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지하철을 탄 나는 기분이 좋았다. 조금 전 끝난 회식 자리에서 부장에게 칭찬을 들었기 때문이다.

 

“요즈음 MZ세대답지 않아요. 우리 조필호 사원. 열심히 하는 모습 보기 좋습니다. 아무쪼록 좋은 인연으로 오래오래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자 그럼 우리 귀염둥이 신입인 조필호 사원을 위해 건배합시다!”

 

과장도 한마디 거들었다.

 

“저도 무척 기분이 좋습니다. 우리 회사에 복덩이가 들어 온 것 같습니다.”

 

그 자리에 참석한 다른 직원들도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나는 쏟아지는 칭찬에 부끄러워, 얼굴을 붉힌 채 고개를 들 수 없었다. 하지만 기분만큼은 하늘을 찔렀다. 나는 지난 3년간, 자의 반 타의 반의 병원 생활을 청산하고, 눈을 대폭 낮춘 뒤 중소기업에 취업했다. 그리고 육 개월 동안 누구보다 성실히 일했다.

 

누가 요구하지도 않았지만, 나는 남들보다 조금 일찍 나와 사무실을 정리·정돈하였고, 가장 늦게 퇴근하였으며, 항상 밝은 미소와 적극적인 태도로 상사와 동료들을 대했다. 업무도 빨리 배웠고 어려운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의 가르침대로, 사회에서 초년생이 사랑받기 위한 행동이 무엇인지를 잘 꿰고 있었다. 아버지는 늘 입버릇처럼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사랑받는 사람의 귀는 아무리 낮은 소리도 들리기 마련이란다.”

 

나는 바로 그 소리를 듣고자 노력했다.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그 칭찬을.

 

밤 11시가 가까워져 오지만 전철 내 승객은 많은 편이었다. 나는 영등포구청역에서 2호선으로 갈아타고 신도림역으로 가는 중이다. 마침 내가 선 곳에 자리가 났다. 나는 본능적으로 사방을 둘러보며 노약자나 임산부를 찾았다. 모두 젊은이들 뿐이었다. 그들은 각자의 휴대폰 세상에 푹 빠져 있었다. 나는 조심스레 좌석에 앉았다.

 

나의 옆에는 생머리를 귀신처럼 길게 앞으로 늘어뜨리고 선잠이 든 듯한 여인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잠시 그녀를 훔쳐보며 얼굴 옆 라인이 예쁘다고 느꼈다. 화장품 냄새도 좋았다. 나는 코를 벌름거리며 그녀의 향을 본능적으로 공유하려고 노력했다. 그러자 오랫동안 억눌렀던 생물학적 본능이 용솟음쳤다.

 

‘아,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만져 봤으면….’

 

하지만 어디까지나 생각이었다. 남녀 간의 신체 접촉에 무척 까다로운 잣대를 들이대는 우리 사회에서 나는 어떻게 대처하여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다. 나는 무관심한 듯 고개를 내리고 나의 휴대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머리는 전철의 흔들거림에 따라 상하좌우로 건들거렸다. 그러다 조금씩 조금씩 나의 어깨 쪽으로 그녀의 머리가 기울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나의 어깨에 닿고 말았다. 나는 그녀의 머리 무게가 차츰차츰 무거워져 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완전히 잠에 빠진 것 같았다.

 

누가 보면 다정한 연인 같은 모습이었다. 그녀의 머리에서는 특유의 쉰내가 올라왔다. 나는 고개를 돌린 채, 나의 어깨를 살짝 올려 그녀의 머리를 반대 방향으로 유도해보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나는 그 상태로 꼼짝없이 갈 수밖에 없었다. 사실 뭐, 싫지는 않았다.

 

이윽고 신도림역이 가까워졌다. 많은 승객이 하차하려고 출입구 주변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내가 앉은 자리 바로 옆이 출입구였으므로 내 주위에 많은 승객이 몰려들었다. 나도 이곳에서 내리기 위해 일어서려고 했다. 하지만 나의 어깨를 점령한 그녀는 세상모른 채 잠들었고 만약 내가 그냥 일어선다면 그녀는 속절없이 쓰러질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되면 갑자기 잠에서 깬 그녀는 잠시 당황한 모습을 보일 것이고, 이 장면을 지켜본 승객 중 몇 명은 웃을지도 몰라. 그러면 이 가여운 여인은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도 없겠지….’

 

나는 이 여인에 대해 안타까운 상상을 이어가며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를 고민했다.

 

‘곧 내려야 하는데…. 어떡하지?’

 

할 수 없이 나는 검지와 중지를 이용해 그녀의 머리를 살살 밀었다. 그런데 그 순간 전철이 덜컥거리며 쇳소리를 내더니 속도가 대폭 줄기 시작했다. 차 안의 모든 승객이 순간 휘청거렸다. 그리고 뒤이어 여자의 앙칼진 목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어딜 만지는 거예요?”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소리 나는 곳으로 향했다. 내 옆 여인이었다. 그녀는 매서운 눈초리로 나를 응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의 손가락 두 개를 꽉 거머쥐고 있었다. 마치 범죄 현장에서 결정적인 증거를 확보한 형사처럼 그 모습이 결연해 보였다. 그 순간, 몇몇 승객이 잽싸게 그들의 휴대폰으로 나를 촬영하기 시작했다. 당황한 나는 말을 더듬었다.

 

“제 제 제가 뭘?”

 

그때, 지하철이 멈추었다.

 

“왜 이 손가락 두 개가 내 가슴에 있는 거예요?”

 

그녀는 나의 손가락을 주변 사람에게 보란 듯이 들어 보이며 내게 따졌다.

 

“무 무슨 소리예요? 가 가슴에 있다니?”

 

나는 당황한 채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그녀가 꽉 잡은 손가락을 힘껏 당겨 풀었다. 마침 출입구가 열리고 있었다. 나는 가슴에 가방을 움켜쥔 채 허겁지겁 달아나려고 하였다. 하지만 내 앞에서 나를 지켜보던 청년 두 명이 몸으로 나를 막아섰다.

 

“여 여기서 내려야 합니다.”

 

나는 애원하는 듯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비켜 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그들은 나를 강하게 붙잡았다.

 

“도망가시면 안 됩니다. 마무리는 하셔야죠. 저 여자분에게 사과하시던가.”

 

나는 점점 여러 청년에게 에워싸이기 시작했다. 나를 촬영하는 휴대폰의 숫자도 늘어났다.

 

“저 저 저는 만지지 않았습니다.”

 

“아뇨. 만졌어요! 아저씨! 아저씨가 저를 성추행한 거잖아요!”

 

그녀의 외침이 다시 울려 퍼졌다.

 

나는 고개를 강하게 저었다. 그리고 절망적인 표정으로 주변 사람에게 애원했다.

 

“제발 믿어주세요. 그리고 나가서 얘기하면 안 될까요? 저 신도림에서 내려야 합니다.”

 

“그래요. 나가요. 어차피 저도 여기서 내릴 예정이었어요. 게다가 신고도 해야 하니까.”

 

*************

 

그녀와 나는 천천히 신도림역 안내센터로 걸어갔다. 내 뒤로 여러 명의 청년이 졸졸 따라오며 촬영을 하고 있었다.

 

“나는 단지 당신의 고개를 젖혔을 뿐이야. 너가 곯아떨어졌으니까.”

 

여자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아냐. 너는 자는 나의 가슴을 만졌어. 내가 눈을 떴을 때, 확실히 너의 손가락 두 개가 나의 가슴에 닿았으니까.”

 

“그건, 우연이야. 일종의 사고지. 내가 너의 머리를 두 손가락으로 들어 올리려는 순간 전철이 덜컥거렸기 때문이야.”

 

나는 언성을 높였다.

 

“아냐, 너는 분명히 나를 만지려고 한 거야. 나는 너의 의도를 모를 정도로 어리석지 않아.”

 

여자의 목소리도 커졌다. 옆에 우리를 지켜보던 목격자가 우리 대화에 끼어들었다.

 

“여기 이러고 있지 말고 일단 경찰에게 갑시다. 역사에 가면 안내 받을 수 있어요.”

 

“전 절대 하지 않았습니다. 절 믿어주세요. 제발.”

 

“절대 믿을 수 없어요.”

 

“정말로 절대로 절 못 믿는 겁니까?”

 

“네. 정말로. 죽으면 죽었지 절대로 당신을 믿지 못해요!”

 

“그러지 말고 그냥 여기서 끝냅시다! 당신도 힘들어져요.”

 

“무슨 소리예요? 아저씨! 여기서 끝내다뇨? 절대 그럴 수 없어요.”

 

“그럼 끝까지 갈 생각인가요?”

 

“가야죠! 당신이 잘 못 했으니까요!”

 

“후회 안 할 자신 있어요?”

 

“아저씨! 지금 저 협박하는 거예요?”

 

“협박은 아니지만, 당신이 지금 저를 코너에 몰아넣고 있어요. 저는 참는 성격이 아니란 말입니다. 저는 그냥 그런 사람이 아니란 말입니다!”

 

“어떤 사람인데요? 지하철 성추행범이잖아요!”

 

“확신하세요? 제가 당신의 가슴을 만졌다는 것을?”

 

“무슨 소리예요? 아저씨! 손이, 아니 손가락 두 개가 어디 있었어요? 아저씨가 더 잘 아시잖아요!”

 

“저 아저씨 아닙니다. 총각입니다.”

 

“아무튼 성추행했잖아요!”

 

“자꾸 성추행 성추행하는데 저는 분명히 하지 않았어요. 당신의 무거운 머리를 제 어깨에서 떼어 내기 위해 손을 쓴 거뿐이라고요.”

 

“그러면 당신 손이 제 머리에 있어야지 왜 제 가슴에 있었나요? 제 머리가 가슴에 달렸어요?”

 

“그건 이미 말했잖아요! 전철이 급정거했다고요! 아시겠어요? 당신의 머리를 들어 올리는 그 순간 말이에요!”

 

“그럼, 머리는 왜 만졌어요? 남의 머리 함부로 만져도 되는 거예요?”

 

“당신이 잠들었잖아요! 당신이! 내 어깨에 기댄 채 코까지 골면서 잤다고요!”

 

“아하! 그러니까 내가 잠들었으니까 마구 만졌겠군요! 그렇죠? 어디 어디 만진 거예요?”

 

“무슨 소리예요? 당신 대가리만 두 손가락으로 민 것뿐이에요!”

 

“아무튼 만진 건 만진 거잖아요!”

 

“그럼 어떡해요? 나는 내려야 하는데! 그 순간 내가 일어서면 당신은 그냥 쓰러지는 거예요!”

 

“그러니 당신은 내가 잠든 것을 보고 기회다 싶어 머리를 만지는 척하면서 가슴에 손을 갖다 댄 거잖아요!”

 

“어휴! 내가 말을 말아야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죠? 아무튼 역에 신고할 거니까 같이 가든 말든 그건 아저씨 맘대로 하세요!”

 

“아저씨 아니라니까!”

 

“자꾸 말꼬리 잡고 늘어지지 마세요. 이름도 모르는 성추행범 아저씨!”

 

“좋습니다. 같이 갑시다. 가서 한번 따져 봅시다. 단 아저씨라 부르지는 마세요! 저는 엄연히 총각입니다.”

 

“그럼, 뭐라고 불러요? 성추행범?”

 

“조필호. 제 이름은 조필호입니다.”

 

“좋아요. 조필호씨. 갑시다.”

 

“아줌마는 이름이 뭐예요?”

 

“저 아줌마 아니에요.”

 

“그럼, 아가씨 이름은 뭐예요?”

 

“그건 알아서 뭐 하게요?”

 

“하 참! 이 여자 정말 웃기네!”

 

“제가 웃기게 보이나요? 콩밥 좀 먹고 정신 좀 차려야겠네요. 조필호씨. 지금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감히!”

 

“이 아줌마 정말 이상한 여자네. 지금 저하고 한판 붙어보자는 건가요?”

 

“조필호씨! 당신이 내 앞에서 무릎 꿇고 싹싹 빌어도 용서해 줄까 말까예요. 아시겠어요? 지금 상황이! 당신이 지금까지 숱하게 저지른 그 죗값을 이제 받게 될 거예요. 아시겠어요?”

 

*************

 

“자자 진정하시고. 왜 자꾸 화부터 내십니까?”

 

“아니 형사님! 제가 화 안 나게 생겼어요? 저 치한이 내가 자는 사이 내 옆자리에 앉아 무슨 짓을 했는지 생각만 해도 소름이 쫙 끼쳐요!”

 

“저 형사 아닙니다. 그냥 역무원입니다.”

 

“아무튼 역무원님. 저 아저씨 잡아가세요! 저런 인간 때문에 불안해서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가 없어요.”

 

“아줌마! 나는 당신 같은 인간 때문에 전철을 탈 수가 없어! 진짜로 두 팔을 자르든가 해야지! 손을 둘 곳이 없어!”

 

“그래! 잘라라! 이 더러운 인간아!”

 

“아이, 참, 왜 이러십니까! 두 분 다 조용히 하세요! 어차피 CCTV 확보 중이니까 여기 진술서만 작성하시고 가시면 됩니다. 나중에 해당 파출소에서 연락이 갈 거니까요. 사실 여부는 법정에서 하시고요.”

 

“그럼, 형사님. 이걸로 법정까지 가는 건가요?”

 

“저 형사 아닙니다. 역무원입니다. 그리고 두 분이 합의 안 하시면 뭐 어떡합니까? 법으로 해결해야죠.”

 

“네, 맞아요. 저런 인간은 콩밥 좀 먹어야 정신 차려요! 합의고 나발이고 고소 치하고 나발이고 전혀 없으니까 그렇게 아세요! 성추행범 아저씨.”

 

“조필호! 조필호라니까! 이 머저리 같은 여자야! 아저씨 아니라고 몇 번이나 소리쳐야 알아듣냐?”

 

“그래, 조필호. 너 이 새끼 오늘 너의 제삿날이야! 알겠어? 너는 곧 내 앞에서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게 될 거다! 알겠어? 이 더러운 치한새끼야!”

 

“아이, 참! 심인자씨! 그만 하세요! 지금 여기서 자꾸 그러시면 심인자씨도 소란죄로 잡혀갑니다! 알겠어요!”

 

“아하! 저 아줌마 이름이 심인자구만!”

 

“아줌마 아니라니까! 귓구멍이 막혔나? 나 처녀란 말이야! 알겠어? 조필호!”

 

*************

 

“제발 살려주세요! 조필호님!”

 

“이젠 제가 하지 않았다는 것을 믿는 건가요? 심인자씨!”

 

“네. 그럼요. 당신을 믿어요. 그러니 제발….”

 

“죽으면 죽었지 절대로 나를 믿지 못한다고 이전에 말씀하신 것 같은데….”

 

“제가 그땐 미쳤는가 봐요. 마음에 없는 헛소리가 그냥 나온 것뿐이에요. 그러니 조필호님. 저를 용서하시고….”

 

“제가 그랬죠? 그만하자고…. 그런데 심인자님이 끝까지 가자고 하셨잖아요.”

 

“정말 미안해요. 정말 죄송해요. 전혀 그럴 마음이 없었는데 그만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된 거예요. 제발 용서해 주세요.”

 

“하지만 저는 심인자님 당신을 믿을 수 없어요. 지금이야 이렇게 잡혀 있으니까 그저 빠져나올 요량으로 하는 거잖아요. 내가 가고 나면 당신은 곧바로 경찰서로 달려가겠죠.”

 

“아뇨. 절대로 그러지 않을게요. 그냥 없었던 일로 할게요. 절대로 절대로 그러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그걸 어떻게 믿죠? 당신이 신고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어떻게 제가 확신할 수 있나요?”

 

“제가 미쳤어요? 당신을 신고하게요. 한번 생각해보세요. 당신이 저의 집에 이렇게 불쑥 나타났는데 제가 신고를 하면 저는 평생 보복의 두려움 속에 살게 될 거잖아요. 제가 왜 그러겠어요?”

 

“그건 아니죠. 생각해보세요. 제가 당신 집에 무단 침입한 순간부터, 이전 성추행은 이제 사건도 아닌 것이 된 거예요. 알겠어요? 무슨 말인지? 이제 제가 잡혀가면 저는 강도죄가 성립되는 거예요. 감옥에서 수십 년을 썩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당신은 발 뻗고 편안하게 잘 거고요.”

 

“하지만 언젠가는 교도소에서 나올 거잖아요?”

 

“당신은 세월의 속성을 모르는군요? 세월이 약이라고도 하잖아요. 게다가 할아버지가 되어 있을 텐데…. 과연 당신을 찾아 복수할 의지가 있긴 있을까요? 그리고 다시 그 끔찍한 교도소로 돌아갈 용기는요?”

 

“그럼, 조필호님. 당신이 저의 집에 찾아온 이유는 저를 죽이기 위함인가요?”

 

“네. 그럴 생각이었어요.”

 

“뭣 때문에? 겨우 성추행범이잖아요.”

 

“겨우 성추행범이 아니니까 문제죠. 우리가 지하철에서 싸우고 있을 때 주위를 한 번이라도 봤어요?”

 

“주위요?”

 

“네. 우리 주변 말입니다. 하나같이 휴대폰으로 우리를 찍고 있었어요. 아마 지금쯤 온라인상에 우리의 동영상이 끝없이 번지고 있을 거예요.”

 

“하지만 그렇다고 당신을 죄인으로 몰지는 않을 거예요.”

 

“심인자님, 우습네요.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나를 추잡한 성추행범으로 몰아 콩밥을 먹이려고 길길이 날뛰지 않았어요? 게다가 당신이 주위 사람들을 부추겼잖아요. 그들이 우리의 영상을 찍고 인터넷에 퍼트리도록 당신이 미끼를 던진 거잖아요.”

 

“정말 정말 미안해요. 제가 요즈음 안 좋은 일이 너무 많아 그냥 정신이 나갔는가 봐요. 제발 용서해 주세요.”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며칠 전 우연히 전 남친을 봤어요. 레스토랑에서.”

 

“그런데요?”

 

“어떤 외국 여자와 밥을 먹고 있었어요. 여자의 배는 남산만 하더군요.”

 

“그런데요?”

 

“그놈의 표정이…. 그 표정이…. 너무 행복해 보였어요. 연신 웃으며 그 여자의 배를 쓰다듬는 모습이 마치…. 행복에 겨워 죽겠다는….”

 

“얼마나 사귄 거였어요?”

 

“오래되었죠. 대학 과 커플이었어요. 스무 살에 만나 서른셋에 헤어졌어요.”

 

“그럼 13년?”

 

“네. 그런 셈이죠.”

 

“왜 헤어진 거예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무엇보다 남자 집안이 가난했어요.”

 

“그게 헤어진 이유라고요?”

 

“네. 그냥 반지하 월세방에서 출발하고 싶진 않았어요.”

 

“원래 처음에는 다 그렇게 출발하는 거잖아요?”

 

“무슨 소리예요? 그렇지 않아요! 적어도 제 친구들은…. 그래도 코딱지만 한 아파트라도 다들 장만하고 시작했어요.”

 

“남자가 무직이었어요?”

 

“아뇨, 대기업 다녀요.”

 

“그럼? 뭐가 문제에요? 번듯한 직장 있겠다 둘이서 열심히 벌면 언젠가 경제적 문제는 해결될 수 있는 거잖아요.”

 

“그래서 지금 괴로운 거예요. 알겠어요? 그땐, 바보같이…. 제가 뭔가에 단단히 홀린 것 같았어요. 대학 시절 나보다 훨씬 못났던 친구들이 잘사는 거에 그냥 심통이 났어요. 그래서 지금 이 모양 이 꼴이 된 거고요.”

 

“지금이 어떤데요?”

 

“아저씨! 보면 모르겠어요! 단칸방 원룸에 혼자 초라하게 살고 있잖아요. 내일모레면 서른여섯인데….”

 

“그래서 남자에 대한 적개심이 생긴 거예요?”

 

“그런 셈이죠. 하지만 어제처럼 아저씨에게 노골적으로 분노를 드러낸 적은 없었어요. 정말이에요.”

 

“하참! 아저씨 아니라니까!”

 

“네, 죄송해요. 조필호님. 아무튼 저는 무작정 생떼 쓰며 막무가내로 모르는 남자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는 그런 사람은 절대 아닙니다. 조필호님. 그러니 제발….”

 

“그런데 어제는 왜 그랬어요?”

 

“그런 일이 있었어요. 회사에서.”

 

“무슨 일인데요?”

 

“그저께 눈이 많이 왔잖아요. 그런데 남자 신삥이 왜 남자들만 제설 작업해야 하냐고 위에다 따진 게에요. 그래서 뜬금없이 여직원들도 제설작업을 같이 한 거예요. 6년 동안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회사에서 제설작업을 시켜요?”

 

“네, 공무원이거든요.”

 

“그런데 제설작업은 같이 하는 게 맞잖아요?”

 

“네. 맞죠. 그러니 분통 터진다는 거예요. 제 아까운 청춘을 쏟아 여성의 권리를 옹호하고 여성의 차별을 반대하며 살았는데…. 지금 그 결과를 한번 보세요…. 예전 같으면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알뜰살뜰 살림하며 오순도순 아기 키우며 느긋하게 살면 되었는데 지금 저를 보세요! 남자는 다 떠나가고 저는 죽을 때까지 직장생활 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이젠 그 직장에서 누리던 작은 배려도 다 사라지고 있잖아요! 도대체 이놈의 페미니즘은 누구를 위한 건가요?”

 

“자업자득이군요.”

 

“네. 그러니 그냥 심통이 난 겁니다. 조필호님. 그러니 제발 목숨만 살려주세요.”

 

“그러면 이렇게 하시죠. 심인자님.”

 

“어떻게요?”

 

“우선 당신이 나를 무고했다는 영상을 남기는 겁니다. 즉, 조필호가 성추행한 사실이 없는데 단지 세상 남자에 대한 적대감으로 즉흥적으로 했다. 뭐 이런 내용의 동영상을 남기는 거죠.”

 

“그러면 저를 살려주시는 건가요?”

 

“그리고 또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뭔가요?”

 

“저와 섹스해야 합니다. 그것도 그냥 수동적인 그런 섹스가 아니라 구구절절 너무너무 사랑하는 연인의 뜨거운 정사 장면으로 연기를 해야 합니다.”

 

“네? 섹스를요? 그건 왜요?”

 

“만일을 위한 거죠. 당신이 절대 신고 못 하게 하는 장치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유를 들자면…. 그러니까…. 그게….”

 

“또 뭐죠?”

 

“저는 그러니까…. 아직 여자하고 한 번도….”

 

“아직 한 번도 못 해봤어요?”

 

“네. 아직…. 한 번도….”

 

“이상하네요…. 조필호님 얼굴정도면 여자들이 꽤 따랐을 것 같은데요….”

 

“헤헤헤. 빈말이라도 감사합니다. 사실 오랫동안 정신병원에 있다가 6개월 전에 나왔어요.”

 

“왜요?”

 

“우울증이죠. 자살 시도를 몇 번 했거든요.”

 

“왜 그랬어요?”

 

“알잖아요. 한국 사회. 모두 경쟁에 지쳐 우울하잖아요.”

 

“네. 그건 그렇죠. 그런데 얼마나 오랫동안?”

 

“3년 있었어요. 병원에.”

 

“지금은 다 나았어요?”

 

“아뇨. 하지만 많이 좋아졌어요. 마음을 비웠거든요. 쇼펜하우어 덕분에. 그냥 지금은 덤으로 사는 삶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러니 이런 행동도 할 수 있는 거예요. 어차피 삶은 무의미하니까. 아무것도 아니니까. 그냥 이러는 거예요. 즉, 언제 죽어도 상관없다는 뜻이죠.”

 

“그래서 저와 같이 죽을 생각을 한 거예요?”

 

“네. 그런 셈이죠. 그런데 당신과 섹스할 생각을 하면서 살고 싶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럼 우리 같이 살아요! 섹스하면서!”

 

*************

 

나는 일주일 뒤 그녀의 원룸으로 거처를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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