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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춤추는 자들의 왕

2011.01.28 23:44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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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대학생 유 단은 어느날 육교에서 자살하려는 여자를 구해주고, 그 사건을 계기로 그녀와 사귀게 된다. 우연히도 같은 학교 후배였던 그녀의 이름은 임지은. 차분하고 매력적인 얼굴이지만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종잡을 수 없는, 짙은 어둠이 깔려 있는 여자였다. 지은과 알게 된 뒤로 단의 주변에서는 계속 상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기묘한 일들이 일어나고, 단서를 추적하던 단은 ‘데바’라고 불리는 인도의 고대 신족(神族)이 사건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아차린다. 단의 앞에 갑자기 나타나서 수수께끼같은 말만 남기고 사라진 남자, ‘시바’의 정체는? 그리고 지은을 계속해서 괴롭히는 ‘또 다른 인격’의 비밀은?

처음에는 막연한 호기심에서 이들을 쫓아가던 단은 점점 가면 갈수록 뿌리 깊은 태고의 인연이 이 사건에 얽혀 있음을 직감한다. 그의 고달픈 여행은 한국과 인도, 그리고 마침내는 살아있는 인간이 들어갈 수 없다고 알려진 이계(異界)에까지 이어지는데… 평범한 인간에 불과한 단이 신들의 싸움에 말려든 진짜 이유가 밝혀지면서, 그의 여행은 단순한 자아 찾기를 넘어선 새로운 차원으로 접어든다!

저자가 2001년부터 2002년에 걸쳐 PC통신 ‘하이텔’의 창작연재 게시판에 전 120회에 걸쳐 공개한 작품을 출판용으로 대폭 개정한 장편 판타지 소설. 처음에는 대한민국 서울의 익숙한 풍경을 무대로 벌어지는 어번 판타지(urban fantasy)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나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을 둘러싼 과거의 인연이 밝혀지면서 신들과 악마들의 장대한 대결을 묘사하는 영웅신화풍 판타지로 스케일이 확장된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대립하는 세력들의 충돌보다는 주인공의 자아 탐구와 과거 회복에 더 무게를 두고 스토리를 전개해나가기 때문에 어찌 보면 한때 유행했던 구도 소설을 보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독특한 캐릭터들을 차례로 등장시켜 흥미로운 로맨스와 배틀액션 구도를 보여주긴 하지만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주인공을 다양한 스테이지로 이동시키고 다음 고난을 찾아나서게 하기 위한 디딤돌로써 기능할 뿐이며 그 이상의 의미는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무엇보다도 주인공의 로맨스는 그다지 이루어질 가망이 없는 비극을 향해 움직이며, 주인공 자신이 전투계 캐릭터가 아니라서 배틀 장면은 다른 조연들이 도맡아 하고 주인공은 대체로 다른 곳에서 혼자 별도의 미션을 수행하기 때문에 전투와는 아예 인연이 없다.

이 작품의 본론은 어디까지나 저자의 방대한 자료 조사와 깊은 사색을 바탕으로 전개되는 주인공의 내적 변화와 그에 수반되는 운명의 선택이며 그 외의 내용은 필요 최소한으로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좀 더 외향적이고 역동적인 스타일의 판타지를 선호하는 독자들에게는 다소 읽기 버거울지도 모르겠다. 비유하자면 뭔가 프리츠 라이버스럽게 시작해서 클램프와 톨킨이 어우러진 형태로 나아가더니 결론은 뜬금없게도 어슐라 르 귄스럽게 끝났달까.

중심이 되는 인물은 인도 신화의 삼위일체라 할 수 있는 브라흐마, 비슈누, 시바의 3인으로, 이야기의 초점은 특이하게도 3인 중에서 가장 인기가 떨어지는 브라흐마에 맞춰져 있고, 시바는 그를 이끄는 그림자 주역으로 기능하며, 비슈누는 그다지 큰 역할을 하지 못한 채 끌려다니는 모습만 보여준다. 특히나 ‘창조’의 속성을 띤 브라흐마는 일단 창조가 끝난 세계에서는 방관자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전통적으로는 ‘수호자’인 비슈누나 ‘파괴자’인 시바가 훨씬 많은 활약을 보여주며 숭배자 역시 더 많은데도, 이야기는 다른 둘을 의식적으로 주변에 머물게 하고 브라흐마의 과거나 그의 선택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

당초의 이야기는 데바(신족)와 아수라(악마족)의 양대 세력이 현대에 부활하여 격돌한다는 극히 단순한 도식을 바탕으로 전개되지만 단의 수행과 브라흐마의 과거 회상이 연속되면서 문제가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이 서서히 드러난다. 수천 년 전, 시바의 아내이자 데바 전원의 정신적 지주였던 파르바티가 아수라와의 전쟁에서 희생된 이래 데바의 세력은 점점 약화일로를 걸었고, 인간들이 더 이상 신에게 의지하지 않고 자기들만의 길을 걷게 되면서 데바의 입지는 더더욱 좁아지게 되었다. 결국 데바와 아수라는 자기들의 존재 자체를 보존하기 위해 협정을 맺고 천계에서의 삶을 포기한 채 인간계로 숨어든다. 데바들은 기억을 봉인한 채 환생을 거듭하며 인간으로서의 업을 쌓아가고, 아수라들은 영원히 기억과 생명을 보존하는 대신 인간의 몸을 도둑질하여 가까스로 명맥을 유지한다.

별 문제 없이 유지되고 있었던 그 균형이 갑자기 위태로워지면서 데바들은 차례로 각성하여 한데 모이고, 아수라들도 그들에게 대항하기 위해 세력을 재정비한다. 오랫동안 유지되어 오던 균형이 이제 와서 깨지기 시작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브라흐마와 관련이 있으리라 짐작되는 주인공 단이 다른 조연들처럼 곧바로 각성하지 못하고 계속 독립적인 인간성을 유지하면서도 브라흐마의 인연을 자석처럼 끌어당기는 사실에는 어떤 비밀이 감춰져 있는 것인가? 이야기는 그러한 의문에 대한 답을 한꺼번에 제시해주는 대신 작은 힌트를 약간씩 드러내 보이면서 점차 인도 신화의 영역을 벗어나기 시작한다. 인간과 신의 관계, 신의 효용성과 존재의의, 숙명론과 자유의지의 대립 등 고대 인도보다는 현대 서구문명의 산물에 더 가까운 철학적 논의를 펼쳐 보이는 동시에, 데바들과 아수라들이 똑같이 두려워하는 ‘종말’의 정체와 그들이 브라흐마를 배신자라고 성토하는 진짜 이유, 그리고 지은의 전생인 아유타와 브라흐마의 가슴 아픈 과거를 마치 추리소설처럼 흥미진진하게 밝혀 나가는 것이다.

이야기의 대부분이 단의 수행과 브라흐마의 과거, 아유타의 비극에 집중되어 있다 보니 다른 캐릭터들의 인상이 상대적으로 옅어지는 것은 문제로 남는다. 위에서 소개한 3명의 신 외에도 다른 중요한 신들이 환생체로 모습을 드러내지만, 그럴 듯한 능력과 역할을 갖추고 제법 활약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각자의 내면이나 사연이 충분히 그려지지 못해서 피상적인 느낌으로밖에 남지 못한 케이스가 너무 많다. 표면상의 악역인 아수라 측에서도 같은 문제가 발견된다. 그나마 단의 주변 인물로 환생하여 나름대로 고초를 겪는 락슈미와 인드라, 그리고 냉랭한 분위기 속에서도 사실은 뜨거운 형제애로 맺어진 스칸다-가네샤 형제는 비교적 나은 대접을 받고 있지만 그 외의 인물들은 정말로 책 덮은 후에는 ‘누가 나왔더라’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비중이 없다. 물론 이야기의 본론인 브라흐마의 고뇌에 집중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겠지만, 다른 신들의 과거 이야기나 현재에서의 개인적인 드라마가 더 보강되었더라면 훨씬 풍부한 이야기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하긴 진짜로 그랬다가는 두 권이 아니라 열 권으로 내도 모자랄 지경이었겠지만.)

그런 가운데서 이채를 띠는 인물이 하나 있는데, 바로 데바도 아수라도 아닌 ‘타리스라다’라는 캐릭터다. 그는 혼돈의 숙명을 타고 난 반인반마의 무성체로, 편의상 아수라들의 진영에 들어가 있지만 사실은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고 어디에서도 안식을 찾을 수 없는 박쥐같은 존재다. 등장 초기에는 단의 앞을 막아서서 온갖 잔인한 흉계와 술수를 휘두르는 대악당으로 그려지지만, 그와 브라흐마가 과거에 같이한 시간, 그리고 그가 마음 속에 품고 있는 진정한 궁극의 목적이 서서히 드러나면서 아유타를 능가하는 비극의 주인공으로 자리잡는다. 신도 악마도 되지 못하고 그렇다고 인간으로도 살 수 없는 저주받은 존재임에도, 그가 작품 속에서 취하는 행동과 언뜻언뜻 내비치는 감정들은 놀랄 만큼 ‘인간적’이다. 어떻게 보면 혼돈을 초래해야 한다는 다르마(의무) 때문에 모든 진실을 처음부터 꿰뚫어보고 있었음에도 그것을 속시원하게 밝히지 못한 채 혼자 속을 태우며 모든 악업을 짊어지고 다른 인물들의 행로를 직간접적으로 이끄는 또 하나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의 의미를 알기 쉽게 요약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겉으로만 보면 ‘자기가 신이라고 주장하는 맛간 초인들과 그들을 신으로 인정하는 유사 좀비들이 사납게 툭탁거리는 가운데 주인공 혼자 고고하게 도만 닦더니 어느 순간에 갑자기 튀어나와 그 모든 분쟁을 철저하게 종결지어버리는, 약간 희한한 판타지’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그 아래에는 세계와 신에 대해서, 그리고 인간 자신에 대해서 끊임없이 고민하는 치열한 의식의 흐름이 펼쳐진다. 이 작품의 정체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필자는 이렇게 답하고 싶다. 상상 이상으로 묵직한 테마를 마치 물에 뜬 빙산처럼 슬그머니 약간씩만 보여주면서 독자를 인간의 내면, 신의 내면이라는 대양(大洋) 밑바닥으로 유혹하는, 은근히 위험스럽지만 그럼에도 사랑스러운 책이라고.

출간 자체는 수년 전부터 기획되고 있었으나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점점 늦어져서 결국 연재된지 십여 년 후에야 책이라는 형태로 다시 빛을 보게 된 작품인 만큼, 저자와 당시 독자들이 갖는 감회도 남다를 것이다. 출판본은 연재본과 비교할 때 기본 골격과 주제 면에서는 큰 차이가 없지만 각종 세부설정이나 스토리의 전개, 인물들의 성격 등이 상당 부분 달라져 있으므로 이미 연재본을 읽은 사람에게도 신선한 감동을 선사할 것이다. 마치 같은 산을 오르더라도 최초로 올라갈 때보다 좀 더 세련되게 경험을 쌓은 가이드를 데리고 훨씬 더 복잡한 길을 거쳐서 등산할 때의 신선함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그런 뜻에서 이 작품은 연재 이후 여러 해 동안 저자가 추가로 쌓은 경험치를 통하여 더욱 숙성시킨 버전인 동시에, 연재 당시부터 변함없는 열정으로 출간을 기다려 준 독자들에게 보내는 하나의 장대한 연서(戀書)라고도 할 만하다. 물론 연재본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읽어도 이해에 큰 무리는 없으며, 오히려 새롭고도 신비한 세계로 안내하는 이정표의 역할을 충실하게 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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