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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그림자 친구

2006.11.05 05:3211.05

그림자 친구

  1.
  소년의 엄마는 미친년이었다. 한 밤중에 소년은 밖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잠에서 깼다. 방문을 열고 나가니 거실에서 엄마가 식칼을 든 채 허공에 마구 휘두르고 있었다. 엄마 뭐해? 엄마는 계속 식칼을 휘두르며 말했다. 훈련해. 소년은 얼빠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니까, 무슨 훈련? 엄마는 차분히 대답했다. 싸우는 훈련. 소년은 기운 없는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그, 그러니까, 무엇과 싸우는 훈련? 엄마는 갑자기 원목으로 만들어진 식탁에 칼을 내리 꽂았다. 오 센티미터 쯤 박혀버린 것 같았다. 보이지 않니. 저기 있잖니. 적. 엄마의 시선이 어디에 닿아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소년은 부지런히 거실을 둘러보았지만, 불이 꺼진 상태라 온통 어둠뿐이었다. 모르겠어. 아무튼 훈련은 그만해. 시끄러워서 잠을 잘 수가 없잖아. 엄마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식탁에 박힌 칼을 빼내서 싱크대 밑에 넣어놓았다. 굿나잇. 엄마는 환하게 웃으면서 안방으로 들어갔다. 소년도 다시 방으로 돌아와서 침대에 누웠다. 왠지 모르게 주위가 서늘했다. 창문 너머에서는 푸른 달빛이 비치고 있었다.
  그때 소년은 보았다. 달빛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가 움직이는 모습을. 가만히 있는 자신과는 달리 달빛 그림자는 천천히 걷고 있었다. 소년은 졸린 눈을 감지 않고 흐릿한 시선을 유지했다. 자신의 그림자는 기묘하게도 벽을 타고 천장을 걸어 다시 바닥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반복. 방안을 쳇바퀴처럼 빙빙 맴돌고 있었다.
  어째서일까. 소년은 문득 창밖에 비친 달과, 스스로 움직이는 그림자를 보며 하늘을 날고 싶어졌다. 소년은 일어나서 그림자에게 다가갔다. 그 순간, 창밖의 달빛은 사라졌다. 그림자도 자연스레 자취를 감췄고 어둠 속에 남겨진 것은 소년 혼자뿐이었다. 창문 너머로 본 달은 새까만 구름에 가려져 있었다. 시시해. 소년은 다시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2.
  소년은 새벽에 일어났다. 창밖으로 햇빛이 조금씩 비치기 시작했다. 그림자가 생기는 중이었다. 가방을 챙겨서 밖으로 나오자, 찬 바람이 불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자신의 그림자가 보였다. 그러고 보니 세상에는 그림자가 참 많았다. 시선이 닿는 곳마다 온통 그림자 투성이었다. 이렇게 그림자가 많았던가? 이래도 되는 건가?
  소년은 왠지 그림자가 너무 많다는 생각을 했다. 말도 할 수 없고, 물건도 들 수 없는 쓸데없는 그림자들이 왜 이리도 많은 것일까? 소년은 전부 없어져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소년은 학교에 가던 걸음을 멈추고 돌연 자신의 그림자를 마주 보았다. 그림자도 소년을 쳐다보았다. 신경전이 펼쳐졌다. 둘 다 눈싸움에서 뒤지지 않았다. 소년은 이 녀석 제법인데, 라고 생각했다. 자신과 이토록 눈싸움에서 기세가 밀리지 않는 녀석은 처음이었다. 인정해주지. 소년은 조그맣게 중얼거리고 그림자에게서 시선을 뗐다. 녀석은 언제까지나 묵비권을 행사할 것 같았다.
  아이들은 항상 똑같았다. 매일 같은 풍경이 반복되는 것 같아서 소년은 지루했다. 게임 이야기나 드라마, 영화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혹은 성적 이야기, 친구 이야기, 이성 이야기. 교실은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 틈새에는 조그맣게 줄어든 그림자들이 소리 없이 구석마다 스며들고 있었다.
  5교시는 미술시간이었다. 갓 부임해서 교생 티가 남아있는 미술 선생님은 자유 주제로 그림을 그리라고 했다.
  소년은 검은색 물감을 물에 탔다. 그리고 새까맣게 칠하기 시작했다. 자신을 닮아 한없이 작고 어리석어 보이는 그림자를 그리고 싶었다. 자화상일지 정물화일지 모를 그림이었다.
  7교시가 끝날 무렵 선생님은 소년을 교무실로 불렀다. 그리고 호되게 혼을 냈다. 너, 나한테 불만 있니? 소년은 고개를 저었다. 까맣게 대충 낙서하면 네가 무슨 예술가라도 될 줄 알아? 소년은 묵묵부답이었다. 내일까지 다시 그려와. 안 그려오면 점수는 없다. 소년은 눈을 치켜 뜬 채 대답했다. 그렇게 하세요. 선생은 황당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뭐? 소년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어차피 제가 가려는 곳은 내신이 안 들어가거든요. 선생님은 기가 막혀서 소년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소년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결국 먼저 시선을 거둔 것은 선생님이었다.
  쉬는 시간 이름밖에 알지 못한 아이가 말을 걸었다. 우리 중학교 때 같은 반이었지? 응. 3년이나. 응. 소년은 계속 응이라는 말로만 대답했다. 너 중학교 때 기억 잘 나? 응. 그 아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난 말이지, 이상하게 기억이 잘 안나. 흐릿하단 말이지. 넌 아니라고? 응. 아이는 계속 당황한 눈초리였다. 마치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대신 산 것 같은 기분이야. 좋으면서도 한 편으로는 기분 더러워. 이런 기분 모르겠지? 응. 소년은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도 아이는 집착하듯이 질문을 던졌다. 왜 그런 걸까? 매일 똑같은 하루였기 때문인가? 별 생각 없이 살아서? 큰 일이 없었기 때문에? 중학생 때의 하루란 누구나 비슷하겠지만, 기분이 나쁜 건 나쁘단 말이지. 소년은 똑같이 단조로운 어조로 대답했다. 응. 너 별로 말하고 싶은 게 없냐? 응. 그래, 알았다. 내가 괜한 걸 물었구나. 하지만 중학교 때 너만은 생생이 기억이 나서. 지금과 똑같으니까. 과거의 연장선이라고 할까? 유일한 실마리라고 할까? 그런 기분이라서 물어봤어. 응. 아무튼 됐어. 곧 기말고사나 준비해야지. 중간이 끝나면 기말이고, 기말이 끝나면 중간이니. 응.

  3.
  방과 후 거리를 걷는 소년은 흠칫 놀랐다. 색이 옅어진 그림자들이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세계가 모두 힘을 잃고 비틀거리는 것 같았다. 소년은 그림자가 모두 없어져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그림자들이 흐려져 가는 모습을 보자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살고 싶어.
  어디선가 들린 목소리. 환청일까? 아니면 누군가 중얼거린 말이 들린 걸까? 어쩌면 그림자가 말을 한 걸지도 모른다. 소년은 어젯밤 그림자가 제 스스로 움직인 것을 떠올렸다. 말까지 한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소년을 조심스럽게 그림자를 쳐다보았다. 놀랍게도 그림자는 움직이려고 했다. 아니,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서서히 팔을 들어 올리며 날개짓을 하듯이 펄럭였다. 그건 마치 하늘을 날아오르려는 몸짓 같았다. 어떻게 보면 소년에게 달려드려는 것처럼도 보였다. 그러나 그림자의 몸부림은 짧았다. 이윽고 황혼이 지며 빛이 사라졌고 그림자 역시 어둠 속에 묻혀버렸다. 학원에 갈 시간이 되었다.
  학원은 지루했다. 모든 아이들이 지루해하고 있었다. 아이들의 표정에는 피곤이 서려있었다. 소년은 건성으로 수업을 들으며 망상에 빠지곤 했다. 어떻게 하면 이 시간을 때울까. 지나칠까. 소비할까. 시간을 생략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누가 나대신 학원을 다녀줬으면 좋겠어. 눈을 뜨는 순간, 이미 집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현실은 시간을 거스를 수도 생략할 수도 없었다. 소년은 착실히 모든 수업을 다 듣고 집으로 귀가했다. 평소라면 수업 때 졸고, 귀가할 때도 망상을 하곤 했다. 소년 나름대로의 시간을 생략하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가끔 망상도 지겨울 때가 있었다.
  소년은 집에 오자마자 컴퓨터를 켰다. 인터넷 서핑은 소년의 유일한 취미였다. 소년은 수십 개의 사이트들을 둘러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잠깐만 한다고 생각해도 순식간에 몇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마지막으로 자주 가던 사이트의 인스턴트 채팅방에 접속했다. 낯선 아이디들만 있을 뿐 주로 대화하던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소년은 컴퓨터를 끄고 잠에 빠져들었다.
  꿈속에서 소년은 하늘을 날았다. 하늘을 나는 꿈은 예전에도 몇 번 꾸었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배경이 현실적이었다. 매일 자신이 걷는 등굣길이나 학원에 가는 길거리들이 실제와 똑같았다. 찬바람의 느낌, 구름의 모습, 시간의 움직임까지.
  새벽이었다. 지평선 너머에서 보랏빛으로 물든 하늘이 보였다. 그 색이 서서히 옅어지더니 짙푸른 색이 드러났다. 이제 어둠은 물러가지만 잘게 나누어진 그림자들이 그 자리를 대신할 것이다. 소년은 호기심어린 눈으로 세상을 지켜봤다.
  빛이 세상을 감싸자, 그림자들이 무수히 늘어났다. 커다란 건물부터 가로수, 벤치, 자동차, 걸어 다니는 사람들. 누구나 그림자를 달고 다녔다.
  소년은 더 가까이서 보려고 지상으로 다가갔다. 사람들은 소년이 보이지 않는지 아무도 소년을 신경 쓰지 않았다. 소년은 자유로운 기분이 되어서 마음껏 날아다녔다. 학교 옥상까지 순식간에 날아가는 가하면, 집 앞에 내려서 자신의 집을 관찰하기도 했다. 그러다 문득 더 먼 곳으로 날아가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디로 갈지 정하지도 않은 채 소년은 무작정 방향을 정해서 날아가기 시작했다. 바람을 가르는 기분은 상쾌했다. 무한히 펼쳐진 하늘을 마음껏 날았다. 낯선 도시가 보이자 소년은 허공에 정지했다. 발아래에는 수많은 건물들과 사람, 그리고 그림자들이 펼쳐져 있었다. 소년은 또다시 지상을 향해 다가갔다. 그 순간, 갑자기 바람이 사라지면서 그림자들이 일제히 일어났다.
  실체화된 그림자들이 사방에서 솟구쳐 올라 소년을 향해 쇄도했다. 소년은 도망가려고 했지만 몸이 무거웠다. 그림자들은 빨랐고 소년은 느렸다. 온 몸이 기분 나쁜 그림자들에게 묶여버렸다.
  소년은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깨어났다. 방은 고요했고 어두웠다. 그림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소년은 안도하며 다시 눈을 감았다.

  4.
  딩동.
  현관문의 벨소리가 들렸다.
  딩동. 딩동. 딩동. 쾅! 쾅! 쾅!
  이 늦은 시각에 예의 없이 벨을 누르며 문을 쾅쾅 차는 놈은 아버지였다. 소년은 벨소리가 너무 시끄러웠기 때문에 억지로 일어나서 거실로 나왔다. 거실에는 엄마가 식칼을 휘두르며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마침 텔레비전에는 아동심리학자인 아버지의 인터뷰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아이들에게 좋은 아버지가 되려면, 항상 반듯한 모습을 유지해야 합니다. 약점을 보이면 지는 겁니다. 아이들을 사랑으로 감싸야 합니다. 어려운 것 같습니까? 쉬워요. 대화를 하면 됩니다. 같은 입장에서 대화만 나눈다면, 모든 불화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죽여야 합니다. 자신을 내세우지 마세요. 상대방의 그림자가 되듯이 스며든다고 생각하세요.
  현관문이 열리면서 술 냄새가 거실을 뒤덮었다. 이 자식! 뭐하고 있어! 아버지가 화통 같은 목소리로 소리친다. 아무 것도요. 자려고요. 이 새끼, 지 애비가 왔는데, 나와 보지도 않고 쳐 자고 있어? 아뇨. 나가보려고……. 어따 대고 말대답이야! 버릇 없어가지고! 네가 이래가지고 내 아들이라 할 수 있어! 어디서 개망신을 주려고! 맞아야 정신을 차리지! 소년은 몸을 웅크렸다. 소나기 같은 구타가 이어졌다.
  소년은 정신없이 맞으면서 옆을 바라보았다. 형광등으로 만들어진 옅은 그림자는 소년처럼 작게 웅크리고 있었다. 꿈틀거리면서 맞고 있었다. 너도 나와 같구나. 소년은 서러운 외로움을 느꼈다. 구타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다시 옆을 보자, 자신과 닮았지만 훨씬 큰 그림자가 자신의 작은 그림자를 밟는 게 보였다. 언젠가 내 그림자도 자라면 저 그림자와 같아지겠지.
  두 팔로 얼굴을 가리고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시야는 어두웠고 통증도 어느새 느껴지지 않았다. 소년은 이상했지만 납득했다. 소리까지 거짓말처럼 지워진 이후에도 소년은 모든 걸 납득했다.
  잠시 후 엄마가 허공에 칼을 휘두르다가 아버지의 팔을 베었다. 아버지는 소년에게 화를 낸 것처럼 화를 내며 엄마를 구타하기 시작했다. 엄마는 칼을 놓치자 알 수 없는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소리가 들리지는 않지만, 엄마의 손짓을 보며 소년은 그 소리가 마치 아프리카 오지 속 원주민들이 축제 때 외치는 소리 같다고 생각했다.
  
  5.
  소리가 지워진 세계에서 소년은 컴퓨터를 켰다. 이번에는 채팅방에 사람들이 있었다. 익숙한 아이디가 두 명이나. 그들은 다양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아찔한 소녀>라는 아이디를 가진 사람은 원조교제를 하고 있다고 했다. 이미 천 명에 가까운 수의 원조교제를 했다고 한다. 요즘은 경기가 나빠서 수입이 좋지 않다고 투덜거렸다. <가이드맨>이라는 남자는 자살 사이트의 운영자였다. 그는 그 동안 천 명에 달하는 사람들에게 자살을 안내해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자신은 영원히 살고 싶다고, 죽기 싫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소년은 그들과는 달리 그 어떤 특색도 없었다. 아이디도 단순히 <소년>일 뿐이었다. 난 도대체 뭘까. 소년은 자신이 가진 특징을 생각하려고 했지만, 떠오르는 게 없었다. 외모도, 성적도, 재산도 평범했다. 부모는? 엄마는 미친년이고, 아빠는 개자식이니까. 미친 개새끼 정도는 될지도.
  그러다 소년은 모니터 불빛으로 만들어진 그림자를 보고 생각했다. 자신에겐 특별한 그림자가 있었다. 그 누구와도 다른 특징이며 개성이었다. 아이디가 평범하다고 바꿔보라는 사람들에게 소년은 가까스로 생각해낸 특징을 말했다. 제 그림자는 스스로 움직여요. <아찔한 소녀>가 대꾸했다. 그럼 피터팬은 어떨까요? 피터팬처럼 그림자가 스스로 움직이잖아요. 소년은 자신의 새로운 아이디가 마음에 들었다. <피터팬>. 소년은 한 글자 씩 입에 담으며 탄성을 내질렀다. 피… 터, 팬!
  <가이드맨>이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바꿨다. 그들은 주로 세계정세나 경제 같은 문제를 이야기하곤 했다. 때로는 그 이야기들이 겹치기도 했다. <가이드맨>은 예전에 이라크 전쟁 발발 전에 미국의 군수 기업들에게 주식을 투자했다. 전쟁이 벌어질 거라고, 블러드 머니를 벌게 될 거라고 말했다. 소년은 21세기에 전쟁 같은 비현실적인 일이 벌어질 거라곤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예상대로 전쟁은 일어났고 수많은 사람이 죽으면서 돈으로 변해 <가이드맨>의 호주머니로 들어갔다.
  북한의 핵무기 보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가이드맨>의 질문에 <아찔한 소녀>가 대답했다. 벌써 북한은 핵보유국이라고 평양 시내 곳곳에 광고를 한다지 뭐예요? 아무튼 우스워요. 사실 정도 CIA가 5년 전에 예상했던 것처럼 북한의 정치적 생명력을 짧게 봤지만, 역시 꽤 질긴 목숨이지 않겠어요? 이러니저러니 해도 한 동안은 소란만 일어나겠죠. 소년에게도 질문이 돌아왔다. 평소에 소년이라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넘겼겠지만, 오늘만은 달랐다. 더 이상 눈팅만 하던 평범한 소년이 아니었다. 이제 나는 하늘을 마음껏 나는 <피터팬>이다! 소년은 자신 있게 키보드를 두드렸다. 북한은 마치 그림자 같아요. 그래서…….

  6.
  언제부턴가 소년은 소리가 지워진 세계에 살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한 예전보다 한층 어두워진 세계라는 것도. 잠자리에 들어 다음날이 되자, 세상은 줄곧 어두웠다. 형체를 분간하기에는 어렵지 않았으나 어색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리고 소년은 깨달았다. 일상 또한 바뀌고 있음을. 그림자처럼 말이 없이 구석진 곳에 앉아만 있던 소년의 일상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먼저 반 아이들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아이들은 의아해하면서도 곧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함께 했다. 소리가 지워진 세계에서 소년은 마치 무언극을 하고 있는 듯했다.
  언제부터 변화가 시작된 건지는 소년도 알 수 없었다. 개자식에게 맞을 때였을까, 아이디가 바뀐 때였을까, 아니면 그보다 한참 전 인걸까.
  방과 후에도 바로 학원에 가지 않고 아이들과 축구도 했다. 학원에 갈 때는 혼자 간 게 아니라 같은 학원에 다니는 여자아이와 같이 갔다. 여자아이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걷는 일은 처음이었다. 집에 와서는 예습, 복습을 하고 일찍 잠에 들었다.
  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소년은 아이들 틈에서 해맑게 웃으며 대화를 나눴다. 누가 봐도 소년은 그 사이에서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수업을 들을 때도 잠시도 한 눈을 팔지 않고 수업에 집중했다. 선생님들은 하나같이 소년의 눈빛이 바뀌었다고 칭찬했다.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림자 같이 말없던 소년이 갑자기 빛나는 존재가 된 것에 대해서.
  소년은 이번에도 여자아이와 하교를 같이 했다. 여자아이는 시종일관 예쁘게 웃었다. 시덥지 않은 얘기에도 쉽게 웃음을 터트렸다. 환한 웃음이 눈부실 지경이었다. 소년은 그 웃음을 더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일요일에 영화 볼래? 여자아이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두 사람의 입가에는 똑같은 미소가 그려졌다.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정말 시간이 생략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일요일이었다. 소년은 여자아이와 영화를 보고 나서 카페에 들어갔다. 영화관 근처에 있는 카페라 그런지 빈자리를 찾기 힘들었다.
  뭐 마실래? 여자아이는 잠시 고민하더니 대답했다. 카페 모카. 소년은 카푸치노와 카페 모카를 주문했다. 이윽고 두 사람은 영화 얘기를 나눴다. 주위는 조용한 편이었다.
  카페 모카를 몇 모금 마신 여자아이는 눈을 내리깔았다. 소년의 시선을 회피하는 것만 같았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여자아이는 안절부절 하지 못했다. 괜스레 테이블보를 만지거나 머리를 꼬거나 찻잔만 바라보았다. 입을 앙 다문 채. 우물쭈물하는 몸짓.
  소년은 여자아이 옆자리로 가 순식간에 입을 맞췄다. 여자아이가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소년은 여자아이의 그림자를 쳐다보았다. 백열등으로 만들어진 여자아이의 그림자는 파르르 떨고 있었다.
  우리 사귀자. 소년의 말에 여자아이는 고개만 주억거렸다. 볼엔 홍조를 띠고 있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앉은 채, 커피를 다 마실 때까지 잡담을 나눴다. 이야기가 길어져 해가 질 무렵이 돼서야 두 사람은 카페에서 나왔다. 소년은 여자아이를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7.
  집에 돌아온 소년은 공부를 하다가 문득 여자아이의 입술이 떠올렸다. 그러나 부드러운 감촉은 잘 떠오르지 않았다. 마치 자신이 한 게 아니라 본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생각해 보니, 자신의 몸은 떨리지도 않았던 것 같았다. 왜 그랬던 걸까. 거실로 나와 냉장고에서 찬 물을 꺼내 마셨다. 머리가 맑아져도 시야는 아직도 어두웠고, 소리 역시 들리지 않았다.
  냉장고 불빛에 거실 바닥에 남은 핏자국이 드러났다. 엄마의 식칼이 아버지의 팔을 베었을 때 흐른 피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요즘 통 엄마와 아버지를 보지 못했다. 소년은 소리  뿐만 아니라 그 둘까지 지워졌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어쩌면 그 날, 두 사람은 칼부림을 하다가 전부 죽어버린 것은 아닐까. 그래서 그림자조차 남지 못하고 재가 되어 사라져 버린 것은 아닐까. 그리고 또 어쩌면 자신도 그 날 죽어서 지금은 그림자만 남아버린 것은 아닐까. 지금의 자신은, 사실 소년이 아니지 않을까.
  소년은 혼란스러웠다. 자신이 자신인지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소년은 그림자를 떠올렸다. 그림자가 있다면 자신이 증명될 것이다. 왠지 요 며칠 새 자신의 그림자를 본 기억이 전혀 없었다. 여자아이의 그림자를 확인할 때도 자신의 그림자는 보지 않았다. 왜 그랬던 걸까. 그건 그림자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소년은 방안으로 들어와서 불을 켰다. 형광등 빛에 비친 그림자가 선명하게 보였다. 소년은 자신의 그림자를 노려보았다. 그림자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소년은 <그림자>가 되어 소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림자>는 소년이었다. 소년은 <그림자>였다. 소년은 자신을 대신해줄 수 있는 존재는 그림자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림자는 <소년>을 대신했다. 교대가 이루어졌다. 왜 그랬던 걸까. 소년은 자신이 피터팬이 아니라 결국 피터팬의 <그림자> 밖에 되지 않았음을 알았다.
  늦은 시각이었다. 소년은 침대에 누워서 잠이 들었다. 그러나 소년이었던, 이제는 <그림자>인 <소년>은 잠을 잘 수 없었다. 이대로 소멸되는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건 어둠이 자신의 몸을 물들이 때 더욱 심해졌다. 인지하지 못할 땐, 그림자가 대신한 자신을 보고 있었기에 알 수 없었다. 인식한 순간, 소년은 이제 더 이상 하나가 아니었다.
  <그림자>는 따로 움직일 수 있었다. <소년>은 고심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바란 결과가 아니던가. 이대로 편하게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 이 세상에서 오직 자신의 그림자만이 자신을 대신해 줄 수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림자가 자신의 모든 것을 대신해 주고 있었다. 이것이 끝내 자신이 바라던 꿈같은 삶. 소년이 원하던 인생. 그림자를 닮은 <소년>은 마침내 진짜 <그림자>가 되었고, <소년>의 삶을 동경했던 그림자는 지금 소년이 되었다.

  8.
  교환? 하지만 왜 꼭 그래야 하지? 소년은 의문을 가졌다. 어두운 시야 속에서도 밝게 빛나던 여자아이의 미소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느끼지 못했던 입술의 감촉이 입가에 간지러움처럼 맴돌았다.
  누군가 대신한다. 자신의 삶을 편하게 지켜보기만 한다. 이것만큼 좋은 게 또 있을까. 하지만 소년은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이전의 그림자 같은 자신의 삶 또한 나쁘지 않았다. 어떤 삶이든 해답을 찾아 가는 건 자신이다. 지금까지 그러지 않았다고 해서 앞으로도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 체념이 올 때도 있지만, 변덕쟁이처럼 때론 발광을 하는 것이 사람이다. 그래서일까. 소년은 지금 상황에 납득하면서도 울분을 느끼면서 탈출을 결심했다. 어떻게든 해야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소년의 몸으로 들어가 보려 했지만 실패했다. 그림자가 몸에 스며드는 일은 없으니까.
  우선 몸에서 떨어져야 해. 피터팬의 그림자는 웬디가 재봉질을 했지. 그렇다면 아마 가위로 자를 수도 있겠지. 소년은 가위를 찾았다. 그걸로 소년의 몸과 그림자를 떼어냈다. 자유의 그림자가 된 소년은 우선 방구석을 돌아다녔다. 벽을 타고 천장을 걸어 다시 바닥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반복. 방안을 쳇바퀴처럼 빙빙 맴돌았다. 신기했다. 그림자는 무척 가벼웠기 때문에 하늘을 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소년은 창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밖은 밤이었기 때문에 온통 새까맸다. 가뜩이나 시야가 어두워진 소년은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겨우 한숨을 돌릴 때는 가로등 불빛이나 24시간 편의점, 포장마차 등이었다. 다행히 번화가에 이르자, 수많은 그림자들과 마주칠 수 있었다. 그림자들은 대부분 말수가 적었기 때문에 시장통 같이 번화한 거리에서도 그림자들은 말없이 눈짓만 주고받고 있었다.
  소년은 침묵의 거리에서 결국 용기를 내서 말을 걸어보기로 했다. 저기, 그림자와 전환된 사람이 어떻게 다시 제자리로 갈 수 있는지 아시나요? 소년이 붙잡은 그림자는 커다란 덩치를 가진 신부의 그림자였다. 제자리라는 건. 누구의 제자리인가? 나의 제자리라면 여기일세. 자네의 제자리라면, 내가 알 수 있을 리 만무하지. 제자리라는 건 결국 스스로 있을 자리일 텐데, 그걸 어찌 타인이 알 수 있단 말인가? 소년은 혼란스러웠다. 그럼 제자리를 모르는 사람은 영원히 제자리로 이를 수 없단 말인가요? 그림자 세계를 지배하는 그림자에게 물어보게나. 어디에 있죠? 어디에 있다니. 어느 곳에나 다 있다네. 지금 이곳에도 있지. 소년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에 있는 그림자들 말고 그림자들의 지배자가 있다고요? 모든 그림자들은 빛이 비추지 않음에 생겨나지. 이 밤. 이 지구의 반을 뒤덮은 어둠은 그림자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소년은 그제야 이 모든 곳을 뒤덮고 있는 어둠이, 별의 그림자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소년은 어둠에 자신의 그림자를 맡겼다. 이제는 더 이상 두려움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둠의 정체를 알게 되자, 두려움보다는 편안함이 느껴졌다. 묻고 싶어요. 이 그림자 세계에서 빠져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별의 그림자가 말했다. 그림자가 되고 싶지 않을 바에야 빛이 되면 되겠지. 명쾌하지만 무책임한 답변이었다. 빛이 될 수 없다면요? 그럼 빛 속에 있으면 되겠지. 빛은 어디에 있죠? 어디에나, 누구에게나, 있겠지. 소년은 자신을 대신한 그림자를 떠올렸다. 어딘가 빛나고 있는 것 같아서 마치 자신이 아니었던 것처럼 보였던 녀석. 마음에 안 들어. 소년은 자신의 그림자가 뿜어낸 빛이 싫었다.
  소년은 정처 없이 걸었다. 어차피 세계는 밤이었기 때문에 별의 그림자는 어디로 가든 있었다. 사실 있든 없든 상관도 없기도 했다. 대답을 해주기는 하나, 영 성의가 없었다. 이래가지곤 아무리 그림자 세계의 지배자라고 해도 그림자는 결국 그림자일 뿐이라고 소년은 생각했다. 그 사이에 소년은 낯익은 집 앞에 도착해 있었다. 낮에 봤었던 집. 여자아이의 집이었다. 그림자는 어디든 갈 수 있었기 때문에 소년은 여자아이의 집에 무단으로 침입했다. 방은 온통 어둠이었다. 소년은 온 집안을 뒤진 끝에 2층에 있는 여자아이의 방을 찾아낼 수 있었다. 여자아이는 곤히 자고 있었다. 그 옆에는 여자아이가 무서워서 켜둔 스탠드 불빛으로 만들어진 미세한 그림자가 꿈틀 거리고 있었다. 안녕? 소년은 인사를 건넸다. 그림자 소녀는 깜짝 놀란듯했다. 누구? 소년은 달리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난 나야. 그림자는 아닌데, 지금은 그림자야. ……. 소녀는 어이가 없는 듯 말이 없었다. 소년은 황급히 말을 수습했다. 아무튼 설명하기가 복잡해. 하여간, 날 도와줄 수 있겠어? 소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왜? 소년은 이번에도 마땅히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넌 정도 없어? 소녀는 고개를 까닥였다. 없어. 그림자가 그런 게 있을 턱이 없잖아. 소년의 그림자는 소녀의 그림자에게 손을 뻗었다. 있어도 상관없잖아. 도와줘. 지금 내 빛은 너 뿐이야. 소녀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쉬더니 오히려 소년의 팔을 잡아끌고 어디론가 가기 시작했다. 야, 어디가? 소녀는 말없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소년을 바라볼 뿐이었다. 소년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소녀를 따라갔다. 두 그림자는 순식간에 집을 빠져나와 길거리에 도착했다.
  소녀는 소년의 손을 잡고 달렸다. 아니, 날았다고 하는 게 정확한 표현일지도 몰랐다. 두 그림자는 빛의 속도로 거리를 이동하고 있었다. 가로등 사이를 빠르게 스쳐지나가는 그림자. 가로등마다 두 개의 작은 그림자들이 나타났다 사라지고 있었다. 짧은 시간 동안 수십 킬로미터를 이동한 두 그림자는 이내 바닷가까지 도착했다.
  어둠에 잠긴 바닷물이 파도를 치며 넘실거렸다. 압도적인 광경이었다. 시야를 뒤덮은 곳 전부 어둠과도 같은 물이, 파도가, 바다가 모든 걸 뒤덮어버릴 것 같았다. 세상이 모두 어둠 속에 잠겨 영원히 빛을 잃어버릴 것 같았다. 캄캄했다. 밤하늘의 별빛조차 초라해보였다. 막막했다.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일까. 이제 어디로 가도 어둠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여기가 세상의 끝이 아닐까. 소년은 하염없이 바다만 쳐다보았다. 그러자 소녀의 손이 등에 닿았다. 소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소년은 바다 속으로 풍덩 빠져버렸다. 소녀는 곧바로 소년을 따라 바닷물 속으로 들어갔다. 두 그림자는 수면 위에 비친 달그림자를 타고 바다 위를 질주했다.
  두 그림자는 바다 한가운데에 이르렀다. 대서양일까? 태평양일까? 주위는 대륙도 섬도 보이지 않았다. 무서웠다. 혼자 있는 방안은 편안하고 즐겁지만, 무한히 넓은 것 같은 바다 한 가운데는 심장이 멎을 것처럼 무서웠다. ‘나’라는 존재가 지워질 것 같은 두려움. 소년은 망망대해에서 소리 없이 떨고 있었다.  
  소녀는 소년을 심해로 끌어들였다. 물속에도 그림자가 생겼다. 바다 속 깊은 곳, 햇빛조차 스며들 수 없는 곳에서는 스스로 빛을 내는 발광생물들이 살았다. 심연 속에서 두 사람은 바닥이 보이지 않는 바다 속으로 끝없이 내려갔다. 소년은 그대로 기절하는 줄 알았다. 사실 심해만 아니었다면 기절했을 지도 몰랐다. 그러나 엄청난 수압과 빛이 없는 캄캄한 암흑 속에서는 버티는 게 고작이었던 것이다. 정신을 잃는다면, 그림자는 그대로 암흑 속에 갈갈이 찢겨 존재 자체가 사라졌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가까스로 버티던 도중에 갑자기 차가운 대기가 느껴졌다. 그 순간, 소년은 주위가 심해 속이 아니라 성층권을 넘어선 지구 밖 우주라는 것을 깨달았다.
  심해가 우주와 연결되어 있었던 걸까. 어느새 우주가 눈앞에 펼쳐졌다. 매일 올려다보던 밤하늘과는 전혀 느낌이 달랐다. 말 그대로 다른 차원이었다. 새까만 우주와 촘촘히 박힌 무수한 별들, 그리고 발아래 영롱하게 빛나는 푸르른 지구까지. 이런 걸 실제로 볼 수 있다니! 소년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소녀가 말했다. 이 무한히 넓은 우주도 그림자야. 빅뱅이라 불린 빛의 탄생과 더불어 무서운 속도로 팽창한 검은 우주는 빅뱅의 그림자였지. 지금도 계속 자라고 있는 그림자야. 빛이 그 세기를 더할수록, 그림자도 점점 커지는 거야. 소년은 그제야 소녀가 왜 우주까지 나왔는지 알았다. 이 세계는 그림자로 뒤덮여 있다. 이 우주라는 그림자로 뒤덮여 있는 그림자 세계에서 빠져나오려면, 지구에 있어서도 안 되고, 우주에 있어서도 안 된다. 우주 너머에 있는 태초의 빛으로 가야한다. 이 우주라는 그림자를 만들어낸 본질인 빛 속에 있어야만 그림자 세계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세계의 이면, 참된 진짜 원세계로 가야만 한다. 소년은 신이 났다. 소녀는 까르르 웃었다. 두 그림자는 손을 맞잡고 우주를 가로질렀다. 달을 지나, 화성을 지나, 목성, 토성을 지나 태양계를 뛰어넘었다. 백여 개의 항성들을 지나쳐 우리 은하를 관통하고, 안드로메다 은하를 스쳐가 은하가 모인 은하군, 은하군이 모인 은하단, 은하단이 모인 초은하단, 초은하단이 모인 우주를 꿰뚫었다. 암흑 속 빛의 나선들이 춤을 추듯 움직였다. 그림자들도 따라서 춤을 췄다. 두 그림자는 왈츠를 추면서 우주를 여행했다. 어디선가 빛이 새어나오는 듯했다. 끝에 다다른 것일까. 그림자 세계가 아닌 빛의 세계에 도달한 것일까. 빛이 강해질수록 그림자는 옅어졌다. 흐릿해져 가면서도 두 그림자는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태양을 향해 날아간 이카루스처럼 그림자들은 빛 속에 뛰어들었다. 빛은 모든 그림자를 지워버렸다. 온 세상 소리가 일시에 깨어났고 세계는 찬란히 빛났다.

  9.
  소년은 잠에서 깼다. 왠지 모르게 아침부터 기분이 상쾌했다. 소년은 일어나자마자 거울을 찾았고, 전신을 비쳐보았다. 어제와 하나도 달라 보일 것 없는 몸이었다. 다만 빛나던 눈동자만은 다시 빛을 잃고 침울하게 가라앉았다. 어둠이 짙어졌다.
  소년은 다음에 그림자를 관찰했다. 그림자는 소년을 따라 소름이 끼칠 정도로 똑같이 움직였다. 소년은 놀라지 않았다. 그림자가 움직이는 것은 당연하니까. 그러니까 놀랄 필요는 없다. 괴상한 요가 동작까지도 전부 따라하는 그림자를 보며 새삼스레 대단하다는 생각을 한 소년이었지만, 애써 놀란 기분을 가라앉혔다. 사실 소년은 이상한 자세를 유지해서 그림자에게 벌을 줄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자기가 너무 힘든 나머지 그만두기로 했다. 게다가 이제 곧 학교에 갈 시간이었다. 거실로 나가자 칼을 휘두르고 있는 엄마가 보였다. 소년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림자였을 때는 못 봤던 엄마가 아직도 살아있다는 것이 왠지 안심이 되었다. 정신이 나간 미친년이라도 좋았다. 살아있어서 다행이야. 엄마가 왜 정신이 나갔는지 몰랐기에 어떻게 치료해야 할지는 알 수 없었다. 언제부턴가 술만 먹으면 처자식을 패는 아버지 때문인지, 아니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인지. 어쩌면 엄마도 그림자와 자신을 바꿨을 지도 모른다. 엄마가 말하는 적이란 자신일까, 아버지일까, 그림자일까. 아버지는 평소처럼 보이지 않았다. 소년은 이대로 그림자처럼 눈에 띄지 않으면 편하겠다고 생각했다.
  아침을 거른 채 등교하자, 교실은 이미 꽉 차 있었다. 아이들은 여느 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떠들고 있었다. 곧 담임선생님이 아침 조회를 하기 위해 들어왔고 아이들은 제자리를 찾아 앉았다. 소년은 따분한 눈초리로 이 모든 모습을 지켜보았다. 쉬는 시간이 되자 떠들썩한 아이들은 소년에게도 말을 걸었다. 그러나 소년은 온통 자신이 잘 보지 않는 드라마 이야기나 자신이 해보지 않은 게임 얘기라 끼어들 수 없었다. 점심시간이 지난 이후로 소년은 예전처럼 반의 그림자가 되었다. 아이들은 소년이 있는 듯 없는 듯 대했고, 소년은 구석진 자리에서 조용히 만화책을 읽거나 망상에 빠졌다.
  하교 시간. 귀가를 서두르는 아이들 사이로 소년은 느긋하게 가방을 정리하고 교문을 나섰다. 해가 지고 있었다. 옅은 자신의 그림자가 제법 늠름한 모습으로 따라오고 있었다. 소년은 왠지 괘씸한 느낌을 받아서 그림자를 밟아보려 했다. 그러나 아무리 재빨리 발을 놀려도 자신의 그림자를 밟는 것은 불가능했다. 소년은 금세 포기하고 그림자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고얀 녀석. 그림자도 따라서 소년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소년이 다시 한 번 발을 쳐드는 순간, 소년의 그림자가 빨간 운동화에 밟혔다. 소년은 고개를 들어 운동화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소년과 같이 하교를 하던 여자아이가, 소년과 입맞춤을 했던 여자아이가 해맑게 웃으면서 서 있었다. 뭐 해? 소년은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림자밟기. 동시에 소년의 발 역시 여자아이의 그림자를 밟았다. 여자아이가 살짝 한쪽 눈을 찡그리며 말했다. 아이, 아파라. 까르르. 그러고 보니 나 어제 이상한 꿈 꿨는데. 네 꿈 꿨어. 아니, 아닌가. 그게 말이지. 모습이 흐릿했어. 나 아직 네 모습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나봐. 소년은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아냐. 제대로 기억하고 있어. 해가 빠르게 지고 있었다. 두 사람의 그림자는 차츰 길어지다가 어느새 두 사람의 발끝으로 사그라 들었다. 그 때까지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그림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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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시간 새벽 5시 30분. 곧 있으면 해가 뜨고 또 세상에는 그림자들이 넘쳐나겠지요. :D

잘 쓰지도 못한 글을 또 개작한다고 이 시간까지 붙들고 있네요. 이러게 처음부터 잘 쓸 수 있으면 좋았을 걸.(ㅠ.ㅠ) 여러 문제점들이 있어서 이곳에도 몇 분 올렸다가 지우고 계속 수정한 끝에 이제야 올립니다.^^

이제 또 새로운 글쓰기 시작입니다. 이번에는 이 글만큼 엄청나게 개작하는 글은 나오지 말아야겠죠.ㅇ_ㅇ


ps: 11월 7일. 오후 9시 30분. 추가로 오타 수정 및 내용을 조금 수정했습니다. 문장 고친 것 하고, 엔딩에 언급이 안되던 부모님 언급 추가했습니다.
댓글 1
  • No Profile
    chrimhilt 06.11.17 18:58 댓글 수정 삭제
    소년의 예술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미술선생님이군요. 왜 이렇게 칠했는지 이유라도 물어봤으면 좋았을 텐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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