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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경 사막의 빛

2009.10.31 01:2810.31

 마을에는 몇 년에 한 번씩 주기적으로 흉년이 들었다. 소녀의 마을에 동방의 상인들이 찾아온 것도 바로 그런 해였다.
 그 전 해부터 이례적으로 심하게 가물었다. 봄부터 여름까지 비가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았다. 본래 비옥했던 땅은 바작바작 타 들어가고 언제나 풍요롭게 이삭이 패고 알곡을 맺던 호밀과 귀리는 모두 말라 죽었다. 가을이 지나 겨울이 왔지만 눈이 한 송이도 내리지 않았다. 대지는 이듬해 봄에 싹을 틔워야 할 씨앗을 품은 채로 말라붙어 딱딱하게 굳었다. 메마른 봄이 지나 여름이 오자 벌판은 황무지가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먹을 것을 찾아 하나 둘씩 떠났다. 걸을 수 있는 나이의 아이들은 가장 가까운 마을부터 차례로 훑으며 구걸을 했고, 조금 더 기운이 있는 어른 남자들은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수도로 향했다.
 소녀의 아버지도 그렇게 떠났다. 이어서 두 동생들이 도망쳤다. 소녀와 함께 집에 남은 것은 어머니와 막내 동생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동생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렸고, 막내 동생은 아직 너무 어린데다 오랫동안 굶어 몸이 약해져서 떠나지 못했다. 그리고 소녀는 어머니와 아픈 동생이 걱정되어 떠날 수 없었다.
 동생은 죽어가고 있었다. 배가 머리통보다 더 크게 부어오르고 팔다리는 가뭄에 타 죽은 나무의 가지처럼 꼬치꼬치 말랐다. 먹을 것이라고는 햇볕에 타서 온통 쩍쩍 갈라진 밭에서 캐온 풀뿌리와 이미 다 벗겨서 더 벗길 것도 없어진 나무껍질밖에 없었다. 그것으로는 건강한 어른이라도 목숨을 지탱할 수 없었다. 동생에게는 빵이 필요했다. 그래서 동방에서 온 상인들이 자루 속에 가득 든 밀가루를 보여주었을 때 소녀는 무조건 고개를 끄덕였다.
 소녀가 상인들을 따라 집을 떠날 때 어머니는 울었다. 어머니 품에 안긴 어린 동생은 눈물조차 흘릴 기운이 없어 얼굴만 찡그렸다. 그 얼굴은 오랜 굶주림에 말라붙어 노인처럼 쪼글쪼글했다.
 “신이여, 자비를 베푸소서.”
 어머니가 눈물을 떨구며 중얼거렸다.


 상인들과 함께 소녀는 동쪽으로 동쪽으로 걸어갔다. 메카를 향해 기도하는 시간을 제외하면 상인들은 해가 떠 있는 동안은 쉬지 않고 움직였다. 천천히, 느긋하게, 그러나 끊임없이. 그래서 소녀도 상인들과 함께 걸었다.
 그렇게 걸어서 지나간 마을들은 모두 소녀의 고향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주인을 잃은 빈집들이 여기저기 을씨년스럽게 쓰러져 가고, 남아 있는 사람들은 모두 배가 커다랗게 부풀고 팔다리가 꼬치꼬치 마른 어린 아이들 아니면 노인이었다.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은 구걸할 기운조차 남지 않아서 소녀와 상인들을 그저 크게 뜬 눈으로 바라보기만 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소녀는 고향에 두고 온 엄마와 어린 동생을 떠올렸다. 그러나 도망치지는 않았다. 도망칠 수 없었다. 고향의 가족들은 입을 하나라도 덜어야 했고, 집이 아니라면 달리 갈 곳이 없었다. 게다가 도망치는 길에 굶어죽을 수도 있었고, 방금 지나온 마을에서는 굶주린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는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최소한 상인들과 함께 있으면 음식과 물은 얻을 수 있었다. 상인들은 소녀에게 특별히 친절하지는 않았지만 괴롭히지도 않았다. 그저 때가 되면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고, 엎드려 기도할 때 말고는 하루의 대부분을 걷고, 해가 지면 묵을 곳을 정해서 잠을 자고, 다음 날 해가 뜨면 다시 일어나 걸을 뿐이었다. 그래서 소녀는 계속해서 상인들과 함께 동쪽으로 동쪽으로 하염없이 걸어갔다.


 수도에 도착했을 때는 겨울이 되어 있었다. 상인들은 저자 거리로 나갔다. 소녀도 따라갔다. 성 안에서는 대공이 아버지인 왕과 전쟁을 하기 위해 북동쪽으로 군대를 이끌고 떠났다는 이야기가 떠돌고 있었다. 대공이 전쟁에 이겨서 이 나라의 거대한 땅을 통일할 것인가, 아니면 왕이 남쪽으로 쳐 내려올 것인가? 성 안의 사람들은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으며 그런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떠들어 댔다. 성문만 나서면 바로 그 바깥에서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고 어린 아이들이 떠돌아다니며 음식을 구걸하는데, 그런 일에는 아무도 관심조차 갖지 않는 것 같았다.
 상인들은 저자 거리에서 우선 겨울을 지낼 털가죽 옷과 가죽 신발을 샀다. 물건을 파는 사람들과 말이 통하지는 않았지만, 상인들은 털가죽을 만져보고 뒤집어보고 털을 뜯어 햇빛에 비춰보고 손가락으로 문질러 보며 세밀하게 조사한 후 돈 주머니를 조금만 열어 가게 주인에게 반짝이는 은전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손가락을 세워 숫자를 내보이며 고개를 끄덕이거나 흔드는 등 능숙하게 흥정했다. 털가죽과 신발을 충분히 사고 나서 상인들은 저자 거리의 나머지 가게들을 돌아다니며 앞날을 알려준다는 성화(聖畵), 물을 포도주로 바꾸어 준다는 돌, 손대는 자의 팔다리를 산산조각 낸다는 신성한 칼 따위를 구경했다. 그런 상인들 곁에 살짝 비켜서서 소녀는 혹시 수도로 떠났다는 아버지를 만나게 되지나 않을까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뭘 찾니, 꼬마야?”
 소녀는 고개를 들었다. 덩치가 커다랗고 지저분한 누런 턱수염을 아무렇게나 기른 뚱뚱하게 배가 나온 남자가 검은 털모자 아래 밀가루처럼 허연 얼굴에 싱긋 웃음을 띠며 다시 말했다.
 “배가 고프냐? 먹을 걸 줄까?”
 그리고 남자는 소녀에게 흑빵을 한 조각 내밀었다.
 상인들이 먹는 납작한 빵이 아닌, 촉촉하게 윤기가 흐르고 먹음직스러운 향을 풍기는 진짜 흑빵을 보자 소녀는 입 안에 군침이 돌았다. 그러나 털이 부숭부숭한 남자의 손을 보고 조금 무서워져서 받지 않았다.
 “수도에는 혼자 왔니?”
 남자가 다시 싱긋 웃으며 물었다. 소녀는 머리를 흔들고, 바로 뒤에 서서 흥정에 여념이 없는 동방의 상인들을 고갯짓으로 가리켰다.
 “아하, 동쪽에서 온 이교도들에게 잡혀 있구나?”
 남자가 턱수염으로 뒤덮인 얼굴을 씰룩거리며 웃었다. 그리고 소녀에게 몸을 숙이고 은밀하게 눈짓을 하면서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그 냄새 나는 동방의 이교도들이 정교를 믿는 너 같은 아이들을 데려다가 무슨 짓을 하는지 아니?”
 소녀는 몸을 움츠리며 고개를 저었다. 남자가 조금 더 몸을 숙이고 소녀의 귀에 얼굴을 바짝 갖다 댔다.
 “그 자들은 너처럼 어리고 예쁜 여자 아이들을 높은 탑에 가둬두고 상상도 못할 짓을 한단다.”
 남자가 속삭였다.
 숨결에서 역한 술 냄새를 풍기며 남자는 소녀의 귓가에 대고 동방의 이교도들이 정교를 믿는 어린 소녀들에게 저지르는 더럽고 끔찍한 일들을 자세히 이야기했다. 소녀가 점점 더 겁을 먹고 움츠러드는 모습을 보며 남자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 그리고 그 일이 다 끝나면 눈알을 뽑고 혀와 귀를 자른 뒤에 사막에 내버린단다. 눈이 멀고 귀가 들리지 않게 된 너 같은 아이들이 사막을 헤매다 쓰러지면 새들이 날아와 쪼아 먹고 들짐승들이 몰려와 뜯어먹게 되는 거지.”
 소녀는 조금 뒷걸음질 쳤다. 남자가 한 걸음 다가와서 굵고 털이 숭숭한 손가락으로 소녀의 뺨을 만졌다.
 “그러니까 꼬마야, 나랑 같이 가자. 아저씨가 맛있는 것도 주고, 아무도 널 해치지 못하게 잘 보호해줄 테니까, 응?”
 그렇게 말하면서 남자는 점점 더 얼굴을 가까이 대면서 조금씩 몸을 낮추었다. 그리고 한 손으로 소녀의 허리를 움켜잡고 다른 손을 치마 밑으로 넣으려 했다.
 소녀는 비명을 지르며 펄쩍 뛰었다. 동방의 상인들이 흥정을 하다 말고 돌아보았다. 소녀는 겁에 질려 뒷걸음질 치다가 뒤에 서 있던 동방의 상인과 부딪쳤다.
 상인은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남자를 쳐다보았다. 다른 상인들도 남자를 쳐다보았다. 남자가 상소리를 중얼거리며 소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소녀가 부딪친 상인이 소녀를 붙잡아 자신의 등 뒤로 숨겼다. 다른 상인들이 그 옆으로 다가섰다.
 남자는 상인들을 번갈아 쳐다보면서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나 허리띠에 단검을 꽂은 상인들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없이 마주 쳐다보자 슬금슬금 저자 거리의 군중 사이로 사라져 버렸다.
 남자가 가 버리자 소녀를 숨겨준 상인은 등 뒤에 몸을 움츠리고 선 소녀를 엄격한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한 손을 들었다. 소녀는 상인이 때릴 것이라고 생각해서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상인은 때리는 대신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소녀는 조금 놀라서 올려다보았다. 상인은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자기 발 바로 옆을 가리켰다. 곁을 떠나지 말라는 뜻으로 알아듣고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상인은 다시 한 번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말없이 돌아서서 하던 흥정을 계속했다.


 수도에서 상인들은 눈길을 끄는 여러 가지 신기한 물건들을 젖혀두고 별로 쓸모가 없어 보이는 평범하고 조그만 단지를 하나 샀다. 소녀를 등 뒤에 숨겨 주었던 상인이 그 단지를 소녀에게 내밀며 뭔가 말했다.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표정과 손짓으로 소녀는 그 단지를 잘 지키라는 뜻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날 밤은 오랜만에 들판이 아닌 여인숙에서 묵었다. 상인들이 모두 잠들고 나서 소녀는 단지 뚜껑을 몰래 열어 보았다. 단지 안은 겨울인데도 얼지 않은 물로 가득 찼고, 그 물 속에서 소녀의 새끼 손가락만한 조그만 물고기가 열심히 헤엄치고 있었다. 여인숙은 어두웠지만, 창문으로 비쳐 들어오는 희끄무레한 달빛 아래서 물고기의 비늘은 푸르스름한 은색으로 빛났다. 그 비늘이 예쁘고 처음 보는 물고기가 신기해서 소녀는 단지 안을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아껴 두었던 빵조각을 꺼내 조금 부스러기 내어 뿌려 주었다. 조그만 물고기는 표면으로 올라와서 빵 부스러기를 맛있게 받아먹었다. 소녀는 즐거워졌다.
 빵 부스러기를 모두 먹고 나서 조그만 물고기가 물 밖으로 잠깐 고개를 내밀었다.
 물고기와 눈이 마주쳤다 – 고 소녀가 생각한 순간, 물고기는 다시 무심하게 단지 안의 물속을 헤엄치고 있었다.


 말과 썰매까지 구한 후에 상인들은 수도를 떠나 다시 동쪽으로 향했다. 소녀는 단지를 안고 상인들이 준 털가죽을 덮어쓰고 썰매 한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서 동쪽으로 실려갔다.
 강을 건너 상인들은 남동쪽으로 내려갔다. 사람이 살지 않는 평원을 지나 계속 동쪽으로 이동하자 또 다른 강이 나왔다.
 강 유역의 들판은 가뭄의 피해를 입지 않은 것 같았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소녀처럼 얼굴이 희고 머리가 금발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소녀가 알아듣지 못하는 거칠고 투박한 언어를 사용했고, 소녀가 성호를 긋자 험상궂게 얼굴을 찡그리며 고함을 질렀다.
 그곳에서 상인들은 은전과 맞바꾸어 자루에 든 밀가루를 샀다. 상인들이 손바닥 위에 구리로 장식한 반지를 놓고 햇빛에 반짝여 보이자 알 수 없는 언어를 쓰는 사람들은 도끼를 들고 강으로 가서 수면을 두껍게 뒤덮은 얼음을 깨 주었다. 상인들은 강물을 길어 호리병 여러 개에 나누어 담았다. 그렇게 물과 먹을 것을 보충하고 나서 상인들은 털가죽을 덮어쓰고 썰매 위에 앉아 말을 몰아서 눈을 헤치고 다시 동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소녀도 털가죽을 덮고 단지를 끌어안고, 자기 몫의 빵을 조그만 물고기와 나눠 먹으며 상인들과 함께 갔다.


 강 유역의 마을을 지나자 다시 평원이 펼쳐졌다. 그곳에는 시체가 무수히 널려 흰 눈에 덮인 얼어붙은 벌판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화살을 맞아 죽은 시체도 있었고, 날카로운 무기에 몸을 베이거나 찔린 시체, 목이나 팔다리가 없는 시체도 있었다. 그 중 어떤 시체는 아직 죽지 않아서 사람의 기척을 듣고 신음소리를 냈다. 죽지 못한 몸에서 흘러나온 피가 흰 눈을 더럽히고, 약한 입김이 얼어붙은 대기 중에 흩어졌다.
 소녀는 썰매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서 눈을 감고 고개를 돌리고 작은 물고기가 든 단지를 꼭 껴안았다. 상인들이 소녀의 어깨에 털가죽을 한 겹 더 둘러 주었다.


 계절이 바뀌고 시간이 흐르는 동안 끝없이 동쪽을 향해 가면서 소녀는 차츰 상인들과 그들의 언어에 익숙해졌다.
 나를 어디로 데려가느냐고 소녀가 묻자 상인들은 술탄에게, 라고 대답했다. 술탄이 누구죠, 하고 소녀는 궁금해 했다. 상인들은 술탄이 신을 믿는 자들의 교주이며 지배자라고 대답했다. 왜 나를 술탄에게 데려가느냐고 소녀는 물었다. 상인들은 술탄에게 선물로 바치기 위해서, 라고 대답했다. 술탄은 한때 용맹한 무사이자 유능한 무역상으로, 세계 곳곳을 다니며 희귀하고 아름다운 것을 모으는 취미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나이가 들고 몸이 약해져서 궁궐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되었으니, 대신 상인들이 세계 곳곳을 다니면서 희귀하고 아름다운 것을 모아다가 바친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희귀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걸요.”
 소녀가 말했다. 상인이 대답했다.
 “너는 루시의 여자라서 우리의 여자들과는 달리 피부가 희고 눈이 푸르고 머리카락이 황금빛으로 빛난다. 그만하면 충분히 희귀하고 아름다우니 술탄께서도 기뻐하실 것이다.”
 그 말을 듣고 소녀는 자기 몸을 내려다보았다. 거친 평원을 하염없이 걸어오면서 피부는 햇빛에 그을었고, 금발은 부스스하게 엉킨 데다 지저분한 갈색으로 더러워졌다.
 “술탄께서 기뻐하시지 않으면 어쩌죠?”
 소녀가 물었다.
 상인은 미소를 띠고 고개를 가로저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동쪽으로 동쪽으로 이동해서 상인들은 강을 건너 사람이 살지 않는 메마른 평원을 지나 늪지대를 건넜다. 비탈길이 나왔을 때, 소녀는 작은 물고기가 든 단지를 안고 한 번도 경험해본 적이 없는 오르막길이라는 것을 상인들과 함께 힘겹게 끙끙거리며 걸어 올라갔다.
 고원에 도달하자 눈앞에 펼쳐진 것은 사막이었다. 소녀는 사막을 처음 보았다. 그곳은 사방이 탁 트인 하늘 아래 끝도 없이 이어지는 흙먼지와 돌뿐인 땅이었다.
 누군가 외쳤다.
 “여기서부터 신을 믿는 자들이 사는 술탄의 땅이다. 우리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신은 유일하시며 위대하시다. 신을 찬미하라!”
 그리고 상인들은 모두 남서쪽을 향해 엎드려 절했다.
 소녀는 그들의 신을 믿지 않았으므로 절하지 않았다. 그저 눈을 크게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늘의 푸른색은 소녀가 태어나 자란 고향의 하늘보다 흐릿해 보였고, 땅은 딱딱했으며 흙먼지로 뒤덮여 온통 불그스름한 노란색이었다. 나무 한 그루 없이 사방에 바위뿐이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살아남은 것은 군데군데 한 줌도 안 되는 잡풀밖에 없었다. 그런 풍경을 보고 소녀는 오래 전 고향을 떠나던 무렵에 가뭄으로 바짝 말라붙었던 들판을 떠올렸다.
 대상들은 엎드린 채로 모두 기도하기 시작했다.
 “신은 위대하시다. 전능하신 나의 신께 영광 있으라. 신은 부르는 자의 목소리를 들으신다. 우리의 신을 찬양하라….”
 그래서 소녀도 어렸을 때 어머니에게 배웠던 기억 속의 기도문을 더듬더듬 중얼거렸다.
 “… 신께 영광 있으라, 영광 있으라. 하늘의 왕이시여, 진리의 정신이여… 자비를 베푸소서, 자비를 베푸소서….”
 상인들이 고향에 도착했다는 것은 그녀에게는 다시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리라는 뜻이었다. 이제 그녀의 운명은 술탄에게 달려 있었다. 그래서 소녀는 되풀이하여 중얼거렸다.
 “자비를 베푸소서….”


 상인들은 그날 밤 유목민의 천막 한 구석에서 묵었다. 다음날 상인들은 해가 떠오를 무렵에 사막으로 나가서 아침 기도를 마친 후 유목민과 오랫동안 흥정을 했다. 유목민은 낙타에 실었던 것을 내렸다. 상인들이 그것을 받아서 흙먼지 투성이 땅바닥에 깔았다. 소녀는 어리둥절하여 지켜보았다.
 그것은 낙타털로 촘촘하게 짠, 튼튼하지만 뻣뻣하고 거친 피륙이었다. 상인들은 넓고 질긴 천을 땅바닥에 잘 펴고 나서 귀퉁이를 세심하게 접었다. 그리고 하늘을 쳐다보며 기다렸다.
 해가 머리 위로 떠올라 하얗게 달구어진 햇볕을 인정사정없이 내리쪼였다. 소녀는 상인이 가져다준 흰 천으로 얼굴과 머리를 가리고 천막 옆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무엇을 기다리는지도 모르면서 상인들과 함께 기다렸다.
 땡볕 아래에서 흙과 먼지뿐인 바위땅은 화덕처럼 달아올랐다. 그리고 상인들이 땅바닥에 깔아둔 천이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천이 떠오르자 상인들은 유목민과 함께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물과 음식이 든 자루를 천 위로 옮겨 실었다. 소녀도 상인들이 시키는 대로 조그만 물고기가 든 단지를 소중하게 안고 올라탔다.
 상인들까지 모두 올라탄 후에도 낙타털로 짠 천은 햇빛을 받으며 땅 위에 둥실 떠 있었다. 그리고 평탄한 흙먼지 투성이 고원을 미끄러지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낙타털 양탄자를 타고 가는 여행은 걸어서 갈 때보다 쉬웠지만 결코 편하지는 않았다. 양탄자는 뜨겁고 메마른 대기를 가르며 빠른 속도로 움직였고, 그 서슬에 일어난 흙먼지와 모래 섞인 바람이 눈으로, 코로, 입으로, 귀로 날아들었다. 따가워서 눈을 똑바로 뜰 수 없었고, 코와 입 안에서 모래가 서걱거렸다. 그래서 소녀는 한 구석에 잔뜩 웅크리고 앉아 상인들이 준 천으로 머리와 얼굴을 가리고 될 수 있는 대로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렇게 웅크리고 앉아 있다가 소녀는 물고기가 든 단지를 안은 채로 더위에 못 이겨 꾸벅꾸벅 졸거나 잠이 들어 버리기도 했다.
 양탄자는 해와 함께 움직였고, 해가 저물자 서서히 느려지다가 멈추었다. 상인들은 양탄자에서 내려서 모닥불을 피우고 둘러앉았다. 자루에 담아온 물을 마시기도 하고, 납작한 빵과 말린 대추야자, 굳혀서 덩어리로 만든 우유 등의 음식을 꺼내 나누어 먹기도 했다. 해가 완전히 지고 깜깜해지자 상인들은 낙타털 양탄자에 긴 막대를 기대어 임시 천막을 세우고 그 아래로 들어가서 모두 잠이 들었다.
 소녀는 잠들지 않았다. 겨울에 쓰던 털가죽을 꺼내 두르고 밖으로 나와 타다 남은 깜부기불 옆에 웅크리고 앉아서 이국의 달을 바라보았다.
 사막의 밤은 차갑고 맑고 고요했다. 별이 촘촘히 뜬 쪽빛 밤하늘은 얼음으로 빚은 것 같아서, 손가락으로 건드리면 쨍, 소리를 내며 갈라질 것처럼 투명해 보였다.
 소녀는 그런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동안 혼자 앉아 있었다. 모닥불이 식고 나니 점점 더 추워졌다. 소녀는 상인들과 함께 낙타 털 천막 아래 들어가서 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때, 달그락, 하는 소리가 들렸다. 소녀는 고개를 돌려 쳐다보았다. 낙타 털 천막 아래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소녀는 상인들 중 하나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천막 아래에서 나타난 것은 낯선 소년이었다. 몸집이 작고 무척 말랐다. 옷차림은 동방의 상인들과는 달라서 소녀의 고향 농군들이 입는 옷과 더 비슷했는데, 다만 윗옷의 가슴 부분을 터서 양쪽으로 여미고 허리띠로 묶어둔 게 달랐다. 낯선 소년은 아무 거리낌 없이 성큼성큼 걸어서 소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깜부기불에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를 나뭇가지를 보태고 남은 불씨를 뒤적여 모닥불을 되살렸다. 그리고 소녀를 보면서 싱긋 웃었다.
 웃음을 짓자 광대뼈 부근의 볼이 통통해지고 눈꼬리가 긴 눈이 반달 모양으로 휘어지면서 가늘어졌다. 그 얼굴이 왠지 다정해 보여서 소녀는 일단 안심했다. 그리고 다시 타오르기 시작한 모닥불이 따뜻해서 기분이 조금씩 좋아졌다.
 졸음이 몰려와서 눈이 저절로 감길 때까지, 소녀는 모닥불 앞에 낯선 소년과 함께 앉아 있었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상인들은 해가 뜨면 양탄자를 타고 달리다가 밤이 되면 양탄자를 천막 삼아 잠이 들었다. 그러면 소녀는 모두 잠든 후에 모닥불 앞에 앉아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깜부기불이 꺼질 때쯤엔 언제나 낯선 소년이 나타나 불씨를 되살렸다. 그리고 곁에 앉아서 소녀와 함께 차갑고 단단하고 투명한 사막의 밤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소녀는 소년에게 자신의 이름을 가르쳐 주었다. 스베뜰라나, 라는 이름을 소년이 어려워했기 때문에 다시 애칭을 가르쳐 주었다. 소년은 서투른 발음으로 조심스럽게 스베따, 스베따, 라고 되풀이했다.
 “빛이라는 뜻이야.”
 소년이 알아듣지 못할 것 같았지만 어쨌든 소녀는 말했다.
 “나는 미르노에 뽈레(평화로운 들판)라는 마을에서 왔어.”
 그리고 상인들이 말하던 것이 생각나서 소녀는 덧붙였다.
 “거기는 멀리 서쪽, 루시의 땅이야.”
 소년은 마치 알아들은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신의 가슴을 가리키며 뭔가 말했다. 그것이 소년의 이름이라고 생각해서 소녀는 아까 소년이 했던 것처럼 되풀이했다. 코, 료오? 코, 랴아? 소년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팔을 들어 한 방향을 가리키며 상인들의 언어로 서투르게 설명했다. 소녀는 알아들었다. 소년은 세상의 동쪽 끝에서 왔다.


 해가 떠서 상인들이 다시 낙타 털 양탄자 위에 올라탈 때면 소녀는 대상들 중에 소년이 있는지 유심히 보았다. 상인들은 모두 모래 먼지를 막기 위해 머리에서부터 긴 천을 덮어쓰고 있어서 얼굴도 옷차림도 잘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해가 지면 소년은 반드시 나타나서 소녀와 함께 모닥불 옆에 앉아 별이 가득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런 밤이면 소녀는 마음에 담아 두었던 이야기를 자신의 언어로 소년에게 들려주었다. 고향에 심한 가뭄이 들었던 이야기, 굶어 죽어가는 동생을 위해 밀가루 한 자루에 팔려온 이야기, 그리고 집을 떠나는 소녀를 배웅하며 울면서 기도하던 엄마의 모습.
 이야기하면서 소녀는 중얼거렸다.
 “엄마한테 내가 잘 있다고 말해줄 수 있었으면 좋겠어. 사막의 예쁜 달을 보면서 무사히 지내고 있다고 전해주면, 엄마도 걱정하지 않고, 자비를 베푸소서, 하고 기도하면서 울지 않을 텐데.”
 소년은 마치 전부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어느 밤에 소년은 소년에게 물었다.
 “너는 왜 여기까지 왔어?”
 소년은 말없이 웃으면서 두 눈을 가리키고, 다시 양 팔을 주욱 펼쳐서 사방을 가리켰다. 세상을 보고 싶어서? 소녀가 묻자, 소년은 다시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어떤 세상을 봤어?”
 소녀가 다시 물었다. 소년은 상인들의 언어로 간단하게 대답했다. 바다.
 “바다? 그게 뭐야?”
 소녀가 되물었다.
 소년은 잠시 고민한 뒤에 설명했다. 물. 넓은, 물.
 “넓어? 얼마나?”
 소녀가 그 때까지 본 가장 넓은 물은 강과 호수였다. 그러나 소년은 말했다. 이 사막만큼.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소녀는 잠시 머릿속으로 상상했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그게 너의 고향이야? 넓은 물?”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녀가 또 물었다.
 “물밖에 없어?”
 소년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설명했다. 산. 땅에는, 산.
 소녀는 이해하지 못했다.
 “산이 뭔데?”
 소녀의 고향에는 평원밖에 없었다. 풀이 자라고, 나무가 자라고, 호밀과 귀리가 자랐지만, 땅은 언제나 평평했다. 하늘과 닿는 곳까지, 평평한 땅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 사막처럼.
 소년은 대답 대신 팔을 구불구불하게 움직여 보였다.
 “땅이 구불구불해?”
 소년은 고개를 저었다. 팔을 들어 올려 보였다.
 “높아? 고원처럼?”
 소년은 조금 생각한 뒤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양손을 지붕처럼 여러 번 맞대 보였다. 땅의 끝이 보이지 않아. 산이 몇 개씩이나, 이렇게 뾰족하게 솟아 있어.
 소녀는 다시 머릿속으로 상상했다.
 “산과 바다, 그게 너의 세상이야?”
 소년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이제까지 보았던 세상과는 전혀 다르다고 소녀는 생각했다. 나도 언젠가, 산과 바다라는 것을 볼 수 있을까.


 낙타 털 양탄자를 타고 하루를 더 달리자 도시가 모습을 나타냈다. 성벽 안으로 들어가자 돌로 바닥을 깐 넓은 광장에서는 사람들이 가득 모여 물건을 사기도 하고 팔기도 했다. 시끄럽고 어수선하고 활기 넘치는 모습을 보고 소녀는 긴장했다. 여기가 바로 술탄이 산다는 상인들의 수도일까?
 “아니다. 이곳은 수도로 가는 길목이다.”
 상인들이 대답했다. 그리고 양탄자를 둘둘 말아 들고 시장으로 갔다. 말과 바꾸었다. 짐을 모두 말에 싣고 상인들은 도시를 벗어나 흙먼지 이는 사막의 길을 달렸다. 소녀는 말을 빠르게 달리면 조그만 물고기가 든 단지가 흔들리는 것이 걱정되어 자꾸 뒤에 처졌다.
 해가 저물자 상인들은 다시 노숙할 채비를 차렸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오늘이 사막에서 지내는 마지막 밤이 될 거다, 라고 한 상인이 말했다. 내일은 술탄의 궁성에 도착한다.


 그래서 그날 밤 소녀는 잠들지 못했다. 오랫동안 밤하늘을 쳐다보며 앉아 있었다. 소년도 언제나 그렇듯이 말없이 곁에 앉아 있었다.
 “술탄이 나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면 어쩌지?”
 소녀가 물었다.
 “이교도들의 왕은 정교를 믿는 사람의 눈알을 뽑고 혀와 귀를 잘라서 사막에 버린대. 정교를 믿는 여자들은 높은 탑에 갇혀서 죽을 때까지 술탄의 노리개가 된대. 나도 그렇게 되는 걸까?”
 소년은 생각에 잠긴 얼굴로 대답하지 않았다.
 소녀는 별이 총총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엄마의 모습을 생각했다. 자비를 베푸소서, 신이여, 자비를 베푸소서.
 소녀가 소년에게 물었다.
 “너는 어떤 신을 믿어?”
 소년은 하늘을 가리켰다. 착한 일을 하고, 남에게 베풀면, 죽어서 좋은 곳으로 간다.
 “우리랑 같네.”
 소녀가 말했다.
 소녀는 언젠가 오래 전 아버지에게 들은 이야기를 소년에게 들려주었다. 현명하신 블라지미르 왕이 루시의 사람들도 신을 믿고 종교를 가져야겠다고 생각해서 세계 곳곳으로 신하들을 보냈다. 남쪽 나라의 종교를 보고 온 신하들은 “그들은 일어섰다 앉았다 한 뒤에 넋이 나간 사람처럼 사방을 둘러보는데, 그 눈빛에는 슬픔만 가득할 뿐 아무 즐거움이 없었습니다”라고 보고했다. 서쪽 나라의 종교를 보고 온 신하들은 “그들의 의식은 딱딱하고 무의미하여 아무런 광영도 없었습니다”라고 보고했다. 그러나 그리스에 가서 정교의 의식을 보고 온 신하들은 “그들은 아름다운 성전에서 향을 피우고 노래를 부르며 엄숙하고 호화로운 예배를 거행하니 이곳이 천상인지 지상인지 알 수 없을 만큼 황홀하였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에 현명하신 블라지미르 왕은 크게 기뻐하여 신하들 모두에게 상을 내린 후 정교를 루시의 신앙으로 선포하였다. 후에 블라지미르 왕은 죽음을 맞이하여 영혼이 하늘로 떠난 후에도 시체가 썩지 않고 신비로운 향기가 나며 그 시신에서 나온 기름을 바르면 병든 자는 병이 낫고 눈먼 자는 앞이 보이는 기적이 일어나 루시의 첫 성자로 추대되었다….
 “정말로 기적이라는 게 있을까?”
 이야기를 마친 후에 소녀가 물었다.
 “너의 신과 나의 신과 저 상인들의 신은 모두 같은 신일까, 아니면 세상에는 나라와 부족의 수만큼 여러 신들이 있는 걸까?”
 소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광대뼈 부근이 통통해지고 눈이 가늘게 반달 모양으로 휘어지는 그 특유의 웃음을 얼굴 하나 가득 웃었다.
 소년의 다정한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소녀는 고개를 들어 수정처럼 단단하고 무심하게 투명한 밤하늘의 별빛 가득한 정적을 올려다보았다. 신이 존재한다면, 이 정적 속에 홀로 깨어 하늘을 바라보며 탄식하는 자에게 살며시 다가와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곁에 있으니, 라고 위로해줄 것만 같았다. 그런 정갈하고 조용한, 마지막 밤이었다.


 다음날 해 뜰 무렵부터 말을 달려서 정오가 되기 전에 상인들은 수도에 도착했다. 해가 머리 위로 오기를 기다려 상인들은 궁성 앞 광장으로 나아갔다. 길목의 도시에서 보았듯이 수도의 광장에도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 물건을 사기도 하고 팔기도 했다. 색색가지 비단, 무명, 아마, 황금과 은과 철과 구리, 칼과 창과 방패와 활과 화살, 각종 고기와 신선한 과일과 채소, 말린 나무 열매와 견과류까지, 시장에는 없는 것이 없었고 모자란 것도 없었다. 왁자지껄 웅성웅성하며 이런 물건들을 흥정하는 사람들은 모두 활력이 넘치고 즐거워 보였다.
 사람들과 그들이 뿜어내는 생기가 가득한 광장 뒤에 서 있는 술탄의 궁성은 본래 갈색 돌로 지은 딱딱한 사각형의 위압적인 건물이었으나 지금은 사막의 모래 먼지에 덮여 모서리가 닳고 그저 노르스름하게만 보였다. 그 성벽이 웅장하고 엄숙하지만 어딘지 지쳐 보인다고 소녀는 생각했다.
 궁궐 옆의 푸른 탑에서 누군가 기도 시간을 소리쳐 알렸다. 그러자 광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이 순식간에 하던 일을 멈추고 남서쪽을 향해 일제히 엎드렸다. 상인들도 모두 땅에 엎드렸다. 광장에 잠시 정적이 감돌았고, 이어서 푸른 탑 꼭대기에서 기도문을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신은 위대하시다…!”
 목소리는 광장을 넘어 사막까지 울려 퍼졌다. 그러자 광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이 되풀이했다.
 “신은 위대하시다…!”
 그 외침 소리는 광장을 뒤흔들고 하늘까지 울렸다. 신에게도 틀림없이 들릴 거라고, 소녀는 감탄하며 생각했다.
 기도가 끝난 후에 사람들은 모두 일어나서 하던 일을 계속했다. 소녀를 데려온 상인들만 궁성 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윽고 궁성의 높은 성벽 위로 보초병이 머리만 내밀었다. 상인들은 소녀를 앞세우고 서서 오른손을 왼쪽 가슴에 대고 경의를 표했다.
 보초병의 머리가 사라졌다. 궁성의 문이 열렸다.
 소녀는 상인들을 따라 궁성 안으로 들어섰다.


 그곳은 별천지였다. 바로 몇 걸음만 걸어 나가면 황량하고 메마른 땅에 모래 바람과 흙먼지만 떠도는 사막인데, 이곳에는 사방에 잔디가 깔리고 꽃과 나무가 자라고 곳곳에 분수가 있어 맑은 물이 솟았다. 궁 안의 건물들은 모두 외벽의 갈색 바탕에 청록색, 푸른색, 노란색, 흰색과 검은색으로 정교한 무늬를 장식해서 무척 아름다웠다. 잔디의 녹색과 꽃의 붉은색, 분수를 장식한 자줏빛 돌, 여기에 건물 외벽을 수놓은 갖가지 색깔의 향연 때문인지 궁 안에 들어서자 갑자기 햇볕이 더 찬란한 황금빛으로 빛나고 하늘도 더 맑고 짙은 푸른색을 띠는 것 같았다. 소녀는 넋을 잃고 구경했다.
 피부가 흑단처럼 검은 남자들이 나타났다. 윗옷을 입지 않고 흰 바지만 입고 머리에 금장식이 달린 흰 두건을 감아올린 검은 남자들에게 상인들은 낮은 목소리로 뭐라고 설명했다. 그 중 한 남자가 고개를 끄덕인 뒤에 소녀에게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몇 걸음 따라가다가 소녀는 상인들이 함께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당황하여 돌아보는 소녀에게 상인들 중 한 명이 손짓하며 말했다.
 “작별이다, 루시의 아이야.”
 상인이 말했다.
 소녀는 잠시 그를 쳐다보았다. 자신의 언어로 말했다.
 “다시 만날 때까지.”
 상인은 미소 지었다. 그리고 다른 상인들과 함께 검은 남자들을 따라서 어디론가 사라졌다.
 소녀는 피부가 검은 남자 뒤에 혼자 남았다.


 남자가 푸른 무늬로 벽을 장식한 건물 안으로 걸어 들어갔기 때문에 소녀도 따라갔다. 밖에 햇볕이 쨍쨍한데도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서늘했다.
 남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계속 성큼성큼 어디론가 걸어갔다. 소녀는 조그만 물고기가 든 단지를 꼭 끌어안고 피부가 검은 남자를 따라갔다. 남자가 걸음이 무척 빨랐기 때문에 종종걸음으로 서둘러야 쫓아갈 수 있었다.
 푸른 건물을 나와서 조그만 분수가 솟는 아름다운 정원을 거쳐 다시 다른 갈색 건물로 들어섰다. 그 건물을 나와서 또 다른 화사한 정원을 지나 세 번째 흰 건물로 들어섰을 때쯤 소녀는 지금 자신이 어디에 있는 건지 혼란스러워졌다.
 네 번째인지 다섯 번째로 들어간 건물 안에서 피부가 검은 남자는 어느 순간 사라져 버렸다. 혼자 남은 소녀는 당황하여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때 갑자기 여자들이 나타났다.
 소녀는 이렇게 많은 여자들을 한꺼번에 본 적이 없었다. 여자들의 갈색 피부에는 황금빛으로 윤기가 흘러 어딘지 신비로워 보였다. 다들 커다란 눈이 깊은 검은 색으로 빛났고, 가슴이 크고 허리가 가늘어 늘씬한 미인들이었다. 목걸이와 팔찌와 반지로 치장하고 소녀가 처음 보는 화려하고 이국적인 옷을 입은 눈부신 미녀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걸면서, 때로 깔깔 웃으면서, 소녀를 건물의 더욱 더 깊숙한 안쪽으로 데리고 갔다. 그곳에서 여자들은 소녀의 옷을 벗기고 꽃잎을 띄운 따뜻한 물이 가득 담긴 욕조 안에서 목욕을 시켰다. 천천히 오랫동안 공을 들여 소녀의 몸을 씻기고, 머리를 감기고, 빗기고, 좋은 냄새가 나는 기름을 온몸에 문질렀다. 이 과정이 모두 끝나자 여자들은 소녀에게 길고 얇고 부드러운 천을 여러 겹 둘러 화려하게 옷을 입히고 목에는 목걸이를, 팔에는 팔찌를 걸치고 손가락에는 반지를 끼워 주었다. 그리고 소녀를 앉혀 놓고 여자들은 원래 색깔로 돌아온 긴 금발을 땋아주기도 하고 매끈한 피부가 더 하얗고 생기 있게 보이도록 분과 연지를 발라주기도 했다.
 마침내 치장이 끝나자 그 중 가장 나이가 많고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 앞으로 나와서 소녀의 전체적인 모양새를 점검했다. 그리고 말했다.
 “나는 술탄의 왕비다.”
 소녀는 깜짝 놀랐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처음에는 고개를 숙였다가, 상인들이 하던 것이 생각나서 오른손을 왼쪽 가슴에 댔다. 왕비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이었다.
 “지금부터 너는 술탄을 배알하러 간다. 그건 알고 있겠지?”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왕비가 다시 말했다.
 “술탄은 연로하셨고 몸도 많이 허약하시다. 곁에 앉아서 말벗을 해 드리고, 심부름을 시키면 그대로 따르면 된다.”
 소녀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왕비는 손을 뻗어 소녀의 뺨을 쓰다듬었다.
 “아름답구나. 술탄께서도 좋아하실 것이다.”
 그리고 왕비는 중얼거렸다.
 “그런데 너무 어려서…. 노인 옆에서 시중드는 게 힘들 텐데….”
 그리고 왕비는 주위의 여인들에게 신호했다. 소녀는 여자들이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술탄의 침실은 또 다시 건물을 나가서 운치 있는 소정원을 거쳐 다른 건물을 지나서 찾아간 푸르고 커다란 건물 안에 있었다. 윤기가 흐르는 새까만 흑단으로 된 거대한 문을 양쪽에서 조금씩 열어 소녀가 들어갈 틈을 만들어주고 여인들은 고갯짓으로 신호했다. 소녀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나서 안으로 들어갔다. 등 뒤로 텅,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에 소녀는 깜짝 놀라 돌아보았지만 이미 문은 닫힌 뒤였다.
 방 안은 어둠침침했고, 향을 피워놓아서 신비한 향내와 함께 자욱이 안개가 낀 것처럼 보였다. 술탄의 침상은 얇은 천을 여러 겹 드리워 가려놓았다. 소녀는 침대 옆으로 다가갔다.
 술탄은 거대했다. 얼굴과 손에 주름이 가득하고 가슴을 온통 뒤덮은 수염도 눈처럼 희었지만, 소녀의 눈에 누워 있는 술탄은 단단한 거목이 쓰러진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소녀는 더욱 더 겁을 먹었다.
 한참동안 그렇게 서서 침상에 누운 술탄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침내 인기척을 느낀 술탄이 눈을 감은 채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 누구냐?”
 목소리는 낮았지만 방안에 진동했다. 마치 땅 속 깊은 곳에서 울려나오는 것 같았다.
 소녀는 목청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루시의 여자입니다. 사막의 대상들이 술탄께 선물로 보냈습니다.”
 술탄은 눈을 가늘게 떴다. 상인들처럼 검은 눈동자가 소녀를 향했다.
 “… 가까이 오너라.”
 소녀는 가까이 다가갔다.
 “… 더.”
 술탄이 힘겹게 손을 움직였다. 소녀는 조심스럽게 침상으로 다가가서 술탄 곁에 앉았다.
 술탄이 소녀의 손등을 쓰다듬었다. 거친 갈색 피부에는 검버섯이 가뭇가뭇하게 피었고, 손이 무척 컸다.
 “… 예쁜 아이로구나.”
 술탄이 중얼거렸다. 소녀는 조금 안도했다.
 술탄이 깊게 울리는 목소리로 천천히 물었다.
 “너는…, 신을 믿느냐?”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술탄은 길게 후으, 하고 한숨인지 탄식인지 모를 소리를 냈다. 그리고 더 이상 아무 말이 없었다.
 잠든 것일까, 하고 소녀가 생각하기 시작했을 때, 술탄이 다시 말했다.
 “네 고향 이야기를…, 해 주련.”


 소녀는 천천히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했다. 가뭄이 들어서 마을을 떠나온 이야기 외에도, 고국의 수도를 지나왔을 때 아버지인 왕과 대공인 아들 사이에 전쟁이 났던 이야기와 들판에 죽은 시체가 가득했던 것도 이야기했다. 그리고 햇빛을 받으면 떠오르는 양탄자를 타고 사막을 달려 이곳까지 찾아온 것도 이야기했다. 술탄은 눈을 감은 채로 누워서 말없이 듣고 있었다.
 이야기가 다 끝난 후에도 술탄은 눈을 뜨지 않았다. 술탄이 완전히 잠들었다고 생각한 소녀는 살그머니 일어나서 방을 나가려 했다. 그러나 소녀가 몸을 살짝 움직이려는 순간 술탄이 말했다.
 “… 내 아들들도, 전쟁에…, 나갔다.”
 소녀는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술탄이 다시 깊이 울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성스러운 땅을…, 되찾기 위해…, 프랑크 인들과 싸우러 갔다.”
 소녀는 이제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그대로 앉아 있었다.
 술탄이 다시 중얼거렸다.
 “잠시 이대로…, 옆에…, 있어 주겠니, 예쁜 아이야….”
 “예, 그럴게요.”
 소녀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술탄은 다시 후으, 하고 길게 한숨 같은 소리를 냈다.


 술탄 곁에 있으면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는 사실을 소녀는 차츰 깨달았다.
 연로한 술탄은 하루의 대부분을 침상에 누워서 보냈다. 그럴 때 곁에 앉아서 술탄의 손을 잡아주는 것이 소녀의 주된 임무였다. 부르면 대답을 하고, 수건을 가져오거나 부채를 살살 부쳐주는 등 간단한 시중을 들었다. 그 밖의 힘든 일은 시종들이 처리했으므로 소녀가 신경 쓸 일은 거의 없었다. 술탄은 소녀를 언제나 ‘예쁜 아이야’라고 불렀고, 간혹 곧바로 대답하지 못하거나 심부름이 늦어지는 일이 있어도 야단치지 않았다. 침상에 앉아 술탄의 손을 잡고, 눈을 감은 채 잠든 것 같은 그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소녀는 종종 평온과 고요 속에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나이가 들면 저절로 이렇게 평화로워지는 것일까, 라고 소녀는 가끔 생각했다.
 그렇게 잠든 듯이 누워 있다가 술탄은 문득 물었다.
 “이곳이 마음에 드니…, 예쁜 아이야?”
 소녀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예.”
 술탄은 아무 말이 없었다. 잠드신 걸까, 라고 소녀가 생각했을 때, 술탄이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내 목숨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소녀는 무어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술탄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젊었을 때, 나는…, 야심찬 왕이었다…. 서쪽으로는 바다 건너 비잔티움…, 카이로…, 동쪽으로는 톈산과 쿤룬 산맥을 넘어…, 티벳 왕국과…, 지나(支那)까지…., 내 나라의 상인들이 다니는 길이라면…, 가 보지 않은 곳이 없었다….”
 소녀는 말없이 귀를 기울였다. 술탄은 깊이 울리는 목소리로 낮게 속삭였다.
 “크지 않더라도…, 강하고…, 부유하고…, 아름다운 나라를…, 만드는 것이…. 내 꿈이었다…. 신을 위하여…, 내 백성들을 위하여….”
 술탄은 눈을 가늘게 뜨고 소녀를 쳐다보았다.
 “… 그리고 나는…, 그 꿈을 이루었다….”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술탄은 소녀를 쳐다보며 말했다.
 “너를 보면…, 그 시절이…, 생각난다…. 이국의 땅…. 낯선 하늘…. 율법 외에는, 거칠 것이 없고…, 신 외에는, 두려울 것이 없던….”
 술탄은 다시 눈을 감았다.
 소녀는 기다렸다. 한참이나 술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얇은 이불을 끌어당겨 덮어주려 했을 때, 술탄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내가 죽고 나면…, 네가 원하는 곳으로 가도 좋다…. 이 나라에 남아 있든, 고향으로 돌아가든….”
 술탄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다시 소녀를 쳐다보았다.
 “… 하지만,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은…, 곁에 있어 주겠니, 예쁜 아이야….”
 “예.”
 소녀가 대답했다.
 “그럴게요.”
 술탄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고맙구나….”
 그리고 술탄은 다시 후으, 하고 깊은 탄식 같은 소리를 냈다. 잠이 들었다.


 날씨가 부드럽고 기운이 나는 날이면 술탄은 정원을 산책했다. 그럴 때는 왕비와 소녀가 양 옆에서 부축했다. 술탄은 아주 느리게 조금씩 걸어서 침소가 있는 건물 앞의 큰 정원까지 나갔다. 그 정원에는 커다란 연못이 있었고, 못가에는 긴 의자가 있어서 술탄은 그 의자에 누워서 쉬곤 했다. 그리고 긴 의자 옆에는 나무를 엮어서 만든 꽤 높은 탑이 있었다.
 “저건 무슨 탑이죠?”
 소녀가 왕비에게 물었다. 왕비는 웃으면서 말했다.
 “조금만 기다리렴. 직접 보게 될 테니.”
 긴 의자에 누워서 한참이나 숨을 고른 끝에 술탄은 손짓으로 신호했다. 술탄의 발치에 서 있던 검은 피부의 시종들이 어디론가 뛰어갔다. 조금 뒤에 시종들과 함께 나타난 것은 사막의 밤에 소녀와 함께 하늘을 올려다보았던 동쪽에서 온 소년이었다.
 “아….”
 그러나 소녀가 인사를 할 새도 없이, 소년은 날렵한 몸짓을 탑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탑 꼭대기에서 소년은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기다렸다. 올려다보던 소녀와 눈이 마주치자 소년은 전처럼 광대뼈 부근이 통통해지고 눈이 가늘게 반달처럼 휘어지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 때, 술탄이 긴 의자에 누운 채로 손을 까딱, 움직였다. 그와 함께 소년은 탑에서 힘차게 뛰어내렸다. 뛰어내리다니, 저렇게 높은 곳에서? 소녀는 겁에 질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얼어붙은 채 지켜보고 있었다.
 탑에서 뛰어내린 소년은 물결도 거의 일으키지 않고 우아하게 연못으로 떨어졌다. 이대로 떠오르지 않는 걸까, 하고 소녀는 걱정했다. 그러나 조금 뒤에 소년은 수면 위로 머리를 내밀고 한 번 고개를 흔들어 물을 튀겨낸 뒤 소녀와 술탄을 향해 다시 그 함박웃음을 지었다.
 술탄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왕비가 끼고 있던 팔찌를 빼어 연못으로 던졌다. 팔찌가 연못에 떨어지자마자 소년의 머리도 물속으로 들어갔다. 조금 뒤에 다시 나왔을 때 소년은 입에 팔찌를 물고 있었다.
 시종이 소년에게서 팔찌를 받아 물기를 닦아낸 후 정중하게 왕비에게 내밀었다.
 “아니다.”
 왕비가 고개를 저었다.
 “술탄을 즐겁게 해 드렸으니 그건 저 아이에게 주어라.”
 시종은 소년을 소리쳐 부른 후 다시 팔찌를 연못으로 던졌다. 소년은 팔찌가 물속으로 떨어지기 전에 잡았다. 그리고 물 밖으로 다리를 내보이며 수면 가까이에서 빙글, 한 바퀴 재주를 넘었다. 다시 물 밖으로 몸을 내밀고 소년은 왕비를 향해 오른손을 왼쪽 가슴에 대 보였다. 그리고 소녀를 향해 함박웃음을 지었다.
 왕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 하는구나.”
 소녀도 웃었다.


 술탄이 연못가의 긴 의자에서 잠들었을 때나 분수 곁의 의자에서 졸고 있을 때면 왕비는 가끔 소녀에게 물었다.
 “루시의 아이야, 힘들지 않니?”
 소녀는 열심히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아요. 이곳은 아주 아름답고, 모두들 저에게 친절하신 걸요.”
 왕비가 다시 물었다.
 “고향을 멀리 떠나왔으니 외롭지 않니?”
 소녀는 조금 생각한 뒤에 솔직하게 대답했다.
 “엄마가 보고 싶어요.”
 “그렇구나….”
 왕비가 한숨을 쉬었다. 소녀는 얼른 말했다.
 “엄마한테, 잘 지낸다고 전해주고 싶어요. 그러면 엄마도 걱정하지 않을 테니까요.”
 왕비는 조금 웃었다.
 “잘 지낸다고 전해도, 엄마는 본래 걱정한단다.”
 그리고 왕비는 말했다.
 “내 아들, 술탄의 가장 어린 아들도 고향을 멀리 떠났다. 성스러운 땅을 되찾기 위해 프랑크 인들과 싸우고 있지. 벌써 삼 년이 지났단다.”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왕비가 탄식했다.
 “몇 달에 한 번씩 전령이 소식을 전해 오지만, 그래도 나는 걱정되는구나. 다치지 않았는지, 병들지는 않았는지….”
 왕비는 길게 한숨을 쉬고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닦았다.
 소녀는 위로했다.
 “무사하실 거예요. 반드시 전쟁에 이기고,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오실 거예요.”
 왕비는 조금 웃었다.
 “고맙구나, 착한 아이야….”
 그리고 왕비는 말했다.
 “전쟁이 끝나면 내 아들은 이곳으로 돌아와 다음 술탄이 될 거란다. 그 때가 되면 너를 고향에 보내주마.”
 “감사합니다.”
 소녀는 말했다. 그리고 조금 생각한 뒤에 물었다.
 “큰 아들이 아닌데도 왕이 될 수 있나요?”
 왕비는 웃었다.
 “서방의 나라에서는 가장 나이 많은 아들이 가문을 잇지? 이곳에서는 형제가 함께 부모를 모시다가 맏이부터 차례로 결혼해서 분가하기 때문에 마지막에 집안을 물려받는 것은 막내란다.”
 그렇구나, 하고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왕비가 이야기했다.
 “술탄에게는 본래 왕비가 네 명 있었다. 위의 두 왕비는 이곳의 여인들이었는데 연로하여 세상을 떠났고, 세 번째 왕비는 티벳 왕국의 여자였는데 고향을 너무나 그리워한 나머지 특별히 술탄의 허락을 얻어 집으로 돌아갔단다.”
 왕비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러나 또렷하게 말했다.
 “나는 멀리 아쉬-샤암(다마스쿠스)에서 이곳까지 와서 술탄의 네 번째 왕비가 되었다. 내 본분을 다하여 술탄을 섬기고, 아들을 낳았다. 다른 왕비의 왕자들은 아마 성스러운 땅에서 자기 자리를 찾아 무역을 하고 신을 믿는 그곳의 백성들을 다스리겠지. 내 아들은 돌아와 이 나라를 지배하고 이끌어갈 것이다.”
 소녀는 고개를 숙이고 오른손을 왼쪽 가슴에 댔다. 왕비가 다시 말했다.
 “그러니 그 때까지만 기다려라, 루시의 아이야. 원한다면 이곳에 머물러도 좋지만, 고향이 그립다면 돌아가도 좋단다.”
 그리고 왕비는 덧붙였다.
 “낯선 나라에서 혼자 살아간다는 건 너무 외로운 일이니까.”
 “… 감사합니다.”
 소녀가 말했다.


 소녀는 침소 안이나 정원의 긴 의자에 누워 있는 술탄 곁에서 하루의 대부분을 보냈다. 술탄은 눈을 감고 잠을 자는지 깨어 있는지 모를 상태로 지내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정신이 맑아지면 때때로 지난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바다를 건너다 배가 풍랑을 만난 이야기. 전쟁에 나갔던 이야기. 비단과 향신료 값을 속이려는 이교도들과 논쟁해서 이기고 마침내 많은 금은보화를 벌어서 돌아온 이야기. 술탄이 이런 이야기를 들려줄 때마다 소녀는 그 끊어질 듯 이어지는 낮은 목소리에 흥미진진하게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소녀는 술탄이 정원의 연못가에 나갈 때면 그곳에서 소년을 보았다. 소년은 술탄의 명을 받고 높은 탑에서 연못으로 뛰어내리기도 했고, 때로는 물속에서 놀다가 술탄이 못가에 와서 앉으면 재주를 부리기도 했다. 물 밖에서 소녀와 함께 사막의 밤을 올려다보던 소년은 작고 마르고 조용했지만, 물속에서 소년은 연못을 온통 제 세상처럼 헤엄쳐 다니며 기운차고 장난기가 넘치고 무척 즐거워 보였다. 소년이 능숙하고 날렵하게 몸을 움직여 물보라를 일으키며 여러 가지 재주를 부리는 것을 지켜보면서 소녀는 마치 물고기 같다고 속으로 감탄했다. 그러고 보니 함께 사막을 건너온 단지 속의 조그만 물고기는 어떻게 되었을까. 단지는 처음 궁성에 들어온 날 누군가 가져가 버렸다. 이렇게 큰 연못이 있으니 물고기도 아마 저 안 어딘가에서 자유롭게 헤엄치고 있겠지. 소녀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술탄을 부축하고 마지막으로 연못가를 산책한 것은 햇볕이 유달리 강하게 내리쬐는 날이었다. 긴 의자에 누운 술탄 위로 시종들이 차양을 드리워 햇빛을 가려주었다. 그날따라 술탄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소년에게 탑 위로 올라가서 뛰어내리도록 했다. 소년은 지치지도 않고 명령대로 탑을 올라가서 높고 커다란 물줄기를 일으키며 연못 속에 풍덩, 뛰어들었다. 그리고 헤엄쳐 나와서 다시 탑 위로 올라가 기다리다가 술탄이 손가락을 움직이면 뛰어내렸다.
 “오늘 술탄께서 유난히 저 아이의 재주를 즐기십니다.”
 왕비가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술탄의 얼굴을 살피며, 깃털 부채로 살살 바람을 부쳐주며 말했다.
 술탄이 대답했다.
 “물길이…, 솟아오르는 것이…, 아름답다….”
 술탄이 다시 손가락을 까딱, 움직였다. 소년이 뛰어내렸다. 풍덩, 소리가 나며 물길이 높이 솟아올랐다.
 “물은…, 영혼을…, 정화시킨다….”
 술탄이 중얼거렸다. 소년은 수면으로 머리를 내밀고 한 번 고개를 휘저어 물을 털어낸 뒤 연못가로 헤엄쳐 나왔다.
 소년이 다시 탑을 올라가기 시작했을 때 술탄이 말했다.
 “너희들…, 모두…, 고향에…, 돌아가도 좋다.”
 왕비가 부채를 부치던 손을 멈추었다. 술탄이 다시 말했다.
 “현명한…, 왕비여…. 왕자의…, 어머니여…. 내…, 왕국을…, 부탁한다.”
 소년이 탑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술탄의 신호를 기다렸다.
 술탄이 오른손을 높이 들었다. 그리고 외쳤다.
 “신은 위대하시다…!”
 굵고 낮은 그 목소리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강했고, 하늘과 땅을 진동시키며 울려 퍼졌다. 그리고 술탄은 잠시 오른손을 쳐든 채 그대로 있었다. 왕비도, 소녀도, 시종들도 모두 정지한 채로 숨을 죽이고 술탄을 쳐다보았다.
 술탄의 오른손이 툭, 하고 떨어졌다.
 그 다음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소녀는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술탄의 마지막 명을 받은 소년이 탑에서 뛰어내렸고, 소년의 몸이 연못물에 닿은 순간 하늘까지 닿을 듯한 물기둥이 치솟았다. 연못의 물이 태풍처럼 휘몰아치며 일어나서 정원을 휩쓸었다. 물이 덮쳐왔을 때 소녀는 눈을 감고 양 팔로 몸과 머리를 감쌌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소녀는 물길에 휩싸여 공중에 떠 있었다.
 ‐ 술탄은 죽었다. 이곳과의 인연은 모두 끝났다.
 소녀를 감싼 은빛 물줄기가 말했다. 투명한 물길 사이사이로 푸른 비늘이 비쳐 보였다.
 ‐ 고향에 데려다 주겠다.
 그리고 다음 순간 소녀는 집에 돌아와 있었다.


 소녀가 돌아온 날로부터 사흘 동안 비가 내렸다.
 마침내 비구름이 걷히고 대기를 가득 채웠던 은빛 물방울이 엷어져 하나로 모이기 시작했을 때 소녀는 물었다.
 “너는 누구야? 어째서 나를 도와주는 거지?”
 푸른색과 은색으로 빛나는 물줄기가 대답했다.
 ‐ 네 몫의 음식을 나눠주었으니까.
 물줄기가 공중에 하나로 길게 모였다.
 ‐ 함께 사막의 밤하늘을 바라보았으니까.
 물줄기의 비늘이 아른아른 반짝였다. 아주 예쁜 뱀 같다고 소녀는 생각했다.
 ‐ 네가 나를 잊지 않는 한, 해마다 여름이면 찾아오겠다.
 하늘을 가득 메운 푸른 용은 그렇게 말하고 사라졌다.


 소녀가 떠났을 때 아기이던 동생은 상인들이 주고 간 밀가루 덕에 목숨을 건지고 이제는 남자아이가 되어 있었다. 그 뒤로 한 차례 더 흉년이 들었지만, 수도에 일하러 갔던 아버지가 곡물 씨앗을 많이 가지고 돌아와서 열심히 농사를 지어 비축해둔 덕에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고 했다. 다만 도망쳤던 두 동생은 아직도 소식이 없어서, 가족들은 기다리고 있었다.
 소녀가 돌아왔을 때 어머니는 눈을 크게 뜨고 쳐다보다가 다가와서 얼굴을 더듬더듬 만져보고는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아버지는 한참이나 주저하다가 소녀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살며시 쓰다듬고는 죽은 줄만 알았는데, 라고 말한 뒤에 소녀의 손을 양손으로 꽉 움켜잡고 놓지 않으려 했다. 어린 동생만 소녀를 알아보지 못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소녀가 돌아온 뒤로 가뭄도 홍수도 마을을 침범하지 못했다. 매년 초봄에서 여름까지 알맞게 비가 내렸고, 그러면 들판이 온통 녹색으로 뒤덮였다가 가을이 되면 초목이 풍성한 열매를 맺었다. 아버지는 이웃 마을에 가서 곡식을 팔아 말을 사 왔고 어머니는 빵과 고기를 구웠다. 막내 동생은 쑥쑥 자랐다. 가족은 소식을 알 수 없는 두 동생을 함께 기다렸다.
 그리고 비가 오는 날이면 소녀는 세상의 동쪽 끝에서 온 소년을 생각했다. 투명하고 단단한 사막의 무심한 밤하늘을 함께 바라보던 일을 떠올렸다. 동방의 상인들이 언젠가 다시 한 번 마을을 지나가기를, 사막의 왕비가 무사히 고국으로 돌아온 아들을 품에 안게 되기를, 그리고 메마르고 단단한 땅에 묻혔을 술탄의 무덤가에도 촉촉한 비가 내려 꽃이 피고 키 큰 나무가 그늘을 드리우기를, 조금은 그리운 마음으로 소녀는 기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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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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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다 09.11.01 19:58 댓글 수정 삭제
    보라님 글은 언제 봐도 흡입력이 있는 것 같아요. 소녀와 함께 저도 여행을 하고 온 것 같은 기분이 드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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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라 09.11.01 23:21 댓글 수정 삭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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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상희 09.11.06 23:30 댓글 수정 삭제
    저 역시 소녀와 함께 어딘가 신비로운 곳을 여행을 한 기분이 드네요. 다만 한국소년이 뭔가 역할을 할 거란 기대를 했는데.. 조금 아쉽네요. 그리고 마지막 부분은 꼭 오즈의 마법사에서 도로시가 마법구두의 뒷굽을 쳐서 캔자스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연상하게 하네요. 잘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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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라 09.11.07 09:18 댓글 수정 삭제
    감사합니다 ^^

    저 고려의 소년용(?)은 소녀를 집에 데려다 주는 것으로 러시아 항공사 기준 비행기 표값 약 70만원을 절약했으니 나름대로 역할을 다한 것이라고 생각합니...(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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