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드래곤이 쏘아올린 작은 공

<1>

사람들이 '아마투스투라' 라는 이름에 보이는 반응은 대게 한가지로 압축된다. 듣는이의 간담이 서늘해질 정도의 처절한 절규. 보통 사람들이 드래곤에게 보이는 반응치고는 조금 오버한 감이 없지는 않으나 그리 특이한 점은 없다 싶을터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아마투스투라의 이름에 보내는 절규는 다른 드래곤에게 보내는 그것과는 조금 거리가 있다.

아마투스투라가 처음 제니라 숲에 정착했을 때 딱히 놀라거나 심히 두려워한 이는 없었다. 이는 제니라 숲의 별칭과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제니라 숲은 아마투스투라가 정착하기 몇 해 전 흰 가루 병이 크게 돌아 나무들이 모두 하얗게 시들어 버려 '겨울 숲'이란 별칭을 얻었기에 그곳은 주거지로써 그리 매력 있는 땅은 아니었다. 원래 워낙 외진 곳에 있어 사람들의 발길이 잘 닿지 않던 곳 이였는데 그런 병까지 돌아 숲이 황폐화 되었으니 사람은커녕 토끼 한 마리 찾아 볼 수 없는 곳이 되었던 터라 아무 가치 없는 그런 곳에 무엇이 살든지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왜 말라비틀어진 나무뿐인 숲에 정착 했는지는 궁금해 하던 호기심 많고 쓸데없는 것을 잘 따지고 드는 무리도 더러 있었으나 왜 그곳에 정착했는지 확인할 방법도 없었는 데다가 사실, 그렇게 중요한 일도 아니 였 기에-그네들에겐 왕자의 애인이 몇 명인가가 더 중요했다.- 일명 '겨울 숲'에 정착한 드래곤, 아마투스투라의 이름은 서서히 잊혀 지는가 싶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아마투스투라가 왕실 학술 협회에 보낸 장문의 편지를 통해 사람들은 왜 그녀가 그 볼품없는 땅에 정착하였는가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었다. 하루종일 학술 협회의 양지에 앉아 해바라기나 하고있던 세간에선 학자라 불리우는 노인네들은 날개달린 산양이 가져온 편지를 읽으며 새삼 전율했다. 드래곤이 인간에게 편지를 보낸 것도 놀랄 일이였으나 일렬로 죽 늘어 놓으면 무려 성인 남성 넷의 키와 맞먹는 그 장대한 편지의 내용이 장관이었던 것이다.  

후에 드래곤이 인간에게 보낸 그 편지를 보고 싶어한 국왕이 정독에 도전 했으나 채 세장을 넘기지 못하고 넉다운 되었다는 일화는 비밀리에 왕궁 궁녀들 사이에서 전해져 내려온다. 내용은 기존의 인간 본성에 대한 이론을 철저히 반박한 것으로, 학자들은 꽤 신선하고 충격적인 이론에 전율했으나 일반 사람들은 한가지 사실 밖에 깨닫지 못했다. 저 드래곤은 미쳤다. 그것이 아니면 어째서 병든 숲에 정착하며 인간에게 인간 본성에 대한 장문의 편지를 보낼 수 있단 말인가.

그 일이 있고 나서도 아마투스투라는 보통 사람이라면 도저히 이해 못할 장문의 편지를 보내오곤 하였으며 그 장르도 무척이나 다양하여 모든 전공의 학자들을 들뜨게 만들어 주었다. 편지들은 책으로 엮어 출판 되었으며 책장 좀 깔짝댄 사람이라면 꼭 읽어야 할 필독서가 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겨울 숲이 현룡' 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녀가 사는 제니라 숲은 미친 드래곤이 거주하니 접근하면 매우 위험하다는 말도 비슷한 시기 세간에 퍼지기 시작했으나 그녀는 제니라 숲에서 틀어박혀 나오질 않으니 알 턱이 없었다.

<2>

아마투스투라는 제니라 숲의 하얀 나무숲을 거니는 것을 좋아했다. 누군가 덜 그려놓은 그림에 그녀 혼자만이 채색까지 되어 완성 된 듯 한 느낌. 그녀는 그런 분위기가 너무 좋았다.  때론 너무 삭막한 것이 아닌가 싶을 때도 있지만 이 느낌을 잊을 수가 없는 것이다.
" 다녀오셨습니까."
그녀가 둥지로 돌아오자 그녀의 시종 고트윙이 말했다. 이곳에 정착할 때 쯤 그녀의 둥지를 관리하기 위해 그녀가 만든 키메라다. 기다란 염소 머리에 어울리지 않은 왜소한 인간의 몸, 그리고 커다란 날개는 어깻죽지 밑에 곱게 접혀있다.
" 다녀왔어."
그녀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기 위해 고개를 조금 숙이며 대답했다. 입구가 너무 좁단 말이야. 넓혀야겠어.
그녀가 방에 들어서자 천장의 거대한 샹들리에에 불이 들어왔다. 방이 환해졌다. 고트윙이 그녀를 따라 방에 들어왔다.
" 식사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 뭐지?"
" 오늘은 염소가 준비 되어있습니다."
그로테스크한데. 염소 머리를 한 그녀의 시종은 별 표정이 없어 보인다. 그녀는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아 그리고."
" 뭐지?"
" 편지가 와있습니다."
" 편지라니?"
여태까지 그녀가 편지를 보낸 적은 많으나 받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인간은 물론이고 드래곤끼리도 교류가 없는 그녀다. 그녀의 물음에 고트윙은 안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냈다. 그녀가 읽기엔 너무 작았기에 고트윙이 소리 내어 읽었다.
"  에 우 토 피 아 市

주택: 001,1― 197. 11. 10
수신: 에우토피아시 122번지의 0001 아마투스투라 귀하
제목: 재개발 사업 구역 및 불법 시설물 철거 지시

귀하 소유 아래 표시 건물은 주택 개량 촉진에 관한 임시 조치법에 따라 헤븐 1구역 재개발 지구로 지정되어 에우토피아시 재개발 사업 시행 조례 제17조, 건축법 제5조 및 동법 제22조의 규정에 의하여 제국력 197. 11. 17 까지 자진 철거할 것을 명합니다. 만일 위의 기일까지 자진 철거하지 않을 경우에는 행정 대집행법의 정하는 바에 의하여 강제 철거하고 그 비용은 귀하로부터 징수하겠습니다.

철거 대상 건물 표시
에우토피아시 122번지의 0001
구조 건평 평



에 우 토 피 아 市長 "

<3>

고트윙은 읽기를 마치고 종이를 반으로 접었다.
" 한 번 더 읽어 주겠나?"
주인의 정중한 요청에 고트윙은 다시 종이를 펼쳤다. 아마투스투라는 고트윙의 말을 더 잘 듣기위해 고개를 숙였다.
" ─에 우 토 피 아 市長."
" ……."
아마투스투라는 무언가 말을 하려는 듯 입을 달싹였으나 이내 다시 닫았다. 고트윙은 다시 종이를 접고 그녀의 반응을 기다렸다. 그녀는 눈을 한 번 깜빡이더니 고트윙에게 말했다.  
" 놓고 가."
" 네."
고트윙은 종이를 그녀 앞에 놓아두고 방을 나왔다. 식사 준비를 위해 식료품 창고로 가던 도중, 불현듯 머리를 망치로 때리는 듯 한 느낌을 받았다. 그의 주인은 소위 철거 계고장이란 것을 받은 것이다. 염소 머리라 그런 건지 키메라는 다 이런 건지 그는 주인의 명령이외의 것에는 이해력이 부족했다. 곤란한 걸. 그는 중얼거렸다. 철거 계고장 때문에 곤란한 것인지 아니면 이해력이 부족해 곤란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고트윙이 마취시킨 염소 두 마리를 짊어지고 방으로 돌아왔을 때 그의 주인은 종이에 코를 처박고 있었다.
" 식사 가져왔습니다."
" 놔두고 가."
" 네."
뭔가 방금 전에도 비슷한 상황이 있었지 않았나 생각 하며 고트윙은 짊어진 염소를 내려놓았다.
" 아니, 잠시 기다려."
아마투스투라가 갑자기 고개를 번쩍 쳐들며 말했다. 고트윙은 나가려던 자세 그대로 멈춰 섰다. 아마투스투라는 고트윙을 세워놓고 생각에 잠겼다. 염소가 슬슬 마취가 풀리는지 꿈틀댔다. 고트윙이 다시 마취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아마투스투라가 입을 열었다.
" 내가 이 숲에 정착한지 몇 년이나 지났지?"
" 이번 12월이면 정확히 240년 입니다. 그리고 드시지 않으실 것이라면 다시 마취를 해놓을까요?"
고트윙의 말에 아마투스투라는 그제야 자신의 눈앞에 놓여 꿈틀대는 염소를 볼 수 있었다. 살짝 허기가 느껴지는 듯싶기도 했다. 아마투스투라는 염소를 코끝으로 툭툭 건드려 보았다. 더 심하게 꿈틀거린다.
"그럴 필요 없어. 두고 가."
" 네."
아마투스투라의 말에 고트윙은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고 그녀의 방을 나왔다. 고트윙은 그녀의 식사가 끝나기 전에 식사를 먼저 끝내고 그녀의 시중을 들 준비를 해야 한다. 고트윙은 빠른 발걸음으로, 그러나 뛰지는 않은 채 식품 창고로 향했다. 염소들을 사오면서 같이 들여온 고구마가 있을 터였다. 아무리 키메라라고는 해도 식사 시간은 즐거운 법이다.

<4>

고트윙이 나가자 아마투스투라는 염소의 목을 물어뜯었다. 염소를 머리부터 차근차근 씹어 먹으며 최근 읽고 있는 -정확히 말하면 듣고 있는- 한 문화 학자의 책에 대해 생각했다. 참 웃기는 주장이라고 생각하며 염소의 뒷다리를 뜯어 삼켰다.

두 번째 염소의 척추를 훑고 있을 때 고트윙이 그녀의 방으로 조용히 들어왔다. 벌써 식사를 마쳤나 보다. 고트윙을 처음 만들 때 그의 뇌에 [일류 집사의 길]인가 뭐 시긴가 하는 책의 내용을 억지로 박아 넣었었는데 부작용도 없이 잘 작동하는 걸 보면 그녀도 꽤 마법에 재능이 있는 것이 틀림없다. 귀찮아서 거의 사용하지는 않지만.

그녀가 식사를 끝내자 고트윙은 뒤처리를 했다. 배부르니 졸린데. 고트윙이 입을 닦도록 내버려 두며 아마투스투라는 생각했다.
"이제 가서쉬도록,”
“예.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불러 주십시오.”
고트윙이 정리를 끝내자 아마투스투라는 말했다. 고트윙은 그녀의 말에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갔다. 고트윙이 나가고 나서 아마투스투라는 샹들리에의 불을 껐다. 방이 순식간에 어두워진다. 오늘은 피곤한 일이 많았어. 아마투스투라는 생각했다. 그리고 서서히 잠이 들었다.

<5>

고트윙이 둥지 입구를 빗자루로 쓸고 있을 때였다. 멀리서부터 웅성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트윙은 비질을 멈췄다. 하얀 나무들 사이로 사람 무리가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고트윙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고트윙의 인사에 사람들은 멈춰 섰다. 그러더니 주춤주춤 한 사람이 앞으로 걸어 나온다.
“좋은 아침입니다. 당신이 아마투스투라 입니까?”
고트윙은 그 남자가 농담을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보통 여기선 웃어야 하는 것일 터인데. 고트윙은 나름대로 입 꼬리를 힘겹게 말아 올려 웃어 보였다.
“풉.”
남자 뒤의 무리에서 킥킥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상한가. 고트윙은 미소를 얼굴에서 지웠다. 남자는 뒤를 한번 노려보곤 다시 고트윙에게 물었다.
“보아하니 아마투스투라는 아닌 듯싶군요. 아마투스투라는 어디 있습니까?”
“무슨 일이 신지요?”
고트윙은 아마투스투라의 이름을 존대하지 않는 남자의 무례를 애써 무시하며 물었다.
“시에서 나왔습니다. 안에 있으면 나와 달라고 해주시지요.”
고트윙은 남자의 복장을 체크했다.  남자는 가벼운 여행복 차림에 긴 장검을 허리께에 차고 있었다. 자신을 훑어보고 있다는 것을 느낀 남자는 말했다.
“아, 이곳이 너무 외진 곳인지라 복장이 이렇습니다. 자 여기 신분증도 있습니다.”
남자는 주머니에서 신분증을 꺼내보였다. 고트윙은 남자가 건넨 신분증은 받아 보지도 않고 말했다.
“시에서 이곳엔 어인 용무신지요?”
“그건 주인장과 이야기하고 싶습니다만.”
남자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쳐들어 보였다. 고트윙은 뒤의 무리를 바라보았다. 그들도 모두 여행자복에 무장을 하고 있었다.
“……잠시 기다리시지요.”
고트윙은 그들을 뒤로 한 채 둥지 안으로 들어왔다. 일단 잡인 같긴 했으나 당당히 신분증도 내밀었으니 일단은 주인에게 알려야겠다 싶었다. 그녀의 방으로 들어가자 아마투스투라는 글을 쓰고 있었다.
“주인님.”
고트윙이 부르자 아마투스투라는 고개를 들었다. 종이 위를 정신없이 움직이던 깃펜도 공중에 멈추었다.
“뭐지?”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손님?”
“예. 시에서 찾아 왔다고 하던데요.”
“쫒아버려. 그런 건 알아서 좀 해.”
아마투스투라는 낮게 그르렁 거리며 대답했다. 고트윙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돌아가시랍니다.”
고트윙은 그 남자에게 말했다. 남자는 코를 긁적이더니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오늘 꼭 만나야 한단 말입니다. 나오지 않겠다면 들어가겠습니다. 안내하시죠.”
남자는 뒤의 무리에게 손짓을 하고 무작정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고트윙은 그들의 앞을 가로 막았다.
“돌아가시지요. 저택엔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저택? 누군가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확실히 아마투스투라의 둥지는 저택이라기 보단 돌산에 가까웠으나 고트윙은 점점 도를 더해가는 그들의 무례에 그들이 정말 공무원인지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오늘 만나야 한단 말입니다. 나오시지 않겠다면 강제로 집행 하겠습니다.”
남자는 막아서는 고트윙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키메라이기는 했으나 인간 남자의 체구 보다 작은 고트윙은 남자를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뭐가 이리 소란스러워?!”
둥지 안에서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남자는 깜짝 놀라 뒤로 주춤 물러났고 무리들 중 몇 명은 땅에 엎어지는 이도 있었다.
“고트윙, 내가 글을 쓰고 있을 땐 방해하지 말라고 했지 않았나? 한 240년 전쯤에!”
고함 소리와 함께 지면이 쿵쿵 울리며 아마투스투라의 모습이 둥지 입구에 나타났다. 오후의 햇볕을 받아 그녀의 붉은 몸이 눈부시게 빛났다. 그녀의 등장에 사람들은 입을 적 벌렸다. 고트윙은 내심 으쓱한 기분이 들었다.
“죄송합니다. 이들이 워낙 막무가내인 탓에.”
고트윙은 깊이 고개를 숙였다. 곁눈질로 남자를 보니 그는 아마투스투라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굳게 다문 입이 살짝 열린다.
“조금 작군.”
낮게 중얼거린다. 딴엔 조용히 말하려고 한 듯하였으나 남자의 정확하고도 엄청난 결례의 말은 그 자리의 모두에게 또렷이 들렸다. 아마투스투라는 반응 없이 눈을 내리 깔고 그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말에 심기가 불편해진 건 고트윙 혼자만이 아닌 듯싶었다. 당황한 남자의 동료들은 남자를 향해 격렬한 손짓을 하며 그를 말리려 애쓰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무시한 채 남자는 입을 열었다.
“반갑소, 아마투스투라씨? 아마 그런 것 같군요. 전 에우토피아 시 토목건축부서의 쿠닌 리미아 라고 합니다. 여기 시에서 보낸 집행문서 입니다. 보시죠.”
쿠닌은 품에서 종이를 꺼내 들었다. 아마투스투라는 목을 빳빳이 세운 자세 그대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여전히 아무 반응도 하지 않자 쿠닌은 조금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혹시 우리말 못하십니까?”
이건 좀 아니지 않는가. 고트윙은 쿠닌의 무례를 꾸짖고 싶었으나 엄연히 주인이 직접 면대를 하고 있는지라 끼어들지도 못하고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다.”
아마투스투라가 입을 열었다. 살짝 낮게 깔린 목소리다. 뜨거운 공기가 그들 주위를 감도는 듯하다. 고트윙과 쿠닌의 동료들은 뜨끔하였으나 쿠닌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했다.
“안 읽어 보셔도 괜찮겠습니까? 그럼 집행 하겠습니다. 저희도 바쁘거든요.”
쿠닌은 종이를 고트윙에게 건넸다. 고트윙은 엉겁결에 종이를 받아들었다. 쿠닌은 돌아서서 동료들에게 걸어갔다. 고트윙은 쿠닌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쿠닌과 그의 동료들은 저들끼리 무어라 속닥이고 있었다.
“1시간쯤 다시 오겠습니다. 짐은 다 비워두시는게 좋을 겁니다.”
이야기가 끝났는지 쿠닌이 고개를 고트윙 쪽으로 돌리고 말했다. 고트윙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그들은 가버렸다.

<6>

“건방진 게 마음에 드는데? 다음에도 저 따위로 행동하면 죽여주겠어.”
아마투스투라는 왠지 모순된듯하다고 느꼈으나 꽤 마음에 드는 말이 이었으므로 내심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아마투스투라는 천천히 몸을 돌려 둥지로 들어가려 했다. 아, 뭔가 이상한데.
"저 시건방진 꼬맹이가 한 말이 무슨 뜻이지, 고트윙?"
아마투스투라는 사뿐히 내딛던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뒤따라오던 고트윙에게 말했다. 고트윙은 갑작스런 질문에도 놀란 기색이 없었다. 이런 질문이 날아올 것을 예상이라도 했던 것일까.
"아마 일주일 전쯤에 날아온 편지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합니다만."
"편지라니?"
일주일전에 그런 게 왔었나. 편지 같은 걸 내가 기억 못할 리가 없는데. 아마투스투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편지요. 에우토피아 시에서 보내온 계고장 입니다."
왠지 기억이 날듯 말듯 가물거린다.
"계고장 이라니?"
"둥지를 철거 한다는 내용 이였습니다."
아마투스투라는 입을 닫았다.
"생각났어. 그때 식사는 염소였지. 조금 질겼어."
"아, 그러십니까? 그럼 다음부터는 다른 곳과 거래를 하도록 하겠……."
"그만."
아마투스투라는 고트윙의 말을 끊었다. 그녀는 다시 고개를 천천히 들어올렸다. 둥지의 회색빛 벽을 타고 지네 한 마리가 기어 올라가고 있었다. 그녀는 다시 둥지로 걸어갔다. 고트윙은 그녀의 뒤를 조심스레 따라가며 말했다.
"편지를 읽어 보시겠습니까?"
아마투스투라는 말없이 걸었다. 고트윙은 종종 걸으며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가져와."
어둑한 둥지의 입구로 그녀의 붉은 몸이 사라져 가며 대답이 들려왔다. 고트윙도 말없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아마투스투라는 자신의 방 중앙에 잔뜩 쌓여있는 책과 종이 무더기를 앞발로 훑어 공간을 만들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공간에 자리를 잡고 앉자 고트윙이 조심스레 방 안으로 들어온다. 아마투스투라가 고개를 까딱이자 고트윙은 안주머니에서 조심스레 접힌 종이를 꺼냈다.
"읽어봐."
고트윙은 그녀가 시키는 대로 편지 내용을 처음부터 끝까지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고트윙의 목소리가 울리며 천장의 샹들리에가 미묘하게 흔들리는 것 같았다. 아마투스투라는 고트윙이 다 읽고 난 뒤에도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은 채 고개를 들고 샹들리에만 바라보고 있었다.
고트윙이 편지를 반으로 곱게 접은 뒤 그녀에게 물었다.
"이제 어떻하실런지요? 떠날 준비를 할까요?"
고트윙의 물음에 아마투스투라의 멍하던 눈에 빛이 나는 듯하다. 그녀는 고개를 낮추어 고트윙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고트윙은 순간 뒤로 주춤 물러났다. 아마투스투라의 목구멍 깊숙한 곳에서 부터 그르렁 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소리는 천장으로 울려 버져 샹들리에를 흔들었다. 샹들리에의 불이 깜빡깜빡 거리며 위태롭게 흔들리며 붉고 노란 잔상을 남긴다.
"내가‥!"
뜨거운 입김과 함께 아마투스투라의 노성이 울려 퍼졌다. 고트윙은 한 발짝 더 물러섰다.
고트윙이 뒤로 물러서는 모습을 보고 아무투스투라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곤 숨을 깊게 들이 내쉬었다.
"‥인간에게 둥지를 '헐린' 첫 번째 드래곤이 되란 말인가? 어이가 없군."
아까보단 진정된 목소리이나 여전이 노기가 어려 있다. 고트윙은 조심스레 물었다.
"‥인간들을 전부 죽이실 생각이십니까?"
그런 말을 하는 고트윙의 표정은 의외로 침착했다. 약간의 기대가 서려있는 듯도 했다. 그래도 전엔 인간 이였는데. 아마투스투라는 생각했다.
"그러지는 않아. 나는 교양 없는 다른 <거대 도마뱀>들과는 다르니까."
"그럼 어쩌시겠습니까?"
아마투스투라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다시 입을 여는 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준비해."
그녀의 짧은 한마디에 고트윙은 그저 고개를 까닥일 뿐이었다. 고트윙은 조심스레 밖으로 나섰다. 고트윙이 나가고 아마투스투라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미약한 불빛 만으로만 밝혀진 방엔 그저 적막만이 흐르고 있었다. 방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는 천천히 그리고 미약하게 좌우로 흔들리며 옅게 깜빡이고 있었다.


<7>

쿠닌이 인부와 장비를 챙겨 아마투스투라의 둥지로 돌아왔을 땐 정확히 그가 약속한 한 시간 뒤였다. 쿠닌은 둥지 입구에 서서 둥지의 드넓은 입구를 황망히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순순히 따를 것 같아요?"
그의 뒤에 서있던 인부로 보이는 남자가 말했다. 쿠닌은 주의 깊게 입구 안쪽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모르지."
"‥반항이라도 하면 좀 곤란할 것 같은데."
곡괭이를 짊어진 다른 남자가 말했다. 나름 완곡하게 표현하려 한 기색이 역력하다. 모두들 쿠닌의 말만을 기다린다.
"일단 들어가 보죠. 이미 나가고 없을 수도 있잖습니까. 우리가 드래곤을 죽이러 온 것도 아니고 움츠러들 이유는 없죠."
"죽이는 게 아니라 둥지를 헐러왔지. 제길."
담배에 불을 붙이던 남자가 대답했다. 그의 대답에 다른 이가 힘없이 맞장구를 친다.
"그럼 우린 드래곤 네스트 헌터입니까?"
"레어 헌터겠지."
그들의 시시한 콩트에 쿠닌은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오늘 안에 일을 시작할 수는 있는 거요?"
다른 하나가 물었다. 쿠닌은 그의 말에 얼굴에서 미소를 지우고 말했다.
"어서 들어가기나 합니다. 해 지기 전에는 절반은 끝내놓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의 말에 하나 둘 무겁게 발걸음을 옮긴다. 쿠닌도 그들과 섞여 둥지 안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계십니까?"
쿠닌의 말이 울려 퍼진다. 여기가 과연 드래곤의 둥지가 맞는지 아니면 자연 동굴인지 헤 깔렸다. 어둑어둑한 커다란 복도-중앙 홀일 수도 있다.-는 앞으로 쭉 뻗어 있었다. 인간의 건물처럼 장식물이나 전등 따위가 있는 것이 아닌지라 왠지 두려움이 생겨나는 듯하다.
"함정이라도 있는 거 아니야? 아니면 괴물 같은 거?"
앞장서서 걸어가던 사람이 조심스레 말했다. 아무도 대답은 하지 않고 다만 발걸음의 속도가 느려졌을 뿐이다. 덜컹거리는 수레의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얼마간을 걷자 일행은 아무런 장식 없는 커다란 방에 도착했다. 삭막한 방에는 어울리지 않게 거대하고 화려한 샹들리에가 옅게, 아주 옅게 빛나고 있었다.
"흡!"
무심코 방 안에 들어서려던 한 사람이 숨을 크게 들이쉰다. 샹들리에에 시선을 빼앗겨 있던 쿠닌은 모두의 시선이 아래로 향하고 있음을 깨닫고 샹들리에의 아래를 바라보았다.
매끈한 붉은 몸을 자랑 하는 듯 레드 드래곤 한 마리가 조용히 엎드려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뭐하십니까, 아마투스투라씨?"
쿠닌이 물었다. 순수한 호기심에서 나온 질문이라기 보단,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은 자에게 당신 여기서 뭐하는 거요 라 묻는 듯 했다.
아마투스투라는 그의 말에 조용히 대답했다.
"다음에도 네놈이 그 따위로 말한다면 그땐 죽여 버리겠다고 생각한지 아직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
낮고 음험한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문득 불빛이 깜빡인 듯도 싶었다.
"그러십니까."
쿠닌은 무표정을 유지한 체 대답했다. 그의 옆에 서있던 인부는 살짝 그와 거리를 유지했다. 목숨은 소중한 거니깐.
"슬슬 시작해도 좋겠습니까? 그렇다면 나가주셔야 겠는데요."
쿠닌이 말했다. 쿠닌을 제외한 일행은 아마투스투라의 표정을 살피며 살짝 뒤로 물러섰다.
"기다려봐. 고트윙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어."
고트윙이라면 아까의 그 괴물 말인가, 특이한 작명 센스로군. 쿠닌은 그렇게 생각했다.
"저흰 마냥 기다릴 수도 없습니다만."
그의 말이 나오고, 그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인부인 워그스는 마냥 기다릴 수 있다고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드래곤에게 외칠 용기는 없어 잠자코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그저 쿠닌과 아마투스투라의 얼굴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쿠닌은 여전히 무표정 했고 아마투스투라의 표정은 방이 너무 어두워 보이지 않았다.  
아마투스투라는 대답 없이 정적을 유지했다.

<8>

고트윙이 방으로 천천히 걸어들어 왔을 때, 그는 그제서야 손님들이 와있다는 것을 깨닫고 극심한 좌절감을 느껴야 했다. 집사로써 손님 대접 하나 제대로 못하다니. 그가 좌절감을 느끼든 말든, 예의 '손님들'은 방 입구 부근에 쪼그려 앉아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그리고 그의 주인은 저번의 그 공무원과 눈씨름을 하고 있었다.
인부들로 보이는 자들 중 몇몇은 짐수레에서 무엇인가를 꺼내어 서로 나눠먹고 있었다. 고트윙이 헛기침을 해보이자 그들의 시선이 고트윙에게로 꽂혔다. 그제서야 고트윙이 들어온 것을 안 쿠닌이 눈인사를 보낸다.  
"방이 어둡군요."
샹들리에를 올려다보며 쿠닌이 말했다. 고트윙이 무어라 대답하기 전에 쿠닌은 아마투스투라를 보며 말했다.
"이제 일을 시작 해도 좋겠습니까. 더 시간을 끌 수는 없을 것 같군요."
무례하긴. 고트윙이 눈쌀을 찌푸렸다. 그러든 말든 쿠닌은 팔짱을 끼며 아마투스투라를 올려다 보았다. 아마투스투라는 그를 무시하며 고트윙에게 말했다.
"어떻게 되었나?"
고트윙은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무시당한채 황당해 하는 쿠닌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말해야 좋을까.
"일단 사는 곳은 알아냈습니다만."
"다만?"
"‥‥거처에 없었습니다."
아마투스투라는 그르렁거리는 소리를 냈다. 방 전체가 순간 환해졌다 다시 어두워 진듯했다. 고트윙은 눈을 깜빡였다.
"멀리 갔는가."
"그건 아닌듯 싶었습니다."
아마투스투라는 고트윙의 말을 듣고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가자."
"‥정말 가실 생각 이십니까."
"안내나 해."
아마투스투라가 다시 그르렁 거리는 소리를 냈다. 쿠닌과 그 일행들은 멀뚱히 눈만 깜빡이며 서있다.
"저기?"
보다못한 쿠닌이 끼어들었다.
"뭐지?"
"드디어 가십니까? 그럼 일을 시작하겠습니다?"
"완전히는 아니야."
아마투스투라는 방을 한번 천천히 훑어 보았다. "그러니 아직 부수지마."
“예?"
쿠닌이 어이가 없다는 듯 되물었다.
"부순다면...니놈의 씨가 뿌려진 모든 것들을 죽여 버리겠다."
쿠닌은 그녀의 말에 귀까지 새빨게졌다. 이 드래곤이 미쳤나, 아 미친 드래곤 이였지 참.
아마투스투라는 고트윙을 앞장세우고 밖으로 나섰다. 일행은 그들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 보고만 있었다.
그녀의 꼬리까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을때 였다.

"어쩔거요?"
육포 조각을 씹으며 워그스가 물었다. 쿠닌은 아직도 입구를 노려보고 있었다.
"일단 먹고 합시다."
그제 들어온 신참이 쿠닌에게 다가와 빵조각을 내밀었다. 워그스와 쿠닌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신참은 주춤거리며 말했다.
"왜요? 먹으면 안 됩니까? 다들 먹고 있잖아요."
그가 얼빵하게 말하자 쿠닌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래. 먹고 하지."  쿠닌은 신참이 내민 빵조각을 받아들며 대답했다. 신참은 머쓱해하며 자리로 돌아갔다. 워그스는 쿠닌에게 기묘한 웃음을 보냈고 쿠닌은 그 얄궃은 웃음을 무시 해버렸다.

<9>

인간이 도시라는 것을 형성한 이후 그들의 도시는 그 풍성한 식탁과 다름없는 특성
덕분으로 먹이를 노리는 배고픈 드래곤들의 습격을 밥 먹듯이 받아야만 했다. 하지만 한명의 영웅이 모든 것의 위에 군림한 뒤로 인간의 도시는 더 이상 드래곤의 습격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한 형편이 되었었다.
천적이 없어진 도시는 마치 포만감을 모르는 돼지처럼 모든 것을 꾸역꾸역 밀어 삼켰고, 삼킨 만큼 꾸역꾸역 커져갔다.
그러다 이제는 저 하늘을 휘젓는 강대한 드래곤조차 도시의 불빛을 피해 다닐 만큼 도시는 강성해 졌다. 모든 인간은 도시로 향하고 모든 길들은 도시로 통한다.
그런 도시를 지키는 경비대장을 맡고 있는 자로서 깁슨은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랬기에 난대 없는 드래곤의 출현에도 당황하지 않고 침착히 부하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빨리 위치로! 야, 경보 소리가 작은 것 같은데 확인 해봐! 이봐 누가 3번 망루에 기름 좀 전달해줘! 야 이 새꺄, 여기에 돌은 왜 가져다 놓은 거야?”
솔직히 살짝 불안하기는 했다. 요즘 같은 세상에 드래곤이 인간 도시로 날아오다니. 깁슨은 부하들에게 호령하며 초조한 기색으로 서쪽 하늘을 살폈다.
해는 어느새 지평선 아래로 서서히 잠기어 가고 있었다. 붉게 물든 하늘에 무엇인가 빨간 것이 아른 거린다. 슬슬 보이는 군. 깁슨은 호흡을 가다듬고 눈에 힘을 줬다. 준비가 너무 부족했다. 너무 나태해져 있었어, 우린.
긴급 소집된 청년들은 각자의 무기를 꼬나 들고 자리를 찾아 어수선히 움직이고 있었다.
몸을 획 돌리고 나아가려는데 가느다란 선의 청년이 서쪽 하늘을 입을 떡 벌리고 바라보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겁나나, 필로?”
깁슨은 나름 위엄 있게 목소리를 내려 깔며 말했다. 깁슨이 말하든 말든 필로는 멍하니 해 지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깁슨이 한번 헛기침을 할 때서야 그제서 깁슨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는 듯 아는 체를 해 보였다.
“아, 대장님.”
“뭘 껄끄럽게 대장님이야. 우리끼리 있을 땐 아저씨라고 불러라.”
깁슨은 필로의 어깨를 큼지막한 손바닥으로 툭툭 내려치며 커다란 웃음을 지어보였다. 필로는 다리가 꺽이지 않도록 최대한 힘을 주며 어색한 웃음으로 답했다.
깁슨은 내리치던 손으로 그대로 필로의 어깨를 감싸 쥐며 그를 자신 쪽으로 끌어 당겼다. 그리곤 필로의 귀에 대고 누가 들을 까봐 그런 다는 듯 작게 속삭였다.
“오늘은 일찍 귀가해. 집안에 할아버지 혼자 둘 순 없잖나. 몸도 편찮으신데 자네가 돌봐 드려야지.”
깁슨의 난대 없는 배려에 필로는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것이 싫지는 않은 듯 주위를 흘깃 거리며 덩달아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저 혼자만..그래도 될까요?”
부모를 일찍 여의고 조부모 손에 의해 자란 필로는 철이 들 무렵부터 효성이 지극 하기로 소문이 자자했었다. 깁슨은 자신의 아들도 이렇게 커 주었으면 하고 내심 빌면서 필로를 도닥거렸다.
“너는 내가 심부름 보냈다고 하지. 모두들 이해 해줄 거야.”
살짝 주저하던 필로는 그래도 집에 혼자 두고 온 할아버지의 걱정이 더 앞서는 지 깁슨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필로는 깁슨에게 작게 감사를 표한 뒤 조용히 뒤로 빠져나갔다. 깁슨 그런 필로의 뒷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태양은 자신의 마지막을 화려한 불꽃을 들에 화려하게 수놓음으로써 자축하는 듯 했다. 오늘의 태양은 여기서 끝이다. 오늘 밤만 무사히 넘길 수 있다면, 우린 내일의 태양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붉은 점이 슬슬 커지기 시작한다. 깁슨은 그것을 노려보며 저무는 태양과 도시의 빛 중 어느 것이 더 밝을지 생각했다.  

<10>
긴급 상황을 알리는 종소리가 거리에 울려 퍼지며 착 가라앉은 저녁의 공기를 때렸다. 병사들의 급한 발소리만이 잔잔히 들려 올 뿐, 도시는 대체로 차분했다. 필로 만이 조용히 그리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필로는 최대한 동료를 만나지 않도록 애쓰며 빠져나오느라 성벽 위의 이상한 분위기를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조금만 신경썼더라면 성벽 위의 어수선한 분위기를 눈치 챌 수 있었을 텐데. 난데없이 나타난 드래곤이, 또 난데없이 사라진 것이다.
말 그대로 ‘사라졌다.’
깁슨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손에 잡힐 듯 가까워졌던 그 거대한 형상이 갑자기 사라질리 없지 않는가. 하지만 자신만 그런 것이 아닌듯, 주위의 병사들도 하나같이 얼이 빠진 얼굴이었다. 방금 전까지 활을 메기던 병사들은 멍하게 활을 손에 든 채 아마투스투라가 사라진 하늘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마법이다!”
누군가 툭 내뱉듯 외친 소리에 깁슨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마법? 어떡하지? 깁슨은 이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저 거대한 도마뱀이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니, 무엇에라도 씌었던 것일까. 병사들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반응이었다.
당연하게도, 도시엔 마법사가 없었다. 나이가 적지 않은 깁슨도 평생을 살아오면서 진짜 ‘마법사’-옛 이야기에나 나올법한 그런 마법을 쓰는-를 본 적이 없다. 드래곤이 마법을 쓸 수 있다는 사실도 그 때문에 잊었던 것일까.
갑작스런 사태에 병사들뿐 아니라 깁슨 조차 공황 상태에 빠져 버렸다. 어수선한 웅성임만이 성벽 위를 맴돌았다.
  
고트윙이 내민 긴 코트를 걸친 아마투스투라는 헝클어진 머리를 뒤로 넘겼다. 검붉은 빛깔의 머리카락들이 노을빛에 출렁이며 아지랑이처럼 흔들렸다. 아마투스투라는 조금 부자연스럽게 손을 놀려 코트를 여몄다. 아직 몸이 익숙하지 않은 듯 했다.
“굳이 인간의 모습으로 가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고트윙이 작게 물었다. 아마투스투라는 발목을 풀며 가볍게 대답했다.
“인간들은 빨리 늙고, 늙은 만큼 약해지지. 젊었을 때도 벌벌 떨던 녀석이 이젠 늙었을 터이니 그때의 모습으로 만난다면 죽을지도 모르잖는가?”
꽤 재밌는 농담을 한 것 인양 아마투스투라는 가볍게 피식하고 웃었다.
“어디지?”
고트윙은 그녀의 질문에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이고 앞서서 걷기 시작했다. 아마투스투라도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닌듯 그런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다만 걸음걸이가 상당히 불편해 보였기에 고트윙은 평소의 걷던 속도보다 한참을 늦춰서 그녀의 보조를 맞추었다.
거리는 한산했다. 가벼운 종소리만 경쾌히 울려 퍼졌고 멀리 보이는 성벽에는 횃불을 든 무리들이 일렁거리며 보일 뿐이었다.
“인간들은 경쾌해서 좋구먼.”
아마투스투라가 말했다. 이젠 걸음이 조금 익숙한 모양새였다. 도보를 따라 걸으며 건물이나 간판 따위를 구경하며 때론 서쪽 하늘을 바라 보기도 했다. 서쪽 하늘엔 저녁 별이 총총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아마투스투라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숨을 크게 들이쉬는데 고트윙이 멈춰섰다.
“여깁니다.”
그가 멈춰선 곳은 허름한 흙집의 앞이었다. 자그마한 창에선 희미한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마투스투라는 별 기대도 하지 않았다는 듯 좀먹은 나무문을 벌컥 열어 젖혔다.
“잠겨있지도 않군. 인간은 자신의 둥지의 방범에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은 아니지만 입구에 문을 달아 놓고 빗장을 거는 것이 기본이라던데.”
“애초에 빗장이나 자물쇠 같은 것이 있지도 않아 보입니다만.”
고트윙은 아마투스투라의 뒤를 따라 들어가며 끼익 거리는 문을 힐끔 쳐다보았다.  고트윙은 집안을 훑어보았다.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란 표현이 정말 잘 어울리는 집이구만.  아마투스투라가 멈춰선 채 가만히 서있자 의아해진 그는 그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벽난로가의 나무 의자에 앉아 졸고 있는 노인에게 향해 있었다. 난로불은 미약하여 곧 꺼질 듯 보였다. 아마투스투라는 천천히 노인에게 다가갔다.
발소리에 깬 것일까. 노인은 고개를 살짝 치켜들었다.
“누구시오?”
타닥. 장작이 타들어가는 소리에 노인의 미약한 목소리가 묻힐 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들 정도로 힘이 없는 목소리였다.
아마투스투라는 엎드려 편안한 자세를 취하려다 자신이 인간의 몸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곤 고트윙에게 자신이 앉을 의자를 가지고 오라고 시켰다.
고트윙이 가져온 의자에 앉으며 그녀는 노인의 질문에 대답했다.
“나다.”
그런 짧막한 자기소개를 듣자면 대개의 경우 당황하기 마련이나 노인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침착한 것인지, 아니면 잠든 것인지. 그런 노인을 아마투스투라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정말로 잠들었나 싶은 걱정이 살짝 고개를 들 때 즈음, 노인은 고개를 순간, 번쩍 하고 들었다.
“당신이군요.”
놀랍게도, 노인의 목소리는 묘하게 힘이 실려 있었다. 방금 전의 목소리는 연기였고, 지금의 목소리가 진짜인 양. 하지만 여전히 노인의 모습은 다 타버린 장작 같다.
아마투스투라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다 타버려 저물어가는 태양 같은 미소였다.

<11>

집으로 돌아온 필로가 아연 질색한 이유는 단지 그의 할아버지를 돌봐주기로 한 이웃이 자리를 비웠다던가 하는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부엌에선 염소 머리를 한 괴생물체가 차를 끓이고 있었고 벽난로가의 할아버지의 곁엔 웬 빨갛고 검은 뭉치가 꼼지락 대고 있었다. 필로가 집 안으로 들어서자 기척을 느꼈는지 별안간 뭉치에서 사람 얼굴이 튀어나왔다.
다소 왜소한 체구에 어울리지 않은 커다란 털 코트를 껴입은 중년의 여성이 붉은 머리를 바닥까지 늘어뜨린 채 불을 쐬고 있었다.
“누구지?”
그녀가 입을 열었다. 장작을 지폈음에도 약간 추웠던 집 안이 살짝 따뜻하게 느껴지게 하는, 그런 목소리였다.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잠시 고민 하였는데, 그때 그의 할아버지가 입을 웅얼거렸다. 그녀는 잠시 할아버지의 웅얼거림을 듣는 듯하더니 “그렇군.”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차를 끌이던 염소머리의 괴생명체가 차를 쟁반에 담아 내왔다. 필로에게도 한 잔 권하자 필로는 엉겁결에 받아들었다. 무슨 말이든지 해야 할 터인데 그것이 무슨 말인지 생각이 안나, 그냥 “고맙습니다.”라고 중얼거렸다.
“아무튼”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차를 받지 않았다.
“나는 내가 그곳을 좋아하는 것만은 확실해.”
할아버지를 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묘하게 힘 있는 목소리다. 필로의 할아버지는 그런 그녀의 말에 고개를 까닥까닥 하며 들었다. 필로는 새하얀 김이 몽실몽실 올라오는 따뜻한 찻잔을 두 손으로 쥔 채 서있었다. 그가 오기 전부터 할아버지와 대화를 하고 있었나 보다. 할아버지는 옛날, 여행을 자주 다니셨다 하니 그 때의 친구일 런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니 납득이 되기 시작한다. 옛 친구이신가 보구나. 여태 찾아왔던 할아버지의 특이한 옛 친구 분들 중 한 명이시겠지.
...저런 것을 달고 오신 분은 한 분도 없었지만. 필로는 염소 머리를 한 괴생명체를 힐긋거리며 생각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의 할아버지가 고개를 살짝 든다.
“그렇지 않아요. 당신은 그저 병든 나무를 보며 우월해 있을 뿐이에요.”
여전히 작았지만, 또박또박 정확히 들려 왔다. 그녀는 할아버지의 말을 듣곤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지금 내가 병든 나무들 사이에서 우월감을 느낀다고 말하는 건가?”
얼핏 할아버지는 킥킥대며 웃었던 것 같았다. 기침일지도 몰랐지만.
그녀는 헛기침을 한 번하고 말했다.
“인정하지. 조금이야. 색이었어. 단지 색깔 때문 이야. 흰색은 아무것도 없는 색 이잖아. 누구라도 가진 것 없는 자를 보면 우월해 지지 않아?”
“당신의 색이 짙었다는 것은 지금 이 나이가 되어서도 또렷이 기억나는군요.”
할아버지는 말했다. 말을 할 때마다 점점 발음이 또렷해져갔다.
“세월이 이렇게나 흘러도 도저히 당신의 색이 옅어질 것 같다고 생각되진 않습니다. 당신의 색이 옅어질 순 없어도 이곳의 흰색에 짙은 색이 칠해 질 순 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상대적으로 당신의 색이 옅게 보이겠지요.”
할아버지는 말을 잠시 멈추었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그녀는 못마땅한 눈치다.
“짜증나는 군. 그래도 나는 둥지를 헐리는 일 따윈 당하고 싶지 않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들을 다 죽이기는 싫어.”
“당신은 특별하니까요.”
필로는 어리둥절했다. 찻잔을 올려 한 모금 마시려다 자신이 차를 다 마셨다는 것을 알았다. 염소 머리를 한 괴생명체가 그에게 살짝 다가와 잔에 차를 따라 주었다. 딱히 할 말이 없어 다시 “고맙습니다.”하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러자 그 염소 머리가 “고트윙 입니다.”라고 말한다. 이름인가.
그의 할아버지가 몸을 일으켰다. 필로는 할아버지가 몸을 꼿꼿이 세우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놀라 하마터면 찻잔을 떨어뜨릴 뻔 했다.
할아버지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붉은 머리의 여자는 할아버지를 시큰둥하게 바라  보고 만 있었다.  
“이런 계절에도, 이런 시간에도 매 일, 매 시간 하얗게만 덧칠해지는 곳이 있죠.”
필로는 놀라 부들부들 떨고 있는데 그녀는 ‘아아 거기?’라는 표정만 지어 보인다.
“붉은 빛깔이 가장 어울리는 곳은 이제 검어진 이곳이 아닐런지도 모릅니다. 아직 색이 없는 동네에 색을 입혀 주시겠습니까?”
할아버지가 말했다. 그녀도 몸을 천천히 일으킨다.
“내가 당신에게 색을 입혔던 것처럼?”
“우리에게 색을 입혔던 것처럼.”
“당신은 예나 지금이나 당당하군. 좋아. 이제 슬슬 질려가던 차였는데 눈이나 보러가지.”
그러며 그녀는 살짝 흘러내린 코트를 여몄다. 그녀는 거침없이 집 밖으로 걸어 나갔다. 앞에 서있던 필로에겐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고트윙도 녀의 뒤를 쫓아 밖으로 나갔다. 그도 아무 인사도 없었다. 할아버지는 그런 그들의 모습을 말 없이 지켜보곤 다시 자리에 풀썩 앉았다. 축 늘어진 솜같이 다시 불을 쬐며 조는 노인으로 변하기 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필로는 얼결에 그들의 뒤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거리는 조용했다. 고트윙이 길 복판에 서있었다. 필로는 작별 인사를 하고 다음에도 들르시라고 말하려 했는데 말이 목에서 턱하고 막혔다.

그리 높지 않은 하늘에 붉은 드래곤이 떠 있었다. 입을 떡 벌리고 그 자리에서 굳어 있으려니 드래곤이 날개 짓을 크게 한다. 바람이 휘감아 일며 먼지가 날린다. 드래곤은 높이 날아 올랐다. 어디선가 고함 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고함 소리가 나는 쪽을 보기 위해 고개를 내렸을 때 고트윙이 날아오르는 게 보였다. 일련의 무리들이 횃불을 들고 달려오고 있었다.
특이한 친구 분들 이구나. 라고 생각했다.

<12>

-마음대로 해도 좋다-
갑자기 벽에 나타난 커다란 글자를 보며 쿠닌은 피식 웃었다. 신참이 무슨 일이냐고 다가왔다. 쿠닌은 아무 일도 아니라고 얼버무리고 글자가 나타난 벽면을 가리켰다.
“저기도 부셔.”
신참은 곡괭이를 들고 힘차게 나아가려다 글자를 보고 멈칫한다. 그리고 쿠닌을 바라보고 자신도 피식 웃었다.

<13>

아마투스투라는 스마그라 산의 하얀 얼음 계곡을 거니는 것을 좋아했다. 누군가 덜 그려놓은 그림에 그녀 혼자만이 채색까지 되어 완성 된 듯한 느낌. 그녀는 그런 분위기가 너무 좋았다.  때론 너무 삭막한 것이 아닌가 싶을 때도 있지만 이런 느낌을 잊을 수가 없는 것이다.
" 다녀오셨습니까."
그녀가 얼음으로 만든 둥지로 돌아오자 그녀의 시종 고트윙이 말했다. 아마투스투라는 둥지로 들어오며 입구가 조금 작아진 것 같다고 느꼈다. 왜 자꾸 입구가 작아지는 거지. 귀찮은걸. 그녀는 사뿐히 걸음을 내딛으며 자신의 방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방 입구에서 고개도 돌리지 않고 고트윙에게 물었다.
“오늘 식사는 뭐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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