락으로 떨어지는 과정이 드라이하게 그려진다. 그럼에도 주인공 본인은 끝까지 자신이 상대방과는 달리 제정신을 잃지 않았다고 착각하고 있다는 점이 특히 무시무시한데, 집필 당시 계속되고 있었던 동서 냉전을 비롯한 세상의 여러 가지 분쟁도 따지고 보면 이런 식으로 계속되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2006년에는 노다 히데키(野田秀樹)에 의해 [THE BEE]라는 영어연극으로도 각색된 바 있다.
 
 ■ 하늘을 나는 표구사(空飛ぶ表具屋, 1972)
 18세기 일본, 표구사의 아들로 태어난 고키치는 하라는 일은 안 하고 새처럼 하늘을 날고 싶다는 꿈에만 몰두하여 가족들의 속을 썩인다. 처음에는 허황된 것으로만 여겨졌던 그의 설계도는 연구를 거듭하면서 점점 그럴 듯한 모습으로 진화하고,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고키치의 열정은 식을 줄을 모른다. 일본 최초로 하늘을 날았다고 전해지는 우키다 고키치(浮田幸吉, 1757~1847?)를 주인공으로 삼아 창공에 대한 인간의 끝없는 도전기를 그려낸 중편. 중간 중간에 현대 일본에서 벌어진 각종 항공기 사고에 대한 기록이 삽입되어 있는데, 그 충돌 유형은 바로 앞 장에서 고키치가 실험 중에 체험한 사고와 대응하는 형태로 되어 있다. 중반까지만 보면 주인공의 투지를 통해 인력비행의 로망을 그려내는 인간승리 드라마로 느껴지지만, 고키치의 마지막 비행을 다루는 클라이막스 이후에는 인상이 180도 바뀌어버린다. ‘아무리 기술이 발달하고 비행이 일상적인 것이 되더라도, 인간이 하늘에 올라가는 한 반드시 추락도 계속될 것이다’라는 시니컬한 결론을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앞서서 인용된 사고 기록들의 ‘진짜 의미’가 이 부분에서 분명해진다.) 희망과 절망이 빛과 그림자처럼 서로 교차하면서 공존하는 츠츠이 월드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드러내 보이는 걸작. 수록작들 중에서는 가장 진지한 편에 속하기 때문에 저자의 블랙유머에 면역이 없는 사람에게도 쉽게 권할 수 있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본서의 수록작들은 하나같이 독특하고 기발한 아이디어가 빛나는 작품들로 채워져 있다. 특정 취향을 타는 작품도 있고 반드시 건전하다고만은 볼 수 없는 사고방식도 언뜻 보이지만 그 저변에 흐르는 저자 특유의 센스에는 팬들을 열광하게 만드는 일관성이 숨어있는 것이다.
 
 현재 저자는 칠순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작품 집필과 TV 버라이어티 출연, CM 출연 등을 통하여 끊임없이 시대와 함께 호흡하고 있는데, 2008년에는 소설 [비앙카 오버스터디(ビアンカ・オーバースタディ)]를 발표하면서 최고령 라이트노벨 작가라는 신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불세출의 괴물작가 츠츠이 야스타카가 앞으로 어떻게 더 뻗어나갈 지 궁금하다면, 본서를 통하여 그가 과거에 걸어온 길을 되짚어 보는 것도 유익할 것이다. 비록 그 길이 아무리 암울하고 처절하게 느껴질지라도, 그 반대편에는 그런 어둠을 상쇄시켜주는 유쾌함이 틀림없이 숨어있을 테니 말이다.
 
 
 
 
 ■ 참고 사이트 (as of 2011-03-20) ■
  ○ http://www.jali.or.jp/tti/
     츠츠이 야스타카 공식 홈페이지
  ○ http://d.hatena.ne.jp/daen0_0/20080706
    {꿈틀꿈틀 장관}의 결말에 관한 몇 가지 해석
  ○ http://www.nodamap.com/site/play/31
     연극 [THE BEE] 소개
  ○ http://www.saitama-subaru.co.jp/plane/07_ukita.html
     실존인물 우키다 고키치의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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