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장편 미래전쟁 (8)

2010.08.15 20:2008.15

“아들의 머리에 총구를 겨눴어요.”

움찔.

앨런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쉽게 뒷이야기를 상상할 수 있었다. 그리고 결말도 알았다. 그녀는 총으로 아들의 목숨을 위협했다. 아버지이자, 연인이었던 그녀의 남편은 무슨 수를 썼던 간에 아내를 죽였다. 그 결과 앨런은 지금 여기에 누워서 속이 다 후련하다는 태도로 말할 수 있는 거다.

“괴로웠지만, 그래도 지금은 괜찮아요. 오히려 잘 선택했다는 생각도 들고요.”

이제 내 차례다. 누구 한 명도 얘기하지 않았지만, 잠깐의 휴식이 필요했다. 내가 울었기 때문에 시작한 일이니, 마무리를 지어야만 했다. 몇 년 전의 시간으로 돌아갈 필요도 없다. 아침으로 뭘 먹었는지 기억이 나진 않았지만, 윤경이 아프다고 말한 게 기억났다. 회사 상사에게 뭣 때문에 욕먹었는지 떠오르지는 않지만, 비가 내려 우울했다는 건 떠올랐다. 하나가 생각나면, 하나가 생각나지 않는다. 웃어보려다가, 울어버린다. 아내가 임신했다는 말을 귓가에 속삭인 게 기억났고, 그녀와 아이가 죽었다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제길, 이건 어째서 이리도 생생한 거야.

상처를 극복하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영화 속에서나 나오는 멋진 남성의 모습은 없었다. 과거를 그리워하고, 죽은 아내를 떠올리며, 아직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에 괴로워하는, 아직 죽지 못해서 살아가는 그런 나약한 남자가 여기에 있다. 어젯밤은 그렇게 흘러갔고, 이야기를 모두 듣자 암묵적인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모두가 잠이 들었다.

앨런이 내 영역으로 불쑥 머릴 내민다.

“고글에 뜬 메시지 확인했어?”

과거에서 현재로 돌아오는 건 눈 깜짝할 사이지만, 마음의 늪에서 가라앉는 일에는 천년만년이란 시간이 필요하다.

“메시지?”

확인해보니 고글의 오른쪽 끄트머리에는 핸드폰의 문자메시지처럼 편지 표시의 이미지가 있었다. 그걸 활성화시키니 글귀가 떠오른다.

-08시 식사 이후 10시에 비스마르크 호 의료실에서 귀하의 검진이 예약되어 있습니다. 시간을 엄수하십시오.

“10시에 의료실로 오라는군요.”

그녀는 건너편 사람들에게 “마리아도? 아서도?” 라고 말했다. 마리아가 고개를 끄덕였고, 아서는 뻐근한 어깨를 움직이며 대답했다.

“우리는 모두 10시인 모양이군.”

이 배에 탄 사람들의 수를 생각해봤을 때, 나는 의료시설이 진심으로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 많은 수를 일일이 검진하려면 과연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 그리고 이 배의 시설이 부족하진 않을까.

결론적으로, 괜한 걱정이었다. 우리는 고글의 안내에 따라 아침을 먹으러 식당으로 이동했다. 이미 배의 군인들은 대부분 식사를 마친 상태라는 안내 메시지를 받았기 때문에 식당은 널찍했다. 물론, 수를 직접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이쪽으로 넘어왔던 거의 모든 사람이 들어와도 공간이 남을 정도로 식당은 컸다. 이 함선의 규모를 그제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식당으로 가는 동안 끔찍하게 맛없는 우주식에 대한 이야길 늘어놓던 앨런은 자신이 본 메뉴에 대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놀랍게도 식당은 배식을 하는 게 아닌 뷔페가 차려져 있었고, 요리사 모잘 쓰고 있는 군인들이 떨어져가는 음식들을 채워줬다. 적당한 크기의 접시를 들어 음식으로 다가갔을 때, 조금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튜브에 들어있는 음식이 아니어서 다행이었고, 낯선 외계 생물을 잡아서 만든 요상한 요리들은 하나도 없다는 점에서 안심했다. 입맛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식빵과 과일 몇 조각만 집었다. 줄에서 벗어나 앉을 곳을 살펴보니, 가까운 곳에 마리아가 자리를 잡고 벌써 식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녀의 접시에는 조각 케이크가 종류별로 잔뜩 있다.

“그건 식사가 아니라 디저트 아닙니까?”

“먹고 싶은 걸 어떻게 해요. 우진은 그것만 먹을 건가요?”

“다이어트 중입니다.”

“풉!”

자리에 앉아 사과 한 조각을 들었다가, 마리아에게 내밀었다. 진한 색의 초코 쇼콜라를 야금야금 갉아먹던 그녀는 머뭇거리더니 포크에 꽂힌 사과를 뽑아간다.

“고마워요.”

어깨를 으쓱이다가 누군가의 손에 제지를 당했다. 아서였다. 작은 동산처럼 잔뜩 쌓인 갖가지 음식들을 보다가 피식 웃었다.

“콜레스테롤로 죽을 수도 있습니다.”

“뭐, 다시 살려주겠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나름 설득력이 있는 말이었다. 기름에 바싹 튀긴 음식들을 주로 가져온 그는 새우튀김을 들어 한 입에 넣고 오물거린다.

“으음.”

몇 번 씹더니 그는 나에게 새우튀김 하나를 내밀었다. 맛이 없는 모양이다, 라고 생각했다가 거의 울 것 같은 아서의 표정을 본 마리아가 다시 웃음보를 활짝 열었다.

“푸핫!”

“바삭바삭한 식감이 정말 훌륭해. 새우도 아주 좋은 놈이고. 주방장을 만나 조리법을 알고 싶을 정도군.”

나도 새우튀김을 먹었다. 반 정도 씹었다가, 눅눅할 줄 알았던 튀김옷은 막 튀김기에서 꺼내온 것을 집어먹는 느낌이었다. 나는 나머지 반쪽을 들고 마리아를 쳐다봤다.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훌륭하군요.”

“음, 뭐야. 아직도 예의바르게 구는 거야? 어제 이후로 그런 걸 털어냈다고 생각하는 건 나와 앨런뿐인 거 같군.”

나는 포크의 끝으로 마리아를 가리켰다.

“사실 마리아도―”

“어머, 내가 뭘?”

그녀는 남자를 홀린 구미호 같은 눈을 하고서 히죽거렸다. 나는 졌다는 표정을 지은 다음 그의 접시에 귤 하나를 올려놓았다. 아서는 고맙다는 인사를 한 다음 목을 쭉 내밀고 주변을 둘러봤다.

“그런데 앨런은?”

―앨런이 보이지 않았다. 10분이 지나도 앨런은 나타나지 않았고, 식사를 마치고 멋대로 복도를 돌아다니다가 지나가던 군인에게 의료실의 위치를 물어본 다음, 다시 방으로 돌아왔을 때 우리는 앨런을 찾을 수 있었다. 내 침대에 앉아서 멍하니 탁자를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서 나는 우수를 발견했다.

“뭘 생각하고 있어?”

그녀와 한 침대를 쓰는 아서가 의자에 앉으며 물었다. 나는 문 근처의 벽에 서있었고, 마리아도 그들의 이야기를 듣기로 결심했는지 내 옆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냥, 식욕이 없어서.”

이런 걸 동문서답이라고 하는 거다. 나는 그녀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왜냐면 저런 얼굴을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아내가 떠올랐다.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소식을 듣게 된 이후, 애써 밝은 척을 했었던 그녀는 1년이 지나기도 전에 눈물을 보였고, 내 품에서 죽고 싶다는 말을 했었다. 우리가 어떻게 그 위기를 극복했더라. 아이는 상관없다는 말 같은 건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으로 휘발유를 한 가득 퍼붓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난 그리 무식하지 않았었다. 제길, 그런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가 그때 아내를 어떻게 달랬었지. 실제로 그 위기를 극복한 이후 우리의 관계는 더욱 끈끈해졌었다. 아서는 질풍노도의 정신세계를 매일 대면하고 있는 교사답게, 차분한 목소리로 그녀와 대화를 계속 시도했다.

“왜 식욕이 없는데?”

질문의 노선을 바꿔, 그녀의 정신을 뒤따라간다.

“뷔페에 먹을 만한 게 없던걸. 그래서 그냥 먼저 돌아왔어.”

우리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맛있게 맘껏 먹었던 뷔페식 식사였다. 식당에 도달하기 전까지 크리스마스를 손꼽아 기다린 공주님처럼 들떠있었던 그녀가 할 만한 말은 아니었다. 대체 거기서 뭘 본 걸까. 나는 그걸 묻고 싶었지만, 아서는 조금 더 돌아가는 일을 선택했다.

“아무리 밥맛이 없어도 사람은 밥을 먹고 살아야지. 점심은 꼭 같이 먹는 거야. 알았지?”

“아아, 그래. 그쯤 되면 나도 살려고 먹지 않을까.”

절대 직구를 던지지 않는 노련함을 보이는 에이스는 우리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공기가 결코 가볍지는 않았다. 10시가 되기 전에 알람이 울렸다. 7시에 울렸던 것처럼 알람은 자동적으로 울렸다. 시간은 정확히 9시 55분이었다. 방에서 나오자 아서가 내게 다가와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뒤에서 따라와.”

나는 불만 없이 감시하는 역을 맡았다. 마리아는 자신이 먹었던 케이크를 말하면서 점심때에는 꼭 같이 먹자는 이야기를 앨런에게 하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를 만나자 꿀꿀했던 기분이 조금은 풀어졌는지, 그녀는 밝아진 목소리로 깔깔 웃으며 복도를 시끌벅적하게 만들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의료실로 가는 조를 발견한 다음에는 더 밝아진 모습을 보여줘서 잠시나마 걱정했던 마음을 풀어주는 듯 했다.

의료실에 도착하자, 일단 그 규모에 기가 죽어버렸다. 내가 생각한 의료실은 대체로 침대가 몇 개 있고, 간단한 의료기구와 하얀 가운을 입고 있는 군의관, 그리고 몇 명의 의무병이 서있는 광경이었다. 그러나 단순한 의료실이 아닌, 병원의 한 층을 그대로 가져온 것 같은 모습에 다들 어안이 벙벙했는지 말을 잃고 말았다. 이곳까지 오는 길에 친해진 제리라는 남자는 워싱턴에서 일하던 의사였는데, 지금 보이는 것 중에서 자신이 사용하던 것과 비슷한 도구는 고작 침대가 전부라는 농담으로 모두의 긴장을 풀어줬다.

안으로 들어가자 우리 조는 의무병의 안내를 받아 뿔뿔이 흩어졌다. 나는 여자 의무병을 따라갔는데, 입구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볼 수 없도록 칸막이가 쳐진 방으로 들어갔다.

“아, 반갑습니다. 내가 바로 닥터 존입니다.”

당연히 처음 보기 때문에 눈살을 찌푸렸지만, 닥터 존이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가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는 궤도정거장에서 내게 지시를 내렸던 담당의였다. 내가 비스마르크 호에 탔다는 건 어떻게 알았을까. 의문을 길게 가지 않았다. 그는 내 반응을 기다리더니 손에 들고 있던 펜을 얼굴 높이에서 놓아버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그것을 잡으려고 허리를 숙였다가 눈을 깜빡였다.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펜은 바닥에 닿기도 전에 싸구려 마술처럼 눈앞에서 사라졌다. 나는 잠깐 그의 왼손을 무섭게 노려봤다.

“마술이 아닙니다. 그리고 당신처럼 반응한 사람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 또한 고백해야겠군요. 난 당신과 아마 30광년은 떨어진 곳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전 여기에 있으면서도, 여기에 없는 겁니다.”

“그럼 궤도정거장에서도?”

여기에 없는 닥터 존은 고개를 끄덕이며 능구렁이 같은 표정을 지었다.

“물론입니다. 자, 그럼 시간이 많지 않으니 상담을 시작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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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큐브 B-815를 구입하고 잠시 패닉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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