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불통

2020.09.24 12:5609.24

아직도 악몽을 꾼다. 이게 내 몫의 악몽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난 잘못한 게 없으니, 내가 꿀 꿈이 아니여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악몽의 마지막은 항상, 그 긴 무음으로 끝나버린다.

 

 

 

*

 

 

 

내려가기 이주 전쯤 수정 언니의 엄마가 죽었다. 장례식장엔 면접 일정이 겹쳐 가지 못했다. 대신 긴 통화를 했다. 언니도 건조한 목소리로 이해한다고 했다. 오랫동안 마음의 준비를 해서 슬프지도 않다고도 했다. 그냥 피곤하다고. 그 뿐이라고. 난 대학교 마지막 학기였다. 언니도 그 시기를 겪어 봤으니까 이해해 주는구나 했다. 난 장례식장에 가는 친구에게 이십만 원을 들려 보냈다. 인턴을 하고, 다른 회사에 지원서를 넣으며 학교 과제를 해야 했다. 가까스로 준비하고 있던 조별 과제에서 나를 무임승차자라고 부르는 후배가 있었고, 간신히 채워 넣은 지원서는 번번히 낙방했다. 그러다 간신히 어느 기업에 최종 합격을 했다. 기념으로 친구들과 오랜만에 신촌에서 만나 술을 마셨다. 우리는 이상한 사회의 구조와 아무것도 모르면서 정의로운 척하는 후배를 욕하고, 내 취업을 축하했다. 대학원이나 준비할 걸, 알바도 구하기 힘들어, 한참 번갈아 가며 속풀이를 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한 친구가 농담 식으로 물었다.

 

“근데 서주영 너, 수정 언니랑 헤어졌어? 그럼 빨리 말해. 내가 들이대게.”

 

“맞아. 수정 언니가 너한테 해준 게 얼만데 엄마 장례식도 안 가고.”

 

맛있는 간식을 본 개처럼 친구들의 눈이 빛났다.

 

생각해보니 나를 빼고는 다 장례식장에 다녀왔다. 기차로 편도 세 시간이라고, 멀다 멀다 하면서도 다녀온 아이들이었다. 그땐 아니라고 웃으며 대답하고, 이야기 주제를 돌렸다. 계속 술을 먹다 집에 들어와 침대에 누웠을 때, 헤어졌냐는 그 물음이 자꾸 떠올랐다. 핸드폰을 꺼내니 그 사람에게 왔던 부재중 전화 몇 통이 있었고, 메신저를 확인하니 언니가 보낸 사진이 여덟 장 있었다. 늘 그랬듯 가까이서 찍은, 물방울이 맺힌 토마토와 상추, 그리고 서글서글 웃고 있는 언니의 셀카였다. 그 사진 묶음 다음에 ‘언제 한 번 놀러 와.’라는, 마침표도 띄어쓰기도 언제나 정확히 같은 언니의 말이 적혀있었다.

 

어느새 내 옆에 올라온 강아지의 목덜미를 긁어주며 언니의 사진을 보다가 생각했다. 귀찮다. 다 귀찮고 질린다. 안주로 먹었던 족발의 비계가 입 안에서 넘어가지 않고 질겅이며 씹히는 것 같았다. 정말로 끝낼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난 언니에게 한 번도 한 적 없었던 말을 보냈다. 내려 갈게.

 

정말? 언제 올 거야? 언니의 답장은 바로 왔다.

 

 

 

언니와는 삼 년을 만났다. 잠깐씩 헤어진 기간을 빼고도 삼 년. 사귀기 전에 봤던 날들까지 포함하면 거의 대학 생활 내내 만났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러니, 얼굴을 보고 말하는 게 예의일 거라 생각했다.

 

“용성리? 거긴 좀 곤란한데.”

 

언니가 보내준 위치를 네비게이션을 찍으며 택시기사가 중얼거렸다. 난 못 들은 척했다. 택시기사는 한참을 궁시렁거리다가 내가 계속 대꾸를 하지 않으니 혀를 차며 출발했다. 역 앞의 상가들과 시장을 덮는 아케이드도 낡았다 생각했는데, 십 분 정도 가자 점점 더 낙후된 건물과 도로들이 눈에 띄었다. 도로는 점차 좁아져 이 차선으로 바뀌었고, 길옆으로 산과 밭이 보였다. 곤란하다는 기사의 말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토마토, 고양이 사진의 테두리 밖의 모습을 본 건 처음이었다. 시골이네,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길가에 물에 젖은 조약돌만큼 까맣고 윤이 나는 비석이 서있었다. 거기엔 한자로 마을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그래도 택시는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얼마나 더 가야해요? 기사에게 묻자 기사는 퉁명스럽게 네비게이션에 찍힌 도착예정시간을 가리켰다. 십 분. 이 시골에서 차로 십 분 가량 더 시골인 곳. 거기가 언니가 사는 곳이었다.

 

기차에서 내려 역전으로 나왔을 때, 전화를 하니 언니가 택시를 타라고 했다. 학교 다닐 땐 돈이 아깝다며 지각하는 한이 있어도 지하철을 타던 언니가 그러니 좀 낯설었다. 언니는 차비를 주겠다고, 버스는 시간이 안 맞으면 너무 오래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그 말을 하던 목소리가 생각났다. 내가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어도 다시 기차를 타고 떠나버릴 거라고 생각하는 듯 다급한 목소리. 도착 십 분 남았어. 언니에게 문자를 보내자 언니는 기다리고 있던 듯 바로 답장을 보내왔다.

 

알았어. 지금 기다리고 있어.

 

 

 

택시는 버스정류장 앞에서 멈춰 섰다. 달랑 버스 정류장이라는 파랗고 녹슨 표지 하나만 서있는 정류장이었다. 언니가 그늘도 없는 그곳에 서있었다. 꼿꼿하게, 무슨 버스정류장 표지 마냥. 자기가 다른 곳을 가리키는 표지라도 되는 것처럼.

 

택시에서 내리자 언니는 나에게 안겼다. 내 뺨 바짝 가져다 댄 머리에선 열기가 느껴졌고, 내 팔뚝에 닿은 언니의 팔은 땀으로 축축했다. 내가 문자를 하자마자 나와서, 혹은 그보다 더 전부터 나와 나를 기다렸던 것 같았다. 언니는 포옹을 풀자마자, 어땠어? 오는 데 힘들지 않았어? 덥지? 목 마르지는 않아? 질문을 쏟아내며 내 짐 가방을 가져갔다. 나는 아니라고, 괜찮다고, 언니의 붉게 탄 목덜미와 그걸 훤히 드러내는 늘어난 티셔츠를 보며 죄책감에 휩싸였다.

 

정류소 도로를 따라 걷다가 차 한 대가 간신히 들어갈 것처럼 보이는 샛길로 꺾어 들어갔다. 별로 걷지 않았는데도 목을 타고 땀이 흘러내렸다. 샛길 양 옆으론 논이 있었다. 트랙터를 타거나 허리를 숙여 일하던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누구야?”

 

트랙터의 요란한 소리를 뚫고 한 사람이 외쳤다. 언니는 그쪽으로 손을 흔들며 말했다.

 

“대학교 후배요!”

 

“뭐야, 그러면 서울 사람이야?”

 

그렇게 외친 사람은 뭐가 우스운지 가래 끓는 소리가 섞인 웃음소리를 냈다. 나머지 사람들도 따라 웃었다. 언니는 미소를 띤 채 허리를 숙여 인사하며 앞으로 걸어갔다. 기분이 나빴다. 안 그래도 입은 블라우스가 끈적하게 등에 달라붙고 있었다. 내가 손을 뻗어 언니 손을 잡으려고 하자 언니는 깜짝 놀라며 내 손을 쳐냈다. 나도 언니의 반응에 너무 놀라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미안, 미안해. 너무 놀랐어.”

 

언니는 금방 다시 내 손을 잡았다. 그 손이 내가 잘 아는, 이 더운 날씨에도 이상하게 서늘한 손이라는 게 사실 같지 않았다.

 

 

 

길은 점점 오르막길로 변해 어느새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아직 정오도 되지 않았는데 몸 안에 수분이 끓는 느낌이었다. 조그만 개울이 있었는데, 물은 다 말라버려 없었고 원래 물이 있어야 할 곳엔 온갖 잡초들이 자라고 있었다. 그래도 원래는 물이 흐르는 곳이었다는 걸 알리는 듯 비린내가 났다. 온갖 짐승의 배설물과 부패한 쓰레기 냄새와 섞인 썩은 물의 비린내. 언니는 계속해서 나의 표정을 살폈다. 내가 힘들다고 말하면 업어서라도 데려갈 것 같은 얼굴을 한 채로.

 

걷는 동안 드문드문 집들이 보였다. 다 비슷하게 벽돌로 짓고 기와를 얹은 집이었다. 기와 말고 태양광 판넬을 얹은 집이 하나 있었다. 커다란 안테나가 그 위로 나와있었다. 그 집에서 개가 짖었다. 털 상태가 더러웠다. 축 처진 귀와 분홍색 코를 가진 커다란 개였다.

 

내가 그 개에게 다가가자 그 개가 짖으며 달려들었다. 놀랐지만 무섭진 않았다. 굵은 쇠사슬이 그 개의 목을 죄고 있었다. 개 집 안에서 새끼들이 꼬물거리고 있었다. 개는 내게 다가오지 못하는 게 분한지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렸다. 언니는 가까이 오지 않았다. 두려운 표정이었다. 언니는 개를 싫어했다. 언제 한 번 데이트를 할 때, 반려견을 데리고 나간 적이 있었다. 당연히 귀엽다고 하며 개의 목덜미를 쓰다듬어 줄 거라 생각했는데 언니는 한 마디만 말했다. 치워. 그 말로 다투고 한동안 만나지 않았었다. 그러고 며칠 후 언니에게 온 문자에서 동물이 무서워서 그랬다는 변명이 적혀있었다. 하지만 언니의 행동은 무서워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언니는 빨리 자기 쪽으로 돌아오라며 손짓하고 있었다.

 

“이 개 산책도 못 하지?”

 

“그건 그냥, 번견이야.”

 

언니의 목소리에 비웃음이 섞였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 목소리와 말에 꾹 눌러 놓았던 짜증이 솟구쳤다. 내 표정에 그 감정이 비쳤는지, 언니가 금방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로 다가왔다. 언니는 내 손목을 잡고 비굴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 하지만…… 저 개는 그냥 가축이야. 사람이 먹다 남은 밥이나 먹고, 개소주로 먹는 그런 거야. 네가 생각하는 그런 개가 아니야.”

 

언니의 말은 역겨웠다. 내가 생각하는 그런 개가 뭔데?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손목을 잡은 언니의 두 손이 빠른 속도로 축축해지는 걸 느꼈다.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습하고 덥고 냄새 나는 공기가 머리카락 뿌리까지 들어오는 것 같았다.

 

언니랑 깔끔하게 헤어지고 싶었다. 오래된 테이프처럼, 그냥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떨어질 때가 돼서 떨어지는. 악수를 하며 그동안 수고했다고 말한 뒤 질척하고 더러운 것 없이 헤어져야 했다.

 

난 입술을 꾹 눌러 닫았다. 언니에게 내 가방을 뺏 듯 가져와 먼저 걸어가는데, 언니가 조심하라고 외쳤다. 그 말이 들리기가 무섭게 땅이 쑥 꺼졌다. 구덩이였다. 한 뼘 정도 되는 깊이였다. 바닥으로 고꾸라지듯 넘어졌다. 언니가 금방 달려와 나를 일으켰지만 발을 땅에 대자 발목이 시큰거렸다. 부러지거나 삔 건 아닌 것 같았지만 당장 걷기엔 불편했다. 언니는 울상을 지으며 괜찮으냐고 물었다. 그리고 내 겨드랑이 밑으로 머리를 집어넣고 날 부축했다. 조금만, 조금만 더 가면 집이야. 언니가 말했다. 우리는 천천히 걸었다. 언니의 머리에서 언니 특유의 냄새가 났다.

 

“이 냄새 참 좋아했었는데.”

 

내가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지만 언니는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언니의 집은 거의 언덕 꼭대기에 있었다. 다른 집들 하고 비슷하게 생겼지만 좀 더 깔끔한 인상을 주었다. 마당에 지저분한 잡동사니도 없었고 그 둘레 조그마한 밭엔 상추와 토마토 고추 같은 것들이 줄지어 심겨 있었는데, 도중에 끊겼다 다시 이어졌다 했다. 그 끊긴 부분엔 듬성듬성 흙이 파였다 덮인 자국이 보였다. 언니가 보내온 사진이 주로 어디서 찍은 건지 대충은 짐작할 수 있었다. 우리는 커다란 나무 아래에 서있었다. 그래도 그늘 밑이라 땀이 좀 식는 것 같았다. 언니가 집 앞에 있는 비닐하우스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녁에 고기 구워먹을 거야. 아빠가 이것저것 해놔서 저기가 오히려 집보다 시원해. 아빠는 오늘 늦는다고 했으니까, 우리끼리 먹을 수 있어.”

 

언니는 내가 만족해 할지 아닐지 궁금해하는 것 같았다. 난 올라온 길 쪽을 바라보았다. 그저 푸른색 뿐이었다. 논과 밭들. 그리고 거기서 좀 떨어졌기 때문에 나지 않는 악취.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뱉었다. 캠핑장에서 나는 냄새가 났다. 아직 언니는 모르는, 좋지 않은 이유로 찾아오긴 했지만 이런 여유 자체는 오랜만이었다. 잠깐이나마 나쁘고 갑갑한 기분을 털어내고 난 내 눈앞까지 내려오는 나뭇잎으로 손을 뻗었다. 앞면은 서늘하고 부드러웠는데 뒷면에서 이물감이 느껴졌다. 손가락 아래에서 바삭, 소리를 내며 무언가 으스러졌다. 놀라 손을 떼고 확인하니 커다란 벌레였다. 내가 손을 털며 비명을 지르자 언니가 웃음을 터뜨렸다.

 

“괜찮아. 괜찮아. 그냥 매미 허물이야.”

 

아직까지 손끝에 그것이 바스러지는 느낌이 남아있는 것 같았다. 옷에 손을 문질러 잔여물을 털어냈다. 내 손에서 떨어지는 것이 매미 유충의 어느 부분인지 보였다. 머리, 배, 다리. 다시 머리가 아파오는데 언니가 조금씩 몸을 붙였다.

 

“뭐하는 거야?”

 

내가 묻자 언니가 웃으며 왜, 지금 아무도 없잖아 내 목을 감쌌다. 불쾌했다. 이런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다가오는 언니의 얼굴을 피하려고 하는데 언니의 표정이 급격하게 변했다. 그리고 오히려 언니 쪽에서 내 어깨를 살짝 밀쳤다. 언니는 내 어깨 너머의 다른 것을 보고 있었다. 난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언니의 집에서 한 남자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셔츠를 입고 있었지만 그게 깔끔하다는 인상은 주지 않았다. 그 남자는 언니에게 손을 흔들었다. 언니는 대놓고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치워, 라고 말할 것처럼.

 

“이 더운 날 둘이 뭐하고 있어?”

 

남자가 외치며 다가왔다. 말하는 억양이 특이했다. 언니의 표정을 전혀 읽지 못하는 듯 그 남자는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 남자는 언니 쪽에 가까이 서서 내 얼굴을 뚫어져라 봐라 봤다. 나도 지지 않고 바라봤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언니가 내 앞을 가로막아 서며 남자에게 말했다.

 

“우리 집 들어갔다 나왔어? 내가 그러지 말라고 했잖아.”

 

“아니 문 두드려도 반응이 없어서 똥 싸나 하고…… 아 씨 알았어. 저번에 빌린 거 두고 나온 거야.”

 

그리고 남자는 뜬금없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손톱이 긴 손이었다. 그리고 어서 잡으라는 듯 살짝 흔들었다. 내가 천천히 그 손을 잡자 남자가 말했다.

 

“전 오라고 하고요. 박오요. 외자. 얘 오빠 친구. 그쪽은 누구에요?”

 

“내 대학교 후배야.”

 

내가 대답하기 전에 언니가 말했다.

 

“서주영이라고 합니다. 언니랑 많이 친한가 봐요?”

 

“어렸을 때 많이 같이 놀았죠.”

 

“그래요?”

 

“그냥 자전거도 타고, 벌레나 좀 잡고, 병아리……”

 

“됐어. 이제 가.”

 

언니가 오를 살짝 밀었다. 오는 소리 내 웃으며 우리가 온 좁은 길을 따라 걸어갔다. 가다가 뒤를 돌고 나를 향해 또 봐요, 소리치기도 했다. 불쾌했다. 아까 본 냄새 나는 개울이 생각났다. 깨끗한 것은 다 말라버리고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찬. 더워서인지 오의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갑자기 다시 이 공간이 낯선 곳이라는 게 실감났다. 산, 나무, 밭, 논, 묶인 개들, 낮은 전깃줄과 씨발 새끼.

 

“들어가자.”

 

언니가 말했다. 우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언니는 내가 신발을 벗고 있을 때, 현관문을 잠갔다.

 

 

 

*

 

 

 

그 꿈을 꾸고 깨면 가글을 해야 한다. 몇 번이고 가글을 해도 입에서 그 냄새가 나는 것 같다. 물비린내. 거기서 맡은, 그 냄새. 지워지지 않는 냄새를 지우려다 보면 가끔은, 정말 가끔은 그게 내 잘못같이 느껴질 때도 있다.

 

 

 

*

 

 

 

언니와 선풍기 앞에서 포도를 먹었다. 알이 작고 신맛이 강한 포도였다. 언니는 자기가 길렀다고 했다. 원래 동물은 싫어하면서 식물은 좋아하던 사람이었다. 서울에 살 때, 언니가 살던 조그마한 방에도 커다란 화분이 몇 개 있었다. 그 화분들은 볕이 들지 않는 그 답답한 방에서도 잘 자라났었다. 결국 내려오면서는 다 버렸겠지만.

 

쥐고 있던 핸드폰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문자를 보내온 그 사람에게 오늘은 연락하기 힘들다고 답장하는데 전송이 잘 되지 않았다. 언니가 흘끗 보더니 말했다.

 

“좀 기다리면 가긴 가. 비오면 문제지.”

 

“안 답답해?”

 

언니는 망설였다. 내 얼굴을 한참이나 쳐다보며 입술을 달싹이다가 대답했다.

 

“그냥 뭐.”

 

그리고 포도를 씹으며 한동안 말이 없었다.

 

언니는 일년 전에 내려왔다. 내가 막 한 학기 휴학을 마치고 복학했을 무렵이었다. 술에 취한 언니가 집 앞에서 전화를 했다. 엄마에게 개를 데리고 산책을 다녀오겠다고 한 뒤 집밖으로 나왔다. 언니는 아파트 현관 앞에서 머리를 부여잡고 소리 나게 숨을 쉬고 있었다. 언니의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언니는 나와의 관계에서도, 동아리에서도, 커뮤니티에서도, 자신의 과 안에서도 어른스럽고 멋진 사람이었다. 조금씩 늦어질 기미가 보이는 취업에도, 학교빨로 어떻게 되겠지 하며, 자존심 때문에 나에게 조차 속내를 숨기던 사람이었다. 내 품 안에 개가 짖자 언니가 흠칫 놀라며 개를 바라봤다. 언니와 싸웠던 일이 생각나 개를 내 뒤에 두려 하는데, 언니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언니는 개의 발을 만졌다. 언니 도대체 무슨 일이야, 난 물었고 언니는 뜨거운 것에 덴 것처럼 개의 발에서 손을 뗐다. 주영이다. 언니가 중얼거리며 말했다. 주영이, 사랑스럽고, 다 좋고, 부러운 주영이. 그리고 울음을 터뜨렸다. 울며 횡설수설하는 언니를 근처 편의점에 데려가 물을 먹였다. 그제야 언니는 말을 했다.

 

내려가야 한다고, 엄마가 암이라고, 엄마가 암인데 돈도 부족하고, 자신은 아직도 취직을 못 했고, 엄마를 돌봐줄 사람도 없고, 방 보증금을 빼서 내려가야 한다고. 그리고 미안하다며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그 대책 없는 사과는 나에게 하는 것 같기도, 언니의 엄마에게 하는 것 같기도, 뜬금없이 개에게 하는 것 같기도, 언니 스스로에게 하는 것 같기도 했다.

 

 

 

포도를 다 먹고 나서는 언니와 함께 집 주변을 걸었다. 발목은 좀 시큰거리긴 했지만 걸을 만 했다. 난 언제 말을 하면 좋을 지 재고 있었다. 언니의 집 옆을 둘러싼 산엔 밤나무들이 많았다. 아직 채 다 썩지 못한 밤송이들이 바닥에 쌓여있었다. 이렇게 햇볕이 뜨거운 날에도 나무 밑은 검게 그늘져 습하고 축축해 보였다. 언니가 잠깐 그 그림자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면서 나를 향해 오라고 손짓했다. 내가 발목을 가리키며 고개를 젓자 언니는 슬퍼 보이게 웃었다. 그림자 안의 언니는 약하고 병들어 보였다. 도시, 서울의 무언가가 언니를 활기차고 모두가 사랑하는 사람으로 만들었다면, 여기 나무들은 언니의 그 활기를 빨아먹고 자라, 비릿한 냄새를 풍기는 것 같았다.

 

집 뒤편으로 돌자 판자로 지은 작은 건물이 나왔다. 커다란 아기가 나무 블럭을 가지고 대강의 모양만 집처럼 만들어 놓은 것처럼 보였다. 저게 뭐야, 내가 묻자 언니가 창고라며 들어가보자고 내 손을 잡아 끌었다. 서늘한 손이 땀으로 미끌거렸다. 긴장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까 그 오 때문인가? 주위를 둘러봤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창고에 가까이 갈수록 모기들이 달라붙었다.

 

창고 안엔 녹슨 철제 선반이 있었고, 그 위에 비료 포대와 삽 같은 것들이 있었다. 문을 닫아도 지붕과 벽 틈새로 햇빛이 들어와 안은 그렇게 어둡지 않았다. 천장엔 우리 둘의 손으로도 가리지 못 할 크기의 거미줄이 있었다. 선반에 다가가 삽자루를 쥐어 보았다. 까끌까끌했다. 손을 떼자 흙 알갱이가 손바닥에 묻어났다. 삽날에도 흙이 묻어있었다. 언니가 밭일을 하거나 할 때 쓰는 삽인 것 같았다.

 

“주영아.”

 

언니가 불렀다. 난 손을 털며 언니를 바라보았다. 언니는 조금씩 내 쪽으로 다가왔다. 또 내 목을 감싸 안을까? 여기서 피하고 안 어색할 수 있을까? 그냥 지금 사실 난 언니랑 헤어지러 왔다고 말할까? 고민하는데, 언니가 먼저 입을 열었다.

 

“너 취직하고 이제 나와서 살 거라며. 내가 이걸 다른 사람에게 들어야 해?”

 

언니의 입술 끝이 파르르 떨렸다.

 

“나, 너랑 같이 살면 안 돼?”

 

아, 난 대꾸하지 않았다. 언니는 황급히 덧붙였다.

 

“보증금은 못 주겠지만, 월세를 내가 더 낼게. 올라가면, 올라가기만 하면 바로 아르바이트도 시작 할게. 나 경력이 많아서 바로 구할 수 있을 거야. 응? 그러면 안 될까? 서울 가면 취직도 금방 할 테니까, 뭐라도 하면서 대출도 받을게. 그러면 더 넓은 집으로 갈 수도 있잖아. 나 지금 너한테 이러는 것도 부끄러운데, 그런데……”

 

갑자기 왜? 라고는 물을 수 없었다. 그동안 언니와 카톡으로, 가끔 언니가 올라와 만나면서 나눈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었으니까. 언니는 나한테 부탁하는데도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언니에게 같이 살자는 말을 듣고 나서야 난 여태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이미 오래 전부터 언니는 내 삶에 끼어들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최소한 일 년 전부터. 나는 한숨을 쉬었다. 흙먼지 냄새가 났다. 퀴퀴한 냄새. 난 생각을 정리하고 말했다.

 

“언니. 안 돼. 나 사실 여기…… 언니랑 헤어지려고 왔어. 그만하자고 말하러 왔다고.”

 

언니는 한동안 조용했다. 입을 다물고 내가 아니라 내 발 쪽을 보고 있었다. 언니의 정수리를 보며 난 집에 어떻게 돌아갈지를 생각했다. 아까 정류장으로 가서 기다리면 버스가 올까. 택시를 부르면 여기까지 올까. 언니가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한 걸음 더 바짝 내게 붙더니 언니가 말했다.

 

“예의? 너 딴 사람 만나잖아. 내가 몰랐을 것 같아? 애들한테 다 말할까?”

 

 

 

*

 

 

 

침대에 누워있을 때면 어딘가로 빠져버리고 말았다는 기분이 든다. 쉽사리 나올 수 없는 어딘가로. 그 기분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

 

 

 

창고에서 나오고 언니는 평소대로 돌아왔다. 한 번 다시 생각해보라는 말을 남기고. 비닐하우스로 저녁에 먹을 고기와 불판, 버너를 나르면서 우리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지금 난 완전한 가해자였고, 내가 성인이 되고 만난 사람들은 언니와도 연결되어 있었다. 모두가 다. 언니는 어디서나 우상이었다.

 

언니는 창고 안에서 내 친구이자, 자신의 동아리 후배에게 받은 사진을 보여줬다. 나와 그 사람. 너무 명백했다. 언니는 친구에게 아니야 주영이가 그럴 리가 없잖아, 짧은 답장을 보내 놓은 상태였다. 그 친구와 나는 어제도 언제 같이 놀러 가자며 떠들었었다. 그때 그 친구는 내게 어떤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준비를 하고 여기에 온 것처럼, 언니도 여기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언니는 밭에 있는 상추를 따 수돗가에서 씻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하늘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소나기라도 쏟아질 듯 검은 구름이 몰려왔다. 습도 때문에 살갗이 끈적이기 시작했다.

 

준비를 마칠 때쯤 파란색 포터가 집 앞으로 들어왔다. 아빠다. 언니가 놀란 듯 중얼거렸다. 나와 언니는 느릿느릿 포터 쪽으로 다가갔다. 곧 차문이 열리고 언니의 아빠가 수건으로 몸을 털며 나왔다. 그리고 조수석 쪽에서 오가 나왔다. 능글맞게 웃고 있었다. 언니는 그것 또한 예상하지 못 했는지 눈을 크게 떴다.

 

“어유, 서울에서 온다던 후배가 아가씨야? 이쁘게 생겼네. 어때, 있을 만 해요?”

 

네, 그냥 뭐. 둘러 대는데 언니가 소리를 질렀다.

 

“여길 또 왜 와?”

 

오는 상관없다는 듯 얼굴을 찡그리고 있는 언니를 지나쳐 비닐하우스 쪽으로 걸어갔다.

 

“뭐 언제는 안 왔냐. 어제도 같이 밥 먹어 놓고. 오늘은 삼겹살 파티네.”

 

“수정아 나도 먹고 씻어야겠다. 소주 하고 밥하고 다 들고 나와.”

 

언니의 아빠가 말하자, 언니는 아무 말 없이 집 안으로 들어갔다.

 

“아가씨, 아가씨도 가서 오 옆에 앉아 있어요.”

 

아니에요, 난 언니를 따라 집으로 들어갔다. 언니는 밥솥에서 밥을 푸고 있었다. 방금 꺼낸 게 분명한 소주 세 병에는 그새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미안해. 원래 오늘 아빠도 늦는다고…….”

 

“그게 미안해?”

 

언니는 밥을 푸던 손을 멈추고 나를 바라봤다. 한참 날 살피던 언니는 그래, 내뱉 듯 말하고 밥솥을 닫았다. 난 소주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곧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사위는 금방 깜깜해졌고 비닐하우스 안에 켜놓은 작은 전구를 향해 나방들이 날아들었다. 나방은 툭툭, 전구에 부딪히다가 바닥으로 고꾸라지기를 반복했다. 언니의 아빠와 오가 반복해서 술을 따랐다. 더 못 먹겠다고 해도 자꾸만 마지막 잔이라며 따랐다. 그걸 막아주지 않는 언니를 속으로 비웃었다. 그깟, 그깟 바람이 뭐라고. 언니도 조용히 술을 계속해서 마셨다. 고기를 굽는 연기는 비닐하우스 옆에 난 틈으로 빠져나가다가, 비가 내리기 시작하니 비닐하우스 안으로 고여갔다.

 

언니의 아버지는 붉어진 얼굴로, 젊은 애들끼리 더 마시라며 한 숟갈 남긴 밥그릇을 그대로 둔 채 집으로 들어갔다. 비는 이제 쏟아지고 있었고, 한동안 빗방울이 비닐하우스에 부딪히는 소리만 이어졌다.

 

“안 가?”

 

언니가 오에게 말했다. 오는 아저씨가 젊은 애들끼리 놀라고 하시는데 어떻게 가냐며 술을 다시 입에 털어 넣었다. 나도 그냥 술을 마셨다. 내일까지 어떻게든 언니를 여기 두고 갈 방법을 찾아야 했다. 가끔 번개가 치고 천둥이 울렸다. 세 잔 째 연거푸 술을 마시자 언니는 결국 내 손에서 술잔을 뺐으며 말했다.

 

“우리 같이 살면 다 비밀로 할게. 그러니까……”

 

“야.”

 

오가 갑자기 끼어들었다. 비웃음이 섞인 목소리였다. 언니가 오를 노려봤다.

 

“너 아저씨한테 서울타령하다 뒤지게 맞은 지 얼마나 됐다고 아직도 그러고 있냐.”

 

언니와 오의 표정으로는 뒤지게 맞았다는 말이 많이 혼났다는 말의 과장된 표현인지, 뭔지, 알 수 없었다.

 

“정신차려. 아저씨 말 따라 시집이나 가. 어? 근데, 너무 멀리서 찾지 말고.”

 

언니는 간신히 화를 누르는 표정이었다. 낄낄거리던 오가 술을 따르다 술이 남지 않은 걸 보고 말했다.

 

“술 좀 더 가져와봐.”

 

“뭐?”

 

“아깐 나보고 너네 집 들어가지 말라며.”

 

하, 언니는 머리를 잡고 나와 오를 번갈아 가며 쳐다봤다. 뭐, 내가 가져와? 내가 말하자 언니는 작게 욕을 했다. 그리고 비닐하우스 문 쪽에 기대어 서있던 우산을 들고 집으로 들어갔다. 언니의 모습을 좇던 오가 나에게 물었다. 술에 취하니 특이한 억양이 더 도드라졌다.

 

“쟤 대학에서 인기 많았어요?”

 

대답을 바란 질문은 아니었던 듯, 곧바로 다음 질문이 이어졌다.

 

“나 쟤 좋아하는 거 티나요?”

 

참지 못하고 비웃음을 터뜨렸다. 좋아한다고? 뭘? 오가 내 눈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재밌어요?”

 

노란 조명 아래에서 오의 표정이 점점 뻣뻣하게 굳는 것 같았다. 내가 아무 말 없자, 내가 좀 재미있긴 해, 오는 중얼거렸다. 그리고 곧바로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쟤는 서울 물 잘못 먹었어. 까마귀마냥 반짝이는 것에 눈이 돈 거지. 그렇지 않아요? 여기가 그냥 놀 게 없어도 조용하지, 이웃끼리 다 친하지, 뭐가 나쁘다고 지랄을. 지네 엄마 돌아가신 지 얼마나 됐다고. 그리고 지 혼자서도 잘 놀더만.”

 

“뭐하고 놀았는데요.”

 

진짜 궁금해서 물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는 내 대꾸에 신이 난 듯 떠들었다.

 

“어릴 때 쟤랑 쟤네 오빠랑 내가 하고 놀던 게 있어요. 여긴 산하고 땅 밖에 없잖아. 개울? 거긴 나 어렸을 때도 말라 있었어. 자전거 타고, 술래잡기 하고, 그러다가 질리면 땅 파고 놀았어. 신기하죠? 셋이서 삽 하나씩 들고, 땅을 파고, 거기에 묻고 놀았어. 개미, 잠자리, 개구리. 그 구덩이에서 빠져나올 수 있나 없나.”

 

난 오에게 그만 하라고 하고 싶은 마음과 끝까지 들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내 생각과 관계없이 오는 계속 떠들었다.

 

“개구리 좀 잘 빠져 나오더라. 개구리 다음에 병아리. 닭장에서 한 마리 빼 오면 아무도 몰랐어요.”

 

난 핸드폰을 꺼내 녹음기를 틀었다. 오는 자기가 하는 이야기에 빠져 내가 뭘 하는지 관심도 없어 보였다.

 

“근데 저번 때 아버지한테 혼나고, 내가 아저씨 말 들어보니까 혼날 짓 하긴 했더만, 아무튼 그래서 내가 위로라도 해주려고 밤에 놀러 갔는데, 얘가 창고에서 삽을 들고 어디로 가는 거야. 안 그래도 몇 번 그러는 걸 내가 봤거든. 화가 나는 일이 있을 때마다. 아줌마가 아파서 데굴데굴 구르는 날마다. 너무 궁금해서 쫓아가봤지. 저 아랫집에 개 봤어? 그 개가 새끼를……”

 

“박오, 안 닥쳐?”

 

어느새 언니가 돌아와 있었다. 소주와 우산을 든 언니의 손이 무참히 떨리고 있었다. 난 언니와 눈이 마주쳤다. 사실이다. 박오의 말이 다 진짜다. 언니의 표정으로 알 수 있었다. 개를 보고 치우라고 말하던 언니가 생각났다. 그리고 오늘 본 밭의 파였다가 덮인 자국들이 떠올랐다. 난 친구들에게 말하는 걸 상상했다.

 

수정 언니가 뭘 했는지 알아? 개를 묻었어. 살아있는 개를. 태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강아지들을.

 

언니는 내게 뭘 말할 듯 입을 뻐끔거리다가 결국 손에 있는 모든 걸 내던지고 비가 쏟아지는 어둠으로 다시 돌아갔다.

 

언니가 내 얼굴에서 본 건 뭐였을까? 노란 전구 아래에서 그늘진 내 표정이 더욱 분노한 것처럼 보였을 수도, 아니면 순간 내가 느낀 혐오감이 고스란히 나타났을 수도, 그것도 아니라면 언니가 날 잡을 수 없게 만드는 이유를 마침내 찾아낸, 찰나의 기쁨이 언니에게 전해졌을 수도.

 

“안 따라가요?”

 

오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오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다가, 비웃으며 천천히 씹어 뱉 듯 말했다.

 

“둘이 그거 아니야? 레즈?”

 

그리고 오는 일어나 언니가 사라진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순간, 비를 맞은 것처럼 온몸이 차가워졌다. 난 그 냄새 나는 모멸감에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오가 비닐하우스를 나가고 잠시 뒤에 선명한 비명소리가 빗소리를 뚫고 들렸다. 언니였다. 난 조용히 귀를 기울였지만 그 뒤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설마. 오의 비웃는 얼굴이 생각났다. 나가 봐야 했다. 언니가 버리고 간 우산을 들고 핸드폰 조명을 켰다. 젖은 땅엔 둘의 발자국이 선명히 찍혀 있었다.

 

발자국을 따라 걸었다. 발자국은 집 뒤로 이어져 있었다. 집 뒤로 돌기 전에, 난 핸드폰 조명을 끄고 주머니에 넣었다. 최대한 인기척을 내지 않으려 천천히 움직였다. 언니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까 봤던 창고 안이었다.

 

살짝 열린 판자 문을 슬며시 열었을 때, 컴컴한 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말라버린 개울에서 났던 비린내가 훅 끼쳤다. 눈이 어둠에 적응해 안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 처음엔 언니가 오의 목을 조르고 있는 줄 알았다. 누워있는 오의 위에 언니가 앉아 목을 조르고 있었다. 언니의 우는 소리가 배경음처럼 들렸다. 난 천천히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마침내 번개가 쳐서 순간적으로 창고 안이 밝아졌을 때, 바닥에 고인 게 빗물이 아니라 피라는 것을, 비린내의 정체가 사람의 안에 흐르던 것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언니는 오의 목에서 나오는 피를 두 손으로 틀어막고 있었고, 두 사람의 근처엔 삽날이 붉게 물든 삽이 떨어져 있었다. 주영아, 언니가 이를 부딪히며 나를 불렀다. 난 바닥에서 눈을 떼고 언니의 얼굴을 바라봤다. 역시 피투성이가 된 얼굴을, 노인처럼 울상을 짓고 있는 얼굴을.

 

“그냥 겁만 주려고 했어. 오지 말라고. 가까이…… 휘둘렀는데…… 이렇게 될 줄 몰랐어…… 주영아…… 제발…… 일일구…… 전화, 빨리…… 일일구……”

 

언니가 흐느꼈다. 난 떨리는 손을 주머니에 넣어 핸드폰을 꺼냈다. 화면에 뜬 다이얼을 한 번에 누르지 못하고, 몇 번이고 지운 뒤에야 간신히 그 세자리 번호를 누를 수 있었다.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 댔을 때, 통화음은 울리지 않았다. 내가 들을 수 있는 건 언니의 울음소리, 오가 숨을 헐떡이는 소리와 핸드폰의 긴 침묵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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