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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돼지 멱따기

2015.07.29 00:1907.29

돼지 멱따기




그가 난생 처음 돼지의 눈으로 세상을 둘러본다. 온통 검고 하얗다. 너무 낯설어 그는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지 않다. 돼지에겐 눈물샘이 존재치않는다. 울상을 지으려하나 사람이 지닌 다채로운 표정은 사람나름의 것이다.

3류 흑백 영화 화면 속에 들어온 성싶다. 회색 토담 위에 한국과는 다른 형태로 볏집이 올라 있다. 약간 흰 볏집이다.

거무틱틱한 영감 하나가 튀어나온다.  영감 이라는 역사성 짙은 낱말은 금기다. 옛날이고 나라도 다르다.

거무튀튀한 늙은이 하나가 나타나 뭐라 시부렁댄다. 집안 사람들로 보이는 검고 흰 사람들이 꾸벅거린다. 여편네도 하나있다. 옛날이고 시골이니까 돼지 유방보다 나을 것도 없는 허여멀건 가슴을 내놓고 있는 꼴을 봐야만 한다. 조잘조잘, 빽빽. 고등학교때 허구헌날 장난치거나 자면서 배운 짧은 중국어 실력으로 그 말들을 알아듣기는 불가능하다.

여물통에 희멀건 물이 철철철 쏟아진다. 그는 애써 눈을 돌리고 뒷걸음질친다. 이 집 식구들이 무엇을 먹었는지 적나라하게 알려주는 가지가지 음식물들이 둥둥 떠있다. 나물밖에 없다.

그가 한 발 앞으로 내딛고 콧구멍을 벌름거린다. 상큼한 냄새 분자가 여물통에서 슬금슬금 기어나와 퍼진다. 싱그러운 냄새가 와닿는다. 눈 대신 발달된 코가 끊임없이 벌름거린다. 먹을만 할 것이다. 수천가지의 냄새를 분별할 줄 알지만 수이 지치는 불완전한 코를 지닌 사람과는 달리 돼지는 언제든 신선한 냄새의 만찬을 즐길 줄 아는 콧구멍을 가졌다.

그는 흐뭇해하며 길쭉한 들창코를 여물에 처박는다. 찰랑거리는 촉감이 좋다.

마치 토사물같다. 어렸을적 버스에서 허겁지겁 내려 길거리에 뱉어놓던 토사물같은 꼬락서니가 그의 눈이 어안렌즈가 되면서 밀어닥친다. 먹기 싫다. 사람이 잡식동물이라지만 길들여지지 않은 의지는 여물을 거부한다. 그는 생각의 파편에 지나지 않는다. 불교에서 윤회의 근본으로 여기는, 윤회하는 맹목적 생존의지라고나 할 존재다.

돼지가 입을 여물통에 박고 꾸역꾸역 들이마신다. 밍밍하고 껄끄러워 목젓이 이를 거부한다. 아니 거부할 작정을 하고 있다고 그가 상상한다. 토하길 갈망한다. 삶을 지속시킬 수 있게해줄 먹거리를. 잘도 먹는다.

한참을 먹자 배가 실팍하다. 그는 가물거리는 기억을 붙잡으려 한다. 법원은 살인을 저지른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그가 교수대 앞에 섰을때 그는 교수대를 관찰했다.

영화에서 본 것과 다름없다. 사형수의 머리굵기에 따라 조절되어 어떤 사람이든 처형할 수 있도록 둥그렇게 매듭진 동아줄이 천장에 매달려있다. 전체적으로 어둡지만 매듭만이 하얗다. 아래엔 나무 판자가 있지만 색깔을 구분하긴 힘들다. 벽은 회색이다. 그는 신부를 선택했다. 눈자위만 빼고는 검어보이는 신부가 중얼댄다.

-이건 꿈이야. 너 또한 내 꿈에 등장하는 가상 인물에 지나지 않아! 

그가 청색 수의를 입고 포승에 묶인 채 외친다.

-스스로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오. 편안히 받아들이도록 하시오. 회개하시오. 

울대가 조여진다. 장은 뇌와 심장이 끝장난 뒤에도 헛되게 저항한다. 음식물이 소화되는 장이 심장더러 깨어나라고 신호를 보낸다. 물론 헛수고로 끝날 일이다. 장은 사실 사람이 살아남는데 가장 중요한 존재라 할 수 있다. 뇌나 생식기 따위야 훨씬 나중에 진화된 것. 살아남는데엔 소화만 할 수 있으면 되는 것이다.

서서히 말을 알아들을 수 있을 것같다. 아니다. 무슨 새소리같다. 모든 게 몽롱하다. 시간 관념도 잊은지 오래다. 이렇게 된 시간은 몇 시간? 몇 분? 몇 초? 어두운 쪽으로 이동한 것을 보니 이 화면은 밤이다.

젊고 패기에 넘치나 어딘지 지친 목소리 둘이 들려온다. 노인이 나귀를 타고 나간다. 사람들 목소리, 개짓는 소리가 시끄럽다. 조용해진다. 기분나쁜 시골스런 침묵이 공간을 휘감는다. 그가 진창을 밟으며 이리저리 움직인다.

새된 목소리가 들린다. 장정 둘이서 그를 부여잡고 푸대 자루 안에 집어넣으려 한다. 엉덩이가 뜨겁게 달궈져온다. 책망하는 듯한 목소리가 거칠게 웅웅거린다. 어둠이다. 밧줄이 묶여 긁히는 소리가 들린다. 그의 다리만큼이나 굵은 몽둥이 여럿이 그를 늘씬하게 두들긴다.

그가 정신을 잃는다. 육체는 포기하지 않는다. 푸대 속에서 오물을 싸지르며 꽥꽥거리고 퉁퉁 튄다. 칼이 목을 따면 더욱 심하게 튀어오를 것이 분명하다.
밝고 빛나는 조잘거림이 들린다. 그는 속으로 한숨짓는다. 말을 알아들을 수 있으리란 희망은 포기했다. 시간 관념이 더욱 희박해진다. 어떻게 돌아가는지 조금도 모른다. 귀를 땅에 대고 뻗는다.

고양이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아니다. 더 큰 짐승의 것이다. 젊은 두 사내일 것이라 여겨진다. 무겁고 용의주도하다. 날카롭고 가벼운 것이 바람가르는 소리. 비명소리. 달아나는 소리. 책망하는 소리. 그가 머리를 땅에 처박고 벌벌 떤다. 바람이 잘릴 때마다 비명과 액체가 뿌려지는 소리가 들린다. 아무래도 한 사내가 주도하는 피의 잔치일 거란 직감이 밀려든다. 확실한 건 없다.

모든 소리가 잣아들고 침묵이 집을 휘덥는다. 간간히 들려오는 부엉이 소리. 책하는 소리. 응하는 소리. 자괴감에 빠진 소리. 바람이 쌩하고 갈라진다. 그를 노리고 있다. 그가 몸을 태아가 탯줄을 잡아당기는 것처럼 웅크린다.

푸대 자루가 벌려진다. 그가 고개를 빼꼼히 내민다. 조조의 냉혹한 얼굴이 그를 반긴다. 상대가 조조인지 그가 알 길은 물론 없었다.

살았다!

칼이 바람을 가른다.

살찐 돼지 머리가 허공을 난다.

@1997년 10월.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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