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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거울설화

2012.10.23 18:0410.23


옛날, 여섯 대왕이 세상을 다스리던 시절에 경(鏡)이라고 하는 마물이 살고 있었다. 경은 무엇으로든 변신할 수 있는 능력을 사용하여 세상을 크게 어지럽혔으므로 결국 신의 노여움을 사 거울 속에 갇혔다. 신은 경에게 앞으로 영원히 거울에 비치는 것을 흉내내며 살도록 하는 벌을 내렸다. 그리고 거울을 들여다보는 사람들의 눈을 통해 경을 감시하였다. 여섯 왕국의 사람들은 이런 연유로 거울을 보는 사람에게는 신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으며, 거울 앞에서 눈을 감거나 뒤돌아서는 것을 결코 해서는 안 될 금기로 여겼다.

경이 날뛰는 바람에 가장 큰 피해를 입었던 동왕국의 대왕은 경이 한순간이라도 감시를 피해 딴마음을 먹지 못하도록 자신의 여섯 딸에게 하루종일 거울 앞에서 춤추라 명했다. 첫째, 둘째, 셋째 공주는 흰 옷을 입고 새벽과 아침, 정오의 춤을 추었고, 넷째, 다섯째, 막내 공주는 검은 옷을 입고 오후와 저녁, 자정의 춤을 추었다. 공주들이 춤을 추는 거울의 방에는 눈길 닿는 모든 곳에 전부 거울이 달려 있었으며 춤사위는 흉내내기의 명수인 경도 감히 따라하기 어려울 만큼 복잡하며 화려하였다. 이로써 여섯 왕국에는 잠시나마 평화가 찾아왔다.

자정의 춤을 추는 막내 공주의 이름은 수선(水仙)이었는데, 그녀는 여섯 왕국을 통틀어 감히 겨룰 자가 없다는 미인이었다. 모든 사람이 잠든 한밤중에 거울로 둘러싸인 방에서 매일 춤을 추다 보니 수선은 그만 자기 자신에게 연정을 느끼게 되었다. 사모하는 마음은 하루하루 커져 갔고, 수선은 거울 속의 자신에게 점점 빠져들었다.

"아, 그대는 밤의 여신처럼 아름다워. 내가 미소지으면 언제나 같은 미소로 화답해 줘. 이토록 가까이 있는데 어째서 나는 그대를 안을 수 없지? 부탁이야. 제발 거기서 나와서 내게 입맞춰줘."

어느 날 격정을 이기지 못한 수선은 눈을 감고 거울에 입술을 댔다. 때는 깊은 밤중이라 여섯 왕국의 어떤 사람도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지 않았고 감시가 끊어지자 경은 즉시 뛰쳐나왔다. 수선은 황홀한 마음으로 거울 밖으로 나온 자기 자신을 끌어안았다. 그러나 달콤한 입맞춤만을 남긴 뒤 경은 바람으로 변해 사라졌고,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은 공주는 거울에 머리를 부딪쳐 자결했다.

경이 풀려나자 여섯 왕국은 발칵 뒤집혔다. 멀쩡한 가장이 자고 있던 일가족을 몰살한 뒤 집에 불을 질렀고 존경받던 사제가 신도에게 몹쓸 짓을 저질렀으며 성주가 우물에 맹독을 풀어 수백 명의 백성이 목숨을 잃었다. 경은 일부러 덕망 있는 자로 변신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의심 없이 경에게 접근했다가 당하기 일쑤였다. 또한 경은 사람으로 가득한 저잣거리에서 무시무시한 맹수로 변해 혼비백산한 사람들이 달아나다 서로 밀쳐 다치게 하고, 쥐가 되어 전염병을 옮기는가 하면 왕의 사자로 변하여 국경을 지키는 장수에게 즉시 이웃나라를 침공하라 전하니 크고작은 전쟁이 끊일 날이 없었다.

그 때 신은 은하수가 넘치는 바람에 쓸려나간 별자리를 고쳐 박느라 바빠 손수 경을 물리치러 가지 못하고, 대신 경만큼 변신에 능한 감(鑑)이라는 장수를 세상에 내려보냈다. 신은 감에게 일전에 자신이 경의 본체를 여섯 조각으로 나누어 여섯 왕국의 큰 거울 속에 가두었으니 그 거울 여섯 개만 깨뜨리면 경이 죽으리라 일러 주었다. 신은 지금 경이 달아나서 세상의 모든 거울이며 유리와 잔잔한 물, 반질반질한 금속에 만물의 형상이 비치지 않는데 그 여섯 거울에만은 비칠 터이니 사람들에게 물어보아 반드시 찾아 부수라 명했다.

감은 신이 명한 대로 여섯 왕국을 돌아다니며 성의 큰 유리창을 깨고, 잔잔한 호수를 말려 버리고, 은으로 만든 왕의 검을 용광로에 던지는 등 경의 본체를 하나하나 없애나갔다. 그러나 경의 본체가 점점 줄어들었건만 여전히 여섯 왕국에서는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사람을 죽이거나 물건을 훔치고도 경이 저지른 짓이라 발뺌하는 자들이 생겨난 탓이었다. 하여 감은 더욱 부지런히 거울을 찾아다닌 끝에 마침내 경의 다섯 번째 본체까지 없앨 수 있었다. 감이 본체를 없애는 동안 경은 한 번도 감을 막거나 그와 싸우려 하지 않았다. 감이 경의 다섯 번째 본체가 갇혀 있던 서왕국의 검은 대리석 제단을 깨부수자 그제서야 감의 앞에 나타난 경은 깔깔 웃으며 그를 조롱했다.

"멍청한 주인에 멍청한 수하로다. 어리석고 어리석구나. 부질없는 명령을 따르느라 애썼으니 내 특별히 좋은 것을 가르쳐 주마. 마지막 한 조각은 동왕국 공주가 몸을 던진 거울 속에 있었느니라. 내 빠져나올 적에 그것을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 수만큼 나누고, 다시 각각을 둘로 찢어 뭇사람의 눈동자 속에 심어 두었으니 네가 그것을 어찌 다 찾아 없애겠느냐? 공연히 헛고생 말고 돌아가거라."

이 말을 들은 감이 사람들의 눈을 들여다봤더니 과연 자신의 모습이 뚜렷히 비쳤다. 감은 그날부터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눈알을 뽑아다 으깨 버렸다. 감을 영웅이라 칭송하던 여섯 왕국의 사람들은 이제 감을 피해 달아나기 바빴다. 그러자 보다못한 여섯 대왕은 군사를 일으켜 감을 쫓았고, 여섯 왕국 어디에도 갈 곳이 없게 된 감은 하늘로 돌아가려 했다. 그러나 눈을 잃은 사람들의 원성이 이미 하늘을 찔렀으므로 신은 감을 꾸짖으며 하늘 문을 굳게 걸어잠갔다.

"경이 그런 짓을 저질렀으면 일단 돌아와서 나와 상의할 것이지, 누가 너에게 사람들을 소경으로 만들라 하더냐? 너와 같이 우둔하고 잔인한 자를 더 이상 하늘에 둘 수 없으니 썩 꺼지거라!"

하늘에서도 추방당한 감은 결국 여섯 대왕의 군사를 피해 거울 속으로 들어가 숨었다. 그리고 경이 하던 대로 거울에 비치는 형상을 흉내내며 살게 되었다. 거울을 이르는 말인 경과 감은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경은 끝내 잡히지 않았으나 감이 거울 속에 들어간 뒤로는 큰 소동을 벌이는 일 없이 잠잠해졌다. 다만 이후로 사람들은 이따금 자신과 똑같이 생긴 사람을 보게 되었는데, 이것은 모두 경이 사람을 놀래키기 위해 변신한 것이다. 또한 덕망 있던 사람이 갑자기 돌변하여 악행을 저지르는 일이 있는데, 이것은 눈동자에 있는 경이 부추긴 탓이다. 따라서 여섯 왕국에서는 이전에 죄를 지은 일이 없던 사람이 별안간 아무 이유 없이 부모를 살해하는 등의 중죄를 저지르면 벌로써 반드시 그 눈을 뽑아 태웠다.
너구리맛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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