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S. E. P. 라는 겁니까.”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지금껏 설명해왔던 담담한 목소리로 말한다.

“네, 두 번째 지구를 찾는 일이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 겁니다. 그러면 또 하나의 궁금한 게 생기게 되겠죠. 과연 ‘블랙 큐브’에는 뭐가 들어있었는가.”

이제야 이야기는 본론으로 들어가기 시작한다. 자, 지구의 생명체는 어떻게 멸망하게 되었을까.

“생명의 활동에는 태양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생명의 원천을 태양이라 말했으며, 실제로 태양은 많은 생명 활동을 유지시켜주는 원동력입니다. 하지만 저렇게 대기층이 재로 뒤덮어버린다면, 태양의 에너지가 지구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게 됩니다. 백년이 지난 시간에도 지구는 아직 죽지 않았지만, 대부분의 생명체는 죽었습니다.”

닥터 존의 모습이 흐릿해지더니 그의 뒤로 푸른 별이라 불리던 시절의 지구가 보였다. 그리고 아까 봤었던 붉은 꽃들이 여기저기서 피어오른다.

“SF영화를 많이 보셨다고 말씀하셨으니 묻겠습니다. 이 장면은 어떤 영화에서 나온 것 같습니까?”

“……「터미네이터」 같군요.”

“네, 제가 기대하던 대답입니다. 전 그 영화를 보지 못했지만 몇몇 사람들이 하진우 씨처럼 그 영화를 언급하더군요.”

나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럼 이게 핵폭발이라는 뜻인가. 아니, 조금 다르다. 그가 재라고 불린 저 물질들이 지구를 뒤덮은 까닭은 단순한 핵폭발로 끝낼 게 아니었다.

“내가 잘못 느끼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당신의 말투는 마치 ‘우리’가 핵을 터트렸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리는군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정말 그런 겁니까. 당신들이 내 가족을 죽인 겁니까?”

자신들이 한 짓거리를 시인이라도 하는 것처럼 미소를 짓는다. 살짝 감긴 눈을 바라보니 한 대 쳐올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지구를 멸망시켰지요. 이제부터 그 이유를 설명해드릴 겁니다.”

아니, 아니 됐습니다. 듣고 싶지 않아.

“아까 삼각형 모양의 그림자를 보셨지요. 그건 우리가 ‘베른’이라 부르는 종족의 함선 중 하나입니다. 모함 급이라 부르고 있죠. 참고로 비스마르크 호는 순양함 급입니다. 조금 전의 이야기로 돌아갑시다. ‘블랙 큐브’는 현존하는 어떤 물체로도 자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안을 투시할 수는 있었죠. 단순한 큐브의 외면과 달리 안쪽은 무척 복잡한 온갖 기하학적 문양들이 겹쳐져 있었습니다. 러시아에서는 그 중 가장 바깥을 두르고 있는 문양을 분리해냈고 그건 송곳이 그려진 미로였습니다. 정육면체를 모두 이용한 복잡한 미로에는 들어가는 입구는 여섯 개였지만 나가는 출구는 없었습니다. 게다가 모두가 한 곳을 향해 가고 있었죠. 과학자들은 어렵지 않게 그것을 풀어냈습니다만 그 다음을 몰랐죠. 그래서 그들은 과학 잡지를 통해 이 문제를 세계인에게 보여줬습니다. 몇몇 성실한 독자들이 보낸 답안 중 하나가 채택되었는데, 그 미로의 중앙을 송곳으로 찔러보자는 거였습니다.

미로를 다시 정육면체에 맞게 분리시킨 다음 여섯 개의 선이 도착하는 하나의 장소를 특수합금으로 제작한 송곳을 이용해 찔렀습니다. 그러자 안쪽의 문양들이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모든 면에 걸쳐서 복잡하게 겹쳐있었던 문양들이 각각 하나의 면에 정돈되었습니다. 그걸 본 과학자들은 그 중 다섯 개가 어떤 물체들의 설계도라는 걸 알아냈습니다. 하진우 씨의 뇌를 이곳에 보낸 정보 또한 여기에 있었죠. 그리고 나머지 하나에는 씁쓸한 소식이 있었는데, 방금 말씀드린 베른의 모선 급 함선이 지구에 도착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건 영상재생장치였습니다. 기록의 과정이 없이, 설계도대로 만들기만 한다면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이 나오는 재생장치였죠. 베른의 함선에서 내린 건 베른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들은 지구인을 학살했고, 지구를 자신들의 거주지로 삼았습니다. 그게 바로 2012년 4월의 이야기였습니다.”

“그걸 알아낸 게 정확히 언제입니까.”

“2004년입니다.”

“그럼 알고도 당했다는 겁니까.”

“아이러니하게도 사실 그걸 미리 알아버렸다는 게 문제였습니다. 우리에게 반격수단이라는 건 핵무기가 고작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기술로 우주전쟁은 전혀 불가능했지요. 나중에 알았지만 베른의 모선에는 행성을 파괴할 수 있을 정도의 에너지를 방출할 수 있는 무기가 장착되어 있었습니다. 반격이라도 했다가는 꼼짝없이 당했을 겁니다. 과학자들은 자신을 바보라고 생각했습니다. 안에 있는 설계도대로 물건을 만드는 건 가능했지만, 그걸 활용하는 방법을 도통 떠오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한 명의 소설가를 영입하게 됩니다. 안타깝게도 그 소설가에 대한 자료는 없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그다지 유명하지는 않았다는 점이었죠. 그가 써낸 시나리오는 미군의 승인을 받아내는데 성공합니다. 계획이 수립되자 2005년부터 각 국가는 병원을 방문한 모든 사람들의 DNA를 채취했습니다. 러시아 과학자들은 설계도에 나타난 물건들을 하나씩 만들었고, 미군은 자신의 최첨단 무기와 더불어 그걸 사용할 수 있는 천 명의 정예 병사들을 지원했습니다.”

닥터 존의 모습이 다시 선명하게 나타났다. 그는 접시 하나와 아까 보여줬던 원통의 물건을 양손에 들고 있었다.

“이 접시는 미군의 병사들이 탑승한 침투선입니다. ‘블랙 큐브’에 있었던 설계도대로 만든 겁니다. 물론 실물은 아니지만 이것과 비슷한 모양입니다. 그리고 이건 핵무기입니다. 역시 실물은 아니지요. 과학자들은 이것을 지구에게 가장 큰 피해를 줄 수 있는 활화산에 투여할 계획을 세웠고, 그것이 터질 날짜를 정했습니다. 그게 바로 2012년 4월 6일입니다. 정체불명의 외계인이 지구를 침공한 지 하루가 지난 시점이었지요. 그리고 그때 침투선은 베른의 모함을 성공적으로 점거했고, 그때 함께 간 과학자들의 손에는 거의 모든 지구인들의 DNA가 들려있었습니다. 하지만 소수민족이나 아프리카 오지에 있는 인종들의 DNA까지는 채취하지 못했지요. 우주선에는 지구에서 죽은 이들을 재생시킬 수 있는 기술이 있었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습니다.

잠깐 스티븐 호킹 교수의 이야기를 해야겠군요. 그가 경고하기를 지구인은 200년 안에 자원을 모두 소비하여 멸망할 거라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고로 그 안에 다른 행성으로 이주를 해야 한다고 말했죠. 맞는 말입니다. 화석연료는 고갈되고 있었고, 2012년에 멸망하는 마당에 곧장 우주로 나가 살 수 있는 기술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세계를 굴리는 게 돈이라고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건 자원입니다. 그 중에서도 식량이 가장 중요한 요소지요. 아무리 돈이 많은 부자라 할지라도 돈을 먹고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우주선에 있는 식량은 한정되어 있었고 흔히 60억이라 말하는 지구인을 한꺼번에 먹여 살릴 수는 없었습니다.”

그때였다. 고글에서 글자들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닥터 존은 우리처럼 고글을 쓰고 있지 않았다. 그는 어딘가를 응시하더니 접시와 원통을 보이지 않는 책상에 내려놓은 시늉을 했다.

-상담 종료까지 1분 남았습니다. 상담이 끝난 조는 방으로 돌아가서 대기해주시기 바랍니다. 12시에는 비르마르크 호 함장의 요청에 의한 정기모임이 있습니다. 한 분도 빠짐없이 참석해주십시오.

“오늘 상담은 여기까지입니다. 내일 오전에도 뵙지요.”

일방적인 작별인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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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강신청을 오늘 하고, 이제 개학 준비로 인해 휴재를 하게 됐습니다. 아래 글에 달린 말씀대로 이 글은 미약합니다. 왜냐면, 제가 읽은 SF소설은 다섯 손가락 안에 들거든요. 이것도 그냥 쓰고 싶어서 쓴 거고, 대충 머리에 있는 내용들을 기점으로 이어나갔습니다.

계속 쓰고 싶고, 한 권의 분량으로 끝내고 싶은데, 아쉽게도 9월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제 개학 준비를 해야하기에-_-; 어쩔 수없이 당분간 휴재를 해야할 듯 싶습니다. 이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하고, 또 찾아뵐 수 있으면 찾아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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