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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미래전쟁 (7)

2010.08.14 07:1608.14



*주의*
본 소설 7화는 동성애에 관한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동성애에 관해 불쾌감을 가지시거나, 혐오감을 느끼시는 분들이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백 스페이스를 눌러주시기 바랍니다. 강도는 높지 않으나, 그에 관한 언급이 있으니, 주저하지 말고 뒤로가기를 눌러주세요.











“자살했어요.”

건조한 공기 위로 까막까치 한 마리가 요란한 울음소리를 내며 날아간다. 그러나 나 말고는 아무도 들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그게 있으면 적절하겠다고 생각했지만, 동의해주는 이가 없어서 서글펐다.

“앨런, 얘기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되요.”

마리아가 배려하는 차원에서 가장 먼저 그녀의 이야기에 제동을 걸었다. 그러자 앨런은 소탈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다들 하는데 나만 안 하면 이상하잖아요. 게다가 내 아랫사람도 아직 남았고. 여기서 끝내면 분위기 이상해질 거 같으니까 그냥 할래요.”

그렇게 말한 다음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어디서부터 시작을 해야 좋을지 숨을 고르고 있는 중이었다.

“난 그래도, 살만큼은 살았던 거 같아요. 나사에 들어가서 일하는 게 꿈이었는데, 그걸 가장 먼저 이뤘죠. 다음은 결혼이었고, 그 다음은 애를 낳는 거였고, 그리고 내 집을 가져서 우주의 신비를 가장 먼저 만날 수 있는 곳에서 평생 일하는 게 마지막 목표였어요.”

나는 앨런이 누워있는 걸 상상하며, 보이지 않는 그녀의 등에 별을 그렸다. 굴곡을 따라 숲을 구성하고 있는 나무 한 그루씩 촘촘하게 심어서 북극칠성을 만들어본다. 침대 천장의 어둠은 말 그대로 넓은 우주와 같은 색이었기에, 쉽게 연상할 수 있었다.

“큰 틀을 잡아놓으면, 작은 건 알아서 맞춰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어요. 내가 아닌 것들은 모두 호락호락하지 않았고, 그 중에서도 사람과 어울리는 게 가장 힘들었어요.”

“남편과도 그랬습니까?”

아서가 물었다.

“남편이 왜 남편인 줄 알아요?”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항상 남의 편만 들어서 남편인거에요.”

갑자기 의문이 떠올랐다. 대체 그녀가 영어로 어떻게 말했기에 한국어로 저리 번역되어 들리는 것일까. 영어로 남편은 Husband니까, 아마 Hus나 Band와, 혹은 Husband와 유사한 발음으로 구성된 단어가 다른 사람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이 언어통역은 정말이지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는 것 같다. 자동으로 통역이 되기 때문에 제 2외국어를 배우지 않아도 되는 때가 정말 왔다는 말인가.

“남편이 바람을 폈군요.”

가제의 맘은 게가 안다고, 마리아가 콕 집어서 말하자 앨런이 시큰둥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비슷해요.”

나는 입을 다물고 그녀가 기억하고 있는 과거에 대해 깊이 생각해봤다. 만나게 된 지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지만 앨런의 대범한 성격상 단순한 바람은 큰 문제가 될 거 같지 않다. 그녀라면 단 번에 이혼을 하던가, 한 번 용서를 하고 각서를 쓰게 만들었을 거다.

“마리아. 러시아 여자들은 어때요? 바람피운 남자를 용서하나요?”

“사람 나름이겠죠. 나라면 용서하지 않았을 거예요. 일단 먹고살 걱정은 하지 않고 있었으니까요. 앨런도 그렇지 않나요?”

그녀는 잠깐 뜸을 드리더니, 긴 한숨을 내뱉었다.

“마리아 말대로 사람 나름인 거 같아요.”

앨런의 뉘앙스가 조금 이상하게 느껴져서, 내가 물었다.

“무슨 뜻입니까? 뭔가 다르게 들리는데.”

“어머, 그런 것도 파악하며 듣고 있었어요?”

“뭐, 영업 쪽에서 일한 적이 있어서. 사람의 대화는 주의 깊게 듣는 편입니다. 지금 말하는 건 완전히 다른 세계의 이야기를 하는 거 같습니다만.”

“다른 세계라면 다른 세계죠. 그런데 딱히 먼 나라 이야기는 아니었어요. 당시……라고 말하기도 좀 웃기지만, 여하튼 2010년 미국은 동성애로 꽤 골머리를 썩이고 있었으니까요.”

“…….”

아서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남자와 바람이 난 겁니까?”

앨런의 등에 촘촘히 박힌 별들이 파르르 떨리는 모습이 보인다. 분한 감정 때문일까, 아니면 소름이 끼칠 정도로 구역질이 나는 것일까. 나라면 또 어떨까. 어느 날 자고 일어나보니 갑자기 남자가 사랑스러워진다고? 나는 잠깐 생각했다가, 「필립 모리스」에서 열연한 짐 캐리와 이완 맥그리거를 떠올렸다. 잠깐, 그건 코미디 영화였잖아. 지금 분위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데. 「브로큰백 마운틴」이 차라리 더 침울하지 않을까. 나는 비록 얼굴도 모르지만 그녀의 남편이 자신의 연인을 향해서 “Jack, I Swear.” 이라고 말하는 걸 잠깐 과거 속에서 되뇌어봤다.

“남자는 남자였어요. 자기 아들이어서 문제였지.”

푸핫!

잠깐 혼백이 날아간 탓에 침대의 난간에 팔을 걸치고 이야기를 들었던 마리아가 2층에서 떨어질 뻔 했다. 아서는 지진이 남기고 간 상처처럼 입을 쩌―억 벌렸고, 나는 방금 났던 소리를 냈다. 침과 함께 쏟아져 나온 공기들이 중력의 영향을 받아 다시 얼굴에 떨어졌지만, 닦아야 한다는 필요성을 못 느낄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빅뱅이 끝나고 우주가 다시 창조되고 있는 순간이다. 조물주가 없는 지금 누군가는 생명의 근원인 태양이 뭔지 가리켜야 했기에, 나는 어깨에 총대를 멨다.

“어,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아빠와 아들이란 말이죠.”

나는 밑바닥에 커다란 상어가 돌아다니는 살얼음 위를 걷는 심정으로 조심스레 말했고, 아서는 충격에서 헤어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으며, 마리아는 이상하게 눈을 빛내고 있었다. 저게 단순한 호기심인지, 금강산에서 비로소 이산가족을 만난 눈물겨운 상봉의 감동인지는 잘 모르겠다.

“진우, 당신이라면 그 사실을 알았을 때 기분이 어땠을 거 같아요?”

나는 아내와 딸이 사실은 사랑하는 사이였다는 생각을 해봤다. 부모가 자식에게 주는 아가폐적 사랑이 아닌 연인끼리의 에로스……. 제법 그림이 되려다가 도덕이라는 칸막이가 둘 사이를 갈라놓았다. 아니, 그것보다 일단 내가 아들과 사랑하는 사이라고 생각하니, 좀 끔찍한 기분이 든다. 아무래도 유전자가 거부하는 거 같다.

“아무래도 그들이 미쳤다고 생각할 겁니다. 세상 많은 사람들이 믿는 상식이라는 것에 위반되는 행동이니까요.”

“그래요. 나도 처음에는 미쳤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더라고요.”

역시 마리아가 그녀의 감정을 알아맞힌다.

“배신감? 그런 건가요?”

“비슷해요……아니 맞아요. 난 남편이 나에게 정말 완벽한 존재일 거라 생각했어요. 그래서 결혼했고, 그의 아이까지 낳았죠. 그런데 사실, 남편은 날 좋아하고 있지 않았어요. 20년 동안,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내가 알아차린 순간까지 단 한 번도 날 사랑한 적이 없었죠.”

이상했다. 내가 그녀의 말을 제대로 알아먹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남편에게 느끼는 배신감이 아니었다. 내 의심을 확인해준 건 카오스에서 간신히 빠져나온 아서였다.

“자신에게 실망한 거로군요.”

보통 바람과 다른 성격을 지닌 건 확실하다. 아내가 아닌 다른 여자에게 잠깐 빠진 거라면, 용서하고 다시 사랑을 하면 된다. 하지만 사랑하는 대상이 여자가 아닌 남자였다면, 이미 경쟁 자체가 되지 않는다. 그를 용서해도, 그는 다른 남자를 찾아가지, 앨런에게 돌아오지는 않는다.

“목표를 쉽게 성취한 학생들이 다음 기회에서 실패를 경험하면 더 큰 패배감을 느낍니다. 당신의 경우 나사에서 일하고자 하는 꿈을 이룬 다음, 완벽한 가정을 꿈꾸며 20년 이상이란 시간과 노력을 들였지만, 결국 첫 단추부터 실수였다는 게 알아버리자 그동안의 성취감이 모멸감으로 변해 자신에게 돌아온 겁니다. 공부를 잘해서 성적은 좋지만 사회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는 학생들이 보이는 주된 증세죠.”

“10점 만점에 10점을 줄게요.”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어떻게 하긴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음날 날이 새자마자 내 차를 가지고 집을 나갔어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요?”

“사람들에게 떠들 만큼 좋은 일도 아니었잖아요. 그럴수록 오히려 내가 더 불쌍해졌을 거예요.”

등에서 반짝이던 별빛이 죽어가고 있었다. 그녀의 이야기도 끝을 향해 내려가는 중이다.

“차를 타고 가다가, 어디서 멈췄는지는 모르겠어요. 그냥 갑자기 살고 싶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가장 빠르고, 효과적이고, 고통스럽지 않게 죽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죠. 하지만 딱히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는 않았더라고요.”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아까 했던 말이 떠올렸다. 그녀는 분명 자살했다고 했다.

“어떻게 했을 거 같아요?”

죽을 수 있는 방법을 떠올려봤다. 차를 가지고 호수에 빠진다. 마주 오는 트럭과 정면충돌을 감행한다. 독약을 마신다. 손목을 그어버린다. 창문을 모두 닫고 에어컨을 작동시킨 다음 잠든다. 벨트를 이용해 목을 매달아 죽는다. 짐승에게 잡아먹힌다. 사냥꾼 총에 맞아 죽는다. 일부러 경찰을 공격한다. 수면제를 다량 복용한다. 살모사에게 물린다. 전깃줄 위에서 춤을 춘다…… 방법이 너무 많아서 딱히 적당한 게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가장 빠르고, 효과적이고, 고통스럽지 않은, 3박자를 갖춘 죽음은 뭔지 모르겠다. 물론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앨런이 선택한 것은 느리고, 비효율적이고, 고통스러운, 짜증나는 3가지 조건을 모두 갖춘 죽음이었다.

“아들의 머리에 총구를 겨눴어요.”

움찔.

앨런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쉽게 뒷이야기를 상상할 수 있었다. 그리고 결말도 알았다. 그녀는 총으로 아들의 목숨을 위협했다. 아버지이자, 연인이었던 그녀의 남편은 무슨 수를 썼던 간에 아내를 죽였다. 그 결과 앨런은 지금 여기에 누워서 속이 다 후련하다는 태도로 말할 수 있는 거다.

“괴로웠지만, 그래도 지금은 괜찮아요. 오히려 잘 선택했다는 생각도 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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