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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파프리카

2011.04.30 00:47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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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인의 꿈을 모니터링하거나 아예 꿈 속에 개입함으로써 정신질환을 치료하는 PT(사이코 테라피) 기술이 발달한 근미래의 일본. 언제부터인가 유력인사들의 의뢰를 받고 그들의 꿈에 접속하여 정신치료를 해 주는 수수께끼의 꿈 탐정 ‘파프리카’에 대한 소문이 돌기 시작한다. 파프리카의 정체는 정신의학연구소에 근무하는 PT 연구의 일인자 치바 아츠코. 하지만 연구소 외부에서 PT기기를 사용하는 것은 불법이기 때문에, 파프리카로서의 활동은 오래 전에 그만둔 상태였다. 이사장의 간절한 부탁으로 오랜만에 파프리카로서 출동한 아츠코는 연구소 내부의 권력투쟁에 말려들어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지게 되는데…….



   ▲ 위기에 빠진 아츠코, 애니메이션 [파프리카](Paprika, 2006)의 한 장면.

 츠츠이 야스타카의 장편 SF소설. 전 2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패션지 [마리 끌레르] 일본판에 약 2년간 연재된 뒤 1993년에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누구나 한 번쯤은 경험해 보았을 ‘꿈’이라는 소재를 정신분석과 결합시켜 기상천외한 상상력으로 풀어나가는 수작(秀作). 2006년에 콘 사토시 감독에 의해 애니메이션 영화로 제작되었으며, 두 차례 출판만화로 각색되기도 했다. 처음에는 현실을 배경으로 등장인물들의 꿈에 얽혀 있는 수수께끼를 풀어 가는 구조로 진행되지만 타인의 꿈에 원격 접속할 수 있는 휴대용 기기 ‘DC 미니’가 등장하면서 꿈 장면의 비중이 커지며, 급기야는 DC 미니의 예상치 못한 부작용과 악역의 폭주로 인해 꿈과 현실이 엉망진창으로 뒤섞인 이상공간까지 나타나는 등, 이야기는 점차 독자의 상상을 뛰어넘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스토리 자체는 사실 그렇게 복잡한 편은 아니며, 등장인물도 선악이 확실하게 구분되어 있어 전체적인 흐름을 따라잡는 것도 어렵지 않다. 정신의학연구소의 이사장 자리를 놓고 현 이사장인 시마 파와 부이사장이자 도전자에 해당하는 이누이 파가 격렬하게 대립하고, 시마 파에 속하는 아츠코와 그녀의 동료이자 DC 미니의 개발자인 도키타가 이누이 파의 음모에 의해 위기에 빠진다. 아츠코는 파프리카로서의 경험을 살려 꿈과 현실을 넘나들며 이누이 일당의 공격에 맞서고, 파프리카에게 신세를 진 대기업 중역 노세와 경찰 간부 고나카와가 든든한 조력자로서 그녀를 지원한다. 하지만 꿈 속의 물체를 현실에 투영하거나 현실의 인물을 꿈을 통해 다른 장소로 이동시키는 DC 미니의 부작용이 가속화되면서 이들의 대결은 연구소 내의 정치 싸움을 벗어나 일본 사회를 뒤흔드는 괴사건으로 번져 간다.

 제1부에서는 인물 소개와 파프리카의 등장, 노세와 고나카와의 ‘꿈 치료’를 거쳐 이누이 일당에 의한 DC 미니 도난사건과 그에 대처하는 아츠코의 수난을 묘사하고 있다. 정신질환과 꿈의 관계나 PT 기기의 작동 방식에 대한 설정 소개의 비중이 커서 다소 지루한 면도 있지만, 사건에 사건이 꼬리를 물고 계속 이어지는 절묘한 구성과 숨막힐 듯한 템포로 캐릭터들을 들었다 놨다 하는 저자의 필력이 기막힌 흡인력을 발휘한다. 한편으로는 치료사가 정신질환자의 꿈에 ‘감염’되어 폐인이 될 수도 있다는 리스크를 설정함으로써 독자의 긴장을 유발하고, 아무런 맥락 없이 휙휙 지나가는 꿈 장면들이 치료사의 해석을 통해 별개의 의미로 재구성됨으로써 추리소설을 읽는 듯한 재미를 선사하기도 한다.

 제2부에서는 그 전까지 적절히 균형을 이루고 있었던 꿈과 현실의 비중이 점점 왜곡됨으로써 장르 자체도 SF 미스터리에서 호러 어드벤처의 영역으로 이동해 간다. 모든 소동의 주모자인 이누이 부이사장의 비뚤어진 권력욕과 감춰진 음욕(淫慾)이 고삐 풀린 말처럼 내달리게 됨으로써 DC 미니의 부작용도 더욱 더 광범위하게 퍼져 나간다. 그로 인해 초래되는 사태들은 현실의 논리와는 동떨어진 추악함과 기괴함으로 점철되어 있기 때문에, 분위기 면에서는 저자 자신의 부조리 단편들과도 유사하게 느껴진다.



   ▲ 백귀야행, 애니메이션 [파프리카]의 한 장면.

 문제는 독자가 제1부를 어떻게 읽었느냐에 따라 이 부분에 대한 인상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이다. 만약 기존의 츠츠이 작품에 익숙하고 제1부의 설명적인 부분이 지루했다면 모든 제약을 깨고 막힘 없이 펼쳐지는 저자의 광기와 자유분방한 폭주에 압도되어 만족감을 느끼겠지만, ‘꿈을 다룬 SF’라는 측면에 더 무게를 두고 있으며 제1부의 절제된 전개에 큰 불만이 없었다면 오히려 제2부의 폭주는 지나치게 황당무계하고 설득력 없게 비춰져서 실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제2부는 뒤로 가면 갈수록 아츠코의 비중이 줄어들고 주변 인물들의 활약이 늘어나며 급기야는 아츠코 본인이 결정적인 해결 부분에서 소외되는 듯한 인상까지 주기 때문에, 주인공 중심의 평범한 엔터테인먼트를 즐기고 싶었던 독자라면 ‘잘 나가다가 이게 뭐지?’ 싶은 기분이 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본격적으로 ‘꿈’을 인간 활동의 무대로 설정하여 기막힌 서스펜스를 풀어 나가는 저자의 능력은 주목할 만하다. 또한 중간에 파프리카가 적들과 싸우다가 ‘꿈에서 깨어나는 꿈’이라는 함정에 걸려들어 위기에 처하는 부분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인셉션]보다 훨씬 먼저 꿈의 다층 구조를 스토리 상의 중요한 포인트로 활용하고 있어서 흥미롭다. 냉철한 미인 과학자와 장난기 가득한 소녀라는 2중성을 겸비한 아츠코의 캐릭터도 리얼리티 면에서는 설득력이 떨어지지만 저자가 부여하고자 했던 상징성이나 이상화된 여성상 같은 것을 엿볼 수 있어서 매력적이다. 여러 모로 아쉬운 점이 눈에 띄긴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리저리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길 꺼리가 많은 작품이기도 하다. 시금치나 깻잎처럼 깊게 우러나는 맛은 부족하지만 동명(同名)의 야채처럼 씹으면 씹을수록 사각거리는 느낌이 입 속 가득히 퍼지는 그런 작품, 바로 그것이 소설 [파프리카]의 본질일지도 모른다.

  ■ 참고 사이트 (as of 2011-04-10) ■
○ http://www.jali.or.jp/tti/
    츠츠이 야스타카 공식 홈페이지
○ http://www.shinchosha.co.jp/book/117140/
    신쵸사의 [파프리카] 단행본 소개
○ http://slashdot.jp/~uruya/journal/390405
    uruya의 [파프리카] 감상
○ http://asiamoth.com/mt/archives/2007-04/15_2357.php
    亞細亞ノ蛾의 [파프리카] 감상

 * 추가: 제2부의 비약을 어떻게든 설명하려 한다면 그럴 듯한 이론이 하나 있기는 하다. 바로 ‘노세의 단골 바텐더인 구가의 꿈’이라는 설이다.

 제2부의 전개는 아무리 봐도 너무 갑작스럽고 비약이 심해서 현실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많다. 아츠코와 얼굴만 아는 사이였던 구가와 진나이 콤비가 그녀의 구원 요청에 아무런 의문도 없이 곧바로 임전태세에 돌입하여 악몽과 싸우기 시작한다는 것 자체가 희한하다. (남자들을 매혹시키는 아츠코의 인망이 그만큼 강하다고 한다면 할 말 없긴 하지만 두 사람이 그제서야 드러내는 전투력이 상상을 초월하는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DC 미니 사건을 쫓느라 바빴던 아츠코가 최종 논문 제출을 제때 했는지 어떤지도 알 수 없는데 뜬금없이 노벨상 수상 결정이 내려진 것도 어쩐지 수상쩍고, 구가는 클라이막스 부분에서 꿈의 위력을 빌려 ‘시간을 되돌리는’ 일종의 반칙 기술까지 선보인다. 마지막 장면에서 ‘그러니까, 그건 역시 꿈이었던 건가?’라는 진나이의 질문에 아무런 말 없이 ‘부처님과 같은 미소’를 짓는 구가의 태도를 생각해 보면 소설 전체, 혹은 제2부의 어느 시점에서부터의 사건이 그의 꿈일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것은 저자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순전히 개인적으로 생각해 낸 이론이기 때문에 이것을 믿고 안 믿고는 독자 여러분의 자유임을 밝혀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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