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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용에게 가는 길

2012.11.11 16:5811.11

성지 마니산은 조용한 곳이지만 겨울이 오면 많은 순례자들로 붐빈다. 약 300년 전, 마니산 기슭에 살았다고 전해지는 성자 아그리파와 수호룡 바라문행의 우정을 기리기 위해 찾아오는 이들이다. 성자와 용의 우정은 제국이 성립되기도 전의 일이지만, 성 아그리파가 제국의 국교인 용교의 시조이니만큼 제국에서도 성 아그리파가 바라문행을 만나기 위해 홀로 마니산 정상에 오른 2월 27일을 성일聖日로 삼아 기리고 있다. 그맘때쯤 되면 마니산에는 눈이 사람 허리까지 쌓여서 웬만큼 산타기에 익숙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오르기 힘들지만, 연중 가장 많은 순례자들이 찾아오는 시기이기도 하다. 용교에서 규정하는 신자의 7대 의무 중 하나가 성일에 마니산을 오르는 것이다 보니 혈기왕성한 젊은 수사修士들이나 독실한 신자들이 굳이 한겨울에 마니산을 찾는다. 산세가 험한 탓에 그 중 일부는 돌아오지 못하기도 하지만 성지를 찾는 순례자들의 발길은 멎을 줄을 모른다.
제국력 173년의 2월도 예외가 아니었다.

해가 지고 있었다. 수사 알렌은 걸음을 빨리했다. 해가 떨어지면 더욱 추워질 터였다. 두꺼운 겉옷을 입고 있긴 했지만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성지의 겨울은 그의 생각보다 훨씬 더 혹독했다. 아직 성산聖山에는 오르지도 못했는데, 하고 그는 실소를 머금었다. 자조하는 그의 시선 끝에 성지 마니산이 걸려 있었다. 정상은 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그 험난한 산세는 순례자들의 의지를 시험하기에 충분했다. 저 모습을 보고 포기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겠지, 하고 수사 알렌은 생각했다. 물론 그런 사람들과 같은 부류가 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수도 뷔젠에서 출발한 지 백 하고도 칠 일째. 말이나 다른 탈것은 일절 이용하지 않고 오로지 도보로만 이어온 순례 끝에 그는 성지에 도착했다. 아무리 젊고 의욕이 넘치는 그였지만 힘든 여정이었다. 용교의 순례 규칙은 굉장히 세세하지만, 중간에 쉬어가면 안 된다는 규정은 없었기에 그는 근처 마을에서 며칠 쉬면서 여독을 풀 생각이었다. 마침 옛 스승인 제레미아 신부가 이 근처에 살고 있다는 소식을, 그는 들어 알고 있었다. 아니, 그는 제레미아 신부가 성지 인근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성지를 순례할 계획을 짰는지도 모른다. 그만큼 신부와 알렌의 관계는 특별했다.
스승, 아니 은사라고 해야 할까. 고아로 수도원에서 자라고 신학교를 졸업한 그에게는 종교적인 스승이 수십 명은 있었다. 하지만 단순한 지식의 전수자가 아닌 진정한 의미의 스승은 제레미아 뿐이라고 생각한다. 수도원 시절, 알렌이 아직 어린아이였을 때부터 신부는 그를 따뜻하게 보살펴 주었다. 수도원에서 태어난 그가 성직에 들어서는 것은 어찌 보면 예정된 일이었지만, 제레미아 신부의 영향도 적지 않았다. 무엇보다 알렌이 세례를 받기도 전인 어린 나이에 스스로 자청해서 수사가 된 것은 팔 할이 제레미아 신부 때문이었다. 자상하고 현명한 그를 보고 어린 알렌은 성직의 꿈을 키웠다. 신부도 총명한 알렌을 기특하게 여기고 아버지처럼 대해 주었다. 신부가 사제관으로 발령받아 수도원을 떠나간 뒤에도 둘 사이의 교제는 계속되었다. 한 달에 한 번, 알렌은 신부에게 편지를 썼고 신부는 답장을 거르는 법이 없었다. 대게 알렌의 것보다 훨씬 긴 편지였다. 사제관 신부들의 직무가 매우 과중한 것을 생각해 볼 때, 신부도 알렌과의 인연을 소중히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둘의 교제는 알렌이 정식 수사가 된 지 일 년째 되는 해 갑자기 끊어졌다. 신부 쪽에서 일방적으로 서신 왕래를 끊은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신부의 태도 변화는 비록 정식 수사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아직 어린 알렌의 마음에 큰 상처가 되었다. 참다못한 알렌이 직접 수도로 신부를 만나러 가려고 했을 때쯤, 제레미아 신부는 교단으로부터 파문되었다. 사악한 이단의 죄. 그것이 교단이 공식적으로 밝힌 신부의 죄명이었다. 신부가 그들의 신을 모욕하는 죄를 저질렀다고. 자세한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다. 너무도 끔찍한 이단의 행위이기 때문에 공개할 수 없다고 했다. 파문은 사법적 제재 권한이 없는 교단이 내릴 수 있는 최고의 형벌이었다. 파문당한 사람은 비록 제국 법에 의한 처벌은 받지 않지만, 용교 신자의 자격이 박탈되고 수호룡에 의한 어떤 보호도 받지 못하며 죽으면 그 영혼은 악룡에게 삼켜진다고 믿어진다. 알렌은 직접 신부를 만나 자초지종을 들어보고 싶었지만 교단의 규율은 파문당한 자와 신자의 만남조차 금지했다. 몰래 신부를 만난 것이 알려지면 이제 막 서품을 받은 알렌에게 큰 오점이 될 터였다. 결국 알렌은 신부를 포기했다. 그리고 십 년이 지났다.

이제 알렌은 작은 규칙 위반에 쩔쩔매는 초임 수사가 아니었고, 교단도 제레미아 신부에게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교단 사람의 눈에만 띄지 않는다면, 지금 신부를 만난다고 해도 큰 문제가 되지는 않으리라. 알렌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도 수도원을 떠나려면 구실이 있어야 했다. 제레미아 신부를 만나러 간다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의심받지 않고 마니산 일대를 여행할 만한 구실로 성지순례보다 더 좋은 것은 떠올릴 수 없었다. 용교 신자, 하물며 수사에게 그것은 당연한 의무이니까. 의심받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다. 어쩌면 신부도 알렌이 자기를 찾아와 주길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를 만나러 오진 않더라도 신자라면 한 번은 성지에 오기 마련이니까. 성지에 들르면 자기 생각이 날 거라고 생각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게 아니라면 파문당한 신부가 굳이 아무 연고도 없는 성지에 살 이유가 없다. 자기 마음대로의 추론이었지만 알렌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옛 은사인 제레미아 신부를 만나고 싶은 마음과, 언젠가는 해야 할 성지순례를 한꺼번에 해치울 생각으로 이곳 마니산까지 왔다. 그리고 이제 신부가 사는 마을까지는 한 시간도 남지 않았다. 해 지기 전까지는 도착할 수 있겠지, 하고 알렌은 생각했다. 작은 언덕 위에 오르니 신부가 사는 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십오 년 만의 재회였다. 그렇다고 해도 신부는 너무 늙어 있었다. 알렌이 마지막으로 신부를 봤을 때, 신부의 나이는 마흔을 넘지 않았다. 지금은 예순은 족히 넘어 보였다. 수도원 시절의 제레미아 신부는 항상 수염을 단정하게 깎고 깔끔한 사제복 차림이었다. 밤늦게까지 경전을 읽고 새벽 닭 소리에 일어나 예배를 드리면서도 두 눈에는 피곤한 기색 하나 없을 정도로 건강했다. 지금의 제레미아 신부는 흰색이 드문드문 섞인 수염을 아무렇게나 기르고 농부들이나 입을 법한 낡은 겉옷을 입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제레미아 신부가 사제복을 입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하지만, 기억 속의 제레미아 신부는 항상 사제복 차림이었기에 알렌은 조금 당황했다. 마음고생이 심하셨겠지, 하고 알렌은 생각했다. 그렇게 따지면 알렌도 많이 변했다. 신부도 알렌의 모습에서 열심히 추억 속의 소년을 찾고 있겠지.
“하지만 신부님,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던가요. 이런 연고도 없는 벽지에서.”
신부가 권한 차茶를 마시면서 알렌이 물었다. 서리 맞은 차는 마니산의 명물이었다. 알렌은 차를 마셔본 적이 없었지만, 은은한 향과 온기가 꽤 마음에 들었다. 신부는 차 농사를 짓는 듯했다. 생계를 위한 건지, 단순한 소일거리 일지. 아마 후자일 거라고 알렌은 생각했다.
“연고야 교단에서 나를 파문한 순간에 전부 끊어졌지. 그렇게 된 마당에 사는 곳이 어디든 무슨 상관이 있겠나? 그것보다 나는 자네가 걱정이야 알렌. 수사가 파문당한 인간을 만난 것을 알면 교단에서 가만있지 않을 텐데.”
신부는 재회의 기쁨을 표현하기보다는 걱정을 먼저 했다. 자기감정보다 남을 더 위하는 그 성격은 변함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알렌은 내심 서운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성지 순례는 수사로서 언젠가 한 번은 해야 할 일이니까요. 근처에 사시는 걸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순례자들이 많은 계절이네. 혹시라도 나나 자네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다면 문제가 될지도 몰라. 이렇게 찾아와 준 건 고맙지만, 나 때문에 신세를 망쳐서야 자네에게 면목이 없네.”
“많이 뵙고 싶었으니까요. 그리고 걱정도 많이 했습니다. 파문은, 선생님. 죄송하지만 어째서 그런 일이 생긴 건가요. 억울한 누명이라도 쓰신 게 아닙니까?”
알렌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원래는 이렇게 직접적으로 물을 생각은 아니었다. 그저 얘기를 나누는 도중 자연스럽게 알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내심 신부를 믿고 있었다. 파문당하긴 했지만 신앙은 유지하고 있을 거라고. 뭔가 오해를 산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일개 지방 수사인 그와는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실제로 교단의 상층부에서는 암투와 모략도 드문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신부와 이야기하면서 알렌에 대한 신부의 애정에는 변함이 없다 해도, 신부가 교단과 나아가 용교에 대해 그리 좋은 인식을 갖고 있지 않음이 분명해졌다. 신부의 집에는 경전이 한 권도 없었다. 그 밖에도 신앙생활에 필요한 물건은 찾아볼 수 없었다. 방 한구석에 작게나마 서가가 있는 걸로 봐서, 신부의 독서열은 여전한 듯했지만 종교에 관한 서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교단이 주장하는 것처럼 이단의 죄로써 파문당했다면 이단의 서적이라도 있어야 할 텐데 신부의 서가에는 그것조차 갖춰져 있지 않았다.

제레미아 신부는 신앙을 완전히 잃어버린 것인가? 알렌은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그토록 신실했던, 자신을 신앙의 길로 이끌어준 아버지와도 같던 신부가 신심을 버리다니. 있을 수 없다. 이단의 죄에 빠졌다면 차라리 괜찮다. 분명히 다시 바른길로 돌아올 수 있을 테니까. 그는 신부를 믿고 있었다. 하지만 아예 신앙에 흥미를 잃어버렸다면, 교단의 지나친 처사에 질려 믿음이란 것 자체에 무관심해진 것이라면 그로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 아니, 선후가 바뀌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지금까지 알렌은 신부의 신앙을 의심하지 않았지만 만약 제레미아 신부가 신심을 상실한 것이 먼저이고 그 결과로써 교단에서 파문당한 것이라면?
알렌은 그렇게 믿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이렇게 물을 수밖에 없다. 어째서 당신처럼 신앙심 깊던 인간이 파문자가 되어 버렸느냐고. 알렌은 해명을 바랐다. 상층부의 암투라고, 모함을 당했다고 말해 주길 바랐다. 그게 아니라면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길 바랐다. 파문은 신부에게도 괴로운 일이니 떠올리게 하지 말라고, 화를 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신부는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파문은 별로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네. 교단에서 날 파문하지 않았다면 제 발로 떠났을 테니까 별 미련은 없네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주위 사람들에게 너무 폐를 많이 끼쳤군. 글쎄, 자네한텐 미안한 마음뿐이네.”
“그럼 그들의 말이 사실입니까? 신부님이 이단에 빠지셨다는 게?”
“교단의 시선에서 보면 이단일 지도 모르지. 그렇다고 다른 교리를 따른다는 건 아니야. 그냥 불쾌한 사실을 알게 되어서, 교단에 정이 떨어졌다고나 할까.”
자네한테는 굳이 말하고 싶지 않았는데, 하고 신부는 하하 웃었다.
“불쾌한 사실이라니요? 교단의 비리라도 목격하신 겁니까? 아니면 뭔가…….”
“자네는 알 필요가 없는 얘기야. 우리 이제 화제를 바꾸는 게 어떤가? 자네 표정을 보아하니 이러다가 나를 치기라도 할 것 같군.”
제레미아 신부는 장난이라도 치듯이 그렇게 말했다. 알렌은 순간 자기가 너무 흥분하지 않았나 생각했지만 이내 신부가 그를 놀린 것임을 깨달았다.
“신부님!”
“하하, 미안하네. 하지만 이제 정말 그만 하지. 이런 얘기를 한다고 그들이 파문을 철회하진 않을 테니.”
“그래도 저는 알고 싶습니다. 저에게 신앙을 가르쳐 주신 건 신부님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적어도 납득할 만한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신부님이 왜 신앙을 버리셨는지요.”
흐음, 하고 제레미아 신부, 아니 제레미아 전 신부는 고민하는 듯했다. 그러나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자네의 마음은 알겠네. 그건 그렇고 자네는 원래 성지 순례를 위해 이곳 마니산에 온 게 아닌가. 나를 추궁하기 위한 것도 있겠지만 본 목적은 어디까지나 성지 순례일 테지. 산에는 언제 오를 생각인가?”
“그건 이것과 상관없는 이야깁니다. 지금 제가 알고 싶은 건…….”
“상관이 있네. 자네가 물은 그 불쾌한 사실이, 마니산에 있으니까.”
“마니산에 있다고요?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할 수가 없군요, 신부님.”
알렌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산에 올라서 해주겠네. 여기서 말해봤자 자네는 믿지 않을 거야. 믿는다고 해도 뭐 불쾌하고 허무할 뿐인 이야기이지만.”
자네에게 이런 이야기는 들려주고 싶지 않은 게 내 본심일세, 하고 제레미아 전 신부는 말했다.

성지 마니산에서는 매년 반드시 사망자가 나온다는 말이 있다. 그 정도로 산세가 험하고 오르기 힘들다는 뜻이지만, 대륙 전체를 둘러보면 마니산보다 오르기 힘든 산은 적지 않다. 높기로는 서쪽의 천운봉보다 못하고 험하기로는 제국의 국경 역할을 하는 이빨 산맥에 훨씬 못 미친다. 눈이 많이 오는 편이긴 하지만 적설량도 대륙 북부의 고원 지대에 비하면 평범한 수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니산이 악명을 떨치는 이유는 하필이면 눈이 쌓이길 기다려 산을 오르는 순례자들 때문이다. 그들은 보다 뜻있는 순례를 하기 위해서 성일, 2월 27일까지 기다렸다 산을 오르곤 하지만 제레미아 전 신부는 그런 것은 상관하지 않았다.
“꼭 이렇게 서두르셔야 하나요. 일주일만 기다리면 성일이라고요.”
알렌이었다. 툴툴대는 목소리는 불만을 하나도 숨기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적극적으로 불만을 표출하고 있었다.
“자네는 내 이야기를 빨리 듣고 싶어 하는 줄로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나 보군. 하루 이틀이면 오를 산을 오르는데 일주일이나 지체하려고 하다니 말이야.”
“하지만 모두 다 그렇게 합니다. 보셨으니까 아시겠지만 마을에서 순례자 수천 명이 성일 만 기다리고 있다고요. 유종의 미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지금 가야지. 수천 명이 한꺼번에 이 눈 덮인 산을 오르다니, 상상만 해도 끔찍하군. 매년 사망자가 한두 명밖에 안 나오는 게 이상할 정도야. 자네는 순례가 처음이라 모르겠지만 나는 파문당하기 전에 열 번 이상의 순례를 했네. 성일 당일에도 마니산에 오른 적이 있지. 길도 없는 눈길을 수천 명이 한꺼번에 오르는 게 어떤 기분인지 아나? 한 명이 넘어지면 수십 명이 같이 넘어지고 앞뒤에서 밀어대는 사람들 때문에 정신은 하나도 없고, 거기에 또 냄새는 얼마나 나는지. 내가 사제가 아니었다면 교단의 순례 지침 중엔 몸을 씻으면 안 된다는 규정이라도 있는 줄 알았을 거야. 유일한 장점이라면 하도 많은 사람들이 부대끼니까 춥지는 않다는 거지.”
알렌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렇게 말씀하시지 마세요. 성스러운 순례를 모독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순례에 성스러운 의미라는 건 전혀 없다고. 애초에 이 순례라는 것 자체가…….”
“성자 아그리파가 수호룡 바라문행을 만나기 위해 홀로 산을 오른 것이 시초죠. 그 정도도 모를까봐 그러세요?”
제레미아 전 신부는 잠시 알렌을 쳐다보더니 말없이 앞서나갔다. 눈이 허리까지 쌓여 있는 산길을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쓱쓱 올랐다. 길도 없는 산길을 망설임 없이 오르는 솜씨가 한두 번 올라 본 것은 아닌 듯했다. 알렌은 그 뒷모습을 못마땅하다는 듯이 쳐다보다가 전 신부의 모습이 사라지기 전에야 황급히 따라 올라갔다. 제레미아 전 신부와 수사 알렌, 둘을 제외하면 산에 인적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현실적인 이득을 따지는 제레미아 전 신부를 제외하면 누구도 오늘 산에 오를 생각은 하지 않은 게 분명하다. 알렌은 첫 순례를 성일에 마치고 싶었지만 그를 설득할 도리가 없었다.

한참을 앞서 가던 제레미아 전 신부는 산 중턱에 이르러서야 알렌을 기다렸다. 알렌은 간신히 신부를 따라잡긴 했지만 기진맥진해 있었다.
“아직 정정하시네요. 저는 힘들어 죽을 것 같은데.”
원망이 담긴 목소리였다. 알렌은 어제 그가 많이 늙었다고 생각했지만 그 생각을 고쳐먹지 않을 수 없었다. 체력만은 수도원 시절보다 더 좋아진 것 같다. 농사일이 전 신부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자네 말대로 성일에 산에 올랐다면 속도는 반도 안 나오면서 이 두 배는 더 힘들었을걸. 뭐 어쨌든 많이 왔으니 간단하게 요기라도 하고 가지. 마침 점심때이기도 하니까 말이야.”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요, 신부님. 점심 때문에 절 기다리신 건 아니죠?”
알렌은 등의 짐을 가리키면서 물었다. 제레미아 전 신부는 아무 짐도 지고 있지 않은 반면 알렌의 등에는 무거워 보이는 짐이 지워져 있었다. 점심이 그 안에 들어 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하하, 그럴 리가 있겠나. 그냥 자네가 하도 지쳐 보여서 쉬어갈 겸 식사라도 하자고 한 것  뿐이야.”
제레미아 전 신부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지만 알렌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사제의 열한 번째 의무, 거짓은 말하지도 행하지도 말라. 순례 규정 제173조, 순례 기간 동안 순례자는 몸짓, 표정, 말투, 그 마음에 이르기까지 어는 것 하나라도 꾸밈이나 솔직하지 못한 것이 있어서는 안 된다, 알고 계시죠?”
“물론 알고 있지. 하지만 자네와 달리 나는 사제도 아니고 순례를 하는 것도 아니야. 그냥 산을 오르고 있을 뿐이지.”
전 신부는 이제 노골적으로 알렌을 놀리고 있었다. 신부님이 원래 이렇게 능글맞은 성격이었나, 하고 알렌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 보면 수도원 시절에도 아이들의 유치한 장난을 잘 받아주기는 했지만, 그건 성직자로서 의무를 다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신부님이 말장난을 좋아하시는 줄은 몰랐네요.”
“몰랐다니 의외군. 가끔 장난이 지나쳐서 자네를 울린 기억도 있는데 말이야.”
그것도 아이들과 놀아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알렌이 제레미아 전 신부를 따르게 된 이유 중에 하나가 다른 신부들처럼 엄격하지 않아서이기도 하지만…….
신부가 변한 것일까? 아니면 내가 그를 오해하고 있었던 걸까? 어느 쪽이던 제레미아는 알렌이 기억하는 모습과는 달랐다. 그 솔직한 모습이 싫지는 않았으나 자신이 생각하던 신부의 모습은 아니었기에 알렌은 내심 불안했다.

식사라고 해 봐야 간단했다. 말린 빵과 물, 그리고 차가 전부였다. 알렌은 순례 중이라 기름진 음식을 먹을 수 없는 몸이었고 제레미아 전 신부 역시 검소한 식성만은 여전한 듯했다.
“그러고 보니 수도원 시절에는 식사 전에 꼭 훈화 시간이 있었는데 말이야. 자네 기억하나?”
딱딱한 빵을 차에 불리면서 전 신부가 말했다.
“물론이죠. 배는 고프고 음식이 눈앞에 있는데 가만히 설교만 듣고 있자니 죽을 맛 이었죠. 그땐 왜 그렇게 먹성이 좋았는지. 기껏해야 일이 분일 텐데 그 짧은 시간을 못 기다리겠더라고요.”
“미안하네. 재미없는 설교 쟁이라서.”
“아뇨, 그래도 신부님은 나은 편이었죠. 버나드 신부님 기억하세요? 지금은 다른 곳에서 수도원장으로 계시는데. 얘길 시작하면 기본 삼십분 이었죠. 그나마도 항상 같은 내용이고. 하하 ,이런 말 하면 안 되는데. 그에 비하면 신부님은 참 재미있었어요. 그 뭐냐, 신화? 전설? 그런 것도 자주 얘기해 주시고. 일부러 들으러 오는 아이들도 있었으니까요.”
“그야 그땐 그게 내 취미였거든. 지금도 완전히 끊은 건 아니네만. 민간 설화 수집 말이야.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꽤나 많이 모았었지. 애들 마음에 들도록 조금씩 각색하기도 했고. 언젠가는 책으로 낼 생각도 있었네. 당시 수도원장은 별로 안 좋아했지만 말이야. 그럴 시간에 경전 공부나 더 하라면서.”
“그래도 결국엔 꽤 인정받으셨잖아요? 사제관으로 불려 가신 것도 그 때문이었다고 들었는데요.”
“뭐 비슷한 이유였지. 당시의 교단은 출판 사업에 열심이었거든. 문맹 퇴치 운동의 일환이었네. 경전을 읽으려면 문자를 알아야 하니까. 그래도 애들한테 다짜고짜 경전부터 읽힐 수는 없고 해서 시작한 게 민간 설화 수집이었지.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풀이한 경전도 냈고 말이야. 막상 내고 보니 애들보다는 어른들이 더 많이 읽긴 했네만.”
전 신부는 충분히 불었다고 생각했는지 빵을 크게 베어 물었다. 우물우물, 게걸스럽게 빵을 씹어 삼키는 모습은 성직자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알렌은 이제 그것이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사제복에 가려진 제레미아 신부는 이런 사람이었다. 소탈하고, 어딘가 엉뚱했다. 예전의 위엄은 없었지만 그것이 그의 본성에 더 가까운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를 성직자의 모범이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지만 어쩌면 그는 사제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어린 알렌이 제레미아 전 신부에게 끌렸던 이유는 성직자로서의 품행보다는 단순히 그의 인간성 때문일지도.
“사제관에 발령받은 뒤에는 완전히 설화 수집과 각색에만 매진했네. 그게 당시 내 일이었거든. 하루 세 번의 미사 참석 말고 다른 의무는 없었어. 완전히 연구에만 몰두할 수 있었지. 돌볼 아이도 집전할 미사도 없었지만 내 평생 그때가 가장 바쁜 때가 아니었나 생각하네. 분위기란 게 무섭더군. 주로 경전 연구이긴 했지만 거기 사람들은 죽어라 자기 일에만 매달리거든. 시골 수도원 신부들과는 완전히 다르지. 어떻게든 실적을 내야 하는 상황이었어. 안 그러면 매달 있는 총회에서 할 말이 없거든. 내 분야는 절대 주류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소홀히 할 수는 없었지. 솔직히 출세 욕심도 있었어. 시골 수도원에 있으면 잘해봐야 수도원장 정도 달겠지만 사제관은 교단의 핵심 기관이니까. 거기서 잘만 하면 법왕청이나 제국 수도회 같은 곳에 한자리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지. 뭐 결국 헛물 켠 거였지만 말이야.”
그건 좀 아쉽단 말이지, 하고 전 신부는 너스레를 떨었다.
“별로 아쉬워하는 표정은 아니신데요. 그래서요?”
알렌이 말했다. 장난스럽게 말하고 있지만 제레미아 전 신부가 진지하다는 것을 모를 그가 아니었다. 제레미아 전 신부는 지금 어젯밤 알렌의 질문에 답하고 있었다. 자신이 파문당하게 된 경위를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뭐, 밤낮을 정신없이 일로 보냈지. 수도원 시절에 취미로 수집한 설화, 전설을 아이들이 읽을 만한 동화로 각색했어. 알지 모르겠지만 이 설화라는 게 생각보다 잔인하고 야하단 말이야. 그런 부분은 적당히 잘라내고 빈틈을 메워서 이야기가 되도록 하는 거지. 스스로 문학적 재능이 있다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어차피 아이들이 읽을 동화니까 크게 걱정은 하지 않았네. 적당한 교훈이나 교리를 집어넣어서 교단의 구미에 맞게 만들면 되었지. 왜 그런 거 있잖나. 주일 예배를 빠지고 숲으로 놀러 간 꼬마가 요정에게 사로잡혀서 돌아오지 못하게 된다든가 하는 얘기들. 그런 얘기를 묶어서 책 한 권을 냈네. 모두 웨딩거 지방 설화였지. 십 년 이상 수도원에서만 머물렀으니, 수집하는 설화도 전부 그쪽 지방일 수밖에 없지 않겠나? 그런데 이게 생각보다 반응이 좋았네. 사제관장도 마음에 들어 했고 법왕한테까지 보고가 올라갔으니까. 다음 권을 내라는 명이 떨어졌지. 지원도 많아졌고, 자기 연구 팽개치고 도와주는 사제들도 생길 정도였네.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겠지. 신학 연구에서 별 성과를 못 낸 사제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래도 도움을 거절할 필요는 없었네. 손은 많을수록 좋았지. 그때는 꽤나 거창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거든. 제국 전역의 설화를 지방별로 수집해서 정리할 생각이었네. 마침 첫 권이 웨딩거 지방이었으니까, 다음 권은 그 옆인 이곳 브뤼 지방이 좋겠다고 생각했지. 브뤼는 옛 공국公國의 영토이니만큼 제국 본토와는 다른 설화가 많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거든. 성지 마니산도 있고 교단의 발흥지이기도 하지. 종교적이면서도 색다른 설화를 수집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네. 설화 수집에 적어도 일 년은 걸릴 거라고 생각해서 아예 거처를 사제관에서 브뤼에 있는 수도원으로 옮겼네. 성 아그리파 대수도원이었네.”
“성 아그리파…….”
“맞아. 마니산의 성자 아그리파의 이름을 따서 지은 거지.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네. 어쨌든 거기서 나는 일을 시작했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흥미로운 설화를 하나 수집했지. 그게 발단이었네.”
“흥미로운 설화요?”
“그래. 설화라고는 해도 지역 주민들은 그걸 실화라고 믿고 있더군. 브뤼 지방에서는 꽤나 널리 퍼져 있는 이야기였어. 그만큼 변형도 많아 원형까지 거슬러 올라가기가 쉽지 않았네. 자네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있을 거야. 옛 공국 시절의 문헌에서 겨우 가장 원형에 가까운 형태를 수집할 수 있었네. 제국보다도, 그리고 교단보다도 훨씬 더 오래된 이야기지. 어떤가 알렌. 오랜만에 아이가 된 기분으로 옛날이야기를 한번 들어 보겠나?”
알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레미아 전 신부는 소녀와 남자와 용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용에게 가는 길

“용이라는 게 진짜 있는 걸까요?”
어깨너머에서 소녀가 불쑥 말했다. 앞서 가던 사내는 당황했지만 이내 태연하게 되물었다.
“얘야,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니.”
“하지만 성으로 간다니까 엄마가 그러시던 걸요. 절 껴안으시면서 산 위에는 용이 있다고, 절대로 가서는 안 된다고요. 그러면서 막 펑펑 우시는데 정말 이상했어요.”
사내는 이마를 찌푸렸다. 소녀의 부모가 기어코 입을 놀린 모양이었다. 작별인사 같은 것을 하게 둬서는 안 됐는데. 희생양이 자신의 처지를 알아서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어머니가 괜한 걱정을 하시는 거란다. 성에서 살게 되면 당분간은 못 볼 테니까 걱정되시는 거지.”
사내의 대답에 소녀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럴까요. 하지만 정말 이상했어요. 용 같은 건 동화에나 나오는 것일 텐데.”
사내는 주먹을 꽉 쥐었다. 길이 험했지만 계속 소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은 험한 길, 그 이상의 고역이었다.
“하늘이 심상치 않구나. 곧 비가 올지도 모르겠다.”
사내는 소녀의 말을 못 들은 척하고 걸음을 재촉했다.

사내는 젊었던 시절을 떠올렸다. 20년 전 사내는 혈기왕성한 20대 청년이었고 지주의 횡포를 피해 고향을 떠난 무리의 지도자였다. 그들은 젊음과 노력으로 뭐든 해낼 수 있을 거라 믿었고 지주의 간섭과 수탈이 없는 곳을 찾아 고향을 등졌다. 철없는 것들이라며 그들을 말리는 노인들은 비웃음의 대상이었다. 사내와 무리는 몇 년 동안이나 대륙을 방황한 끝에 마침내 지주도 귀족도 없는 곳을 찾아냈다. 용의 산이었다. 그곳은 흉포한 용이 성주를 몰아내고 산 위의 성에 둥지를 튼 이후 아무도 찾지 않는 곳이었다. 용이 수시로 마을을 불태우고 성을 습격했기 때문에 용의 산 주변은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채 울창한 숲이 되어 버렸다. 사내와 무리는 그런 곳에 정착했다. 용이 사는 위험한 곳이라곤 하지만 적어도 귀족들의 수탈은 없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마을을 꾸리고 열정적으로 넓혀 나갔다. 산은 그들이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해 주었다. 그들은 나무를 베어 장작을 구하고 덫을 놓아 고기를 얻었다. 사내가 그 모든 것을 주도했다. 마을의 모든 집이 그의 계획대로 세워졌고 마을 한가운데에 우물을 파자는 제안도 그가 맨 처음 했다. 그는 유능했고 무엇보다 매우 열정적이었기 때문에 모두 그를 따랐고 그는 자연스럽게 지도자가 되었다.

마을은 그렇게 자리 잡아 가는 듯했고 아무 문제도 없어 보였다. 용이 찾아오기 전까지는. 화전을 일군 것이 화근이었다. 점점 커져가는 마을은 잠든 용의 이목을 끌었고 화전의 연기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사람들이 농사를 짓기 위해 산을 불태울 때, 용이 나타났다. 사람들은 죽음을 각오했다. 그러나 용은 불을 내뿜는 대신에 놀랍게도 제안을 했다. 산을 훼손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용의 산에서 사는 것을 허락한 것이다. 사람들은 기뻐했지만 용의 요구는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들은 매년 한 명씩 어린아이를 용에게 바쳐야 했다. 용은 귀찮게 사냥을 할 필요가 없고, 사람들은 더는 생명의 위협을 느낄 필요가 없었다. 언뜻 모두에게 이득이 되는 거래처럼 보였다. 하지만 일은 그렇게 쉽지 않았다. 용과의 거래가 불가피하다는 것에는 모두 동의했지만, 자기 자식을 내놓겠다는 부모는 없었다. 서로의 눈치만 보며 전전긍긍할 뿐이었다. 매일같이 격렬한 회의가 벌어졌다. 어린 자식이 없는 사람들은 목소리를 높이며 마을을 위해 누군가는 희생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어린아이를 둔 부모는 하지만 왜 하필 내 아이냐며 항의했다. 아예 아이를 숨겨 놓고 회의에 나오지 않는 부모들도 있었다. 용이 정한 기한이 다가왔지만 회의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더는 미룰 수 없게 되자 마침내 사내가 나섰다. 사내는 마을의 모든 부모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제비뽑기로 용에게 바칠 제물을 정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반대 의견도 나왔지만 모두를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묵살되었다. 마을 사람 전부가 죽느냐 아이 한 명이 죽느냐 하는 일이었다. 당장 자기 목숨이 걸린 상황에서 무조건 거부할 수만도 없었다. 그리고 사내의 제안은 나무랄 데 없이 공평해 보였다. 제비뽑기가 실시되었다. 일흔여덟 개의 파란 제비와 하나의 빨간 제비가 준비되었다. 사내도 일곱 살 난 딸의 아버지로서 제비뽑기에 참가했다. 빨간 제비였다. 그 의미는 명백했다. 얄궂은 일이 아닐 수 없었으나 사내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딸을 데리고 용이 사는 성으로 향했다. 울며 매달리는 아내를 뿌리치고 아무것도 모르는 딸아이에게는 거짓말을 하며. 혼자 돌아온 그를 맞이한 것은 싸늘한 시체로 변해 있는 아내와 텅 빈 후회뿐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사내를 격려하고 위로했지만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마을 귀퉁이에 움막을 짓고 기거하기 시작했다.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밖으로 나오지도 않고 마을 사람들과의 교류도 최소한으로 줄인 채 그는 은둔 생활을 해 나갔다. 사냥도 농사도 하지 않는 그가 마을 밖으로 나설 때는 일 년에 단 한 번, 희생양이 되는 아이를 용에게 바칠 때뿐이었다. 누구도 악역을 원치 않았기에 그 일은 자연스럽게 사내의 몫이 되었다. 사내는 일 년에 한 번 용이 사는 성까지 아이를 데려다 주는 일을 하고 일 년 동안 입을 옷과 먹을 음식을 얻었다. 그는 열두 해 동안 열두 명의 어린아이를 용에게 데리고 갔다. 남자아이일 때도 있었고 여자아이일 때도 있었다. 어른들이 철저하게 입을 막았기에 제물로 바쳐지는 아이들은 자신의 운명은커녕 용의 존재조차도 알지 못하고 사내를 따라나섰다. 그리고는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빗방울이 하나 둘 떨어지더니 이내 굵은 빗줄기로 변했다. 사내와 소녀는 비를 피해 나무 아래로 숨어들어 갔다. 커다란 아름드리나무는 비를 완전히 막아 주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견딜 만하게 해주었다. 사내는 소녀에게 짚을 엮어 만든 비옷을 건네고 자기는 챙이 넓은 모자를 눌러 썼다. 그들은 그렇게 나무에 등을 기댄 채 한참을 쉬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소녀였다.
“아저씨…….”
쥐어짜 내는 듯한 목소리였다. 사내는 대답하지 않는 편이 좋다고 생각했지만, 그 목소리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는 말없이 소녀를 쳐다보았다. 말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말해라. 그런 의미였다. 소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녀는 울고 있었다. 빗물이 앳된 얼굴 위로 쉼 없이 흘러내렸기에 사내가 그 사실을 알아차리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아는구나.”
사내가 말했다. 그것밖에는 해줄 말이 없었다.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눈이 발갛게 부어 있었다.
“언제부터?”
“뭔가 이상하다는 건 예전부터 느끼고 있었어요. 확실히 알게 된 것은 어젯밤이었고요.”
“알면서도 따라온 이유가 뭐지? 차라리 도망가 버리지 그랬어?”
사내는 까닭 모를 충동에 이끌려 그렇게 말했다. 소녀가 도망치면 가장 곤란한 것은 자신인데도.
“갈 데가 없는 걸 알잖아요. 부모님은 어쩔 수 없다고만 하시고.”
사내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고작 열다섯 살이나 되었을까. 혼자서는 마을을 벗어나기도 힘든 나이다. 벗어난다 해도 갈 곳도 없고. 그래서 자포자기하고 사내를 따라왔겠지. 도살장에 끌려가는 짐승처럼. 나약하고 무기력한 짐승. 사내는 화가 치밀었다. 누구에게 화가 났는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눈앞의 소녀에게 분노를 쏟아냈다.
“좋아.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지? 나한테 그 얘길 하는 이유가 뭐야? 난 너를 도와줄 수 없어. 오히려 그 반대지. 난 너를 용한테 데려갈 거야. 그게 내가 해야 할 일이니까.”
소녀는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사내가 자기를 위로해 줄 줄 알았겠지. 죽음을 앞둔 어른 생명 앞에서 누구라도 그러지 않겠는가. 하지만 사내는 달랐다. 열두 번의 반복은 동정마저 무디게 만들 수 있다. 비록 마음 한구석에 더러운 기분이 남기는 하지만, 그런 것쯤 애써 무시하면 그만이다. 소녀는 무릎 사이에 고개를 묻고 서럽게 울었다.
“제길.”
홧김에 욕을 내뱉은 사내도 그 뒤로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둘은 비가 그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침내 비가 그치자 사내가 말했다.
“네가 죽는 건 피할 수 없어. 아무도 너를 도와주지 않을 거고 너 혼자서는 그걸 피할 방법이 없지. 그러면 이렇게 생각해봐. 너는 마을을 위해서 죽는 거야. 고귀한 희생이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어른이라도 그런 용기를 내기는 쉽지 않아. 네가 희생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살 수 있어. 그들은 영원히 너를 기억하고 고마워할 거야. 어때? 영광스러운 일 아니야?”
“개 같은 소리 말아요.”
소녀는 사내를 한 번 노려보고 다시 울기 시작했다. 사내는 인상을 팍 썼다.
“그래. 개 같은 소리지. 일어나. 가자고. 나도 이런 일은 후딱 끝내버리고 싶어.”
사내가 앞장섰고 소녀도 그 뒤를 따랐다. 비에 젖은 길은 질척질척했다.

사내는 이상함을 눈치챘다. 산짐승이 너무 많았다. 사내와 소녀는 이제 용의 영역 한가운데에 들어와 있었다. 짐승들은 용의 영역에 들어오기를 꺼려하기 때문에 용의 영역에서는 산짐승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곳곳에 산짐승의 발자국이 널려 있었다. 수풀을 헤칠 때마다 산새들과 다람쥐들이 달아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뭔가 이상해.”
사내가 중얼거렸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부디 심각한 문제였으면 좋겠네요.”
소녀가 이죽거렸다.
“좀 조용히 해라. 중요한 일이니까.”
“중요해요? 24시간 안에 죽게 생겼는데 그거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 있어요?”
“조용히 안 하면 24시간이 아니라 2시간 안에 죽을지도 몰라. 너나 나나 전부.”
“그거 잘 됐네요. 최소한 외롭진 않겠어요.”
사내는 얼굴을 찌푸리며 풀숲을 뒤졌다. 마침내 찾던 것을 발견하자 그가 말했다.
“봐라. 저게 뭔 줄 아니?”
“발자국이네요. 개?”
발자국 수십 개가 젖은 땅 위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한두 마리가 남긴 흔적은 아니었다. 공교롭게도 발자국은 용의 성을 향해 있었다.
“늑대야. 발자국이 선명한 걸로 봐서 지나간 지 한 시간도 안 됐어. 무슨 말인지 알겠어? 해는 떨어지고 노숙을 해야 하는데 주위에 늑대 Ep가 돌아다닌다고.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사내는 말끝을 흐렸다. 알았다고 해도 다른 방법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는 소녀를 용에게 데려가야 했다. 그것도 내일 아침까지. 그는 허리춤에 찬  칼을 쳐다보았다. 칼은 낡아 있었다. 젊었을 때는 사냥에 제법 자신이 있었지만 혼자 늑대를 상대해 본 적은 없다. 하물며 중년인 지금에야.
“늑대한테 물리는 게 용한테 먹히는 것보다 덜 아플까요?”
“바보 같은 소리 말고 따라와. 밤이 되기 전에 최대한 여기서 멀어져야 돼. 조금 돌아가는 셈이 되겠지만 어쩔 수 없지.”

해는 금세 떨어졌다. 사내와 소녀는 얼마 가지도 못해 야영할 곳을 찾아야 했다. 사내는 소녀의 느린 걸음이 불만이었지만 소녀가 도저히 더는 못 가겠다며 울먹이는 통에 어쩔 수 없었다.
“일단 잘 곳을 찾자. 주위에 올라갈 만한 나무가 있는지 찾아봐.”
다행히 나무는 많았다. 사내는 곧 소녀가 올라갈 수 있을 정도로 낮으면서 자기가 올라가도 문제없을 만큼 튼튼한 나무를 찾아냈다. 그 옆에는 짐승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큰 모닥불을 피웠다. 낮에 내린 비 때문에 쉽게 불이 붙지 않았다. 불을 피우는데 거의 두 시간이 걸렸다.
“나무 위에서 자는 건 처음이에요. 잠이 올 것 같지 않아요.”
“어쩔 수 없어. 오늘은 자는 건 포기해라. 자다가 떨어지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마지막 잠이 될 수도 있는데 포기하라니. 잔인하네요.”
“늑대들은 안 잔인할 것 같아? 조금이라도 더 살고 싶으면 내 말대로 해.”
소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죽음을 앞둔 아이에게는 너무 심한 말이었을까. 사내는 조금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계속해야 했다.
“만약 내가 내일 죽을 거란 걸 안다면 오늘 밤 절대 자지 않을 거야. 깨어서 살 방법을 생각하겠지. 방법이 없다 해도 마찬가지야. 자면 그동안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잖아? 나라면 조금이라도 더 깨어있겠다.”
“깨어있는 시간이 괴로워도요? 어차피 죽을 거 오늘 죽나 내일 죽나 뭐가 달라요? 다 포기해 버리는 게 편해요. 마음 같아선 지금이라도 죽어버리고 싶다고요. 내가 늑대에게 죽어 버리면 당신이 곤란해질 테니 그것도 괜찮겠네요.”
“나뿐만 아니라 마을 전체가 다 곤란해지겠지. 네 부모님도. 친구도. 좋게 생각해. 나라고 좋아서 이 일을 하는 건 아니니까. 아까도 말했지만 이건 의미 있는 희생이라고.”
“아까도 말했지만 개 같은 소리 말아요.”

사내의 설득은 전혀 소용없었다. 소녀는 밤늦게까지 꾸벅꾸벅 졸다가 늑대 떼가 나타나자 보란 듯이 몸을 던졌다. 떨어진 건지 일부러 뛰어내린 건지 알 수 없었다. 떨어지면서 소녀는 비명을 질렀고 그 비명에 맞춰 늑대 떼가 달려들었다.
사내는 욕을 쏟아내면서 나무에서 뛰어내렸다. 착지하면서 두어 번 구른 탓에 온몸이 쑤셨지만 지체할 겨를이 없었다. 그는 낡은 칼을 뽑아들고 소녀에게 달려갔다. 달조차 흐린 탓에 늑대가 몇 마리나 되는지도 알 수 없었다, 무작정 달려가서 가장 먼저 보이는 형체를 향해 칼을 내리쳤다. 낑낑대는 소리와 함께 늑대 한 마리가 쓰러졌다. 운이 좋았다.
“살려줘요!”
소녀의 비명이 들렸다. 사내는 이리저리 칼을 휘둘러 늑대들을 쫓아내고 소녀에게 다가갔다. 소녀는 크게 다친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겁을 먹어 사내에게 매달리는 소녀는 짐이 될 뿐이었다. 사내는 소녀를 떼어내고 주위를 둘러봤다. 늑대들이 으르렁거렸다. 주위를 맴도는 게 열 마리는 되어 보였다. 사내는 그제야 정신이 퍼뜩 들었다. 맙소사. 늑대 열 마리라니. 가망이 없었다. 횃불이라도 가지고 올걸. 불이 있으면 어떻게 쫓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사내는 짐 속의 횃불을 생각했다. 기름을 먹여 놓은 거라서 불만 붙이면 잘 탈 텐데. 짐 속에는 횃불이 있고 바로 옆에 모닥불이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은 그것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횃불을 가지러 갈 수는 없었다. 소녀가 가져다준다면……. 사내는 고개를 저었다. 무리한 기대다. 소녀는 자기 한 몸 지키는 것도 벅찰 텐데.
“움직일 수 있어?”
사내가 물었다. 소녀는 고개만 끄덕였다. 겁에 질려 있었다. 잠시나마 이런 아이에게 기대를 걸었다는 게 바보같이 느껴졌다.
“내 말이 끝나면 바로 뛰어. 뛰어서 아까 있던 나무 위로 올라가.”
“못 해요. 못 하겠어요.”
“해야 돼. 그리고 날이 밝고 안전해졌다 싶으면 산 위로 올라가. 길은 몰라도 돼. 어차피 여기서부터는 올라가기만 하면 어디로 가든 용의 성이 나오니까. 그러면 끝나. 할 수 있지?”
“네.”
“좋아. 뛰어!”
사내는 늑대 무리 사이로 뛰어들었다. 그러면서 칼을 휘둘렀다. 아까 같은 행운은 없었다. 늑대들은 순식간에 흩어졌고 사내의 칼에는 아무것도 걸리지 않았다. 늑대들은 사내가 지치기를 기다리는 듯 주위를 빙빙 맴돌았다. 한두 마리가 시험 삼아 덤벼들기도 했다. 사내는 칼을 있는 힘껏 휘둘러 그놈들을 떨쳐냈다.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늑대들이 본격적으로 달려들기 시작하면 일 분도 못 버틸 것이다. 하지만 늑대들은 그러지 않았다. 처음에 한 놈을 잡은 것 때문에 사내를 만만치 않은 사냥감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사내가 사냥개 한 마리보다도 무력하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얼마나 남았을까?
“아저씨!”
소녀였다. 그게 얼마나 위험한지 알고 있으면서도 사내는 한순간 늑대 무리에서 눈을 돌렸다. 소녀가 횃불을 들고 달려오고 있었다. 내가 그러라고 말했던가? 사내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무에 올라가면 안전할 텐데. 왜 그러지 않은 거지?
소녀는 횃불을 이리저리 휘둘렀다. 방금 전까지 겁에 질려 있던 아이라고는 믿기 힘들었다. 횃불은 늑대들을 완전히 쫓아내지는 못했지만 사내에게 오는 길을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나무에 올라가 있으라니까!”
“사내가 윽박질렀다.
“어떻게 그래요!”
소녀도 지지 않았다.
“어떻게 나 혼자만 살아요. 나 때문에 이렇게 된 건데. 내가 안 떨어졌으면 이런 일도 없는데. 빨리 이걸로 어떻게 좀 해봐요.”
사내는 횃불을 받아들었다. 늑대 한 마리가 달려들었지만 불을 들이대자 물러났다. 불은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일단 시간을 벌 수는 있다. 하지만 늑대들은 끈질겼다. 결국 나무 위로 올라가야 했다. 사내와 소녀는 천천히 나무쪽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올라갈 수가 없었다. 소녀야 문제없지만 양손에 칼과 횃불을 든 사내는 그럴 수가 없었다.
“좋아. 네가 생각보다 용감하다는 걸 알았으니까 부탁 하나 하자.”
“무슨 부탁이요?”
“불이 생겼지만 시간 끌기밖에 안 돼. 나무 위로 올라가야 하는데 보다시피 양손에 이걸 들고는 무리지. 그렇다고 버릴 수도 없고.”
“그래서요?”
“네가 이걸 들고 잠깐만 놈들을 막아줘. 너는 가벼우니까 일단 내가 올라가면 금방 끌어올릴 수 있어. 늑대들이 달려들기 전에.”
소녀는 망설이지 않았다. 사내에게서 횃불을 빼앗아 들고 늑대들을 막아섰다. 사내는 나무를 오르기 시작했다. 사냥감이 도망가는 것을 본 늑대들이 더 크게 짖어댔다.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 같았다. 실제로 한 마리가 달려들었지만 소녀는 횃불을 휘둘러 늑대를 후려쳤다. 털에 불이 붙은 늑대는 바닥을 뒹굴며 발버둥쳤다. 흙에 비벼 불을 끄려는 시도였다. 불은 꺼졌지만 그때는 이미 사내가 나무를 다 오른 뒤였다. 사내는 손을 내밀었고 소녀는 횃불을 내던지고 그 손을 잡았다. 둘의 손이 맞닿고 소녀는 나무 위로 사라졌다.

다음 날 사내와 소녀는 용의 성에 도착했다. 성은 낡고 무너져서 옛 모습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그들은 문짝이 떨어져 나간 성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갔다. 성 안에 들어간 사내는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산새였다. 조그만 산새들이 성 곳곳에 둥지를 틀고 살고 있었다. 망루부터 낡은 첨탑아래, 성벽의 작은 흠까지 빼곡히 새 둥지가 들어서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어떤 새도 용이 사는 성에 둥지를 틀진 않는다. 그러고 보면 어제의 늑대들도 이상했다. 원래 그 길은 산짐승들이 다니지 않는 길이다. 그래서 사내도 출발하면서 별다른 대비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짐승들은 사람이 느끼지 못하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용을 피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 그 규칙이 깨졌다.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하다. 사내는 꺼림칙함을 느끼며 성의 계단을 올라갔다. 소녀도 불안한 기색으로 그 뒤를 따랐다.
“무슨 일 있어요? 표정이 이상해요.”
“뭔가 이상해. 진작 눈치챘어야 하는 건데. 어제는 너무 정신없어서 깜빡 잊고 있었어.”
계단을 오르는 사내의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사내는 이제 거의 뛰어가고 있었다.
“같이 좀 가요. 그렇게 서두를 필요 있어요? 나한테는 이게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고요.”
소녀가 말했지만 사내는 듣지 않았다. 그는 성큼성큼 계단을 오르고 몇 개의 아치문을 지나 성 중앙의 커다란 홀 앞에 도착했다. 용이 있는 곳이다. 용은 항상 이곳에 있었다. 사내는 이곳에서 용에게 아이들을 바쳤다. 그러면 용은 사내가 보는 앞에서 한입에 아이들을 삼켜버렸다. 사내는 홀 안에 들어섰다. 소녀도 숨을 몰아쉬며 뒤따라왔다. 홀 안은 여느 때와 다를 게 없었다. 가장자리에는 기사들의 갑옷이 전시되어있고 중앙에는 보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용이 큰 몸을 눕힌 채로 자고 있었다. 용은 있었다. 여전히 압도적인 존재감을 품은 채로. 사내의 옆에서 소녀가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사내는 소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긴장감에 자신도 모르게 손이 굳어졌다. 단단히 힘이 들어간 손길에 소녀가 이리저리 몸을 비틀었지만 사내는 놔 주지 않았다. 소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 들지 않았다. 우는 듯했다. 울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 같았지만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무리 당차고 용감하다 해도 결국 어린애다. 아니 어른이라고 코앞에 닥친 죽음 앞에서 의연할 수 있을까? 사내는 결심을 굳혔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용의 산에서 살기 위해서는 희생이 불가피하다. 딸을 바치던 날이 생각났다. 지금의 소녀보다 훨씬 어린 그의 딸. 사내는 버팅 기는 소녀를 밀치다시피 해서 용 앞으로 갔다.

사내는 용 앞에 나아가 말을 걸었다. 용을 깨우기 위해서였다.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채였다.
“용이여.”
대답은 없었다. 잠시 기다리던 사내는 의아함에 고개를 들었다. 용은 움직이지 않았다. 어째서? 다시 한 번 불렀다. 이번에는 조금 큰 목소리였다. 역시 대답은 없었다. 설마.
어리둥절한 소녀를 뒤에 남겨두고 사내는 용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용의 몸을 밟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작은 언덕을 오르는 것 같았다. 똬리를 튼 용의 머리에 다가갔을 때, 뭔가가 날아올랐다. 깜짝 놀란 사내는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산새였다. 새가 용의 귀에 둥지를 튼 것이다. 그 의미는 명백했다.
“죽었어.”
사내가 소녀에게 말했다.
“네?”
잠시 어리둥절하던 소녀는 이내 화색을 띠었다.
“죽었어요? 용이요? 용이? 그럼 나 어떻게 되는 거예요. 살 수 있는 거예요? 집에 갈 수 있어요?”
“몰라.”
사내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용이 죽다니. 용이 죽을 수도 있나? 용에게는 정해진 수명이 없다고 알고 있었다. 그냥 세상이 시작할 때부터 존재해온 것이 용이었다. 세상이 망한다면 아마 분노한 용들 때문일 테고. 지난 십이 년 동안 용에게 아이들을 바쳐왔다.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용의 보호를 받지 못하면 마을은 어떻게 되는 걸까? 내 딸은? 지금껏 희생된 아이들은? 이렇게 허무하게 죽어버릴 용의 환심을 사려고 그 애들이 희생된 건가?
사내는 고개를 들어 소녀를 보았다. 함성을 지르며 홀 안을 마구 뛰어다녔다. 기뻐하고 있다. 하지만 사내는 기뻐할 수 없었다. 소녀를 죽일 필요가 없어진 것은 다행이다. 하지만 여기서 끝날 거라면 지금까지의 희생은 뭐란 말인가. 용이 죽었으니 이제 지주들이 들이닥치겠지. 용의 영토를 배회하는 늑대들처럼. 용의 귀에 둥지를 튼 산새처럼. 귀족들의 수탈이 없는 유일한 곳이 용의 산이었다. 그래서 매년 용에게 아이를 바치면서도 그들은 마을을 유지해 왔던 것이다. 사내가 자식마저 버려가며 지키려 했던 꿈이었다. 귀족들 없이 모두 평등하게 살아가는 마을. 가족도 친구도 모두 잃은 지금, 마을은 그가 살아가는 이유였다. 포기할 수는 없었다.

사내의 머릿속에 끔찍한 생각이 떠올랐다. 용이 없다면 용을 만들면 된다. 그가 용이 되면 된다. 사내는 기뻐하는 소녀에게 다가가 그녀를 불렀다.
“왜요? 이제 마을로 돌아가나요?”
사내는 대답 대신 칼을 빼 들었다. 소녀가 얼어붙었다.
“무슨 짓이에요?”
“이해하지 못할 거란 건 알아. 하지만 이 방법밖에 없어.”
사내는 자신이 미친 게 아닌가 생각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놀라 이성을 잃어버린 건 아닌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다른 방법은 없었다. 그때와 같은 기분이었다. 용에게 딸을 데려갔을 때.
“왜 그러는지 설명이나 해 봐요.”
“네가 살면 용이 죽었다는 걸 모두 알게 돼. 그러면 승냥이들이 몰려들겠지. 귀족과 군대와 사제들이 말이야. 그들이 마을을 그냥 둘 리가 없어. 우릴 노예로 만들고 세금을 물리겠지. 난 그게 싫어서 떠나 온 거야. 그게 싫어서 내 딸과 아내를 죽게 했어. 그 희생을 헛되게 할 수는 없어.”
“내가 죽으면요? 뭐가 달라지는데요? 그래도 용이 죽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잖아요. 이제 용은 없어요. 당신 말대로 귀족들의 군대가 와서 우릴 노예로 만들겠죠. 하지만 그게 왜 내가 죽어야 하는 이유가 되는데요? 내가 죽으면 용이 살아나기라도 한데요?”
소녀는 단호했다. 이제는 눈물도 흘리지 않았다. 겁에 질린 기색도 찾아볼 수 없다. 이게 어제의 무기력한 짐승이란 말인가. 살아남을 의지라곤 찾아볼 수 없었던 아이가 이렇게 변했다. 늑대에게 쫓긴 경험이 마음속의 뭔가를 일깨우기라도 한 걸까.
“비밀로 하면 돼. 용이 죽었다는 사실을 아는 건 너와 나밖에 없으니까. 너를 죽이고 돌아가면 아무도 그 사실을 모르겠지. 매년 그렇게 하면 돼. 여기 오는 사람은 나밖에 없으니까, 나만 입 다물면 아무도 몰라. 용이 멀쩡하게 살아서 공물을 받는 줄 알겠지.”
흔들림 없던 소녀의 표정이 무너졌다. 경악이었다.
“매년이라고요? 당신 미친 거 아냐? 어떻게 그런 생각을…….”
“나처럼 살다 보면 그보다 더한 것도 생각하게 돼.”
사내가 담담하게 말했다. 이겼다. 그는 생각했다. 소녀는 겁을 먹었다. 이제 두려움을 느끼고 저항할 의지조차 잃겠지. 아이는 다시 원래의 짐승으로 돌아가고 그는 마음먹은 대로 움직이기만 하면 된다.
“좋아요.”
소녀는 체념한 듯 고개를 떨어뜨리고 말했다.
“당신 말을 들어 보니까 방법은 그것밖에 없는 것 같네요. 어차피 죽기로 되어 있었던 거, 용한테 죽은 셈 치지요.”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고 소녀에게 다가갔다. 한 손에는 낡을 칼을 든 채였다. 그가 생각한 대로 되었다. 그도 기분이 좋진 않지만 이보다 더한 일도 해왔다. 술에 거나하게 취해 며칠 자고 나면 깨끗이 잊어버릴 일이다.
소녀는 고개를 떨어뜨린 채 눈을 꼭 감고 있었다. 작은 어깨를 파르르 떨었다. 아이는 완연한 짐승이 되어 있었다.
“미안해. 나도 이러고 싶은 게…….”
동정심이었을까. 어쩌면 단순한 방심이었는지도 모른다. 사내는 소녀가 저항할 거란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고 칼도 한 손으로 느슨하게 들고 있었다. 감겨 있던 소녀의 눈이 뜨였다. 소녀는 벼락처럼 사내에게 달려들어 칼을 낚아챘다. 어른과 아이, 손아귀 힘으로는 상대가 되지 않았지만 사내는 긴장이 풀어져 있었고 소녀는 필사적이었다. 소녀는 낡은 칼로 사내의 어깨를 내리찍었다. 끔찍한 고통이 엄습했다. 사내는 고통 속에서도 간신히 소녀의 손목을 움켜쥘 수 있었다. 칼은 여전히 그의 어깨에 박혀 있었다. 사내는 있는 힘껏 소녀의 손목을 비틀었다. 근육이 뒤틀리는 소리와 함께 소녀의 손에서 칼이 빠져나왔다. 사내는 발로 소녀를 걷어찼다. 소녀는 저 멀리 나가떨어졌다. 정신을 차린 소녀가 다시 달려들었을 때, 사내는 이미 칼을 들고 있었다. 사내는 끔찍한 기분을 느끼며 칼을 내리쳤다.

“희생이야.”
사내가 말했다. 소녀의 시체를 안고 있었다. 빨간 피로 옷이 젖어 있었다.
“마을을 위한 희생이야. 누군가는 희생해야 해. 모두를 위해 하나를 희생하는 거고, 그건 고귀한 죽음이야. 모두가 그녀를 기억하고 고마워할 거야. 신념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한 ……. 그녀는 차라리 성인이야. 절대 비참한 죽음이 아니야. 의미 있는 일이라고.”
개 같은 소리 말아요.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개 같은 소리. 그래. 개 같은 소리다. 하지만 세상이 개 같은데 어찌할까?
그는 용 앞으로 나아갔다. 소녀의 시체를 죽은 용 앞에 뉘었다. 부릅뜬 눈은 감기고, 헝클어진 머리도 깨끗이 정돈했다. 그렇게 단장하니 제법 봐 줄 만한 모양새가 되었다. 기괴한 방향으로 뒤틀린 손목은 어떻게 되질 않았지만 처음에 비하면 굉장히 양호했다.
“용이여!”
사내가 말했다.
“용이여 일어나게. 일어나서 공물을 받으시게. 우리의 우정의 징표로 여기 아이를 데려왔네.”
사내가 주문처럼 되풀이했다. 용은 대답하지 않았다. 사내는 미친놈처럼 낄낄댔다. 그는 죽어버린 용을 세게 걷어찼다. 자꾸 헛웃음이 나왔다.

그는 비틀거리며 성을 빠져나왔다. 하늘은 언제 비가 왔느냐는 듯이 말짱했고 산새들이 지저귀고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용이여 굽어 살피소서!”
사내는 크게 소리 질렀다. 산새들이 놀라 달아났고 그의 외침은 메아리가 되어 돌아왔다. 굽어살피소서, 굽어살피소서, 살피소서…….
달아나는 산새들을 보면서 사내는 크게 웃었다. 행복했다. 걱정할 것이 없었다. 마을의 수호룡. 그가 마을을 굽어살필 테니.



“너무 끔찍한 이야기라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수사 알렌이 말했다.
“솔직한 감상을 이야기하자면 역겹군요. 잔인하고 신성 모독적인데다 광기까지 느껴집니다. 어린아이들을 위한 동화로는 도무지 적합하지 않은 이야기로군요. 신성한 수호룡이 인신공희를 원했다거나 어처구니없이 죽어 버리는 장면에서는 명백한 악의가 느껴집니다.”
“악의라. 그렇게 느낄 수도 있겠군.”
제레미아 전 신부가 대답했다. 혐오감을 감추지 못하는 알렌과 달리 그는 담담했다.
“그렇지 않나요? 그건 자연 발생적인 설화가 아니라 누가 악의적으로 지어낸 이야기가 분명합니다. 일부러 지어내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렇게 용교를 모독하는 내용투성이 일 수 있단 말입니까?”
“알렌. 민간의 설화라는 게 원래 그렇다네. 뚜렷한 저자가 없으니 이리저리 변형되기 일쑤고 그 창작자라는 사람들이 대부분 교육받지 못한 무지렁이들이니 내용이 잔인하고 직설적일 수밖에. 그렇기에 자네 같은 성직자들은 신성 모독적이라고 느낄지 모르나, 나는 오히려 그런 점 때문에 솔직하다고 생각하네. 몇백 년 전의 민중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가감 없이 해 보라고 하면 아마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잔인하거나 천박한 점은 그렇다고 치죠. 그래도 명백하게 이단적인 그 내용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하실 겁니까? 그 설화는 신성한 수호룡을 모독하고 있다고요.”
알렌이 되물었다. 그는 신부를 찾아온 것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차라리 기억 속의 좋은 모습만 간직할 것을. 교단이 옳았다. 신부는 이단이 분명했다.
“자네도 나를 이단으로 몬 사람들과 같은 말을 하는군. 내가 누누이 말해 왔지만 아무도 믿지 않는 사실은, 선후관계가 정반대라는 거야. 자네는 누군가 용교를 모독할 목적으로 그 설화를 조작했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라네. 설화가 먼저고 후대의 누군가가 그 설화를 이리저리 짜깁기해서 용교의 경전에 편입시켰겠지. 지금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눈치챘겠지. 그래. 마니산의 성자, 성 아그리파 설화. 성 아그리파가 일 년에 한 번씩 수호룡을 만났다지? 방금 들려준 이야기가 그 원본이네. 나는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있었네. 교단에서 불태워 버리긴 했지만 그 원본은 최소 500년 전의 것이었어. 용교의 창시자 성 드래코누스가 300년 전의 인물이고 지금의 교리가 갖춰진 지는 겨우 150년밖에 안 된 것을 생각하면 다른 해석은 나올 수 없네. 용교가 성립되기도 전에 누가 용교를 모독할 목적으로 설화를 조작하겠나?”
“이럴 수가! 신부님!”
알렌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 바람에 찻잔이 뒤집어졌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저는 신부님을 믿었습니다만, 신부님은 정말 이단에 단단히 빠지셨군요. 어떻게 그런 얘기를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용교의 경전이 그런 사악한 설화를 짜깁기한 것이라니요.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건 함정입니다. 악마의 함정이에요. 성 드래코누스가 그런 설화를 알고 있었을 리 없고 알았다 한들 경전에 포함시킬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경전은 성스러운 실화입니다.”
“물론 그는 몰랐겠지. 내가 방금 들려준 이야기는 말이야. 그런 잔인하고 교리에 배치되는 설화를 경전에 실을 이유는 없지. 하지만 처음에 말하지 않았는가. 마니산의 성자 이야기는 수없이 많은 판본이 있다고. 내가 말한 이야기는 찾을 수 있는 가장 오래된 판본이고, 특별히 인상적인 판본이네. 성 드래코누스가 살았던 300년 전에는 이미 무수한 다른 판본들이 퍼져있었겠지.  그 이야기들은 세월이 지나면서 많이 순화되었을 거고. 가장 널리 퍼진 판본에서는 용이 죽지도 않고 소녀와 사내가 함께 살아남는다네. 그 정도면 성 아그리파 전설과 비슷하지 않나? 그 판본은 브뤼 지방에서는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브뤼 출신인 성 드래코누스가 참조했을 개연성도 충분하지. 그는 천재였지만 경전을 무에서부터 새로 쓰기란 불가능했네. 그래서 고향인 브뤼 지방의 설화에서 몇 가지 재료를 빌려 온 거야. 이해할 수 있겠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알고 싶지도 않습니다. 다만 신부님이 파문당하신 이유는 알 것 같군요.”
제레미아 전 신부는 절박한 눈으로 알렌을 바라보았다.
“자네에게 이런 말을 한 것을 후회하네. 그냥 좋은 친구로서 떠나보냈으면 좋았을 것을. 하지만 믿어 주게.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네. 다만 학자로서 눈에 보이는 명백한 사실을 무시할 수 없었을 뿐이야. 사실대로 말하면 나는 방금 들려준 설화도, 용교의 경전도 어느 것 하나 진실이라고 믿지 않네. 자네는 용을 본 적이 있는가? 난 없네. 모두가 있지도 않는 것을 진심으로 믿고 있어. 그건 모두 이야기일 뿐이야. 사실은 없고 이야기만 꼬리를 물고 돌고 돌 분이야. 그런데 사람들은 그걸 진짜라고 믿어버리지. 그게 모든 비극의 시작이네. 나는 그걸 두고 볼 수 없었어. 눈에 보이는 진실을 어떻게 외면할 수 있겠나.”
알렌의 표정은 싸늘했다. 그는 벌써 겉옷을 단단히 여민 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는 어리석음을 멀리하는 것이 사제의 성스러운 세 번째 의무입니다. 감각은 속기 쉽지만 진실한 영혼은 그렇지 않죠. 그렇기에 성 드래코누스도 감각보다 믿음의 눈으로 사물을 보라고 가르쳤고요. 저는 순례를 마무리하러 가보겠습니다. 따라오실 필요는 없습니다. 다시 뵙기는 힘들 것 같군요. 안녕히 계십시오.”
알렌은 신부를 남겨두고 산을 올랐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아니, 너무 많은 생각이 한꺼번에 떠올라서 아무것도 제대로 생각할 수 없었다. 제레미아 신부는 어디서 그런 사악한 지식을 배워왔단 말인가? 교단이 그를 화형에 처하지 않은 것이 놀라울 정도였다. 법왕의 권련이 강했을 때라면 분명히 화형을 당했겠지. 그런 사악하고 이단적인 작자는.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대륙 북부에는 못 미친다고 해도 마니산의 겨울은 혹독했다. 이미 허리까지 쌓여 있던 눈은 이제 거의 알렌의 가슴까지 도달했다. 눈 때문에 길은커녕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눈 닿는 곳 모두가 눈이었다. 무서운 추위가 엄습하면서 알렌은 길을 잃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나온 길도, 나아갈 길도 전부 눈에 뒤덮여서 보이지 않았다. 이정표가 될 만한 나무와 바위도 전부 눈 속에 숨어버렸다. 꽁꽁 언 발과 손에는 이미 감각이 없었다. 알렌은 그가 순례를 끝마치지 못할 것임을 직감했다. 하지만 상관없어. 어차피 순례의 성스러운 의미는 그 사악한 이야기를 듣는 순간부터 망쳐져 버렸다. 아아, 나는 왜 그 사악한 작자를 따라나섰던가? 일주일 후, 성일에 출발했더라면 적어도 아무도 도와줄 이 없는 산중에서 홀로 죽지는 않았을 텐데. 설마 이 또한 이교도의 함정일까. 알 수 없었다. 아니라고 믿고 싶었지만 제레미아 신부가 타락했다는 사실은 이미 부정할 수 없었다. 알렌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올라가기는커녕 서 있을 기운도 없었다. 엎드린 그의 등 위에 눈이 쌓이기 시작했다. 의식이 흐려지면서 감각도 같이 사라졌다. 온몸이 얼어붙고 있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는 점점 추위를 잊어갔다.
“알렌! 알렌!”
멀리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성룡聖龍의 부르심인가? 알렌은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곧 그 소리가 성룡의 부름이 아니라 귀에 익숙한 목소리임을 깨달았다. 제레미아 신부였다. 어린 시절의 은사, 그러나 이제는 타락하여 이단이 된 자. 알렌은 정신을 차렸다. 목소리는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곧 그를 찾아낼 기세였다. 죽어가던 몸뚱이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알렌은 몸을 일으켜 무서운 속도로 산을 뛰어올라갔다. 어깨높이까지 쌓인 눈도 장애가 되지 못했다. 그는 가야 했다. 사악한 이교도에게 붙잡힐 수는 없었다. 죽어도 신자로서 죽겠어. 성룡이여, 내 영혼을 받아주소서!

그러나 아무리 투철한 믿음의 소유자라고 해도 의지만으로 산을 오를 수는 없는 법이다. 하물며 알렌은 동사 직전이었다. 그는 미친 듯이 달리다 발을 헛디뎠고 한참을 굴러떨어졌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그의 눈앞에 캄캄한 동굴이 큼직한 입을 벌리고 있었다. 몸이 부서질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알렌은 눈이라도 피하자는 심정으로 그 안으로 기어들어 갔다.
“이렇게 추위를 피함도 수호룡의 보살핌이다.”
알렌은 마음속으로 기도하고 불을 피웠다. 다행히 그의 짐 속에는 부싯돌이 들어 있었고 눈을 파내자 그럭저럭 마른 불쏘시개를 구할 수 있었다. 불 옆에 앉아 열기를 쐬자 살 것 같았다. 얼어붙었던 손발이 녹으면서 끔찍하게 가려웠지만 이제 손가락을 움직일 수는 있었다. 몸이 녹자 동굴 안쪽에 뭐가 있는지 궁금해졌다. 눈을 피하게 해 준 동굴이지만 무서운 짐승이 살고 있을 수도 있으니 확인은 해 보아야 했다. 동굴은 그렇게 커 보이지는 않았다. 몇 분만 걸으면 끝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알렌은 횃불을 만들어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알렌은 무서운 것을 보았다. 공포인지 한기인지 모를 것이 밀어닥쳤다. 제레미아 전 신부의 말이 떠올랐다. 불쾌한 사실이 마니산에 있다. 그는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그 이교도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는 모종의 사악한 마술로 그 끔찍한 짓을 행했음이 틀림없다. 그는 수호룡을, 알렌의 신을 죽이고 그 뼈를 바위에 박아놓았다. 동굴 안에서 그가 본 것은 성스러운 용의 시체가 틀림없었다. 이미 그 살점은 전부 썩어 문드러졌어도 뼈만은 남아 있었다. 알렌은 그것을 직접 만져 보았다. 장구한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것은 아름다웠다.
날카로운 이빨이 촘촘히 박힌 삼각형의 커다란 두개골, 길고 곧게 뻗은 등뼈와 꼬리뼈, 커다란 뒷다리와 그에 비해 조금은 왜소한 앞다리. 경전에 나온 그대로였다. 날개는 보이지 않았다. 악마가 잘라 버렸으리라. 불경한 일이었다. 타락한 천사가 날개를 잃는 종교화는 보았어도 용의 성스러운 날개를 잘라내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알렌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용은 있다. 이단자 제레미아가 뭐라고 말하건 알렌의 신은 이렇게 존재했다! 그는 신을 증명하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를 발견했으나, 그것은 곧 신의 패배를 의미했다. 그의 신은 이렇게 죽어서 동굴 속에 묻혀 있으니 말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알렌은 두려워졌다. 그는 신의 살해 현장에 있는 것이다. 그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노력했다. 이 사실을 교단에 알려야 한다. 그리하여 교단으로 하여금 신의 유해를 수습하고 이교도에게 마땅한 응징을 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알렌은 미친 듯이 땅을 파기 시작했다. 증거로 삼으려면 용의 뼈를 조금이라도 가져가야 했다. 그러나 손에서 피가 나도록 땅을 팠지만 뼈를 파낼 수는 없었다. 그것은 단단한 바위에 너무도 깊게 박혀 있었다. 마치 수천만 년 전부터 그렇게 존재했던 것 같았다. 허탈했다. 알렌은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동굴을 빠져나왔다.
멀리서 제레미아 전 신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알렌을 애타게 부르고 있었다. 그가 두려웠다. 알렌은 기도했다. 성룡이여 내 영혼을 지켜주소서! 그러나 용마저 살해한 저 사악한 악마 앞에서 누가 안전할 수 있단 말인가? 수호룡도 그를 지켜주지 못한다면 그는 어디로 가야 하나? 알렌은 겁에 질려 눈 덮인 산길을 뛰어갔다. 마침내 기운이 다하여 쓰러졌을 때 그는 마지막으로 새하얀 눈이 자신을 가려 주기를, 저 사악한 악마의 눈에서 숨겨주기를 기도했다.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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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길윤 12.11.13 02:56 댓글 수정 삭제
    재미있게 잘 보았습니다! 단지, 한번 더 이야기를 틀어줬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지순례를 떠나는 주인공, 그리고 성지순례의 숨겨진 진실, 이 두 내용만으로는 이야기가 완결이 되지 않는다는 느낌이랄까요? 숨겨진 진실이라는 것도 특별히 새롭다고 볼 수도 없겠고요. 끝에 가서 더 새로운 뭔가가 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래도 대화와 문장, 묘사는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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