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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바퀴벌레 유서

2020.07.24 22:1007.24

그날따라 하늘이 유독 노랬다. 승우는 거친 숨을 내쉬며 흐르는 땀을 닦아냈다. 사이즈가 맞지 않는 헐렁한 셔츠 속으로도 땀 줄기가 타고 내려갔다. 그는 옷깃을 펄럭여 열기를 식히며 눈앞의 돌계단을 쳐다봤다. 예순 아홉 개였다. 서울에도 이런 곳이 존재했구나 싶었다. 승우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씩씩하게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취업 준비 후 처음으로 면접을 통보받은 날이라 평소답지 않게 들뜨고 의욕이 넘치는 승우였다. ‘취직되어도 여긴 계단 때문에 다니기 힘들겠다.’ 승우의 생각 역시 현실을 의욕적으로 앞질러 갔다.

 

계단을 다 오른 이후에도 몇 개의 골목을 꺾어 지난 뒤 그가 도착한 곳은 깨져가는 타일이 덕지덕지 붙은, 재개발을 앞둔 건물이었다. 건물은 텅 빈 듯했다. 승우는 또다시 계단 앞에 섰다. 3층으로 올라가야 사무실이 있었다. 승우는 계단 옆의 커다란 전신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땀에 절어 눌어붙은 머리카락, 몸에 맞지 않는 헐렁한 아버지의 양복, 이미 지쳐버린 눈빛을 한 볼품없는 남자가 서 있었다. 승우는 머리를 매만져봤지만, 상황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마윤 종합무역. 승우는 나무판에 회사 이름이 궁서체로 쓰인 현판 앞에 섰다. 주변은 쥐죽은 듯 조용했다. 큼, 큼. 승우가 목소리를 가다듬는 소리가 복도에 작게 울려 퍼졌다. 승우는 똑똑똑, 하고 조심스러우면서도 분명한 스타카토로 문을 두드렸다. 돌아오는 것은 침묵이었다. 승우가 다시 한번 문을 두드리자 그때서야 귀찮은 듯한 대답이 돌아왔다.

 

“들어오세요.”

 

사무실은 휑한 분위기였다. 기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여자가 키보드를 두드리며 앉아있었다. 승우가 멍하게 서 있자 그녀는 고갯짓으로 안쪽에 있는 문을 가리켰다.

 

“저쪽으로 갈까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사무적인 눈빛으로 다시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승우는 어정쩡한 묵례를 건넨 뒤 사장실로 들어갔다.

 

“안녕하십니까! 변승우 입니다!”

 

승우는 할 수 있는 최대한 떨림을 삼키며 크게 소리쳤다. 들어오자마자 고개를 90도로 숙인 탓에 아직 방 안의 상황은 모르고 있었다. 방 안에는 커다란 소파와 기다란 탁자가 놓여있었고, 그 옆에 놓인 낡은 장식장에는 각종 상패들과 사장이 언급된 신문 기사가 스크랩된 액자 등이 놓여있었다. 사장은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꼰 채 신문을 읽고 있었다.

 

“왔니?”

 

마치 옆집 아저씨처럼 친근한 목소리에 승우는 고개를 슬쩍 들어 사장을 쳐다봤다. 창문에서 들어오는 햇빛이 마치 사장의 후광처럼 보였다.

 

“뭐 해? 자기소개 안 해?”

 

승우는 사장의 기백에도, 얼빵한 자기 자신에도 흠칫 놀라 버벅거리며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현실의 자신과는 미묘하게 거리가 있는 소개였다. 사장은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것 같았고 승우의 목소리는 조금씩 작아졌다. 승우의 자기소개를 듣고 난 사장은 승우에게 시간에 대한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삶이라는 건 시간이 제한된 게임이라며 1분 1초를 소중히 여길 것이라는 뻔한 이야기였다. 다른 점은 보통의 꼰대들보다도 훨씬 강렬한 자기 확신에 차 있었다는 점이었다. 사장이 말하는 걸 듣고 있자면 사장이 마치 영생을 누릴 사람처럼 느껴졌다.

 

“요새 신문에 나는 거. 바퀴벌레 유서. 이거는 어떻게 생각해.”

 

바퀴벌레 유서. 줄여서 바유서. 최근의 가장 큰 사회문제였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하나둘씩 바퀴벌레가 되겠다는 편지를 남기고 사라지는 사람들이 생겨난 것이다. 처음에는 은유적 표현으로 여겨졌지만, 그 수가 늘어날수록 점차 사회문제가 되었다. 언론에는 각종 추측이 난무했다. 사이비 종교 회원의 표식이라는 둥, 자살 카페를 통한 자살자들이라는 둥, 진짜로 바퀴벌레가 된 거라는 둥, 뇌를 좀먹는 바이러스가 나타난 것이라는 둥 다양한 주장이 나오고 있었다. 취업준비생이라면 당연히 어느 하나의 스탠스를 취하고 자기만의 생각처럼 보이는 것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주제였다. 승우 역시 준비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가 입을 열려는 찰나, 사장이 먼저 말을 했다.

 

“이런 패배자들이 나오긴 나와야 된단 말이지...”

 

승우는 당황했다. 자신이 말하려던 방향과는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주로 소외된 계층에게서 바유서가 발견되었던 만큼 사회적 약자에게 지속적인 관찰과 관심이 필요하다는 일반론을 꺼내놓을 생각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된 거 먼저 말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승우의 머리는 빠르게 돌아갔다.

 

“이런 사람들이 있어야 나 같은 사람도 있는 거지. 삶이라는 건 원체 남을 밟고 쟁취하는 거라고. 안 그래?”

 

승우는 당황했다. 도대체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 어... 저는... 그렇게까지는...”

 

사장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승우는 속으로 뜨끔했다. 이런 유형의 사람에게는 죽었다고 생각하고 납작하게 엎드려야 했는데.

 

“요즘 친구들 빳빳하단 말이지... 그럼 이건 어떻게 생각해?”

 

사장은 신문을 던졌다. 그 신문은 절묘하게 승우에게 앞에 떨어졌다. 승우는 신문을 집어 들었다. 신문에는 박정숙 교수가 바퀴벌레 유서를 남기고 사라졌다는 소식이 실려있었다. 박 교수는 젊은 시절 아프리카와 아마존 등지에서 직접 거주하며 생태에 관해 연구해 뛰어난 성과를 거둔 데다 아름다운 외모까지 갖춘 덕분에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승우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망설였다. 이 사람은 사회의 패배자다? 높은 곳에 있는 사람이 내려오는 것이 밑에서 올라갈 나에게는 유리하다?

 

“어.....”

“뉴스 안 보냐?”

“아, 아닙니다. 봅니다.”

“난 이게 이해가 안 된단 말이지. 그 여자가 이럴 사람이 아니거든”

 

“아시는 분인가요?”

 

“이 여자 모르는 사람도 있어! 뭐시기 특집 다큐멘타리인지도 나오고. 햐... 참 궁금해. 이상하단 말이야.”

 

승우는 헷갈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저 사장은 여교수와 아는 사이일까 모르는 사이일까. 승우가 멍하니 서 있자 사장은 쯧쯧거리며 서랍을 뒤적여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인턴 계약서였다. 사장은 손짓으로 승우를 부르더니 펜을 건넸다. 승우의 가슴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서류광탈의 역사를 뒤로하고 직장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승우의 머릿속에 가득 찼다. 그래서 승우는 열악한 근무환경, 소시오패스 꼰대 상사, 급여 조건 등을 따져볼 여유조차 없었다. 그에게는 취업 준비라는 기나긴 암흑기를 끝낼 수 있는 한 줄기 빛만이 보일 뿐이었다. 홀린 듯 사인을 하고 나자 현실적인 생각이 스멀스멀 치고 들어왔다. 그래서 여기는 뭐 하는 회사고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 건가.

 

“내가 싸인을 해야 계약서가 완성되는 거겠지?”

“넵.”

“그냥 해줄 수는 없고”

 

승우의 마음은 급속도로 차가워졌다. 세상을 너무 쉽게 생각했다.

 

“가서 알아봐봐.”

“예?”

“그 박정숙이 말이야. 어떻게 된 건지 알아보라고.”

“...제가요?”

“못 해?”

“아, 아니요... 해보겠습니다!”

“그래. 나가봐.”

 

승우는 완전히 말렸다고 생각했다. 이런 황당한 일은 살면서 겪어본 적이 없었다. 이대로 도망가버릴까 싶었지만 도망간 곳에는 취업 준비라는 익숙한 시련이 존재하고 있었다. 승우는 그것이 지긋지긋했다. 그래서 새로운 시련을 택하기로 했다.

 

 

***

 

박정숙의 신상정보는 찾기 쉬웠다. 포털사이트에 검색만 해도 어느 대학교, 어느 건물, 몇 호실에 서 근무하는지 알 수 있었다. 승우가 박정숙 교수의 사무실에 도착했을 땐 이미 문 앞에 폴리스 라인이 쳐져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승우는 굴하지 않고 다가가 손잡이를 살짝 돌렸다. 스르륵 문이 열렸다. 안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승우는 주위를 둘러본 뒤 조심스럽게 폴리스 라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심판대에 올라선 것이다. 여기서 단서를 찾아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다시 바퀴벌레만도 못한 취준생이 될 것이다. 승우는 생각했다.

 

세계적인 생태학자인 박정숙 교수가 한국에 와서 교수직을 맡게 됐다고 했을 때 대대적인 환영 행사가 열렸고 사장이 봤다는 특집 다큐멘터리를 비롯한 각종 특집 프로그램이 거의 모든 채널에서 방영되었다. 승우를 비롯한 많은 사람은 한국인의 세계적 성과에 대한 자부심을 공유했다.

 

교수의 사무실에서 첫눈에 들어온 것은 책장이었다. 책보다는 전부 수기로 기록된 자료들이 빽빽이 꽂혀있었다. 승우는 파일 하나를 뽑아서 펼쳐보았다. 생태학에 대해 지식이 전무한 승우였지만 박정숙 교수의 연구에 대한 열정만은 느낄 수 있었다. 교수의 책상 위에는 경찰이 와서 뒤진 듯 서류들이 이리저리 펼쳐져 있었고, 책상 밑의 서랍장도 열려 있었다. 결정적인 단서가 될 것은 경찰이 이미 전부 가져갔을 것이라고 결론 내린 승우는 허탈하게 등을 돌렸다. 그리고 들어올 때는 보지 못했던 문 앞쪽 진열장에 여러 개의 상패, 트로피들이 아무렇게나 대충 놓여있는 것을 보며 문득 사장의 집무실을 떠올렸다. 사장이 박정숙 교수에 대해 갖는 의문이 승우에게도 옮겨왔다. 이렇게 성공적으로 살아온 사람이 도대체 왜...

 

승우는 박정숙 교수의 사무실에서 나오자마자 그 앞을 지나던 남자와 마주쳤다. 교수로 보이는 남자는 경계가 가득한 눈빛으로 승우를 보며 말했다.

 

“기자예요?”

 

승우는 당황했지만, 상대가 먼저 그럴듯한 핑계를 제공해준 셈이었다.

 

“아, 네네. 기자입니다.”

“...그래도 이렇게 막 들어가시면 안 되지.”

“죄송합니다...”

“왜 다들 여기 와서 들쑤시는지 모르겠는데... 박 교수 여기 와서 학과장까지 하고 잘 지냈고, 학생들한테도 인기 좋았고 안 좋은 거 없었어요.”

“네...”

“그나마 문제라고 할 거는 연구 실적이 안 좋았던 거지.”

“연구 실적이요?”

“예. 그러니까 딴소리 말고 그렇게 써요. 연구 부진에 따른 부담감. 알았죠?”

 

남자는 휙 돌아서서 옆방으로 들어갔다. 승우는 작은 노트를 꺼내 메모하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세계인을 감탄케 한 성과를 내었으나 그보다 더 큰 성과를 내기를 압박받는 삶에 대해서. 그런 승우에게 학생 한 명이 다가왔다.

 

“저기요...”

“네?”

“제가 엿들으려고 한 건 아닌데... 아까 기자시라고 하신 것 같아서요.”

 

승우는 어느새 아무렇지 않게 거짓말을 할 수 있었다.

 

“아 네네. 기자예요.”

“그... 제가 말했다고는 쓰시지 마시구요. 사실... 이 얘기가 기사에 왜 안 나오나 계속 이상했거든요.”

“무슨 얘기죠?”

“저... 좀 유치하게 들리시겠지만... 정숙 교수님이 왕따시거든요...”

“네? 왕따요?”

“솔직히 정숙 교수님이 좀... 뭐랄까 한국 사회에서는... 잘 적응하시는 성격이 아니긴 하셔가지구요... 근데 오자마자 학과장 하시구. 그래서 김형철 교수라구 원래 학과장 되려던 분이 주도적으로 따돌렸거든요? 그분이 원래 교수 임용도 반대하셨는데 막 유학파에 여자라고 아무 자리나 준다고...”

 

승우는 정신없이 메모하며 이야기를 들었다. 학생은 물 만난 듯 이야기를 계속해서 풀어놓았다.

 

“그리고 교수님이 또 이쁘신 데다가 독신이시잖아요. 그래서 의도적으로 접근하는 사람도 많았어요. 어떤 새끼는 아 죄송해요. 어떤 대학원생은 박 교수님이 여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겠다는 애도 있었어요. 그게 무슨 뜻인지는 아시죠?”

“아...”

“솔직히 저 같아도 짜증 나서 죽어버리고 싶었을 거 같긴 하거든요”

 

승우는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빨리 정신 차려야했다. 이 정보만으론 부족했다.

 

“혹시 박정숙 교수님 댁이 어딘지 아시나요?”

“알긴 하는데...”

 

학생은 교수 집보다는 다른 곳에 먼저 가보라며 고수찬 박사의 연락처를 주었다. 박정숙 교수의 은사라고 했다. 아주 어릴 때부터 함께 했으며 박정숙 교수의 연구실에도 종종 찾아오곤 했었다는 것이다. 학생이 보기엔 둘 사이가 보통 이상으로 돈독해 보였기에 분명히 뭔가 알고 있을 것이라고 했다.

 

고수찬 박사는 흔쾌히 승우와의 만남에 응했다. 아니 오히려 그가 더 열성적으로 만나고 싶어 했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고수찬 박사는 승우를 앞에 앉혀놓고 열변을 토했다. 그가 언성을 높일 때마다 승우의 얼굴에 침이 튀었다. 그의 말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박정숙 교수는 어린 시절부터 끈기와 집념이 대단했다고 한다. 아침 일찍 산에 올라 식물을 관찰하다가 밤늦게까지 돌아오지 않아 부모를 놀라게 하는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고, 떼쓸 때마저도 어른이 두손 두발 다 들 정도로 울어 끝끝내 원하는 걸 얻어내곤 했다는 것이다. 자기가 열망하는 것을 향한 강한 아우라가 몸 밖으로 뿜어져 나와 가끔은 한참 어른인 자기 자신도 그 기세에 눌렸다고 했다. 박 교수가 스무 살이 되자마자 아마존으로 향한다고 했을 때 주변 모두가 걱정했지만 자기 자신만은 그녀를 믿었다고 한다. 그녀는 뭐든 해낼 것이며, 자기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그런 박 교수가 한국에 돌아와서 시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교수들의 파벌 싸움이 가장 큰 문제라고 했다. 박 교수는 워낙 학내 정치보다는 자기 연구에 관심이 많은 사람인데 외국 출신에, 변변한 학위도 없는 사람이 학과장이 되었다며 비난하는 교수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순수한 실력보다는 명성 때문에, 그리고 여자이기 때문에 보여주기식으로 학과장에 선정됐다는 논리였다. 이 부분에서 고수찬 박사는 격분했다. 한국 대학교수들은 연구비나 타 먹는 헛똑똑이들인데 박 교수 같은 인재가 그들의 음해에 시달려 연구 지원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고 했다. 게다가 산으로 바다로 마음껏 뛰놀 사람을 싸구려 컴퓨터밖에 없는 골방에 가둬놓았다고 열을 올렸다. 고수찬 박사 자신이 박정숙 교수를 만나러 학교에 갈 때마다 허리를 꼿꼿하게 편 주변 교수들을 지팡이로 한 대씩 후려치고 싶은 것을 몇 번이고 꾹꾹 참았다는 고백도 했다.

 

고수찬 박사는 자신의 말을 그대로 보도할 것을 신신당부하며, 자신이 아닌 다른 그 누구도 박정숙 교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리고 박정숙 교수의 가장 절친한 친구이자 박정숙 교수와 함께 자신에게 수업을 들었던 사람을 만나보라는 조언을 해주었다.

 

하지만 그 사람은 더 이상 가장 절친한 친구가 아니었다. 승우가 전화를 걸자 그 친구는 자신은 최근의 행보에 대해선 아는 게 없다고 했다. 박정숙 교수가 해외로 떠나고 나서는 어쩔 수 없는 거리감이 생겼다고 했다. 그나마 자신이 알고 있는 모습은 학창 시절의 박정숙인데 그때부터 자기만의 세계가 확실한 친구였고, 고수찬 박사는 그런 정숙만을 예뻐하며 차별했다고 말했다. 한국에 돌아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린 시절 동네 친구들을 찾기 시작하고, 보통 사람들이 좋아할 법한 사치품, 유력한 인맥에 신경 쓰기 시작했던 걸 보면 사실 정숙이도 특별한 척, 외롭지 않은 척하는 게 힘들지 않았겠냐는 연민인지 힐난인지 헷갈리는 말을 남겼다. 통화가 끊어지고 휴대폰 액정을 보니 여덟 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승우에게 남은 마지막 선택지는 박정숙 교수의 집에 방문하는 것이었다. 승우는 다시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타고, 대중교통이 닿지 않는 언덕에 위치한 박 교수의 집으로 향했다. 지친 승우의 다리에 점점 감각이 사라져갔다. 거의 땅을 짚고 기어가듯 도착한 박정숙 교수의 집 앞에는 검은 그림자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니 그들이 사람이란 걸 알 수 있었고, 다들 카메라를 들고 모여있는 것을 보니 자신이 영 잘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아 안심되었다. 승우가 다가가자 그들을 익숙한 듯 말을 건넸다.

 

“어디에요?”

“네?”

“어디 방송에서 왔냐구요.”

“아... 그냥 작은 곳이에요.”

“일루 앉아요. 다 같은 처진데.”

“네. 감사합니다.”

 

승우는 그가 내민 종이 쪼가리 위에 털썩 앉았다. 그제야 교수의 집이 눈에 들어왔다. 담을 가득 둘러싼 넝쿨들 때문에 마치 다른 집들과는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다. 승우가 넋 놓고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 아까 그 사람이 다시 말을 걸었다.

 

“신기하지?”

 

그는 어느새 말을 놓고 있었다. 워낙 친근한 성격인 듯 했다.

 

“네. 그러네요.”

“아이고. 여기 죽치고 있는다고 뭐가 나오겠냐.”

“그래도 뭐라도 나오지 않을까요?”

 

승우의 순진한 말에 카메라맨과 몇몇 사람들이 눈을 마주치고 껄껄거리며 웃었다.

 

“친구야. 생각해봐 봐. 이렇게 사람들이 쭉- 기다리고 있는데 너 같으면 여길 오겠냐?”

 

승우는 입을 달싹거렸지만 적절한 대답 거릴 찾지 못해 그저 마른 공기만 되삼켰다.

 

“그냥 어디로 갈지 모르니까 여기라도 있는 거지. 그리고... 난 사실 그냥 자살이라고 봐. 무슨 암호니, 뭐니 하는데... 에휴 씨. 죽을 거면 죽는다고 하지. 이게 다들 무슨 고생이냐. 안 그래?”

 

몇몇 사람들이 카메라맨의 말에 동의한다는 투로 나오자 카메라맨은 몸을 돌려 앉아 그들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각자 바유서에 대한 자기만의 해석방식에 대해 떠들어댔다. 승우는 말없이 바닥에 누워 새까만 하늘을 보았다. 하늘이 원래 이렇게 까맸던가 하고 승우는 생각했다.

 

그때였다. 아주 작게 서걱거리는 소리가 승우의 귓가에 들려왔다. 승우는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켜 그 소리를 진원지를 찾았다. 주변 사람들은 여전히 토론에 열을 올리느라 소리를 듣지 못한듯했다. 승우는 조용히 일어서 소리를 따라 움직였다. 담벼락을 끼고 집 뒤쪽으로 반 바퀴쯤 돌았을까. 승우는 창고 셔터 밑으로 지나가는 바퀴벌레 한 마리를 발견했다. 생김새는 보통의 바퀴와 다르지 않았지만 승우는 그 바퀴가 박정숙 교수라고 확신했다. 잽싸게 셔터를 들어 올려보았지만, 셔터는 굳게 닫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승우는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주변 화단의 돌 하나를 집어 들어 자물쇠를 내리치기 시작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아무렴 어때, 어차피 주인 없는 집인걸.’하고 승우는 생각했다. 자물쇠는 금방 부서졌다. 승우는 혹여나 다른 사람이 몰려올까 셔터를 조용히 조금씩 들어 올리며 묘한 희열을 느꼈다. 그가 맛본 오랜만의 성취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창고에서 집 내부로 통하는 문은 열려있었기에 그 이후는 순조로웠다. 승우의 심장은 빠르게 두근거렸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자신이 이런 일을 할 수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승우였다. 박정숙 교수는 언론에 자신의 집을 노출한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항간에는 여러 소문이 있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박정숙 교수가 아프리카에서 알려지지 않은 마약성 식물을 들여와 집에서 재배한다는 것이었다. 승우 역시 내심 식물들로 빽빽한 집을 기대하며 안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박정숙 교수의 집은 아주 평범했고 식물이라고는 흔한 난초 하나 없었다.

 

승우는 집 안을 구석구석 살폈다. 지나칠 정도로 깔끔한 집이었다. 사진도, 일기도, 하다못해 작은 메모나 쪽지 하나도 없었다. 마치 모델 하우스처럼 느껴졌다. 서재로 들어가자 커다란 창 앞에 책상이 있었고 그 위에는 비어있는 유리컵 하나가 놓여 있었다. 교수가 바유서를 이 책상에 앉아서 썼다면 박정숙 교수의 마지막 행동은 물 한 잔을 마시는 것이었을 것이다.

 

이곳은 박 교수의 흔적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 곳이 분명했지만 그런 만큼 의미있는 것들을 발견하기도 쉽지 않았다. 승우는 의자에 털썩 앉았다. 굉장히 푹신하고 아늑해서 온몸이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오늘은 정말로 지치는 하루였다. 몸에 제대로 맞지도 않는 양복을 입고,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는 회사에서 면접을 보고, 시작과 끝을 도무지 알 수 없는 술래잡기를 하고 있는 승우였다. 그는 최면에 걸리듯 스르륵 잠에 빠져들었다.

 

꿈속에서 승우는 식물로 가득한 곳에 있었다. 그렇게 풀이 무성한 곳은 꿈에서도 처음이었다. 그가 식물들을 마구 헤치고 밟으며 걷자 누군가가 옆에서 나직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조심해!”

 

승우가 돌아보자 거기엔 박정숙 교수가 서 있었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보던 모습 그대로였다.

 

“교수님? 박정숙 교수님 맞으세요?!”

“쉿”

 

박정숙 교수는 입가에 손을 갖다 댔다. 승우는 목소리를 낮춰 대답했다.

 

“교수님. 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어디 계신 거예요? 바퀴벌레가 되다니요? 파벌 때문이세요? 저한테 얘기 좀 해보세요.”

 

승우가 질문을 쏟아내자 박정숙 교수는 조용히 고개를 내젓고는 뒤돌아 도망가기 시작했다. 승우 역시 바로 뒤쫓았다. 그러나 마치 물속을 달리는 듯 다리가 무거웠고 점점 박정숙 교수와의 거리가 멀어졌다. 승우는 다급해졌다.

 

“교수님! 안 쫓아갈 테니까 도망가지 마세요! 여기 있을게요!”

 

박정숙 교수는 그제야 멈춰 승우를 돌아봤다. 승우도 멈춰서서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교수님. 돌아오세요. 제가 교수님 어떤 점이 힘드신지는 정확히 알진 못하지만 그래도 살아야죠. 삶이란 게 가끔 힘들 때는 있어도 지나고 나면 행복한 추억이 더 많잖아요.”

“...”

“교수님 생명을 중요하게 여기시지 않아요? 작은 식물에도 마음이 있다고 하셨잖아요? 그럼 커다란 사람들은 어떻겠어요? 사람들이 교수님이 사라지셔서 얼마나 슬퍼하는데요. 제가 다 만나고 왔거든요. 다들 교수님을 엄청나게 그리워하고 또 보고 싶어 하고 또 감싸주려고 하고 아무튼요. 그런 마음들을 져버리시면 안 되죠.”

 

승우는 틈이라도 주면 큰일이라도 날듯이 마구잡이로 말을 쏟아냈다. 박정숙 교수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내가 왜?”

“교수님은... 그래도 돌아오시면...”

 

승우는 말문이 막혔다. 파벌 싸움도, 외로움도, 성과에 대한 압박도 자신이 해결해줄 수 없으며 아마 앞으로도 절대 해결되지 않을 문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교수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아요...”

“누가?”

“저...도 그렇고...”

 

승우는 만났던 사람들을 떠올려봤지만 쉽게 이름을 끄집어내기가 힘들었다. 남교수, 대학생, 고수찬 박사, 친구 아무개의 말들이 승우의 뱃속에서 뒤엉켜 요동치며 구토를 유발했다. 승우가 머뭇거리는 틈을 타 박정숙 교수는 다시 도망치기 시작했다. 승우도 뒤쫓아 뛰었다.

 

“내가 못 잡을 줄 알아!”

 

다급한 외침과 동시에 승우는 헉하며 잠에서 깨어났다. 어느새 동이 터 서재 창문을 햇빛이 길게 비추고 있었다. 승우는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자신이 꾼 꿈의 내용을 머릿속으로 정리하고 있었다. 눈곱을 떼어내고 흐릿했던 시야에 점점 초점이 맞기 시작하자 승우는 서재 벽에 비친 거대한 그림자의 존재를 눈치챘다. 그의 시선이 빛의 궤도를 따라 앞으로 이동했고, 유리컵 위에 앉은 바퀴벌레와 눈이 마주쳤다. 1초 남짓의 시간이 영겁처럼 느껴졌다. 승우는 도망가려는 바퀴벌레를 본능적으로 붙잡아 유리컵 안에 가뒀다. 승우는 그것이 박정숙 교수임을 확신했다.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놓칠세라 컵을 입구를 손으로 틀어막은 뒤 서둘러 집 밖으로 나갔다.

 

바퀴벌레는 다급하게 승우의 손바닥 위를 왔다 갔다 하며 물어뜯어 보았지만, 바퀴벌레와 승우의 물리적 크기 차이는 그런 시도를 묵살하고도 남았다. 승우는 유리컵을 뒤집어 바퀴벌레를 손에서 떨어트렸고, 회사에 도착했을 땐 바퀴벌레는 더는 유리컵을 기어오르기를 포기한 듯 잠자코 있었다. 승우 역시 회사 문 앞에 등을 기댄 채 가만히 숨을 고르고 있었다. 얼마쯤 지났을까, 어제 보았던 여직원이 도착해서 승우를 이해할 수 없단 듯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승우는 그녀의 차가운 시선에 마음이 쪼그라들었다. 분명 본인은 아무도 해내지 못한 일을 해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말이다. 승우는 여직원을 따라 쭈뼛쭈뼛 걸어 들어갔다.

 

사장의 반응은 호탕했다. 자신이 부여한 임무를 밤을 새워 수행한 승우를 대견하게 여겼다. 박정숙 교수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는 이제는 그에게 중요하지 않은듯했다. 승우는 열심히 설명하려 애썼다. 박정숙 교수는 많은 사람에게 시달리고 있었다고, 바퀴벌레가 되고 나서 역시 그랬다고, 자신은 그녀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겠다고 말했다. 사장은 그의 말에 그저 웃으며 끄덕일 뿐이었다. 마치 어린 아들의 응석을 받아주는 아버지와 같은 모습이었다. 사장은 승우의 인턴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적극적인 자세가 마음에 드니 함께 재밌게 일해보자고 했다. 승우는 바퀴벌레 같은 것은 다 잊어버렸다. 승우는 미련과 후련이 섞인 묘한 감정을 느끼며 뒤돌아섰다. 사장실 문을 나서는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묻어났다.

 

 

***

 

승우는 열심히 일했다. 즐거웠다. 세상에서 한 사람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적으나마 돈도 벌고 있었다. 그의 방에는 하나둘씩 물건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원룸용 공기청정기, 각종 생활용품, 꼭 맞는 정장. 그는 적금도 들기 시작했다. 월급은 CMA 통장으로 받았다. 한 푼이라도 더 모으기 위해서였다. 얼른 원룸 월세를 벗어나 원룸 전세로, 그리고 여자친구를 만들어 결혼한다면 신혼집은 투룸으로, 아이가 생긴다면 학군이 좋은 아파트로... 행복한 계획이 그의 미래 앞에 쫙 펼쳐져 있었다.

 

그러나 승우의 현재는 그리 쉽지 못했다. 승우는 술을 잘 마시지 못하지만, 술을 자주 마셔야 했다. 항상 사장의 옆자리에 앉아야 했는데 그럴때면 사장의 입에 안주를 집어 넣어줘야 했다. 사장이 그것을 왜 좋아하는지 처음에는 이해하기 힘들었고 거북했지만, 세 번쯤 하고 나니 익숙해졌다. 그리고 자신 역시 즐거워졌다. 즐거워야만 살 수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승우에게는 자신 앞에 놓인 삶 말고는 다른 것을 신경 쓰거나 기억할 여유가 없어졌다.

 

바퀴벌레 유서 사태는 이후로도 한동안 지속되었다. 박정숙 교수 이후로 많은 유명인이 그 뒤를 따르면서 우리 사회가 무엇이 잘못되었는가에 대한 많은 논의가 오갔지만, 그 논의 때문에 오히려 갈등의 골은 더 깊어졌다. 바유서를 쓰고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정부는 이를 자살로 규정했다. 남겨진 가족들은 자살이 아닌 사회적 살인이라며 국가에 보상금을 청구하는 대규모 집단 소송을 벌였다. 세상은 박정숙 교수를 뒤쫓던 그 날의 승우처럼 앞으로만 질주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사장은 승우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의 책상에 있는 서류를 찾아봐달라는 부탁을 해왔다. 승우가 사장이 없는 사장의 집무실에 들어간 것은 처음이었다. 승우는 문득 면접 날이 떠올랐다. 그땐 이곳이 마치 대강당처럼 크게 느껴졌었는데 지금은 매우 초라하게 느껴졌고, 사장의 후광처럼 보였던 햇빛이 이제는 날아다니는 먼지들을 비추는 것처럼 보였다. 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승우는 문득 박정숙 교수를 떠올렸다. ‘사장은 그 바퀴벌레를 도대체 어떻게 한 걸까. 사장이 기분이 좋을 때 물어봐야겠다.’ 승우는 생각했다.

 

그 기회는 생각보다 금방 왔다. 대기업 하청업체와의 거래를 성사시킨 후 만취한 사장을 집에 데려다줄 일이 생긴 것이다. 사장은 그날따라 인사불성이었다. 승우는 한쪽 어깨에는 사장을 들쳐메고 반대쪽 손으로는 사장의 휴대폰에서 현관 비밀번호를 찾기 위해 애썼다. 가족이라도 함께 살았다면 그저 초인종을 누르면 되었겠지만 안타깝게도 사장은 기러기아빠였다.

 

킹사이즈의 안방 침대 위에 사장을 눕힌 후 양복을 벗기던 승우는 그날따라 이상한 용기가 생겼다. 안방까지 들어올 정도로 가까운 사이가 되었고, 게다가 사장은 술에 취해 아무것도 기억을 못할 텐데 못할 말이 없겠다는 마음이었다.

 

“사장님. 박정숙 교수님 기억하시죠?”

“으음... 음...”

“어떻게 하셨어요? 제가 그때 잡아드렸잖아요.”

“옷장...”

“옷은 옷장에 넣을게요. 어떻게 하셨어요? 그건 기억 안 나세요?”

“옷장에... 내가...”

 

승우는 맥이 빠졌다. 하긴 사장은 처음부터 그게 박정숙 교수라는 것을 믿지 않는 눈치였다. 사장의 양복을 주인 잃은 화장대 위에 대충 걸쳐둔 승우는 안방 화장실에 들어가 세수를 했다. 거울에 비쳐 보이는 사장의 잠든 얼굴에서 마치 자신의 미래가 보이는 듯해 씁쓸해졌다.

 

사장의 양복을 집어 옷장에 넣고 돌아서려던 승우는 그 안에서 작고 투명한 상자를 발견했다. 어디선가 본 기억이 나는 물체였다. 승우는 빠르게 기억을 더듬었다. 유년 시절 가지고 놀았던 곤충 채집 박스였다. 그리고 그 안에는 승우가 그토록 만나고 싶어 했던 바퀴벌레가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마치 사육이라도 해왔던 듯 젤리 몇 개가 옆에 놓여 있었다.

 

승우의 가슴은 다시 미친 듯 뛰기 시작했다. 사장은 박정숙 교수를 키우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사실은 감금에 가까웠다. 세계적인 성과를 낸 학자이자, 자신의 삶을 버리고 싶어 바퀴벌레가 되기를 택한 사람을, 사장이 만든 작은 세상 안에 가둬놓은 것이다.

 

승우는 고개를 홱 돌려 사장이 여전히 잠에 빠져있는지 확인했다. 그리고 고민에 빠졌다. 지금 이 채집 상자를 들고 도망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장이 승우가 훔쳐 갔는지 모를 리는 없을 터. 어렵사리 얻은 자신의 일자리가 사라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날따라 승우에게 이상한 용기가 또 피어났다. 승우는 사장과 똑같은 사람이 되기는 싫었다. 불쌍한 박정숙 교수를 풀어주고 싶었다. 박 교수가 바퀴벌레가 되어서나마 자유로운 삶을 살길 바랐다. 승우는 채집 상자를 품에 안은 채 태연한 듯 사장의 집을 나섰다.

 

아파트 단지 밖으로 빠져나오자 승우는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어디로 가야 할지는 모르는 상태였다. 다시 박정숙 교수의 집으로 데려가야 할까? 하지만 그곳은 이미 박정숙 기념관이 된 후였다. 근처 공원 벤치에 자리를 잡은 승우는 주변을 둘러보고 바퀴벌레를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교수님, 교수님. 저 기억하시죠?”

“...”

“그동안 고생 많으셨어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자유롭게 사실 수 있도록 풀어드릴게요. 그런데 어디가 좋을까요. 그걸 모르겠어요.”

“...”

“말씀을 하실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선생님 댁은 기념관이 됐거든요. 거긴 불편하실 거에요. 그럼 어디가 좋을까요. 일단 저희 집으로 가셔야 되는 건지...”

 

승우는 바퀴벌레가 서서히 빨간색으로 달아오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아! 이렇게 하죠. 저희 집으로 가서 어디로 가시면 좋을지 차근차근 저한테 알려주세요. 지금은 시간이 많이 늦어서 저도 다른 선택지를...”

 

바퀴벌레는 이제 미친 듯이 채집 박스 안을 빙빙 돌고 있었다. 승우도 이제는 그 광경을 인식했다.

 

“교수님? 괜찮으세요?”

 

그러나 바퀴벌레는 더욱더 빠르게 빙빙 돌고 있었고 점점 새빨갛게 물들어갔다.

 

“교수님!”

 

다급해진 승우가 채집 박스에 손을 대는 순간 바퀴벌레는 펑 하는 작은 폭발음 함께 터져버렸다. 승우의 귀에는 삐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승우의 눈 앞에 남은 것은 까맣고 작은 조각들이 담긴 채집 박스뿐이었다. 승우는 눈도 깜빡이지 못한 채 그 자리에 멈춰있었다. 점점 이명이 멎자 그의 귀에는 새로운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바퀴벌레들이 움직이는 서걱거리는 소리였다.

 

승우는 귀를 부여잡고 무작정 뛰기 시작했다. 다리를 타고 올라오는 간지럼증이 승우를 괴롭혔다. 마치 지표면에 가득 찬 바퀴가 자신의 몸을 타고 오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승우는 그들을 피해 위로, 더 위로 도망치다가 어느새 작은 언덕의 정상까지 쫓겨갔다. 이제는 더 갈 곳이 없었다. 서걱거리는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왔고 온몸을 간지럽히는 기운도 승우의 턱 끝까지 올라왔다. 그것들이 승우의 숨통을 조여왔고 승우는 강렬한 자기 연민과 자기혐오에 휩싸였다. 그는 마지막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승우의 시야에는 새까만 암흑만이 보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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