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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 작은대나무

2010.08.22 20:4108.22

소년은 배가 고팠다.
어머니는 1년 전에 도망쳤고 아버지는 삼일 전에 노역 중에 사고로 죽었다. 처음에는 매우 슬펐지만 그것도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아버지가 죽은 지 고작 삼 일만에 소년의 머리 속에서 부모를 잃은 슬픔 따위는 눈 녹듯이 사라졌다. 그리고 남은 것은 지독한 공복감뿐이었다. 소년은 아버지가 죽은 뒤로 물 이외에는 아무 것도 먹지 못했다. 집은 강도나 다름없는 거지들에게 빼앗겼다. 항상 부모님이 가져다 주는 음식만을 먹던 그는 스스로 먹을 것을 구할 능력도 없었다. 때문에 밤이 깊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주린 배를 감싸 쥔 채 어두운 뒷골목을 떠돌 수밖에 없었다.
소년이 커다란 기루의 뒤를 지나칠 때였다. 기루의 뒤에 조그맣게 만들어져 있는 문이 벌컥 열리더니 누군가가 문밖으로 뜨거운 김이 새는 무언가를 쏟아버렸다. 소년은 그 문으로 천천히 다가가 보았다. 문으로 가까이 다가갈수록 향긋한 냄새가 풍겼다. 그 냄새로 미루어보아 문의 안쪽은 기루의 주방인듯 싶었다. 소년은 고개를 내려 바닥에 버려져 있는 음식찌꺼기를 보았다. 그는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결국에는 먹을 것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그것을 주워먹기 시작했다.
음식찌꺼기를 다 먹어 치웠지만 소년은 아직도 배가 고팠다. 그래서 그는 근처 으슥한 곳에 쪼그려 앉아 누군가가 또 문을 열고 음식찌꺼기를 버리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늦은 밤이라 그런지 또 누군가가 문을 열고 나오는 일은 없었다.
가을이 가고 겨울이 오기 시작하는 때라 바깥은 상당히 추웠다. 이곳을 떠나 더 따뜻한 곳을 찾아가고 싶었지만, 그는 여전히 배가 고팠다. 그리고 주방에서 풍겨져 나오는 향기는 끊임없이 그의 코를 괴롭혔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밖을 향해 음식물을 버리는 사람은 없었다. 소년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직접 주방의 쪽문을 향해 다가갔다. 문 앞에 서서 잠시 망설이던 그는 슬그머니 문을 열고 고개를 들이밀었다. 들이민 고개의 왼쪽에서 뜨거운 기운이 느껴졌다. 눈동자를 돌려 살펴보니 탐스럽게 부풀어오른 하얀 만두들이 쌓여있는 것이 보였다. 소년은 눈을 번뜩이며 주위를 살펴보았다. 주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하얀 김이 모락모락 솟아나는 만두를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주방의 문에 등을 기대고 쭈그려 앉아서 만두를 입 속에 꾸역꾸역 밀어 넣고 있었다. 그는 그제서야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고 손을 멈췄지만 이미 만두는 반쪽밖에 남지 않은 상태였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겁에 질려서는 몸을 떨었다. 생전 처음 해보는 도둑질이었다. 당장이라도 주방에서 사람이 뛰쳐나와 ‘이 도둑놈!’하고 자신을 욕할 것만 같았다.
“얘, 뭐하니?”
소년은 깜짝 놀라 손에 들고 있던 만두를 떨어트렸다. 다시 한번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뭘 그렇게 놀라?”
목소리는 소년의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소년은 고개를 들어올려 위를 바라보았다. 건물 창 밖으로 누군가가 머리를 내밀고 소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소년은 안절부절못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이곳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지만 그런 행동을 하기에 소년은 너무나 정직한 사람이었다. 결국 그는 도망치지도 못한 채 우두커니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소년은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는 무슨 말을 할지 한참을 고민한 다음에 입을 열었다.
“……누나는 누구에요?”
소년의 질문에 그를 내려다보던 여자는 깔깔깔 웃었다.
“나? 나는 여기서 일하는 기녀야. 그러는 너야말로 누구니? 밤이 이렇게 깊었는데 집에 가야지. 부모님이 걱정하시겠다.”
그 말을 들은 소년의 얼굴이 침울해졌다.
“……부모님은 돌아가셨어요.”
“저런……”
여자는 혀를 쯧쯧 차더니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던 그녀는 다시 물음을 던졌다.
“누구 친척이라든지 너를 돌봐줄 사람도 없는 거야?”
소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는 연신 혀를 찰 뿐이었다. 소년의 처지가 딱하기는 하나 어느 날 갑자기 양 부모를 잃고 거리로 나앉게 되는 것 정도는 그리 드문 일도 아니었다. 혀를 차던 여자는 의기소침해있는 소년을 안쓰럽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래서 만두를 훔쳤구나?”
그녀의 말에 소년의 몸이 흠칫하고 떨렸다.
“아, 알고 계셨어요?”
“나는 뭐 눈이 없는 줄 아니?”
소년의 얼빵한 모습에 여자는 또 다시 까르륵 웃음을 터트렸다. 소년은 자신의 잘못을 잘 알고 있었으나 여자가 계속 생각 없이 웃어대자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기분이 상해 자리를 뜨려고 했다. 그러자 여자가 웃음을 멈추고 말했다.
“어디 가니? 딱히 갈 곳도 없어 보이는데.”
그녀의 말은 옳았다. 하지만 때때로는 옳은 소리만큼 사람의 기분을 나쁘게 만드는 것이 없다. 소년은 슬슬 화가 나기 시작하는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게 누나랑 무슨 상관이에요?”
그 말에 여자는 씨익 웃어 보였다.
“그래,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지. 그럼 잘 가렴.”
그녀는 가볍게 손을 흔들어 보이더니 창문 안으로 쏙 들어가버렸다. 곧이어 하얀 손이 나오더니 창문을 탁하고 닫아버렸다. 예상치 못한 그녀의 행동에 소년은 잠시 얼이 빠진 듯이 멍하니 서있었다. 왠지 모르게 목이 메이고 눈이 시려왔다. 결국 소년은 눈물을 터트리고야 말았다.
“흐윽…… 으허엉!”
소년은 엉엉 울면서 걷기 시작했다. 그가 막 골목을 빠져나가려 할 때였다. 그의 등뒤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일 생각 있으면 이 시간에 이 곳으로 와!”
“어엉, 으아아앙!”
소년은 대꾸는커녕 뒤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소년은 소란스러운 울음소리와 함께 골목을 돌아 사라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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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 소년은 매일같이 해가 질 시간만 되면 기루 뒤의 음습한 골목을 들락거렸다. 소년과 이야기를 나누었던 그 기녀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그가 올 때마다 먹을 것들을 창 밖으로 던져주었다. 그것이 하루, 이틀 늘어나면서 소년과 기녀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리고 보름이라는 시간이 지났을 때, 소년은 그 기녀에 대해서 꽤 많은 부분을 알게 되었다. 그녀의 이름이 장연비(張燕飛)라는 것, 나이는 열일곱이고 이년 전에 집안사정이 어려워져서 이곳으로 팔려왔다는 것, 그리고 이곳으로 오기 전에 남동생이 오랫동안 제대로 된 음식을 먹지 못해서 굶어 죽었다는 것까지.
물론 장연비, 그녀 역시 소년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오늘은 뭐 소득이 있니?”
“아뇨.”
“도대체 뭘 어떻게 하길래 며칠 동안 아무것도 받은 게 없어?”
소년은 볼을 긁적이며 낮의 일을 떠올렸다.
“음…… 일단은 저잣거리에서 서 있다가 괜찮아 보이는 사람이 보이면 그 사람을 붙잡고 부탁해요.”
“어떻게?”
“그냥 ‘제가 며칠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는데 자비를 조금 베풀어주시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하는 거죠.”
“그게 끝?”
“......”
말이 없는 소년을 창 밖으로 내려다보며 장연비는 쯧쯧하고 혀를 찼다.
“소죽(小竹), 몇 번이나 말했지만 그렇게 뻣뻣하게 굴어가지고는 먹고 살기 힘들어. 구걸의 기본은 동정심을 불러일으키거나 당당하게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귀찮게 구는 게 요령이라고. 상대방이 ‘이거나 먹고 떨어져라!’라고 생각하게 만들어야 된다니까. 거머리처럼 끈질기게 달라붙어야 한 푼이라도 뜯어낼 수가 있는 거야.”
“음……”
장연비의 말에 소죽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의 집안은 이미 몰락한지 오래되었지만 한때는 제법 이름이 있는 문가(文家)였었다. 때문에 그는 어려운 집안사정에도 불구하고 어렸을 때부터 긍지 높은 선비의 후손답게 정직하고 당당한 삶을 살도록 교육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고개를 숙이는 일에는 익숙하지도 않았고 밖으로 쏘다니는 것보다 집에 틀어박혀서 글공부만 했던 탓에 그다지 붙임성이 좋지도 않았다. 그런 그에게 장연비가 말하는 구걸의 요령은 그리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별 수 없구나. 어렸을 적부터 몸에 밴 걸 하루아침에 뜯어고칠 수도 없고……”
“……”
그녀는 볼 옆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꼬며 허공을 바라보았다. 소죽 역시 꼬릿꼬릿한 냄새가 나는 뒷골목의 벽에 몸을 기대고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문득, 장연비가 입을 열었다.
“이 곳에서 일을 해보지 않을래?”
“네? 무슨 일요?”
“무슨 일은. 기루에서 너 같은 조그만 애가 할게 뭐가 있겠니? 고작해야 점소이나 누군가의 하인이 되겠지.”
“물론 일을 할 수만 있다면야 좋지만……”
소죽은 고개를 들어올려 장연비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장연비는 소죽의 눈을 슬쩍 외면하며 손을 내저었다.
“뭐, 걱정하지는 마! 내가 잘 말해둘 테니까. 너는 그냥 내일 아침 일찍 와서 네가 내 사촌동생이라고 말만 하면 되. 나머지는 내가 다 알아서 할게.”
그 말을 끝으로 장연비는 창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하지만 소죽은 한참 동안이나 그녀가 사라진 창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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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연비의 소개로 소죽은 그녀가 일하는 기루, 청화루(淸華樓)의 점소이가 되었다.
그는 그리 영민하지도, 민첩하지도 않았지만 성실하고 예의가 발랐다. 덕분에 기루의 주인을 비롯한 모두는 그를 좋게 보아주었고 소죽은 쉽게 점소이의 생활에 적응할 수가 있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장연비는 날이 갈수록 성숙한 여인으로써 무르익어갔고 소죽은 날이 갈수록 번듯한 청년이 되어갔다. 그 둘은 사이가 정말 좋았다. 장난기가 많고 약간 덤벙대는, 말괄량이 같은 장연비와 말은 별로 없지만 언제나 침착하고 부드러운 성격의 소죽은 서로 죽이 잘 맞는 한 쌍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어이쿠!”
소죽은 비명을 지르며 넘어졌다. 그러자 그의 손위에 올려져 있던 쟁반이 뒤집어지며 음식물이 옆에서 술잔을 들이키고 있던 한 남자에게로 쏟아졌다. 언제나 침착한 소죽답지 않은 보기 드문 실수였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소죽은 제법 경력이 있는 점소이답게 실수를 하자마자 바로 납죽 엎드리며 절을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상대가 별로 좋지 않았다. 남자는 얼굴이 붉어져서는 바닥에 엎드려있는 소죽의 멱살을 단숨에 잡아서 끌어올렸다.
“이 자식! 미안하다면 다 인줄 아나?”
소죽과 얼굴을 맞댄 남자의 입에서는 지독한 술 냄새가 났다. 그의 얼굴이 붉어진 것도 그저 화가 나서 그런 것만은 아닌 듯싶었다. 이런 사람에게는 말이 필요가 없다. 그저 무작정 비는 것이 최선일 뿐. 소죽은 열심히 빌었다.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한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이렇게 비굴한 소죽의 모습을 보면, 그 누구도 그가 아는척하기 좋아하고 콧대가 높은 선비집안의 후손이라는 것을 알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몇 년 동안 점소이의 일을 해오면서 터득한 이 비굴함도 한번 열이 오른 주정뱅이에게는 통하지가 않았다.
“이 놈!”
남자는 호통을 치며 냅다 소죽의 뺨을 후려쳤다. 소죽은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고 남자는 그를 향해 마구 발길질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 놈! 이 놈!”
한치의 용서도 없는 무자비한 구타였지만 아무도 남자를 말리려는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몇몇 사람들은 소죽이 두들겨 맞는 것을 보면서도 킬킬 웃으며 술을 마셨다. 그때, 어디선가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만 그 아이를 용서해주시지요.”
기녀들 특유의 애교 넘치는 목소리에 남자는 발길질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얼굴에 하얗게 분칠을 하고 화려한 색의 옷을 차려 입은 장연비가 서있었다. 그녀는 남자를 향해 살짝 눈웃음을 치며 말을 이었다.
“그 정도면 이 아이도 충분히 반성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만 그를 용서해주시지요.”
남자는 눈을 치켜 떴다.
“네 년이 뭔데 참견이냐? 이 놈이 네 기둥서방쯤이라도 되냐?”
남자의 말에 장연비의 고운 아미가 살짝 찌푸려졌다. 하지만 그녀는 인내심을 가지고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그 아이는 제 동생입니다. 그러니 그만……”
짜악!
말을 하던 장연비의 뺨이 홱 돌아갔다. 남자는 입에서 침을 튀겨가며 소리를 질렀다.
“꺼져!”
장연비는 꺼지지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도전적인 눈초리로 남자를 노려보았다. 그것을 본 남자는 광분하며 손을 휘둘러댔다.
짝! 짝!
“싸구려 창녀주제에 누굴 노려봐! 엉?”
기루의 상품인 기녀에게도 손찌검이 가해지자 소죽이 맞는 동안에는 가만히 있던 흑도방파의 무리들이 움직였다. 덩치가 커다란 장한들로 이루어져있고 매달 돈을 받으며 기루를 지켜주는 일을 하는 그들은 재빠른 동작으로 달려들어 남자를 끌어냈다.
“이 자식들! 이거 놓지 못해!”
남자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발악을 했지만 장한들의 힘을 이길 수는 없었다. 남자는 결국 그들의 손에 이끌려 기루 밖으로 쫓겨났다.
남자가 그렇게 쫓겨나가고 난 뒤에야 소죽은 비척거리며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뺨에는 불이 난 것만 같았고 전신이 욱신거렸다. 하지만 소죽은 장연비의 안부를 먼저 물었다.
“누님…… 괜……”
“괜찮니?”
그의 말을 자르며 장연비가 물어왔다. 그녀는 손을 뻗어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아프지 않아? 응?”
“……”
그녀의 말과 손길은 부드럽고 따뜻했다. 하지만 그녀의 그런 친절함도 이제 다 큰 청년인 소죽에게는 너무나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쯧쯧, 사내놈이 여자치마폭에 쌓여서는……’
한심하다는 듯이 자신을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그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그는 속에서 무언가가 욱하고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끼곤 저도 모르게 장연비의 손을 쳐냈다. 장연비는 어리둥절해 하며 소죽을 바라보았다.
“소죽?”
소죽은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혼란스러워 하는 것 같기도 한 복잡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던 그는 입술을 깨물더니 갑자기 기루 밖으로 뛰쳐나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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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長沙)는 호남성(湖南省)의 중심도시 중 하나로 드넓은 곡창지대가 있는 덕에 예로부터 풍요로운 땅으로 유명했다. 게다가 진(秦)나라 때 시황제가 장사군을 설치한 것으로 시작해 호남성이 정식으로 설치된 이후로는 경제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눈부신 성장을 이루어 지금에 와서는 성도라고 불리기에 모자람이 없는 큰 도시가 되었다. 큰 도시인 만큼, 해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장사의 저잣거리는 대낮처럼 밝고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그 수많은 사람 사이에 소죽이 있었다. 그는 멍하니 걷고 있었다. 그러던 그는 뭔가를 보고선 걸음을 멈췄다. 그의 눈에 띈 것은 깃발을 꽂고 거적때기를 깔아놓은 채 의연히 앉아있는 한 누추한 노인이었다. 노인의 깃발에는 이렇게 써있었다.
‘제자 구함.’
다짜고짜 제자를 구한다니, 조금 이상하긴 했지만 노인이 이렇게 깃발을 걸고 거리에 앉아있기 시작한 것은 벌써 몇 달이나 지난 일이었다. 때문에 소죽은 그가 무슨 제자를 구하는 지를 알고 있었다. 마침 거하게 술에 취한듯한 한 젊은이가 노인에게 말을 걸었다.
“이보슈 노인장. 무슨 제자를 구하는 거요?”
“무공을 배울 제자를 구한다네.”
젊은이는 비쩍마른 노인의 몸을 보고선 말했다.
“무공을 가르친다구? 별로 그럴 것 같지는 않은데. 당신 고수요?”
“글쎄, 자신있게 자신이 고수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고수가 아니네. 단지 몇 가지 쓸만한 재주가 있을 뿐이지.”
“그럼 그 쓸만한 재주 몇 가지라도 좀 보여주쇼.”
노인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 재주들은 한 번 보여주면 쓸모가 없어져버리는 것들뿐이라…… 미안하지만 안되겠네.”
“퉤! 그게 뭐요? 제자를 구한다면서 뭐 보여줄 것도 없어? 제기, 그럼 뭐 검강이나 검기 같은 건 좀 쓸 줄 아쇼? 그런 거라도 좀 보여주지 그래.”
“나는 내공이 적어서 그런 것들은 잘 쓰지 못한다네.”
젊은이는 기어이 성을 냈다.
“정말 웃기는 노인네로군! 내보일 만한 게 아무것도 없으면서 무슨 제자를 구한다고 하는 거요? 체! 허풍쟁이에게 시간만 낭비했군.”
“……”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노인에게 흥미를 가지고 접근했지만 노인의 제자가 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왠 거지꼴의 노인네가 별다른 무공을 가진 것도 아니면서 제자를 구한다는데 누가 그의 제자가 되고 싶다고 하겠는가?
노인을 뒤로하고 소죽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멍하니 걷던 소죽은 그만 한 남자와 어깨를 부딪히고 말았다. 덩치가 커다란 사내의 부리부리한 눈이 그를 노려보았다.
“미안하오.”
소죽은 몸에 밴 대로 꾸벅 인사를 하고선 다시 걸었다. 그런데 누군가의 억센 손이 그의 뒷덜미를 끌어당겼다. 고개를 돌려보니 방금 어깨를 부딪힌 그 사내였다. 사내는 음침하게 웃으며 소죽을 노려보았다.
“흐흐흐…… 이 자식, 감히 패력호(敗力虎)라고 불리는 이 몸의 어깨를 쳐 놓고 그냥 지나가?”
소죽은 무표정한 얼굴로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사과 했잖소.”
“풋! 겨우 사과하는 것 정도로 나를 건드린 죄가 용서될 줄 아느냐? 네 놈, 아무래도 좀 맞아야 정신을 차리겠구나!”
“……”
소죽은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는 말을 하는 대신에 주먹을 말아 쥐었다.
퍼억!
남자의 얼굴이 소죽의 주먹에 맞아 홱하고 돌아갔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돌아갔던 속도 그대로 되돌아왔다. 남자는 분노에 가득 찬 눈으로 소죽을 노려보았다.
“이 놈이 미쳤나!”
남자의 솥뚜껑만한 손바닥이 소죽의 뺨을 갈겼다. 그것 한 방에 소죽의 입안에서는 피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 둘 사이에 주먹과 욕설이 오가기 시작했다.
소죽은 나름대로 주먹질 발길질을 하며 저항했지만 그는 사내처럼 덩치가 크지도, 힘이 세지도 않았다. 그는 결국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는 신세가 되었다. 그는 사내의 주먹다짐을 오래 버티지 못하고 금세 쓰러져서 바닥을 뒹굴었다.
“에잇 퉤! 이런 미친 놈 같으니.”
소죽을 때려눕힌 사내는 옷을 털고선 침을 탁 뱉었다. 쓰러진 소죽을 내려보며 욕지거리를하던 그는 뭔가를 발견하고선 입 맛을 다시더니 곧 걸음을 옮겨 사라져버렸다.
소죽은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심하게 맞은 터라 몸을 제대로 가눌 수가 없었다. 그는 사람들이 다니는 거리 한복판에 쓰러져 힘겹게 팔다리를 바둥거렸다. 그 때였다. 누군가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괜찮아요?”
수수한 차림의 여자였다. 여자는 그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소죽은 그녀의 동정어린 눈을 보자 괜히 오기가 치밀어 올랐다. 그는 이를 악물고 용을 썼다. 그리고 기어이 혼자서 몸을 일으켰다. 소죽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여자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감사를 표하고선 다시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못했다. 그는 신음을 흘리며 걸음을 멈췄다. 몸이 너무 아팠다. 그는 비틀거리며 건물 사이의 골목으로 들어갔다. 빛이 없어 앞뒤분간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깊숙한 곳까지 들어온 그는 건물의 벽에 등을 기대고 천천히 주저앉았다. 그는 무릎을 가슴 앞으로 모으고 쪼그려 앉았다. 몸 전체가 욱신욱신 아파왔지만 왠지 모르게 기분은 나른했다. 그는 천천히 얼굴을 무릎 사이에 파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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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악…… 흐읍!”
“조용히 해!”
어디선가 들려온 비명에 소죽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무래도 잠깐 잠이 들었었던 것 같았다.
“입 닥치고 있어! 안 그러면 이걸로 멱을 따버릴 거야! 알겠어?”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어떤 남자의 목소리가 누군가를 윽박지르는 것이 들려왔다. 그리고 뒤따라서 옷을 찢는 소리와 여자의 흐느끼는 소리가 조그맣게 들려왔다.
찌익! 찍!
“흐흐흑…… 안돼요…… 안돼……”
거기까지만 들어도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쉽게 알 수 있었다. 소죽은 몸을 벌떡 일으키고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의 눈은 이미 어둠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그는 쉽게한 남자가 여자를 깔아뭉개고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뭐냐? 네 놈은?”
갑작스런 인기척에 놀란 남자가 소죽을 쳐다보며 경호성을 터트렸다. 놀랍게도 짙은 어둠 속에서 드러난 그의 얼굴은 아까 소죽과 어깨를 부딪혔던 패력호라는 사내였다. 패력호는 소죽의 얼굴을 알아채곤 놀란 표정을 지우고 득의 양양하게 웃었다.
“뭐야? 아까 그 미친 놈 아니야? 지금 이 몸은 일이 바쁘니 그냥 봐주마. 꺼져라!”
“……”
잠시 갈등하던 소죽은 걸음을 땠다. 어차피 그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가 막 그 두 명을 지나쳐 골목을 벗어나려고 할 때,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와주세요…… 제발……”
“닥쳐!”
짝!
“아악!”
패력호가 곧바로 호통을 치며 그녀의 따귀를 후려쳤다. 하지만 언뜻 들은 그 목소리는 어디선가 들어본 목소리였다. 소죽은 걸음을 멈추고 여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여자의 얼굴을 확인한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어찌된 일인지 패력호의 밑에 깔려있는 사람은 아까 그가 쓰러져있을 때 그에게 손을 내밀어주었던 여자였다.
“뭐해! 저리 꺼지지 않고!”
패력호는 손에 들고 있던 짧은 칼을 휘둘러 보였다. 날카로운 칼날이 달빛을 받아 번뜩이며 소죽을 위협했다. 소죽은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평생 싸움 한번 제대로 해본 적이 없는 그에게 패력호의 손에 들려져 있는 칼은 너무나 위협적인 물건이었다.
소죽은 눈을 꾹 감고 골목을 빠져 나왔다. 강간이 벌어지고 있는 음침한 뒷골목과는 달리 거리는 활기찬 빛으로 충만해 있었다. 그는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억지로 옮겨 사람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그는 무표정하게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머리 속은 복잡했다. 계속 해서 그에게 손을 내밀어 주었던 여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쓰러져있는 그를 향해 손을 내밀며 했던 그녀의 말이 귓속을 울렸다.
‘괜찮아요?’
그는 고개를 휘저어 그 목소리를 떨쳐내고 걸음을 더욱 빨리 했다. 하지만 아무리 걸음을 빨리 해도 목소리는 끝이 없었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괜찮아요?’
마치 고약한 저주에라도 걸린 기분이었다. 그는 인상을 쓰며 귀를 틀어막았다. 그때, 갑자기 장연비의 얼굴이 떠올랐다.
‘괜찮니?’
순간, 소죽은 번개라도 맞은 것처럼 몸을 떨었다. 그는 눈을 크게 뜨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달리기 시작했다.
그는 날래게 움직여 좀 전에 빠져 나왔던 뒷골목으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그 곳에는 이미 한 사람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어느새 빠져나갔는지 패력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단지 강간을 당한 여자만이 걸레나 다름 없는 옷가지를 끌어안고 흐느끼고 있었을 뿐이었다. 소죽의 표정이 돌처럼 굳어졌다.
잠시 그녀를 지켜보던 그는 천천히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자신의 옷을 벗어서 그녀에게 덮어주었다. 그녀는 비에 젖은 병아리처럼 몸을 떨면서도 소죽이 자신의 몸을 덮어주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그러던 그녀가 살짝 고개를 돌려 소죽을 바라보았다.
“당신……!”
소죽의 얼굴을 본 그녀는 그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그녀의 표독스러운 두 눈동자가 소죽을 노려보았다. 소죽은 그 원망 어린 눈빛을 마주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는 그녀를 외면한 채로 몸을 일으켰다. 멍하니 서서 한참 동안이나 망설이던 그는 힘겹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미안하오.”
소죽은 골목을 뛰쳐나왔다. 개미떼처럼 바글거리는 사람들 사이로 파고든 그는 마치 술에 잔뜩 취한사람처럼 휘청거리며 걸었다. 그는 한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제길, 제길.”
머리 속이 혼란스러웠다. 자신을 원망스럽다는 듯이 바라보던 그녀의 얼굴과 장연비의 얼굴이 계속 겹쳐 보였다. 그런 혼란스러운 와중에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만약, 만약에 누님이 그녀와 똑같은 일을 당하게 된다면?
그의 몸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는 이를 악물고 억눌린 신음소리를 흘렸다. 왜냐하면 너무나도 쉽게 그 뒷일을 상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윽……”
그는 울었다. 자기 자신이 너무나도 한심하게 느껴져서 울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그가 어려울 때 손을 내밀어 주었고, 그녀 자신의 몸보다 그의 몸을 먼저 생각해주는, 그가 사랑하는 여자에게도 그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으아아아아!”
그는 고함을 지르며 마구 달리기 시작했다. 미친 놈처럼 괴성을 지르며 달리는 그를 보며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해댔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달렸다. 미친 듯이 달렸다. 너무 힘들어서 생각이라는 것을 할 수 없을 때까지, 그는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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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거리는 조용했다. 가게들의 문은 모두 닫혀있었고 돌아다니는 사람은커녕 개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그런 쓸쓸한 거리를 한 사람이 걷고 있었다. 소죽이었다. 그는 마치 며칠 굶은 사람처럼 힘이 없어 보였다.
아무런 생각 없이 흐린 눈으로 걸음을 옮기던 소죽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그의 앞에는 깃발 하나가 떡 하니 서있었다.
‘제자 구함.’
늦가을의 새벽녘 거리는 쌀쌀맞기가 그지 없었다. 하지만 그런 추위 속에서도 노인은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앉아있었다. 그것을 본 소죽은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충동을 강하게 느꼈다. 그는 노인의 앞에 섰다.
노인은 소죽을 올려다 보았다.
“무슨 일인가, 젊은이?”
소죽은 무릎을 꿇으며 노인에게 절을 했다.
“무공을 가르쳐 주십시오.”
소죽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노인은 잠시 당황했다. 하지만 그는 금세 침착함을 되찾고 소죽에게 물었다.
“이보게, 그만 일어서게. 나는 자네에게 절을 받을만한 처지가 못 되네.”
노인의 말은 소용이 없었다. 노인이 뭐라하든, 소죽은 땅에 머리를 박고 꿈쩍도 하지 않았다. 노인은 한숨을 쉬었다.
“왜 그리 간절하게 무공을 배우려 하는가?”
소죽은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그것은 길지 않았다.
“전…… 제 자신에게 실망했습니다. 받은 은혜도 채 갚지 못하면서…… 누님을 사랑하는 제 자신이 싫고, 언제나 죄진 것 마냥 주정뱅이들에게 허리를 굽혀대는 것도 싫습니다. 그리고 부당한 일로 두들겨 맞아도 아무런 반항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한 제가 부끄럽습니다. 제게 무공을 가르쳐 주십시오. 저는 강해지고 싶습니다. ”
노인은 손을 내저었다.
“내가 가리킬 것은 그리 대단한 것이 되지 못한다네.”
“매일매일 약한 사람이나 괴롭히면서 술을 퍼 마시고, 여자를 강간하는 잡배들도 때려눕힐 수 없는 형편없는 무공이란 말입니까?”
“아니…… 그 정도는 아니지만……”
“그럼 됐습니다. 그 정도로도 충분하니 가르쳐 주십시오.”
노인은 질린다는 표정으로 소죽을 바라보았다. 그는 잠시 생각했다.
‘잠시 당황해 거절을 하기는 했지만 어차피 제자를 구하러 나온 것인데 내가 왜 그것을 말리겠는가?’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자네에게 무공을 가르쳐 주겠네. 그러니 그만 일어서게.”
“그럼 제자의 절을 받으십시오.”
“아니……”
노인은 절을 하려는 소죽을 말리려다가 그만두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든 소죽이 그것을 듣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고집이 센 청년이로군.’
그는 절을 하고 있는 소죽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겉보기에는 그저 유약한 느낌의 청년이었다. 하지만 예법에 어긋나지 않는 바른 자세의 절은 이 청년이 제법 엄격한 교육을 받았다는 것을 알게 해주었고, 앞에서 보았던 그 고집스러운 행동과 굳게 다물어진 입술은 그가 성실하고, 자기 자신에게 엄격한 사람이라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노인은 소죽이 마음에 들었다. 비록 억지로 그를 제자로 삼게 되었지만, 그것을 후회하게 될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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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죽은 위를 올려다보았다. 버려진 음식물위로는 파리가 날아다니고,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 더러운 골목길에서 장연비의 창문을 바라보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는 잠시 눈을 감고 처음 이 골목길에서 장연비와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당장이라도 창문이 열리며 장연비가 얼굴을 내밀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녀에게 뭐라고 말을 해야 할 까.
그는 회상을 끝내고 눈을 떴다. 하지만 창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그는 내심 아쉬웠지만 한편으로는 안심했다. 그는 창문을 향해 절을 올렸다.
‘강한 남자가 되어 돌아오겠습니다.’
그는 굳게 다짐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등을 돌려 골목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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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시의 서쪽에는 악록산이 있다. 악록산은 남악 형산의 최북단에 위치해있고 남악 72봉의 꼬리에 해당하는데 그리 높은 산은 아니지만 가을철에 단풍이 매우 아름다운 것으로 유명한 산이다.
이 안록산에서 소죽은 노인에게 무공을 배우기 시작했다. 어려울 것은 없었다. 노인은 보기보다 재산이 있어서 소죽은 언제나 풍족하게 먹었고 잘 잤다. 그는 그저 청소와 요리 같은 잡일만 하면 되었다. 그리고 노인은 하루에 딱 한 시진씩만 무공을 가르쳤다. 그 외에 시간은 모두 자유시간이었다.
너무 편했다. 처음에는 느끼지 못했지만 소죽은 몇 달 지나지 않아 자신이 터무니 없을 정도로 게을러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루 종일 잠만 자는 것이 일쑤요, 그러다 보니 청소도 잘 하지 않게 되고 노인에게 밥상을 차려주는 것도 드물어졌다. 하루에 단 한 시진 뿐인 무공을 배우는 시간도 귀찮아서 대충대충 하는 수준이었다. 허나 노인은 다른 것은 아무런 말이 없어도 그 시간만은 엄격했기에 그것을 빼먹을 수는 없었다.
게으름 뒤에 찾아온 것은 권태였다. 별로 하는 것 없이, 하루 종일 자거나 하늘만 멍하니 바라보는 일상이 그를 미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는 노력했다. 늪처럼 진득하고 거미줄처럼 단단한 게으름이 그의 온몸을 옭아 메는 상황에서도 그는 발버둥쳤다. 조금이라도 일찍 일어나려고 노력했고 한끼라도 더 밥상을 차리기 위해 노력했으며 조금이라도 더 열심히 무공을 배우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매일매일 장연비를 생각하며 끊임 없이 자신을 채찍질 해나갔다.
노력한 성과는 있었다. 크지는 않았지만, 그는 조금씩, 조금씩 게으름의 늪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었다. 소죽은 아침 햇살을 받으며 침상에 누워서 뒹굴 거리고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일어나기 귀찮아 하면서도 일어나려고 기를 쓰고 있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었다. 그때 노인이 그의 방에 들어왔다.
“많이 좋아졌군.”
“……?”
그 말만을 남기곤 노인은 사라져 버렸다. 소죽은 어리둥절해졌다. 난데없이 자신의 방에 들어온 것도 이상하지만 이렇게 게을러 빠진 모습을 칭찬하다니? 그는 움직임을 멈추고 고민에 빠졌다. 노인은 말이 많지 않은 성격인 만큼 쉽게 허언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한 것은 분명 무언가가 나아졌으니 그러는 것이다.
소죽은 잠시 동안 고민을 하다가 뭔가 답이 나오지 않자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다. 일단 밥이나 먹고 생각하자.
순간 그는 깨달았다. 자신이 예전에 비해서 터무니 없을 정도로 여유로워진 것을. 그는 자신의 모습을 둘러보았다. 가느다란 팔은 굵어져있었고 갈비뼈가 드러나 보이던 배는 기름기가 자르르 흘렀다. 주먹을 꾸욱 쥐어보자 예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힘이 몸 안을 휘감는 것만 같았다. 그는 침상을 박차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리고 평소에 수련 할 때 쓰던 목도를 꼬나 잡고 마구 휘두르기 시작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웠다. 검도, 몸도, 마음도 깃털처럼 가벼워서 바람만 불어도 하늘꼭대기까지 솟아 오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날 처음으로 소죽은 자신이 강해졌다는 것을 실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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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의 일은 일사천리였다. 그는 조금씩 수련을 하는 시간을 늘려나가며 성장해가는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즐겼다. 한번 발동이 걸리자 그것은 멈출 줄을 몰라서, 그는 눈만 뜨면 무공수련에 매달렸고 귀찮아하던 노인의 수업시간을 초조해하며 기다리게 되는 수준에 이르렀다.
그렇게 3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다.
그 동안 노인의 몸 상태는 매우 나빠져서 그는 소죽의 시중을 받지 않으면 일상생활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날도 소죽은 아침 일찍 일어나 죽을 끓여서 노인에게 먹여주고 있었다.
묵묵히 소죽이 떠주는 죽을 받아먹던 노인이 말했다.
“네가 여기에 온지 얼마나 지났느냐?”
“3년이 지났습니다. 사부님.”
“3년이라…… 그리 오래 지난 것은 아니구나.”
“……”
소죽은 힘없이 뇌까리는 노인의 말에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사부님, 어디 편찮으십니까?”
“아니다, 그저 갈 때가 다 되었을 뿐이지.”
“무슨 그런 말씀을……!”
노인은 손을 들어 소죽의 말을 막았다. 그는 기침을 몇 번 하더니 힘겹게 말을 이었다.
“너는 지금까지 내가 예상한 것 이상으로 잘 해주었다. 지금 너의 성취라면 나를 뛰어넘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니 이제 결정할 때가 된 거지. 처음에 네가 원했던 것처럼 웬만한 잡배들은 이제 아무리 많아도 너에게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무림에 나간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내공이 거의 없는 너는 잘 봐줘야 이류다. 네가 배운 무공의 특성상 일 대일이라면 어떤 고수라도 상대할 수 있겠지만 암계가 판치는 무림에서 언제나 일 대일을 바라는 것은 무리지. 일 대 다의 싸움과 독 같은 여러 가지 상황에 대처하는데 내공만큼 좋은 것이 없다. 만약 네가 무림을 경험해보고 싶다면 내가 너에게 도움이 될만한 사람을 추천해주마. 그것이 아니라면 그냥 하산(下山)하거라.”
소죽은 노인의 말에 깜짝 놀라 소리쳤다.
“사부님!”
“시끄럽다. 귀아프니 입 다물고. 시간을 줄 테니 천천히 생각해보거라.”
“……”
소죽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그는 침상에 몸을 누이고선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한참이 지난 뒤에야 눈을 뜬 소죽은 머리맡에 놓여있는 목도를 쥐었다. 지난 3년 동안 소죽의 손에서 휘둘러진 덕에 목도의 표면은 거칠지 않고 부드럽게 길이 잘 들어있었다. 이제는 자신의 손발이나 다름없는 목도를 만지작거리던 소죽은 잠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림에 나가고 싶습니다.”
다시 노인의 앞에 선 소죽이 한 말이었다. 노인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너는 젊구나.“
그는 품속을 뒤지더니 가죽 주머니 하나를 꺼내어 소죽에게 주었다. 소죽은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군말 없이 주머니를 받았다. 주머니는 묵직했다. 노인이 말했다.
“돈이다. 얼마 안되긴 하지만.”
“사부님, 전 이런 게 필요가……”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필요할 거다. 돈이 없으면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 너무 많을 필요는 없지만 어느 정도는 가지고 있어야지.”
소죽은 입을 다물었다. 노인의 말은 옳았다. 그는 묵묵히 주머니를 자신의 품속으로 집어넣었다. 그가 할 수 있는 말은 단지 이것뿐 이었다.
“감사합니다.”
노인이 말을 이었다.
“내려가서…… 하오문을 찾아가라. 아무 건달이나 창녀를 잡아 족쳐 보면 찾는 게 그리 어렵지는 않을 거다. 그리고 놈들을 써서 유소림이라는 사람을 찾아라. 가서 귀갑봉침(龜甲蜂針)이 보냈다고 해. 그러면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다.”
노인은 말 몇 마디 하는 것도 힘에 부쳤는지 숨을 몰아 쉬며 늘어졌다. 그것을 바라보는 소죽은 마음이 편치가 않았다.
‘나는 언제나 받기만 하는 구나.’
그는 자신의 인생에서 두 번째로 만난 은인을 바라보며 착잡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잠시 침묵하던 그는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사부님…… 제가 뭔가 해드렸으면 하는 건 없으십니까?”
노인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그게 무슨 소리냐? 난 딱히 대가를 바라고 너를 제자로 삼은 것이 아니다. 그런 건 이미 오래 전에 다 잊어버렸어. 하산해서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행복하게 살거라. 그게 내가 원하는 거야.”
“……”
노인은 말을 끝내곤 소죽을 바라보았다. 처음 만났던 그때처럼 소죽은 고집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언뜻 봐도 쉽게 물러날 기색이 아니었다. 노인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별 수 없군. 그럼 한 가지만 부탁하마.”
그는 헛기침을 몇 번 하고서 말했다.
“내가 네 나이일 때는 승부욕이 강해서 지는 걸 싫어했다. 하지만 별다른 스승도, 무공도 없던 일개 칼잡이가 세봐야 얼마나 세겠느냐? 고작해야 산적이나 칼 잡은 지 얼마 되지도 않는 하수들을 베면서 으스대는 수준이었지. 하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않았다. 진짜 고수를 만나버렸거든.”
노인은 씁쓸하게 웃었다.
“녀석은 남궁세가의 도련님이었다. 별로 강해 보이지도 않았어. 한창 자신감이 넘치던 나는 말쑥하게 생긴 녀석이 마음에 안 들어서 곧바로 비무를 신청했다. 부잣집 도련님의 콧대를 눌러주고 싶었지. 하지만 나는 졌다. 내 실력은 녀석의 일초지적도 되지 못했지. 그 때부터였다. 무공수련에 열을 올리게 된 건. 별다른 연고도 없던 나는 수없이 강호를 떠돌아다니며 무공을 익히다가 결국에는 산골에 틀어박혀버렸다. 정신을 차려보니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이 되어있더군. 서론이 길었는데…… 어쨌든 내가 원하는 것은 하나다. 누구든 지 좋으니 남궁세가의 인물 하나를 꺾어다오.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나도 지금까지 헛고생만 한 것은 아니겠지.”
노인은 말을 끝내곤 소죽을 바라보았다.
“어떠냐? 할 수 있겠느냐?”
소죽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겠습니다. 반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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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악록산은 단풍잎의 천국이었다. 앙상하게 마른 나무들 사이로 빨강 노랑 형형색색의 단풍잎들이 물결치듯이 허공을 떠돌았고 땅에 떨어진 것들은 소죽의 발에 밟히며 바작바작 소리를 냈다. 소죽은 뒤를 돌아보았다. 오랜 풍파에 시달려 허름해진 초가집이 보였다. 문득 품 속에 넣어두었던 주머니의 무게가 느껴졌다. 무거웠다. 그는 그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며 다시 한번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는 3년간 이곳에서 쌓아왔던 추억들을 되새김질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장연비의 얼굴을 떠올렸다.
“……”
아직은 돌아갈 때가 아니었다. 그는 아직 자기 자신이 얼마나 성장했는지 몰랐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강해졌는지를 시험해보고 싶었다. 허리춤에 손을 대자 부드러운 가죽으로 싸여있는 칼 손잡이가 만져졌다. 그의 스승으로부터 받은 칼이었다. 비록 싸구려에, 투박하기 짝이 없는 박도지만 칼이 손에 잡히자 이름 모를 자신감이 솟아 올랐다. 그 누구에게도 질 것 같지가 않았다.
그는 상념을 끝내고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바닥에 몸을 누인 단풍잎과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한 초가뿐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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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름한 집안에서는 고약한 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발 디딜 틈도 없을 정도로 약 뿐인 집이었다. 소죽은 조심스럽게 약 더미를 해치며 나아갔다. 약 더미 사이에 등을 돌리고 앉아 무언가를 빻고 있는 사람이 보였다. 소죽이 말했다.
“유소림 대협이십니까?”
유소림은 등을 돌린 채로 말했다.
“누구신가? 약을 구하러 왔나?”
“그게 아니고 제 사부님께서 보내셨습니다. 귀갑봉침이 보냈다고 하면 알 거라고 하시더군요.”
유소림은 그제서야 고개를 돌려 소죽을 바라보았다. 소죽을 돌아본 중년의 얼굴은 햇빛을 많이 받지 않아서 그런지 유난히 하얬다.
“귀갑봉침? 그 아저씨가 아직도 살아있었나?”
“……”
소죽은 대답하지 않았다. 유소림은 혀를 찼다.
“……그런가. 하긴 나이가 있으니 별 수 없지.”
유소림은 옷을 툭툭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약재의 잔해로 보이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것들이 후두둑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그는 정돈이 되어있지 않아 엉망진창인 머리를 쓸어 올리며 말했다.
“그래, 그 분이 보냈다면 아마도 자네는 내공을 원하는 거겠지?”
소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좋아, 자네의 사부님과의 인연도 있고 하니 자네를 도와주겠네. 하지만 공짜는 아니야. 일을 좀 해줘야겠어.”
“어떤 일을……?”
유소림은 소죽의 눈 앞에 손가락 하나를 들어 보였다.
“하나는 단순한 경호네. 나는 가끔씩 약재를 구하러 위험한 곳까지 갈 때가 있으니까 말이야. 그저 곁에서 내 신변을 보호해주면 되는 거야.”
그는 손가락 하나를 더 폈다.
“그리고 둘. 앞의 것과는 다르게 조금 특이한 일인데…… 바로 새로 만든 약에 대한 실험대상이 되어주는 것이네. 쉽게 말해 인체실험을 해주는 거지.”
소죽은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소리신지……”
유소림은 피식 웃었다.
“자네는 하오문 녀석들을 이용해서 나를 찾아냈겠지. 그들로부터 내 별호에 대해서 듣지 못했나?”
“들었습니다. 광약사(狂藥師)라고 하더군요.”
“나에게 아주 잘 맞는 별호지. 말 그대로 나는 약에 미친 사람이네. 언제나 새로운, 그리고 특이한 약을 만드는데 미쳐있는 거지. 그러다 보니 약을 이것저것 많이 만들게 되는데 새로 만든 약은 반드시 그 효과가 어느 정도 되는지 실험을 해봐야 하거든. 그렇다고 내가 직접 실험을 하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 때 대처를 할 수가 없지 않나? 그러니 실험을 대신 해줄 사람이 필요한 거네.”
유소림은 슬쩍 소죽을 바라보았다. 소죽은 매우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소죽이 말했다.
“그 실험이라는 것이 많이 위험합니까?”
“글쎄,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실험대상이 되어주었지만 죽은 사람은 없었네.”
소죽은 내심 안도했다.
“다만 반병신이 되어버린 사람은 있었지.”
“……그렇군요.”
“하지만 그 정도 위험쯤은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네. 내가 항상 이상한 약만 만드는 것은 아니야. 실험을 하다 보면 영약 같은 것도 꽤 많이 먹게 될 것이네. 괜히 자네의 사부님이 자네를 내게 보낸 것이 아니란 말이야. 그분도 내가 어렸을 때 아버지의 실험대상이 되었던 분이시거든. 만약 운이 좋다면, 자네는 소림의 대환단에 비견될 만한 영약을 먹게 될지도 모르네. 어떤가? 그래도 싫은가?”
소죽은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다. 위험하지만 유소림의 말처럼 그것을 감수할만한 이점은 확실히 있는 것 같았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제안을 받아들이죠.”
유소림은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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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죽은 얼마 지나지 않아 유소림의 꼬임에 넘어간 것을 후회했다. 희귀한 약재를 위해서라면 도둑질이나 강탈, 그리고 모험을 서슴지 않는 유소림 때문에 그는 수많은 고명한 의원, 그리고 그들의 고명한 호위무사, 심지어는 사람이 아닌 영물들과도 싸움을 벌여야 했다. 게다가 유소림의 인체실험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라서 소죽은 한 달에 한번 정도는 온몸의 구멍에서 검은 피를 뿜으며 쓰러지거나 전신의 근육이 뒤틀려 움직이지도 못하는 꼴이 되어야 했다.
하지만 얻은 것이 없지는 않았다. 수많은 싸움을 통해 얻은 경험과 무림에서의 명성, 그리고 갖가지 영약들을 먹음으로써 생긴 내공까지. 그 모든 것들이 소죽을 강하게 만들어 주는 것들이었다. 소죽은 자신에게 패해 바닥을 뒹구는 무사들과 영물들을 보면서 조금씩, 자신이 가진 힘의 수준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자신이 충분히 강해졌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그는 유소림과의 일을 그만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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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무슨 생각으로 우리 오빠한테 비무를 신청했어요? 물론 비무니까 죽지는 않겠지만 팔 하나 정도는 날아갈지도 모르는데.”
소죽은 담담한 얼굴로 차를 한 모금 마신 뒤에 대답했다.
“승산이 있으니 비무를 신청한 거요.”
남궁세가의 둘째 딸인 남궁화련은 그런 소죽을 보면서 빙글빙글 웃었다.
“헤에, 무림 제일 가는 후지기수인 우리 오빠랑 싸워서 승산이 있다고요? 물론 당신도 나름대로 무림에서 명성이 있다는 건 알아요. 귀갑봉침이라고 하던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우리 오빠와 견줄 정도는 아닐 텐데요?”
“명성의 차이와 실력의 차이는 다르오.”
“그래서 지금 우리 오빠한테 이길 수 있다는 거에요?”
“이길 수는 있소. 단지 확률이 낮을 뿐이지.”
“당신이 이길 확률이 얼마나 되는데요?”
“일할, 또는 이할.”
“뭐에요? 너무 낮은 것 아니에요?”
“별 수 없소. 실력의 차이가 너무 크니까.”
“……”
남궁화련은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소죽이 마음에 들었다. 생긴 것도 괜찮고, 무엇보다도 거짓말 일색에 허풍뿐인 도련님들과 달리 그는 솔직하고 겸손했다.
그녀는 소죽을 바라보았다. 그는 느긋한 동작으로 차를 마시고 있었다.
“뭘 믿고 그렇게 여유롭게 구는 거에요?”
소죽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이런 여유라도 부리지 않으면 미칠 것 같으니까.”
“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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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도전에 의해 일어난 비무라 구경꾼은 많지 않았다. 단지 소죽의 보증인인 유소림과 남궁군명의 숙부인 남궁지, 그리고 남궁화련, 이 세 명이 비무를 지켜보는 사람의 전부였다.
남궁세가 내부에 마련되어있는 대련장에서 마주선 소죽과 남궁군명은 서로에게 포권을 취했다. 소죽이 말했다.
“비무를 하기 전에 부탁하는 것인데…… 선수를 양보해 주실 수 있습니까?”
남궁군명은 잠시 당황했다. 지금까지 그와 싸워온 그 누구도 이렇게 당당하게 선수를 양보해 달라고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는 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강호제일의 후지기수인 천룡공자(天龍公子) 남궁군명이었다. 태어나자마자 벌모세수를 받았고 영약을 밥 먹듯이 먹었으며 중원제일의 검법을 익혔다. 소죽이 굳이 말을 꺼내지 않았더라도 그는 선수를 양보했을 것이다.
“알겠소. 선수를 양보하지.”
인사를 나눈 둘은 뒷걸음질을 쳐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각자 자신의 허리춤에 매달려있는 무기를 뽑았다. 남궁군명은 검(劍)이었고 소죽은 도(刀)였다.
소죽은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몰아 쉬었다. 선수를 양보 받았으니 남궁군명은 소죽이 무슨 짓을 하든 먼저 공격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천천히 내공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우우웅!
소죽의 칼이 부르르 떨며 날에서 붉은 기운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강기(罡氣)였다. 남궁군명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강기란 내공이 심후한 고수나 쓸 수 있는 기예다. 소죽만한 나이에 강기를 쓰는 것은 명문정파의 제자가 아닌 이상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만만치 않겠군’하고 생각하며 그는 공격을 받을 준비를 단단히 했다. 생각 같아서는 자신도 내공을 끌어올려 강기를 만들어내고 싶었지만 그래서야 선공을 양보한 의미가 사라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자신감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남궁군명은 소죽과는 달리 준비시간이 없어도 빠르게 강기를 뽑아낼 수 있었다.
소죽은 여유롭게 자신을 지켜보는 남궁군명을 보곤 이를 악물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실력차이가 너무 컸다. 하지만 그는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고 각오를 다졌다. 단 한 수! 한 수에 끝낸다!
“하압!”
소죽은 기합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그리고 남궁군명의 머리를 내리쳤다. 남궁군명은 순식간에 검에서 강기를 뽑아내며 그것에 맞서나갔다.
강기와 강기의 충돌에 쾅하는 폭음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소죽의 칼이 그의 손을 떠나 허공을 날았다. 남궁군명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이겼다!’
소죽은 무기를 잃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뛰어오르며 양팔과 양다리를 번개같이 내뻗었다. 남궁군명은 가볍게 뒤로 물러서서 소죽의 공격을 피했다.
모든 것이 소죽의 계산대로였다.
순간, 소죽의 양팔과 양다리에서 네 줄기 빛살이 남궁군명을 향해 폭사되었다. 소죽이 익힌 무공, 귀갑도(龜甲刀)봉침검(蜂針劍)의 비기(秘技) 사봉사출(四蜂四出)이었다.
남궁군명은 매우 놀라서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는 방심한데다가 급하게 강기를 끌어올리느라 진기의 흐름이 원활하지 않은 상태라 반응이 늦을 수 밖에 없었다. 각기 다른 방향으로, 동시에 날아오는 네 개의 빛살 중 세 개는 어찌어찌 쳐낼 수 있었지만 나머지 하나는 도저히 막아낼 수가 없었다.
마지막 남은 빛살 하나가 남궁군명의 눈에 박혀 들었다.
“으아악!”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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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만에 소죽은 그의 사부가 머물던 악록산의 초가로 돌아왔다. 그는 사부를 만나 자신이 남궁세가의 아들을 꺾었노라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돌아온 초가에는 아무도 없었다. 소죽은 산에서 내려와 모든 수단을 동원해 사부를 찾았지만 아무도 그의 행방을 알지 못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의 스승은 이 세상을 떠나버린 것이다. 영원히.
다시 돌아온 소죽은 그 초가에서 하루 밤 동안 머물렀다. 지금은 아무도 없지만 한때 그의 사부가 누워있던 침대의 앞에서였다. 그는 그 곳에서 노인의 빈자리를 바라보며 밤새 어린아이처럼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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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화루 뒤편의 골목길은 맨 처음 왔을 때와 다를 바 없이 더러웠다. 하지만 그 골목이 아무리 더럽다고 해도 소죽에게는 상관이 없는 이야기였다. 그에게 이 골목보다 아름다운 곳은 없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올려 청화루의 창문을 바라보았다. 저 창문 너머에 장연비가 있다고 생각하니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두근거려왔다. 그는 창문을 바라보며 한참 동안 멍하니 서있었다. 그러던 그는 곧 마음을 굳게 먹고 발을 박찼다.
한때는 그렇게 높아 보이던 장연비의 창문도 지금의 그에게는 한 없이 낮았다. 그는 골목을 이루고 있는 두 건물의 벽을 번갈아 밟으며 순식간에 창문의 앞에 달라붙었다.
“아…… 아흣……”
“헉…… 헉……”
소죽의 귀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남자가 헐떡거리는 소리와, 여자의 교성이었다. 소죽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어느 새인가 잊고 있었지만 장연비는 기녀였다. 기녀는 술과 춤과 노래를 팔지만 그것은 모두 겉치레일 뿐, 결국은 몸을 파는 일이다. 장연비가 기녀인 이상, 그녀의 방안에서 그녀가 다른 남자와 뒹굴고 있는 게 이상할 것은 없었다. 소죽은 가슴을 움켜쥐었다. 이곳을 떠나기 전의 그는 전혀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었다. 그때의 그는 어리고 멍청했다. 소죽은 슬프기도 하고 화도 났지만 참았다. 그리고 자리를 뜨려고 했다. 나중에 다시 올 생각이었다. 하지만 방안에서 느껴지는 수많은 인기척에 그는 움직임을 멈췄다. 못해도 다섯 명 이상이 그녀의 방안에 있었다. 이상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창문을 열어보았다.
벌거벗은 여러 명의 남자와 한 여자. 소죽의 눈에 보인 것은 윤간의 현장이었다. 그의 숨결이 거칠어졌다. 그는 자신의 예상이 틀리기를 바라면서 남자들 밑에 깔려있는 여자를 확인했다.
장연비였다.
못 알아볼 수가 없었다. 남자들에게 윤간을 당하고 있는 여자는 분명히 장연비였다. 소죽은 단숨에 창문을 박살내며 방으로 뛰어들었다.
“뭐, 뭐야!”
“뭐냐? 네놈은?”
“……”
무공을 배운 이래로 그는 단 한번도 감정에 휘둘려서 함부로 폭력을 쓴 적이 없었다. 하지만 눈 앞에 보이는 광경은 그의 이성을 순식간에 날려버렸다. 그는 허리춤에서 칼을 뽑았다.
“으아악!”
“아악!”
“끄아악!”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 장연비의 방안은 피 웅덩이가 되어있었고 남자들은 모두 바닥에 누워있었다. 대부분은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지만 운 좋게 살아있는 자도 있었다. 허나 소죽에게 자비는 없었다. 그는 힘겹게 숨만 몰아 쉬고 있는 남자들에게 다가가 한 순간의 주저도 없이 그들의 성기(性器)를 잘라버렸다. 성기를 잘린 남자들은 모두 고통에 눈을 희게 뒤집으며 기절해버렸다. 남자들을 처리한 소죽은 칼을 집어넣고 침대에 늘어져있는 장연비에게 다가갔다.
“으욱……”
소죽은 눈물을 흘리며 바닥에 쓰러져있는 장연비를 안아 들었다. 장연비의 몸에서는 역한 비린내와 밤꽃냄새가 풍겼다. 그 냄새를 맡자 소죽은 분노 때문에 기절해버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장연비의 초점이 없는 눈이 그의 분노를 잠재웠다. 장연비는 정신을 놓아버린 백치 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정상이 아니었다. 소죽은 등에 매고 있던 봇짐에서 옷가지를 꺼내 장연비에게 입혔다. 그리고 그녀를 안은 채 창 밖으로 몸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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