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그 날도 비가 많이 오는 날이었다.

누구는 하늘에 빵구가 났다고도 말했다. 그 말에 그녀는 잠깐 피식 웃긴 했었으나 아닌 게 아니라 요즘은 정말 비가 많이 내렸다. 구멍 뚫린 하늘에서는 끊임없이 물들이 떨어져 내렸고, 눈앞에 보이는 것이라곤 온통 검은 화면에 흰빛으로 아래로 내려 긋는 직선 혹은 사선들뿐이었다.

이러다간 어둠속에서 질식해버리겠어.

그녀는 약간 겁에 질려있었다. 등줄기가 떨리도록 추웠고, 물기가 많아 잡은 우산 손잡이가 미끄러워 몇 번이나 놓칠 뻔했다. 도로 옆에서는 노란 두 눈을 번쩍이는 괴물들이 양복쟁이 배불뚝이들을 태운 채 빵빵 소리를 내면서 지나갔고, 그럴 때마다 그녀는 귀와 눈이 멀어버릴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솨악, 솨악 하는 소리는 괴물 같은 차들의 고무바퀴가 아스팔트 위에 고인 웅덩이를 내려칠 때마다 앞에서, 옆에서 들려왔다. 물들이 튀기도 했지만 이미 젖을 대로 젖은 그녀의 옷에는 별반 차이가 없었다.

익숙지 않은 하이힐이 걸을 때마다 그녀의 발목을 죄었다. 얼굴을 갑갑히 가둬두었던 화장은 반쯤 지워진 후였다. 립스틱 바른 입술의 한쪽은 이미 번졌고, 그마저도 그녀가 신경질 내며 내뱉는 욕지거리에 일그러지기 십상이었다.

살들이 떨리면서 오싹하니 추웠고, 또 그런 추위를 피부가 느끼지 못할 정도로 무뎌질 만큼 추웠다.

귀는 빗소리, 찻소리, 그리고 작게나마 들리는 그녀의 하이힐 또각또각 소리에 잠식된 지 오래였다.

퇴근길에 갑자기 또 그 놈의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었다. 뜬금없이 내리는 비는 한 번 내렸다하면 온 도시를 모두 물에 적셔버리곤 했다. 딱히 대책은 없었다. 그녀는 그냥 물에 잘 젖지 않는 재질의 짧고 얇은 외투와 긴 검은색 장우산을 들고 다닐 뿐이었다. 화장이 지워질 걸 대비해 특별히 화장품 세트를 핸드백 속에 든든히 준비하고 다니기도 했다. 집으로 가는 버스였고, 밤 열 시를 막 지나 집까지 몇 정거장 채 남지 않았을 때 하늘의 자크가 열린 것이었다. 이어서 준비하고 있던 물줄기는 지상으로 내려 꽂혔고.

그녀는 오늘밤의 비가 평소보다 배는 더 심한 것처럼 느꼈다. 아마 이 비 때문에 그녀가 이상한 길로 들어섰던 것이리라. 정신없이 창밖의 비를 내다보다가 버스에서 내렸는데 하필이면 한 정거장 앞이었다.

끽해야 얼마나 걸리겠어, 그냥 걷고 말지, 어차피 버스 기다리는 시간까지 치면 비슷하지 않겠어?
이런 그녀의 안일한 생각은 곧 후회로 바뀌었긴 했다. 날이 밝았고, 날씨가 이 모양, 이 꼴이 아니었다면 그녀의 처음 생각이 맞았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날씨는 그녀의 엄마가 오늘 출근할 때 말해주었던 것처럼 개판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녀도 털이 흠뻑 젖은 개처럼 모르는 골목길을 가로질러갈 수밖에 없었다. 이런 날씨에는 개들도 돌아다니지 않았다.

장마철 폭우에 사람들이 많이 실종된다는 뉴스를 쳐다보던 엄마가 말했었다.

얘, 밤길 조심해라. 요새 사람들이 많이 실종된단다. 밤에 다닐 땐 꼭 사람 많고 밝은 곳으로 다니고.

엄마도 참!

그렇지만 괜히 다른 사람들이 보일라치면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걱정이 멈추질 않았다. 골목길에서 마주치거나 뒤따라오거나 앞서가는 사람은, 만나보기도 극히 힘들었고, 그 사람 역시 이런 날씨에 고생하고 있는 게 뻔했지만 거기에 덩달아 그녀가 일방적으로 내린 혐의마저 벗어던지기 힘들었다. 드문드문 남자 체격이 보일 때마다 그녀는 호신용 스프레이나 가스 건이라도 들고 다닐 걸이라고 생각했다.

잠깐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확인하자 집에서 온 부재중 전화가 걸려있었다. 그녀는 다시 주머니에 전화기를 집어넣었다.

여기가 저기 같았고, 이미 왔던 곳인 것 같았다. 시야가 좁아 멀리보이지도 않아 더 그런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골목을 틀었다. 다행이었다. 뭐가 다행이냐면 곧 그녀의 앞쪽에서 노랫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던 것이 다행이었다. 한물간 락 음악이었다. 이게 왜 다행이냐면 밴드 보컬의 악쓰는 그 소리는 지금 열어있는 가게에서 들리는 소리였고, 이 말은 곧 추위와 비, 어둠을 피할 장소가 그녀 앞에 드러났다는 소리였다.

바였다. 이런 골목길에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가게 이름을 적어둔 네온등 하나는 나가버려 있었다. 붉은 기가 감도는 불빛이 안에서 새어나와 그녀는 멀리서부터 온기를 느낄 수 있는 것 같았다. 일단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물줄기 쏟아지는 소리가 안 들리다시피 잦아들었다. 가게는 지하 일층이었다. 접은 우산과 핸드백을 양손에 들고 내려가다가 계단에서 삐끗할 뻔했다. 이게다 돌계단을 적셔버린 저놈의 빗물 때문인 것 같았고, 제법 높은 굽의 하이힐도 불만의 대상이 되었다. 계단에 들어서자마자 노랫소리에 빗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엄마, 엄마. 나야. 응, 괜찮아. 아니. 아, 비 좀 그치면 들어갈게. 에이, 설마. 금방 그치겠지. 곧 들어갈 거야, 걱정 말고 먼저 자.

음악 때문에 좀 큰 소리로 전화를 할 수밖에 없었다. 전화를 끊고 그녀는 가게 안을 들여다보았다. 어둔 색으로 코팅이 된 유리창이라 그런지, 아니면 오늘 같은 날씨의 밤이라 그런지 안의 모습은 약간 오싹해보였다. 또 자신을 뚫어져라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했다.

다행히 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런 기운은 싹 가셨다. 조명은 밝은 편은 아니었지만 아늑한 느낌을 내기엔 충분했다. 밖이 거센 폭우라면 이곳은 엄마의 자궁 속 같았다. 틀어놓은 음악이 너무 큰 편이라 거슬리기는 했다.

자리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의자는 푹신했지만 옷이 젖어 찝찝했다. 자신처럼 비를 피해 들어온 것처럼 보이는 커플이 하나 보일 뿐 다른 손님들은 없었다. 그 둘은 새빨간 무언가를 마시고 있었다. 인상이 어두워 보이는 바텐더는 큼지막한 은색 시계를 차고 있었다.

시끄럽다고 생각했던 노래들을 어느새 따라서 흥얼거리며, 그녀는 주문한 간단한 칵테일을 홀짝였다. 논 알코올, 달콤한 체리 맛. 언제고 다시 와서 맛보고 싶은 그런 멋진 칵테일이었다. 바텐더는 싱긋 웃었다. 처음에 느꼈던 기분 나빴던 인상은 곧 사라졌다.

약간 피 맛이 느껴지긴 했다. 그녀는 입안이 터졌는지 혀를 돌려봤다. 그리고 그것이 정신을 잃기 전 그녀가 한 마지막 행동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마지막으로 한 '인간적인' 행동이기도 했다.







******






그녀는 아직도 그 날의 기억을 생생하게 떠올린다. 무서웠던 비오는 밤과 아늑했던 바, 그리고 피의 향이 느껴졌던 체리 맛 칵테일.

하지만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어두운 밤이 두렵지 않다. 그리고 그녀는 비가 내리 쏟는 오늘밤도 그 바에 간다. 그녀를 반겨주는 사람이 있고, 그녀가 반길 사람도 있다. 또 새로 맛 볼 칵테일들.

넌 참 천재야.

가게에 들어설 때마다 그녀는 바텐더에게 그런 인사를 했다.

바텐더는 그녀를 보며 늘 웃었다.

손님을 잠들게 해 피를 마시는 건 뱀파이어이면서 비폭력주의자인 자들에게 딱 맞는 우아한 방법이었다. 피를 섞어 만든 칵테일이란 적응하기 전에는 참 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나쁘지 않았다. 아니, 그 맛에 계속 그 바를 찾는지 몰랐다. 길 잃은 사람들을 이끄는 비의 도움을 받아 마실 수 있는 그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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