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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마른 바다 건너기.

2010.12.07 04:3112.07



으악!
내가 녀석을 발견한 건 이틀 전이었다. 올해 들어 처음이었다.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간에 조용히 화장실을 가려고 주방에 붙어있는 내 방을 나왔을 때였다. 주방 한 쪽에 놓인 웅웅거리는 냉장고 밑으로 긴 더듬이를 흔들며 녀석이 기어가고 있었다. 분명 바퀴벌레였다. 녀석은 내 방 불빛에 그대로 노출돼 있었다. 나는 다시 방으로 들어가 재빨리 휴지를 두껍게 말아들고는 슬금슬금 기어가는 그 녀석을 쫓았다. 녀석은 주방을 지나 마룻바닥을 기어가고 있었다. 나는 살금살금 다가가 단번에, 아주 사납게 내리쳤다. 비록 혐오스럽게 생긴 미물이지만, 그래도 살생을 할 때 조금이나마 고통을 덜어주고 푼 작은 배려랄까. 그리고 흔적을 깨끗이 닦아내기 위해 걸레를 찾았는데, 얼마나 청소를 안 했던지, 걸레가 푸석하게 말라있었다. 나는, 걸레는 원래 쓰고 빨아놓으니까 굳이 또 빨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 싱크대에서 대충 물만 묻히고 죽음의 흔적을 닦아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나의 살생이 다시 재발할 줄은 몰랐다. 원래 우리 집에 바퀴벌레가 많았던 것도 아니고, 늘 어머니는 바퀴벌레가 열린 베란다 창문을 통해 밖에서 날아든다고 주장하셨으니까. 그런데 이틀 뒤, 이번엔 이른 새벽에 화장실을 갔다오는데 노란 화장실 불빛 아래로, 다시 냉장고 아래에서 기어 나오는 바퀴벌레가 보였다. 아주 느릿느릿하고, 납작한 게 이틀 전에 잡은 녀석보다 좀 힘없고, 늙어 보이는 녀석이었다. 나는 다시 화장실로 들어가 하얀 두루마리 휴지를 손에 칭칭 감고 나왔다. 그런데 녀석은 보이지 않았다. 그 짧은 시간에 사라진 것이다. 느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나는 방에 들어가 문을 살짝 열고 냉장고 아래를 살폈다. 그러자 역시나 다시 바퀴벌레가 기어나왔다. 그런데 이번에 나타난 녀석은 분명 조금 전 본 그 녀석이 아니었다. 조금 길쭉하고 날씬해 보였다. 전체적인 크기를 그려봤을 때도 크기가 더 작고 어려 보였다. 나는 살짝 방 문을 열었다. 녀석이 그대로 내 방 형광등 불빛 아래 노출됐다. 녀석은 이미 걸렸다는 것도 모르고 마룻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나는 휴지를 말아 쥐고 재빨리 다가갔다. 그런데 젠장!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제대로 물기를 닦지 않아 휴지가 물기를 먹고 그새 흐물흐물해져 있었다. 이대로라면 녀석을 짓누를 때, 바삭거리는 느낌이 그대로 내 손에 전해질 게 분명했다. 나는 다시 방에서 휴지를 말아 쥐고는 이제 막 불빛을 벗어나려는 녀석의 뒤를 살금살금 쫓았다. 그리고 힘껏 내리치고 집어들었는데, 녀석이 날랬는지 내가 그거 하나 제대로 못 맞추고 빗맞혔는지, 녀석은 그대로 바닥에 남아 있었다. 녀석은 살려고 바동거리며 어둠 속으로 내달렸다. 그러나 방향을 잘못 잡았다. 녀석은 마루를 가로질러 가려고 했다. 어리석은 것. 나는 다시 휴지를 들고 녀석을 뒤쫓았다. 그리고 마침내 녀석을 내리쳤다. 꾹꾹 재차 확인하고 녀석을 말아 휴지통에 던져버렸다.
걸레로 깨끗이 마룻바닥에 남은 죽음의 흔적을 지우고, 냉장고 밑으로 사라져버린 또 다른 한 마리를 잡기 위해 1년 전에 한 번 뿌린 뒤 벽장 구석에 처박아두었던, 뭔가 있어 보여 구입했던 노란색 통에 노란 빨대가 달린, 이름도 섬뜩한 [레이드 트리플 킬]을 꺼내 냉장고 뒤편과 싱크대 밑, 그리고 찬장 위와 장롱 밑에 잔뜩 뿌렸다.

                                                     *    *    *

남편이 돌아오지 않았다. 남편 커크가 집을 나선 건 이틀 전이었다.
"이모할머님이 생신이시라네."
식사를 하던 남편은 고개를 더 깊이 처박았다.
이모할머님?
무르망초는 불안했다. 이모할머님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뵀을 때의 그 섬뜩하고 무서운 표정이 먼저 떠오르긴 했지만, 단지 그것 때문은 아니었다. 그때 이모할머님은 남편과 무르망초와의 결혼을 마뜩잖아 하셨다. 그러나 그건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오래전 일이었다. 그런데도 무르망초는 불안했다. 이모할머님이 사시는 곳 때문이었다.
"마른 바다 건너, 웅웅거리는 울음 바위 뒤에 사시는?"
남편은 무르망초의 불안 따위는 전혀 모른다는 듯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미소에 무르망초는 더 불안해졌다. 남편에게 그곳을 다시 떠올리게 한 건 아닐까.
"응, 생신 잔치를 한다는데, 사촌들이 꼭 와줬으면 하더군. 내가 이모할머님 깜짝 선물이라나. 사실 오지 말라고 해도 가야지, 내겐 엄마와 같은 분이시니까."
이모할머님은 어릴 적 부모를 잃은 남편과 그의 사촌들을 홀로 키워냈다. 한 마을에 살던 남편의 부모와 친척어른들 모두가 순식간에 몰살당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살아남은 건 마을 밖에서 먹을거리를 구하던 이모할머님뿐이었다. 이모할머님은 죽은 친척들을 대신해 아이들을 키웠다. 그리고 모두 훌륭하게 키워냈다고 자부했다.
"사촌이며 팔촌들까지 모두 온다고 했대. 게다가 그 마을 최고 어른이시니까, 분명 어마어마한 잔치가 될 거야. 하지만, 당신은 몸이 무거우니 힘들겠지? 아니, 그냥 당신은 안 가는 게 좋을지 몰라."
당신은 안 가는 게 좋을지 몰라?
무르망초는 남편에게 불안한 눈빛을 던졌다.
"어차피 그곳 음식은 형편없을 테니까. 당신 음식이 그리울 거야. 이모할머님은 늘 우리에게 입 갖추지 말라고 하시면서 맛이 형편없는 음식만 주셨지. 그래도 잔치에는 또 다를지 모르지. 혹시라도 맛있는 게 있으면 당신을 위해 가져올게."
남편이 무르망초의 볼록한 배를 바라보았다.
"커크, 설마, 또 마른 바다를 건너가려는 건 아니죠?"
마른 바다.
무르망초는 지금까지 푸른 물결이 출렁인다는 바다를 본 적이 없다. 그러나 마른 바다는 이미 수십 번, 수백 번 보았다. 어둠 속에 숨어 처음으로 마른 바다를 보았을 때, 무르망초는 마른 바다로 달려가고 싶었다. 바다로 달려나가 소리치고 싶었다. 그러나 무르망초의 부모님, 그리고 다른 마을어른들은 모두 마른 바다는 갈 곳이 못 된다고 했다. 가선 안 된다고 했다.
"아무리 맛있는 먹을거리가 풍족한 풍요의 바다라 하더라도, 모두의 목숨을 걸고 가야한다면 절대 가지 말아야 한단다. 알겠니, 무르망초야. 그곳이 바로 마른 바다야."
그런 마른 바다를 남편은 건너왔다. 자신의 고향을 떠나 더 넓은 세상을 구경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놀라운 기백이었지만, 마을 어른들은 무모한 짓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무르망초는 그런 커크의 기백에 반해 그와 결혼했다. 부모님과 이웃들은 남편의 무모함이 큰 화를 불러올지 모른다고 반대했지만, 이미 사랑에 빠진 무르망초는 그 누구의 말도 들리지 않았다. 이웃들은 무르망초가 아직 철이 없어서, 아직 좋은 신랑감이 어떤 건지 몰라서 그런 거라고 말했다. 심지어 과부가 될 거라고 수군거렸다. 그럴수록 무르망초는 남편에게 끌렸다. 남편과 함께 남들이 무서워하지 못하는 모험을 즐길 수 있을 것 같았고, 과부가 된다해도 비련의 여주인공이 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볼록해진 배 때문이었다.
"물론이야. 위험하게 마른 바다를 건널 순 없지. 이제 곧 아빠도 되는데."
남편은 그렇게 무르망초를 안심시켰다. 그리고 일찌감치 출발했다. 마른 바다를 건너지 않기 위해서, 건너지 않겠다는 다짐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모할머님 댁은 멀지 않은 곳이었다. 바다 건너편이라곤 하지만 반나절이면 다녀올 수 있는 거리였다. 마른 바다를 건너지 않고도 말이다. 그런데 남편은 이틀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무르망초는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조바심이 마냥 남편을 기다리게 놓아두지 않았다. 만약 홀몸이었다면, 포기했을까?
무르망초는 먼저 마른 바다로 나아갔다. 마른 바다는 어둠 속에 그 끝을 숨기고 있었다. 무르망초는 길을 걸었다. 마른 바다를 따라 어둠 속에서 길을 찾았다. 길은 평탄했다. 그러나 부쩍 무거워진 몸이 걸음을 붙잡았다. 이모할머니에 대한 두려움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그 두려움을 극복해야 했다. 어쩌면 가는 길에 남편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으며 걸었다. 그러나 이모할머니의 마을이 점점 가까워질수록 그 기대는 불안으로 바뀌었다.
혹시 길이 엇갈린 건 아닐까?
무르망초는 왔던 길을 돌아보았다. 마른 바다를 건너지 않는다면 오는 길은 하나였다. 마른 바다의 좁은 만을 건너지 않는다면 말이다. 하지만, 그런 좁은 만을 건넜다면 분명 무르망초의 눈에 띄었을 터였다.
이모할머님의 마을은 절벽 위에 있었다. 무르망초는 마음을 다잡고 절벽을 톺아 올랐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자 낯선 무르망초의 출연에 마을이 번잡스럽게 움직였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 고개를 내밀었다.
"누구냐?!"
공격적이었다. 놀란 무르망초는 더듬거렸다.
"저, 전, 이, 이모할머님을 뵈러왔어요."
"이모할머님?"
"제 남편, 커크의……"
"아하, 블라타 할멈. 엊그제 거창한 생일 잔치를 벌였지."
"맞아요."
"근데 왜?"
"커크가 돌아오지 않았어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사내는 무르망초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마치 으르렁거리는 듯했다. 무르망초는 몰아세우는 사내의 앞에서 떠밀려 걸었다.
작은 마을이었다. 소문은 금세 마을 전체에 퍼졌다. 삽시간에 모두가 이모할머님 댁에 모여들었다.
"오지 않았다고?"
"네."
"그 아인 어젯밤에 돌아갔어."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이모할머니는 싸늘한 시선으로 무르망초를 바라보았다. 마치 모든 게 네 탓이라는 것 같았다. 무르망초는 고개를 떨군 채, 처분을 기다리는 죄수처럼 서 있었다. 이모할머니가 볼록한 무르망초의 배를 보았다.
"며칠이나 남았지?"
"열흘 뒤요."
"그렇다면 무모한 짓은 하지 않았을 게다."
그러나 이모할머니의 표정을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미 포기한 듯했다. 이모할머니는 무르망초의 다리에 족쇄를 채우는 듯 싸늘한 눈빛으로 무르망초를 바라보았다. 너까지 무모한 짓을 하지 말라는 경고였다.
"하지만, 혹시 모르잖아요. 그이가 또……"
"모른다? 왜 몰라, 넌 잘 알잖아. 난 네가 그런 걸 원하는 줄 알았는데."
이모할머님이 무르망초를 힐난하자 무르망초는 죄인처럼 고개를 떨궜다.
"그건 위험한 짓이에요."
"허, 이젠 좀 철이 들었나보군. 네가 철이 든 걸 보니, 커크도 철이 들었겠지. 너보단 나은 녀석이었으니까."
"이모할머님, 전, 제 남편을 찾고 싶어요. 수색대를 만들어 마른 바다……"
"닥쳐."
이모할머니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이미 남편이 돌아올 수 없다고 단정지은 듯했다. 그때 어둠 속에서 누군가 나섰다. 그의 표정은 몹시 불안해 보였다.
"어디서 찾겠다는 거지?"
"헛소리야!"
이모할머니는 다짜고짜 역정부터 냈다. 무르망초가 대답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무르망초는 이모할머니의 바람을 저버렸다.
"마른 바다요."
모두가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설마."
"커크가 정말 마른 바다로 갔을까요?"
"젠장, 당장 여길 떠야해!"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돌아섰다. 마치 저승사자를 피해 달아나 듯했다.
"떠납시다. 떠나요."
"모두 조용히 해!"
이모할머니는 어둠을 향해 돌을 집어던졌다.
"내 집에서 떠들려면 내 허락을 받아!!"
이모할머니는 무르망초를 노려보았다.
"네가 지금 무슨 말을 했는지 알고 있는 거냐?"
"수색대를 만들어 커크를 찾아주세요, 이모할머님. 제발요, 할머님은 하실 수 있잖아요."
무르망초를 무릎을 꿇고 청했다. 그러나 이모할머니는 돌아서 무르망초를 외면했다. 대신 어둠 속에서 성난 사내들이 나섰다.
"수색대를 만들어 마른 바다로 가자고!? 죽으려고 환장했군."
"죽으려면 혼자 죽어. 우리까지 끌어들이지 말고."
"차라리 우리 손에 죽어!"
"도와주세요. 제발요."
무르망초는 울먹이며 애원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녀를 위해 나서지 않았다. 오히려 그럴수록 저주가 터져 나왔다.
"그런 일은 없어. 모두 돌아가!"
이모할머니는 무르망초의 손을 잡아 안으로 끌어들였다.
이웃들은 주저하며 어둠 속으로 숨어들었다. 그들은 힐끗거리며 사나운 눈초리로 무르망초와 블라타가 사라진 어둠 속 방을 흘겨보았다.
어두운 방구석에 무르망초를 앉힌 이모할머니의 표정은 처연했다.
"마른 바다는 재앙을 불러온다. 아무도 마른 바다를 건널 수 없어."
"하지만, 건넌 이들도 있잖아요. 커크처럼……"
"그들은 운이 좋았을 뿐이야. 그저 운이지. 하지만, 그건 그들의 운이야. 우리에게까지 그 운이 오지 않는다. 심지어 그들의 운이 우리에겐 재앙을 불러들이지. 빛이 그림자를 만드는 것처럼. 예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우리는 그저 마른 바다를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해."
"커크를 포기할 수 없어요."
"네 뱃속의 아이들은?"
무르망초는 자신의 볼록한 배를 어루만졌다.
"아빠 없이 키울 순 없어요."
"왜 못 해. 나도 해냈다. 그러니 너도 해내야 해. 무모한 짓은 안 돼. 절대, 마른 바다만은 절대! 그냥 돌아가라. 제발, 부탁이다. 부모라면 포기할 줄도 알아야해."

무르망초는 포기할 수 없었다. 재앙이 온다해도 커크와 함께라면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커크가 없다면, 어떤 풍요 속에서도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산다해도 기쁘지 않을 것 같았다. 무르망초는 마른 바다를 향해 나아갔다.
마른 바다는 작은 바다였다. 어쩌면 호수라고 해야 맞을 터였다. 하지만 호수라 부르는 이는 없었다. 모두 마른 바다라 불렀다. 바다는 모든 물, 모든 것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두려움도 그중 하나였다. 돌아올 수 없다는 두려움이 바다에 녹아있었다. 마른 바다는 두려움만 남긴 채 말라버렸다. 그러나 무르망초는 그 두려움을 이겨냈다. 눈앞의 두려움보다 다가올지도 모를 슬픔이 그녀를 걷게 했다. 그러나 마른 바다를 향해 첫발을 내딛자마자 무르망초는 쓰러졌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을 때, 머리가 지끈거리고 쑤셨다. 낯선 그림자가 눈앞을 서성거렸다.
"이 빌어먹을 년이 결국 갔다고요."
"저년만 간 게 아니었어. 커크 그 자식도 갔더군."
"정말이여?"
"정말이냐니? 지금 날 의심하는 거야. 내가 이런 걸로 장난칠 놈으로 보여!?"
"하지만, 누가 그런 무모한……"
"커크가 그 무모한 놈이야! 파수꾼들이 이미 다 확인했어! 잔칫날이라고 파수꾼을 쉬게 한 게 잘못이었지. 빌어먹을 놈!"
"커크, 그 자식 결국 일을 저질렀군."
"내가 왜 그 녀석이 다른 마을 처녀와 결혼한다고 했을 때, 좋아한 줄 알아? 언젠가 이런 일이 벌어질 줄 알았던 거야. 그런데 하필 블라타 할멈 생일에 우리 마을에 와서라니. 저주받을 할망구."
"블라타 할멈이 뭐라 하건 이젠 다 틀렸어. 빨리 마을을 떠야해."
"이년은 어떻게 할까요?"
"모두 안전한 곳으로 떠날 때까지 잡아둬야지. 이틀이면 될 거야. 그 뒤엔 알아서 기든지 날든지 맘대로 하라고 해."
"안 죽여요?"
"이미 떠나기로 한 마당에 우리 손을 더럽힐 필요는 없잖아."
"누가 누구 손을 더럽힌다는 거지?"
이모할머니였다.
무르망초는 사내들이 놀란 틈을 타, 재빨리 몸을 굴려 이모할머니의 등뒤로 몸을 숨겼다.
"웬일이슈. 블라타 할멈."
어둠 속의 사내는 블라타를 경계하며 한발 물러섰다.
"내가 왜 왔는지 몰라서 묻는 건 아니겠지?"
블라타는 무르망초를 힐끗 돌아보았다.
"저들이 절 기절시키고 잡아왔어요."
무르망초는 이모할머니의 어깨너머로 사내들을 쏘아보았다.
"그년이 마른 바다로 갔었슈."
사내 역시 당장이라도 무르망초를 잡아먹을 것처럼 노려보았다.
"그래서? 마른 바다로 들어가기라도 했단 말이냐."
이번엔 블라타가 사내를 쏘아보았다.
"우리가 막지 않았으면 분명 들어갔을 거유."
"흥, 네가 언제부터 그런 예언력이 있었지?"
"예언력까지 필요한 일도 아니었슈."
"네 애미가 내 품에서 기어다니던 날이 엊그제 같구나."
"평생을 기어다녔는데, 새삼 그렇게 말한 건 없잖슈."
"그랬지. 평생 기어다녔지."
"커크도 마른 바다로 갔어요."
어려 보이는 사내가 갑자기 앞으로 나섰다.
"어른들 얘기하는데, 끼어들지 마라."
블라타가 어린 사내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어린 사내는 움찔하더니 어둠 속으로 숨어들었다.
"끼어들만 하니까, 끼어든 거 아니겠슈."
가장 연장자인 듯한 사내는 여전히 블라타에게 도전적이었다. 아니, 적대적이었다.
"내가 모르는 줄 아시우. 블라타 할멈의 그 잘난 서방, 아니 정확히 따지면 남의 바깥양반이제."
"닥쳐!"
"허유, 진실 앞에선 늘 성질부터 내시네."
사내가 야비한 미소를 지었다.
"예전에 숨통 막아 죽이고, 온몸을 마비시켜 죽이고, 내장을 찌르고 깔아내서 세 번 죽인다는 황금빛 안개가 밀려들어, 이 마을 어른들이 다 몰살당했을 때, 어떻게 혼자 블라타 할멈만 살아났을 수 있었는지, 우리가 모를 줄 아시우. 그때 혼자 살아남은 걸 자랑으로 여기시는 모양인디. 알고 보면 아주 드러븐 짓이었슈. 남의 남편, 것도 임신한 아내까지 있는 사내를 가로채서 함께 마른 바다를 건너 도망쳤던 거 아니유. 그런데 서방이 마른 바다에서 죽자 뻔뻔하게 돌아왔쥬. 당연히 마을 어른들은 화냥년을 몽둥이 찜질해 내쫓았쥬. 그런데 마을에 할멈이 불러들인 재앙 때문에 마을 어른들이 몰살당하자, 마치 자신이 구세주인 양 나타나 잘난 채 하는 거 아니유. 마치 우리에게 자기를 세상의 진리를 다 아는 현자처럼 받들게 했지만, 나는 알고 있었슈. 얼마나 드러븐 화냥년인지."
블라타는 분한 듯, 어쩌면 놀란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사내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그의 뒤에 선 사내들이 블라타를 비웃듯 쏘아보고 있었다.
"흥, 그래, 잘도 아는구나. 그런데 왜 지금까지 모른 척 한 거지?"
"살아야하니께. 어린 내가 살 수 있는 방법은 그것밖엔 없었으니께. 혼자 살아남을 순 없었으니께. 그런데 이젠 어차피 죽게 생겼으니, 이젠 아니잖슈. 살고 봐야제. 어차피 마을을 떠나야하는데 못 할 말이 어디 있슈."
블라타는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무르망초는 그런 이모할머니를 붙잡고, 뭐라 변명이라도 하라고 재촉하고 싶었다. 그러나 블라타는 망부석처럼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블라타를 노려보던 사내들은 그런 블라타를 남겨두고 하나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무르망초는 이모할머니의 얼굴을 더듬으며 안색을 살폈다.
"괜찮으세요?"
"마른 바다를 건너선 안 돼!"
이모할머니의 얼굴은 넋이 나간 듯했지만 목소리만큼은 여전히 힘이 있었다.
"남편의 흔적이 마른 바다로 이어지고 있어요."
"그래서? 그게 어쨌다는 거지?"
이모할머니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무르망초를 바라보았다.
"그러니 가야해요."
이모할머니는 무르망초를 한없이 바라보았다.
"넌 예전의 나를 보는 것 같았다. 이기적이었지. 하긴 지금도 이기적이야. 커크를 너희 마을에 시집보내면 우리는 무사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너희 결혼을 굳이 반대하지 않은 거지. 하지만,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어차피 결국 다 이렇게 되는 건가."
이모할머니는 그간의 긴 세월을 탄식하는 듯했다. 이모할머니는 세월에 짓눌린 모습으로 무르망초를 바라보았다.
"이게 우리의 운명일까?!"
무르망초는 멍해진 이모할머니의 눈빛을 살폈다. 넋이 나간 듯했다.
"그가 다치자 나는 도움을 청하기 위해 마을로 돌아왔어. 하지만, 그땐 이미 황금빛 안개가 마을을 덮친 뒤였어. 모두가 마지막을 조금이라도 연장하기 위해 발악하고 있었지. 어린 아이들을 살리려고 울부짖고 있었어. 그들은 나를 원망하며 죽어갔어. 나는 어찌해야할지 몰랐어. 철없는 내 행동이 이런 결과를 불러올 줄 몰랐지. 무서워 도망쳤지만, 그에게 돌아갈 수도 없었어. 나 때문에 죽어간 이들이 내 다리를 족쇄처럼 잡아 붙들었지. 그래서, 그래서 그를 버렸다. 하지만,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이제 난 모든 걸 잃었어. 오래전엔 사랑을, 그리고 지금은 이웃을. 그를 사랑한 탓에."
"그라는 분이 아까 저들이 말한, 마른 바다에서 죽었다는 분인가요?"
블라타는 고개를 들어 무르망초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무슨 얘기를 했는지 뒤늦게 깨달은 듯했다.
"아니야, 아니야. ……혼자 있고 싶구나. 제발, 나를 혼자 놔둬."
그러나 무르망초는 그녀를 혼자 둘 수 없었다. 무르망초는 이모할머니의 앞에 무릎꿇고 앉아 그녀의 손을 잡고 한참을 말없이 그녀의 곁을 지켰다.
"정말 다 내 잘못일까?! 왜 끝없이 나를 원망하지. 이걸로는 부족하다는 건가. 하지만, 나는 책임을 졌어. 아이들을, 죽은 이들의 아이들을 뱃속의 아이들까지."
이모할머니가 여전히 넋 나간 표정으로 나직이 속삭였다.
"마른 바다를 건넌다고 늘 황금빛 안개가 오는 건 아니잖아요. 커크도 마른 바다로 갔지만, 아직 황금빛 안개를 오지 않았잖아요. 그러니 이모할머님 탓만은 아니에요. "
이모할머니는 멍하니 무르망초를 바라보았다.
"가라. 이제 가. 네 마음대로 커크를 찾아."
이모할머니의 손이 스르르 미끄러져 무르망초의 손을 빠져나갔다.

무르망초를 막을 건 아무 것도 없었다. 모두가 이미 마을을 버리고 떠난 뒤였다. 무르망초는 울음계곡을 지나 마른 바다로 나아갔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다시 마른 바다를 바라보았다. 긴 한숨을 내쉬고 첫발을 내디뎠다.
"그 몸으로 참 무모한 짓을 하는군."
어둠 속에서 다리 없는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무르망초의 부른 배를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시죠?"
무르망초는 뱃속의 새끼를 보호하려는 듯 몸을 움츠리며 사내를 경계했다. 이 사내가 이모할머님의 마을에서 자신을 가뒀던 사내들이 말한 마른 바다를 감시하는 파수꾼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했다.
"사람들은 날 짱랑이라고 부르지."
"짱랑?"
"물론 내 진짜 이름은 아니야."
"진짜 이름은 뭔가요?"
"이미 남들이 쓰지 않는 내 이름이 뭐가 중요하지?! 그냥 로취라고만 알아둬."
사내를 무르망초를 흘겨보았다.
"그런데 무슨 짓을 하려고 했던 거지? 내가 보기엔 마른 바다로 나아가려고 했던 것 같던데. 입덧이라도 하나? 허긴 마른 바다에는 맛있는 게 많지."
"그냥 구경만 했어요."
무르망초는 눈을 깔고 사내를 외면했다. 사내의 모습에 용기는 났지만, 어딘가에 다른 파수꾼이 숨어있을지도 몰랐다.
"구경만 했다? 고작 구경하려고 여기까지 왔단 말인가, 위험하게?! 말해봐, 솔직히 말해도 돼. 설마 이렇게 추한 늙은이와는 말 섞기도 싫다 이건가?"
무르망초는 사내를 외면하고 돌아섰다. 어차피 마른 바다로 들어가는 길은 바다만큼 넓었다. 굳이 마른 바다보다 위험한 파수꾼 앞에서 보란 듯 마른 바다로 갈 필요는 없었다.
"요즘 것들은 참 용기가 없어."
로취는 울음바위를 지나 마른 바다로 나아갔다. 무르망초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로취는 보란 듯이 마른 바다를 가로질러 다시 무르망초 앞에 섰다. 그의 입에는 무르망초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붉은 색 열매가 물려있었다. 로취는 열매를 아삭아삭 씹었다.
"함 먹어 볼 텐가?"
로취가 눈앞에 열매를 내밀자 무르망초는 미끼에 이끌린 쥐처럼 그에게 끌려갔다. 열매는 그저 흔한 열매가 아니었다. 조금 맵긴 했지만 어딘지 시고 바다의 향도 났다.
"왜 저한테 이런 걸 주시는 거죠?"
무르망초는 두려웠다. 입 갖추지 말라던 이모할머님의 말씀이 생각났다.
"세상 최고의 식탁에 혼자 앉아 음식을 즐기는 것만큼 외로운 일은 없지."
"세상 최고의 식탁?"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는 은혜로운 마른 바다. 그게 세상 최고의 식탁이란다."
무르망초가 고개를 들자 로취는 불편한 몸을 돌리며 그녀 앞에 끝없이 펼쳐진 마른 바다를 보여주었다. 마른 바다는 지평선 끝까지 펼쳐졌다. 모든 것을 주는 은혜로운 마른 바다. 그곳에 남편 커크도 있을 것 같았다.

"이제 내가 아는 마른 바다의 모든 걸 너에게 가르쳐주마."
로취는 무른 회색 바위 위에 앉아 무르망초를 바라보았다.
"세상에는 항하사만큼 많은 마른 바다가 있고, 그 많은 마른 바다는 모두 우리에게 많은 걸 가져다주지. 멍청이들은 바람이 옮겨다준다고 하지만,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바람은 그저 바람일 뿐이니까. 나는 마른 바다의 진실을 알고 싶었어. 물이 떨어지면, 그 물의 수원이 있듯이, 마른 바다가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많은 게 어디서 시작되는지 궁금했지. 그리고 대모험가 고끼부리 사마를 만나 듣게 됐지. 그건 닫힌 하늘이라고."
"닫힌 하늘?"
"그래, 닫힌 하늘, 고끼부리 사마는 닫힌 하늘에서 많은 것들이 떨어진다고 했어. 조금 전 내가 너에게 줬던 것도 닫힌 하늘에서 떨어진 거라고 하더군. 하지만 그것도 진실은 아니었어."
"진실은 뭐였죠?"
"움직이는 물컹 산."
"움직이는 물컹 산?"
무르망초는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세상에 그런 산이 있다니?!
"마른 바다에는 움직이는 많은 산이 있다. 마른 푸석 산, 젖은 흐물 산, 꽈배기 산, 벽돌 산, 접힌 종이 산, 나무 산 모두 움직이지. 그 중에 움직이는 물컹 산만이 우리에게 음식을 가져다 줘."
"움직이는 물컹 산만이?"
무르망초는 남편이 분명 움직이는 물컹 산으로 갔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 물론 마른 푸석 산과 젖은 흐물 산에도 종종 먹을 게 있어. 마른 바다에 흩어진 음식들보다 많이 말이야. 하지만, 대부분의 움직이는 산에는 아무 것도 없어. 하지만, 움직이는 물컹 산이 지나가면 마른 푸석 산에도, 젖은 흐물 산에도 음식이 생기지."
"그걸 어떻게 알았죠?"
"쭉 지켜봤으니까. 움직이는 물컹 산 주위로 수많은 음식들이 비처럼 쏟아지는 걸, 내가 직접 봤지."
무르망초는 그 움직이는 물컹 산을 찾으면 남편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산으로 가려면 어떻게 하면 되죠?"
"그건 절대 안 돼."
"왜요?"
"움직이는 물컹 산은 평소에도 우리가 쫓아가기에는 너무 빠르기도 하지만, 우리를 싫어하는지 가까이 갈수록 더 빨리 멀어지지."
"우리를 싫어한다고요?"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야. 사실, 움직이는 물컹 산에 우리가 먼저 다가간다는 건 자살행위야. 움직이는 물컹 산은 하얀 마른 구름을 몰고 다니니까."
"하얀 마른 구름?"
"그래, 하얀 마른 구름. 하얀 색과는 어울리지 않는 죽음의 구름이지. 그 마른 구름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지."
로취가 하반신이 있어야할 빈자리를 두드려 보였다.
"하지만 전 가야 해요."
"뭐?"
로취는 놀란 표정으로 무르망초를 바라보았다.
"남편이 거기에 있을 테니까요."
"남편?"
"제 남편이 마른 바다로 갔어요. 그는 분명 움직이는 물컹 산을 찾아갔을 거예요."
"네 남편이 그걸 어떻게 알고 간단 말이지?"
"그도 마른 바다를 건넜으니까요."
무르망초의 결연한 표정으로 로취를 바라보았다. 로취는 잠시 어리둥절해하더니 마른 바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돌아오지 못했군."
무르망초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로취는 쓰디쓴 미소를 짓더니 무르망초를 바라보았다.
"너 때문이었나?"
"네?"
"너를 위해 마른 바다로 나간 거냐?"
로취가 무르망초의 부른 배를 가리켰다.
"아니요."
로취는 의외라는 듯 놀라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그럼 왜?"
"그는 그저 모험을 좋아했어요."
"진정한 모험가군."
그렇게 말하는 로취의 표정은 쓸쓸하고 외로워 보였다.
"아저씨는 왜 마른 바다를 건넜죠?"
"아내를 위해서였지. 임신한 아내를 위해 마른 바다에서 맛있는 음식을 구해주고 싶었어."
"아내 되시는 분은……?"
"죽었지."
"아!"
무르망초의 가벼운 탄성에 로취는 쓴웃음을 지었다.
"황금빛 안개가 마을을 덮쳤어."
황금빛 안개! 무르망초는 알겠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황금빛 안개를 아나?"
로취는 의아한 표정으로 무르망초를 바라보았다.
"네, 이모할머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었어요."
"이모할머님?"
"아, 그 분의 성함은 블라타에요. 울음계곡 너머의 마을의 최고 연장자로 남편을 키워주신 분이시죠."
로취는 다리가 없다는 것도 잊은 듯 벌떡 일어서려 했다. 로취는 무른 바위에서 굴러 떨어졌다. 그리고 무르망초를 향해 기어갔다.
"그녀, 그녀를 안단 말이냐!"
무르망초는 놀라 뒷걸음질쳤다.
"네?"
"불라타! 그 년, 그 년이 아직 살아있었단 말이지!"
로취의 눈빛이 사악하게 변했다. 눈앞에 있다면 블라타를 당장이라도 갉아먹을 듯했다.
"왜, 왜 그러세요?"
"그 년이 날 버렸어! 그 년이!"
무르망초는 냉정하게 조카 손자까지 포기하는 블라타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로취의 분노가 이해됐다. 자신도 로취처럼 화를 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블라타의 마지막 모습을 보기 전이었다. 자기 탓에 죽은 마을 사람들을 대신해, 아이들을 지켜야했던 예전의 블라타를 몰랐을 때뿐이었다. 그러나 지금 로취 앞에서 그녀를 변호할 수 없었다. 그의 가르침이 필요했고, 그의 도움이 절실했다.
"그 분은 원래 그런 분이시죠."
무르망초는 짐짓 싸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로취는 의외라는 듯 무르망초를 바라보았다.
"이모할머니라면서 그녀의 편을 들지 않는군."
"그 분은 남편을 찾아달라는 제 청을 거절했어요."
"흥, 그렇군. 여전히 냉정하군."
"사랑하는 이까지 버린 분이니까요."
"사랑하는 이?"
로취가 의아한 표정으로 무르망초를 바라보자 무르망초는 짐짓 태연한 척, 가만히 앉아 이야기를 시작했다.
"임신한 아내까지 있는 사내를 꼬셔 사랑의 도피로, 마른 바다까지 갔다더군요. 하지만, 그 사내가 죽자 이모할머님은 뻔뻔하게 혼자 마을로 돌아왔대요. 황금빛 안개를 몰고요. 그리고 마치 자신이 구세주인양 어린 아이들을 이끌고 절벽을 올라 다시 마을을 건설했대요. 그리고 형편없는 음식만 먹였다더군요."
"……"
로취의 맞장구를 기대하던 무르망초는 이상한 기운에 고개를 돌렸다. 뜻밖에 로취가 벼락이라도 맞은 듯 멍한 표정으로 무르망초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왜 그러세요?"
"그게 언제 적 일이지?"
"글쎄요. 정확히는 모르지만, 제 남편이 어렸을 때니까, ……."
로취는 자리에 풀썩 주저앉으며 머리를 감싸쥐었다.
"그녀가, 그녀가 돌아갔었군. 갔었어."
"무슨 말씀이세요?"
"그때 그녀와 함께 마른 바다로 간 건, 나였어."
"이모할머님과 함께 도망친 게 아저씨라고요?"
"도망친 게 아니야! 나는 아내를 위해 먹을거리를 구하러 온 것뿐이었어."
이번에는 무르망초가 벼락을 맞은 듯한 얼굴로 로취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마을 분들은 두 분이 사랑의 도피를 했다고, 그리고 그 분이 죽었다고……"
"아니야. 그녀는 나와 마른 바다에 먹을거리를 구하러 나온 것 뿐이야. 그때 그녀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마른 바다를 보고 싶다고, 같이 가겠다고, 도와주겠다고 했어. 그래서 함께 마른 바다로 갔지. 그러다 내가 하얀 마른 구름에 다치자 도움을 청하겠다며 마을로 돌아갔어. 그런데 돌아오지 않았어. 나는 혼자 며칠을 기다렸지만 그녀도, 아무도 오지 않았어. 그리고 내가 다친 몸으로 간신히 마을로 돌아갔을 땐, 마을의 모두가 몰살당한 뒤였어."
로취는 그날의 기억이 다시 떠오른 듯 머리를 쥐어짜며 괴로워했다. 무르망초는 조심스럽게 로취를 바라보았다.
"하, 하지만 이모할머님은 그때 사랑을 잃었다고 했어요."
"사랑을? 하지만, 그때 그녀는 남편도, 애인도 없었어! 그런데 그게 무슨 소리지?"
"그럼 혹시, 어쩌면 이모할머님은, 아마도 당신을 사랑하고 있었나봐요."
로취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무르망초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나는 아내를 사랑했어. 여전히 지금도 그녀를 사랑해!"
"하지만 이모할머님은 당신을 사랑했어요. 어쩌면, 그래서 잠시라도 함께 하려고……. 하지만 그 사랑의 결과가 두려웠던 거죠. 그 결과를 보았으니까요. 그래서, 그래서 그 사랑의 책임을 진 거예요."
"그녀가 무슨 책임을 진단 말이지?"
"이모할머니는 그때 마을 어른들이 몰살당해서, 아이들을 피신시키고 돌보고 있었어요.."
"아이들을 돌본다고? 아이들이 살아있단 말인가?"
무르망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마을이 어디지?"
"울음계곡 뒤의 절벽 위요. 하지만 이젠 모두 떠났어요. 이모할머님을 버리고 도망쳤죠."
"도망? 왜?"
"곧 재앙이 올 거라고, 제 남편 커크가 마른 바다를 건너 재앙이 올 거라고 도망쳤어요."
"재앙?"
"네, 모르셨어요? 마른 바다를 건너면 재앙이 온다고."
"아니, 그건 전설일 뿐이야. 아주 먼, 아주 다른 마른 바다의 전설. 이곳의 마른 바다는 그런 적이 한 번도 없었어. 그래서 이곳 어둠이 내려앉은 마른 바다는 늘 우리에게 축복이었지. 우리는 마른 바다를 건널 때마다 늘 잔치를 벌이고, 춤을 추었어."
"이상하네요. 이모할머님은 늘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그리고 마른 바다 주위의 다른 마을도 이제는 다 그렇게 믿어요. 마른 바다를 건너는 건 재앙을 불러오는 거라고."
"아니야. 그건 다 거짓말이야. 마른 바다를 건넌다고 그런 재앙이 오진 않아."
"그때가 첫 재앙이었군요."
무르망초는 문득 두려운 듯 로취를 바라보았다.
"첫 재앙?"
"이모할머님의 마을에 황금빛 안개가 나타난 게, 그때가 이 마른 바다의 첫 저주였던 거예요."
"그, 그럼 그때 마을이 몰살당한 게, 내 탓이란 말인가?! 이 마른 바다를 건넌 내 탓?!"
로취가 고개를 돌렸을 때, 무르망초는 뒷걸음질치고 있었다. 그의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자신에게까지 재앙이 다가올 것 같았다.
"이모할머님은 죄가 없던 거예요. 그 분은 정말 마을의 모두를 구했던 거예요. 그리고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한 거예요."
"나를 사랑했다고?"
"당신 때문에 마을에 재앙이 닥쳤는데도, 당신을 원망하기는커녕 그 일로 자신을 비난하는 이들 앞에서 자신이 죄인인 것처럼 스스로 감수했어요. 변명조차하지 않았죠. 당신이 비난받는 것보다 자신이 비난받는 편을 선택한 거예요. 당신을 사랑한 죄로 당신의 죄까지 뒤집어쓰고 자신에게 책임을 물은 거예요. ……어쩌면 그렇게라도 당신을 사랑했다는 걸 모두에게 인정받고 싶었는지도 모르죠."
"나는 그녀가 나를 사랑하는 줄 몰랐어. 나는 그저 그녀를 원망했어. 나를 내팽개쳤다고 생각했지."
로취는 머리를 가슴팍에 묻고 머리를 감싸쥐었다.
"내가 어리석었어. 나 때문에 마을에 재앙이 왔는데도 나는 여직 그걸 몰랐어. 그저 내 신세만 처량하다 여겼지. 그런데 그녀는, 그녀는 그 재앙을 겪으면서도 나를 원망하지 않았단 말인가. 그녀는 모든 걸 잃었는데도 그녀는……. 내가 너무 무정했던 건가!"
로취가 팔로 바닥을 짚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는 웅웅거리는 울음바위가 메아리치는 울음계곡을 향해 기어갔다. 무르망초는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로취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마른 바다가 울릴 때를 조심해. 움직이는 죽음의 물컹 산이 다가온다는 뜻이니까."
이제 로취의 모습은 어둠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무르망초는 몸을 돌려 멀리 지평선이 보이는 마른 바다를 바라보았다. 마른 바다는 어둠에 깊이 잠겨있었다. 무르망초는 천천히 마른 바다를 향해 나아갔다. 마른 바다는 평평하고 딱딱했다. 멀리서 물냄새가 났다. 오래전에 말라버린 물의 냄새가 아니었다. 멀리 젖은 흐물 산이 보였다. 분명 젖은 흐물 산에서 날아오는 물냄새였다. 남편은 분명 저 산으로 가지 않았을 거라 무르망초는 확신했다. 무르망초는 마른 바다의 한가운데로 나아갔다. 그때 난데없이 빛이 쏟아졌다. 빛은 어둠에 잠긴 마른 바다를 둘로 갈라놓았다. 그리고 마른 바다가 울렸다. 로취의 말이 생각났다. 죽음의 물컹 산이 다가오고 있는 듯했다. 무르망초는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빛을 피해 달려야 했지만 움직일 수 없었다. 바다의 울림에 귀기울였다. 아니,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바다의 울림이 잦아들었다. 무르망초는 다시 몸을 일으켰다. 빛은 여전히 마른 바다를 둘로 나누고 있었다. 마치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말라고 경고하는 듯했다. 그러나 무르망초는 나아갔다. 이 빛을 지나면 남편과 더 가까워질 것 같았다. 빛을 지나 다시 어둠에 잠긴 마른 바다에 들어섰을 때, 다시 바다의 울림이 느껴졌다. 이번 울림은 무르망초의 걸음처럼 조심스러웠다. 그래서 아련히, 아주 멀리서 들려오는 듯했다. 그러나 그 울림은 점점 조심스럽게 다가오고 있었다. 무르망초는 오로지 어둠에 의지한 채 몸을 숨겼다. 그때 무언가 무르망초를 덮쳐왔다. 하얀 마른 구름이었다. 구름은 무르망초의 다리를 짓눌렀다. 그러다 갑자기 날아올랐다. 무르망초는 다시 앞으로 내달렸다. 마른 바다의 더 깊은 곳으로 달려간다는 게 두려웠지만, 이제 돌아갈 순 없었다. 마른 구름이 그녀의 머리 위를 맴돌고 있었다. 다시 마른 구름이 무르망초를 짓눌렀다. 무르망초는 발버둥쳤다. 그럴수록 구름은 무르망초를 더, 더 강하게 짓눌렀다. 의식이 희미해져갔다. 커크가 저 멀리서 아련히 자신을 부르는 것 같았다. 뱃속의 아이들이 절규하는 듯했다. 마른 구름은 무르망초를 감싸고 다시 날아올랐다. 그리고 다시 짓눌렀다. 모든 것이 원망스럽고, 모두가 원망스러웠다. 그리고 뱃속의 아이들에게 미안했다.

힘겹게 절벽을 오른 로취 앞에 이제는 텅 빈 마을이 보였다. 마을 입구에는 망부석처럼 선 블라타가 로취를 등지고 마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로취는 그녀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의 기억 속에서도 그녀의 마지막 모습은 지금처럼 뒷모습이었다. 게다가 로취는 그녀의 모습을 단 하루도 잊은 적이 없었다. 잊을 수 없었다. 매일 원망하고, 증오하기 위해 매일 그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러나 이제 다시 본 그녀의 뒷모습에는 어떤 원망도 증오도 남아있지 않았다. 예전의 아름다웠던 모습은 사라지고 그저 작고 초라하기만 했다. 로취는 자신의 원망과 증오가 그녀를 그렇게 만든 것 같아 한없이 미안했다. 지금까지 해온 그녀를 향한 모든 저주와 증오가 이제는 자신을 비웃는 것 같았다.
로취는 더없이 초라해진 자신의 몸을 기어 그녀에게 다가갔다.
"블라타, 이제 내가 책임지러 돌아왔소."
블라타는 잊은 듯했던, 그러나 결국 잊을 수 없는 목소리에 돌아섰다. 그녀의 눈에는 언제부터인가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로취?"
그러나 블라타는 로취를 볼 수 없었다. 로취는 그녀의 발아래 있었고, 그녀의 눈에는 이미 황금빛 안개가 덮쳐오고 있었다. 블라타는 마지막으로 다시는 볼 수 없을 사랑의 이름을 속삭였다. 그것만으로 죽음이 두렵지 않았다.


written by 라퓨탄 (writtenmoon@naver.com)
댓글 4
  • No Profile
    Dominique 10.12.07 18:56 댓글 수정 삭제
    반전 비스므리 하게 노리신 것 같은데 애초에 이럴거였으면 전개를 왜 대체 저리 진지하게 하셨는지 모르겠네요. 차라리 밝은 분위기였으면 '하하, 그런거였어?' 하고 웃어넘기겠지만 비극에 가까운 이야기에 갑자기 난데없이 저런 이야기가 나오니 참 당황스럽네요. 밑의 김밥형사와 대조됩니다. 희화나 풍자를 노렸다면 처음부터 일관되게 구성을 짜시거나, 글 분위기 대로 비극적인 사건으로 남겨두거나 했으면 좋았을 텐데요. 파리의 연인도 최고의 인기를 구기하다 마지막의 허무한 엔딩으로 실소만을 남겼지 않습니까? 글의 마감을 어떻게 할지 생각해 보시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 No Profile
    라퓨탄 10.12.13 02:07 댓글 수정 삭제
    Dominique님/ 당황하셨다니.. 그런 의도는 없었는데... 괜히 죄송하네요.. _(__)_;;;
    흐음... 글의 분위기는... 원래 글의 태생이 비극적인 사건이라... 어쩔 수 없었다고 말씀드려야할 듯 싶네요.. 희화나 풍자를 노린 건 아니니까요... 흐음. 그리고 뒷부분은..... 최소한 황금빛 안개와 마른 바다에 대한 진실(?), 그리고 사건의 전모를 어떻게든 풀어줘야했기에.. 쓸 수 밖에 없었던 것이고요... 하지만, 님의 덧글을 보고나니.. 흐음.. 그럼.. 차라리.. 뒷부분을 앞으로 보내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드네요. 사실.. 약간 힌트 비스무리하게.. 이 이야기는 실제 사건을 재구성(?)한 이야기라는 글을 넣을까 하다가... 어차피 소설이 다 사실인 것처럼 쓰는 것이고, 뒷부분을 보면 알텐데..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아.. 뺐는데.. 아예 뒷 부분을 앞으로 보내면.. 굳이 그런 안내 멘트를 쓸 필요도 없을 것 같고.. 그게 나을 것 같네요. 흐음.. 특별히 다시 다 뒤집고 쓸 생각은 없어서요.. ^^;;;
  • No Profile
    라퓨탄 10.12.13 02:11 댓글 수정 삭제
    Dominique님/ 좋은 의견, 덧글 감사합나다.. _(__)_
    흐음.. 덧글이 수정이 안 돼서... 또 쓰네요...
  • No Profile
    티아리 10.12.16 02:18 댓글 수정 삭제
    수정 전과 수정 후를 모두 읽어본 입장에서, 글의 완성도는 오히려 수정 전이 낫지 않았나 싶습니다. 엔딩이 허무한 것도 단점이 될 수 있겠지만, 서두에서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가 사실은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라는 사실을 먼저 말해주면 오히려 글을 읽으며 본문 내용이 김빠지고 시시하게 느껴져서요. 독자의 의견을 반영하는 자세는 언제나 좋은 것이지만, 때로는 작가로서의 소신을 가지는 게 더 중요할 때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글은 읽는 사람마다 평이 달라질 수 있는 것이고 저 개인적으로는 수정 전의 글을 꽤나 재미있게 읽었거든요^^ 물론 수정한 글도 수정 전에 비해 장점이 있고 다른 사람들은 또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저는 좀 아쉽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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