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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경 한 번 사는 인생

2009.11.28 01:5511.28

 그것이 모텔의 이름이다. 아니, 밖에서 봐서는 모텔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지만 최소한 철문에 붙은 조그만 표지는 그렇다. ‘한 번 사는 인생.’ 건물 전체가 모텔이 아니라, 입구가 4층 건물의 3층에 있어서 웬만해서는 그곳에 모텔이 있다는 사실조차 알기 힘들다. 안에 들어서면 왠지 지방 소도시의 오래 전에 폐쇄된 낡은 버스 터미널 같은 느낌이 든다. 조명은 살짝 어두운 감이 있지만 그래도 모텔치고는 너무 밝은 것이 어정쩡하고, 바닥을 덮은 낡은 카펫은 이제 닳아빠져서 원래 무슨 색이었는지도 알 수 없다. 벽은 달걀 껍질 색이라고 해야 하나, 때탄 옅은 노란색인데 애매한 조명과 닳아빠진 바닥과는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언제나 흘러간 옛날 가요가 들려온다.
 ‘가는 세월- 그 누구가- 잡을 수가- 있나요-‘
 언제나 같은 노래다. 그 음악 소리가 낡고 시대에 뒤떨어진 느낌을 한층 더한다.
 접수대에는 여자가 한 명 있다. 화장이 짙은 건 아닌데 입술만 이상하리만치 새빨갛게 발랐고, 어느 방향에서 보면 이십대인 것 같았다가 또 다른 방향에서 보면 오십대로도 보인다. 여자의 등 뒤에는 벽 전체를 차지한 패널이 칸칸이 나누어져 방 호수대로 조작 버튼이 달려 있는 모양새가 모텔이라기보다는 디비디방 같다.
 손님이 들어서면 여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일단 내뱉는다.
 “자고 가실 거예요? 타임 손님은 안 받아요.”
 그러나 손님들도 이 모텔의 운영 방침을 알고 오는 건지, 돌아서서 나가는 사람은 거의 없다. 손님이 고개를 끄덕이면 접수대의 여자는 다른 모텔의 하룻밤 요금보다 갑절이나 비싼 값을 부른 뒤에 덧붙인다.
 “현금만 돼요. 카드 안 받아요.”
 그러나 대부분의 손님들은 역시 이 사실도 알고 있었다는 듯이 지갑에서 지폐를 꺼내 건네준다. 그러면 접수대의 여자는 돈을 받고 열쇠를 내주면서 말한다.
 “끝나면 전화기 옆에 있는 드링크제 드시고 0번 누르세요.”
 손님들은 대체로 그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그저 고개만 끄덕인다. 그리고 여자에게서 열쇠를 받아 방으로 향한다. 칫솔이나 콘돔 등 모텔에서 일반적으로 판매하는 용품을 요구하는 손님은 없다. 그리고 그런 걸 물어봤더라면 여자는 아마 대답하지 않고 고개만 저었을 것이다.
 접수대를 지나서 한 층 올라가면 방 다섯 개가 한 줄로 늘어서 있다. 보통 건물은 4층을 표시하지 않는 법인데 이 모텔은 그런 관습은 무시하는 모양이다. 그리고 방 다섯 개가 모두 꽉 찬 것을 보면, 이 모든 사정에도 불구하고 모텔은 그 나름대로 성업중인 것이다.
 
 401호: 그녀의 피임법
 남자와 여자가 안에 들어서서 등 뒤로 문을 잠근다. 여자는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 가방과 함께 침대 옆 탁자 위에 내던진다. 탁자 표면을 덮은 유리판에 가방 여닫이의 쇠장식이 부딪쳐 쨍, 하는 소리를 낸다.
 남자가 셔츠를 벗어서 그 위로 내던진다. 여자가 뒤로 돌아서서 남자에게 등을 내민다.
 “자기, 나 여기 지퍼 좀….”
 남자가 여자의 원피스 지퍼를 내린다. 그리고 양 어깨를 잡고 옷을 벗겨 내린 뒤에 양 손으로 여자의 가슴을 움켜잡으며 몸을 숙여 여자의 목 뒤에 키스한다. 여자가 웃으면서 남자를 밀어내고 다리에 걸린 원피스를 완전히 벗어서 탁자 위로 내던진다. 원피스 허리띠의 버클이 다시 탁자에 부딪쳐 쨍, 소리를 낸다. 그리고 원피스는 바닥으로 떨어진다.
 여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브라와 팬티 차림으로 서서 남자의 혁대를 풀어 바지에서 빼낸다. 이어서 남자의 바지를 벗겨내리고 양말과 속옷만 입은 남자를 밀어서 침대 위로 넘어뜨린다. 남자의 허리띠와 바지를 한 손에 하나씩 들고 침대 위로 올라간다. 우선 남자의 바지로 남자의 오른손을 침대 머리판에 묶는다. 남자를 타고 앉아서 브라의 어깨끈을 한 쪽씩 내린다. 남자가 자유로운 왼손으로 가슴을 만지려 하자 살짝 몸을 틀어 피한다. 브라를 벗어서 그것으로 남자의 왼손도 침대 머리판에 묶는다. 그리고 남자 옆에 내려놓았던 혁대로 남자의 옆구리를 찰싹 때린다.
 “아야.”
 양 손을 묶인 남자가 여자 아래 깔려서 울상을 짓는다. 여자가 다시 한 번, 이번에는 반대편 옆구리를 찰싹 때린다.
 “아파. 살살 해.”
 남자가 애원한다.
 “시끄러워.”
 여자가 쏘아붙이고 남자의 가슴팍을 찰싹 때린다. 남자가 항의한다.
 “아야야. 그거 진짜 아팠어.”
 “입 다물어. 자기 아픈 거 좋아하잖아?”
 여자가 몸을 틀어서 이번에는 남자의 허벅다리를 찰싹 때린다. 남자가 몸을 뒤튼다.
 “나 아픈 거 싫어해! 너랑 노는 게 좋지.”
 남자가 몸을 비트는 바람에 여자는 침대 위로 쓰러진다. 남자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여자가 브라로 대충 느슨하게 묶어놓은 왼손부터 얼른 빼낸다. 그리고 오른손을 묶은 바지를 푼다. 여자가 몸을 일으키려 하지만 남자는 틈을 주지 않고 양 손목을 잡아 침대에 찍어 누른다.
 “너야말로 아픈 거 좋아하지 않아?”
 남자가 여자의 양 손목을 꽉 잡아 누르면서 묻는다.
 “더 세게.”
 대답 대신 여자가 명령한다. 남자는 여자의 손목을 쥔 손에 힘을 준다.
 “아프니까 좋아?”
 남자가 속삭인다. 여자가 다시 말한다.
 “더 세게.”
 남자는 있는 힘껏 여자의 손목을 움켜쥐고 누른다. 여자가 비명을 지른다.
 “아!”
 남자는 얼른 손을 떼고 몸을 일으킨다. 여자는 여전히 누운 채 몹시 아픈 듯 얼굴을 찡그리며 자유로워진 양손으로 손목을 잡고 문지른다. 남자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여자를 들여다본다.
 “아파? 다쳤어?”
 여자는 양손을 쳐들고 손목을 들여다본다. 그리고 남자에게 말한다.
 “속았지.”
 “이게!”
 남자는 여자에게 덤벼들어 간지럼을 태우기 시작한다. 여자는 깔깔 웃으며 몸을 비튼다. 배를 깔고 엎드린 여자를 남자가 등 뒤에서 안고 한 손으로 여자의 다리를 벌린다. 여자가 남자의 손을 마주 잡으며 낮은 신음 소리를 흘린다.
 
 밀회를 즐기는 남녀에게 시간은 빨리 지나간다.
 “프론트에 전화할 때 되지 않았어?”
 여자가 묻는다. 고개만 빼서 시간을 확인하고 남자는 낮게 투덜거린다.
 “벌써 그렇게 됐냐….”
 여자가 팔을 뻗어 전화기 옆에 놓인 조그만 약병을 집는다. 금속 뚜껑이 달린, 흔한 반투명 갈색 유리병이다. 여자는 뚜껑을 돌린다. 조그맣게 빠각, 하는 소리가 난다. 여자는 조심스럽게 양을 재어 반만 마신다. 남자가 병을 건네받아서 마저 마신다.
 “전화해?”
 남자가 여자에게 묻는다.
 “응.”
 여자가 고개를 끄덕인다.
 남자가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수화기를 들고 0번을 누른다.
 
 … 그리고 남자와 여자는 현관에 서 있다. 등 뒤로 막 문이 닫히는 중이다.
 남자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날짜와 시간을 확인한다. 정확히 12시간을 되돌려 남자와 여자는 방에 들어선 그 순간으로 돌아와 있다. 분과 초 단위까지 틀림이 없다.
 “정확하네.”
 남자가 말한다.
 “그러니까 믿고 오잖아.”
 여자가 말한다.
 방을 나서기 전에 여자는 마지막으로 한 번 둘러보며 놓고 가는 물건이 없는지 확인한다. 평소보다 조금 더 오래 방 안을 둘러보는 여자의 표정에서 남자는 불안감을 눈치 챈다.
 “왜 그래?”
 남자가 묻는다.
 여자가 복도로 나와 등 뒤로 방문을 닫으며 얕게 한숨을 쉰다.
 “… 진짜 괜찮은 걸까, 싶어서.”
 “뭐가?”
 남자가 되묻는다.
 “콘돔, 안 쓰는 거….”
 여자가 말끝을 흐린다.
 남자가 웃는다.
 “우리 아직 하기 전일 때로 되돌아왔는데 뭐가 걱정이야.”
 “그렇겠지?”
 여자가 고개를 끄덕인다.
 “왜, 걱정돼?”
 남자가 여자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장난스럽게 말한다.
 “애 생기면 콱 결혼하지 뭐.”
 “농담하지 마.”
 여자가 남자의 손등을 살짝 꼬집는다.
 “아야.”
 남자가 다시 울상을 짓는다.
 “자꾸 못살게 굴면 결혼 안 해 준다.”
 “할 마음도 없으면서…. 그런 걸로 자꾸 농담하지 마.”
 여자가 중얼거리고는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걸어간다. 남자가 뒤쫓아 간다.
 “반만 농담인데.”
 남자가 뒤에서 여자의 팔을 잡으며 속삭인다.
 “나머지 반은 진담이야.”
 여자는 대답하지 않는다.
 접수대의 무표정한 여자는 손님이 나가는 걸 보면서도 인사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남자도 여자도 신경쓰는 것 같지 않다. 건물을 나와 헤어지기 전에 여자가 남자에게 묻는다.
 “그럼, 다음 주? 같은 시간?”
 남자가 고개를 끄덕인다.
 “응.”
 “전화할게.”
 그리고 남자와 여자는 돌아서서 등을 돌리고 각기 다른 방향으로 멀어져 간다.
 
 402호: 첫 경험 1
 커플은 어리다. 여자가 남자보다 더 어리다. 고등학교나 제대로 졸업했을까. 게다가 둘 다, 드물게 찾아오는 뜨내기 손님인 모양이다. 남자는 ‘쉬었다 간다’고 말했다가 접수대의 여자가 무뚝뚝한 말투로 거절하자 당황한다. 하룻밤 요금을 물었다가 분명 예산을 훨씬 초과했을 듯한 액수가 나오자 더욱 당황한다.
 남자는 한참이나 망설인 끝에 그래도 지갑에서 지폐를 꺼낸다. 그러나 접수대의 여자는 돈을 받는 대신, 무척이나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무표정하게 어린 남자와 여자의 얼굴을 번갈아 들여다본다. 그 표정과 침묵에 못 이겨 남자가 이번에는 신분증을 꺼내어 내민다. 틀림없이 스무 살이 넘었다.
 어린 여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남자 뒤에 조금은 불안하고 많이 민망한 표정으로 서 있을 뿐이다. 접수대의 무뚝뚝한 여직원이 이번에는 그렇게 서 있는 어린 여자 손님을 쳐다본다. 어린 여자는 외면한다. 남자 손님이 뒤돌아 보지만, 역시나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불편한 침묵이 몇 초 더 이어진 끝에 접수대의 여자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방 열쇠를 내준다. 남자가 열쇠를 받아든다. 남자가 돌아서려 할 때 접수대의 여직원이 무뚝뚝하게 내뱉는다.
 “끝나면 전화기 옆의 드링크제 마시고, 0번 누르세요.”
 남자가 돌아본다. 무슨 소리야? 라고 되묻고 싶은 표정이다. 그 때, 어린 여자가 옆에서 남자의 팔을 살짝 건드린다. 그래서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서서 먼저 걸어간다.
 여자가 접수대의 여직원을 한 번 쳐다본다. 그리고 남자를 따라서 천천히 위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라간다.
 
 남자가 방문을 연다. 들어가기 전에 여자는 방문 앞에서 심호흡을 한다.
 남자가 돌아본다.
 “그렇게 겁나?”
 남자는 조금 웃는다. 여자는 대답하지 않는다.
 남자가 다시 묻는다.
 “싫으면, 그냥 갈까?”
 여자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젓는다. 그리고 방 안으로 들어선다.
 남자가 여자의 등 뒤로 문을 닫는다. 탕, 하는 소리에 여자가 흠칫 놀란다.
 “그렇게 무서워하지 마.”
 남자가 여자의 양 손을 모아 잡으며 말한다. 그리고 여자의 뺨에 가볍게 입맞춘다.
 여자가 억지로 조금 웃는다.
 “그래도….”
 “왜, 아플까봐?”
 남자가 고개를 조금 숙이고 다정하게 여자의 표정을 살핀다. 여자는 내키지 않는다는 듯이 고개를 약간 끄덕인다.
 “아프면, 그만 하면 되지.”
 남자가 여자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말한다. 여자는 시선을 내리깐다.
 “사랑하니까 같이 자고 싶은 거지, 무슨 의무 같은 거 아니잖아. 네가 싫은 건 아무 것도 안 할게.”
 여자가 시선을 살짝 든다.
 “정말?”
 남자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여자를 꼭 껴안고 키스한다.
 
 남자가 안심시킨 후에도 여자는 방에 들어서서 침대를 보고는 매우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러나 남자가 한참이나 어르고 달랜 끝에 두 사람은 옷을 벗고 침대로 들어간다.
 남자가 삽입하려 하자 여자가 묻는다.
 “오빠…. 피임, 해야 되지 않을까?”
 “너 약 먹는다고 그러지 않았어?”
 “며칠 빼먹었는데….”
 여자가 조그만 목소리로 대답한다. 남자가 귀찮다는 듯이 말한다.
 “한 번 가지고는 임신 안 해. 걱정하지 마.”
 “그래도…. 있잖아, 콘돔, 같은 거….”
 여자가 미약하게 항의하려 하자 남자가 말을 막는다.
 “그런 거 쓰면 느낌이 안 좋단 말이야. 처음인데 꼭 그렇게 해야겠어?”
 남자의 표정을 보고 여자는 입을 다문다.
 남자가 삽입하자 여자는 몹시 아파한다. 남자가 달랜다.
 “네가 너무 긴장해서 그래. 긴장 풀고 마음 편하게 먹어봐.”
 “어떻게, 긴장을, 풀어…., 아픈데….”
 남자의 움직임에 따라 여자의 목소리가 조각조각 끊어진다.
 “아프면 소리 질러도 돼.”
 남자는 계속 몸을 움직이면서 속삭인다.
 여자가 창백해진 채로 중얼거린다.
 “오빠…, 나…, 못 하겠어…. 너무, 아파….”
 “쫌만 참아 봐.”
 남자는 멈추지 않고 자세만 조금 바꾸어 여자를 더 꽉 껴안는다. 귀에 대고 속삭인다.
 “여자들은 원래 첫 번째가 제일 아프고, 두 번째는 참을 만하고, 세 번째부터 느낄 수 있대. 그러니까 이번만 참으면 괜찮아질 거야.”
 “아프면, 그만 한다고, 그랬잖아, 오빠가….”
 여자가 울먹인다.
 “이미 시작했는데 어떻게 중간에 그만두냐….”
 남자가 숨을 가쁘게 쉬며 반박한다.
 “좀 있어 봐, 괜찮아질 거야….”
 
 남자가 몸을 일으킨 후에도 여자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 여전히 창백한 채로, 메마른 얼굴로 천정을 쳐다볼 뿐이다. 남자가 옆에서 투덜거린다.
 “여기는 어떻게 된 게 방에 재떨이도 없냐….”
 여자는 대답하지 않는다. 남자가 돌아본다. 여자는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남자는 여자를 툭 친다.
 “왜, 화났어? 그렇게 아팠어?”
 여자는 대답하지 않는다. 남자가 과장되게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다시 묻는다.
 “그래도 끝에 가서는 신음소리도 내고 그러던데? 너도 느낀 거 아냐?”
 여자가 돌아본다. 남자가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여자 쪽으로 몸을 숙인다.
 “난 정말 좋았는데. 너 처녀 맞아? 너무 잘 하던데?”
 남자가 속삭이며 여자의 귓불에 다정하게 입을 맞춘다.
 “그래도 쪼끔은 좋았지?”
 말하면서 남자는 여자의 다리 사이로 손을 넣는다. 여자가 짧은 비명을 지르며 벌떡 몸을 일으킨다.
 “뭐 하는 거야?”
 “왜 그렇게 화는 내고 그래, 아까부터….”
 남자가 미안한 듯 헤실헤실 웃는다.
 “네가 자꾸 아프다고 그러니까, 구멍을 좀 넓히면 덜 아프지 않을까 하고….”
 그리고 남자는 여자를 감싸 안으려 한다.
 여자가 남자의 손을 쳐 낸다. 남자는 뭐라고 대꾸하려다가, 방금 여자의 다리 사이에 넣었던 손가락에 피가 묻은 것을 깨닫는다. 당황한 표정으로 여자의 얼굴과 다리 사이를 번갈아 쳐다본다.
 “처녀라고 했잖아.”
 여자가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린다.
 “가서 손 씻어.”
 남자는 다시 뭐라고 말할 듯하지만, 여자의 표정을 보고 순순히 일어나서 욕실로 간다.
 남자가 침대를 나간 후에 여자는 이불을 들추고 자세를 조금 고쳐 앉는다. 다리 사이에서 흘러나와 침대 시트로 퍼져나간 피 얼룩을 들여다본다. 욕실의 물 소리를 들으며 잠시 생각하다가, 전화기 쪽으로 손을 뻗는다. 드링크제를 집어든다.
 욕실의 물 소리가 멎는다. 여자는 얼른 뚜껑을 돌려 따고 내용물을 전부 마신다.
 남자가 욕실에서 나온다.
 “우리….”
 남자가 막 입을 열었을 때 여자가 전화의 수화기를 든다. 0번을 누른다.
 
 … 그리고 남자와 여자는 모텔방 입구에 서 있다.
 남자가 여자의 등 뒤로 문을 닫는다. 탕, 하는 소리에 여자가 흠칫 놀란다.
 “그렇게 무서워하지 마.”
 남자가 여자의 양 손을 모아 잡으며 말한다. 입 맞추기 위해 여자 쪽으로 몸을 숙인다.
 남자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을 때, 여자는 남자에게 잡힌 손을 뿌리치며 온 힘을 다해 남자의 다리 사이를 걷어찬다. 남자는 미처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몸을 반으로 접은 채 고꾸라진다.
 여자가 몸을 돌려 모텔방을 나간다. 남자는 그 뒤에서 팔을 휘저으며 뭐라고 말하려 하지만, 입만 뻐끔거릴 뿐 목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는다. 여자는 그런 남자의 얼굴에 대고 방문을 쾅, 닫는다.
 “아프면 소리 질러도 돼? 너나 실컷 질러라.”
 중얼거리면서 화가 잔뜩 난 발걸음으로 복도를 성큼성큼 걸어가는 어린 여자의 눈에 비로소 눈물이 가득 고인다.
 
 403호: 첫 경험 2
 소녀는 방문을 열고 들어선다. 남자는 이미 침대에 누워 있다. 소녀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몸을 일으키며 어색한 미소를 짓는다.
 “왔어?”
 소녀는 대답하지 않는다. 문고리를 잡은 채로 잠시 그대로 현관에 서 있다가 등 뒤로 문을 쾅, 하고 소리내어 닫는다. 그 소리에 침대 속의 남자가 흠칫 놀란다. 소녀는 개의치 않고 신발을 거칠게 벗어던지고 안으로 들어서서 가방을 신경질적으로 바닥에 내던진다.
 “저기…, 오랜만이네, 그치? 저, 잘, 지냈어?”
 남자가 다시 말을 건다.
 ‘오랜만 좋아하네….’
 소녀는 속으로 생각하지만 이번에도 대답은 하지 않는다. 가방을 던질 때처럼 신경질적인 몸짓으로 옷을 벗어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던진다. 침대로 다가간다.
 소녀가 다가서자 남자가 몸을 일으켜 양 손으로 소녀의 벗은 어깨를 만진다. 소녀는 자신도 모르게 흠칫 몸을 떤다. 남자도 같이 흠칫 놀라며 손을 뗀다.
 “아, 저기, 미안….”
 남자가 사과한다. 소녀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남자가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소녀의 손목을 잡는다. 소녀는 남자가 이끄는 대로 침대에 눕는다.
 남자는 소녀에게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댄다. 소녀의 볼에, 입술에, 목에 조심스럽게 입 맞춘다. 소녀는 고개를 돌린다.
 “오빠, 할 거면 빨리 해. 쓸데없는 데 시간 낭비하지 말고.”
 가슴에 정성스럽게 키스하는 남자에게 소녀가 퉁명스럽게 말한다.
 남자가 잠깐 고개를 든다. 눈이 마주치자 소녀는 다시 고개를 돌린다.
 “그, 그래….”
 남자가 소심하게 대답한다.
 남자가 삽입할 때, 다리 사이에서 허리와 엉치까지 날카롭고 격렬한 통증이 치밀어 오른다. 침대 옆 전화기에 생각이 미친다. 그러나 아쉽게도 소녀의 양 손은 남자가 하나씩 잡고 깍지를 끼고 있다. 통증으로 정신이 아득해진데다 남자에게 잔뜩 눌려서 소녀는 움직일 수가 없다.
 어쩔 수 없이 아픔을 참느라 이를 악물고 얼굴을 찡그리면서 소녀는 이번만 빨리 끝내고 이 짓을 때려치워야겠다고 결심한다. 그것은 전부터 수십 번, 수백 번이나 해왔던 생각이지만, 물론 그 때뿐이다. 소녀는 기억하지 못한다.
 
 남자들은 왜 처녀와 자고 싶어할까. 배 위에서, 정확히는 다리 사이에서 움직이는 남자를 의식하지 않기 위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남자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비명을 지르고 싶을 정도로 격심해지는 통증을 견디기 위해 소녀는 애써 딴 생각을 한다. 언젠가 오래 전에 친구에게 그렇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별로 친한 친구는 아니지만, 그 친구를 통해 건너건너 이 모텔을 알게 되었고 지금의 이 장사를 하게 됐으니, 그런 점에서 꽤 고맙기는 하다.
 그 때, 소녀보다 좀 더 ‘놀아봤던’ 친구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처녀는 모르니까. 뭘 몰라? 라고 소녀가 다시 묻자 친구는 설명했다. 남자가 테크닉이 없어도, 거시기가 작아도 모를 거 아냐, 언제 다른 남자랑 자 봤어야 비교를 하지. 소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정말로 그렇게 중요해? 친구도 소녀를 따라서 고개를 갸웃하면서 대답했다. 남자들한테는 중요한가 보더라고. 그러면서 친구는 덧붙였다. 그리고 처녀는 신선하잖아. 같은 돈이면 중고보다는 당연히 신상이 좋은 거 아니겠어?
 하지만 지금 소녀 위에 올라타서 숨을 헐떡이는 이 남자는 소녀가 ‘신상’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소녀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바로 그 부분이다.
 아니, 엄밀하게 따지자면 소녀는 ‘신상’이 맞다. 이 모텔의 이 방에 걸어 들어온 그 순간에 소녀는 아직 남자를 모르는 숫처녀다. 그리고 성관계를 하고 난 후에 전화기의 수화기를 들고 0번을 누르면, 소녀는 모텔의 이 방에 걸어들어온 그 순간으로 돌아간다. 또 다시 남의 손이 타지 않은 ‘신상품’이 되어, 다음 손님에게 판매할 수 있게 된다.
 돈을 주고 모르는 여자와의 일회용 성행위를 구입하고 싶어하는 남자는 많다. 그 모르는 여자가 나이가 꽤나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비싼 가격도 마다하지 않는 남자도 대단히 많다. 모르는 여자가 어린 소녀인데다 처녀라면 터무니없는 금액인데도 기꺼이 치르는 남자 또한 상상 외로 많다. 그래서 소녀는 현재 상당히 만족스러운 생활을 영위하는 중이다.
 어차피 당할 일이라면 돈이라도 받는 쪽이 이익이다. 게다가 한 번 당하고 끝이 아니라 원할 때는 언제라도 되풀이해서 팔 수 있으니 이건 땡잡은 셈이다. 다만 자주 할 수 없다는 것은 좀 아쉽다. 처음에는 돈맛에 반해서 연락이 올 때마다 했다. 그랬더니 날이 가고 달이 가는 감각이 완전히 뒤죽박죽이 되어 돌아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기 시작한 데다가 툭하면 어지럽고 구역질이 났다. 겁먹은 소녀는 한동안 쉬었다가 지금은 일주일에 한 번으로 정해놓고 있다. 아쉽긴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꽤나 짭짤하게 벌 수 있고, 그래서 소녀는 만족했다.
 언제까지 이렇게 지낼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소녀는 앞날에 대해 미리 걱정하지 않는다. 소녀는 아직 어리다. 돈을 주고라도 어린 숫처녀와 자고 싶어하는 남자들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그리고 이 모텔이 존재하는 한, 소녀는 아무 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저, 한 번 잤던 손님을 다시 받지 않도록 주의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지금 소녀의 배 위에서 열심히 움직이는 남자는, 그런 면에서 유일한 예외다.
 
 남자가 두 번째로 연락해 왔을 때 소녀는 거절하려고 했다. 남자가 제시한 액수를 듣고 그대로 수락해 버렸지만, 막상 방으로 들어갈 때 조금은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남자는 약속한 액수를 군말없이 내주었고 관계가 끝난 뒤에도 별다른 얘기는 하지 않았다. 그리고 소녀가 방을 나가려 할 때, 남자는 소녀에게 물었다.
 “저기…, 다음 번에…, 또, 만나줄 수, 있어?”
 그 말에 소녀는 방을 나서려다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남자는 시선을 돌리며 얼굴을 붉혔다. 그 표정이 무슨 뜻인지 알아챘기 때문에 소녀는 속으로만 웃으면서 대답하지 않고 방을 나왔다. 그리고 기다렸다.
 남자가 세 번째로 연락했을 때 소녀는 두 번째보다도 금액을 올려 불렀다. 소녀의 예상대로,남자는 받아들였다.
 남자와 전화를 끊고 나서 소녀는 친구에게 전화해서 자랑했다. 어린 여자애에게 맛이 가서 뻔히 알면서도 ‘중고 처녀’를 되풀이해서 사기 위해 거금을 내놓으려는 남자를 두 소녀는 실컷 비웃었다.
 시간도 기억도 언젠가는 사라진다. 남는 것은 손 안의 돈뿐이다. 그것이 소녀의 신념이라면 신념이었다.
 
 삽입할 때 소녀가 얼굴을 찡그리자 남자는 동작을 멈추었다. 그대로 기다리자 통증이 가라앉았다. 거기까지는 좋았지만 남자는 한참이 지난 후에도 하던 일을 계속하려 하지 않았다. 대신 뺨이며 목에 입술을 비벼대기 시작했다. 소녀는 몸을 뒤틀며 고개를 돌리고 짜증을 냈다.
 “오빠 지금 뭐 해?”
 “왜, 싫어?”
 남자가 소심하게 되물었다. 소녀는 남자를 쳐다보며 내뱉었다.
 “할 거면 빨리 하고 끝내, 시간 끌지 말고.”
 “그렇지만…, 아파 하는 것 같아서…. 이렇게 하면, 좀 덜 아프다고…, 들었는데….”
 남이사 아프건 말건, 이라고 다시 쏘아붙이려다가 소녀는 참았다. 말이 길어지면 그만큼 시간을 더 끌게 된다. 목구멍으로 치솟는 짜증을 참기 위해 소녀는 스스로를 달랬다. 어쨌든 돈이 되니까, 그것도 많이 되니까, 손님은 손님이다. 소녀가 자기 배 아래 깔려서 괴로워하는 꼴을 보는 게 목적이라면 그 정도 돈 받는 일인데 못 해줄 것도 없다. 어차피 시간은 가게 마련이고, 정해진 시간이 지나면 소녀는 이 모든 일이 일어나기 전으로 되돌아가버리면 그만이니까.
 남자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이제는 소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이마에 입술을 부벼대고 있다. 그것도 짜증이 나지만 소녀는 가만히 누워 있었다. 눈을 감았다.
 남자의 말대로,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있는 동안 통증은 사라졌다. 아프지 않게 되니까 짜증도 같이 가라앉았다. 그리고 나니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손길이 부드럽고 조심스러운 것이 느껴졌다. 딱히 싫지는 않다.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기분 좋다고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좀, 나아졌어?”
 남자가 소녀의 귓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묻는다. 소녀는 대답하지 않는다. 남자는 소녀의 표정을 살피고는 소녀의 엉덩이 밑으로 한 손을 받치고 조심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가라앉았던 아픔이 다시 다리 사이를 찢고 올라온다. 그러나 남자가 또 멈추고 시간을 끄는 것이 싫어서 소녀는 내색하지 않고 속으로만 욕을 하며 참는다.
 
 두 번째로 만났을 때 남자는 소녀를 건드리려 하지 않았다. 대신 스스로 옷을 벗고 침대에 누운 소녀 옆에 앉아서 물었다.
 “저기, 몇 살이야?”
 “오빤 몇 살이 좋은데?”
 소녀는 누운 채로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 남자가 진지하게 물었다.
 “농담하지 말고, 진짜로. 몇 살이야?”
 소녀는 다시 한 번 피식 웃고 대답하지 않았다.
 남자는 조금 기다리다가 다시 물었다.
 “부모님 뭐 하셔? 너 이런 일 하는 거 집에서도 알아?”
 “아저씨.”
 소녀는 몸을 일으켰다.
 “아저씨 이러고 돌아다니는 거 아저씨 마누라도 알아? 되지도 않게 꼰대 같은 소리 할 거면 꺼져.”
 그리고 소녀는 침대에서 내려가려고 했다. 남자가 소녀의 팔을 잡았다. 소녀는 팔을 뿌리치며 남자를 노려보았다.
 “알았어, 알았어. 미안해. 꼰대 같은 소리 안 할게.”
 남자가 사과했다. 그러나 소녀가 다시 침대에 눕자 또 물었다.
 “학생이지? 학교는 제대로 다니는 거야?”
 “아, 진짜!”
 소녀는 벌떡 일어나서 침대를 나왔다. 남자도 따라서 일어섰다.
 소녀는 옷을 입기 시작했다. 남자가 주춤주춤 옆으로 다가왔다.
 “저기…, 미안해.”
 남자가 주저하며 말했다.
 “네 말이 맞아. 내가 너한테 꼰대 같은 소리 할 자격 없지.”
 소녀는 옷을 입다 말고 고개를 들어 남자를 쳐다보았다. 남자가 소녀의 팔을 살짝 잡았다.
 “저기…, 화 풀어.”
 남자가 중얼거렸다.
 “가지 마…. 여기 나랑 잠깐만 더 있자.”
 소녀는 대답하지 않고 그대로 남자를 노려보았다. 남자가 다시 물었다.
 “안 돼?”
 “이거 놔.”
 소녀가 말했다. 남자는 고분고분 소녀의 팔을 놓았다.
 소녀는 남자의 얼굴을 조금 더 노려보다가 말했다.
 “또 개소리 하면 나 그냥 간다?”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 할게. 약속해.”
 
 사정을 하고 나서 남자는 한동안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오빠.”
 소녀가 불렀다.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소녀는 짜증을 냈다.
 “오빠, 끝났으면 빨랑 내려가, 좀.”
 마침내 남자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몸을 일으키는 대신 남자는 소녀를 꽉 끌어안고 눈썹 바로 옆에 입 맞추었다.
 “또 만나줄 수 있어?”
 남자가 속삭였다.
 대답 대신 소녀는 말했다.
 “시간 다 됐어.”
 그 말을 듣고 남자는 다시 길게 한숨을 쉬었다. 소녀의 귓불에 입 맞추었다. 그리고 소녀를 놓아주었다.
 남자가 일어나 앉아서 전화기 옆의 갈색 병을 집어 뚜껑을 돌려 따는 모습을 소녀는 그대로 누운 채 보고 있었다. 남자가 병 속의 액체를 반쯤 마신 뒤에 소녀에게 내밀었다. 소녀도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남자에게서 병을 받아드는 대신 소녀는 재빨리 손을 뻗어 남자 옆에 놓인 전화기의 수화기를 들었다. 0번을 눌렀다.
 
 … 그리고 소녀는 방문을 열고 들어선다. 남자는 이미, 라기보다는 아직도, 침대에 누워 있다.
 소녀가 남자를 향해 간단하게 요구한다.
 “오빠, 나 돈.”
 남자가 침대에 누운 채로 고분고분 대답한다.
 “거기, 바지 속에 지갑 있어.”
 소녀는 조금 경계하는 표정으로 남자와 탁자 위에 놓인 바지를 번갈아 보다가 결심한 듯이 신발을 벗고 방안으로 들어간다. 남자는 침대 위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소녀가 남자의 바지 안에서 지갑을 꺼낸다. 지갑 속에는 정확히 약속한 액수만큼의 돈이 들어 있다. 지폐를 꺼내는 소녀를 보면서 남자가 말한다.
 “저기…, 또 만나줄 수 있어?”
 소녀가 고개를 들어 남자를 쳐다본다. 남자가 어색하게 웃는다.
 “매번 물어보니까, 이상하지…. 그렇지만, 매번, 대답을 안 해 주니까….”
 그리고 남자는 다시 어색하게 웃는다.
 소녀는 대답하지 않는다. 지갑 속에서 지폐를 꺼내 세어본다. 액수를 확인하고 주머니에 쑤셔넣는다. 방을 나가려는 소녀에게 남자가 다시 묻는다.
 “저기…, 또 만나줄 거지? 앞으로는, 꼰대 같은 소리도 안 하고…, 시간도 안 끌테니까….”
 소녀는 눈살을 약간 찌푸리고 의아한 표정으로 남자를 쳐다본다. 그러나 남자가 간절한 표정으로 마주 쳐다보자 마지못해 대답한다.
 “뭔 소린지 모르겠지만 맘대로 해. 그치만 담번엔 더 비싸질 걸.”
 남자는 조금 웃는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인다. 소녀는 방을 나간다.
 소녀가 나가고 문이 닫힌 후에 남자는 일어나서 침대를 나온다. 옷을 입는다. 지갑을 꺼낸 후에 소녀가 아무렇게나 내팽개치고 간 바지를 입고 셔츠의 단추를 잠근 후에 남자는 방을 나오기 전에 침대 옆 탁자 위의 전화기 곁에 놓인 갈색 병을 바라본다.
 “다음 번에는, 저거, 마셔줄 수 있어?”
 남자가 갈색 병을 향해 속삭인다.
 “나하고 있었던 시간, 기억해줄 수 있어?”
 병은 대답하지 않는다. 남자는 가볍게 한숨을 쉬고 방을 나온다.
 
 404호: 없었던 일
 ‘404’라는 불길한 번호가 붙은 방에서는 사실 불길한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두 남자가 침대에 나란히 누워서 말없이 천장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다.
 두 남자는 각자 다른 직업을 가지고 각자 다른 인생을 사는 평범한 성인 남성이다. 두 남자의 각기 다른 인생에는 서로를 위한 자리가 없다. 지금도 없고, 아마 앞으로도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두 남자는 서로 사랑한다.
 그것이 두 남자가 이 모텔을 찾는 이유다. 서로의 인생에 흔적을 남기지 않으면서도 잠시나마 함께 있기 위해서. 그리고 그 잠시나마 함께 있는,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시간을, 지금 두 사람은 말없이 누워서 천장을 쳐다보며 보내기로 한 것이다.
 “야.”
 오른쪽에 누운 남자가 왼쪽에 누운 남자에게 말을 건다.
 “왜.”
 왼쪽에 누운 남자가 대답한다.
 “지금 몇 시야?”
 오른쪽에 누운 남자가 묻는다.
 왼쪽에 누운 남자가 고개를 돌려 시계를 본다. 시간을 말한다.
 잠시 침묵이 흐른다.
 “야.”
 오른쪽 남자가 다시 말을 건다.
 “왜, 또.”
 왼쪽 남자가 대답한다.
 “계속 이러고 있을 거야?”
 오른쪽 남자가 묻는다.
 “음.”
 왼쪽 남자가 간단하게 대답한다.
 “우리 지금 세 시간째 이러고 누워 있잖아.”
 오른쪽 남자가 투덜거린다.
 “음.”
 왼쪽 남자가 또 다시 간단하게 대답한다.
 오른쪽 남자가 고개를 돌려 왼쪽 남자를 쳐다본다. 그리고 벌떡 몸을 일으킨다.
 “야, 도대체 지금 뭐 하는 거야? 우리 왜 이러고 있는 건데?”
 왼쪽 남자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대로 누워서 천장을 쳐다본다.
 “야아.”
 오른쪽 남자가 왼쪽 남자를 건드린다. 왼쪽 남자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는다.
 오른쪽 남자가 다시 왼쪽 남자를, 이번에는 조금 더 거칠게, 건드린다.
 “눈 뜨고 자냐?”
 “아니.”
 왼쪽 남자가 아까처럼 간단하게 대답한다.
 오른쪽 남자가 짜증을 낸다.
 “약 먹었냐? 아님, 도 닦아? 아까부터 왜 이러는 건데?”
 “지루해?”
 왼쪽 남자가 여전히 천장을 쳐다보면서 묻는다. 오른쪽 남자가 여전히 짜증이 밴 말투로 대답한다.
 “당연하지. 보면 몰라?”
 “심심해?”
 왼쪽 남자가 천장을 쳐다보면서 미동도 하지 않고 입만 움직여서 다시 묻는다. 오른쪽 남자가 상체를 세워 앉은 자세로 어이가 없다는 듯 왼쪽 남자의 얼굴을 내려다본다.
 “그래, 심심하고 지루하고 답답해서 미치겠다. 됐냐?”
 “됐어.”
 그리고 왼쪽 남자는 드디어 고개를 조금 움직여 오른쪽 남자를 쳐다본다.
 오른쪽 남자는 기가 차다는 듯 웃는다.
 “되긴 뭐가 돼?”
 “심심하고 지루하면 시간이 느리게 가잖아.”
 왼쪽 남자가 다시 고개를 원상태로 돌려 천장을 쳐다보면서 대답한다.
 “그래서, 뭐?”
 오른쪽 남자가 다시 묻는다.
 “너랑 좀 오래 같이 있고 싶어서.”
 왼쪽 남자가 중얼거린다.
 오른쪽 남자는 입을 조금 벌리고 아주 잠깐 멍한 표정이 되어 왼쪽 남자의 얼굴을 내려다본다. 그리고 꾸물꾸물 다시 왼쪽 남자 옆에 눕는다. 전처럼 나란히 누워서 다시 천장을 쳐다본다.
 시간이 지나면 두 사람은 다시 각자의 현실로 돌아가야 한다. 지금 이렇게 함께 누워서 보낸 시간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그것은 두 사람에게 현실적으로 이로운 일이지만,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두 남자는 알지 못한다. 인간의 관계란 함께 보낸 시간을 통해 몸과 마음에 쌓이는 것이다. 이 모텔에서 접수대 뒤의 알 수 없는 계기판과 전화기의 0번과 갈색 병에 든 드링크제의 도움을 받아 시간을 거스르면 마음 속에 기억은 남지만 그 시간은 몸에 쌓이지 못한다. 쌓이지 못하고 흩어지는 관계는 관계가 아니다 - 최소한, 정상적인 관계는 그런 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장기적인 고찰은 지금 여기 누워 있는 두 사람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다. 두 남자는 결혼을 할 수 없다. 그 외의 형태로 가족을 이룰 방법도 없다. 주위 사람들에게 서로를 소개하는 사건이 만약에라도 벌어진다면 그 때는 ‘친구’라는 애매한 단어 외에는 공식적인 호칭이 있을 수 없다. 장기적으로 친밀한 관계 따위는 없다고 보는 편이 현명하다. 그러므로 나란히 누워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천장을 쳐다본다는 다분히 멍청한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지금, 여기, 함께 있는 이 순간을 조금이라도 늘려보는 것이 두 남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그렇게 천장을 쳐다보다가 오른쪽 남자는 자기도 모르게 잠이 든다. 오른쪽 남자가 가볍게 코를 골기 시작하자 왼쪽 남자는 고개를 돌려 오른쪽 남자를 돌아본다. 옆으로 누워서 한 손을 오른쪽 남자의 가슴에 올려놓는다. 오른쪽 남자의 왼쪽 가슴에서 왼쪽 남자의 왼손으로 심장 박동이 전해져 온다. 심장이 한 번 뛸 때마다, 남자는 연인이 자기 옆에 누워 있음을 느낀다. 동시에, 연인의 심장이 한 번 뛸 때마다 남자는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이 한 조각씩 부서져 사라지는 것을 느낀다.
 
 오른쪽 남자가 퍼뜩 잠에서 깬다. 왼쪽 남자와 눈이 마주친다.
 “어, 지금 몇 시야? 나 얼마나 잤어?”
 “좀 잤어.”
 왼쪽 남자가 모호하게 대답한다.
 오른쪽 남자가 몸을 일으킨다. 침대 옆에 놓아둔 손목시계를 집어들어 시간을 본다. 입 속으로 낮게 투덜거린다.
 “빌어먹을….”
 그리고 오른쪽 남자는 왼쪽 남자를 원망한다.
 “시간 다 됐잖아? 좀 깨우지 그랬어?”
 왼쪽 남자가 변명한다.
 “너무 잘 자서 못 깨웠어.”
 “그래도 그냥 깨우지, 그걸 자게 냅두냐….”
 뭐라고 더 불평하려는 오른쪽 남자에게 왼쪽 남자가 전화기 옆의 갈색 병을 집어서 내민다.
 “아 씨발, 진짜? 벌써?”
 오른쪽 남자가 항의한다. 왼쪽 남자가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오른쪽 남자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병을 받아든다. 눈대중으로 분량을 확인한 뒤에 조심스럽게 반만 마신다. 그리고 병을 왼쪽 남자에게 내민다. 왼쪽 남자가 받아들어 나머지 반을 마신다.
 왼쪽 남자가 빈 병을 전화기 옆에 내려놓는다. 그리고 수화기를 든다. 오른쪽 남자를 쳐다본다. 오른쪽 남자가 불만에 가득찬 얼굴로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다.
 왼쪽 남자가 0번을 누른다.
 
 … 그리고 두 남자는 모텔방 입구에 서 있다.
 왼쪽에 누워 있었던 남자가 문고리를 잡는다. 문을 밀어 열려는 남자의 팔을 오른쪽에 누워 있었던 남자가 붙잡는다.
 “하루만 더 있게 해 달라고 할까?”
 오른쪽에 누워 있었던 남자가 말한다.
 “한 번만 더, 되돌려 달라고…. 안 될까?”
 “… 안 될 걸.”
 왼쪽에 누워 있었던 남자가 대답한다.
 오른쪽에 누워 있었던 남자가 후우, 하고 한숨을 쉰다. 중얼거린다.
 “… 가야지.”
 그러나 두 남자는 방에서 나오지 못한다. 흘러가는 시간을 아쉬워하며 그대로 모텔방 현관에 선 채 연인의 얼굴을 마주 들여다볼 뿐이다.
 
 405호: ?
 복도 끝방은 405호다. 이 방에 누가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가끔 문 밑으로 불이 켜지기도 하고 꺼지기도 하는 것이 보인다. 안에서 돌아다니는 발소리나 웅얼거리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올 때도 있다. 그러나 남자의 목소리인지 여자의 목소리인지는 알 수 없다.
 때로 비명 소리 같은 것이 들릴 때도 있다. 그러나 그 소리는 문 밖으로 완전히 새어나오기 전에 길게 끄는 한숨 소리처럼 약해졌다가 가늘게 떨리면서 사라져 버린다.
 
 모텔은 언제나 저녁이다.
 405호를 제외한 네 개의 방을 차지했던 손님들이 모두 나가고, 새 손님이 들어오기 전에 방이 전부 비는 때가 있다. 아주 드물지만, 그런 일도 때로는 일어난다.
 그럴 때, 접수대의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자는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옛 가요를 끄고 접수대를 정리한다. 서랍을 열고 안에서 열쇠를 꺼낸다. 잠시 자리를 비우고 위층으로 올라간다. 네 개의 방문을 하나씩 열어보며 층 전체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재차 확인한 후에 천천히 복도 끝으로 간다. ‘405’라고 적힌 번호표가 붙은 문 앞에 서서 손에 든 열쇠를 열쇠구멍에 꽂고 천천히 돌린다. 조그맣게 찰칵, 소리가 나면서 문이 열리면 여자는 살짝 웃는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간다.
 여자가 405호에 있는 동안 되감겼던 시간이 풀어져 나머지 네 개의 방으로 흘러 들어간다. 그리하여 여자가 방을 나올 때쯤 모텔은 새벽이 된다.
 방을 나와서 여자는 다시 복도를 살피며 주위에 아무도 없는지 확인한다. 들어갈 때처럼 살짝 웃음을 띠며 열쇠로 방문을 잠근다. 그리고 복도를 천천히 걸어 아래층의 접수대로 돌아간다.
 그렇게, 시간을 거스르는 이 모텔에서도 아주 가끔은 시간이 흐른다. 그리하여, 모텔 속에 세상이 존재하듯, 모텔도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게 된다.
mirror
댓글 10
  • No Profile
    SeeReal 09.11.28 21:04 댓글 수정 삭제
    에, 보라님과 함께 거울 에로화의 첨병을 달리려고 하는 필진 1인으로서... 이와 같은 시도는 매우 환영해마지않는바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여성 작가의 에로티시즘!

    ...어째 농담으로 말했던 막장 시스터즈가 현실화되는 느낌이...
  • No Profile
    보라 09.11.28 22:41 댓글 수정 삭제
    SeeReal님과 함께라면 막장마저도 황홀합니다 (진지)

    사실 이 단편 필진합평회에 들고 갔다가 "그다지 에로하지 않다"라는 평을 듣고 절망했어요. 환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노력하겠습니다 -_ㅜ
  • No Profile
    우상희 09.12.07 18:29 댓글 수정 삭제
    회사에서 짬을내서 읽기에는 약간 부담스러운 내용이네요. ^^;; 보라님의 글은 언제나 설정이 참 좋은 거 같습니다. 제목이 모텔이름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질 못했네요.
  • No Profile
    보라 09.12.08 21:41 댓글 수정 삭제
    죄, 죄송합니다;;; 그래도 말씀대로 제목이 모텔 이름같진 않으니까 그냥 눈치 봐서 읽으셔도 되지 않을까요 ^^;;;

    재미있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
  • No Profile
    윤재진 09.12.09 17:41 댓글 수정 삭제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설정이 독특하네요. ^^a

    여기에서 기억은 남아있는거죠??
  • No Profile
    보라 09.12.09 23:13 댓글 수정 삭제
    감사합니다 ^^

    기억은 드링크제를 마셔야만 남게 되는 거죠. 안 마시면 기억이 안 남구요.
  • No Profile
    김양현 10.01.27 11:58 댓글 수정 삭제
    잘 읽었습니다 ㅇ_ㅇ

    방마다 다르게 되감겨있는 시간을 풀려면 어깨가 뻐근하겠네요.
  • No Profile
    보라 10.01.28 00:29 댓글 수정 삭제
    예 좀 복잡하겠죠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No Profile
    유리장미 10.02.02 21:16 댓글 수정 삭제
    거울에서 처음으로 클릭한 작품인데 소재가..^^; 운이 좋은건가요(???) 콜록콜록;;
    어쨌든 독특하면서도 여운이 남는 좋은 작품 잘 읽었습니다! 재미있었어요+_+
  • No Profile
    보라 10.02.02 23:09 댓글 수정 삭제
    헉 영광입니다;;;; 운이 좋으셨던 거예요 아무렴요 ^^;;;;; 아하하;;;;;; 진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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