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아낌없이 주는 남자

2020.07.09 22:0207.09

1.

그대, 괴로워하고 있군요. 그대가 어떤 고통을 겪고 있을지 나는 감히 상상이 안 됩니다. 그대의 고통을 내가 대신해 줄 수만 있다면. 내 목숨을 바쳐 그대를 되돌려 놓을 수만 있다면.

그대, 처참한 모습이군요. 그대의 아름다운 눈과 손과 머리카락이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게 되었군요. 눈꽃처럼 반짝이던 눈망울이 살덩어리와 한데 섞여 뭉치고, 얼굴과 두피 곳곳에 어지러운 불꽃이 피었네요. 변해버린 자신의 모습조차도 볼 수 없는 그대, 하지만 내 눈엔 여전히 아름답습니다.

아름답다는 것은 나에게는 내적인 기준 위에 서 있는 정의이므로 외적인 기준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당신이 아름답다는 겁니다. 당신은 아름다운 영혼을 가졌으니까요.

세상 사람들은 외적인 아름다움에만 미쳐 있죠. 스스로 요상한 기준을 세우고서는 그 기준에 미달하는 자들을 깎아내립니다. 자신도 그 기준에 들지 못하면서요.

왜 세상의 로맨스는 아름다운 자들의 전유물이어야만 할까요. 우리 모두 로맨스를 할 수 있는 성정을 타고났는데 말입니다. 나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영화로든 책으로든 남의 로맨스를 보면서 울고 웃는 모습을요. 그래서 나는 나만의 로맨스를 꽃피우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언제였을까요, 당신을 처음 본 것이. 당신이 투석을 하러 내가 근무하는 이 병원에 왔던 날이군요. 지루한 투석 시간 동안 말동무가 되어 주기 위해 당신의 친구가 함께 왔었죠.

나는 그대의 아름다움에 눈이 멀고 말았습니다. 단지 외적인 아름다움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그대의 눈망울을 통해 심연을 보았고, 그대의 영혼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알아챘습니다.

그걸 어떻게 볼 수 있냐고요? 제 나름대로 특별한 능력이 있다고 말해야겠군요. 어머니 덕에 발달한 능력이죠. 매일과 매 순간의 기분이 아들에 대한 태도를 좌지우지하셨던 분이거든요. 그런 어머니 밑에서 살아남기 위해 나는 어머니의 영혼의 상태가 어떤지 재빨리 파악하는 재주를 기르게 됐답니다.

나는 어머니가 나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나를 키우며 들어간 생활비와 학비, 어머니의 자유를 앗은 구속감, 어머니의 어깨에 쌓이는 의무감과 책임감만큼이나 늘어가는 빚을 미워했던 거라고 생각하며 애써 나 자신을 다독여왔습니다.

어머니는 결국 무너지고 나는 버림을 받았습니다. 나는 나 자신과, 어머니를 증오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결국 둘 다 실패하고 말았지만, 그 이야기는 나중으로 미뤄야겠군요.

내 얘기가 너무 길었습니다. 애초에 이 편지를 쓴 것은 당신을 위로하고자 함이었는데. 그대라면 내 사연을 기꺼이 들어줄 것 같아 말이 많았습니다.

나는 당신의 고통을 대신하고자 합니다. 이 편지와 함께 보내는 것을 소중히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미안해하지도 고마워하지도 마십시오. 이것은 응당 내가 해야 할 일이니까요. 그런 식으로라도 나는 내 죄를 씻어내고 싶습니다.

착한 그대, 걱정하지 마십시오. 내가 이것을 드리더라도 나는 그대의 고아함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습니다. 오랜 세월 눈치를 보며 살아온 자의 특별한 감각이라고나 할까요.

 

2.

내가 드린 선물로 그대가 소중한 빛을 찾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선물을 그대의 친구가 보고는 경악하여 쓰러졌다는 소식도요. 세포가 괴사하지 않도록 정말 심혈을 기울여 포장한 건데 그것이 그토록 놀라웠나 봅니다.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겠지요. 나는 이제 당신의 일부가 되었으니까요. 당신의 눈이 되어 당신의 머리로 세상을 보게 되었으니까요.

나는 더더욱 그대 앞에 나설 수가 없게 됐지만, 괜찮습니다. 나는 이제 당신에게 큰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과거에 내가 당신에게 바랐던 소망, 그것을 하룻밤의 악몽으로 여기고 잊어주시기 바랍니다.

가여운 그대, 내가 상처받을까 봐 안타까워하던 모습, 그것 하나만으로도 나는 여생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아니, 행복할 수 있을까요. 이토록 극악무도한 고통을 그대에게 안겨준 나인데요.

괴로워 마십시오. 그대를 괴롭히고자 하는 말이 아닙니다. 나 자신의 죄를 나 스스로 상기하고자 함입니다.

아아, 오늘도 내 얘기를 늘어놓는군요. 원래 죄가 많은 사람은 변명하려고 말이 많아지는 법이죠.

그대, 이제 영화관도 가고 미술관도 가고, 추악하지만 일면과 일면에 아름다움도 공존하는 이 세상을 마음껏 감상하고 만끽하기를 바랍니다. 그대의 맑고 고운 시선에 나의 안구, 아니 당신의 안구도, 세상의 흉함도 모두 정화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당신의 얼굴에 피어오르는 환희와 열정과 감격을 내가 볼 수만 있다면. 당신이 그것들을 느낄 때 내가 곁에서 공유할 수 있다면. 너무 큰 바람이겠죠. 나는 이렇게 당신에게 편지를 쓸 수 있다는 것마저도 감사해야 하는 놈인 것을 잊고 있었습니다.

 

3.

그대, 어느덧 일 년이 지났군요. 지난번의 내 편지를 받고 이름도 주소도 모두 바꿔버리셨죠. 병원까지 바꾸셨더군요.

그대를 내버려두고 싶었지만 이 나약한 영혼이 그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대가 잘 지내는지 무척 걱정이 됐으니까요. 사실은 그리움이 더 컸다는 게 솔직한 변명이겠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대는 정신과 치료까지 받고 계시더군요. 어떻게 알았느냐고요? 지난번 편지에 말씀드린 대로 나는 당신의 눈이 되어 당신의 머리로 세상을 보고 있습니다.

당신은 오늘 아침에 토스트와 오렌지 주스로 아침을 때웠죠. 정신과 상담을 받으러 갈 때는 청바지와 회색 니트 위에 낙타색 코트를 입고 갔고요. 그리고 상담을 받으며 많이 우셨죠.

이 모든 게 나 때문이라 생각하니 착잡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위로가 될지 모르겠지만 그래서 선물을 하나 보내드리고자 합니다.

여자들은 헤어스타일을 참 자주 바꾸지요. 당신도 사고, 아니 사건이라 해야 할까요, 전에는 그랬었다는 걸 압니다. 긴 머리의 그대는 청순하고 늘씬한 매력이 있었고 짧은 머리의 그대는 귀엽고 강단 있는 모습이었죠.

금전적인 문제로 가발을 많이 구비하지 못 했다고 들었습니다. 모든 것이 내 탓입니다. 하여 나는 나의 머리카락을 한 올도 빠뜨리지 않고 모아서 가발을 만들어 보냅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대머리가 됐느냐고요? 물론이죠. 단순히 가위로 자르는 것으로는 속죄의 깊이가 얕은 것 같아 두피까지 통째로 벗겨 만들었답니다. 반의반도 지나지 않아 그만두고 싶은 고통이었지만 그대가 겪은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 생각하고 마지막 한 치까지 힘주어 뜯었답니다.

저를 용서해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대를 경악하게 만들고자 함도 아닙니다. 일종의 고해성사와 징벌이라고 여겨주십시오.

이 추운 겨울, 내가 당신에게 다소간의 따뜻함을 제공하리라 생각하면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많은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제가 보내드리는 선물은 내가 아닌 당신을 위해 써 주십시오. 당신의 허약한 몸이 감기에 들까 늘 걱정하는 나입니다.

 

4.

그대, 내가 드린 선물을 불태우고 계시군요. 조금 섭섭한 마음이지만 그대의 마음도 이해하기에 이 서운함을 멀리 던져버리려고 합니다. 길이가 짧았거나 색상이 마음에 안 드셨거나 한 것이겠지요.

하여 오늘은 다른 선물을 드리고자 합니다. 당신의 아름다운 손가락들이 모두 뭉개져 학업에 애로사항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아니, 봤다고 해야 할까요. 저번에 말씀드렸다시피 나는 당신의 눈을 통해서 당신이 보는 모든 것을 보니까요.

하지만 그대, 씻을 때 불을 끄거나 눈을 감지는 말아주십시오. 당신이 미끄러운 욕실 바닥에서 넘어져 다치기라도 할까 봐 걱정이 됩니다.

그대, 거울을 볼 때마다 원망과 혐오가 가득한 눈빛으로 그대 자신을 마주하는군요. 그때마다 그대는 유리에 입김을 분 다음, 망가진 손가락으로 나에게 편지를 쓰지요. 두 눈을 뽑아버리고 싶다고, 그러지 못 하는 자신이 증오스럽다고요.

착한 그대, 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것은 내가 당신에게 드린 선물입니다. 아무런 보상도 대가도 바라지 않고 드린 것입니다. 날 염려해 돌려주고 싶어 하는 마음, 알지만 받아드릴 수는 없습니다. 나에겐 나보다 그대가 소중하니까요. 그래서 그대의 고통을 함께하고 싶은 것입니다.

사람에게 손가락이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요. 우리는 이것으로 아주 많은 일들을 하니까요. 나는 당신에게서 그것을 앗아가 버렸습니다. 그래서 돌려드리고자 합니다.

애석한 일입니다. 손가락을 이식할 수 있는 기술이 아직도 발달되지 않았으니까요. 이건 제 사과의 상징으로 봐 주십시오.

이것을 돌려드리고자 내가 지금 할 일은 나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겨줄 것입니다. 하지만 그대가 느낀 고통에 비하면 새 발의 피겠죠. 나는 나를 단죄하는 심정으로 손가락 하나하나마다 작두질을 할 것입니다. 이것을 받고 부디 그대가 내 진심을 알아주시길 바랍니다.

다음부터는 편지 쓰기가 조금 힘들어지겠군요. 눈도 손가락도 없는 사람이 글을 쓸 수 있게 도와주는 프로그램이 있는지 알아봐야겠습니다.

 

5.

그대, 울고 계시는군요. 내가 보낸 선물을 망치로 깨부수고 계시군요. 얼굴은 특별히 잘 난 게 없어도 손은 남자치고는 예쁘단 소리를 꽤 들었었지만, 아무래도 본체에서 떨어져 나간 것이니 그 생명의 기운을 잃은 것이겠지요. 보기 싫어하신 것도 이해가 됩니다.

그래도 의수가 잘 작동해서 다행입니다. 익명으로 기부한 것을 또 이렇게 밝히고 마네요. 겉으로는 아니라 해도 관심과 칭찬을 바라는 것이 사람의 심리인가 봅니다.

부담스러워하지 마십시오. 의사 생활하면서 돈 쓸 일이라곤 없어, 장롱 뒤의 먼지처럼 쌓여 있던 것으로 장만했으니까요. 가족도 친구도 연인도 없는 제가 무슨 일로 돈을 썼겠습니까. 이제라도 용도를 찾아 다행일 따름입니다.

궁금해 하실 지도 모르겠네요. 가난한 어머니를 둔, 그런 어머니에게서 버림받은 제가 무슨 수로 의대를 가고 의사가 되었는지.

신은 그래도 완벽히 불공평하지만은 않나 봅니다. 제게 머리를 주셨으니까요. 그리고 저희 어머니에게는 끈덕지게 들러붙어 거액의 생명보험을 가입시킨 고마운 친구가 있었습니다.

사실 어머니에게서 버림받았다는 표현이 옳을지 모르겠습니다. 마음으로는 절 버렸지만 그래도 같이 살고는 있었으니까요.

버린 쪽은 저인지도 모릅니다. 어머니에게서 그런 머리를 물려받고, 그대, 그거 아시는지 모르겠네요, 아들의 지능은 엄마의 지능을 따라간다는 것을요, 지능에 관련된 유전자가 X염색체에 있거든요, 그 머리로 의대에 가서 배운 지식을 이용해 어머니를 버렸지요. 특별한 지능을 물려준 그 어머니를요.

나는 천벌 받아 마땅한 놈입니다. 어머니가 지옥에서 날 기다리며 내가 끌려 내려오기만을 벼르고 계실 것입니다. 그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습니다. 왜인지는 나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다른 선물을 드리고자 합니다. 이 몸이 한낱 흙이 되어 부서지기 전에 그대에게 하나라도 가치 있는 일을 해 드리고자 함입니다. 부디 거부하지 마시고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통장 잔고가 갑자기 늘어나 있더라도 놀라거나 돌려주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대의 애처로운 삶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그대에게도 가족이 있지 않나요. 내 가족과는 다르게 그대의 가족들은 그대를 사랑하죠. 하지만 그대의 치료비로 인해 큰 고통을 받고 있죠. 그대의 가족들까지 도와드리고자 함입니다.

그대의 계좌번호를 어떻게 알게 됐는지는 굳이 말씀드리지 않아도 알 것이라 생각합니다. 내가 그대의 가족에 대해서 어떻게 알고 있는지도요.

 

6.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습니다. 내 신장이 당신의 몸에서 제 기능을 잘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토록 망가진 신장으로 어찌 지금까지 버텨왔는지, 왜 진즉에 날 찾아오지 않았는지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아, 왜 날 찾아오지 않았는지는 자명하죠. 내가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압니다. 그대가 날 피하는 것은 나를 걱정해서라는 것을. 착한 그대, 그 연약한 몸으로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짊어지고서도 여전히 나의 죄의식까지 신경 써 주시는군요.

그렇게 곧은 성정을 지닌 그대이니 내가 드린 전 재산을 한 푼도 남김없이 기부한 것이겠죠. 그대의 자비로움과 관대함에 나는 몹시도 놀라고 감동받았습니다. 내가 기부한 것 같아 공연히 뿌듯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천국에 가지 못 해도 괜찮습니다. 이미 그대에게서 마음 한 조각을 받았으니까요. 그 환한 파편이 내 가슴에 박혀 암흑 같은 내 영혼을 찬란하게 밝혀주고 있으니까요.

어머니에게서조차 버림받은 나를 이렇게까지 보듬어준 여자는 그대가 유일합니다. 나는 이미 나의 천국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 생이 다 하면 기꺼이 지옥에서 불타오를 생각입니다. 그대에게 죄를 저지르기 전에 나는 나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 준 여자에게 죄를 저질렀으니까요.

그 여자의 죄목은 무엇이었을까요. 나를 낳은 죄? 나를 낳아놓고 사랑하지 않은 죄? 사랑하기는커녕 체육관 샌드백 취급을 해댄 죄?

나는 모든 것을 용서했습니다. 나이가 들고 보니 알겠더군요. 세상은 멀쩡한 몸으로도 저 하나 건사하기에도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현실. 그런 데다 남편은 없고, 매사에 발목을 잡는 아들이 있다면 어머니의 삶이 얼마나 기구했을 지를요.

모든 깨달음은 뒤늦게 찾아오지요. 내가 내 손으로 어머니에게 그런 짓을 하기 전에 이런 진리를 알고 있었다면, 그리고 내가 당신에게 그런 짓을 하기 전에도 깨달음이 먼저 찾아왔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그러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대, 내 능력으로는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나의 모든 것을 드릴 수는 있습니다. 모든 것을 다 드려도 아깝지 않은 그대, 부디 건강하십시오.

 

7.

그대, 잘 지내고 계시지요. 나는 그대 덕분에 잘 있습니다. 이곳은 통행이 부자유스럽고 뭇사람들과 의도치 않게 부대껴야 한다는 점만 빼면 편안한 곳입니다. 의식주에 대한 걱정이 없으니 호텔과도 같다고 볼 수 있겠네요.

비꼬는 게 아니라 진심입니다. 나는 그대가 왜 나를 신고했는지 알고 있습니다. 내 추악한 영혼이 조금이나마 속죄하고 회개하기를 바라셨겠지요. 당신에게 내 죄를 고할 때부터 예견된 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이토록 고마운 당신의 마음 씀씀이에 나는 또 한 번 감격하게 됩니다.

그러니 걱정 마십시오. 나는 삼시세끼 꼬박꼬박 잘 먹고 정해진 일과대로 운동하고 일하며 잠도 충분히 자면서 생활하고 있으니까요. 눈이 없으니 특별 대접 받는 것도 있습니다. 동료 수형자들과 교도관들이 날 어떤 눈으로 볼지 신경을 안 써도 되고요.

오늘 편지는 당신에게 지은 내 죄를 고하고 용서를 구하고자 함입니다. 당시를 다시 떠올리게 하는 고통, 그것이 싫으시다면 더 이상 읽지 않고 이 편지를 버려도 좋습니다.

나는 역시 이기적인 놈인가 봅니다. 당신이 괴로워할 것을 알면서도 이렇게 나의 괴로움을 하소연하고 싶어지니까요. 파렴치하게도 용서를 바라고 싶어지니까요.

그대가 물었었죠. 도대체 그대에게 왜 이런 짓을 했냐고. 그대가 뭘 잘못했냐고.

그대는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이 못난 영혼의 불찰입니다. 그대가 나에게 보여준 따뜻한 미소와 다정한 눈빛이 환자와 의사 이상의 어떤 감정이라고 오해한 나의 잘못입니다. 내 연락과 기다림을 당신이 단칼에 거부하지 못 하는 게 나에 대한 배려가 아니라 연정이라고 착각한 나의 과오입니다.

거기서 멈췄으면 좋으련만, 나는 정말로 큰 판단착오를 하고 만 것입니다. 당신의 얼굴이 추해지면 나의 사랑을 받아줄지도 모른다는 유치하고 이기적인 발상 말입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그 독한 물질을 당신의 얼굴에 끼얹은 것입니다. 결코 당신을 미워해서가 아니라면 그대의 마음이 조금은 편해질까요. 아니, 내가 무슨 변명을 해도 당신의 마음이 편해질 리가 없겠죠.

내가 당신의 괴로움으로 아무리 괴로워한들 당신이 직접 느끼는 고통에 비할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다짐합니다. 나의 모든 것을 당신에게 드리겠노라고.

마침 드리고 싶은 게 하나 생겨서 기쁜 마음입니다. 무엇인지는 다음에 알려드리겠습니다. 깜짝 선물은 미리 알면 재미가 없으니까요.

 

8.

사랑하는 그대, 요즘 들어 혈색이 좋아져 다행입니다. 빈곤이란 사람을 어찌나 초라하고 미약하게 만드는지요. 그대의 가계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 빈곤을 내가 초래했다 생각하니 뭐라도 해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보름 전에 복지관의 이름으로 후원받으신 고기 세트를 기억하시는지요. 입맛이 없어 식음을 전폐하던 그대가 그래도 그것은 맛있게 드셔 주셨다니 벅찬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습니다. 비록 제 허벅지와 종아리는 뼈만 남았지만 말입니다.

둔부까지 잘라 드리고 싶었으나 누군가가 말리더군요. 그러면 휠체어에 앉을 수가 없다고요. 그래서 그 정도에서 타협하기로 했습니다. 저도 가끔은 밖에 나가, 실크처럼 피부에 와 닿는 산들바람을 느껴보고 싶으니까요. 부디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대, 우리가 병원 근처에서 곱창을 함께 구워 먹은 기억을 아직 간직하고 있나요. 그것이 내가 어머니가 아닌 여자와 단둘이 가져본 첫 식사라면 믿으시겠습니까.

그때가 그리워지는군요. 그렇다면 다음 선물은 무엇을 보내드려야 할지 명백하네요. 앞으로 제가 수액만 맞고 살아가게 된다고 해도 말입니다.

사람이 느끼는 ‘먹는 기쁨’은 상당하다고들 하죠. 나는 그것을 잃는 대가로 그대에게 기쁨을 되돌려 드리겠습니다.

 

9.

그대, 그대가 이 편지를 받았을 때에는 나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왜냐면 심장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하지만 나는 그대의 몸속에서 그대의 피를 펌프질 하며 그대의 삶이 다하는 순간까지 그대와 함께할 것입니다.

그대의 심장이 약해져 이식을 받아야만 살 수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제발 그대, 내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습니다. 물론 마음이 무척 아팠습니다. 진심입니다. 하지만 내가 그대의 심장이 되어드릴 수 있음은, 그것 하나만은 기뻤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가여운 그대, 슬퍼하지 마십시오. 나는 죽는 게 아닙니다. 그대의 중요한 일부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그대와 하나가 되고 내 사랑의 염원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심장을 드리고 남은 껍데기를 어찌할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간도 뇌도 당신에게 내어드리고 싶지만 당신의 간과 뇌는 건강하지요. 혹여 당신이 나이 들었을 때 문제가 생기면 드릴 수 있으면 좋으련만 장기를 그렇게 오래 손상 없이 보관할 수 있는 기술은 아직 발달되지 않았습니다.

그대가 다니는 의대에 내 시신을 기증할까 고민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내 시신을 당신의 의수로 파헤치게 된다는 보장이 없으니 그 점은 금방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마음이 점점 급해지고 있었습니다. 얼른 내 심장을 내어드려 당신을 살려야 하는데, 아직도 나머지 몸뚱이를 어찌 처리해야 할지를 결정을 못 내렸으니까요. 그러다 어느 날 여러 가지 장례 절차에 대해 설명을 듣다 무릎을 탁 쳤습니다.

요즘에는 매장과 화장 말고도 갖가지 장례 방법이 있지요. 내 몸을 태운 흙에 나무를 한 그루 심어 당신에게 드릴까 하는 생각은, 시신을 태워서 다이아몬드로 만들어준다는 서비스에 대해 듣고는 씻은 듯이 지워져 버렸습니다.

그렇습니다. 당신이 내 심장을 이식받고 나서 며칠 뒤에 이 편지와 함께 다이아몬드가 배달될 것입니다. 당신에게 드리고 남은 것들을 높은 열로 태워 정수만 남긴 다이아몬드. 그대에 대한 내 사랑처럼 순수하고 투명한 빛을 발하는 다이아몬드. 그대의 마음처럼 티 하나 없이 곱고 매끄러운 다이아몬드가 그대의 손에 전해질 것입니다.

그것을 어찌 처리하는가는 전적으로 그대에게 남겨두도록 하겠습니다. 집안 어딘가에 두고 그것을 볼 때마다 나를 떠올려준다면 더없이 큰 기쁨이겠지만, 나를 팔아서 그대의 가계에 진 주름을 조금이라도 펼 수 있다면 그 또한 나에게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이겠습니다.

 

10.

그대, 잘 지내고 계시군요. 나는 이제 그대의 일부가 되었으므로, 마음을 비유할 때 많은 작가들이 상투적으로 사용하는 단어인 심장이 되었으므로 그대가 느끼는 것들을 모두 느낄 수가 있습니다.

깊고 깊은 나락으로 떨어져 유황불 속으로 던져질 줄 알았던 내가 이렇게 그대의 몸속에서 살 수 있게 된 것을 신의 은총이라 여깁니다.

그대의 마음이 편안하다는 것을 나는 몸소 느낄 수가 있습니다. 이제 그대는 조금씩 웃기도 하네요. 그 웃음이 내가 아닌 다른 남자를 향한다는 것에 내 심장이 쓰라리지만 말입니다. 아니, 당신의 심장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래요. 내가 이 마음을 전할 수만 있다면 당신은 이해하겠죠. 그 남자를 볼 때 기쁘면서도 왜 이리 마음이 불편한지. 그것은 그대가 느끼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대가 느끼는 것을 내가 느끼는 것처럼, 내가 느끼는 것을 그대도 느끼는 것이죠.

그 사실을 안다면 이번에는 그대가 심장을 파내고 싶다고 말할까요. 당신이 내 다이아몬드로 한 것처럼 이 심장을 발뒤꿈치로 짓밟은 후에 발길질해 깊은 바다로 차버리고 싶어질까요.

나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당신이 사랑하는 남자를 나도 사랑해야 옳은 일인지, 이 투기심을 더욱 불사질러 그대의 마음을 뾰족하게 만들고 그리하여 그 남자가 떨어져 나가도록 만들어야 하는지.

나는 관대한 남자일까요, 옹졸한 남자일까요. 내가 관대한 남자라면 애초에 당신에게 구애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겠죠. 로맨스란 사람을 옹졸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으니까요. 첫 편지에서도 얘기했었죠. 누구나 로맨스를 할 수 있는 성정을 지녔다고요. 당신에게 베푼 모든 것, 그것이 결국은 내 이기심의 발로였다는 것을 나는 깨닫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이렇게 당신의 꿈에 나타난 것입니다. 나에게 남은 것은 한 가닥의 혼에 불과하지만 그것마저도 그대에게 바치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이 나를 기쁘게 하기 때문입니다.

오오, 사랑하는 그대여. 부디 그대의 지친 영혼을 나에게 기대어 쉬시기를. 내가 그대에게 내어드릴 것이 이것뿐이라 해도 나는 기꺼운 마음으로 바치겠습니다. 그리하여 언젠가 그대가 나의 진심을 알아주고, 우리가 한마음 한 몸으로 해로할 수 있기를 염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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