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믿음

2010.12.29 18:4112.29

초인종을 누르고 내 이름을 말했지만 B는 나와보질 않았다. 한 숨을 쉬고는 도어락을 열어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B는 자는 척 하고 있었다. 뭐 이젠 상관없었다. 단지 여기에는 나 혼자서 넋두리하러 왔으니.
난 B가 누워있는 침대에서 조금 떨어진 소파에 그녀를 등지고 앉아 그녀에게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오늘도 자는 척이군요.
그제도 그랬었죠. 그 때 당신을 떠보기로 한 건 참 잘 했던 일이었습니다. 모든 건 내 생각대로 되었으니까요. 그러지 않기를 얼마나 바랐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결국 결과는 내 생각대로였고 난 이젠 정말 이 관계를 끝내기로 했습니다.
오늘 낮 당신이 내게 문자를 보냈죠? 믿음이 깨졌으니 이제 나는 끝이라고요. 그래요, 믿음을 증명하자고 시작한 관계였으니 그 믿음이 깨진 이상 이제는 끝내야겠죠. 지금 나는 혼자 술을 먹고 왔습니다. 술을 먹으면서 큰 소리로 고함치고 떠들다보니 누가 그러더라고요. 정 그러면 그 여자 집에 당장 가보라고. 그래서 나는 왔습니다. 지금 내가 잠들어있을지, 아니면 그러는 척을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당신 옆에 그냥 앉아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모든 것을 비우기 위함입니다. 더 이상 내 마음에 당신을 둘 수가 없습니다. 당신은 더 이상 달콤하지 않으니까요. 더 이상 ‘그 분’의 말이 그렇지 못 하듯.
아니 실은 처음부터 ‘그 분’의 말은 내게 달콤하지 않았어요. 사실 달콤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직도 ‘그 분’의 친위대인 ‘카론’이 ADA지부 중 한 곳을 급습했던 광경을 잊지 못 합니다. 방송으로 생중계 중이었고, 국가적 명령으로 모든 가정, 식당, 회사에서 강제 시청을 해야 했으니 안 볼 수도 없었죠. 심장이 약하건, 언제 죽을지 모르는 노인이건, 갓 태어난 아기건 모두 봐야한다는 게 규칙이었으니까요.
ADA지부 소속원들은 그 때 같이 모여서 크리스마스 파티 중이었습니다. 크리스마스 파티였기에 카메라에 몰래 비친 소속원들의 부모도 어린 아이들도 모두 행복한 모습이었죠. 하지만 카론부대가 들이닥치자 그 행복은 순식간에 목숨과 함께 사라졌습니다. 다 같이 부르던 노래는 어느새 비명으로 바뀌었고, 그들은 카메라 앞에서 죽어갔습니다. 카론 부대원들은 어릴 때부터 반체제 인사들은 악마나 다름없다는 세뇌를 수없이 받아왔고, 그렇기에 그들의 총질에는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이미 총을 맞아 죽은 이들에게도 계속 총알을 날렸고, 심지어는 놀란 얼굴로 쳐다보는 어린 아이의 이마에도 망설임없이 발포했습니다. 이름처럼 사람들을 지옥으로 인도하는 이들이었습니다. 그 광경을 나도, 크리스마스라서 행복에 취해있을 사람들도 보고 있었죠. 끄고 싶었겠지만 끌 수도 없었을 겁니다. 모두 감시 하에 있으니까요.
소탕의 마지막 단계는 예전 것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늘 그렇듯, 카론 부대는 소탕 중에 젊은 여자 한 명을 남겨두었고, 절단된 사지와 피바다로 범벅이 된 그 곳에서 충격으로 미쳐버린, 그래서 계속 중얼거리고 있는 그녀를 의자에 앉혔습니다. 군인 중 하나가 마이크를 잡고 말했습니다. 더러운 년, 왜 이런 짓을 했지. 그는 정말 대답을 기다리고 있진 않았을 겁니다. 대답이 없자, 마이크를 잡은 군인은 다른 군인들에게 손짓을 했고, 그녀를 둘러싸고 무자비한 폭행이 시작되었습니다. 비명소리조차 들리지 않았습니다. 단지 그녀가 맞는 소리만 마이크를 통해 크게 울렸죠. 그러는 동안 군인 하나는 의자 뒤의 벽에 스프레이 프린트로 뭔가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게 뭔지는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믿어라’
그 뒤에 나는 그 여자가 또 어떻게 될지 알았습니다.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아서 나는 방송을 꺼버렸습니다. 불편했습니다. 하지만 그 불편함이 그냥 보통 사람이 느낀 불편함과 역겨움이 아니라는 것을 당신은 잘 알고 있을 겁니다. 결국 내가 하는 일도 케론 부대와 다를 바가 없었으니까요.
나는 친정부 입장의 소설을 쓰는 작가니까요. 판타지 소설을 쓰기에 얼핏 관련이 없어보이지만 그 안에는 정부가 원하는 내용이 들어있었습니다. 믿어야 할 이를 믿지 못 해 죽음으로 가는 어리석은 주인공. 그 소설을 쓰면서 나는 마치 살아있는 문어가 입으로 통째로 들어온 듯 거북함을 느꼈습니다. 내 뜻대로 써진 것이 아니어서 뱉어내고 싶었지만 두려움에 뱉어낼 수 없는 것. 그렇게 써낸 소설은 친정부 입장의 언론의 기사를 가장한 수없이 많은 홍보, 그리고 나름의 재미로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었습니다. 판매량이 워낙 압도적이었기에, 단숨에 나는 큰 파급력을 지닌 인물로 부상됨과 함께 정부의 신뢰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나는 점점 더 거북해졌습니다.  팬사인회를 잘 마치고 집에 와서 토를 한 적도 많았습니다. 내가 바라던 삶이 아닌 것을 살고 있었으니까요. 이런 삶을 포기하고 내가 예전에 해왔던 대로 살고 싶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러려니 한 번 갔던 고문실의 모습이 눈에 선했습니다. 젊은 시절 막 ‘그 분’이 정권을 잡았을 때 저항단체 소속으로 내가 쓴 소설을 배포하고 다니다가 잡혀갔던 곳이었습니다. 그 곳에서의 하루 동안 나는 그들의 개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내 손톱을 꺾었고, 물이 가득찬 욕조에 내 얼굴을 집어넣었다가 뺐으며 나를 못이 잔뜩 박힌 책상 밑으로 집어넣어 책상을 발로 찼습니다. 겨우 몇 분의 고문 후 내 의지는 더 이상 버티질 못 했습니다. 다행히 정권은 나를 살려주었습니다. 동료들을 밀고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내 글쓰기의 재능을 인정해서 국민들을 세뇌시킬 도구로 이용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정부와 결탁해서 성공을 거뒀습니다. 하지만 그런 삶을 살고 있는 나는 오히려 힘들었습니다. 옛동료들은 이미 죽었거나, 나와는 연락이 끊겨버렸고, 간혹 연락이 되는 이들에게도 나는 그저 배신자였습니다. 젊은 시절 당했던 그 고문으로 인한 트라우마로 사람을 새로 사귀는 일도 쉽지 않았습니다. 감정은 고문당하다 토했던 것에 갈이 쓸려나간 듯 찾기 힘들었고, 주로 만나게 되는 건 일과 관계된 사람들이었습니다. 만나는 여자는 있었지만 그들에게 쉽게 마음을 열 수 없었습니다. 내가 만나던 여자들은 정부가 의심하지 않을만한 골 빈 여자들뿐이었으니까요. 꽉 차게 되었지만 결국 비어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럴 때 만난 것이 당신이었습니다. 난 당신의 첫말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모두들 감명 받았느니 당신의 소설을 읽고 나도 믿음에 대해 배웠다느니 말하는 이들이 대부분인 팬사인회장이었고 그렇게 말하고 싶지 않은 이들도 주변에서 넌지시 지켜보는 군인들이 두려워 그렇게 말하지 못 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런 곳에서 당신은 그런 말을 했습니다. 당신이 소설 속에서 말하는 믿음이 정말 가능한 것일까요, 라고. 그 말을 듣자 난 한참동안 당신을 올려다보았습니다. 어이가 없었다거나 화가 나서 그랬다기보다는 그런 말을 너무 오랜만에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게다가 뭐라고 대답할 말도 없었습니다. 애써 짓고 있던 가면 같던 웃음도  흐트러진 채였습니다. 그렇게 당신을 쳐다보고 있는 내게 당신은 덧붙였습니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의심을 하기 마련이에요, 그런데 당신이 말하는 절대적 믿음이 가능한 건가요. 난 뭐라고 대답할 말을 찾지 못 해서 당신을 그냥 멀뚱히 쳐다볼 뿐이었고, 사람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의 말을 귀담아 듣던 군인들도 당신을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어수선한 상황에서도 난 그냥 당신의 얼굴만 보고 있었습니다. 그 말을 하는 당신은 몹시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실제로 내 이상형을 닮은 아름다운 모습이긴 했지만, 당신의 그 말이 내게 얼마만큼의 의미가 있었는지 당신은 모를 겁니다. 지금 이 순간도, 그 때 당신의 그 말만 생각하면 당신을 놓고 싶지 않을 정도이니까요. 그 말이 당신이 한 말이 아니라 만들어진 말이라고 해도 말이에요.
내가 우물쭈물하고 있는 사이에 당신은 다가온 군인들에게 잡혀갔고, 난 당신이 간지 얼마 안 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당신과 군인들이 사라진 방향으로 뛰어갔습니다. 당신은 군인들에게 팔을 잡힌 채 걸어가고 있었죠. 난 군인들을 불렀습니다. 그리고는 당신을 한 번만 봐줄 수는 없겠냐고 사정했죠.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웃긴 짓이었어요. 하지만 지금이야 어떻게 된 건지 아니까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지, 그 땐 몰랐으니 어쩔 수 없었죠. 내 사정 끝에 군인들은 조금은 난감한 표정으로 당신을 풀어주었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2분동안만 당신과 이야기하겠다고 했고, 그들은 팬사인회장으로 돌아갔습니다. 당신도 기억하고 있겠죠, 그 이후의 내 말을. 난 당신에게 당신이 한 질문에 대해 답하고 싶으니 다음에 만나자고 했습니다, 당신이 이 말을 기억하고 있으면 좋겠습니다. 적어도 그 때의 나에겐 몹시 용기 낸 말이었으니까요. 그 말을 하면서 나는 내가 아직은 살아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그런 좋은 예감에도 불구하고 난 여전히 당신이 나를 뚱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어서 걱정했습니다. 괜한 말을 했나 싶어 식은땀도 흘렀죠. 하지만 다행히도 당신의 입에서 나온 말은 긍정적이었습니다. 당신은 내게 휴대폰 번호를 주고 떠났죠. 만날 장소 결정하면 연락 주라고 말입니다.
다음 날 나는 당신과 만났고 그 자리에서 당신의 질문에 답했습니다. 밤새 고민해온 대답이었습니다. 질문 자체가 어려웠다기보다는 거기에 대한 답이 ‘그 분’의 입장에서는 민감할 수 있는 이야기였고 밖에서 당신과 이야기하고 있던 터라 어딘가에 감시꾼이 우릴 보고 있을 지도 몰랐으니까요. 그렇게 고민하다가 결국 나는 말했습니다. 절대적인 믿음이란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믿음은 노력하는 것이다. 노력하다보면 절대적 믿음에 가까워질 수는 있을 거다, 그를 통해 우리는 믿음에 대한 대가를 얻게 된다, 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런 내 말에 당신은 이렇게 말했죠. 난 당신의 말을 받아들이지 못 한다, 믿음이라는 게 어떻게 노력하는 것인가. 노력해서 생긴 믿음은 세뇌일 뿐, 믿음이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믿음을 통해 대가를 얻는다는 보장은 어디 있느냐고 했습니다. 그런 당신의 말은 나를 자꾸 조마조마하게 했습니다. 당신의 말은 ‘그 분’의 감시견들이 받아들이기에 너무 민감했고, 한 편으로는 당신의 말이 자꾸 내 마음 속에 묻어뒀던 생각들을 들춰내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난 더 이상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당신과 있을 때면 자꾸 내 속까지 드러나는 것 같아 평온해질 수 없었습니다. 그러는 제게 당신은 말했습니다.
그러면 서로 믿음을 통해 대가를 얻는다는 걸 증명해보라고.
그렇게 당신과 나는 사귀게 되었습니다. 아니,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했나요. 그렇진 않았겠죠? 아무 말이 없는 걸 보면 그런 것 같네요. 하긴 의도적인 접근이었으니까요. 눈치 챘어야 했습니다. 당신이 만남에서 내건 조건은 애초에 서로에게 모든 것을 밝히는 것이었습니다. 서로에게 숨기는 것이 있다면 완전한 믿음은 힘드니까요. 하지만 난 처음부터 당신에게 모든 진심을 밝히진 않았습니다. 만나는 것은 우리지만 결국 우리를 제일 위에서 보고 계시는 ‘그 분’이 있으니까요.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는 건 결국 내 마음 속에 있는 ‘그 분’의 필터로 거른 말들이었죠. 하지만 그에 비해 당신은 무슨 말이든 하기 시작했습니다. 강요한 믿음을 이해할 수 없다는 말까지 했죠. 그런 당신이 걱정되어 우선은 내 집에서 감시망을 피해서 말하기로 했습니다. 정부에서 신뢰하고 있는 작가였기에 저도 보통 사람들보다는 감시에서 예외가 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아니,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문화부의 허가를 받아 감시카메라와 도청장치를 제거할 수 있었죠. 그래서 당신과 나는 늘 집에서 만나기 시작했습니다. 집에서 만나면서 당신은 더더욱 과감해졌습니다. 당신이 그 때 한 말 중에 잊을 수 없는 말이 많네요. 그 분이 누구인지 본 적이 있냐는 등, 다들 그 분이 엄청난 존재인양 떠받들고, 반체체단체를 소탕하는 모습을 생중계해서 강제시청시킴으로서 당근과 채찍 전략을 동시에 사용해서 그 분에 대한 믿음을 강요하지만, 결국 그것은 사람들에게 믿음을 전염시키는 일일 뿐이라는 이야기까지.
그런 당신 앞에서 나는 뭐라고 할 말이 없었습니다. 당신을 만나던 처음에는 분명 내게도 자기 검열이라는 것이 존재했습니다. 아무리 감시가 없는 환경에서도 쉽게 내 진심을 털어놓을 수가 없었죠. 하지만 나보다 더 솔직한 당신 앞에서 나도 내 진심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결국 대화 주제는 내 소설까지 나아갔습니다. 제 소설 내용은 기억하고 있겠죠? 그랬을 겁니다. 분명 내게 접근하기 위해 수십 번 소설을 읽었을 테니까요. 그러고 보면 결국 내 지금도 소설 속의 S와 별 다를 바가 없네요.
S도 대치하는 상대 제국을 차지하기 위해 내부협력자인 여주인공을 믿어야만 했죠. 내부협력자인 여주인공은 자신의 제국을 무너뜨리기 위해 수없이 많은 전략을 펼쳐야했고, 그 중에서는 심지어 이중 전략들도 존재해 S까지 혼란에 빠지게 했습니다. 그래서 S는 여주인공을 믿음에 있어서 계속 갈등하게 되죠. 그러다가 결국 여주인공을 믿지 못 한 채 S는 독단적으로 작전을 수행하고, 여주인공도 S도 모두 죽게 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어때요? 지금 생각해도 참 웃기죠? 그 때는 그 소설 이야기하면서 당신이 S란 인물은 결국 나 자신이고, 불합리한 ‘그 분’에게 완벽한 믿음을 보이지 못 하는 것은 아니냐고 했었는데. 그래요, 결국 그게 사실이었죠. 그래서 당신에게 그렇다고 말했고요.
당신을 보낼 때면 늘 아쉬웠습니다. 당신을 바로 보내는 것이 아쉬워 집에서만큼 제대로 된 대화를 할 수 없어도 늘 밖에 나가서 같이 커피를 마시고 보내곤 했죠. 봄이어서 함께 벚꽃도 봤고요. 제한된 대화 밖에 할 수 없어도 같이 보는 벚꽃은 참 예뻤습니다. 그 추억이 변질되버린 지금에 와서 생각해도 그 벚꽃은 정말 예뻤어요. 그 벚꽃이 내 마음에도 들어와 앉을 것만 같았습니다. 내 마음의 표면에 들어와 앉아 내 마음을 흔들어서 깊이 들어가버린 감정을 끌어낼 것만 같았어요.
그런 마음의 변화는 내가 쓰는 글에도 드러나고 있었습니다. 신문에 어떤 글을 기고하기로 해서 쓰던 글이었습니다. 글을 탈고 후 나는 위험하다 싶은 내용들을 애써 수정했습니다. 하지만 수정하다보니 애초에 이 글의 기본 바탕에 문제가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결국 그 글의 주제는 이랬으니까요. ‘결국 사람은 자신이 믿고 싶은 이를 믿기 마련이다. 믿으라고 강요당하는 인물을 믿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논란이 될 수 있는 글이었습니다. 예전에 내가 기고하던 글들과는 분명 다른 입장이었습니다. 결국 시간도 없고 해서 신문사에 글을 보냈고, 신문사에서는 글을 그대로 실었습니다. 물론 위에는 글쓴이의 시각은 본 신문사의 입장과는 상관없다는 말을 붙이고요.
그 글이 나가고 나서 우선 나는 문화부에 호출되어 불려갔습니다. 늘 날카롭게 작가들의 글을 보고 있는 문화부에서 내 글을 보고 이상한 조짐을 느꼈던 모양입니다. 거기서 나는 최대한 호의적인 태도로 변명했습니다. 그들로서는 민중선동을 위한 좋은 도구인 내 글이 변하고 있다는 건 불안한 일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불안감을 씻어주겠다고 계속 노력했습니다. 그 노력이 통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결국 그 불안감은 계속 더해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그들의 불안감이 커짐과 동시에 내게는 색다른 인물이 접근해왔습니다. 그녀는 내가 저항단체에 있었을 때의 옛 동료 D였습니다. 내가 고문실에서 동료들 이름을 밀고한 후에 연락이 끊긴 사람들 중 하나였는데, 당신도 D만은 몰랐겠죠. 그럴 수밖에요. 그녀는 당신 몰래 만났고 얘기하려 하기도 전에 D가 죽었으니까요.
그녀가 접근해 온 계기는 신문에 기고한 내 글이었습니다. 내 글에서 심경의 변화를 느꼈다고 했어요. 그동안 글은 정부에 우호적인 글뿐이라 정말 내가 생각이 바뀐 건가 싶었는데 그렇지 않은 것 같아서 만나고 싶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녀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녀는 내가 예전에 엷은 마음을 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내 밀고 이후로 동료들이 연락이 안 될 때 가장 걱정된 것도 D였고, 가장 미안한 마음이 들었던 것도 D였습니다. 그런 D가 눈앞에 있다니 마음이 복잡했습니다. 제일 먼저 한 일은 그녀에게 용서를 구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녀는 나를 용서하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아직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있다고 했습니다. 그 일이 무엇일지 나는 짐작이 갔습니다.
ADA 활동이었습니다. ‘그 분’ 정권 초기부터 그녀는 그런 단체를 계획하고 있었기에 ADA가 생겨났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D도 어딘가에서 활동하고 있진 않을까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녀는 ADA가 전국적으로 선언문을 배포하고 본격적인 게릴라전을 시작할 생각인데, 그 선언문을 써달라는 부탁을 했습니다. 난 망설여져서 한동안 대답을 못 했습니다. 나 혼자의 안전이 아닌 당신의 안전도 달린 문제였습니다. 내가 당신을 만나고 있다는 것을 감시자들도 알고 있을 터였습니다. 내가 망설이자 D는 쉽게 결정하기 힘들다면 며칠 후에 다시 찾아올 테니 답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그녀는 떠났습니다.
당신은 분명 처음 듣는 이야기일 겁니다. 처음에 당신에게 이 이야기를 하지 않은 이유는 당신을 위험에 빠뜨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감시가 되지 않는 집이었지만, 혹시라도 D가 나와 접촉했다는 사실을 누군가가 알게 된다면 나는 물론이고 당신까지 다치는 거였으니까. 물론 그런 이유만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엷은 마음이었다고 해도 예전에 그런 관계에 있었던 사람에 대해 당신에게 말하는 것이 조금 겁났습니다. 당신이 그런 걸 신경쓸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예전에 관계가 있었던 사람 이야기가 우리 사이에서 오가는 것은 싫었습니다. 실제로 나는 당신에게 D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 뿐, ADA와 접촉했다는 이야기는 했었지요. 일을 부탁받았는데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요.
그 때 당신은 내게 조금은 망설이면서 말했습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이고 위험하지만 결국 사람들은 다들 이 정권에 대해 불만이 많을 거라고요. 그런 당신을 보면서 나는 마음을 굳혔고 난 점점 더 당신을 믿어갔습니다. 당신에 대한 믿음이 깊어질수록 웃음이 많아졌습니다.
난 다시 찾아온 D에게 그 일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D는 몹시 기뻐하면서도 내게 혹시 그 일에 대해 알고 있는 다른 사람이 있냐고 물었죠. 난 감추려고 했지만, 내 표정에서 거짓이 드러났던 모양입니다. D는 뭔가를 숨기고 있는 사람과는 같이 일할 수 없다고 했고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녀에게 당신에 대해 말했습니다.
당신에 대해 많은 것을 듣게 된 D는 당신을 의심했습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군인들까지 있는 팬사인회에서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없었을 거라는 점, 게다가 요즘 신고제가 시행되서 정부에 대해 부정적 발언을 하는 이들은 신고를 당하는데, 카페에서 ‘그 분’에 대해 그 정도의 이야기를 했는데도 잡혀가지 않은 점 등이 이상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난 애써 부인했죠. 그 땐 당신을 믿고 있었으니까요. 그런 일들은 그냥 우연일 뿐, 실제로 의심할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D는 쉽게 당신에 대한 의심을 버리지 않았죠. 지금 생각해보면 난 분명 D의 말대로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난 그 때 당신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생전 처음 좋아하게 된 사람이기에 그저 믿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당신을 믿는 내가 좋았습니다. 누군가의 감시 하라고 해도 서로 사랑하는 이들은 있는데 나는 그런 마음을 가져본 적이 없어서 늘 괴로웠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나도 사랑하고 믿을 사람이 생겼습니다. ‘그 분’처럼 강요당해서 믿을 이가 아닌, 믿고 싶어서 믿는 사람이요. 믿음을 통해 대가를 얻을 수 있는지 보자며 시작한 관계에서 정말 나는 대가로 행복을 얻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당신은 배신을 했던 걸까요. 나한테 절대적 믿음,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지랄하면서 당신은 왜 나를 배신했죠? D가 찾아온 그 날 밤, 난 당신 집에 가서 말했죠. 당신 집에서도 제대로 된 이야기가 하고 싶었기에 문화부의 허락을 얻어 당신 집의 도청장치와 감시카메라까지 제거한 집이었습니다. 그 정도로 믿었던 당신이었기에 ADA에 대한 이야기를 했던 겁니다. 의뢰를 받아들여 쓴 글이 다음날 정도면 완성될 것이고, 당장 ADA지부가 있는 곳으로 가져갈 거라고요. 감시카메라도 도청장치도 모두 제거했기에, 내 말을 듣고 있는 건 당신뿐이었습니다.
그 다음 날 공습이 있었죠. 텔레비전에서 긴급 속보가 흘러나올 때 나는 혹시 하는 마음에 불안했습니다. 내 예감은 맞아떨어졌습니다. 습격 장소는 D가 가르쳐준 그 ADA지부였습니다. 카론 부대원들은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기자는 한 군인에게 인터뷰까지 했습니다. 그는 울면서 이 나라를 위해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자신이 자랑스럽다고 했습니다. 그는 총을 굳게 들고 있었고, 인터뷰가 끝나자마자 그들은 ADA지부가 있는 건물 지하로 들어가서 총질을 시작했습니다. 난 더 이상 볼 수 없어서 텔레비전을 꺼버렸습니다.
뭔가가 마음에 걸렸습니다. D는 당신을 의심했었고, 어쩌면 그 의심이 맞을 수도 있었습니다. D는 그 날 돌아가면서 보안은 완벽하게 유지되고 있다고 했습니다. 물론 정말 완벽하게 유지되고 있는지는 C도 100% 알지는 못 했겠죠. 하지만 그 비밀을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당신이 있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신문에 D의 사진이 실려 있을 때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D가 케론 부대의 ADA지부 습격 마지막 예식인 폭행을 거치기 바로 직전에 찍은 사진이었습니다. 그 사진을 찍고 난 후 그녀는 개처럼 맞았을 겁니다. 그리고 또 한 군인이 스프레이 페인트를 가지고 벽에 ‘믿어라’고 썼겠지요. 나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당신의 집으로 갔습니다.
난 당신 앞에 신문을 내려놓고 이게 어떻게 된 건지 아냐고 물었습니다. 당신은 자신도 모르는 일이라고 했죠. 오히려 당신은 나의 안전을 물었습니다. 나도 이 일과 관련되어 있으니까요. 그렇게 물어오는 당신을 보고 난 당황했습니다. 아직 의심하기에 부족한 증거를 가지고, 평생 믿겠다고 한 사람을 의심해버렸으니까요. 난 당신에게 미안하다고 하고, 그 집을 나와 버렸습니다. 그 때는 내가 부끄러웠으니까요. 하지만 집에 들어와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의심은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D가 한 말도 있기에 쉽게 떨쳐버릴 수가 없었어요. 무엇보다 당신을 좋아하게 되면 될수록, 어두운 마음도 커져갔습니다. 너무 어렵게 얻은 사랑이라 불안해졌어요. 당신이 정말 의도적으로 접근한 것이면 어떻게 하나 싶었습니다. 당신이 그저 나를 감시하기 위해 온 사람이고 당신의 마음이 진심이 아니라면.
그제, 당신의 집에 찾아갔을 때 당신은 잠들어 있었고, 나도 모르게 당신을 시험해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의심을 이기기가 힘들었습니다. 물론 망설여지기도 했습니다. 뭐가 어찌 됐건 그냥 내 의심이었다면 당신에게 잔혹한 행동이었으니까요. 하지만 결국 불안감이 날 이겼습니다. 난 내 행동을 애써 정당화했습니다. 의심을 떨쳐야 다시 당신을 믿을 수 있을 거라고 하면서요. 난 잠들어 있는 당신 옆에서 전화를 했습니다. 물론 가짜 전화였죠. 또 다른 ADA 지부의 연락인 것처럼 전화를 해서 위치까지 상세히 불렀습니다. 그러고 나서 나는 당신의 집을 나갔죠.
그리고 어제 아침, 문화부의 친한 직원을 통해 확인해보니 카론 부대의 ADA 지부 습격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는 친절하게 하지만 그건 정보원이 잘못 안 것이라고까지 말했죠. 그래서 나는 알아버린 겁니다. 당신이 누구인지를요.
나는 당신을 찾아갔습니다. 폭격을 퍼부을 마음이었습니다. 문을 열어주는 당신에게 나는 다짜고짜 말했죠. 이게 당신이 말하는 믿음이고 믿음의 대가 배신이냐고요. 그렇게 화냈던 적은 별로 없었을 겁니다. 믿음이 깨져버렸으니까요. 평생 가져가겠다고 다짐했던 그 믿음을 당신이 깨버렸어요. 그렇게 화를 냈더니 결국 당신은 실토하더군요.
당신은 문화부의 정보원이었습니다. 빌어먹을 문화부 새끼들, 결국 녀석들은 내 파급력이 걱정돼서 내가 친정부적인 소설을 쓰고, 정부에 우호적인 글을 기고를 해도 오히려 나를 더 감시하기로 작정한 겁니다. 그래서 몰래 당신이라는 정보원까지 붙인 거고요.
그런데 당신이 그 다음에 한 말이 더 가관이었습니다. 그래도 믿으라니, 정말 자신은 ADA에 대해 보고하지 않았다니. 난 그 때 처음 당신에게 욕을 했던 것 같습니다. 당신은 정말 지랄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런데도 당신은 정말 나를 좋아하게 되었고, 나에 대해 보고할 마음이 없다고 했죠. 그 때 팬사인회에서 내게 했던 말은 문화부에서 시킨 대사이기도 했지만, 그 말도 결코 거짓은 아니었다고 했죠. 자신도 자신의 역할에 회의가 많았고 나와 나눴던 이야기 중 진심이었던 것도 많았다고요. 하지만 당신의 어떤 말도 내 귀에 들리지 않았습니다. 날 배신한 사람에게 무엇이 더 필요할까요. 그냥 나가려는 나를 당신은 뒤에서 끌어안았습니다. 이렇게 가지 말라고 했죠. 차라리 둘이 어디론가 도망가는 게 더 낫다고요. 하지만 그건 분명 정보원 생명을 연장시켜보려고 한 당신 연극이었겠죠. 뭐하려고 그런 연극을 하나요, 당신은 이미 내 믿음을 대가로 당신이 원하는 것, ‘그 분’에 대한 내 변절을 손에 넣었는데 말입니다.
난 이제 더 이상 당신을 믿지 않습니다. 그리고 내게 이렇게까지 하는 이 정부, ‘그 분’의 정권을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사람의 감정을 이용해서 이렇게까지 할 수 있는 정부라는 것을 알아봐야 했는데, 내게 한 짓은 너무 극악합니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의심하면서 절대적 믿음을 바라다니, 사람들이 그 믿음을 통해 얻는 건 부자유뿐이죠. 그래요, 그거 하나는 좋네요. 적어도 저는 이 체제에 대한 믿음을 버리면서 자유만은 얻었으니까요. 하지만 당신에 대한 믿음이 함께 사라지면서 남은 건 살이 찢어지는 듯한 괴로움이에요.
휴, 그래도 다 소용없죠. 이렇게까지 말했으니 나는 한 번 더 그 고문실을 마주하겠군요. 지금 잠든 척 하는 당신은 이 말도 이미 자신의 머릿속에 다 기억하고 있을 테니까요. 그런데 참 궁금하네요. 오늘 그 문자는 왜 보냈나요. 믿음이 깨졌으니, 난 끝이라니요. 믿으라고 한 건 당신이었잖아요. 제발, 그 동안 내 마음을 생각해서 일어나서 한 마디 정도는 해줄 수 없습니까?


나는 결국 내 마음을 절제할 수가 없어서 그녀에게 다가갔고 누워있는 그녀를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그러면서 깨달았다. 그녀의 몸은 몹시 차가웠다.
“뭐야?”
나는 놀라서 그녀의 코에 귀를 갖다 대었다. 그녀는 숨을 쉬고 있지 않았다.
분명 죽어 있었다. 나는 놀라서 그녀를 침대에 다시 누이고, 그녀를 깨우기 위해 별 짓을 다했지만 그녀는 깨어나지 않았다.
난 멍해져서 침대 옆에 서있었다. 그리고 순간, 뭔가가 내 다리를 찔렀다.
“아악!”
나는 주저앉았다. 침대 밑에서 사람이 하나 나왔다. 그녀의 얼굴은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D였으니까.
“다시 소개해야겠네. 난 정보부 소속 비밀요원이야. 너처럼 고문당하던 날, 사상을 바꿨지.”
D는 나를 보고 말했다. 몸에 점점 감각이 없어지는 가운데 그녀의 목소리는 몽롱하게 들렸다.
“이 여자는 방금 내가 독으로 죽였어. 그리고 눈 감기고 눕혀 놓은 거야. 이 여자도 참 안 됐어. 이 여자는 오랫동안 문화부의 골칫거리였어. 너무 감정적이고, 사상개조도 완전히 되질 못 해서 문화부의 도움이 안 됐지. 심지어는 네가 예전에 저항단체에 있을 때 썼던 소설도 읽었다니까. 그래서 결국 이번에 문화부에서 계획을 세운 거야. 너를 시험해보고, 이 여자도 시험해볼 기회를 말이야.”
점점 멍해지는 가운데 듣는 진실은 실감이 나질 않았다.
“우린 이 여자를 네 취향에 맞게 성형수술시켰어. 그 후에 네 팬사인회를 할 때부터 정보원으로 투입시켰지.”
D는 웃고 있었다.
“이 여자 꽤 금방 본색을 드러냈어. 처음에 연기랍시고 시킨 대사를 할 때부터 뭔가 이상하다 싶었지. 그 뒤로 꾸준히 너희 둘을 감시해왔어. 결국 둘 다 우리 예감대로 움직였지. 둘 다 ‘그 분’에 대한 믿음을 버렸어.”
모든 것이 명확히 밝혀지는 순간이지만, 이미 독에 취해 나는 몽롱해지고 있었다.
“내가 너에게 접근한 건 글을 기고하고 나서 네가 점점 이상해진다 싶어서 너를 시험하기 위해서였어. 그런데 너는 선언문을 쓰겠다고 했지. 그래서 우린 너와 그 여자 모두 위험하다 싶어서 너에게 그 여자를 의심하게 만들려고 했어. ADA 지부를 습격하는 거야, 정보부는 예전에 그 위치를 알고 있었어. 다음 날 아침 신문에 나온 사진은 카론 부대랑 내가 짜고 찍은 거고. 하지만 넌 우리 뜻대로 이 여자를 의심하기 시작했지. 네가 이 여자를 시험해서 거짓 정보를 흘릴 때도 이 여자는 정말 자고 있었어.”
그랬구나.
“다음날 너와 통화했던 문화부 직원은 이미 우리에게서 명령받고 난 후였어. 너는 집에 있는 도청장치와 감시 카메라, 그리고 이 여자 집에 있는 것도 다 제거했다고 생각했겠지만, 우리가 그렇게 두진 않았다는 거, 그건 너도 알겠지?”
난 계속 죽어가고 있다.
“오늘 낮에 그 문자 보낸 것도 나야. 너한테 보내는 내 마지막 인사이기도 했고, 너를 이 집에 오게 만들 수단이기도 했지.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좀 부족해서 사람을 하나 보내서 술 먹는 너한테 이 집에 가라고 말하도록 시켰어. 네가 술자리를 떠날 때 우린 네가 이 집에 오겠구나하고 예상했지. 그래서 네가 술집을 떠나는 순간에 나는 이 집에 먼저 와서 이 여자를 죽이고 난 침대 밑에 숨어 있었어. 기다리다보니 술에 취한 네가 와서 긴 고백을 하더라고.”
이제는 정말 버티기 힘들었다. 정말 카론이 나를 향해 손짓하는 것만 같았다.
“차라리 끝까지 이 여자 믿지 그랬어? 그랬으면 우리도 더 잡기 힘들었을 텐데, 아 맞다.”
D는 말하다 갑자기 내 정면에 위치한 텔레비전 옆의 가방을 가리켰다.
“지금 이거 다 찍혔어. 지금 생방송 중이었어. 몰랐지? 너 같은 작가가 ‘그 분’을 배신하다 죽는데 이거, 꽤 파급력 있는 영상이 될 거야.”
그렇구나. 또 가족끼리 삼삼오오 모여 이 광경을 보고 있겠구나. 노약자도, 갓 태어난 친구들도 함께. 난 어떻게든 침대 위로 올라간다. B는 고개를 돌리고 있다. 그녀의 손이라도 잡는다. 생각해보니 카론이 우리를 향해 손짓하는 게 아니라 천사가 우리 둘을 향해 손짓하는 것 같다. 하긴 지옥에서 지옥으로 가란 법은 없다. 나도 천사를 향해 손을 내민다. D가 그 모습을 보다가 가방이 놓인 반대편 벽으로 가서 스프레이 프린트를 들고 뭔가를 쓴다. 그게 무엇일지는 안 보고도 알 것 같지만 이젠 상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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