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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선천성 불면증

2012.11.29 23:1911.29

05. 선천성 불면증

사내는 33년 6개월 21일 17시간 20여분동안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코끼리 아홉마리를 재울만한 양이라고 돌팔이의사가 장담하며 놔준 수면제도 효과가 없었다.

어둡고 적막한 방 안, 시간은 물먹은 솜처럼 정체되어 있다. 그는 침대맡을 더듬어 담배를 한 가치 꺼내물었다.

붉고 노란 담뱃불만으로는 방을 밝히기에 역부족이다. 커튼을 열자 달빛이 배어든다. 높은 밀도로 굳어있던 어둠을, 물컹거리는 달빛이 밀어내기 시작했다. 사내는 그 빛을 조명삼아 휘적휘적 걸었나갔더랬다.

달빛에 비친 사물들의 모서리는 비정상적일 정도로 흐릿했다. 사내는 거실 어딘가에서 깨진 병조각에 손가락을 베이고 말았다. 피가 방울져 배어나오더니, 금새 터진 수도관처럼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는 반응이 없었다. 긴긴 불면이 통각조차 앗아가버린 모양이다. 피가 사내 가는 길을 따라 축축히 흘러내렸다.

인적 없는 공원 놀이터. 사내는 그네에 앉는다. 33년여 간 쌓인 잠의 무게에 그네가 비명을 질러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사내 앞에 고양이가 어슬렁거리며 나타났다. 무성한 나무들 사이로 스민 달빛은 고양이를 파랗게도, 까맣게도 보이게 한다. 검푸른 가죽 위로는 알 수 없는 문양이 귀부터 꼬리끝까지 물결치고 있었다. 그것은 왠지 그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어쩐지 그 광경은 익숙한 데자뷰를 느끼게 했고, 또 한편으로는 그와는 아무 상관없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무심함도 들었지만, 자정의 달빛과, 또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받고 있는 고양이와, 그 실루엣이 주는 묵직한 존재감을, 그는 서서히 못견뎌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고양이가 그에게 물었다.

졸리지 않아?

졸리지..않느냐고? 사내는 중얼거렸다.

고양이의 질문은 사내 안으로 기어들어와, 뱃속에서 나비처럼 날아다녔고, 그것은 거대한 방죽을 찌르는 송곳 같기도 했으며, 이내 그의 혈관 곳곳으로 퍼져나가 꽃처럼 피어났던 것인데, 고양이는 가타부타 말도 없이 그저 그를 바라볼 뿐이었고, 그는 반쪽이 된 달을 올려다봤고,
그러던 순간에, 33년 6개월 21일 17시간 40여분 가량 눌러두었던 수면이 기지개를 펴듯 꿈틀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사내는 거대한 잠이 되었다.



사내는 도시를 걷는다.

그의 손길이 머문 전광판이 발광하기를 멈추었다. 눈을 마주친 행인들은 그 자리에서 쓰러져 속절없이 잠에 빠져들었다. 왁자지껄한 광장을 손짓 한 번으로 잠재운 그는, 천천히, 무수한 잠들의 사이를 걸었다.

도시란 대저 모순된 인간성들이 극한에 가까이 응축된 곳으로서, 그 마찰을 이겨내지 못하고 알 수 없는 일들과 납득할 수 없는 인간들이 종종 발생하는 곳이다.

사만 칠천 이백 서른 두번째 울고있는 노파도 그중 하나로, 노파의 눈물이 흘러간 자리는 염전이 되었다. 사내는 1.2L/s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 노파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속삭였다.

그대, 잠들지어다.

그녀가 고개를 떨구자 소금 결정이 비늘처럼 흩나렸다.

소녀는, 382년 하고도 4개월째 초경을 지속하고 있었다.
적요한 조우. 사내를 바라본 그녀는 고개를 몇 번인가 끄덕였고, 잠들었다. 사내가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는다. 소녀는 잠든채로 그의 옷깃을 잡고 그를 좇기 시작했다.



이제 이 도시엔 사내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깨어 있는 이 없다. 사내는 문득 앞으로도 영원히 잠들지 않을 것임을 깨닫는다. 그는 이미 잠의 기표이자, 기의였으므로.

사내는 오늘도 몇몇 몽유병자와 잠든 도시를 배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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