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중편 작은대나무-2

2010.08.22 20:4508.22

유소림은 혀를 찼다.
“상태가 많이 안 좋군.”
소죽은 침상에 누워 잠들어있는 장연비를 바라보며 말했다.
“설명을…… 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음약(淫藥)과 환락향에 의한 중독상태가 심해. 그것도 한 두 번 먹은 것이 아니군. 먹은 것도 그다지 질이 좋은 약이 아니라서 휴우증이 머리에 까지 미친 것 같아. 거기에 윤간 때문에 생긴 정신적 충격이 더해져서 백치가 되어버린 것 같군.”
음약, 환락향은 흔히들 색마들이 여자를 강제로 안기 위해 자주 쓰는 약인데 먹이는 것은 음약, 향을 피워 흡입하게 하는 것은 환락향이라 한다. 남자든 여자든 이 약을 접하면 몸이 절로 뜨거워지고 이성이 흐릿해지며 성에 대한 것만 생각하게 된다. 효력이 약한 것은 가볍게 음심을 일으키는 정도에 불과하지만 심한 것은 환각을 보게 만들 뿐만 아니라 약 없이는 살수 없는 강력한 중독현상을 나타내기도 한다.
“치료는…… 가능합니까?”
“몰라. 몸에 남아있는 약 기운이야 얼마든지 빼줄 수 있지만 한번 백치가 되어버린 걸 고칠 수는 없어. 그저 시간이 해결해주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지.”
“……”
“……그리고 네 앞에서 말하기에는 미안하지만 심한 일을 당한 것 같아서 그…… 쪽의 상태도 살펴 봤다.”
“……어떻습니까?”
“나름대로 치료는 했지만 이 쪽도 손상이 심해. 재수가 없으면 아이를 낳지 못하게 될 수 도 있어.”
“……”
소죽은 굳게 입을 다물었다. 대꾸가 없자 유소림은 소죽을 바라보았다. 소죽은 울고있었다.. 그런 소죽 앞에서 유소림은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소죽을 남겨두고 천천히 방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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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죽은 며칠 동안 유소림의 집에서 머물렀다. 소죽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장연비를 간호했고 유소림도 그녀의 치료에 온 힘을 기울였다.
유소림은 이마에 송글송글 맺혀있는 땀을 소매로 닦았다.
“후우, 됐다. 더 이상은 치료할 필요가 없어. 이제는 요양을 하면서 천천히 회복하기만을 기다리면 돼.”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감사! 필요 없어. 그런 건.”
“……”
유소림은 물에 적신 수건으로 연신 몸을 닦으며 말했다.
“그나저나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냐? 여기 말고 머물 곳은 있냐?”
“예전에 사부님께서 머무시던 거처로 가려고 합니다.”
“거기가 어딘데?”
“악록산입니다.”
“……그렇게 멀지는 않군. 그러면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나에게 알려라. 금방 달려갈 테니까.”
“예.”
소죽은 눈 밑이 시커멓게 되어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소림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 녀석…… 그나저나 내가 하오문을 통해 알아봤는데 네가 고자로 만들어버린 놈들 중에 흑사방 방주의 아들녀석이 있다더군. 그 녀석이 윤간을 즐기는 변태라고 하니까 아마 모든 원흉은 그 놈일 거다.”
“흑사방이오?”
“별 것 아닌 흑도방파야. 어딜 가나 꼭 하나씩 있는 건달 집합소지.”
“그렇군요.”
“그런데 그 놈들이 너를 노리고 있는 것 같더라. 흑사방에서 너의 정보를 사갔다고 하더라고.”
소죽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긴, 그렇게 생각 없이 사람을 죽이고 불구로 만들었는데 뒤끝이 없을 수가 없다.
“그래서 말인데…… 갈 때 이걸 가져가라.”
유소림은 자신의 소매 속으로 손을 넣어 팔뚝을 만지작거리더니 철로 만들어진 토시를 꺼내서 소죽에게 내밀었다. 소죽은 놀란 표정으로 그것을 받았다.
“이건……! 철비갑이 아닙니까?”
철비갑은 독과 암기의 대명사인 사천당문에서 만들어낸 암기 중 하나로, 팔뚝에 착용해서 방어구로도 쓸 수 있고 안에 내장되어있는 암기를 발출할 수도 있는 고급 장비다. 예전에 유소림이 당가에서도 해독제를 만들지 못해서 애를 먹던 것을 도와준 적이 있는데 그때 보답으로 받은 것이었다.
“주는 거 아니야. 너 혼자라면 흑사방 놈들쯤이야 별 것도 아니겠지만 너는 이제 홀몸이 아니잖아? 그러니까 빌려주는 거지. 잘 쓰고 나중에 반납해. 그리고……”
유소림은 그것 이외에도 이런저런 약들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들고 다니는 금창약, 내상약부터 시작해서 배탈약, 감기약 같은 자질구레한 것들까지 내놓더니 마침내 효과가 보장되지 않은 실험용 약까지 꺼냈다.
“이건 시환단(尸換丹)이라는 건데…… 이걸 먹으면 하루 동안은 심장이 멈추는 가사상태가 되지. 거의 모든 신체활동을 정지시키니까 죽은 척을 할 때 쓰거나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은 사람한테 먹여서 치료할 때까지 시간을 벌거나 할 수가 있을 거야.”
소죽은 조그맣게 웃었다.
“물론 그 외의 다른 효과가 있을 수도 있는 것이겠죠?”
“아니야! 실험해 본적은 없지만 효과는 확실해! 부작용 따위는 없을 거야.”
“……하하.”
소죽은 웃으며 시환단을 받아 들었다. 약의 효과는 믿을 수 없지만 유소림의 마음만큼은 믿을 수 있었다. 그는 감사하다는 말을 속으로 삼키며 유소림이 준 것들을 품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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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사방의 방주 마단역은 매우 화가 나있었다. 그는 아들인 마조연이 변태적인 취향을 가졌다는 것을 알았지만 막지 않았다. 물론 아들의 행동이 못마땅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마조연은 그의 하나뿐인 아들이었고 마단역은 아들의 조금 이상한 취향을 감싸줄 만한 아량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아들이 거세를 당하다니. 그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살심(殺心)이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는 분을 참지 못하고 앞에 있던 상을 뒤엎었다. 상위에 올려져 있던 찻잔과 주전자가 와장창 깨지며 바닥을 뒹굴었다. 그는 소리를 질렀다.
“어떤 놈이 이런 건지 당장 알아와!”
잠시 후, 그의 부하가 그의 방에 들어왔다. 부하는 난장판인 방의 풍경과 광기가 번들거리는 마단역의 눈을 보고선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 마단역은 겁에 질려 우물쭈물하고 있는 부하를 다그쳤다.
“말해! 어떤 놈이야!”
“……그, 그러니까 하오문에게 의뢰해서 얻어온 정보입니다. 도련님을 해친 흉수는 소죽이라는 자인데…… 무림인입니다.”
무림인이라는 말에 마단역의 눈에서 광기가 사라졌다. 그것을 본 부하는 안정을 되찾고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귀갑봉침이라는 별호를 가지고 있는데 방어적인 도법으로 빈틈을 만들고 양팔과 양다리에 숨겨놓은 암기로 치명타를 가하는 무공을 구사하기에 그런 별호가 붙었다고 합니다. 세간에는 광약사 유소림의 호위무사로......”
마단역은 손을 들었다.
“그만. 잡다한 것은 필요 없다. 놈은 고수인가?”
“예. 고수인 것 같습니다. 비쾌검 이운룡, 패도 장량등 수많은 무림인들이 그에게 패했고 천룡공자 모용군명의 한쪽 눈을 가져간 것이 이 자라는 소문도 있다고 합니다.”
“흠…… 사문은?”
“없습니다. 하지만 과거에도 귀갑봉침이라는 별호를 사용하며 비슷한 무공을 구사하는 자가 있었다고 하니 아마도 그의 제자가 아닐까 합니다.”
마단역은 화를 억눌렀다. 비록 흑사방이 별 것 아닌 방파라 해도 하나의 집단을 이끄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닌 법. 그는 무림고수라는 말에 금세 냉정을 되찾고 계산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얼굴을 찡그렸다. 그의 흑사방은 말 그대로 건달집단이었다. 무공을 익힌 놈이라고 해봐야 사람 몇 죽여본 정도로 으스대는 허접쓰레기들뿐이고 방주인 자기 자신의 무공도 그리 고강한 편이 아니었다. 강력한 무공을 가진 진짜 고수를 상대하기에는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는 말이다. 그는 한참이나 고민했다.
“……”
복수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상대는 그의 사랑하는 아들을 병신으로 만들고 가문의 대를 끊은 놈이었다. 절대로 가만히 내버려 둘 수 없었다. 그는 결정을 내리고 낮은 어조로 말했다.
“나가서 애들을 모아라. 한 놈도 빼놓지 말고 다 모아! 그리고 놈이 있는 곳을 알아와라! 당장! 알겠나?”
“예…… 예!”
부하는 더듬더듬 대답을 하고선 부리나케 방을 뛰쳐나갔다. 홀로 방안에 남은 마단역은 사나운 얼굴로 으르렁거렸다.
“고수건 나발이건 간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죽여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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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죽은 폐가나 마찬가지인 사부의 집을 깨끗이 고쳤다. 비바람에 휩쓸려 부서져버린 곳은 고치고 창고는 가득 채웠으며 식기나 이불 같은 것들도 모두 새것으로 바꿨다. 그렇게 새로 단장한 집에서 장연비와 소죽은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
“……”
소죽은 묵묵히 죽을 떠서 수저를 장연비의 입에 대주었다. 장연비는 멍하니 있다가도 소죽이 그리 하면 날름날름 잘도 죽을 삼켰다. 죽을 다 먹고 나자 장연비는 침상에 드러누워 버렸다. 소죽은 장연비의 침상 옆에 앉아 책을 보았다.
“아…… 아……”
장연비가 울상이 되어서 앓는 소리를 내자 소죽은 그녀를 업고 뒷간으로 향했다. 그녀는 뒷간에서 대놓고 변을 보았다. 소죽은 얼굴도 붉히지 않고 물에 적신 수건으로 그녀의 사타구니 사이를 깨끗하게 닦아 주었다.
소죽은 다시 장연비를 눕혀놓고 마당으로 나와 무공을 연마했다. 도를 휘두르고 숨겨둔 비검을 던졌다가 회수하기를 반복하는 수련이었다.
어느새 보니 장연비가 방에서 나와 그가 수련하는 것을 구경하고 있었다. 허공에 칼을 그어대는 소죽을 한참 동안 지켜보던 장연비는 그것도 지겨웠는지 몸을 일으켜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소죽은 장연비가 숲 속으로 들어가버리자 칼을 내려놓고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장연비는 아이처럼 놀았다. 나뭇가지를 꺾어 바닥에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바닥의 돌을 주워 아무데나 던지기도 하고, 하늘을 나는 새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까르르 웃기도 했다. 소죽은 변해버린 장연비의 모습에 씁쓸하게 웃었다. 어렸을 때 그를 지켜주던 장연비는 이제 없었다. 그저 세상의 풍파에 휩쓸려 부서져버린 여자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소죽은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왜 거기서 욕심을 부렸을까? 사부가 하산하라고 했을 때 바로 돌아왔더라면 누님을 저런 꼴이 되도록 하지 않았을 텐데. 소죽은 목이 메는 것을 느끼고 가슴을 주먹으로 퍽퍽 때렸다.
“아.”
소죽은 번쩍 정신을 차렸다. 나무뿌리에 발이 걸린 장연비가 휘청휘청하더니 넘어지려는 것이 보였다. 그는 재빨리 달려들어 넘어지려는 장연비의 몸을 안아 들었다. 장연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소죽을 올려다보았다. 그 놀란 토끼 같은 눈 보자 소죽은 다시 한번 실감했다. 장연비는 약했다.
“아, 아아……”
장연비는 소죽의 품에서 벗어나더니 그의 등뒤로 들어가 어깨를 잡고 보채는 듯한 신음소리를 냈다. 소죽이 그것이 업어달라는 몸짓이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데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소죽은 그녀를 업고 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장연비는 소죽의 등에 업혀서 바동바동거리더니 곧 잠이 들었다. 등으로 느껴지는 온기에 소죽은 왠지 모르게 가슴이 뭉클해졌다.
과거는 돌이킬 수 없는 것, 이제 와서 후회하면 뭐하나. 앞으로는 잘 해야지. 받은 것의 열 배, 스무 배로 갚아 드릴 거야.
소죽은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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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죽은 해가 뜨기도 전에 일어났다. 그는 바닥에서 조용히 몸을 일으켜 침대에 누워있는 장연비를 살펴보았다. 장연비는 곤히 자고 있었다. 소죽은 흐트러져있는 장연비의 이불을 정돈해준 뒤에 방을 나왔다.
아침을 만들기 위해 주방에서 이것 저것 뒤적이던 소죽은 불을 피울만한 장작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발견했다. 그는 주방을 나와 도끼와 지게를 메고 집을 나섰다.
아침 해가 떠오르고 새들이 지저귀기 시작할 때, 소죽은 돌아왔다. 등에 메고 있던 지게에는 장작이 잔뜩 쌓여있었다. 마당에 들어선 그는 누군가를 보고선 멈췄다.
“오랜만이군요.”
“……”
소죽은 말없이 지게와 도끼를 마당 한 구석에 내려놓았다. 그의 무심한 반응에 남궁화련은 약이 올랐다.
“당신은 인사도 안 해요?”
“무슨 일이오? 나는 이제 강호의 일에서는 손을 땐 사람이오.”
“……알아요. 그런 일로 찾아온 것은 아니에요.”
소죽은 한숨을 쉬었다.
“일단은 들어가시오. 차라도 올릴 테니.”
“알았어요.”
남궁화련은 소죽의 안내에 따라 순순히 방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방안을 둘러보았다. 침대에 누워 새근새근 자고 있는 장연비가 눈에 띄었다. 그녀는 문득 질투심이 솟아 올랐다. 남궁화련은 최근 소죽의 행적을 조사했었기 때문에 장연비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소죽이 유일하게 사랑하는 여자가 그녀라는 것도 느낌으로 알았다. 그래서 질투가 났다. 하지만 뭐라 할 수도 없었다. 장연비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말도 제대로 못하는 백치에게 무슨 말을 하겠는가? 게다가 남궁화련은 소죽의 마음을 빼앗을 자신이 있었다. 그녀는 장연비보다 아름다웠고 남궁세가라는 든든한 후원자까지 있었다.
잠시 후 소죽이 주전자와 찻잔을 가지고 방으로 들어왔다. 그는 남궁화련에게 앉으라고 권한 뒤에 자신도 의자에 앉았다. 그는 남궁화련에게 찻잔을 내밀며 말했다.
“어떤 용건으로 찾아왔는지 물어도 되겠소?”
“꼭 용건이 있어야만 찾아오나요?”
“그런…… 건 아니지만.”
소죽은 남궁화련의 날카로운 반응에 입을 다물었다. 그는 이 여자가 무슨 이유로 갑자기 찾아와서 괜히 신경질을 내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남궁화련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당신, 당신과 싸운 뒤에 오빠가 어떻게 됐는지 알아요?”
“글쎄…… 모르겠소.”
“오빠는 미쳐버렸어요. 한쪽 눈을 잃은데다 자존심에도 크게 상처를 입었죠. 거기에 아버지는 오히려 오빠에게 벌을 내렸어요. 오빠가 실력이 모자라서 진 것이 아니라 어설픈 방심 때문에 졌다는 걸 아시기 때문이죠. 게다가 어디선가 소문이 나서 천룡공자가 귀갑봉침에게 졌다고 모두들 떠들고 다니더군요. 결국 오빠는 막 나가기로 작정을 했는지 천룡공자라는 별호도 내놓고 매일매일 술독에 빠져서 지내요.”
“……”
“당신 잘 못이 아니라는 건 나도 알아요. 정당한 비무였으니까요. 하지만 오빠의 생각은 다른 것 같아요. 오빠는 당신이 자기자신의 인생을 망쳐버렸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서……“
소죽이 불쑥 말했다.
“복수를 하려고 한다는 거요?”
남궁화련은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소죽은 한숨을 쉬었다. 흑사방만 해도 골치가 아픈데 남궁군명까지 더해지다니. 아니, 남궁군명에 비하면 흑사방은 아무것도 아니다. 한번은 운이 좋아서 어떻게 이겼지만 두 번은 자신 없었다. 남궁화련은 침중한 표정이 된 소죽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오빠의 손에서 벗어날 방법을 하나 가르쳐 줄까요?
“……그게 뭐요?”
“내 남편이 되세요.”
소죽은 놀란 눈으로 남궁화련을 바라보았다. 남궁화련은 얼굴을 붉혔지만 소죽의 눈을 피하지는 않았다.
“남궁세가의 사위가 된다면 남궁세가가 당신을 보호해 줄 거에요. 오빠는 이제 내버린 자식이나 다름없지만 저는 다르니까요. 당신은 오빠를 쓰러트린 사람이고 제법 명성도 있는 사람이니 아버지도 제가 좋다고만 하면 크게 반대하시지는 않을 거에요.”
“……진심으로 하는 소리요?”
“그럼 내가 이런 소리를 장난으로 할 것 같아요?”
소죽은 망설였다. 대답은 정해져 있었지만 왠지 미안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입을 다물고 있을 수는 없었다.
“미안하지만,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이오.”
“……!”
남궁화련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눈에서 빛이 아른거렸다. 소죽은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오.”
남궁화련은 입술을 깨물고 눈물을 참았다. 하지만 욱하고 튀어나온 말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당신은 정신이 나가버린 창녀가 나보다 더 좋단 말인가요?”
챙그랑!
소죽의 손에서 찻잔이 터져나갔다.
“내 앞에서, 누님을 모욕하는 발언은, 하지 마시오.”
막대한 살기가 남궁혜련에게 쏟아졌다. 하지만 그녀는 겁을 먹기는커녕 눈을 부릅뜨고 소죽의 뺨을 갈겼다.
“나쁜 자식!”
남궁화련은 방을 뛰쳐나갔다. 소죽은 한참을 멍하니 화끈거리는 볼을 쓰다듬었다. 풀리는 일은 하나도 없고 점점 꼬여만 간다. 그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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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소죽은 잠을 자지 못하고 뒤척였다. 남궁화련의 일 때문인 것도 있지만 그 외에도 몸이 저릿저릿 아려오며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지는 기이한 감각이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예감, 곧이어 닥쳐올 싸움의 냄새였다.
소죽은 일어나 의자에 앉았다. 장연비는 그의 앞에서 잠들어있었다. 그는 장연비의 볼을 쓰다듬으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농후한 살기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다만 그 살기는 칼날처럼 예리하지도, 날뛰는 야생마처럼 난폭하지도 않았다. 연기처럼 두리뭉실한, 단련을 거치지 않은 하수의 살기였다.
‘흑사방의 무리들인가 보군.’
소죽은 조심스럽게 칼을 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방문을 열었다.
쐐애액!
문을 열자마자 무언가가 번개처럼 날아들었다. 소죽은 곧바로 귀갑도를 펼쳤다.
거북이 등껍질의 이름을 가진 도법은 순식간에 모든 방위를 점하며 날아드는 것들을 쳐냈다. 소죽은 공격을 막아내면서 자신이 쳐내고 있는 것이 화살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상대방은 활을 가지고 온 것이다. 지금 당장이야 막아낼 수 있지만 막기만 하다가는 언젠가 한계가 온다. 그는 거리를 좁히기 위해서 발을 박차고 튀어나갔다. 그러자 이번에는 수풀이 흔들리며 검을 옷을 입은 괴한들이 튀어나왔다. 그들은 진형을 갖추며 뭔가 길쭉한 것을 찔러왔다. 창이었다.
창은 다루기가 쉬운 무기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개개인이 사용할 때의 이야기. 여럿이서 진형을 갖추고 다루기에는 창처럼 사용하기 쉽고 강력한 것이 없다. 일렬로 나란히 서서 순차적으로 찔러대기만 해도 그 엄청난 사정거리 때문에 빈틈이 없는 완벽한 공격이 되는 것이다.
소죽은 이들의 조직적인 움직임에 잠시 당황했다. 상대방은 철저한 준비를 하고 온 것이 분명했다. 이런 자들을 상대할 때는 시간을 끌면 안 된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그들은 더욱 짜임새있게 공격해 올 것이고 그렇게 되면 아무리 소죽이 날고기는 고수라 해도 이길 수가 없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전심전력으로 공격해 들어갔다.
창은 칼보다 길지만 던지는 비검보다는 짧다. 그는 비기인 사봉사출을 사용해 단번에 비검 네 개를 내쏘았다. 비검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창을 든 괴한들의 목에 꽂혔다.
“으악!”
“크어억!”
순식간에 네 명의 괴한들이 쓰러지고 진형이 무너졌다. 괴한들은 그 한 수에 겁을 먹고 주춤거렸고, 그 사이 소죽의 칼에서는 시뻘건 기운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놀라서 소리쳤다.
“가, 강기다!”
“피해라!”
소죽은 강기를 뿜어내는 칼을 마구 휘둘렀다. 강력한 내공으로 만들어낸 빨간 칼날은 그저 휘두르기만 해도 무기와 사람을 한꺼번에 두 조각 내버렸다. 소죽은 종횡무진 휩쓸었고 괴한들은 추풍낙엽으로 쓰러져갔다. 남은 자들은 소죽의 기세에 완전히 압도되어서 싸울 생각도 하지 못하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런 병신들! 도망치는 놈은 죽인다!”
괴한들의 두목으로 보이는 한 명이 욕지거리를 하며 검을 뽑아 도망치는 자의 목을 날려버렸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히이이익! 죽는다!”
“도망쳐!”
소죽이 칼을 멈췄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기들끼리 우왕좌왕하다가 두목으로 보이는 자를 빼놓고는 다 도망쳐버렸다.
“제, 제기랄! 쓸모 없는 것들 같으니!”
괴한들의 두목, 마단역은 천천히 다가오는 소죽을 피해 뒤로 물러섰다. 그는 자신이 있었다. 그의 준비는 완벽했다. 소죽을 잡을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하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그는, 아니 그의 흑사방은 소죽에게 생채기하나 내지 못했다. 게다가 그는 도망칠 수도 없었다. 흑사방은 철저히 이득과 실리를 통해 이루어진 조직이다. 살아 돌아간다고 해도 이런 엄청난 고수를 적으로 돌려버린 이상 아무도 그를 따르지 않을 것은 자명한 일. 흑사방은 끝난 것이다.
“으아아아!”
그는 괴성을 지르며 소죽을 향해 달려들었다. 모든 것이 끝났다. 그는 이미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마지막 남은 오기가 그를 움직였다. 죽어도 이렇게는 안 죽어! 하다 못해 상처 하나라도!
소죽은 침착하게 대응했다. 그는 칼을 휘둘러 마단역의 검을 쳐내고 다시 한번 움직여 그의 몸을 베었다.
“크악!”
마단역은 비명을 지르며 나가떨어졌다. 하지만 죽지는 않았다. 그래도 부하들과는 다르게 배운 가락이 나와서 최후의 순간에 몸을 뒤로 빼서 치명상을 면한 것이다.
“헉! 헉!”
한번 죽을 뻔한 위기를 면하자 이제는 오기고 자존심이고 다 사라져버렸다. 마단역은 눈물 콧물 질질 흘리며 빌기 시작했다.
“사, 살려줘! 제발!”
하지만 소죽은 그를 살려줄 생각이 없었다. 이런 류의 종자는 은혜를 베풀어도 등만 돌리면 그것을 원수로 갚는 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는 마단역의 앞에 서서 칼을 들어올렸다. 그때였다. 누군가가 어둠 속에서 튀어나오며 엄청난 속도로 공격을 해왔다.
쓰아악!
소죽은 칼을 내려치지 못하고 몸을 날렸다. 그의 앞섬이 날카롭게 잘려나가 가슴이 드러났다.
“으흐흐흐흐! 여기 숨어있었구나! 소죽!”
한쪽 눈을 안대로 가리고 나머지 한 쪽 눈으로는 시퍼런 광기를 뿜어내는 남자가 달빛 아래로 모습을 드러냈다. 소죽은 남자가 뿜어내는 지독한 살기와 증오심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드디어 올 것이 온 것이다.
“남궁군명!”
남궁군명은 사악하게 웃었다.
“신수가 훤해 보이는군! 소죽! 나를 이렇게 만들어놓으니 그리 기분이 좋던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당신과 나의 비무는 정당한 것이었소! 그 책임을 나에게 물을 수는 없을 텐데?”
남궁군명은 버럭 화를 냈다.
“정당? 정당하다고? 네놈은 그 샌님 같은 얼굴을 하고 나를 속였어! 뭐? 선공을 양보해 달라고? 크하하! 거기에 속아 넘어간 내가 잘못이지! 게다가 네놈은 비겁하게 암기를 날리기 까지 했어!”
“……그게 이유가 된다고 생각하오?”
“닥쳐!”
남궁군명은 노성을 지르며 난폭하게 검을 날렸다. 소죽은 남궁군명의 검에 맺혀있는 시퍼런 기운을 보곤 공격을 막지 않고 피했다.
“다 네놈 때문이야! 모든 게! 죽여주마! ”
폭풍 같은 검세가 소죽을 난자하려 달려들었다. 그 기세가 매우 삼엄해, 소죽은 반격은 생각도 못하고 피할 뿐이었다. 소죽은 이를 갈았다. 남궁군명은 흥분한 나머지 빈틈을 보이고 있었지만 소죽은 그것을 노릴만한 기술이 없었다. 그의 칼은 방어를 위한 것이지 공격을 위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비검은 이미 다 써버렸고 흑사방을 처치하는데 상당히 많은 내공을 소모한 터라 보법을 발휘해 피하는 것도 금세 무리가 왔다. 결국에 그는 남궁군명의 검을 피하지 못하고 막았다.
콰앙!
급하게 강기를 끌어올려 방어에 성공하기는 했지만 워낙 내공의 차이가 심해서 그 여파만으로도 엄청난 충격이 왔다. 소죽은 훨훨 날아 나무에 몸을 들이받았다.
“크윽……”
입가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그저 일격을 막았을 뿐인데도 내상이 심했다. 소죽은 고통을 눌러 참으며 칼을 들고 일어서려고 했다.
“늦었어!”
어느새 소죽의 코앞까지 다가온 남궁군명이 그의 손목을 밟았다. 남궁군명은 발에 내공을 집중했다.
우두두둑!
“으아아악!”
단숨에 소죽의 손목이 부러져버렸다.
“하하하하! 내가 이런 놈에게 졌다니! 믿을 수가 없군!”
남궁군명은 승자의 미소를 지으며 소죽을 깔아뭉갰다.
“우선은 당한 만큼 돌려줘야겠지?”
그는 검을 소죽의 눈 앞에 들이댔다. 그리고 천천히 검을 밀어 넣기 시작했다.
“크, 으으윽!”
소죽은 고통스러운 신음을 냈지만 검이 눈 속으로 파고들어서 반항도 못하고 가만히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남궁군명은 검을 슬슬 돌려 눈을 후벼 파면서 말했다.
“그래, 눈을 잃은 기분은 어떤가 응?”
남궁군명은 말을 끝내며 검을 확 뽑았다. 그러자 완전히 뭉개져 덩어리가 되어버린 안구가 검 끝에 매달려 나왔다.
“아아아아악!”
소죽은 발버둥을 치며 비명을 질렀다. 남궁군명은 검을 털어내고 이번에는 반대쪽 눈에 검을 가져다 댔다.
“당한 만큼 돌려주는 것만으로는 영 성에 차지가 않는 군. 못해도 두 배로는 돌려줘야겠어.”
그리고 그대로 검을 찔러 넣으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꺄아아아악!”
“응?
갑작스럽게 울려 퍼지는 여자의 비명에 남궁군명은 검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푹 패인 눈에서 솟아나는 피로 얼굴을 뻘겋게 물들인 소죽도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누, 누님!”
집밖으로 장연비가 나와있었다. 밖이 소란스러워서 잠이 깬 것이다. 그녀는 주변에 널린 시체와 피를 보고선 겁에 질려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남궁군명은 소죽과 장연비를 번갈아 보더니 이내 웃었다.
“하, 네놈의 여자인가? 팔자도 좋군.”
그는 소죽을 내버려두고 장연비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점점 재미있어지는데? 네 앞에서 저 여자를 범하고 갈기갈기 찢어주면 어떨까? 생각만해도 통쾌하군!”
“그만둬!”
소죽은 어디서 힘이 났는지 몸을 벌떡 일으켜 남궁군명에게 달려들었다.
“어디 찌그러져서 구경이나 하시지!”
남궁군명은 가소롭다는 듯이 손바닥을 내뻗었다. 소죽은 멀쩡한 한 손으로 장력을 내뿜어 남궁군명의 공격에 맞섰다.
퍼엉!
“크악!”
소죽은 피를 토하며 튕겨져 나갔다. 남궁군명은 혀를 찼다.
“멍청한 놈! 장력끼리의 대결은 내공의 차이로 승패가 갈리는 것인데 자기 주제도 모르고 그대로 부딪혀 오다니! 정말 기가 막히는 군! 내가 이런 놈한테……!”
남궁군명은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피를 토했다.
“……어?”
그는 상황파악이 안된 듯, 멍한 표정을 지으며 소매로 입가를 닦았다. 그러자 시커멓게 죽은 검은 피가 묻어 나왔다. 남궁군명의 눈이 천천히 내려가 자신의 가슴팍을 보았다. 그의 가슴에는 작은 바늘이 박혀있었다.
“으…… 으……”
남궁군명의 눈, 코, 귀에서도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는 충혈된 눈을 크게 부릅뜨며 소죽을 바라보았다.
“이, 이 비겁한 자식…… 아, 암기를……!”
그것이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는 휘청거리더니 나무토막처럼 뻣뻣하게 쓰러져버렸다.
“헉! 헉!”
남궁군명이 쓰러지는 것을 본 소죽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는 마음 속 깊이 유소림에게 감사했다. 그가 빌려준 철비갑이 아니었으면 그는 물론이요, 장연비까지 죽었을 것이다.
“아, 아아!”
장연비는 오줌까지 지리며 주저앉아있었다. 소죽은 전신을 달리는 격통에도 불구하고 비척비척 걸어서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그때, 누군가가 장연비를 향해 달려들었다.
“하하하하! 거기 멈추시지!”
마단역이었다. 그는 장연비의 목에 검을 들이대고선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소죽은 하나밖에 남지 않은 눈을 무시무시하게 빛내며 말했다.
“그 손 놔라.”
“싫은데? 미쳤나? 겨우 잡은 기회를 놓치게?”
“내가 이 몸이라도 너 하나쯤은 잡아 죽일 수 있다.”
“마음대로 해! 별로 살고 싶은 생각도 없으니까! 곧 죽을 놈이 뭘 못하겠어?”
“……”
마단역은 히죽히죽 웃으면서 말했다.
“난 어차피 죽은 거나 마찬가지야. 네게서 도망칠 자신도 없고, 살아서 도망친다고 해도 흑사방은 이미 망했어. 난 끝난 거라고!”
“……그래서 뭘 원하나?”
“내가 원하는 거? 그거야 간단하지!”
마단역은 장연비에 목에 대어져 있던 검을 그대로 그어버렸다. 장연비의 목이 쩌억 갈라지며 피분수가 터져 나왔다.
“바로 네가 고통스러워하는 얼굴을 보는 거야! 크하하하하!”
“이 노옴!”
소죽은 노성을 지르며 마단역에게 달려들어 그의 머리통을 내리쳤다. 마단역은 피할 생각도 하지 않고 웃었다.
뻐억!
마단역은 단박에 머리통이 깨져서 바닥을 뒹굴었다. 소죽은 마단역은 신경도 쓰지 않고 장연비를 안아 들었다.
“누님!”
촤아악!
대답대신 피가 그의 얼굴에 쏟아졌다. 마단역이 그녀의 목에 남긴 검상은 그녀의 목을 끊어버리지는 않았지만 엄청나게 깊은 상처를 남겨놓았다. 소죽은 이성을 잃고 소리를 질렀다.
“으아아악! 누님! 누님!”
그는 미친 듯이 손을 놀려서 장연비의 혈도를 짚었다. 출혈량이 많이 줄었지만 그래도 상처부분에서는 피가 꾸역꾸역 흘러나왔다. 소죽은 피에 젖은 손을 덜덜 떨며 품으로 손을 가져갔다. 약! 약이 필요했다.
그의 품에서 유소림이 주었던 약 꾸러미가 나왔다. 그는 금창약을 찾아내 그것을 장연비의 목에 발랐다. 하지만 피가 너무 많이 흘러나와서 약이 다 씻겨 나가버렸다. 약으로 해결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의원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런 첩첩 산중에서 어떻게 의원을 구하겠는가. 소죽은 눈이 캄캄해지며 주저앉았다. 그러던 그는 문득 한가지 생각을 떠올리고 약 꾸러미를 뒤졌다. 기름종이로 둘둘 말아놓은 단약 하나가 그의 손에 잡혔다. 유소림이 준 시환단(尸換丹)이었다. 그는 유소림의 설명을 떠올렸다.
‘거의 모든 신체활동을 정지시키니까 죽은 척을 할 때 쓰거나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은 사람한테 먹여서 치료할 때까지 시간을 벌거나 할 수가 있을 거야.’
그는 단약을 장연비의 입에 넣어주고 그 입에 자신의 입을 맞춰서 약을 삼키도록 했다. 약효는 금방 나타났다. 장연비의 몸이 차가워지더니 곧 죽은 시체처럼 시퍼렇게 변해버렸다. 목에서 흘러내리던 피는 멎은 상태였다.
소죽은 다시 한번 유소림에게 감사했다. 그리고 그는 장연비를 업은 채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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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럭!”
소죽은 피를 왈칵 토했다. 내상을 입은 채로 무리하게 경공을 운용한 탓에 전신의 기혈이 뒤틀리고 있었다. 눈의 상처도 제대로 치료를 하지 않아 엄청나게 아팠다. 손목도 마찬가지였다. 급하게 움직이느라 부목도 대지 못해서 부러진 부분이 보기 흉하게 덜렁거렸다. 물론 그에 따라오는 고통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달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으윽!”
무작정 달리던 그는 결국 돌부리에 걸려서 넘어지고 말았다. 제대로 경공이 발휘되지 않은 탓에 일어난 일이었다.
소죽은 몸을 일으키기 위해서 기를 썼다. 하지만 몸은 그의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의 몸이 자신의 것이 아닌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몸이, 팔이, 다리가 그저 머리 밑에 달려있는 고깃덩어리처럼 느껴졌다.
아무리 애를 써도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우욱, 우우우……”
그는 울었다. 충분히 강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아직도 그는 약했다. 그리고 그 나약함의 대가로 장연비는 죽을 것이다. 아니, 이미 죽었을지도 모른다. 전과는 달리 장연비가 업혀있는 등에서는 단 한 점의 온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약효가 발휘되어 몸이 식은 것이 아니라 죽어서 그런 것일 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가 모르는 약의 부작용이 발생해 죽었을 수도 있다.
장연비가 죽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그는 머리가 텅 비어버리는 것 같았다.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눈앞에 있는 것은 오직 어둠뿐. 그는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며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아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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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아아아악!”
소죽은 소리를 지르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헉! 헉!”
그는 거칠게 숨을 몰아 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방에 쌓여있는 약재들, 그리고 거기서 풍기는 고약한 냄새.
그는 자신이 유소림의 집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리자 무지막지한 고통이 그를 덮쳤다.
“윽, 으으윽……”
한참을 그렇게 끙끙거리는 데 어디선가 유소림이 나타났다.
“정신이 좀 들었냐?”
소죽은 아파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소죽이 말했다.
“누님은…… 누님은……”
“멀쩡해. 내가 다 고쳐놨지.”
소죽은 아픔도 잊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누님이 멀쩡하다고요?”
유소림은 인상을 찡그렸다.
“이놈아. 날 뭐로 알고 그런 소리를 하는 거냐? 내 의술은 거의 완벽하고 내 약은 완벽해!시환단 덕분에 상처가 악화되지 않아서 어렵지 않게 치료할 수 있었지.”
“그, 그런…… 전 분명히 오는 도중에 정신을 잃고 쓰러졌었는데……”
“남궁화련이 너랑 네 누나를 이곳으로 데려왔다.”
“남궁화련이……!”
유소림은 품속에서 서신 한 통을 꺼내 소죽에게 주었다.
“남궁화련이 너에게 주라고 한 거야. 한번 읽어봐.”
소죽은 서신을 펼쳐보았다.

‘당신은 오빠를 죽였어요. 그렇게 마음에 드는 오빠는 아니었지만 오빠는 오빠에요. 그런데 그 오빠를 죽인 당신을 살려주다니…… 나도 참 미친년이죠. 하지만 나는 이 미친 짓을 조금 더 해보려고 해요. 아무리 내버린 자식이라고 해도 오빠를 죽였으니 우리 가문에서는 당신을 잡아 죽이려 할거에요. 그걸 막아줄 게요. 하지만 당신에게 베푸는 호의는 여기까지 에요. 당신 같은 남자를 좋아한 내 업보라고 생각해두죠.
경고하는데, 다시는 무림으로 나오지 말아요. 어디 산골에나 틀어박혀서 당신이 그렇게 좋아하는 그 누님인지 뭔지랑 입 닥치고 조용히 사는 게 좋을 거에요. 만약 당신이 정신 못 차리고 또 다시 무림에 나오는 일이 생긴다면…… 내가 직접 당신을 죽여버리겠어요.’

“하하하……”
소죽은 헛웃음을 흘리며 서신을 접었다. 유소림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거기 뭐라고 써있길래 그러냐?
소죽에게 서신을 받아서 읽은 유소림은 피식 웃었다.
“무서운 여자군.”
소죽은 털썩 주저앉았다.
“후우……”
그는 한숨을 쉬며 손목에 장착되어 있는 철비갑을 끌러서 유소림에게 건네었다.
“잘 썼습니다. 이게 없었으면 죽었을 거에요. 그리고 그 시환단도…… 정말 감사합니다.”
유소림은 철비갑을 받아서 손목에 차며 궁시렁거렸다.
“자식아, 맨날 말로만 감사한다고 하지 말고 행동으로 뭘 좀 보여봐.”
“뭘 해드릴까요?”
“……됐다. 그나저나 이제 어떻게 할거냐? 남궁화련이 말한 대로 그냥 산골에 틀어박힐 거냐?”
소죽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무래도 다시 강호로 나가야겠습니다.”
“왜? 강호에 나오면 직접 죽여주겠다는데 왜 나가냐?”
“아시잖아요? 제 성격.”
“……빚지고는 못살겠다 이거군.”
“일단은 좀더 강해져야겠습니다. 충분히 강해졌다고 생각했었지만…… 멍청한 생각이었죠. 지금 제 능력으로는 누님 한 분 모시기도 벅찬데다가...... 그녀에게 받은 빚을 갚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니까요.”
유소림은 혀를 찼다.
“멍청한 녀석, 그렇게 받는 족족 모조리 갚으려 들다간 너만 힘들게 된다는 건 알고 있냐?”
“물론 알고 있죠. 하지만 타고난 천성이 그런걸 어쩌겠습니까? 그리고……”
소죽은 쓴 웃음을 지었다.
“빚은 갚으라고 있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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