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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로냥 취업경위서

2009.07.31 22:4007.31

    내게는 그 방면으로 조예가 깊은 소꿉친구가 하나 있었다. 그냥 점술이나 신비주의에 흥미가 있다는 정도가 아니라 그녀의 고모인가 이모인가 아니면 육촌의 사돈의 팔촌이던가가 진짜 마법사였다는 거다. 황당하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그녀가 딱히 내게 실없는 장난을 칠 이유도 없고 해서 진지하게 ‘실은 나, 마법사를 찾아 가야 하는데 말이지’하며 상담해 왔을 때는 들고 있던 콜라컵을 내려 놓고 테이블에 바싹 몸을 당겨 앉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내 소꿉친구—는 수사관을 지망하고 있었다. 나야 체육 시간에 30분만 열심히 달려도 근육이 일주일 내내 뻐근해지는 한심한 여자이므로 현장에서 범죄자와 힘을 겨뤄가며 사회에 공헌하겠다는 그녀가 다만 눈부셨을 뿐 더 자세한 내막은 모르겠지만, 여하간에 경찰대학인지에 진학을 희망하는데 여러모로 힘든 점이 있었던 모양이다. 성적은 노력해서 올리면 된다. 내신도 체력 문제도 전부 노력하면 된다. 그래서 몇 년간 열심히 노력해 왔다. 그런 기특한 이야기 끝에, 그녀는 한숨을 쉬며 털어 놓았다. ‘키가 작아서 원서를 낼 수 없을 것 같다’라고. 수사관이 되어 범죄를 소탕하겠다는 기특한 청소년에게 이 나라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지는 못할 망정 그런 가혹한 기준을 들이대고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던 나는, 풀 죽어 있는 그녀 대신 한 시간 정도 나라 욕을 해 주었다. 교육부와 국방부와 경찰청을 싸잡아 비난하느라 콜라컵 속의 얼음이 몽땅 녹는 것도 모르고 있는 나를 그녀는 미미한 웃음을 띄운 채 어른스럽게 바라보다가 갑자기 그 말을 꺼냈다.
  
    ‘그 문제 때문에, 나, 마법사를 찾아 가야 하는데 말이지.’
  
    소원을 들어주는 마법사가 있다고 했다
    현직 마법사였던 그녀의 고모인가 이모인가 육촌의 사돈의 팔촌인가 하는 사람이 몇 년 전 숨을 거두었을 때 장례식장 구석에서 울고 있는 그녀를 향해 누가 ‘헬리엔. 델뎁틸. 암브롯시아의 가족이지?’하고 말을 붙였단다. 엄청나게 얄밉게 느껴질 만큼 정확한 발음으로, 그러니까 꼭 사건사고 소식을 전하면서 ‘효과’를 ‘효꽈’대신 ‘효과’라고 제대로 발음하면서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 아나운서같이 대수롭지 않게. 그녀가 울던 걸 멈추고 퉁퉁 부은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더니 그 사람이 어깨를 꼭 한 번 툭, 두들겨 주고 나서 ‘헬리엔. 델뎁틸. 암브롯시아에게는 빚이 있었는데 갚지 못하게 되었으니 너라도 나중에 곤란해 지면 오도록 해라’하며 연락처를 알려주고 갔다는 것이다. 너무 열심히 울고 있었던 탓에 눈 앞이 뿌얘서 얼굴도 잘 보지 못했지만 아무튼 믿을만한 목소리였단다.
   
    [헬리엔 델…… 아무튼 그건 뭐야?]
    [그분의 마법사 이름이래.]
    [흐음.]
    [마법사라는 건 알고 있었어. 친척 중에서도 알고 있는 건 나 하나였지만, 진짜였어. 결혼을 하지 않은 것도, 아이가 없었던 것도, 전부 마법사였기 때문이랬어.]
   
    한숨을 폭 쉬며 그녀가 쭈삣쭈삣 말을 이었다.
  
    [이제 와서 몇 센티나 되는 키가 갑자기 클 리 없잖아. 수험까진 몇 달 남지도 않았고. 그래서 한 번 찾아가 소원을 빌고 싶은데…… 좀 무서워. 왜, 소원을 비는 덴 대가라는 게 있다잖아. ‘그분’도 그 대가로 평생 가족을 이루지 못한 거였으니까.]
   
    그래서,
    나는 반쯤은 호기심을 품고 그녀와 동행했던 것이다. 나머지 반은 물론 그녀를 염려하는 숭엄한 우정.
   
    “헬리엔. 델뎁틸. 암브롯시아는 아이를 아주 예뻐했지.”
   
    마법사 사무실은 의외로 소박했다. 도심 한 가운데에 위치한 주상복합 오피스텔의 최상층으로 주거와 사무 양쪽 모두의 조건을 충족시킬만한 규모와 인테리어를 갖추고 있긴 했지만 마법의 구슬이나 점술 카드 비슷한 소품 하나도 없는, 말하자면 ‘미니멀’한 디자인이라고 할까. 건조하고 단순하고 깨끗했다. 봄인데도 일순 춥게 느껴질 만큼 황량하다고도 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나는 한 눈에 그곳이 마음에 들었다. 거실과 부엌을 겸한 널찍한 공간에 소파와 테이블과 책상 등속이 갖춰져 있고 옆으로 침실이나 서재로 쓸법한 방이 하나 따로 나 있는 듯 했다. 닫힌 방문에는 아무런 표식도 없었다. 벽면도 달력은커녕 액자나 레터링 장식 하나 없이 새하얀 빛깔로 가득 메워져서 손자국이 날까 싶어 보는 사람이 위축될 지경이었다.
   
    “저, 그분의 아이가 아니에요. 모르셨어요? 그분에겐 가족이 없다는 거.”
   
    그녀가 정색을 하고 답하자 마법사는 한쪽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그래?’하고 반문했다. 몰랐던 모양이다. 심드렁한 표정 한 켠으로 잠깐 실망감이 서리는 듯도 싶었지만 이내 그는 담담한 얼굴로 돌아왔다.
   
   “그래서 부탁하고 싶은 건 뭐지?”
     “키를…… 5센티 정도 키울 수 없을까 해서요. 지금 키에도 불만은 없지만 이대로라면 가고 싶은 학교에 지원할 수가 없으니까요.”
    “키? 흐음…… 좀 생각해 보자. 이거 언제까지 해야 돼?”
   
    그녀가 마법사 앞에 자신의 다이어리를 꺼내 놓고 열심히 설명하는 것을 나는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다. 지나치게 깨끗한 사무실만큼이나 깔끔한 인상의 남자였다. 나이는 서른 안팎. 외모만 보자면 대학생 정도 같지만 그렇게만 보기에는 매우 피곤해 보인다고 할까 세상사에 질린 듯한 느낌이 강했다. 머리카락부터 눈동자, 피부까지 죄다 일반보다 색소가 연해 보이는 탓에 손바닥으로 쓱 문지르면 덜 마른 수채화 물감마냥 지워질 것 같은 탓일까. 가느다란 눈매며 나른한 느낌의 입매. 긴장감 없는 몸동작까지 늘씬하면서도 꽤나 위태위태한 남자다.
   
    마음에 드는 남자다.
    열 아홉 살 난 여고생인 나는 당돌하게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사이 ‘계약’이 끝났다. 그녀는 5센티의 키를 약속 받았고 ‘무엇인가’를 그에게 주기로 협의했다. 계약서에 도장 대신 물 묻힌 엄지손가락을 가져다 댄 후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친구 아가씬 뭐 부탁하고 싶은 거 없어?”
    “아…… 소원은 아닌데요.”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올려다 보면서 답했다.
   
    “혹시 저 여기에서 일하게 해 주실 수 있나요? 제자가 안 되면 조수도 괜찮은데.”
   
    어이가 없었는지 그와 그녀가 동시에 나를 바라 보았다. 그는 그녀의 계약서를 돌돌 말아 다른 쪽 손에 든 커다란 통에 막 넣으려던 참이었는데 꼭 정지 버튼을 누른 동영상처럼 멍하니 행동을 멈추었다. 동시에 두 사람이 눈도 깜박이지 않고 날 주시하는 바람에 난 꽤 머쓱해서 헤헤헤 바보처럼 웃었다.
   
    “소원이면 가능한 한 들어 주겠다만 그게 아니라면 거절하고 싶은데.”
    “너 되게 엉뚱하다.”
   
    그와 그녀가 차례차례 말했다.
   
    “일단 시험 삼아 써 보세요. 의외로 쓸만할 수도 있고 저도 의외의 재능을 발견하게 될 지도 모르잖아요.”
    “친구 아가씨, 마법은 대개 타고 나는 거라서 의외의 재능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아. 아가씨가 마법사가 될 사람이었다면 여기 들어서는 순간 내가 알았을 거야.”
    “음…… 그렇지만 마법사 조수의 재능은 있을 지도 모르잖아요.”
    “여긴 직업훈련소가 아니야.”
   
    딱 잘라서 거절 당하자 아무리 나라도 마음이 상했다. 울적한 얼굴로 어깨를 늘어뜨린 채 반쯤 떠밀리듯 마법사 사무실에서 쫓겨났다. 돌아오는 길에 그녀는 반은 꿈에 부풀었고 반은 근심에 짓눌렸다. 같이 간 보람은 없었던 것 같다. 나는 무엇을 대가로 주기로 했는지 그녀에게 물었지만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어색하게 웃었다.
   
    “너는 이해하지 못할 거야.”
   
    다음 날 방과후에 나는 매일 다니던 학원에 가서 수강을 철회했다. 수수료를 뺀 나머지 금액을 돌려받고 나서 곧바로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타 마법사 사무실로 향했다. 마법사는 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 예약하지 않은 손님이라는 걸, 구태여 목소리나 얼굴을 확인하지 않고도 알 수 있는 모양이었다. 과연 마법사다.
   
    “소원 빌거니?”
    “안 빌어요.”
    “그러면 돌아가.”
   
    사흘 째 찾아갔더니 겨우 그런 목소리가 인터폰으로 흘러 나왔다. 나는 발끈했다.
   
    “빌 지도 모르잖아요. 고용하면.”
    “아가씨 아니라도 빌 사람은 많으니까 돌아가.”
    “이런 식으로 찾아오는 사람 있죠? 종교 권유나 판촉으로 찾아오는 사람도.”
    “문 안 열어 주니까 괜찮아. 아가씨. 나, 예지력이 있는 마법사니까.”
    “그래도 귀찮죠?”
    “저기, 알면 돌아가 주지 않을래?”
   
    한숨 소리가 인터폰 너머로 들렸다.
   
    “그런 사람들도 전부 상대해 드릴게요. 편할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착실하게 본 업무에만 충실할 수 있다구요.”
   
    그게 구미에 당긴 건지 아니면 단순히 내 고집에 질린 건지 모르겠지만 꼭 일주일 만에 그는 내게 문을 열어 주었다. 내가 졌어, 라는 첫마디로 인사를 대신하며. 그리하여 나는 임시로 그의 조수가 되었다. 정 싫다면 두 달이든 세 달이든 기간을 정하면 되지 않느냐고 먼저 말해 봤는데 그는 그 심드렁한 얼굴로 설렁설렁 방으로 걸어가며 답했다.
   
    “한 달은 어차피 선택지에 없는 모양이네. ……뭐, 안 정해도 상관 없어.”
    “왜요? 못 버틸 거 같으세요?”
    “아가씨, 나는 마법사야. 대단한 건 아니지만 예지력이 있어서 말이지, ‘볼 수 있거든’……. 다 알면서 하는 거야, 나는.”
    “뭘요?”
   
    아주 잠깐 망설이고 나서 그는 말했다.
   
    “결과 말야.”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더 답하지 않고 방문을 닫았다. 겨우 사무실 안으로 입성했는데 그는 언제나 방 안에 틀어박혀 있었다. 나는 하루의 대부분을 학교에서 보내고 땅거미가 질 즈음 사무실에 도착해 보이지는 않지만 별이 그 빛을 더해갈 즈음 집으로 돌아갔다. 그 몇 시간 동안 나는 본디 학원에 있어야 했다. 조만간 내 부모가 딸이 학원을 땡땡이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걸까? 그래서 그는 내 고용 기한을 굳이 정하지 않은 걸까. 나는 그런 걸 생각하면서 혼자 접대용 테이블에서 숙제를 하고 학습지를 풀고 책을 읽었다. 텔레비전도 오디오도 갖춰져 있었지만 이 지나치게 깨끗하고 조용한 집안의 평화를 깨서는 안 될 것 같아서 손도 대지 못했다. 보름이 더 지난 다음에 그가 처음으로 방문을 열고 나와 부엌 쪽으로 향했을 때 나는 풀리지 않은 행렬 문제와 씨름하고 있었다. 수학이라는 건 세상에서 없어져야 돼, 하고 밑도 끝도 없는 불평을 입 밖으로 소리 냈을 때 그가 곁에 앉으며 녹차가 담긴 컵을 곁에 내려 놓았다.
   
    “그게 아가씨의 소원이야?”
    “와, 깜짝이야! 소리도 안 내고 갑자기 나타나는 게 어디 있어요?”
    “냈는데.”
   
    다른 하나의 컵을 입에 가져가며 그는 손짓으로 내 곁에 놓인 컵을 가리켰다. 커다란 머그컵에 가득 담긴 녹차는 당장 마실 수 없을 만큼 뜨거웠다. 그는 그런 건 개의하지 않는 듯 벌컥벌컥 차를 마셨다. 나는 뜨거워서 손으로 컵을 쥐지도 못하고 멀뚱멀뚱 그의 옆 얼굴을 바라 보았다.
   
    “내 소원 아니에요. 예지력 있다면서 물어요?”
    “그런 예지력 아니야. 내 예지력은 내가 말을 해야 보여.”
    “말? 어떤 말이요? 주문이라도 외우는 거예요?”
    “그런 게 아니고, 어떤 말을 했을 때 그 반응이나 결과가 보이는 거야. 이 사람의 소원이 뭘까 하는 건 알 수 없는데, 소원을 말하면 그걸 이뤄주었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올지 보이는 거야.”
    “와. 신기하다.”
   
   나는 컵을 잡아 들어올렸다가 다시 내려 놓았다. 너무 뜨거웠다.
    
    “다 보이는 건 아니고 한 순간 영상 같은 게 지나가. 대개는 결말이지.”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 마신 자신의 컵을 쥔 채 몸을 일으켜 싱크대가 있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나는 그 뒤를 따라 가려고 했지만, 그는 다시는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저기, 내일부터는 제가 차 탈까요? 조수니까.”
   
    대답은 들을 수 없었다.
   
    나는 다음 날 멋대로 차를 탔다. 그리고 문을 두드렸다.
   
    “선생님, 선생님이 하는 행동의 결과만 보이는 거예요?”
    “응.”
    “그럼 지금 방문을 열고 나오면서는 뭘 보셨어요?”
    “내가 차를 다 마실 때까지 아가씨는 한 모금도 못 마셔.”
   
    그거야 어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뜨거운 걸 참고 어떻게든 조금 마셔 보려고 했지만 입술을 가져대는 순간 눈물이 찔끔 나올 만큼 뜨거워서 잔을 놓치고 말았다. 순간 당황하여 등을 움찔거렸는데 잔 깨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저런.”
   
    감았던 눈을 뜨니 기울어진 컵과 흘러 나오던 녹차가 그 모양 그대로 허공에 붙박여 있었다. 그는 자조하듯 허허로운 웃음과 함께 다 마신 자신의 컵을 내게 보여 주었다. 녹차 찌끼가 묻은 컵 바닥이 물기로 반짝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의 뒤를 따라 허공에 둥둥 뜬 녹차 컵이 움직이는 모습은 비현실의 극치라고 할만 했지만 나는 놀라지도 못했다.
   
    “제가 컵 떨어뜨리는 것도 보였어요?”
    “……응.”
   
    묘하게 한 호흡 늦은 대답이다 싶었더니 방문을 닫기 전에 나직한 목소리가 덧붙었다.
   
    “아가씨 질문에 대답했을 때, 보였어.”
   
    그가 한 말에 고무되어 어떻게든 차를 빨리 마셔 보려고 했고 그래서 실수할 여지가 생겼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럴싸한 일이긴 하지만. 여하간 참 제약도 많고 델리케이트하신 예지력이다.
   
    “선생님, 손님 오셨어요.”
   
    집에 갈 채비를 하는데 누가 ‘마법사’를 찾아 왔다며 초인종을 눌렀다. 내가 큰 소리로 부르며 방문을 두드렸기 때문에 그는 없는 체를 할 수 없게 됐다. 느릿느릿 방에서 나온 그가 현관문을 열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외모에 한 번도 들은 적 없는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거기 서 있었다. ‘마법사를 찾아 왔다’고 하는 말은 분명한 우리 말이었는데.
   
    “아가씨는 얼른 돌아가. 지하철이 끊기면 곤란하잖아.”
    “모처럼 손님이 왔는데 더 있다가 가면 안 돼요? 저, 조수잖아요.”
    “안 돼.”
    “……그렇게 말씀하셔서 제가 돌아가요, 안 돌아가요?”
    “하아.”
   
    한숨을 쉬며 그가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말하더라. 아가씨, 내가 곤란하니까 돌아가 줘.”
    “조수라면 말을 잘 들어야지. 얼른 돌아가요.”
   
    낯선 손님이 다시 분명한 우리 말로 말했다. 사람은 사람인데 기이하게 위화감이 들어서 아무리 봐도 국적은커녕 나이도 성별도 알 수 없다. 그의 얼굴을 향해 던진 인사는 이 훌륭한 한글로도 결코 옮길 수 없을 법한 ‘소리’였다.
   
    “조수니까 선생님을 지켜야 되는 거예요.”
   
    나는 얼른 소파 구석에 가서 앉았다. 그는 화를 내지 않았다. 돌아가라고 말하는 순간부터 이런 결말을 보았기 때문이겠지. 나는 비로소 그가 항상 심드렁한 얼굴을 하고 있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세상사에 초연한 듯한 동작도 목소리도 눈빛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자 슬퍼졌다. 이런 내 감정이야말로 도리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가 마음에 든다.
    이건 아주 단순하고 이해하기 쉬운 감정이 아닌가. 헌데 불현듯 알 수 없게 됐다. 나는 들어본 적 없는 언어로 대화하는 두 사람에게 멋대로 녹차를 타서 내 놓았다. 짝이 맞는 컵이 딱 두 개뿐이어서 그걸 내 놓고 나니 손님이 힐끔 내 얼굴을 쳐다 보았다.
   
    “조수, 얘는 마법사야. 마법사가 차 마시는 거 봤니?”
    “선생님은 마시던데요.”
    “어라? 그러니? 얘, 이상해졌네. 마법사주제에.”
   
    손님이 가고 난 다음에 그는 마시지 않은 자기 몫의 차를 내게 주었다.
   
    “아가씨, 식은 차를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마법사는 차 안 마셔요?”
    “마셔. 원래 그 손님은 헬리엔이 거래했는데 헬리엔은 차 안 마셨으니까 그러는 거야.”
    “그런데 왜 이상해‘졌다’고 해요? 이상하다고 해야 되잖아요.”
    “아가씨, 그 사람한테 여기 말은 외국어잖아. 일일이 따지면 안 되지.”
    “그래요?”
    “그래.”
   
    나는 식은 차를 전부 마셨다. 썼다. 사실 나는 차를 좋아하지 않는다. 녹차는 아무리 고급이어도 그냥 쓰기만 할 뿐이지 맛을 모른다. 나는 주스나 콜라가 좋다. 하지만 한 번도 그에게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하고 싶지 않았다. 그 날은 자정이 넘었으므로 그가 택시비를 쥐어 주었다. 택시비로 준 돈은 동전까지 말끔하게 맞아 떨어졌다. 과연 마법사다.
   
    “아가씨, 식은 차를 좋아하지?”
   
    그는 다음 날부터 매일 그렇게 말하면서 내가 탄 뜨거운 차를 단숨에 마셨다. 그리고 내 앞에 놓인 차가 식을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나는 차가 식다 못해 한 톨의 온기조차 남지 않았을 때가 되어서야 겨우 차를 마셨다. 때로 내가 차를 마시고 나면 돌아갈 시간이 되어 있었다.
   
    “이제 돌아가.”
    “오늘도 손님이 없었는데 괜찮아요?”
    “괜찮아.”
   
    손님이 없는 게 아니었다.
    내가 머무는 시간 동안 방문객이 드물었을 뿐 그는 그럭저럭 손님을 상대하는 모양이었다. 그걸 알게 된 건 내가 억지로 조수 노릇을 한 지 꼭 오십 일 되던 날이었다. 한낮에 나는 학교를 뛰쳐나와 그의 집 문을 두드렸다. 손님이 있었다. 손님은 울어서 퉁퉁 부은 내 얼굴을 보고 기가 질려 돌아갔다. 선생님, 선생님! 나는 거의 비명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그는 이럴 줄 알았다는 듯이—아니 처음부터 알고 있었으므로—미리 타 놓았던 녹차 컵을 내 놓았다.
   
    “죽었어요! 죽었다구요! ……알고 있었으면서 소원 들어 준 거죠? 알고 있었죠!”
    “소원을 들어 주기로 결정하기 전까지는 안 보여, 결말 같은 거. 하지만 헬리엔의 아이는 그걸 알면서도 결정했던 거야.”
    “걔는 헬리엔의 아이가 아니에요. 얘기 했잖아요. 죽은 건 걔가 아니에요. 죽은 건 걔가 아니라 걔의…….”
   
    설명할 말이 없어서 나는 입을 다물었다. 죽은 건 그녀의 친구였다. 옆 학교의 남자아이. 연인이라고 하기에는 장난 같고 친구라고 말하기엔 어째 정확하지 않은, 그런 관계라고 했다. 같은 초등학교를 나와서 같은 중학교에 진학했고 고등학교는 나란히 같은 재단의 남고와 여고, 집으로 돌아갈 적엔 똑 같은 번호가 붙은 버스. 주말엔 함께 영화를 보기도 하지만 한 번도 손을 잡은 적 없는, 그런 사이였다. 그 남자애는 제법 머리도 좋고 성격도 괜찮아서 인기가 있었다. 그녀도 그 남자애가 싫지는 않은 눈치였다. 관계를 정의 내리지는 않았지만 그렇지만, 틀림없이 서로 좋아했던 거다. 그런 남자애가 죽어 버렸다. 트럭에 치여서 처참하게 몸이 뭉그러졌다. 잘 아는 사이도 아닌데 인사만 나눴던 사인데 나는 눈물이 줄줄 나서 견딜 수 없었다. 이게 누구 때문인지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 없었다.
    나는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며 열심히 달렸다.
   
    “그런데 걔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조금 울더니 곧 아무렇지도 않다구요! 그냥 슬픈 일이래요! 유감스럽대요!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 이게 ‘대가’인데! 걔의 대가인데!”
    “헬리엔의 아이는.”
   
    그는 힘주어 말했다.
   
    “헬리엔의 아이는 그걸 몰라. 영원히 모를 거야. 소원을 빌었던 것도 헬리엔에 관한 것도 전부 잊었어. 소원을 비는 대신 천천히 잊게 됐어. 그래서 소원과 그 사고를 연결 지을 수 없는 거야. 그냥 우연히 일어난 불행한 사고이고, 이따금 기억하며 슬픔에 젖을 첫사랑의 기억일 뿐이야. 그게 대가야.”
    “그런 게 어딨어요!”
    “아가씨, 아가씨의 친구는 이럴 것을 알고 계약한 거야. 가엾은 친구의 목숨을 주고 자기 소원을 이뤘어. 이런 소원을 빈 걸 기억하지 못하게 해 달라는 소원을 하나 더 빌고, 그것까지 이뤄진다면 괜찮다고 말했지.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 친구의 죽음 정도는 그저 참으로 서글픈 추억으로 남겨 감당할 수 있을 거라고. 나는…....”
   
    나는 말문이 막혔다.
   
    “나는…… 나는 말이지, 아가씨. 나는 그녀가 대가로 건 친구가 아가씨라고 생각했어.”
   
    덧붙이고 나서 그는 괴롭고, 괴롭고, 괴롭고, 괴롭고…… 괴로워 견디기 힘든 표정을 지었다. 부은 내 눈에서 다시 눈물이 넘쳐 흘렀다.
   
    “걔는 헬리엔의 아이가 아니에요. 헬리엔은 그런 일 하지 않아요.”
    “그녀는 헬리엔의 아이야. 그건 틀림없는 사실이야. 아가씨가 헬리엔의 제자였던 것처럼.”
   
    나는 얼굴을 손바닥에 묻고 흑흑 소리 내어 울었다. 헬리엔, 가엾은 헬리엔, 이제는 얼굴도 목소리도 그 무엇도 기억나지 않는 헬리엔.
   
    “헬리엔은 아주 옛날에 의뢰인의 소원을 잘못 이뤄준 탓에 죄를 받아 가족을 이룰 수 없는 계약에 사로잡혔어. 그런데 아이를 갖게 된 거야. 그녀는 뛸 듯이 기뻤지만 계약이 두려워서 나날이 쇠약해졌지. 다행히 열 달 후에 아이는 무사히 태어났어. 헬리엔과 무척 많이 닮은 딸아이였는데 헬리엔은 실신할 만큼 기뻐했어. 태양처럼 빛나는 아이가 되라고 아름다운 이름을 지어 주고 내게도 자랑하러 왔어. 그렇게 환한 얼굴을 한 마법사는 보기 드물어서 기억하고 있어. 그런데 아이의 아버지가 죽었지. 아이가 태어나고 한 달도 되지 않아서야. 그러니 헬리엔이 꿈꾸었던 가족의 형태는 결국 이뤄지지 않게 된 셈이지. 계약대로. 나중에 헬리엔마저 죽음을 피할 수 없게 됐을 때 그녀는 소원을 빌었어. 아이가 다른 가족을 찾아 일원으로 믿으며 사랑 받고 살아가게 해 달라는 소원.”
   
    나는 차디찬 녹차를 마셨다. 쓴 녹차를 좋아하지 않는다. 이게 싫다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할 수 없다. 그가 탄 녹차니까. 나는 그를 좋아한다. 만사에 무심한 표정도 애착이 가는 건 세상 천지에 아무 것도 없다는 양 유유한 몸짓도 길고 아름다운 손가락이 아주 느긋하게 움직여 마른 약초들을 뒤섞을 때 내는 마찰음도, 나는 모두 좋아한다. 오래 전부터 좋아해 왔다. 그는 나를 알고 있었다.
  
    찬 녹차를 매일 마시게 되리라는 것도.
   
    “헬리엔, 하나도 기억나지 않아요. 왜 내 기억까지 지운 거예요? 제자였다면서요.”
    “그때도 재능이 없었겠지.”
   
    단순한 대답에 김이 빠졌다. 나는 웃을 힘이 없어서 멍하니 앉아 천정을 올려다 보았다. 형광등 빛이 환하다. 그녀를 다시 웃는 얼굴로 마주할 수 있을까. 키 5센티 때문에 오래도록 알고 지낸 친구를 죽게 만들다니. 자신이 죽였다는 것을 스스로 알지 못한다면 죄책감도 없다. 그러니 괜찮다. 그런 생각을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처음으로 그녀가 낯설게 느껴졌다.
   
     “소원을 빌어, 아가씨. 그녀처럼 아가씨도 잊으면 되잖아. 죽인 건 나야, 아가씨가 아니야.”
    “저, 아가씨가 아니라 나하예요. 호나하.”
    “소원, 빌래?”
    “……헬리엔은, 왜 내 기억까지 지운 거예요?”
    “몰라.”
   
    다 마신 녹차 컵을 모아 쥔 내 손아귀에서 쉽게 빼내가며 그는 말했다. 모른다고, 내가 몇 번을 다시 물어도 똑 같은 답만을 반복했다.
   
    “헬리엔의 제자였을 때 나는 선생님을 알고 있었어요?”
    “그때는.”
   
    이번에는 제대로 된 답이 돌아왔다.
   
    “그때는 나를 선생님이라고 부르지 않았어. 헬리엔이 네 선생님이었으니까.”
    “아, 그럼 그때에는 ‘손님’이라고 불렀겠군요.”
   
    망설이다가 그는 소파에 앉아 내 눈을 똑바로 들여다 보았다.
   
    “아가씨, 이제 돌아가야 돼. 헬리엔은 내게 와서 아가씨를 위한 소원도 빌었으니까.”
    “어떤 소원인데요?”
    “……어떤 소원이든. 결국 아가씨는 마법사가 존재한다는 것조차 잊고 평범하게 살아가는 아이가 되었지. 헬리엔이 바란 대로.”
    “왜 그런 걸 빌었는데요?”
    “몰라.”
    “왜 다 몰라요?”
    “모르는데 어떻게 해? 자, 돌아가. 아가씨.”
   
    이제는 오지 마.
    그 말을 꺼내면서 그는 어떤 미래를 봤을까. 내가 순순히 응하는 미래? 아니면 완고하게 고개 젓는 미래? 어느 쪽이든 나는 고심하여 선택하는 것일 터인데 그는 한 마디 던져 놓고 미리 나도 모르는 답을 안다니 억울하기 그지 없다. 나는 겨우 웃었다.
   
    “그 말씀을 하시면서요, 선생님. 제가 뭐라고 답하기를 바라셨어요?”
    “뭘 봤느냐고 물었어야지, 아가씨. 나는 마법사잖아.”
    “그래요. 하지만 전 아니죠. 전 재능이 없잖아요.”
   
    눈물이,
    후둑후둑 떨어졌다. 머리가 아팠다. 그는 몇 번이나 간절하게 말했다. 소원을 빌어, 다 잊게 해 달라고 어서 말해, 부탁이야, 아가씨. 제발 소원을 빌어 줘. 그러나 그는 무엇을 바랐을까. 그는 어떤 미래를 봤을까. 불공평하다. 억울하다. 나는 아무 것도 모르겠는데 나도 모르는 내 결론을 그는 이미 알고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 나는 울었다.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소파에 기대 잠이 들었다. 그는 제 몫의 이불을 가져다 내게 덮어 주었다. 아주아주 옛날에 나는 그를 뭐라고 불렀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잠이 들었다. 다시 깨어났을 때 그는 전과 다름 없는 태도를 보였다. 매사에 심드렁한 얼굴로 담담하게 차를 타고 뜨거워서 입술을 댈 수도 없는 차를 단숨에 마셨다. 나는 차가 완전히 식기 전에 마시게 되었다. 사흘이나 학교에 가지 않고 집에도 돌아가지 않았는데 휴대전화가 울리는 일은 없었다.
   
    “왜일까요?”
    “모르지.”
   
    그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나는 다시 월요일이 왔을 때 학교에 갔다. 내 자리가 없었다. 아무도 나를 기억하지 못했다. 학교에는 큰 소동이 일어났다. 나는 그녀의 이름을 말했다. 그녀는 교무실로 불려와 내 얼굴을 보고 크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곧 결연하게 고개를 저었다.
   
    저는 이런 사람 몰라요.
   
    나는 영문을 알 수 없어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는 완고하게, 참으로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누구세요? 저는 당신 모르거든요. 정말 몰라요. 하지만 눈동자에 떠오른 동요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너는 이해하지 못할 거야.’
   
    소원을 빌기 위해 그를 찾아갔던 날 돌아가던 길에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그녀의 소원 ‘대가’는 그 남자아이의 죽음만이 아니었던가.
   
    소원은 한 번에 한 가지.
    장래를 위한 오 센티의 키와, 남자아이의 목숨.
    내 장래와 누군가의 장래.
    소원은 한 번에 한 가지.
    사라진 죄책감과, 그리고 사라진…….
   
    “너!”
   
    나는 그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비명소리가 멀리서 울렸다. 머리 속이 텅 빈 것처럼 웅웅 울렸다. 아주 오래 전에 나는 그녀와 손을 잡고 나란히 앉아 있었다. 무서워서, 무서워서, 그녀와 나는 나란히 어깨를 기대고 앉아 얽어 쥔 손가락을 결코 풀지 않았다. 조개껍질처럼 꼭 다문 입을 열지 않기 위해 두 눈을 부릅떴다. 잠이 들면 안 된다고 서로를 격려하며 차가운 벽에 기대 앉아 커다란 그림자에 잡아 먹혔다. 그림자로 된 이빨은 우리를 상처 내지 못할 거야. 곧 마법사 님이 와 주신다고 했어. 마법사 님이 오시면 선생님은 살아나실 테니까.
   
    하지만 살아나지 못했다. 죽은 목숨을 돌이키는 비법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헬리엔은 죽음을 예감한 순간에 마법사의 마지막 힘을 짜내 소원을 빌었다. 그녀의 아이가 상처 받지 않기를. 어머니의 죽음도 특별한 혈통도 알지 못한 채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행복하게 살아 가기를. 반드시 꿈을 이루기를. 나는 곁을 지키고 싶었다. 그랬던 것 같다.
   
    이제는 얼굴도, 목소리도, 온기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없는 일이 되어 버렸다. 나는 열 아홉 살 난 여학생이고 평범한 가정의 막내딸이다. 나는 학교를 벗어나 집을 향해 달렸다. 초인종을 누르고 막무가내로 딸이라 외치면 믿어 줄까. 불안이 고개를 들었다.
   
    아파트는 흔적도 없었다.
    그런 집은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다. 나는 길가 보도블록에 주저 앉았다. 가방을 벗어 한쪽 팔에 어깨끈을 끼고 무릎을 양 팔로 안았다. 단발로 자른 머리카락은 아직 묶을 수 있는 길이가 아니라 매번 풀어 놓고 있는 탓에 바람이 불 적마다 뺨과 눈을 아프게 한다. 자동차 바퀴 구르는 소리가 끊이지도 않고 들렸다. 귓속에서 이명이 운다. 모르는 애예요.
   
    “그러니까 소원을 빌면 되잖아, 조수 양.”
   
    일전의 손님이다.
    어째서 이런 곳에 있을까. 나는 고개를 돌려 그인지 그녀인지 모를 몸을 비스듬히 치어다 보았다. 석양빛이 정수리를 타고 머리카락과 옷가지에서 반짝거렸다. 휘황한 의복을 걸친 품이 아무리 봐도 광대 꼬락서니인데 당당하기 그지 없다.
   
    “싫어요. 안 내켜요. 나 대신 누가 죽는 거.”
    “아무도 안 죽어. 조수 양은 의심이 많구나. 마법사들은 아주 적합한 대가만 받아. 그들은 원망 듣는 걸 싫어하거든.”
    “저기, 손님의 소원은 뭐였어요? 괜찮으면 가르쳐 주실래요?”
    “아.”
   
    손님은 휘황찬란한 의복과 우스꽝스러운 장신구 틈새로 히죽 웃었다.
   
    “기억 안 나. 간절하게 무언가를 바랐다는 기억이 사라졌거든. 그래서 뭘 빌었는지도 모르는 채로 살 수 있어.”
    “그렇군요.”
    “그래. 말 했잖아, 마법사는 원망 듣는 걸 싫어해. 겁쟁이거든. 헬리엔도 그랬지. 그 녀석도 마찬가지야.”
   
    웃다가 손님은 모르는 새 사라졌다. 나는 지하철과 버스를 탈 돈이 없다는 걸 깨닫고 걸어서 사무실로 돌아왔다. 새벽이 되어 있었다. 사무실도 없어지진 않았을까 의심했지만 다행히 그는 문을 열어 주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알고 있겠지. 알고 있으면서도 내가 학교에 가는 걸 만류하지 않았던 거겠지. 마법사란 대단하다.
   
    “저기요, 선생님. 헬리엔이라는 사람도 소원을 들어 줬어요?”
    “소원 들어주는 마법사는 몇 안 돼. 헬리엔. 델뎁틸. 암브롯시아는 주로 약을 만드는 마법사였지 소원하고는 연관이 없어.”
    “무슨 약이요?”
    “여러 가지 약.”
   
    냉장고에서 녹차가 담긴 컵을 꺼내 내 놓는데 좀 질리고 말았다. 평소와 다름없이 담담한 표정으로 그는 어서 마시라는 손짓을 한다. 그렇구나. 말을 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구나. 예지력이 있는 마법사인데도 말하지 않으면 알지 못해.
   
    “독약이나 그런 거요?”
    “독약도, 수면제도, 무엇이든 만들어. 살이 빠지는 약, 행복해지는 약…….”
    “모든 걸 잊는 약은 못 만들었대요? 그런 게 있으면 날 위해 따로 소원을 빌 필요가 없었을 텐데.”
    “아아…… 그러네. 그런 건 없었던 모양이지.”
    
    웃는다.
    나는 차가운 녹차를 전부 마셨다. 몸을 씻고 소파에서 잠이 들었다. 이대로 살아가도 괜찮냐고 물었더니 그는 애매한 목소리로 ‘아가씨에게는 빚이 있는 셈이니까 좋을 대로 해.’하고 답해 주었다.
   
    그리하여 나는 정식으로 마법사의 조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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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
  • No Profile
    매미 09.08.06 22:05 댓글 수정 삭제
    잘 읽었습니다.

    뭐든지 이뤄준다는 말은 뭐든지 대가로 가져간다는 말이군요. 무섭습니다.
    어차피 소소한 선택 가운데서도 잃어버리고 사라지는 것이 무수히 많은데도요.

    친구가 지금보다 5센치 큰 키의 수사관을 열렬히 지망한 이유를 강제로 잊혀졌지만 작은 트라우마로 남은 선생님의 죽음으로 감히 추측해봅니다.

    앞으로도 건필하세요.
  • No Profile
    우상희 09.08.21 12:31 댓글 수정 삭제
    내용이 산뜻해서 재밌게 읽었는데요. 제가 이해력이 떨어져서 그런지, 친구의 남자친구가 죽었다는 내용부터 잘 이해가 안가네요. 이 이야긴 왠지 연작소설로 써도 재밌을 것 같단 생각도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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