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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화분

2006.10.28 18:4410.28

화분

“아버지는 식물들이 자랄 수 있는 환경에 대해 연구 중이야.”
도니의 아버지는 식물학자였다. 나는 도니의 집에 놀러가기를 좋아했는데, 그 이유는 집 안 곳곳에 생전 본 적도 없는 신기한 꽃들이 고개를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 식물에 관해 도가 튼 도니에게 설명을 들으며 그것들을 감상하곤 했다.
“특정한 토양에서만 자라는 식물들은 키우기가 까다롭지. 그래서 아버지는 그 식물에 환경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직접 만든 환경에서 자랄 수 있는 식물을 개발하고 있단다.”  
예를 들면, 하고 도니가 말했다.
“심지어 아버지는 시멘트에서도 잘 자랄 수 있는 식물을 개발하기도 했어.”
나는 꽤나 재밌는 연구라고 생각하며 거실에 늘어서 있는 화분들을 둘러보았다. 도니의 아버지는 아주 유쾌한 사람이었다. 그는 가끔 낮에도 집에 있는 자신의 연구실에 있었는데, 나를 보게 되면 재미있는 식물에 관한 전설을 들려주기도 했다. 특히 여러 이름 중의 하나인 아도니스 꽃의 전설을 들으며, 그 붉디붉은 빛깔의 꽃잎을 한동안 매료되었다. 아도니스가 죽으면서 흘린 피가 변한 것이라는 말에 그 꽃잎이 핏빛이라고 생각됐다.
“얘는 에키네시아라고 하는데 참 모양 특이하고 예쁘지. 혈액정화에 아주 좋대.”
도니가 화분을 가리키며 말을 계속했다.  
“먹으면?”
내 물음에 도니는 먹으면, 이라고 짧게 대답했다. 도니는 밖에서 놀 때와 비교하면 자신의 집에서만큼은 꽤 말을 많이 하는 편이었다.
“저건 뭐야?”
나는 거실 창가 앞에 놓여 있는 커다란 화분을 가리키며 물었다. 전에는 본 적이 없었던 꽃이었다. 그 꽃잎은 정말 피를 머금은 것처럼 선명한 붉은 빛을 뿜고 있었다. 어찌 보면 아도니스 꽃과 비슷한 색이면서 훨씬 더 묘한 붉은 빛을 띠고 있었고, 모양은 방금 본 에키네시아와도 흡사했다.
“응?”
도니는 조금 놀라더니 이내 그 화분을 슬픈 눈으로 바라보았다.
“얼마 전, 우리 토토가 어디론가 없어졌을 때 말야. 내가 너무 슬퍼하니까 아버지가 선물이라며 나한테 줬어. 그래서 내가 키우고 있는 거야. 토토라고 부르면서.”  
토토는 도니가 키우던 작은 개였다. 나 역시 무척이나 귀여워하던 녀석이었는데, 며칠 전 줄만 남긴 채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너희들 이제 좀 나가서 놀지 않을래?”
도니의 엄마가 부엌에서 나오면서 말했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차가웠다. 도니의 엄마는 아빠의 일에 대해 항상 불만을 토로했으며 거실을 차지하고 있는 화분들을 경멸했다. 그랬기 때문에 도니까지 식물에 관심을 보이는 것을 끔찍이도 싫어했다.  


며칠 뒤에 다시 만난 도니는 뭔가 이상했다. 얼굴에는 슬픈듯하면서도 두려운 기색이 스쳤다. 우리는 롤러를 탔고, 도니는 내내 말이 없었다. 날이 어둑해지고 집에 돌아가야할 시간이 다가왔을 때 도니가 입을 열었다.
“얼마전에 말이야.”
도니는 차마 입을 떼기가 힘겨워 보였다.
“엄마가 아빠랑 싸운 뒤로 며칠 동안 보이지가 않았어. 그런데 내가 엄마를 찾으면 아빠는 덤덤한 표정으로 엄마는 멀리가지 않았다, 라고만 말할 뿐이었어. 삼 일이 지났는데도 아빠는 전혀 엄마를 찾으려 하지 않고 그저 거실의 화분들만 돌보셨지. 그런데 내가 키우던 토토라는 화분 옆에 비슷한 모양의 꽃이 담긴 화분이 하나 더 늘어 있더군. 아빠는 그 화분을 보며 “나는 네 엄마를 참 좋아한단다.” 라고 혼자 중얼 거리기만 했어. 나는 그런 아빠를 견딜 수가 없었지. 빨래는 천정까지 쌓이고 며칠 동안 햄버거만 먹고 있는 데도 말이야. 나는 화가 나서 아빠가 보지 않을 때, 그 화분의 꽃을 뽑아 버렸어.”
도니는 여기까지 말하고 고개를 떨궜다.
“그런데, 이상했어. 그 화분은 흙으로만 채워진 게 아니더군. 꽃을 뽑아드니까 뭔가 끈적거리는 것이 느껴졌어. 냄새도 고약했고 말이야. 머리카락처럼 가느다란 뿌리가 잔뜩 딸려 나왔어. 그리고 내가 본건.”
거꾸로 고개를 늘어뜨린 엄마의 머리였어, 라고 도니가 말했던 것 같다. 나는 한동안 정신이 멍해졌다.
“그때 아빠가 거실로 왔어. 아빠는 말했어.
“식물이 자랄 수 있는 새로운 환경이란다, 도니. 그 빛깔을 보렴, 아름답지? 어이, 그렇게 오래 뽑아들고 있으면 안 돼, 꽃이 죽는다구.”
나는 화분에 다시 머리, 아니 뿌리를 내려놓았어. 아빠는 그걸 지켜보면서 말하더군. 도니, 나는 너를 참 좋아한단다, 라고 말이야. 그때 내가 본 화분의 꽃은 섬뜩할 정도로 붉었어.”
도니는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다고 내게 말했다. 그러나 나는 시계를 보면서 어쩔 수 없다고 얘기했다. 엄마는 저녁시간 전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밥이 아닌 회초리를 준비해놓고 기다리곤 했다. 나는 몸을 돌려 집으로 걸어가는 도니의 뒷모습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도니는 그렇게 천천히 멀어져 갔다.
다음 날, 나는 도니의 집으로 갔다. 초인종을 눌렀지만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문고리를 당겨보니 스르르 열렸다. 나는 거실에 들어가 도니를 불러보았다. 그러나 거실은 조용할 뿐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그때 등 뒤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내가 고개를 돌렸지만 아무도 없었다. 아니, 그 곳에는 붉은 빛깔의 꽃이 심긴 화분 세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제일 끝의 화분에는 얼마 되어 보이지 않는 작은 꽃이 내 쪽을 향해 덤덤하게, 그리고 붉게 피어있었다.  
    
  



e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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