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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프티는 다섯 살
할란 엘리슨, 신해경·이수현 옮김, 아작, 2017년 7월

 

2017년은 SF 팬, 특히 단편 과학소설의 팬에게 만족스러운 한 해였을 것이다. 팬이라면 모를 리 없고 오래 기다렸을 것이며 몇몇은 나온다는 소문만 돌아 애를 태웠던 할란 엘리슨, 제임스 그레이엄 밸러드, 레이 브래드버리, 조지 R.R. 마틴 등 걸출한 작가들의 단편집이 하나도 아니고 복수로 쏟아져 나왔으니(단 밸러드는 한 권짜리).
그 중에서 할란 엘리슨은 공저(앤솔로지)가 아닌 개인 명의의 저서는 국내 최초 출간인데 한 권도 아니고 무려 세 권이 동시에 나왔다는 점에서 특히 놀랍다. 원서는 한 권이지만 분량이 막대하여 분책은 어쩔 수 없어 보이는데, 원서 수록작을 전부 다 실었다는 점도 대단하다. 무엇보다 애초에 원서가 문학상 수상작만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비범하다. 이것이 가능한 작가가 얼마나 될까. 빌보드 차트 1위 곡만 모아도 앨범을 만들 수 있는 비틀스와 마찬가지로 흔하지 않은 업적이리라.

그런 할란 엘리슨이 최근(2018년 6월)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접했다. 레이 브래드버리, 어슐러 K. 르 귄 등과 마찬가지로 처음 존재를 알았을 때부터 늘 생존했던 장수작가였기에 개인적으로 안타까움이 크다. 이 자리를 빌어 명복을 빈다.
그가 남긴 업적은 심지어 악명까지도 워낙 유명하고 단편집 해설에서도 꽤 충실하게 소개했으니 여기서 덧붙일 필요는 없겠지만 이번 단편집의 특징은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원서는 한 권으로 나온 걸작선(정확히는 문학상 수상작품집)인 『The Top of the Volcano』인데 번역본은 세 권으로 나눠 전편을 수록했다. 이럴 경우 보통은 원서를 그저 분량에 따라 자르거나 발표 순서로 싣기 마련인데 이번 선집은 출판사 자체 편집으로 새로 분류했다고 한다. 크게 세 개의 테마에 따라 나눴다고 하며 각자 부제를 붙여서 어떤 기준으로 나누었는지 짐작할 수 있게 했다.
1권은 〈잃어버린 시간〉이라는 부제로 주로 시간을 다루는 작품을 실었다. 「제프티는 다섯 살」처럼 과거에 대한 향수를 담은 단편도 있고 「소년과 개」처럼 미래에 일어날지도 모를 포스트 아포칼립스까지 다루는 등 같은 테마라도 다루는 방식은 다양하다.
1권에서 특히 마음에 들었던 단편들을 뽑아서 소개해본다.

“회개하라, 할리퀸” 째깍맨이 말했다
시간엄수로 상징되는 국가주의와 관료주의, 독재와 통제에 대한 유쾌하고 익살스런 반항. 그러나 결말을 보면 엘리슨의 시니컬한 성향을 엿볼 수 있다.

제프티는 다섯 살
『세계 SF걸작선』에 실려서 많은 사랑을 받았던 그 단편이 정식 번역으로 돌아왔다. 개인적으로도 그때의 감동이 다시금 느껴졌다. 어쩌면 나이가 들수록 더 애절하게 느껴지는 소설일지도 모르겠다.

소년과 개
포스트 아포칼립스 단편을 모은 앤솔로지 『최후의 날, 그 후』에 수록되어 우리나라에서 소개된 단편. 필자는 그 앤솔로지 수록작 중에서 제일 좋았던 단편으로 꼽는다. 스포일러 때문에 자세히 언급하지 못해서 아쉽지만, 초반과 후반과 반전 후의 결말에서 각각 소설의 인상이 크게 바뀐다.

잃어버린 시간을 지키는 기사
이번 걸작선으로 처음 번역 소개된 단편 중에서는 가장 마음에 든다. 엘리슨 답지 않게(?) 거칠거나 막 나가거나 반전으로 뒤통수를 때리지는 않지만, 차근차근 쌓아온 복선을 마지막에 터뜨리는 결말에는 장르소설 특유의 감동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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