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모기

2015.06.06 13:3806.06

모기

 

암모기 A88의 일과는 세상이 어두워질 때 시작한다. 어제 얻은 영양분으로 잔뜩 낳은 알들이 장구벌레 형제들과 함께 떠다니는 웅덩이를 뒤로 하고, A88은 어둠 속으로 날아올랐다. 그녀는 날개를 앵앵거리며 어둠 속에서 냄새를 맡아 숙주를 찾았다. 이산화탄소의 야릇한 냄새를 따라가다 보니, 자외선을 받아들이는 시야에 무언가 툭 튀어나온 자그마한 것이 비친다. A88은 직감했다. 저 곳이 스팟이다.

A88은 곡예비행을 하며 주변의 분위기를 살폈다. 다행히 추출 작업 동안 자신을 방해할 위험 요소는 없는 듯하다. A88은 날개의 속도를 줄여 가볍게 그 위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자신의 빨대를, 숙주의 피부 위에 있는 불쌍한 희생양에게 꽂아넣었다. 힘을 주었다. 노란색 액체가 빨려 올라온다. 그녀의 아이들이 자라나게 해 줄, 다양한 영양분이 조합된 공급원이다. A88은 황홀경을 느끼며 더 이상 아무것도 빨리지 않을 때까지 그곳을 빨아댔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부리를 뽑았다. 아직 만족스럽지 않다. 그녀는 다른 부분을 찾아 다시 날아올랐다. 저 멀리 A57이 보인다. 언제나처럼, 부드러운 공기의 흐름을 역행하여 저 어둠 저편으로 나아가려 하고 있다. 부질없는 시도이다. 저 쪽에는 알을 낳을 수 있는 웅덩이도 없고 영양을 얻을 수 있는 숙주도 없다. A88은 그녀를 못 본 척 다른 숙주 위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또 한 번 추출을 시작했다.

 

, 시원하네요.”

앵앵거리는 모기 날갯짓 소리만이 자욱한 어둠 속에서, 군데군데 구멍이 난 마스크를 쓰고 편안해 보이는 의자에 누워 있는 누군가가 말했다. 방의 구석에 서 있던 다른 이가 대답했다.

저희 닥터모스퀴토의 의료 서비스에 만족하셨으면 좋겠네요.”

, 처음인데 만족스러워요. 좀 시끄럽긴 하지만요.”

그러자 방 안에 누워 있던 다른 손님이 끼어든다.

전 대여섯 번 째 받는 건데, 한 숨 주무시면 딱 좋아요. 하지만 잠결에 모기를 치지 않게 조심하시구요. 닥터 피쉬를 죽였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손해 배상을 해야 해요.”

구석에 서 있던 직원이 웃음을 지으며 대답한다.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이 모기들은 보통 모기가 아니라, 모낭충의 유전자를 섞어서 만들어 낸 모기입니다. 사람의 여드름을 빨아먹어, 그 양분으로 알을 낳죠. 뿐만 아니라 모기가 여드름을 빨면서 주입하는 타액에는 히루딘 대신 항생제가 들어 있어, 완전히 위생적인 치료를 가능하게 해 줍니다.”

, 좋아요. 다음에 또 오고 싶네요!”

손님은 기분이 좋은지 꺄르륵댔다.

 

A88은 이틀치 알을 낳기에 충분한 양의 피지를 빨아먹은 후 부드러운 공기의 흐름을 따라 웅덩이로 돌아왔다. 저 멀리 A57이 웅덩이로 다가오는 것이 보인다. 딴 짓을 하느라 시간을 허비한 탓에, 배가 그다지 불룩하지 않다. 저 정도 양분으로 어떻게 알을 낳으려는 거야? 그렇게 지켜보고 있는데 A57A88에게 와서는 더듬이를 통해 의사를 전해 왔다.

이 곳을 벗어나야 해.’

뭐하러? 여긴 양분도 많고 알을 낳을 웅덩이도 있어.’

여기서 먹는 양분은 제대로 된 양분이 아니야. 이걸로는 건강한 장구벌레를 부화시킬 수 없어.’

그럼 어떤 양분이 제대로 된 양분인데?’

.’

?’

그것은 처음 접하는 생소한 개념이었다.

그게 뭐야?’

우리가 매일 섭취하는 이 이상한 물질과는 차원이 다르게 영양분이 넘치고 맛있는 액체지. 이 곳을 벗어나, 저 바깥 세상에 나가면 그게 잔뜩 있대. 그냥 본능에 따라 퍼마시면 돼.’

바깥 세상?’

그래. 빛을 따라가면 닿을 수 있는 곳이야.’

누가?’

A57은 그것을  WT10이라는 라벨이 붙어 있는 옆 칸의 암모기에게서 들었다고 했다. 그녀가 이 곳으로 오기 전에, WT10A57의 옆 칸에 있었다. 날이 밝아 왔다. 둘은 웅덩이 옆의 그늘로 몸을 숨기고 휴식을 취했다.

저 밖에서 피를 빠는 게 우리의 본래 모습이야.’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A88에게는 본래라는 개념도 생소한 것이었다. 흥미가 떨어진 A88A57과의 대화를 멈추었다.

 

다음 날, 차례가 된 동료들이 영양분을 사냥하러 다녀올 동안 A88은 알을 낳으며 웅덩이에 남았다. 어제 충분한 양분을 섭취하지 못한 A57도 어둠을 향해 날아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웅덩이에서 꿈틀거리는 장구벌레들과 방금 낳은 알들을 돌아보던 A88은 문득 어제의 대화를 기억했다. 이 아이들이 건강하지 않다고? 대체 그 라는 건 뭐지? 그게 뭐길래 더 건강한 아이들을 낳을 수 있게 해 주는 건가?

건강한 자손을 남기는 것은 모든 생명체들의 최우선 과제였다. A88A57이 돌아오면 다시 한 번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날 저녁 모기장을 확인하던 직원이 말했다.

? 한 마리가 없어요.”

그 말에 관리자가 수심 깊은 얼굴로 다가온다.

그래? 손님한테 맞아서 어딘가 죽어 있나 보다.”

어떡하죠?”

뭘 어떡해. 손님이 모기를 죽이는 장면을 우리가 봤으면 모르겠는데, 이렇게 실종됐으면 손해배상 청구도 못해. 그냥 손실 처리해야지.”

그러더니 관리자는 혼자서 혀를 찼다.

에휴. 또 한소리 듣겠구만.”

직원은 모기장의 데이터베이스를 확인했다. 그는 피지 흡입량 순으로 모기 리스트를 정렬시켰고, 사라진 녀석이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 확인했다.

“A57… A57… , 어차피 별로 많이 먹지도 못하던 놈이네요.”

그래? 그나마 다행이네.”

일단 시체가 있나 볼게요.”

그래. 혹시라도 모기의 유전정보가 회사 밖으로 새어나가면 골치아파. 잘 찾아봐.”

관리자가 잔뜩 찌푸린 표정으로 말하자, 직원은 조명을 좀 더 밝게 밝히고 방 안으로 들어서서 구석구석 살피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직원은 투덜거렸다.

 

A88은 귀가하는 암모기들의 행렬 어디에서도 A57을 찾을 수 없었다. A88은 궁금했다. 추출하던 중 불의의 사고라도 당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면, 그토록 소원하던 대로 바깥 세상으로 나가는 데 성공했을까? 그리고 그 라는 것을 잔뜩 먹어서, 이 곳의 어떤 암모기들보다도 건강한 알들을 낳고 있을까?

 

 

며칠 후 여느 때처럼 영양분을 위해 비행하던 A88은 문득 한편에서 날아오는 갑작스러운 빛을 느꼈다. 강렬한 세기의 자외선이었다. 그녀가 빛을 느끼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람이 불어와 A88은 뒤쪽으로 밀려났다. 빛을 따라가면 바깥 세상에 닿을 수 있다던 A57의 말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저 쪽은 A57이 항상 나아가려 했던 그 방향이다.

그녀는 고민했다. 인간의 기준으로는 찰나에 불과하지만, 그보다 훨씬 작은 신경계를 가진 모기 A88에게는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끊임 없이 비추어오는 빛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그녀의 미미한 뇌는 신중히 생각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몸 속에 있는 알들과 정자들을 이용해 가능한 한 최고로 건강한 후손을 낳아야 한다. 그래서, 그녀는 겹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무한한 빛을 향해 몸을 내던졌다. 그러자 더 많은 빛이 그녀를 맞이했다. 겹눈 몇 개가 멀 것 같았지만 나아가는 걸 멈추지 않았다.

 

A57이 찬미하던 저 바깥 세계에는, A88이 지금까지 겪은 낮의 조명보다 훨씬 강한 빛이 가득했다. 그것은 태양빛이었다. 전구빛만 보고 인공적인 밤낮을 구분하던 A88로서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먼 거리를 여행해 온 빛이 작고 연약한 A88을 훤히 비추고 있었다. A88은 본능적으로 나무 아래 그늘로 숨어들었다.

시차적응이 잘 되지 않았다. 그 때 A88 은 생전 처음 보는 이상하고 커다란 생물체가 다가오는 것을 감지했다. 그녀는 다시 날아올라 좀 더 높은 곳으로 옮겼다. 평소보다 너무 먼 거리를 날아다닌 날개가 피로감으로 부들부들 떨린다.

생체 시계가 왜 낮이 끝나지 않느냐며 계속 오류를 보고했다. 하지만 이 생소한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일단 쉬고 활동을 시작하는 것이 오히려 운 좋은 일이다. 그녀는 날개를 식히며 활동 가능한 시간이 오기를, 다시 어두워지기를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이윽고 세상이 어둠 속에 잠들었다. A88은 충분한 휴식 덕분에 에너지가 넘치는 날개를 진동시키며 날아올랐다.

세상은 넓었다. 한번 날아올라서는 도저히 그 끝에 닿을 수 없을 정도로 넓었기에 A88은 깜짝 놀랐다. 그녀는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주변을 탐색했지만, 이 세계는 너무 넓어서 그녀의 작은 뇌에 담을 수 없었다.

그 때, 어떤 강렬한 느낌의 향기가 A88의 후각을 자극했다. A88은 홀린듯 그것을 따라갔다. 그리고 잠시 후 그 발원지인 살구색 피부 위에 내려앉았다. 술에 취해 길바닥에 드러누운 한 행인의 팔뚝이었다. 피부 아래서 탐스러운 혈관이 지나가는 것이 그녀의 자외선 겹눈에 포착된다.

여지껏 그녀가 부리를 박아 온 부위는 죄다 다른 부분보다 좀 더 볼록 튀어나온 모양을 하고 있었다. 지금 보이는 이 혈관은 그것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기에 이질감이 느껴졌다. A88은 정신을 가다듬었다. 이 곳은 바깥 세계다. 지금까지의 경험은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본능에 의지하여, 다리를 움직여서 자세를 잡고는 부리를 꼿꼿이 세웠다. 그리고 그것을 그 말랑한 표면 위에 박아넣었다.

 

이전에 먹던 피지와는 그 맛이 차원이 다른, 신선한 무언가가 부리를 따라 쭉쭉 빨려들어왔다. 이것이 바로, A57이 말한 인 것이 분명했다.

A88은 더 이상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저 힘이 다할 때까지 빨아 올릴 뿐이었다. ‘가 주둥이 안을 적시고, 배에 있는 주머니를 채웠다. 만족스러웠다. 이 액체는 분명 전보다 훨씬 건강한 아이들을 낳게 해 줄 것이 틀림없다. A88은 감전된 것 같은 짜릿함을 느꼈다. 이 행위 자체야말로, 그녀의 진정한 삶의 이유였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


모기 A88은 자유로웠다.

댓글 0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2137 단편 매스게임 니그라토 2015.05.21 0
2136 단편 미술관 C전시실 장피엘 2015.05.16 0
2135 단편 청새치 그믐여울 2015.05.12 0
2134 단편 청새치 그믐여울 2015.05.12 0
2133 단편 아인슈타인의 주사위2 알렉산더 2015.05.10 0
2132 단편 옆집 사람은 담배를 핍니다 사틱 2015.05.06 0
2131 단편 괴우주야사 외전 : 의리의 종족 니그라토 2015.05.03 0
2130 단편 빈 문서 1 423 2015.05.02 0
2129 단편 몽식맥夢食貘 레몬 2015.05.01 0
2128 단편 [심사제외]보편적 열정 페이 니그라토 2015.04.29 0
2127 단편 연못 꽃양배추 2015.04.28 0
2126 단편 [심사제외]우파의 나라 니그라토 2015.04.23 0
2125 단편 가위 별들의대양 2015.04.15 0
2124 단편 빛이 올거야 이늬 2015.04.14 0
2123 단편 아인슈타인의 주사위 알렉산더 2015.04.13 0
2122 단편 청새치 그믐여울 2015.04.12 0
2121 단편 [심사제외] 빈칸(수정) 광석 2015.04.12 0
2120 단편 마지막 바빌론의 탑 알렉산더 2015.04.11 0
2119 단편 z시대의 멘토링 고르고르 2015.04.09 0
2118 단편 z시대의 멘토링 고르고르 2015.04.09 0
Prev 1 ... 36 37 38 39 40 41 42 43 44 45 ... 147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