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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웅은 정말 영웅이었나?

존재를 인식하기란 정말 어려운 일일 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조차 알지 못하는데, 그 누가 우리 이외의 존재들을 인식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귀신이나 요정과 환수 따위들이 전설로만 전해졌지 누구도 직접 목격하지 못한 것처럼.
하지만 영웅은 다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리들은 그들을 인식할 수 있다. 많은 언론 매체들이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을 한다거나, 우리 사회에 정말로 이로운 일을 했다고 한다면 두 손 두 발을 다 들어 하늘 높이 칭송한다. 그의 인품이 정말 깨끗하게 보이는 것처럼.


“그만 도망치는 게 좋을 거야. 이제 막다른 골목이거든!”

공중에 떠있는 검은 망토와 붉은 두건을 매고 몸에 짝 달라붙는 쫄쫄이 타이즈를 입은 한 사내가 슬럼가에서 크게 외쳤다. 그러자 그에게 쫓기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한 처량한 남자가 눈가를 심하게 부르르 떨며 대꾸했다.

“도망을 치든 안치든 그건 내 마음이야. 하지만 여긴 슬럼가라고! 너 따위가 이곳의 지리를 잘 알 리는 없을 테지.”

그러고는 근처 건물 틈새로 있는 힘껏 달려들었다. 사내는 하는 수 없다는 듯이 하늘 높이 날아올라 그를 뒤쫓았다. 하지만 워낙 슬럼가의 건물들이 무질서하게 건설되어 있었고, 전선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어 나는 게 쉽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결국 그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혀를 차며 이를 갈았다.
한편 쫄쫄이 타이즈를 입은 사내에게서 간신히 도망친 남자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했다. 그리고 건물을 마구잡이로 세워버려 미로처럼 변한 슬럼가에서 남자는 몇 안 되는 이들만 아는 장소로 향했다.
그곳으로 향하는 동안 남자는 몇 개의 낡고 오래된 건물들과 복잡하게 얽힌 전선들을 치워야만 했다. 그러면서 그는 손목에 차고 있던 낡은 손목시계를 보고 안색이 안 좋아 지더니 움직이는 속도를 높였다. 그가 슬럼가에서 움직이는 모습은 흡사 정글의 원숭이를 보는 듯 했다. 유연하면서도 민첩한 그는 정말로 정글의 원숭이 같았다.
그렇게 미로 같은 건물들 사이를 빠져나온 남자는 어느 허름한 3층 복합주택의 지하로 통하는 계단으로 내려갔다. 건물이 얼마나 낡았던지 대부분 전구에는 불이 들어오지 않았고, 몇 개의 전구에 불이 들어온다 해도 깨진 전구들이었다. 그리고 그런 낡은 계단을 내려와 작은 문 하나를 통과하자, 희미한 불빛으로 유지되던 좀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그 공간에는 로브를 입고 후드로 머리를 감춘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그런데 남자가 그 공간에 들어서자 그들 중 수장으로 보이는 사람이 둔탁한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드디어 왔나보군. 그래, 어떻게 되었나.”
“뭐, 성가신 녀석이 따라붙긴 했지만 따돌리고 정보도 무사합니다.”

  그의 물음에 남자는 그렇게 답하고는 앞으로 조금 걸어갔다. 그러고는 넓은 공간의 중간에 지도가 펼쳐진 긴 원탁의 의자에 앉았다. 그러자 둔탁한 목소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좋은 소식이군. 그래, 어디 정보를 들어보기로 할까?”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원탁 위 지도를 손으로 가리켰다.

“그것이 지금 보관되어 있는 곳은 도시의 시청과 시립역사박물관입니다. 그들은 그것을 도시의 상징으로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도시의 성장에 그것이 큰 기여를 했다고 말하고 있더군요.”
“뭐, 여기 있는 모두가 그건 잘 알고 있던 사실이 아닌가? 내가,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그걸 어떻게 되찾을 수 있냐는 말이다.”
“물론 그것도 알아왔습니다. 하지만 아직 시기가 이릅니다. 시청과 시립역사박물관의 경비가 무척 산험 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가장 큰 걸림돌은 바로 그 녀석입니다. 우리를 지구 끝까지 쫓아와 괴멸시켜버릴 히로, 그 녀석이 있는 한 우리가 그것을 되찾는 것은 무리일 것입니다.”
“그래, 그 자식이 우리의 모든 일들을 해방 놓지. 하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지 않은가.”

그렇게 묻는 수장의 말에 남자는 차분하고도 강하고 분명한 어조로 대답했다.

“별다른 방법이 없다면, 가장 단순하고 가장 무식한 방법을 쓰면 됩니다.”
“방법? 그게 무엇인가.”
“그를 처치하는 겁니다.”

그 말 한 마디에 수장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술렁였다. 그러자 수장이 원탁을 내려치며 말했다.

“모두 조용히들 하게나! 그래, 어디 자네의 말대로 그게 가장 좋은 방법이겠지. 하지만 어떻게, 어떻게 그를 제거할 건가?”
“도시가 영웅이라고 부르는데, 지금껏 우린 영웅대접을 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이참에 우리도 그를 영웅으로 대해줘야죠.”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히로는 남자를 놓친 것에 혀를 차며 자신의 초호화 고급빌딩으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자신의 매니저인 미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자 신호음이 가고 이내 벽걸이 텔레비전에 미진의 얼굴이 나타났다. 히로는 미진을 바라보며 오늘 있었던 일을 보고 했다. 그러자 미진이 그를 향해 불같이 화를 냈다.

“아니, 당신은 일을 왜 그렇게 처리하는 거예요. 지금 경찰청에서 연예인 놀이만 하지 말고 ‘피스테이큰’이나 잡으라고 얼마나 난리를 치는 줄 아세요?”
“미, 미안해. 하지만 그 녀석이 워낙 빨리 슬럼가 깊숙이 도망을 치는 데 나보고 어떡하라고. 게다가 거긴 전기선들과 건물들이 무질서하게 있어서 미로와 같다는 건 너도 알잖아.”
“하지만 이런 일이 계속 생기게 되면, 경찰청에서의 당신의 입지는 계속 줄어든다는 걸 알아야 해요.”
“나도 알아. 하지만 내 능력 밖인 걸 어쩌겠어. 안 그래?”
“허구한 날 내 능력 밖이라고 하죠. 쯧, 알았어요. 이번만 봐주는 거예요. 그리고 4시간 후에 방송스케줄이 잡혔으니 잠이라도 자는 게 좋을 거예요. 시간되면 데리러 갈 테니까.”
“네~”

포기했다는 듯 혀를 차며 전화를 끊는 미진을 향해 히로가 비아냥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고는 발코니로 향해 문을 열고 난간에 기대어 도시를 내려다보았다. 가까이 보이는 마천루들과 멀리서 들려오는 경적들, 고층 빌딩 아래로 보이는 띠를 이룬 매연들로 인해 허탈감이 밀려왔고, 자신이 영웅이라고 한다 해도 도시에서는 정말 작은 존재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한편으론 지금의 생활이 정말 끝내주었다. 영웅이 아닌 시절에는 이런 초호화 빌딩에서 산다는 것은 꿈만 같은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초호화 고층빌딩에 살며, 연예인 활동으로 수많은 팬들이 자신을 원한다는 걸 느낀다는 게 얼마나 끝내주는 일인지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영웅이라는 이 일을 그만 두고 싶지 않았다. 만일 그만두게 된다면 미쳐버리리라.
그는 발코니의 문을 닫고 침실로 향해 미진이 데리러 올 때까지 잠시 숙면을 취했다. 그리고 세 시간이 지나자 그를 데리러 온 미진이 초인종을 눌렀다. 그 소리에 침대에서 자고 있던 히로는 짜증이 섞인 신음을 내며 일어나 눈곱이 잔뜩인 채로 현관문을 열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본 미진이 집안으로 들어가 그의 등을 떠밀며 말했다.

“이제 일어났나 보네요. 뭐, 마침 잘 됐네요. 제가 메이커하고 해드릴 테니 얼른 씻고 나오세요.”

어쩔 수 없이 그녀에게 등을 떠밀려 샤워실로 들어가 세수를 하고 간단하게 머리를 행구고 나왔다. 그러자 미진이 거실 탁자에 메이커 가방을 펼쳐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나오자 그의 얼굴에 아이라인을 그리고 파우더로 분칠을 하며 그를 화장시켰다. 그런 뒤, 그가 가장 어울릴만한 옷을 가져다주었다.
그렇게 한껏 차려입은 히로는 미진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미진이 오늘 있을 방송에 대해 간략하게 히로에게 설명했다.

“이번 방송은 토크쇼에요. 그 동안 있었던 히로씨의 활약과 함께 최근 쫓고 있는 ‘피스테이큰’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면 됩니다. 그리고 마무리로 팬서비스를 하면 되고요. 히로씨 노래 잘 부르니까. 오늘은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하죠.”
“언제나 내가 할 걸 너 혼자 정하네.”
“당연하죠. 제가 히로씨의 매니저인 걸요. 그러니 제가 당신의 모든 걸 관리하는 거예요.”
“날 관리하느라 힘들겠네. 혹시 미진씨도 매니저 하나 옆에 둘 생각 없어?”
“저는 제 일을 잘 관리하니 매니저 같은 건 필요 없어요. 하지만 히로씨는 다르잖아요. 일일이 제가 다 챙겨야죠. 게다가 당신은 이 도시의 영웅인 걸요.”

그 말에 그는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려 창밖 너머를 보았다. 엘리베이터가 내려갈수록 건물들은 위로 올라왔고, 자신이 있는 위치는 반대로 아래로 내려갔다. 이윽고 엘리베이터가 지하로 들어서자 창문으로 자신의 모습이 비춰졌다. 엘리베이터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영웅이라기보다는 연예인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그는 미진에게 들릴 듯 말듯 한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영웅 좋아하네.”
“뭐라고요?”

중얼거림이 미진의 귀에 들어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히로의 말을 제대로 듯지 못한 모양이었다. 때마침 엘리베이터가 지하주차장에 도착했다는 신호를 보내왔다. 그러자 그는 미진에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고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방송국까지 타고 갈 미진의 차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렇게 미진의 차를 타고 그들은 오늘 출연할 프로그램을 하는 방송국으로 향했다. 방송국을 향하면서 그는 창밖으로 보이는 도시의 풍경들을 바라보았다. 그냥 보아도 화려한 도시는 그 어떤 흠도 있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자신은 영웅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면서 도시의 이면을 볼 수 있었다. 도시는 화려한 것을 겉으로 내세우고 있었지만, 그 속은 정말 더러웠다. 이런 도시에 그런 곳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지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도시라는 곳에는 어느 정도 그런 곳이 있는 거라는 어느 대학 교수의 말을 떠올리고는 그런 의구심을 접어버렸다.
그렇게 도시의 풍경을 바라보며 사념에 잠겨있던 그는 방송국에 도착한 자동차의 급정거에 사념에서 빠져나왔다. 미진이 히로에게 먼저 내려 올라가라고 말하자, 그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차에서 내려 높게 솟은 방송국을 올려다보았다. 방송국은 언제 보듯 높고 화려한 모습을 뽐내고 있었다. 히로는 매일 같이 이 앞에만 서면 집에서 도시를 바라보고 느낀 자신이 작다는 것과 사뭇 다르지만 비슷한 느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 느낌에 적응하지 못했다.
히로는 크게 숨을 들이쉬고는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방송국 내부는 화려한 모습의 외부처럼 화려하기도 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많은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점이 다를 뿐이었다. 그는 방송국 입구에서 오늘 프로그램을 촬영할 스튜디오를 확인하고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몸을 돌렸다. 바로 그때, 그는 지나가던 사람과 몸을 부딪쳐 뒤로 밀려버렸다. 그는 자세를 바로 잡고 자신과 부딪힌 사람을 자세히 보았다. 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목에는 방송국 아이디카드를 걸고 있었다. 그는 그가 방송국 직원인 것을 단번에 알아차리고는 그에게 괜찮냐고 물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이고

“미, 미안합니다.”

라는 짧은 사과와 함께 급히 히로를 지나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다. 히로는 그가 사라진 방향을 얼떨떨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히로 씨 여기서 뭐하세요. 어서 대기실로 가셔야죠.”

때마침 오늘 프로그램을 연출할 pd가 그를 발견하고 불렀다. 그러자 히로는 정신을 차리고 pd를 돌아보고 대답했다.

“네, 가야죠.”

히로는 그런 뒤 pd를 향해서 걸어갔다. 하지만 좀 전 자신과 부딪힌 그가 신경 쓰였는지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pd의 재촉에 못 이겨 그는 다시 고개를 돌리고는 스튜디오로 향했다.


엄청난 인파들이 도시 여기저기를 가로지르며 부딪치고 피하며 걸어 다녔다. 그리고 그들의 숫자와 맞먹을 만큼의 자동차들이 도시를 빠르게 질주했다. 도시는 그렇게 빠르게 흘러갔다. 사람들은 그것이 일상이라 정말 평화롭다고 느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시청 앞에서 그런 그들은 잠시 후 방송될 토크 쇼 ‘이슈 피플’에 대해 떠들고 있었다. 지금 히로는 도시의 아이돌 스타보다 더 높은 인기를 끌었고, 대통령보다도 더 신뢰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한마디에 이 도시의 주가가 오르락 내리락을 하기도 했다. 게다가 그의 방송은 이례적으로 도시의 대형전광판과 시청광장의 스크린으로 중계방송 되었다.
방송시간은 오후 6시였고 방송될 때까지 남은 시간은 한 시간정도였다. 사람들은 그때까지 시청 앞에서 각자의 일상들과 남의 일상들과 도시의 평화는 히로 덕분이라고 수다를 떨었다. 그렇게 그들은 평화로운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어디선가 갑자기 큰 외침이 그들의 귀를 덮쳤다.

“우린 살고 싶습니다! 당신들처럼 인간적인 환경에서 살고 싶습니다!”

사람들은 그 외침에 일제히 시선을 돌렸다. 그들의 시선이 향한 곳은 광장의 중심이었다. 그곳에는 허름한 옷을 입은 한 무리의 사람들이 한 손에는 피켓을 들고 결연한 표정으로 서있었다.
사람들은 그들의 등장에 술렁거렸다. 평화롭게 보이면서 풍요와 화려한 도시에서 보지 못한 그들의 모습에 그들은 적잖이 놀란 모습이었다.
허름한 옷의 그들이 다시 한 번 외쳤다.

“우리는 이 도시에 살고 있습니다! 당신들은 우리를 본 적이 있나요! 아마 당신들은 우리를 보지 못했을 겁니다! 왜냐하면 우린 이곳과 당신들이 사는 곳에는 살 수 없으니까요!”

그러자 다시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했고, 곧이어 누군가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들이 들이 닥쳤다. 허름한 옷을 입은 사람들은 들이 닥친 경찰들을 향해 말했다.

“우리도 이 도시의 시민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도 이곳에서 우리의 권리에 대해 요구할 수 있습니다. 그걸 막는다는 것은 경찰이 해야 할 임무에 위배되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를 내버려 두십시오. 그리고 우리는 시장님을 뵙고 싶습니다.”

그러나 경찰들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안 됩니다. 시청 앞에서의 불법시위는 저희 경찰들도 내버려 둘 수 없는 일입니다. 정식으로 시청에 시위 허가를 받으셔야 가능합니다.”

그 말에 허름한 옷을 입은 사람들 중 한 사람이 대표해 말했다.

“우리도 그래보았습니다. 하지만 알았다고 하고, 아직까지 허가가 나오지 않고 있어요. 몇 번 찾아가거나 전화로 왜 허가가 안 나냐고 물어보았지만 절차가 아직 남아있어서 조만간 될 거라고만 그랍니다.
하지만 저희들의 생활은 날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어요. 우리가 슬럼에 산다고, 그곳에 ‘피스테이큰’들이 있다고 이러는 것 같은데, 우린 그들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제발 시장님을 뵙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경찰들은 그들의 요구를 단번에 거절했다. 지금 시장은 바쁜 업무 때문에 그들을 만날 수 없다는 이유로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물러서지 않았고, 급기야 땅바닥에 주저 앉아버렸다.

“우리는 시장님을 뵙기 전까지는 이 자리에서 한 발짝도 물러설 수 없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시장님을 뵙지 않으면 안 되니까요.”

그렇게 버티고 앉은 그들에게 진 경찰들은 하는 수 없다는 듯이 돌아서 시청 건물로 향했다. 그리고 10분이 지난 후, 그들이 다시 돌아와 말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시죠. 시장님께서 만나 뵈어 주실 것인지는 모르겠지만요.”

앉아있던 그들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일어나 경찰들의 뒤를 따라 시청 건물 안으로 향했다. 사람들은 그들이 떠나자 금방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원래 각자의 일들로 돌아갔다. 그리고 잠시 뒤 있을 히로가 출연하는 토크쇼를 기다렸다.
허름한 옷차림의 한 사람들과 경찰들이 들어간 지 40분이 지나고, 방송까지도 10분도 채 남지 않은 시각이었다. 시청광장의 스크린에는 곧 방송을 할 거라는 듯이 여러 광고들이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광고들이 모두 끝나자 방송을 알리는 오프닝과 함께 사람들의 시선이 스크린으로 향했다.

“자! 한 주간 뜨거웠던 인물들, 혹은 큰 이슈를 불러일으키고 다니는 사람들을 초청하여 이야기를 들어보는 ‘이슈 피플’ 오늘은 우리 도시의 정의와 평화를 지키고 있는 영웅 ‘히로맨’을 모셔 대화를 나누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히로맨, 히로입니다.”
사회자의 소개와 함께 히로가 일어나 인사하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사회자가 곧바로 히로에게 질문 하나를 던졌다.

“첫 번째 질문입니다. 히로맨으로 활동하시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히로는 그 질문을 받고는 마치 누군가가 짜준 멘트라도 된다는 듯이 얼굴 표정하나 바꾸지 않고 말했다.

“그건 역시 꿈이었기 때문일까요? 어릴 적 본 히어로 만화와 영화들을 보면서 나도 저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소망했습니다. 하지만 알다시피 히어로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니잖아요. 성장하면서 저는 그 꿈을 포기했었죠. 그런데 어느 날 우연찮게 제게 초인의 능력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사회자분과 시청자 여러분들이 아시는 바와 같이 도시의 평화를 지켜오고 있습니다.”

그러자 사회자는 그렇군요, 라며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그렇게 몇 번의 질문과 답변이 오가는 동안 시청의 스크린으로 토크쇼를 보던 사람들은 히로의 말 한마디 한 마디에 “꺅~” 하는 등의 비명이 오갔다.
그리고 그런 바로 그때, 비명을 한 순간에 잠재운 일이 벌어졌다.
스크린으로 비취던 토크쇼가 사라지고, 뉴스데스크 화면이 뜨면서 아나운서로는 보이지 않는 남자가 나타난 것이었다. 광장에서 스크린을 보던 사람들은 토크쇼가 아닌 다른 것이 화면에 나오자 화를 내며 난리를 쳤다.
그런데 화면 속 남자는 그런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는 듯이 보이지 않을 사람들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모두 조용!—”

그 순간 시청광장의 모든 이들이 한 순간에 조용해졌다. 그러자 남자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도시의 여러분들 안녕하십니까? 언제나 화려하고 풍요로운 이 도시에서 살고 계서서 얼마나 행복하실까요. 하지만 당신들은 이 도시가 세워진 과정을 모릅니다. 당신들이 알고 있던 진실은 진실이 아닙니다.
우리는 바로 지금. 진실을 알리고 우리의 것이었던 것을 되찾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땅의 당당한 주인으로 거듭날 것입니다. 그러니 그 시작의 선물을 여러분들에게 드리도록 하죠.”

남자가 말을 끝내자, 엄청난 폭음과 함께 시청 건물이 무너져 내렸고, 사람들은 그 광경에 놀라 아비규환에 빠졌다. 여기저기서 비명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은 순식간에 시청광장에서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쳤다. 그러자 스크린의 남자가 그들을 향해 말했다.

“도망쳐도 소용없습니다. 시청 건물을 시작으로 이 도시의 상징물들 중 2개가 더 폭파될 것입니다. 우리의, 우리들의 것을 되찾기 위해 말이죠. 큭크크.”

하지만 그의 경고는 도망치는 사람들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 어디선가 다급한 목소리 하나가 들려왔다.

“아직 건물 안에 사람들이 있어요!”

그러나 다급한 그 외침은 그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았다.



방송을 촬영 중이던 스텝들과 히로, 그리고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이 현재 상황에 놀랐다. 방송을 마음대로 끊어버리고 게다가 시청 건물까지 폭파시켰고, 앞으로도 두 개의 건물을 더 파괴할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된다면 히로에게 돌아오는 달콤한 휴식시간은 한동안 찾아오지 않을 것임이 분명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은 ‘피스테이큰’의 소행임이 틀림없었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고는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스튜디오 밖으로 향했다.
그런데 스튜디오 밖을 나오자, 지금 나오고 있는 방송의 남자를 어디선가 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히로는 그 느낌에 가던 길을 멈추고 생각했다.

‘내가 저 사람을 어디서 봤더라?’

잠시간의 생각 끝에 그는 그를 어디서 보았는지 떠올려냈다. 그는 방송하기 전 1층 로비에서 부딪힌 직원이었다. 그는 얼굴이 엄청 빨개지더니 곧장 송출실로 달려갔다. 마침 그를 뒤따라 나오던 미진이 어디론가 달려가려던 히로를 발견하고 불렸다.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 얼른 현장으로 가야죠.”
“그것보다 그 녀석을 먼저 잡아야 해!”
“그녀석이라뇨?”

그의 갑작스런 외침에 미진은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히로는 놀라 묻는 미진에게 방송 전에 있었던 일과 방송에 나오는 남자에 대해 말했다. 히로의 말을 들은 미진은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가 스텝 한명과 같이 나왔다.
스텝은 미진에게 얘기를 들었는지 히로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들을 데리고 복도를 지나 계단을 내려갔다. 몇 개의 계단을 지나자 조종실이 있는 4층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들은 곧장 송출실로 들어가 말했다.

“지금 이 방송 어디서 촬영되고 있는 지 압니까?”

히로의 물음에 조종실에 있던 직원들은 모두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히로는 입술을 세게 깨물며 이를 갈았다. 그리고 반드시 찾아내 응징하겠다고 다짐했다. 미진은 그런 그를 향해 재촉하며 말했다.

“히로씨 지금 얼른 가야 해요.”

하는 수 없이 히로는 그녀의 말에 따라 조종실을 나와 계단을 내려와 지하주차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주차장에 주차된 자동차에서 출동할 때 입는 옷으로 갈아입고 지상으로 올라와 시청으로 날아갔다. 시청으로 향하는 동안 건물 사이로 부는 도시풍이 히로의 뺨을 스쳤고, 아래로는 많은 사람들이 시청에서 벌어지기 위해 난장판을 벌리고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시청에 도착했을 쯤에는 사이렌 소리의 주인공으로 보이는 경찰들과 소방관들이 도착한 후였다. 경찰들과 소방관들은 시민들을 대피시키며 사상자들을 찾고 있었다. 히로는 사상자들을 찾고 있는 경찰과 소방관들에게 다가가 물었다.

“현재 상황이 어떤가요?”

그들 중 경관 하나가 히로를 보고 물음에 답했다.

“상황은 심각합니다. 방송이 끝날 쯤에 건물이 무너졌고, 좀 전에 시위를 하던 사람들이 시장님을 만나 뵙고 싶다고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시장님을 만나기 위해 안으로 들어가 아직 나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럼 다른 피해는 뭐 없나요?”
“아, 아직 파악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무너진 건물로 향했다. 시청 건물은 건물 이었나 라고 의심을 할 정도로 무너져 있었다. 히로는 저 건물 안에서 사람들을 어떻게 구해야 할지 방법을 알지 못해 그저 무너진 건물만 바라보았다. 건물은 무너져서 사람이 들어갈 수도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사람들을 구해야 할까?
그런데 그런 그에게 질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예요! 얼른 저 안에 있는 사람을 구해야죠. 뭘 망설여요. 무너진 건물 안으로 뛰어들어야죠.”

히로는 그 말에 잠시 망설이는 듯 보였지만 천천히 무너진 건물을 향해 한 발자국 다가갔다. 건물과 가까워질수록 긴장이 되고 얼굴에서는 땀이 흘러내려 땀범벅이었다. 히로는 건물 바로 앞에서 멈춰 섰다. 그는 더 이상 나아가기를 망설였다. 이 무너진 곳에서 사람들을 찾는 것도 무리일뿐더러, 잘못하다가는 자신도 이 건물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사람들과 같은 처지가 될까 두려웠다. 그러나 들어가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뒤에서 자신을 지켜보는 많은 시선들과 카메라 때문이었다.
히로는 침을 꿀꺽 삼키고 발을 때고 무너진 건물로 들어섰다. 건물 안은 앞으로 나아가기가 힘들 정도로 무너진 벽들이 통로를 막고 있었다. 그는 팔에다 건물이 완전히 무너지지 않을 정도로만 힘을 주어 무너진 벽을 치웠다. 그러고는 좀 더 안으로 들어간 뒤, 빠져나오지 못한 사람들이 근처에 있을지 몰라 큰 소리로 불렀다.
하지만 누구도 그 소리에 답해주지 않았고 히로 자신이 낸 소리만 메아리 쳐 돌아왔다. 그는 좀 더 앞으로 가서 찾아보기로 했다. 그런데 안으로 들어가자 움직일 수 있는 폭이 좁아지더니 이내, 앞에 무너진 건물 잔해들로 인해 길이 막혀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었다. 히로는 주위를 둘러보고 다른 길을 찾았다.
주위를 둘러보자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이 뚫려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다른 길들은 다 무너진 잔해들로 가득한 데, 그것만은 잔해 하나 없이 깨끗했다. 그러나 지금 히로에게는 그런 건 아무상관이 없었다. 자신이 지금 맡은 일에 충실하고 그것으로 인해 보상 받는 것이 중요했다.
그는 뚫려있는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으로 올라가는 길은 한 길로 쭉 나 있었다. 마치 이쪽으로 오라는 듯 안내를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뚫려있는 길은 시청에 보관되어 있는 그것에게로 정확하게 향하고 있었다.
히로는 설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는 뚫린 길을 뛰어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길은 2층을 지나 3층으로 향했고, 3층에 도착하자 복도에 일직선으로 뚫린 길이 나타났다. 그리고 복도 끝에 그것이 보관되어 있는 방의 문이 뜯겨져 나간 것이 보였고, 무언가를 보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거대한 기계장치의 원기둥 캡슐 유리가 깨어져 있었다. 히로는 그것을 보고 역시나라고 중얼거리고는 천천히 복도를 지나 그 방에 다가갔다.
가까이에서 본 방은 처참할 정도였다. 여기저기 깨진 캡슐의 유리 조각이 널려있었고, 방의 가 쪽에는 부서진 방범시스템들이 즐비해 있었다. 건물이 무너지고 누군가가 이곳에 침입을 해 방범시스템을 무력화 시키고 침입한 흔적을 남긴 채 빠져나간 것이다.

“으…”

어디선가 신음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그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 캡슐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캡슐 옆에 한 사람이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에게 다가가 그를 부축하며 물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렇게 묻자 그는 히로를 바라보며 힘겹게 입을 움직였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소리가 나오지 않아 그가 무어라 말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좀 더 귀를 그의 입에 가까이 가져다 댔다. 그제야 그가 무엇을 말하는 지 들을 수 있었다. 그는 히로에게 조심하라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체 무엇을 조심하라고 하는 것인지 히로는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때 무언가 둔탁한 것이 히로의 뒤통수를 가격했고, 히로는 그 자리에 쓰러져 의식을 잃었다. 하지만 히로는 의식을 잃기 전 자신의 뒤통수를 둔탁한 것으로 가격한 자의 모습을 희미하게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충격적이게도 그 옆에 히로 자신이 부축했던 사람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으며 웃고 있었다.



뚝 뚝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히로의 귓가를 맴돌며 그의 정신이 되돌아 올 수 있도록 도왔다. 그리고 조금 지나자 그가 약간의 신음과 찌푸린 얼굴로 눈을 뜰 수 있었다. 그런데 눈을 뜨자마자 그가 본 것은 암흑뿐이었다. 그 어떤 빛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의 형상조차도 볼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팔과 다리를 움직여 보았다. 하지만 팔과 다리가 무언가에 묶여 있는지 무엇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몸을 좌우로 흔들며 묶인 몸을 자유롭게 하려 애썼다. 그러나 밧줄은 풀리지 않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결국 그는 몸을 흔들어 팔과 다리를 움직이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했다.

“흐흐흐… 정말 애쓰시는 군.”

어둠속에서 히로를 비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점점 커져갔고, 히로는 그 목소리가 들리는 쪽을 찾기 위해 눈동자를 굴렸다. 그러자 그것을 보고 있다는 듯 목소리가 말했다.

“걱정 마. 난 네 곁에 있으니까 말이야. 그래, 네가 항상 그들 곁에 있는 것처럼 말이지. 히로, 오랜 숙적이자 친구여. 내 모습이 보이진 않겠지만 내가 누군지는 목소리만 들어도 알 것 같지 않나? 오늘도 너와 만났잖아.”

목소리의 그 말에 히로는 곰곰이 생각하며 기억 속을 더듬었다. 그리고 그 목소리가 누구의 목소린지 깨달았다. 그 목소리는 자신이 끈질기게 쫓고 쫓았고 잡을 뻔했던 목소리였다. ‘피스테이큰’의 행동요원의 목소리.
히로는 그를 향해 외쳤다.

“날 어쩔 생각이야!”
“걱정 마. 널 해칠 생각은 없으니까, 다만…”
“다만?”
“다만 시간이 필요할 뿐이지. 우리가 우리의 땅을 되찾을 때까지 널 붙잡아둬야 하거든. 그리고 넌 영웅이 되는 거지. 좋잖아 영웅이라니 말이야. 참, 그 영웅은 인기를 위해 지키던 시민들과 우리의 영웅이 된다는 말도 해야 겠군.”

히로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그에게 되물었다.

“대체 그게 무슨 말이지?”
“말 그대로야. 넌 영웅이 되는 거지. 진정한 영웅이 말이지. 너도 알잖아. 지금 네 자신의 모습은 연예인일 뿐이라는 거 말야. 하지만 넌 진정한 영웅에 대해서 깨닫지 못하고 있어. 우리가 그걸 보여주고 가르쳐 줄 게 영웅이 무엇인지를.”

그러곤 삑 소리와 함께 히로의 눈앞에 화면이 하나 켜지더니, 화면에 영상이 비춰졌다. 영상에는 무너진 건물로 인해 아비규환이 된 현장과 처참한 모습으로 절규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거기에는 ‘피스테이큰’의 구성 민족들도 있었다. 히로는 그것을 보고 어둠속에 있어서 보이지 않는 그를 찾았다.

“왜 이런 짓을 하지?”

그렇게 반문하자 누군가가 밧줄을 끊으며 말했다.

“이건 계획이야. 널 영웅으로 만들고 우리의 목적을 이룰 계획. 그러니 넌 움직이기만 하면 돼. 화면에서 보이는 절규하는 자들을 구해주면 되는 거야.”

팔과 다리를 묶고 있던 밧줄이 끊어지자 히로는 곧바로 그를 잡으려 몸을 돌려 팔을 뻗었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 없었고 목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넌 반드시 영웅이 될 거야. 자, 밖으로 저 밝은 세상으로 나가 도시가 널 기다리니까.”
“하지만 난 너희를 위해 움직이는 게 아냐!”
“누구를 위하든지 간에 일단 움직이는 게 좋을 거야.”

그 말과 함께 머리 위로 빛이 비췄다. 히로는 빛이 비추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꽤 긴 시간 빛을 보지 못해서인지 밖을 재대로 볼 수는 없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내리자 자신을 묶었던 그가 보였다. 허름한 옷차림을 입은 남자가 자신의 앞에 서 있었다. 히로는 그를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다음번엔 반드시 잡아주지.
남자도 히로가 생각하는 것을 알고 있다는 듯한 눈빛으로 히로를 바라보았고, 히로는 그런 눈을 뒤로한 채 머리 위로 난 빛을 향해 뛰어들었고, 빛은 그런 히로를 밝은 세상으로 내보냈다.
밖으로 나온 그는 곧장 현장으로 날아갔다. 날아가는 동안 높은 상공에서 내려다본 도시는 히로가 알고 있던 도시가 아니었다. 화려하고 풍요롭던 도시는 이제 전쟁터로 변해 있었다. 시청을 중심으로 해서 서쪽에 위치한 박물관과 동쪽의 백화점이 무너져 있었다. 히로는 가장 가까운 백화점으로 향했다.
무너진 백화점은 영상으로 보았던 것보다 더 끔찍했다. 그는 천천히 땅으로 내려왔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세상을 가득 채우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히로는 이런 현장을 오늘 처음 보았다. ‘피스테이큰’의 테러는 이 정도로 큰 규모의 테러는 여태껏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테러는 대부분 게릴라로 소규모 테러였다. 그래서 버스가 터지던가 하지 큰 건물을 상대로 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들이 한 번도 하지 않은 일을 한 것이다. 히로는 이런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앞이 캄캄했다.
히로는 일단 생존자들부터 찾기로 하고 건물 잔해들을 치우며 생존자들을 찾았다. 그런데 그때 도시의 시청과 박물관이 있는 곳에서 빛이 올라오더니 빛의 기둥을 만들며 하늘로 향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빛은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다리로 변했다. 그러자 도시의 다른 곳에서도 빛의 기둥이 솟아올라 하늘로 향해 두 개의 기둥들과 마찬가지로 하늘과 땅을 연결했다.
히로는 잔해들을 치우다 말고 기둥들을 바라보았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그런 의문을 품고 있을 그때, 하늘에 먹구름들이 끼면서 천둥과 번개를 동반했다. 그리고 이내 하늘에서 가느다란 빗방울이 떨어졌고 강한 돌풍이 불었다. 금방이라도 뭔가가 튀어나올 듯싶었지만, 기상이 악화되었을 뿐 별다른 조짐은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도시에서 이런 일이 일어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그리고 그것은 히로도 마찬가지였다. 당연한 것이었겠지만, 히로는 이 도시에서 영웅이기는 해도 소규모 테러와 강도 같은 것과 대형 화재에서의 구조 활동이 전부였다. 이런 큰 상황을 마주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 그는 알지 못했고, 이런 일들이 일어나리라 상상하지 않았다. 그저 만화에서만 일어나는 일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래서 히로는 멍하니 서 있었다. 자신이 방금 하려던 일조차 까먹은 채로 빛의 기둥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계속 한동안 멍하니 있던 그의 귓가에 미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히로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정신을 차렸다. 그는 손목에 차고 있던 손목시계를 보았다. 손목시계에는 화상으로 미진과 연결되어 있었다. 미진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큰 일 났어요. ‘피스테이큰’이 도시에 대규모 테러를 감행했습니다.”
“나도 알아. 그래서 지금 현장에 와 있어. 지금 피해 상황은 어떻게 되지?”

침착한 목소리로 히로는 미진에게 그렇게 물었다. 그러자 미진은 잠시만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화면에서 사라졌다. 잠시 후 그녀가 다시 화면에 모습을 드러내며 말했다.

“경찰 쪽에서 들어온 상황을 보면 말로 전부 설명할 수 없을 정도지만, 다행히도 도시의 사회기반시설들은 테러 대상에서 제외된 것 같았어요.”
쿵쿵쿵!

미진에게서 설명을 듣던 중 하늘에서 큰 괴음이 들려왔다. 히로는 화면에서 시선을 때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좀 전과 달리 먹구름들이 소용돌이 모양을 만들어나갔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하늘처럼.
그리고 그런 하늘에서 거인이 하나 지상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그 거인은 나체였고 어떠한 천조가리로도 몸을 가리지 않아 있는 상태였다. 몸은 복근 등 근육들이 발달되어 있었고, 그래서 마치 신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켰다. 히로는 지상으로 내려오는 거인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대체 이 도시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지?’

그런 생각을 하자 순간 그들, ‘피스테이큰’이 여태껏 해왔던 일들의 목적이 떠올랐고, 무너진 시청건물의 2층 방과 겹쳐졌고, 이 일의 원인이 ‘그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들이 ‘그것’을 되찾아서 저 거인을 부른 뒤의 목표는 대체 무엇일까? 히로는 거인을 바라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드디어 때가 됐군. 우리들의 신이 이 땅에 강림했으니 모든 게 끝이군. 너와 이 도시와 주민들 모두가. 하지만 그러기 전에 넌 영웅이 되어야만 하지. 안 그런가? 아직 모두의 영웅이 아니지 않나. 혹시 알겠나? 우리들의 신이 널 어여쁘게 여겨 목숨이라도 살려줄지.”

딴 생각에 잠겨있던 히로에게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히로는 그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고개를 돌린 곳에 그가 있었다. 히로는 그의 이름을 악을 쓰듯 불렀다.

“빌!”

그러자 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얼른 영웅이 되라고. 이 땅에 네 이름을 남기려면 말이야. 그러니 히로. 목숨을 걸어라. 영웅이 되고 싶으면 목숨을 걸어야 돼.”

히로는 그렇게 말하는 그에게 달려들어 주먹을 휘둘러 빌이라고 불린 그를 내동댕이쳐버렸다. 그러면서 그는 빌을 향해 깡다구를 쓰며 말했다.

“어차피 넌 내게 한 주먹감도 안 되는 녀석이야. 네가 나를 영웅으로 만들겠다고? 너희가, 그 잘난 ‘피스테이큰’이 날 영웅으로 만들어주겠다고?! 천만해 난 영웅 따위 필요 없어. 난 그렇게까지 해서 영웅이 되고 싶진 않으니까.”
“그렇다면 도시의 주민들이 실망할지도 모르는데 괜찮겠어?”

빌이 내동댕이쳐진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상관없어.”

히로는 묻는 그에게 딱 잘라 말했다. 그러자 빌은 그렇게 대답하는 히로를 향해 되물었다.

“정말로 괜찮겠어? 너의 팬들이 줄어드는데도?”
“그래, 상관없어. 이 도시에서 날 좋아하는 사람들은 빼고 넘쳤으니까.”

퉁명스럽게 말하는 히로를 바라보며 빌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럼 더 이상 이곳에 네 팬들은 남지 않겠군.”

그러면서 몸을 돌려 유유히 히로에게서 벗어났다. 히로에게서 멀어져가던 빌이 히로를 향해 말했다.

“하지만 영웅이라면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하지, 잘 봐. 우리 ‘피스테이큰’은 조직 전체가 민족의 영웅이니까 말야.”

히로는 그를 붙잡으려고 했지만 왜에선지 그를 붙잡을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돌아서는 그의 뒷모습은 덧없이 초라했다. 그것만은 분명했다.
그러나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고만 있을 여유는 없었다. 화상으로 대화를 하다가 다른 데에 정신을 팔아 잊고 있던 미진이 큰 소리로 말했기 때문이었다.

“히로씨! 뭐하시는 겁니까. 얼른 도시를 지켜야 해요.”

그 소리가 귀에 들리자 히로는 거인이 내려온 방향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거인의 손에 파괴되고 있는 도시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자 빌이 한 말이 떠올랐다.

‘우리 ‘피스테이큰’은 조직 전체의 영웅이니까 말야.’

히로는 그제야 그가 자신을 묶어두고 한 말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이 모두의 영웅이 될 것이라는 그 말을. 그는 아무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중얼거렸다.

“좋아, 내가 그 영웅이 되어주겠어.”

그러고는 힘껏 날아올라 거인을 향했다.


최후의 싸움이었다. 어쩌면 이것이 끝난다면 범죄와의 싸움에서 자신은 해방이 되고 영웅으로서의 연예인이 아니라, 연예인으로서의 연예인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그 영웅이 되어주겠다고 마음먹었다. 결과가 어떻게 나오더라도 영웅이라는 직책에서는 나올 수 있으니까.
하지만 막상 거인이 점점 커지는 것을 보자, 그 마음을 다시 고쳐먹을까란 생각이 들었지만 목으로 침과 같이 삼켜버렸다. 그러자 조금은 용기가 나는 것 같았지만 여전히 두렵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거인 가까이에 도달하자 주먹을 꽉 쥐고 있는 힘껏 거인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주먹은 거인의 얼굴을 때렸고 그의 주먹을 맞은 거인은 몸을 휘청거렸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거인을 쓰러뜨릴 수는 없었다.
휘청거리던 몸을 바로 세운 거인이 자신을 때린 히로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거인은 히로를 손으로 가리키며 둔탁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고작 내 몸의 반도 되지 않는 녀석이 감히 날치겠다는 것이냐. 정말 가소롭군.”

그러면서 팔을 크게 벌려 히로를 내리찍었다. 히로는 거인의 공격을 미쳐 피하지 못하고 상공에서 지상으로 추락해 땅 깊숙이 박혔다. 하지만 다행히 그는 금방 자리에서 일어나 거인을 노려보고는 다시 거인을 향해 날아올랐다. 이번에는 거인의 한 쪽 다리를 잡아 위로 올라갔다. 그러니 거인은 중심을 잡지 못하고 뒤로 넘어져버렸다.
거인은 엄청난 괴성과 함께 히로를 손으로 잡아 내동댕이쳤다. 그러나 전처럼 그는 쉽게 당하지 않고 날아가는 속도에 저항하며 속도를 줄여 날아가는 것을 멈췄다. 그리고 그것을 본 거인이 흥미롭다는 듯이 웃었다.

“내 공격을 막아내다니 너도 제법인데 꼬마영웅. 하지만 난 너랑 놀아줄 시간이 없구나. 나의 후손들이 나를 이 세상으로 불러들인 이상 나는 그들을 위해 할 일이 많다. 그러니 빨리 덤비지 않겠나.”
“나도 바라던 바야. 나는 더 이상 영웅이고 싶진 않거든.”
“후후, 영웅이기 싫은 영웅이라 그거 재미있군. 그래, 와라!”

거인이 히로를 향해 우렁찬 목소리로 그렇게 외쳤다. 그리고 히로는 그와 동시에 거인을 향해 날아가 주먹과 발을 이용해 그를 상대했고, 서로는 서로를 떨어뜨리고 넘어뜨리며 싸움을 접전으로 이끌어 누가 누구를 이길지 알 수 없는 상황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들의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곳 맞은편과 반대편에서는 언제 모였는지, 피신한 시민들과 ‘피스테이큰’의 구성원, 구성 민족들이 서로의 영웅들의 승리를 바라며 지켜보고 있었다.
그렇게 그들의 시선을 떠안고 그들의 싸움이 계속될 무렵. 둘의 싸움은 끝을 보이기 시작했다.

“정말 괴물 같은 체력이군. 내가 많은 공격을 퍼부었는데도 널 이길 순 없다니 말이야.”

히로가 거인을 향해 가쁜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러나 거인은 숨을 헐떡거리기는커녕 아주 평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거인이 히로의 말에 답했다.

“너도 굉장했다. 인간치곤 나와 그렇게까지 싸울 상대는 없는 데 말이다. 너도 인간 사이에서는 괴물이라는 취급을 받았을 것 같군. 그러나 영웅은 아니었던 것 같군. 지금 여기서 포기하는 것으로 보아선 말이지.”
“누가 포기를 했다는 거야!”

히로가 그렇게 말하는 거인을 향해 대꾸했다. 거인은 그 말을 듣고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그런가.” 라 중얼거렸다. 그리고 서로에게 최후가 될 한 방을 날렸고, 당연히― 싸움은 끝을 맞이했다.
그리고 누군가의 승리로 도시는 빛에 휩싸여 여명을 달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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