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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그 남자의 귀

2011.01.27 10:4901.27

그 남자의 귀


외출하려고 문을 여는 순간 피묻은 손이 불쑥 들어와 하마터면 놀라 기절할 뻔했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남자는 한참 전에 올라와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듯 보였다. 나는 냉동인간처럼 얼어붙어 꼼짝도 못하고 문밖에 서 있는 남자를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오른쪽 귀를 가리고 있는 손등에 붉은 피가 잔뜩 묻어 있고, 더듬더듬 뭐라고 지껄이는데 무슨 말 하는지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벌겋게 충혈된 눈에서는 찔끔찔끔 눈물이 새어나왔다. 순간 아폴로 눈병이 생각나 얼른 고개를 돌렸다. 나는 알레르기성 결막염이 있어서 눈병에 걸린 사람을 쳐다보기만 해도 눈동자가 가려워 며칠 동안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낯선 남자 때문에 일순간 기분이 잡쳐 외출을 포기하고 문을 닫으려 했다. 그때 남자가 왼손을 들어 무언가를 내밀었다. 아무렇게 접은 하얀 헝겊인데 거기에 뭐가 들어 있는지도 모르고 얼떨결에 받았다. 그러자 남자는 임무를 다한 사람처럼 비상계단을 통해 내려갔다. 나는 지지대를 붙잡고 조심조심 내려가는 남자를 바라보며 엘리베이터가 있는데 왜 걸어서 내려갈까 생각했다. 남자는 처음부터 엘리베이터를 이용할 뜻이 없었는지도 몰랐다. 남자가 보이지 않자 그제야 내가 무언가를 쥐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하얀 헝겊에서 사내의 온기가 느껴졌다. 이런 더러운 걸 건넨다고 덥석 받아든 나 자신이 참으로 한심스러웠다. 받지 말든가 남자가 보는 앞에서 바닥에 버렸어야 했다. 하는 수 없이 쓰레기통에 버리려고 돌아서는데 헝겊에서 뭉툭한 게 만져져 무얼까 하고 궁금증이 일었다. 그 사이에 일년생 얼룩무늬 고양이가 눈앞에 나타나 어슬렁거렸다. 녀석은 최근 발정기라 밤마다 암고양이를 찾지 못해 안달인데, 어제는 내 다리에 대갈통을 대고 문지르다 호되게 당했다.
풀어헤친 헝겊 속에 사람 귀가 들어 있었다.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찬찬히 살펴보았다. 날카로운 칼로 단번에 잘랐는지 잘린 부분이 매끈하고 색깔이 선명했다. 조금 전 봤던 남자가 왜 오른쪽 귀를 가리고 있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남자는 가까운 곳에서 귀를 자른 후 곧장 이곳으로 가져왔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나였을까. 혹시 아는 사람이 아닐까 싶어 곰곰이 생각해보았지만, 조금 전 말고 어디서 본 기억이 없었다. 멀쩡한 귀를 자른 것도 이해가 가지 않지만, 전혀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찾아와 건네주고 갔다는 사실이 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처음 보는 게 확실하다면 문 앞에서 남자와 내가 마주친 건 우연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남자는 귀를 잘라 무작정을 계단을 올랐고, 마침맞게 내가 문을 열고 나와 딱 마주쳤다. 아무튼, 그렇게 생각하니까 마음이 편했다.
고양이가 어느새 냄새를 맡고 남자의 귀에 눈독을 들였다. 녀석은 당장에라도 물고 가서 아작아작 씹어 먹고 싶은 눈초리였다. 귀는 막 잘라낸 거라 신선도가 높고 말랑말랑해 고양이가 먹기에는 딱 좋았다. 사람 귀만 아니면 진작 고양이에게 던져줬을 것이었다. 어떻게 나오나 보려고 모른 체하고 있으니까 녀석이 눈치를 슬슬 살피며 슬금슬금 기어왔다. 순간 야! 하고 소리 지르며 발길질을 날렸다. 복부를 세게 걷어차인 고양이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부리나케 도망쳤다. 남자가 어디에 사는지 알면 당장 가서 돌려주겠는데 모르는 사람이라 그럴 수도 없고, 아무짝에도 필요 없는 거니까 빨리 찾아갔으면 하는 생각뿐이었다.
옷을 갈아입고 나와 잡지를 뒤적거리는데 남자 얼굴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내 기억 속에 없다고 해서 그 남자가 이곳 아파트에 살지 않는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었다. 이곳에 이사 온 지도 벌써 육 개월이 지났는데 아직도 나는 앞집 사람들하고만 말을 트고 살뿐 위층에 누가 사는지도 몰랐다. 그만큼 잘 돌아다니지도 않고 사람을 쉽게 사귀지 못하는 성격이라 남자가 같은 동에 살더라도 모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조금 전 남자가 보여준 행동은 지극히 비정상적이었다. 경비실 직원한테 물어보면 어디 사는 누군지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수화기를 집어 들고 호출버튼을 눌렀다. 조금 있으니까 수화기에서 경비실 직원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나는 조금 전 봤던 남자에 대해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경비실 직원은 아무 말 않고 한참 듣고 있다가 내 설명이 끝나자 “그런 사람 못 봤는데요.” 하고 짧게 한마디 하고는 끊었다.
다시 소파로 가서 헝겊 위에 놓여 있는 귀를 보았다. 보기 싫어도 눈앞에 있으니까 저절로 보게 되었다. 사람 귀만 아니면 당장 쓰레기통에 버리겠는데 그럴 수도 없고, 남자가 찾으러 오지 않으면 어떡하나 난감했다. 순간 귀가 살아 움직였다. 누가 건든 것도 아닌데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고등학교 때 같은 반 남자아이가 신기한 걸 보여주겠다며 교단에 올라가 귀를 움직이는 시범을 보였다. 그 친구는 양쪽 귀를 자유자재로 움직여 아이들로부터 당나귀 귀라는 소리를 들었다. 지금 눈앞에 놓여 있는 귀도 그 친구 귀처럼 살아 움직였다.
그때 인터폰에서 ‘삐리리’ 하고 벨 소리가 들렸다. 정신이 팔려 있는 상태에서 갑자기 벨 소리가 들리니까 가슴이 벌렁벌렁 뛰었다.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인터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경비실 직원이 부르는 소리라는 걸 알고 얼른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무슨 일이냐고 묻자 경비실 직원이 조금 전 내가 설명한 남자를 봤다고 했다. 인상착의가 내가 말한 사람과 똑같아 무슨 일로 찾아왔는지 물어보려고 부르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 동 건물 뒤로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나는 남자가 오른쪽 귀를 가리고 있었냐고 물었다. 오른쪽 귀를 가리고 있었다면 그 남자가 분명했다. 하지만, 경비실 직원은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다고 했다. 남자가 갑자기 뛰쳐나가서 자세히 볼 수 없었으리라.
나는 알았다, 말하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경비실 직원 이야기를 들으니까 남자에 대한 궁금증이 더해갔다. 남자가 앞 동 건물 뒤로 사라졌다는 말이 떠올라 베란다 창문을 열고 주위를 살펴보았다. 조금 전 봤던 남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창문을 닫고 거실 쪽으로 걸어가며 생각했다. 남자가 비상계단을 통해 내려갔으니까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기다렸다면 경비실 앞에서 붙잡을 수 있었을 텐데 왜 그 생각을 못했나 몰랐다.
후회도 잠시, 눈앞에 벌어진 광경을 보고 또 한 번 매우 놀랐다. 조금 전까지 소파 위에 놓여 있었던 귀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하얀 헝겊만 펼쳐져 있고 귀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경비실 직원과 통화하는 사이에 고양이가 물어간 것일까. 조금 전에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도망친 뒤로는 못 본 것 같은데, 아무튼 소파 위에 있던 귀가 감쪽같이 사라졌다면 보나 마나 고양이 짓이었다. 고양이가 물어갔다고 생각하니까 눈앞이 캄캄했다. 어딘가에 숨어 아작아작 씹어 먹고 있을 것 아닌가.
고양이가 있을 곳은 뒤쪽 베란다밖에 없었다. 거긴 잡동사니가 많아 숨어서 먹기에는 딱 좋았다. 황급히 가서 보니 예상대로 거기에 고양이가 있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고양이가 바닥에 깔아놓은 낡은 모포 위에 잠들어 있었다. 몰래 이불 속에 파고들어 자는 것까지는 좋은데 아무 데나 오줌을 싸질러놓아 따끔하게 야단치고는 바닥에 모포를 깔아줬더니만 녀석도 자기 잠자리라는 걸 아는지 꼭 여기 와서 잤다. 새근새근 자는 모습을 보니 녀석이 정말 귀를 물어갔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남자의 귀도 보이지 않았다. 없어진 시간이 얼마 안 되기 때문에 아무리 먹성이 좋다 해도 그 사이에 먹어치웠을 리는 없었다.
혹시 귀를 어딘가에 숨겨놓고 자는 척하는 건 아닐까. 꾀가 보통이 아녀서 그럴 가능성이 컸다. 아까 냄새를 맡고 코를 킁킁거릴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나는 슬리퍼도 신지 않고 걸어가 자는 척하고 있는 고양이를 세게 발로 찼다. 그러자 고양이가 화들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내가 입구를 막고 서 있기 때문에 녀석은 아까처럼 도망치지 못하고 내 눈치를 살폈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아 나는 고양이를 붙잡아 목을 졸랐다. 생각할수록 괘씸해 죽여버리고 싶었다. 당장 남자가 찾아와 달라고 하면 뭐라고 한단 말인가. 고양이가 본능적으로 위기의식을 느끼고 발버둥쳤다. 날카로운 발톱이 손등을 후벼 파 더는 견디지 못하고 거세게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바닥에 떨어진 녀석은 죽기 살기로 도망쳤다. 고양이가 마구잡이로 긁어놓은 손등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심란했다.
생각보다 상처가 심해 연고를 바르려고 거실 쪽으로 걸어가는데 어디에 숨었는지 고양이가 보이지 않았다. 잠자다 갑자기 당한 일이라 녀석도 몹시 놀랐을 것이었다. 거실장 서랍을 뒤져 연고를 찾았다. 나는 상처에 연고를 바르며 생각했다. 고양이가 사람 육신을 먹다니. 상상도 하기 싫었다. 그런데 정말 녀석이 그 남자의 귀를 물어가 먹은 걸까. 두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기 때문에 녀석의 짓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었다. 그게 사실이 아니라면 나는 녀석에게 못할 짓을 저지른 거나 다름없었다. 미안한 마음에 연고를 제자리에 놓고 고양이를 불렀다. 다른 때 같으면 한 번 만에 야옹! 하고 나타났을 텐데 좀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나오기 싫은 모양이다 생각하고 찾기를 포기했다. 소파 위에 놓여 있는 피묻은 헝겊이 꼴도 보기 싫어 쓰레기통에 버렸다.

다음 날 아침 늦게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전날 없어진 귀는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거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머리카락을 쓸어 모아 쓰레기통에 버리려는데 피묻은 헝겊이 눈에 띄었다. 그제야 전날 벌어진 일이 생생히 기억났다. 없어진 귀보다 고양이한테 너무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말 못하는 짐승이지만 함부로 대한 건 내 잘못이었다. 그 뒤로 고양이는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이 시간이면 어슬렁거리며 아침잠을 깨웠을 텐데 보이지 않는 걸로 보아 전날 받은 충격이 생각보다 컸던 모양이었다. 모포를 깔아놓은 곳에도 고양이는 없었다. 현관문이 닫혀 있으니 밖으로 나갔을 리는 없고, 있을 곳은 여기밖에 없는데 녀석은 어디에 숨어 있는 걸까. 고양이 발톱에 긁힌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아 연고를 한 번 더 발라야 할 것 같았다.
집 안 공기가 탁해 베란다 창문을 열고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선선한 가을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지금은 주차장이 텅 비었으나 어둠이 찾아오면 차들이 빈자리를 찾지 못해 주변을 빙빙 돌았다. 주차공간은 턱없이 부족한데 차들이 무장 늘어나 벌어지는 현상으로,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 무슨 놈의 차가 그리도 많은지 몰랐다. 생각 같아서는 절반 정도는 폐차장으로 보내버리고 싶었다. 앞 동 건물을 보고 있으니 전날 귀를 건네주고 간 남자가 떠올랐다. 남자는 경비실 직원이 소리쳐 부르자 뒤로 돌아보지 않고 앞 동 건물 뒤로 사라졌다. 그렇다면 혹시 앞 동에 사는 건 아닐까.
남자는 어딘가 모르게 사람이 모자라 보였다. 머리는 언제 감았는지 모를 정도로 산발이고 눈에서는 진물이 질질 흘러내렸다. 내 눈이 멀쩡한 걸로 보아 다행히 눈병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눈병이었으면 가려워 견디지 못하고 병원을 찾았을 것이었다. 말도 어눌해 무슨 말 하는지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오른쪽 귀를 가리고 있는 손등은 피가 잔뜩 묻어 있었다. 그럼 계속 바라보고 서 있을 것이 아니라 곧장 문을 닫고 들어가 버려야 했다. 그랬으면 남자가 건네준 더러운 헝겊을 받지 않았을 테고, 고양이를 의심하는 일도 없었을 것 아닌가.
고양이 짓이 아니라면 귀에 발이 달린 것도 아니고 도대체 누가 가져갔단 말인가. 순간 귀가 꿈틀하고 살아 움직인 장면이 떠올랐다. 남들은 거짓말이라고 하겠지만, 귀가 살아 움직이는 걸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혹시 한 눈 파는 사이에 바닥에 떨어지지 않았나 싶어 엎드려 소파 밑을 들여다보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곳이라고 청소를 하지 않아 먼지가 수북했다. 사람 귀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저만큼 지저분할 것이었다. 먼지 더미 속에 십 원짜리 동전과 아이들 머리핀이 처박혀 있었다. 며칠 전 찾아온 조카 아이가 잃어 먹은 바로 그 머리핀이었다. 하지만, 소파 밑에도 귀는 보이지 않았다.
찾는다 해도 하루가 지났으니 귀는 이제 쓸모가 없었다. 귀를 살리고 싶은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이곳으로 올 것이 아니라 바로 병원으로 갔어야 했다. 그때 전화가 걸려와 받으니 젊은 아가씨가 제주도에 좋은 자리가 나왔는데 투자할 뜻이 없느냐고 물었다. 자리가 좋으면 자기가 투자할 것이지 왜 엉뚱한 사람한테 전화를 걸어 귀찮게 하는지 몰랐다. 나는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끊고 아침을 먹으러 주방으로 갔다. 먼저 토스터에 식빵을 굽고 가스렌즈에 프라이팬을 올렸다. 식용유가 탁탁 튀어 손등이 따가웠다. 계란이 너무 익으면 맛이 없어 불을 줄였다.
잠시 후 커피가 생각나 가스 불을 켜고 기다렸다. 주방 창문을 통해 뒤쪽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거실 소파에 머리가 허연 노파가 멍하니 앉아 있었다. 낮 동안에 저 노파는 늘 혼자였다. 오후에 중학생으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다녀왔다는 인사도 않고 곧장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노파도 남자아이가 옷을 갈아입고 나와 왔다 갔다 해도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저녁때가 되면 여자가 외출을 마치고 돌아와 저녁을 준비했다. 저녁 식사를 마친 후에도 노파는 텔레비전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집안 가장인 남자는 노파가 잠들고 한참 후에 귀가했다. 그렇게 노파는 식구들과 한 마디 대화도 나누지 않고 하루를 보냈다. 그때 물 끓는 소리가 들려 불을 끄고 커피잔에 물을 부었다. 은은한 커피 향이 코끝에 스쳤다.

오후 네 시경, 소파에 앉아 책을 읽었다. 그때까지도 고양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배가 고프면 나올 줄 알았는데 단단히 삐친 모양이었다. 나는 스스로 나오기를 바라며 일부러 찾지 않았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찾아올 사람도 없는데 누굴까. 책을 덮어놓고 현관문 쪽으로 가만가만 걸어갔다. 누구냐고 물어도 대답이 없어 현관문에 붙은 어안렌즈에 눈을 댔다. 밖에 서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어제 자신의 귀를 건네주고 간 그 남자였다. 오늘도 어제처럼 오른쪽 귀를 가리고 있었다. 순간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귀를 찾으러 온 모양인데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손이 부르르 떨렸다. 잠시 후 또다시 초인종이 울렸다. 하는 수 없이 문을 열고 무슨 일로 왔느냐고 물었다.
사내 눈은 어제보다 더 심각했다. 붉은 결막이 눈동자를 뒤덮어 검은자위가 보이지 않을 정도인데, 사내는 가려움을 참지 못하고 더러운 손으로 눈을 문질렀다. 참기 어렵다는 건 잘 알지만 그럼 더 상태는 악화될 뿐이었다. 남자가 손을 내리자 눈에서 눈물이 찔끔찔끔 새어나왔다. 보고 있었더니 내 눈마저 가려워지려고 했다. 들어오라고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데, 남자가 허락도 받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나는 막을 생각도 못하고 손님을 맞듯 한쪽으로 비켜섰다. 남자가 벗어놓은 싸구려 신발은 땟물이 잔뜩 끼어 있었다. 저 더러운 발로 밟고 다니면 거실이 얼마나 지저분해질까 생각하니 기분이 언짢았다. 그래도 저지른 잘못이 있어서 아무 말도 못 했다. 남자는 거실 한가운데 섰다. 나는 남자가 먼저 말을 꺼내기를 기다렸다. 멀쩡한 귀를 잘랐으니 통증이 심할 텐데, 남자는 그런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저희 집에 무슨 일로 오셨죠?”
남자는 내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주위를 둘레둘레 살피더니 갑자기 왼손을 내밀었다. 손금에 까맣게 때가 끼어 있었다. 며칠 동안 한 번도 손을 씻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남자의 행동은 전날 주고 간 귀를 내놓으라는 뜻이었다. 귀만 돌려주면 곧장 떠날 것처럼 보였다. 나도 지저분한 남자와 마주 보고 서 있는 것 자체가 싫으므로 어디에 있는지 알면 건네고 당장 내쫓고 싶었다. 하지만, 남자 귀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 기르는 고양이가 먹어버렸다고 말하려다 갑자기 미쳐 날뛰면 어쩌나 싶어 입을 다물다. 남자 모습을 보더라도 그럴 가능성이 컸다. 우선 남자를 안심시켜야 할 것 같아 소파에 앉게 하고 왜 귀를 잘랐는지 물어보기로 했다. 다행히 남자는 내 말에 순순히 따라줬다.
“말해보세요. 귀를 왜 잘랐죠?”
나는 이동이 자유로운 일인용 소파를 가져다 놓고 맞은편에 앉았다. 남자는 여전히 오른쪽 귀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붕대를 감으면 괜찮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두 손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었다. 순간 빈센트 반 고흐의 ‘자화상’이라는 작품이 떠올랐다. 고흐는 자신의 귀를 잘라서 라셀이라는 창녀에게 가져다줬다. 세상 여자들은 아무도 고흐를 사랑하지 않았으며, 고흐를 동정해준 여자는 라셀이라는 그 창녀뿐이었다. 백 년 전에 죽은 고흐에게 왜 귀를 잘랐느냐고 묻는 기분이었다.
남자가 뭐라 뭐라 지껄이는데 시끄럽기만 할 뿐 무슨 말 하는지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내가 자신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는 걸 알고 남자가 갑자기 입을 다물어버렸다. 남자의 입을 다물게 해 미안하지만 나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 누구도 남자 말을 알아듣지 못할 것이었다. 남자가 입을 굳게 다물고 조금 전처럼 다시 손을 내밀었다. 대화를 나눌 수 없기에 이제 어쩔 수 없이 귀를 내놓아야 하는데, 없는 귀를 어떻게 내놓는단 말인가. 얼굴이 화끈거리고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나를 바라보는 사내의 눈은 결막염 때문에 무섭기도 하고 무척 애처로웠다. 당장 귀를 내놓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릴 것 같았다. 가까이 있으니까 남자 몸에서 풍기는 냄새가 심했다. 오랫동안 빨지 않은 걸레에서 나는 자릿내와 비슷했다. 그래도 참아야 했다. 참고 어떻게든 남자와 대화를 계속 이어가야 했다.
말을 제대로 알아들으려면 우선 더듬는 버릇부터 잡아야 했다. 숨을 길게 들이마시게 한 후 말을 천천히 하라고 시켰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 단어씩 끊어 말했다. 그러니까 무슨 말 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말이 빨라져 처음 상태로 돌아갔다. 그러면 말을 못하게 막고 다시 천천히 하라고 시켰다. 남자는 처음 말을 배우는 아이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따라 했다. 그러니까 점점 나아져 두 단어를 연속으로 말해도 무슨 말 하는지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말이 통하니까 남자도 차츰 안정을 찾아갔다.

전날 남자가 주고 간 귀는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한쪽 귀를 가리고 있었기 때문에 남자의 귀라고 생각했지 다른 사람 귀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다. 남자와 대화를 나누고 나서야 그 귀가 다른 사람 귀라는 걸 알았다. 남자 귀는 양쪽 모두 제자리에 붙어 있었다. 남자가 한쪽 귀를 가리고 다니는 건 귓속에서 피고름이 새어나오기 때문이었다. 남자는 오래전부터 중이염을 앓았다. 피고름이 새어나오고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면 무척 심각하다는 건데 형편상 병원 한번 못 갔다. 오른쪽 귀는 청력을 완전히 상실해 소리를 전혀 듣지 못하고 왼쪽 귀로만 겨우겨우 들었다. 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남자는 상대가 무슨 말 하는지도 모르고 임의대로 판단해 제멋대로 지껄였다. 되지도 않는 말을 쉴 새 없이 지껄이다 상대가 못 알아듣는 눈치다 싶으면 아까처럼 입을 다물어버렸다.
남자는 남에게 자신의 귀를 보여주는 걸 망설였다. 내가 간절히 원하자 마지못해 손을 내리고 귀를 보여줬다. 그제야 남자가 왜 귀를 가리고 다니는지 알 것 같았다. 귓속에서 피고름이 새어나와 범벅이고, 귓바퀴도 불에 덴 듯 뻘겋게 부어 있었다. 귓속은 굳이 들여다보지 않아도 어떤 상태일지 뻔했다. 당장 가서 치료를 받지 않으면 퉁퉁 부어오른 귀가 썩어 문드러져 잘라내야 할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남자가 무안해할까 봐 내색하지 않으려고 나름대로 노력했지만, 저절로 인상이 구겨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솔직히 남자 귀를 보는 순간 속이 울렁거려 아침에 먹은 것까지 몽땅 넘어오려고 했다. 비위가 조금만 약했어도 변기통에 얼굴을 처박고 토했을 것이었다.
“그럼 어제 건네준 귀는 누구의 것이죠?”
자신의 귀가 아니면 도대체 누구의 귀를 가져와 건네준 것일까. 질문을 던지고 한참을 기다려도 남자는 입을 열지 않았다. 재차 질문을 던지자 남자는 아예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창밖을 보았다.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있었다. 남자와 대화를 나누다 보니 날이 저문 줄도 몰랐다. 알아먹기 어려운데다 말이 늦으니 시간이 몇 배는 더 걸렸다. 남자는 저문 하늘을 한참 바라보고는 곧 돌아갈 채비를 했다.
“가면 기다리는 사람이 있나요?”
나는 남자가 어디에서 누구랑 사는지 궁금했다. 혼자 살아도 자는 곳은 있을 것 아닌가. 남자는 내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처음부터 빈손이었는데 무얼 찾는 걸까.
“뭘 찾으시죠?”
남자는 앉은자리까지 샅샅이 살피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는 영문을 몰라 멍하니 남자를 바라보았다. 잠시 후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자는 귀를 돌려달라는 말은 더는 하지 않았다. 내가 내놓지 않자 이미 포기한 듯 보였다. 쓰레기통에 버렸다고 생각하는지 몰랐다. 나는 지저분해 남자 팔을 붙잡지 못하고 뒤따라가며 어제 가져온 귀는 누구의 거냐고 물었다. 남자는 신발을 찾아 신고 더듬더듬 자기를 따라오겠느냐고 물었다. 남자를 따라가면 귀 주인을 만나지 않을까 싶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신발장에서 운동화를 꺼내 신었다.
남자는 어제처럼 비상계단을 통해 천천히 내려갔다. 남자가 엘리베이터를 타지 못하는 이유가 있었다. 달팽이관이 망가져 남자는 엘리베이터를 타면 현기증을 느꼈다. 조금만 뛰어도 귓속이 울리기 때문에 계단을 급히 내려가지도 못했다. 어제도 그랬지만, 오늘도 일 층까지 내려오는데 한참이 걸렸다. 경비실 직원은 순찰을 나갔는지 자리에 없었다. 남자는 좌우를 살피고는 앞 동 건물 쪽으로 걸어갔다. 사람들이 남자를 수상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남자는 건물 뒤로 돌아가 잠깐 멈춰 서는가 싶더니 이내 지하로 내려갔다. 건물 뒤편은 사람들 발길이 뜸했다. 관리실에서 화단을 조성해 놓았지만 그늘져 식물이 잘 자라지 못했다. 나는 남자를 따라 건물지하로 내려갔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은 달팽이관처럼 이어져 있었다. 남자를 따라 들어간 곳은 햇볕이 들지 않아 공기가 축축했다. 한쪽 구석에는 폐지라든가 잡다한 물건이 널브러져 있었다. 경비실 직원이 사람들이 이사 가면서 버리고 간 물건 중에 쓸 만한 걸 골라 모아놓은 것으로, 이렇게 모아놓았다가 나중에 고물상에 팔아넘기면 목돈이 생겼다. 먼저 내려간 남자가 작은 창문이 붙어 있는 벽 쪽에 서 있었다. 그리고 뒤쪽에 모르는 여자가 앉아 이쪽을 바라보았다. 여자가 앉아 있는 바닥에는 스티로폼이 깔려 있는데,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를 막아줬다. 나는 두 사람 있는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제야 여자가 자세히 보였다. 어린아이를 안고 있는데 젖꼭지를 물린 상태였다. 여자는 남자보다 더 나이가 들어 보였다. 어림잡아 사십 대 중반은 되지 않을까 싶었다. 남자도 그렇지만 여자는 전형적인 부랑자 모습이었다. 잘 먹지 못해 얼굴은 숯등걸처럼 시커멓고 젖가슴은 물기가 빠진 단무지처럼 쭈글쭈글했다. 가슴을 물고 있어도 젖이 나오지 않으니 아이는 삐쩍 말랐다.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건네도 여자는 본체만체 했다. 여자와 거리는 두 발짝쯤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가까웠다. 순간 아이가 칭얼거려 여자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이럴 수가! 나는 여자의 한쪽 귀가 없는 걸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결국, 어제 남자가 가져온 귀는 여자의 귀였다. 내가 화들짝 놀라자 여자가 눈을 치켜뜨고 쳐다보았다.
여자는 보통사람과 똑같이 대화할 수 있었다. 아이가 계속해서 칭얼대자 남자가 빼앗듯 안아들어 달랬다. 나는 전날 남자가 귀를 건네주고 간 사실을 밝히고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다. 여자는 벌어진 가슴을 여미며 남자한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광대뼈 부분이 퍼렇게 멍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상습적인 구타가 있지 않나 싶었다. 남자는 짐짓 모른 체했다. 아이가 계속 칭얼대자 남자가 아이를 안고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방해받지 말고 조용히 대화 나누라고 일부러 자리를 비켜준 듯 보였다. 한쪽 귀가 없는 여자는 낯설게 느껴졌다. 지금도 어두운데 좀 더 시간이 지나면 어두컴컴해 사물을 분별하기 어려울 것이었다. 그래도 여자는 촛불을 밝힐 생각을 하지 있었다. 촛불을 밝히면 불빛이 새어나가 사람들이 지하실로 들이닥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양초는 두 개씩이나 옆에 두고 있었다.

여자가 남자를 처음 만난 건 작년 초여름이었다. 어둔 골목에서 남자의 신음이 들렸다. 남자는 머리를 얻어맞아 귀밑 쪽으로 피가 흘러내렸다. 술에 취해 걸어가다 불량배한테 당한 듯 지갑도 털리고 없었다. 남자는 인사불성이었는데 목숨을 잃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여자는 사람들을 불러서 노숙하는 곳으로 남자를 데려갔다. 그리고 남자가 의식을 되찾을 때까지 돌봤다. 사경을 헤매던 남자는 일주일 만에 의식을 되찾았다. 하지만, 머리를 다친 탓에 자신이 누구고 어디에 사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하는 수 없이 남자가 기억을 되찾을 때까지 데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부터 남자는 여자와 함께 생활했다.
며칠 후 남자는 오른쪽 고막이 터졌다는 걸 알았다. 왼쪽 귀를 막으면 오른쪽 귀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귀에서 계속해서 진물이 새어나왔다. 그날 바로 병원에 갔으면 지금처럼 악화하지는 않았을 텐데 내버려둬 왼쪽 귀마저 염증이 생겼다. 그때부터 남자는 사람들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말을 더듬었다.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을 지껄이자 사람들이 병신이라고 가까이 오지도 못하게 했다. 가까이 다가오면 발길질을 해서 내쫓았다. 사람들이 이유도 없이 발길질하고 주먹을 날리자 남자는 차츰 사람 많은 곳을 피했다. 남자가 사람들을 극도로 무서워하자 여자가 보다 못 해 그곳에서 데리고 나왔다. 그리고 사람들 없는 곳을 찾아다녔다. 그 사이에 아이까지 생겨 지하철 화장실에서 청소하는 아줌마 도움을 받아 아이를 낳았다.
남자는 갈수록 상태가 나빠져 밤마다 환청에 시달렸다. 험악하게 생긴 사람들이 갑자기 나타나 욕하고 몽둥이를 휘둘러 남자는 웅크리고 앉아 달달 떨었다. 심하면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거나 마구 던지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럼 여자는 잠결에 일어나 남자를 붙잡고 못하게 말렸다. 하지만, 자신보다 힘이 몇 배는 센 남자를 무슨 수로 막는단 말인가. 여자가 붙잡고 말리면 남자는 소리를 지르며 주먹을 휘둘렀다. 얼떨결에 한 대 맞으면 어찌나 아픈지 얼굴이 얼얼했다. 앞니가 하나 없는 것도 남자가 휘두른 주먹 때문이었다.
급기야 어제는 식칼을 집어 들고 난동을 피웠다.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바닥에 떨어진 식칼을 집어 들고 마구 휘둘렀다. 저러다 손목이라도 그으면 큰일이다 싶어 여자는 필사적으로 남자의 팔을 붙잡고 늘었다. 남자는 붙잡고 늘어지는 여자를 뿌리치고는 순식간에 달려들어 여자 귀를 잘라버렸다. 귀가 잘리는 순간 극심한 공포를 느낀 여자는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남자는 여자의 귀를 어찌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다 헝겊으로 싸서 밖으로 나갔다. 여자는 한참 후에 아이 울음소리를 듣고 깼다. 귀가 잘려나간 자리가 바늘로 콕콕 찌르듯 아픈데 그나마 쓰러져 있는 동안 피가 멎어 다행이었다. 여자는 우는 아이를 달래며 남자를 기다렸다. 남자는 날이 저물 때쯤 돌아왔는데, 빈손이었다. 가지고 나간 귀를 어떻게 했느냐고 물어도 남자는 묵묵부답이었다. 남자가 말을 하지 않으니 여자는 더는 묻지 않았다. 남자는 그때부터 잠을 자기 시작해 점심때가 한참 지난 후에야 깼다. 그리고 한쪽 귀가 없는 여자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여자는 일부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남자는 귀를 찾아오겠다, 말하고 밖으로 나갔다.
나는 귀를 쓰레기통에 버렸다고 거짓말했다. 순간 여자가 고개를 옆으로 살짝 돌렸는데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었다.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져 돌아보니 남자가 뒤에 서 있었다. 방금 내가 한 말을 들었는지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나는 미안하다, 말하고 걸어 나왔다. 밤이라도 건물 밖은 지하보다 훨씬 밝았다. 주변에 불빛이 많기 때문이었다. 화단에 심어진 나무를 하나하나 바라보며 걸어가는데 지하에서 남자의 절규소리가 들렸다.

다음날도 늦게 잠에서 깼다. 악몽에 시달린 탓에 몸에서 땀 냄새가 나 욕실에 들어가 샤워부터 했다. 샤워하면서 고양이가 어디로 사라졌을까 생각했다. 문이 닫혀 있었기 때문에 밖으로 나갔을 리는 없고, 베란다부터 샅샅이 뒤져봐야 할 것 같았다. 샤워를 마치고 나와서 옷걸이에 걸려 있는 블라우스와 함께 속옷을 드럼세탁기에 집어넣었다. 드럼세탁기는 뚜껑이 반쯤 열려 있는 상태였다. 뚜껑을 닫고 버튼을 누르자 곧 물줄기가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까지도 나는 세탁기 속에 고양이가 들어 있을 거라고는 생각을 못했다. 고양이는 브래지어와 속옷을 뒤집어쓴 채 뚜껑을 통해 내다보고 있었으리라.
나는 베란다 창문을 활짝 열고 청소기를 돌렸다. 큰방 작은방 모두 청소를 마치고 열어놓은 창문을 닫으러 베란다로 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도 없었는데 지금 보니까 앞 동 건물 앞에 사람들이 웅성웅성 몰려 있었다. 나는 무슨 일인가 싶어 사람들한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때 경비실 직원이 건물 뒤쪽에서 누군가를 데리고 나왔다. 아이를 안고 있는 것으로 보아 어제저녁 때 봤던 그 여자가 틀림없었다. 남자는 지하에 없었는지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한쪽 귀가 잘려나간 걸 알고 경악했다.
그때 드럼세탁기에서 종료를 알리는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세탁실로 가기 전에 음악을 들으려고 오디오를 켰다. 소리크기를 높이고 돌아서려는데 오디오 뒤쪽에 눈에 익은 살점이 떨어져 있었다. 살점은 남자한테서 처음 건네받았을 때보다 훨씬 색깔이 어두웠다. 나는 살점을 집어 들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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