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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랜드
샬롯 퍼킨스 길먼, 황유진 옮김, 아고라, 2016년 8월

뒤표지에 있는 용어를 인용하자면 본작은 최초의 〈페미니스트 유토피아〉로 자리매김한다. 여성만 있는 나라 혹은 사회에 대한 기존의 상상은 여성성을 제거하거나 남자가 바라는 여성을 극대화하는 식으로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양쪽 모두 남자가 상상한 여자의 세상이라 할 수 있다.

가령 그리스 신화 속 아마조네스는 성별만 여자이고 기존 남자 전사의 이상과 가치관을 그대로 구현시킨 존재다. 전쟁과 승리만을 추구하는 잔인하고 강인한 종족으로 묘사되고 있다는 점이 그렇고, 활쏘기에 방해되니까 한쪽 가슴을 도려냈다는 묘사가 그 대표적인 예시다. 오늘날까지 여자 궁수들이 가슴을 자르지 않음은 누구나 알고 있다. 이와 함께 아들은 죽이고 딸만 키운다는 점도 남자가 여자에 대해 품은 두려움을 극도로 과장하여 구현한 결과로 보인다.

한편 『서유기』에 등장하는 서량여국, 흔히 여인국이라 불리는 나라도 여자만 사는데 강물을 마시고 임신하는 등 좀 더 독립적인 세상인 것 같지만, 삼장법사가 나타나자 여왕이 반하여 유혹하는 등 남자의 관점에서 만들어진 여자의 세상이다.

또한 덜 알려졌지만 조선 중기 황중윤의 소설 『천군기』에도 여인국이 나온다. 주인공 천군은 어느 나라의 왕인데 타락했고, 이웃 여인국의 군대가 쳐들어와 쫓겨난다. 이후 정신을 차린 천군이 군대를 모아 여인국을 물리치고 나라를 되찾는다는 이야기다. 여기서도 여인국은 젊고 아름다운 여자로 이루어져 있음과 동시에 강인한 전사로 그려지고 있어, 남자가 여자에게 가지는 욕망과 공포를 동시에 구현한 존재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전례를 볼 때 본작은 여성작가가 차별적인 세상에 대한 스스로의 인식을 바탕으로 여성이 바라는 여성만의 세상을 그려냈기 때문에 처음에 인용한 페미니스트 유토피아라는 용어를 쓸 수 있게 된다. 계보로 치면 『이갈리아의 딸들』, 「휴스턴, 휴스턴, 들리는가?」(『체체파리의 비법』 수록)보다 앞서 있으며 그들에게 준 영향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휴스턴, 휴스턴, 들리는가?」(이하 ‘휴스턴’으로 표기)는 본작의 SF 버전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유사점이 많다.

대표적으로 이런 여성의 세상을 관찰자 시점으로 소개하기 위해 주요 등장인물이 남성이라는 점을 들 수 있다. 본작에서는 여성에 대해 각기 다른 관점을 지닌 세 남자, 즉 남존여비 사상에 물든 마초 테리, 친절하지만 여성을 여성스러운 존재로 대상화하는 로맨티스트 제프, 비교적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이성적으로 상대를 대하는 사회학자 밴딕(주인공이자 화자)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야기는 이들 세 남자가 소문으로 듣던 여자만의 나라를 찾다가 비행기 사고 덕분에 우연히 도착하면서 시작한다.

그들 눈에 비친 여자들의 나라는 「휴스턴」에서 여자들만 남은 지구의 모습과 흡사하다. 평화롭고 사회주의적이며 중성적인 느낌이 든다는 점도 그렇다. 남자들이 생각한 이른바 ‘여성스러운(가령 화장과 옷차림에 신경을 쓰고 애교를 부리거나 수다스러운 등) 여자’가 거의 없기에 남자들에게는 중성적이라고 느껴지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여자들을 모두 손아귀에 넣을 거라며 좋아하던 마초 캐릭터의 환상이 금방 깨진다는 점도 비슷하다.

다만 팁트리 주니어는 더 현실적이며 냉철한 시각에서 남자들이 격리되는 결말을 그렸으나 본작에서 남자들은 여자들의 세심한 보호(?) 아래 안전하게 잘 지낸다. 적응을 위해 교육도 받고 조금씩 교류도 늘려가다 마침내 연애와 결혼에까지 성공하게 된다. 물론 이 연애와 결혼이라는 과정은 세 남자가 지내던 이전 사회와는 전혀 동떨어진 방식으로 이루어지긴 하지만, 작가가 지닌 좀 더 온건한 성향을 엿볼 수 있다. 아니, 1800년대 소설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 정도도 당시엔 무척이나 급진적이었을 거라 짐작된다. 팁트리 주니어는 혁명적이었다고 해도 될 정도로 과격하게 밀고 나갔지만.


위에서 언급했듯 ‘이들은 여자도 아니고 중성이다’라는 테리의 발언이 아마도 작가의 주제의식을 표현한 핵심 문장이 아닐까 싶다. 테리와 제프가 도착하기 전에 소문만 듣고 여자뿐인 나라를 상상할 때 그들은 각기 자기들 세상에서 자기들이 본 여성상을 확대해 적용한 나라를 상상한다. 아마조네스든 여인국이든, 모두 남자가 상상한 여자의 세상인 것이다.

그러나 여성운동에 직접 몸담았던 작가가 그린 여자들만의 세상은 남자들만의 세상과도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를 ‘중성’ 세상이었다. 그러면서도 남녀가 공존했던 기존 사회보다 덜 폭력적이고 모성애가 넘쳐 흘러 훨씬 평화롭고 번영을 그린다고 그렸다. 물론 모든 여성들이 종교를 숭배하듯 모성애에 푹 빠졌다는 설정은 고루한 여성상이라고 느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시대의 한계를 100년 이상 앞서간 작품임은 분명하다.

허랜드에서 살면서 밴딕이 깨닫고 테리와 제프가 배운 점은 바로 여성을 자신과 동등한 타인으로 존중하고 대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와 동시에 ‘남자다움’이라는 말 역시 ‘여자다움’과 마찬가지로 편견이 담겨 있으며 자신들도 그로 인한 피해를 받았음을 깨닫는다. 페미니즘 교육을 제대로 받은 셈이다.

허랜드의 비밀을 지키기로 구두로 약속하고 평화롭게 떠나는 결말을 포함하여, 전체 이야기를 큰 충돌이나 갈등 없이 시종일관 원만하고 온건하게 풀어나갔기에 「휴스턴」을 먼저 읽은 독자라면 밋밋하다고 느낄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본작은 1800년대 소설이고 당대에는 이 정도 설정이나 주제도 논란을 일으킬 수 있기에 일부러 이렇게 평화로운 이야기로 만들었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읽고 나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팁트리 주니어는 본작에 대한 반론 혹은 재해석을 하기 위해 「휴스턴」을 썼을지도 모른다고. 어느 한쪽을 읽어본 독자라면 다른 쪽도 읽고 비교해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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