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비는 축축히 내린다. 후두둑 떨어지는 빗소리는 천장과 벽, 창문을 두드리고 또 내 마음도 두드린다. 느려지다가도 빨라지고 빨라지다가도 느려지는 빗소리 속에서 나는 그냥 멍하니 창문을 쳐다보고 있다. 유리로 만들어진 종이 위에 신은 물방울로 가락가락 그림을 그린다. 그리다가 없어진다. 내 생각은 종잡을 세 없이 이것저것을 뛰놀다가 곧 바로 전의 형태가 무엇이었는지도 깨닫지 못하고 으스러진다. 불을 밝히는 난로와 불의 색을 닮은 담요를 덮은 채 턱에 손을 괴고 계속 창밖을 쳐다본다. 그러면 마치 이 난제가 풀릴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그러나 그러지 못할 것이다. 분명히 그러지는 못할 것이다.

나는 창가에다 놓은 의자에 앉아 있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지금 나를 고민하게 만드는 저 물건을 쳐다보았다. 나처럼 그 물건도 의자에 앉아있다. 내가 종종 의자에 앉아 낮잠이나 생각에 빠질 때 고개를 아래로 떨어뜨리는 것처럼 그 물건도 고개를 숙인 채 의자에 앉아있다. 숨소리 하나 없다. 자는지 죽어있는지조차 모른다. 생명이 없는 물건도 자거나 죽을 수 있는가? 그러나 저 생명 없는 물건은 말은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말들이 나를 괴롭게 했다. 나는 그때마다 악마의 말을 듣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악마라면? 나는 왜 저 물건을 아직도 내 방에 들여놓고 있는가?

사실 물건이라는 말은 정확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무언가 이름을 붙여주기는 겁났다. 이름을 붙이는 순간 사람이 되어 일어날 것만 같았다. 살아있는 그 무언가로 다시 태어날 것만 같은 두려움.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언제까지 피할 수는 없었다. 이름은 불리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고 물건이라는 말은 한 존재로서 불리기에는 적합한 이름이 아니었다.

나는 그걸 다시 한 번 쳐다보았다. 나처럼 의자에 앉아있었고, 적당한 무게나 압력만 가해지면 한동안 흔들리는 흔들의자에 앉아 흔들리고 있었다. 보기 싫어서 몸 전체에 덮어두었다가도 다시 젖혀버리는 붉은 양모천 아래에 삐져나온 은색 광택이 반짝였다. 누가 만들었는지, 신의 소행인지 악마의 협잡인지 사람처럼 생겼다, 그 물건은. 아니 사람처럼 생겼다는 말은 정확한 표현이 아닌지도 몰랐다. 무엇이 사람인데? 그 물건처럼 그냥 팔다리 달리고 얼굴이 있으면 사람인가? 그냥 수많은 조각품들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겉모습만 흉내 낸 저 형상만 보고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사람이 아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면서 저 물건이 사람과 유사한 모든 점을 내 머릿속에서 배제시켜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알고 있다. 말도 하고 생각도 하는 저 물건은 사물과 사람의 중간에 끼인 것이라고. 그리고 그 중간자의 애매함에 나는 지금 고민을 금치 못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어떻게 서슴지 않고 그냥 물건이라고 저걸 부를 수 있었을까? 타당한 표현이었을까? 그렇지 않으면 그냥 어떤 종류의 알 수 없는 겁먹음에 그냥 그렇게 불러대고 있는 것은 아닐 런지. 알 수 없다고는 하지만 깊이 생각해보면 이미 알고 있는 것이었다. 받아들이기 힘듦이었다. 사람 아닌 존재가 사람이 돼버리는 그 순간이 겁났다. 그래도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모르겠는 한 가지 사실이 있다. 나는 왜 이 짐을 혼자 짊어지고 있는가. 왜 아무에게도 저 존재에 대해서 말하지도 않은 채, 집에 가져와 매번 보기만 하면서 이상한 생각에 빠지고 있는가. 그리고 제발 속으로 더 이상 말하지 말라고 기도하고 빌면서도 왜 그 입에서 내뱉는 악마의 말을 기다리고 있는가?

악마, 마귀, 요괴 이런 말들은 다 부질없다. 모르는 악에 대해 무심코 찍어버린 낙인에 지나지 않는다. 무지에 의해 만들어진 것에 대해서, 아니면 무지의 대상 그 자체나 우리와 신념이 다르고 사는 게 다른 이방인들에 대해서 던지는 말들일 뿐이다. 세상엔 실제로 그런 것들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베일을 벗겨내면 모두 우리와 같다.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저 입에서 나오는 그 소리만큼은 악마의 소리라고 부르고 싶었다. 듣기 싫어하면서도 듣고 싶어 하도록 유혹하기 때문이다. 매일 일정한 시간마다 반복된다.

나는 벽에 걸린 회중시계를 보았다. 온갖 기계장치들이 바늘들과 태엽들을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있다. 그리고 나는 숫자와 바늘이 맞물리는 지점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정한 시간이라고 이름 붙여진 공간 속에서 나는 악마의 말이 저 물건의 입에서 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늘은 자정을 가리켰다. 내 앞에 앉아있는 저것은 이제 깨어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처음은 언제나 같다. 손가락을 까닥이다가 숙였던 머리를 든다. 그때마다 끼익, 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온몸이 철판이나 철 조각 따위로 만들어진 저것은 가슴에 심장이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슬픈 말들을 입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을 수는 없을 것이다.

“지금부터 5시간 후 A씨는 교통사고로 죽습니다. 지금부터 23시간 후 B씨는 심장병으로 죽습니다. 지금부터 34시간 후 C씨는 강도에게 습격당해 죽습니다. 지금부터……."

나는 그 입에서 나오는 죽음의 소리들을 듣고 있었다. 매일 자정이 되면 저 입에서는 내가 아는 사람들의 죽음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개중에는 처음 듣는 이름도 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거나 아니면 직접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난 뒤에는 누구였는지 깨닫게 된다. 예외는 없다. 모두 내가 아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저 예고는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옆집에 살았던 할머니건, 만난 지 오래된 친척이건, 티브이에서나 보는 연예인들이건 모두 아는 사람들이고 삶들이다. 그래서 더더욱 슬퍼진다. 무엇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여전히 가만히 앉아서 듣기만 하고 있었다. 말로 들려오는 죽음 속에서 나 자신의 존재도 죽어버리는 느낌을 받았다. 슬퍼할 일들이 다가오는 그 때까지 계속 울기만 하는 나는 막상 죽음이 그 순간으로 다가와도 슬픔을 다 떨쳐버리지 못하고 더 큰 슬픔 속에 사로잡힌다.

이건 사람이 만든 것일까? 아니면 정말 신이나 악마의 소행일까. 내가 어느 비오는 날 우리 집 근처 골목에 쓰러져있던 이 물건을 들고만 오지 않았어도 나는 이런 기분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아직도 왜 들고 왔는지 모르겠다. 그냥 그래야 한다는 생각만이 그 순간 나를 사로잡았었고, 집에서 대충 더러운 것을 닦아내고 내가 자주 않는 의자에 앉혀놓았을 때야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후회하기 시작했었다.

더더욱 참기 힘든 것은 저 물건의 얼굴이었다. 웃거나 울거나 하는 즐겁고 슬픈 기본적인 감정은 모두 초월한 것 같은 저 표정에서 죽음을 선고하는 말들이 나올 때마다 나는 기분이 더 묘해졌다. 불상의 표정인 것 같으면서도 인자한 미소 같은 것은 전혀 없었고,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의 죽음을 아무렇지도 않게 예견하는 목소리에 사람의 목숨이 아무렇지도 않게 치부되는 것 같다고 느꼈다. 십분 정도 말을 하던 저것은 말을 마치는 때에는 어김없이 고개를 떨군다. 나도 슬픔에 고개를 숙이고 한참동안 훌쩍인다. 내 귀속에 들려온 그 말들을 무심코 중얼거리게 된다.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이 겪을 죽음들을 혼잣말로 말하게 된다.

비는 계속 내렸고, 나는 다시 의자에 앉아 고개를 숙이며 창밖에서 들리는 빗소리를 들었다. 빗방울 하나하나가 죽어가는 사람들의 짧은 목숨 같았다. 땅이나 창이나 지붕에 닿아 사그라지는 순간마다 사람들의 생도 이생을 떠나간다.

울다가 일어나 거울을 볼 때면 노쇠한 나의 얼굴이 더욱 늙어 보이고 슬퍼 보인다. 그리고 더 나를 늙고 슬프게 만드는 것은 내 표정이 점차 저 물건의 표정을 닮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만간 저 악마의 입에서 나의 죽음을 예고하는 말도 나올 것 같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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