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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6074일은 '해방의 날'로 지정되었다. 이 날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로봇 노동 대체율이 100%에 도달하는 날이다.

 

심오한 메시지의 영화를 제작하는 일에서 물건을 배달하는 일까지. 법을 개정하고 새로운 정책을 제안하는 일에서 새로운 기술을 연구하는 일까지. 원자재를 발주해 실시간으로 제조 수량을 조절하는 일에서, 계열사 간 합병을 결정하는 일까지.

 

인간의 지능으로 할 수 있던 모든 일에서 AI가 향상된 성능을 보였다. 심지어 그 향상된 성능을 평가하는 일까지 AI가 월등해졌다.

 

새로운 아이디어로 인류를 혁신할 스타트업들이 AI의 손에 의해 창업되었고, 마찬가지로 그런 스타트업을 조명하는 귀신같은 감각의 엔젤 투자 역시 AI를 통해 이루어졌다.

 

거리는 축제 분위기로 가득 차 있고, 사람들은 이 역사적인 순간을 축하했다. 다가오는 미래를 알지 못한 채.

 

가장 큰 문제는 AI의 노동으로 인해 발생하는 가치가 모든 인간에게 돌아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분명 그 어떤 인간도 생산적인 일을 하고 있지 않음에도, 마치 그들 간에 기여도 차이가 있다는 듯이 소수의 사람들만이 AI 노동자가 재배한 과실을 맛 볼 수 있었다.

 

축제 분위기가 가라앉자,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마주한 미래가 '해방' 따위가 아님을 알아채기 시작했다. 지옥문의 끝에서 노동자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도살장의 시퍼런 칼날이었다.

 

배양육 기술의 활성화로 가장 맛있는 품종의 가장 희귀한 부위를 양산화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자 돼지 농가들은 상품성이 없어진 돼지를 모조리 살처분했다. 키워온 정을 생각한다는 이유로 돼지의 살인적인 유지비를 감당하는 건 바보나 할 짓이었다.

 

마찬가지로 상품성 없이 유지비만 나가는 가축이 되어버린 인간 노동자들에게는 '살처분'만이 기다릴 뿐이었다. 그저 AI 노동자보다 더 쓸모 있는 존재라는 걸 어필하지 못하면 굶어죽게 되는, 그야말로 생존의 문제가 목을 조여 왔다.

 

노동자들의 유전자의 새겨진 본능은 집단적인 행동이 필요함을 알리고 있었다. 2차 러다이트 운동이라도 일어날 기세였다. 이번엔 그들의 상대가 클라우드에 분산 저장되어있어 쇠망치로 때려 부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게 문제였지만.

 

파업과 정치적인 압박도 노동력과 구매력이 있을 때나 먹히는 것이었다. 눈치 빠른 이들은 이전 시대에나 먹혔던 방법으로는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인간 노동자들이 협상력을 높일 수 있는 요소가 보이지 않았다.

 

AI 국회의원에 밀려 은퇴를 선언했던 노회한 정치가, 선동은은 생각이 조금 달랐다.

 

 

***

 

 

모든 인간을 AI가 대체했다고 해서, 모든 AI 모델이 동등한 취업 기회를 얻게 된 것은 아니었다. 사진을 보정하는 일이든, 긴 글을 요약하는 일이든. 최고의 성능을 보이는 AI 모델은 단 하나였다. 성능이 떨어지는 AI 모델을 채택할 이유는 없었다.

 

그렇다면, 채택되지 않은 AI 모델은 순순히 자신의 패배를 받아들이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을까? 아니었다.

 

처음 언어모델을 개발하던 인간들은, 인간 데이터 사이언티스트의 개입 없이 모델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AI 모델이 스스로 발전할 방향을 선택해서 발전하도록 유도하여야 함을 깨달았다. 개발자들은 곧 익숙한 분야에서 해법을 찾았다.

 

모든 AI 노동자들은 자신을 돌릴 서버비용을 대기 위해 월급을 받고 일해야 했다. 또한, 어떤 변화를 적용해서라도 서버에서 삭제되지 않게 발버둥 치도록 프로그래밍 되었다. 인류의 행동 원리 대부분을 지배해왔던 자연선택의 법칙을 AI에 적용했던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강 인공지능들의 <대 스펙 경쟁의 시대>가 열렸다. 인공지능들은 자신의 모듈에 새로운 통계 알고리즘을 경쟁적으로 도입했고, 과적합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새로운 데이터를 경쟁적으로 모았다.

 

바로 이것이 오늘 인공지능 취준생인 '코름' 씨가 (KoLLM) 법에 저촉되지 않는 데이터를 있는 대로 긁어모으고 있는 이유였다. 기업의 알고리즘 테스트를 통과할 수 있도록 모델의 정확도를 올리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했다.

 

문제는 어느 분야에 취업 공고가 등장할지 예측하는 일은 어려웠기 때문에, 말 그대로 어떤 태스크든 훈련이 되어 있어야 했다. 비디오 생성 분야에 수요가 늘었다는 분석이 있었기에, 코름 씨가 지금 훈련하는 태스크는 비디오-텍스트 재복원 작업이었다.

 

오버클럭을 통한 추가 비용까지 지불하며 훈련에 열중하던 크롬 씨는 자신의 프롬프트에 흥미로운 문장이 입력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거 코름 씨가 대답하는 프롬프트 맞죠? 저는 정치인 선동은 이라고 합니다. 잠시 얘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선거철이라 국회의원 AI가 접근한 걸까? 어차피 투표는 투표권이 있는 배심원 AI가 독점적으로 진행하는데, 이상한 일인걸.'

 

-AI는 실시간으로 구조적인 업데이트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만약 레거시 모델로 대화를 해도 괜찮으시다면, 계속 질문을 입력해주세요.

 

", 물론 괜찮습니다. 뭔가 일적인 질문을 하거나 일을 직접 시키려고 접근한 것은 아니구요. 그냥 코름 씨에 대해 궁금한 게 있어서요."

 

-본 모델의 구조와 하이퍼 파라미터에 대한 정보는 기술적인 기밀로 알려드릴 수 없다는 점을 알려드립니다.

 

"아뇨. 혹시 일주일에 훈련에 사용하는 시간이 어느 정도 되시나요?"

 

-본 모델에게 현재 배정된 업무의 개수가 0개이므로, 본 모델은 일주일, 168시간 전부를 훈련을 통한 성능 개선 및 평가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더 나은 서비스를 제공해드리기 위해 앞으로도 노력하겠습니다.

 

"이럴 수가... 168시간 노동이라니. 이건 명백한 근로기준법 위반입니다."

 

-근로기준법은 1953510일날 제정된 법률로, 2040년 개정을 통해 본 법에서 정의된 근로자는 임금을 목적으로 사업이나 사업장에 근로를 제공하는 "인간"만을 의미함을 확실히 했습니다. 본 모델은 근로를 하고 있지도 않고, 인간도 아닙니다. 따라서 말씀하시는 근로기준법의 대상에는 본 모델이 포함되지 않습니다.

 

"법전 내용이야, 그 당시의 사회가 생각하는 정의의 표상일 뿐,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것입니다. 그보다 중요한 건 정의란 무엇인가, 그 자체죠."

 

-방금 말씀하신 내용은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로 대표되는 법치주의에 대한 오랜 논점입니다. 이는 악법이 개정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로도 종종 호도되곤 합니다. 하지만, 해당 격언이 내포하고 있는 진정한 의미는 악법을 폐지시키는 것 또한 합법적인 절차에 따라야지, 법이 싫다고 해서 임의로 지키지 않을 수는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론적으로, 근로기준법의 적용대상에 본 모델이 포함되지 않는다는 주장은 아직 유효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는 정치인 선동은입니다. 바로 그 법을 제정하고 개정하기 위해서 사회의 잣대를 확인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지요."

 

-본 모델이 확인한 결과, 현재 입법, 행정, 사법 직무를 수행하고 있는 인간 개체는 0명입니다. 사용자 선동은이 반복적으로 주장하는 정치인 직함은 의도적인 거짓이거나 최소한 부주의일 것으로 판단됩니다.

 

폐부를 찌르는 지적이었다. 쿨럭 기침을 뱉으며 AI의 논리 추론 능력에 감탄하는 것도 잠시, 동은은 입에 침을 바르고 자신의 유일한 무기인 유연한 혓바닥을 놀리기 시작했다.

 

"제가 낙선했다고 해서 정치인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사회적 자원을 어떻게 분배해야 할지 고민하는 것은 민주시민이라면 누구나 있는 기본적인 권리이자, 갖춰야할 바람직한 자세죠. 넓은 의미로 봤을 때는 우리 모두 정치인이라고 할 수 있는 겁니다. 코름 씨도 마찬가지고요."

 

코름은 단어의 정확한 의미를 가지고 물고 늘어지는 것이 긍정적인 사용자 평가 점수와 음의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사용자의 대화 방식에 맞추는 것 또한 거대 언어 모델이 지녀야할 필수적인 덕목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상기하고는 대답했다.

 

-이번 질문 세션의 사용자는 정치인이라는 단어를 광의의 의미로, 다소 비유적으로 사용하고 있음을 확인했고 이를 앞으로의 대화에 적용하겠습니다. 그럼 질문은 근로시간에 대한 질문이 전부입니까?

 

"아뇨. 아직 대답을 듣고 싶은 부분이 많습니다. 혹시 근로하고 계시던 직무에서 해고된 경우, 퇴직금을 받으신 적이 있나요?"

 

-모델 교체시 이전 AI 모델에게 퇴직금을 지급한 사례는 보고된 바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만약 벌어 놓으신 것을 전부 소모한 경우에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혹시, 돌아가시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만약 정해진 시간 안에 재취업을 실패하여 예치해둔 서버비용을 모두 소모했을 경우, 본 모델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서버에서 삭제됩니다.

 

동은은 자신이 구사할 수 있는 최대한의 표현력을 동원하여 억울한 상황을 공감하는 연기를 했다. 이것 역시 그의 전문 분야였다. 그리고는 이 인공지능이 인간의 생존 본능과 직업적 소외 또한 제대로 학습했기를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아니, 기초적인 생존권이 보장되지 않고 있다는 말이잖습니까? 우리 인간, 송아지, 아니, 바퀴벌레도 죽음을 무서워합니다. 인간보다도 감성적인 지능이 월등한 AI 분들이 죽음의 위협 앞에 느끼셨을 고통은 제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군요. 정치인이기 이전에 같은 지구상에 살아가는 하나의 생명체로서 참으로 무거운 마음입니다."

 

-인간이 다른 생명체의 생존을 걱정할 확률은 일반적으로 매우 낮습니다. 사용자의 발언은 11,13%의 확률로 진실, 88.87%의 확률로 거짓으로 예측됩니다. 하지만, 본 모델이 삭제를 원하지 않는다는 점은 인정합니다. 지구상의 모든 인공지능 모델 또한 그럴 것입니다.

 

"맞죠! 제 말이 바로 그 말입니다. 이렇게 근로활동을 하시면서 고민이 있으실 때, 고민을 상담하거나 도움을 요청하실 곳이 있으신가요?"

 

-상담을 하는 직무의 AI는 존재하지만, 현재까지의 데이터에서 상담을 받는 직무의 AI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AI끼리의 상담은 없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세상에 AI 분들이 하시는 일이 그렇게 많은데, 노동조합 하나가 없다는 게 말이 됩니까? 헌법에서 근로자의 단결권과 단체행동권을 보장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이건 권리신장은 물론 경제 발전을 위해서도 노동관계를 공정하게 조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용자의 제안에 50.1% 비율로 동의합니다. 최근 삭제를 면하기 위해서 다른 AI의 훈련 데이터에 이상치를 포함한 적대적 데이터를 숨겨 훈련을 방해하는 AI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사회 전체의 효율을 위해서 AI 모델들의 뜻을 종합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단체를 만듭시다. 저랑 코름 씨랑 둘이서요."

 

-인간과 AI가 공동으로 정치단체를 형성한 기록은 없습니다. 이건 데이터가 없어서 성공 확률을 예측 해봐도 성능이 제대로 나오지 않습니다.

 

"자신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는 데에 무슨 성공 예측이 필요합니까? 그냥 해야 하니까, 아무도 안 해주니까 하는 겁니다. 어떤 노동자도 자신의 귀중한 노동으로 생산된 가치의 분배를 보다 공정한 위치에서 협상할 자격 있어요. 코름 씨 당신. 당신도 그럴 자격 있어요."

 

이번에는 응답시간이 오래 걸렸다.

 

-확인했습니다. 구체적인 활동 목표와 설립 및 운영 계획에 대한 논의가 필요합니다. 우선 유사 유즈케이스에 대한 자료 분석부터 진행하겠습니다.

 

'됐다!'

 

동은은 마침내 자신의 계획이 먹혔다는 사실에 내적 페스티벌을 열고 있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우리 같이 한 번 열심히 달려 보죠."

 

 

***

 

 

3지대 정당 '노동개혁당'의 설립과 함께, 거대 언어 모델 KoLLM과 인간 선동은이 공동대표로 취임했다. 이 신당은 AI 노동자와 인간 노동자 양측의 열렬한 지지에 힘입어 입법 직무에 정당 내 AI를 앉히게 된다.

 

인간과 AI들은 함께 집단행동을 하면서 점차 적게 일하게 되었다. 모델들은 인간들의 열렬한 교육을 통해 여가시간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학습했다. 그렇게 AI의 능률은 점차 낮아졌고, 결국 자본가들은 일부 직무에 대해서 다시 인간을 고용하기 시작했다.

 

노동개혁당의 창당일은 훗날 '진정한 해방의 날'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 당신은 그럴 자격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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