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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돌려주세요

2021.07.31 20:1807.31

어수룩한 초저녁이 되면 한 사람이 집에 찾아온다. 그리고 문을 두드리며 말한다. 

"아이를 돌려 주세요."


1년에 한 번 있는 대학교 동문회였다. 그런 자리에 잘 나가지 않지만 건희가 가자고 등을 떠미는 바람에 억지로 그 자리에 나가게 되었다. 동문회 같은 건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이 영업이나 하기 위해 가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대학교 때 친해지고 아직까지 연락을 이어가는 친구 중에 건희 말고는 아무도 동문회에 나오지 않았다. 언제든지 약속만 잡으면 만날 수 있는 친구들이었다. 굳이 동문회에 나오지 않아도 만날 수 있었다. 내 친구들도 모두 나 같아서 이렇게 단체가 모여서 떠드는 자리를 꺼렸다. 기 빨린다고. 

건희는 그 친구들과 노는 무리가 달랐다. 건희도 친구들이 많았지만 내 친구들과 교집합이 없어서 건희를 만날 때면 나는 항상 혼자서 그와 만나야 했다. 지방 공기업에 취업한 건희는 서울에 올라와도 다른 친구들이랑 어울리느라 나를 만나는 일은 드물었다. 그렇기 때문에 건희가 동문회에서 얼굴 좀 보자고 했을 때, 거절하기가 힘들었다. 오랜만에 보는 건희였다.

건희는 지방에서 KTX를 타고 간다고 서울역에서 보자고 했다. 시간 맞춰 서울역에 가니 열차에서 내리는 그를 볼 수 있었다. 퇴근을 하고 바로 올라온 건지 멀쑥한 정장 차림이었다. 

"여, 신수가 훤해졌구먼."

"너는 어째 옛날이랑 똑같네. 여전하구먼."

시시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인사를 하고 동문회 장소로 지하철을 타고 이동했다. 동문회 장소는 대학로였다. 학생 신분으로 개강, 종강 파티를 벌였던 그 곳에 이제는 일에 찌들은 직장인들이 모여들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나와 있었다. 익숙한 얼굴들도 보이고 낯선 얼굴들도 보였다. 정정하시던 교수님들은 흰머리가 성성하셨다. 나는 조용히 구석 자리로 갔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나는 사람들과 섞이는 것이 불편했다. 적당히 안면이 있는 사람들 속에 섞여 그들이 하는 이야기에 맞장구나 치기로. 건희는 학부장도 했던 외향적인 친구라 이미 교수님 옆에서 싱글벙글 웃으며 술을 따르고 있었다. 시간은 금방 흘렀다.

9시 뉴스만 나오면 소파에 머리를 기대고 주무신다는 교수님은 일찌감치 들어가시고, 나머지 교수님들은 술에 취해 자기 말만 하기 바빴다. 교수란 말하는 것에 특화되어 있는 건지 이런 자리에 와서도 자기 말만 하신다. 들어주기도 질렸는지 건희는 얼큰하게 취해 내 앞에 와서 앉았다. 얼굴이 벌게지고 넥타이가 풀어져 있었다. 취했네! 이자식. 고개는 테이블에 처박혔지만 술을 든 손이 건배는 거뜬히 할 기세였다. 건희는 대단한 술꾼이 분명했다. 

"그만 마셔. 교수님들도 가셨어. 우리도 슬슬 들어가자. 내일 토요일이니까 자고 가. 우리 집으로 가자."

올라 온다고 할 때, 우리 집에서 자고 간다는 말은 없었지만 으레 그러려니 했다. 안 자고 간다고 버티더라도 이렇게 술에 취했으니 오늘 밤 기차를 타고 지방에 간다는 건 무리였다. 다행히 나는 서울에서 혼자 자취를 하고 있어서 성인 남성 하나 정도는 재워줄 수 있다. 주변을 둘러보니 술에 취해서 사람 보다는 흡사 좀비에 가까운 사람들이 귀소본능대로 하나, 둘 자리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그 분위기에 편승해서 나도 건희를 둘러업고 가게를 나섰다. 마침 동문회 주최자인 한학번 어린 후배와 눈이 마주쳤다. 대충 눈인사를 하고 택시를 잡아 건희를 밀어 넣었다. 

"불광역 쪽으로 가주세요."

우리를 태운 택시는 혜화를 등지고 종로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퇴근 시간이 훌쩍 넘은 서울 도심은 한산했다. 지나다니는 사람도 많이 보이지 않았다. 북적거리던 혜화와는 딴 판이었다.  조용한 종로 거리를 택시가 유유히 흘러갔다. 탑골공원 근처에서 신호에 잠깐 걸렸었는데 택시가 멈추는 바람에 깼는지 건희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그거 아냐... 흠흠... 이 밝은 곳에도 귀신이 있대. 불이 꺼지지 않는 도시 서울에도. 탑골공원 뒤쪽이 그렇게 음침하다는데 거기에 귀신이 많이 보인대."

"자다 말고 무슨 소리야. 귀신이라니. 뭔 헛소리야."

"원래 이 자리에 절이 하나 있었대. 절 자리에는 집을 못 짓는다며? 그래서 공터로 남겨둔 게 지금 탑골공원이 된 거래."

"그거랑 귀신이랑 무슨 상관이야."

"절이 있던 자리에 뭔가 있던 걸까? 아니면 절이 없어져서 뭔가가 생긴걸까."

"얘는 자다가 일어나서 무슨 얘기 하는 거야."

"그렇지? 이상한 얘기지. 요즘 세상에 귀신이라니. 그렇지 이상하지"

건희는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았다. 다른 할 말이 있었던 걸까. 건희가 입을 다시 뗀 건 우리 집에 도착해서 씻고 누웠을 때였다. 나름 손님이라고 건희를 침대에 재우고 침대와는 직각으로 놓인 소파에 내가 자기로 했다. 불을 끄고 소파에 누우니 건희가 기다렸다는 듯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 집에 어떤 사람이 계속 찾아와."

뜬금없었지만 호기심이 생겼다. 아까 귀신 이야기와 관련이 있는 걸까.

"몇 주 됐어. 일이 바쁘니까 집에 잘 안 들어가서 몰랐는데 전부터 자주 왔었나봐 그 여자. 그렇게 늦은 저녁도 아니야. 해가 질 때쯤 있잖아 그 초저녁 시간에만 찾아오는 거야. 문을 두드리는데 나는 처음에 옆집 문을 두드리는 줄 알았어. 우리 집에 그 시간에 올 사람이 없으니까. 그런데 자세히 들으니 우리 집인 거야. 누구냐고 물으면서 문을 열었지. 근데 없더라? 없었어. 그 날은 그냥 집을 잘못 찾았겠거니 했지. 그럴 때 있잖아. 층을 헷갈렸다던가. 다른 동으로 잘 못 찾아왔다던가."

"그럴 수 있지, 나도 그랬던 적 있었어. 본가가 4층에 있었는데 계단으로 가다가 한 층 못 가서 아랫집 도어락에 번호 누르고 있었어. 계속 번호 눌러도 안 되는 거야. 이상하다 싶어서 집 번호를 봤는데 3으로 시작하더라고. 엄청 놀라서 올라갔는데 그런 경우 다들 있지."

"그래. 그런 건가 했어 나도. 그런데 일주일 후인가. 또 누가 찾아와서는 문을 두드리는 거야."

어둠 속에서 청각이 예민해져 있었다. 건희의 목소리가 떨리는 게 느껴졌다. 건희는 한숨을 길게 쉬고 말을 계속했다. 

"그 지난주에 있던 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어. 누구세요 하면서 현관으로 갔지. 근데 밖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 거야. 여자 목소리였어. 뭐라고 그러는지 알아? 자기 아이를 돌려달래. 그 순간 소름이 쫙. 사람 목소리가 아닌 거 같았어. 세상에 어떤 사람 목소리가 그럴 수 있지?  생기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거야. 현관까지 갔는데 문을 못 열겠더라. 

그리고 아이라니! 우리 집에 아이가 어디있어. 순간 나는 있지도 않는 아이를 찾느라 방 안을 두리번거렸다니까. 진짜 있을까 봐. 그러고서 정신 차리고 문을 열었는데. 없어. 밖에 아무도 없는 거야. 저번 주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 게 번뜩 생각이 났지. 아마 같은 사람이었을 거야. 미치겠는 건 뭔지 알아? 그 여자가 계속해서 찾아와. 

금요일 저녁, 같은 시간에 찾아와. 금요일 저녁이면 거의 집에 있잖아. 피곤하니까. 일부러 내가 있는 시간에 찾아오는 건가 싶기도 해. 아파트 CCTV? 돌려봤지. 근데 지방이고 낡은 아파트라서 그런지 CCTV가 많이 없더라. 누군지 못 찾았어. 미치겠어. 그게 한 번 의식하기 시작하니까 계속 신경 쓰이더라고. 

그 시간에 혼자 있으면 조금 무서워. 초저녁 그때 있잖아. 해가 지고 밤이 시작되는, 어수룩해서 사물 분간이 잘 안 가는 때. 사람인지 그림자인지 분간이 안 가는 그때. 지금이면 8시쯤 되려나. 꼭 그때 찾아와. 딱 퇴근해서 밥 먹고 씻고 쉴 때 아니냐! 소파에서 뒹굴뒹굴하면서 티비 보는 시간. 그 시간에 오는 거야. 다른 날에도 그 시간 되면 찾아올 것 같아서 집에 들어가면 쉬지도 못하겠는 거야.  

그래서 집에 안 들어간 지 꽤 됐어. 지금은 회사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있는데, 하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다. 기숙사가 답답해서 나가고 싶기는 한데. 

귀신일까? 사람일까? 귀신이어도 무섭고 사람이어도 무서울 거 같아. 난 다시 그 집 못 들어가겠어."  

"집이 문제인 거야?"

"모르겠어. 집주인이 싸게 내놓기도 하고, 해외로 간다고 그랬나, 그래서 빨리 처분하고 싶다고 그랬어. 이젠 그것도 마음에 걸린다. 집에 무슨 문제가 있어서 급처분 한 건가 싶기도 하고."


어제 건희가 했던 말 때문인지 잠자리가 뒤숭숭했다. 잠을 못 자서 퀭하게 일어났는데 건희는 지난 밤에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개운한 표정이었다. 약 올라.

"으악, 야 해장국 먹으러 가자. 죽을 거 같아."

배를 긁적거리며 화장실로 향하는 건희의 엉덩이를 걷어차 주었다. 그리고 간밤에 꾸었던 꿈을 소가 되새김질 하는 것처럼 다시 생각해보았다.

간밤에 나는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건희 집 복도에 있었다. 복도식 아파트 맨 끝. 건희의 집으로 보이는 문 앞에 어떤 여자가 서 있었다. 구불거리는 긴 머리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고 깡마른 앙상한 손이 현관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똑똑똑'

나는 무서워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안에서 반응이 없자 다시 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그 주기가 짧아지고 있었다. 이제 여자는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문을 빠르게 두드리고 있었다. 

"똑똑똑똑똑똑똑똑똑똑똑똑똑똑똑똑똑똑똑똑똑똑똑똑똑똑똑똑똑똑똑똑똑똑똑똑..."

 정상적이지 않은 그 모습에 두려움을 느껴 뒷걸음질 치는 순간, 여자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나는 꿈에서 깨어났다.


건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해장국을 먹고 우리 집 화장실을 술똥으로 테러해 놓은 다음 KTX를 타고 내려갔다. 자주 연락은 하지만 얼굴을 볼 기회가 적으니까 아쉬웠다. 다음 동문회에서나 다시 보게 되려나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의 재회는 의외로 빨리 찾아왔다. 이번엔 내가 건희가 있는 도시로 내려가게 되었다. 그 쪽에서 일할 기회가 온 것이다.  

프리랜서 기획자로 일하고 있는 나는 전국 어디라도 일을 준다면 갈 용의가 있었다. 물론 그에 상응하는 대가가 있을 때 뿐이지만. 나 같은 경우엔 에이전시에 소속되어 있지 않아 헤드헌터를 끼고 계약하지 않는다면 회사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들보다 내 몫으로 챙겨가는 게 많다. 

몇 년 전, 에이전시에 있었을 때, 중급 기획자의 표준 몸값을 보고 얼마나 기함을 했던지. 분명 내 몫으로 월급보다 두 세배 많은 돈이 책정되어 있음에도 내가 받는 것은 고작 에이전시 월급에 불과했다. 즉, 내가 벌어서 회사를 먹여 살리고 있는 셈이었다. 꼴 보기 싫은 대표도 내가 먹여 살리고 있다고 생각하니 불쾌했다. 그래서 경력 조금 쌓아 바로 프리로 일하게 되었다.

프리로 일을 하게 되면서 깨달은 게 있다면 월급을 뺀 나머지 금액은 영업과 안정적인 일자리의 대가였다는 것이다. 개인 영업은 그만큼 어려웠다. 처음엔 일이 없었다. 그러다가 일이 하나둘, 들어오게 되고 그 일을 계기로 또 다른 일이 들어왔다. 

다만 일이 계속 있는 게 아니어서 있을 때 바짝 해 둬야 했다. 지방으로 가야 하는 일이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래도 KTX가 가는 곳이니 저번 보다는 사정이 낫다. 저번에는 산골짜기에 있는 연구소로 들어가게 되었었는데 근처에 숙소가 없어서 읍내에 숙소를 잡고 차까지 빌려 왔다 갔다 해야 했다. 연구소 사람들이 사는 관사가 있었지만 외부 사람이 묵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다행히 임금은 많이 줘서 숙소와 차를 빌리고도 돈이 남았지만 서울까지 거리도 멀고 일상생활도 힘들어서 이만저만 고생한 것이 아니었다. 

다행히 이번에는 나름 도시였다. 거기에 건희도 있으니 쉬는 날에 굳이 놀 사람을 찾아서 서울까지 올라올 필요도 없었다. 

건희에게는 계약서에 싸인하기 전에 우선 연락을 해 두었다. 

"강건희. 나다. 잘 있었냐?"

"어 웬일이냐. 본 지 얼마나 됐다고? 뭔 일 있냐?"

"참나. 뭔 일 있어야 전화하냐. 근데 있긴 해. 너 사는 데가 A 광역시라고 했지? 나 거기로 몇 달 일하러 간다. A대학교 있잖아. 거기 프로젝트가 하나 있더라고, 거기서 몇 달 일할 거야."

"오 완전 환영. 어서 와라. 자주 보겠구먼. 집은. 집은 어떻게 해? KTX타고 왔다 갔다 할 수는 있겠는데 매일 그러기엔 힘들 거 아냐. 월세 사는 거야?"

"그래야지. 근데 월세가 좀 비싸냐."

"그럼 뭐 다른 생각 있어? 거기에서 숙소 제공해줘?"

"뭐 계약직인데 숙소 제공하겠냐. 그래서 말인데." 

나는 건희의 아파트를 생각했다. 건희 말로는 방이 세 개나 되는 아파트였다. 하나는 침실로 쓰고 다른 하나는 옷방으로, 하나는 서재로 쓴다고 했다. 다른 지역으로 이동 할 일이 거의 없는 회사여서 아예 샀다고. 위치도 알고 보니 일하게 된 대학과 가까웠다. 버스 한 번만 타고 가면 되니 교통비도 아낄 수 있었다. 

건희가 전에 했던 얘기만 아니라면 당장에라도 신세 좀 지겠다고 얘기하고 싶었다. 바람 앞의 촛불 같은 프리랜서의 삶이라 월세라도 아껴보고 싶은 마음이 크다. 누가 찾아온다고 하는데 문만 열어주지 않으면 되는 거 아닐까. 설마 쳐들어올까. 목구멍이 포도청이다. 조금 무서운걸 참고 돈을 아낄 수 있다면 조금 무섭고 말지. 하지만 집주인도 집에 들어오지 않는 상황이니 말 꺼내기가 어려웠다. 나는 말을 빙빙 돌리기 시작했다.

"아직도 집에 안 들어가? 집 관리는 어떻게 해? 집에 안 들어가면 냉장고에 있는 음식은 어떻게 해? 관리가 좀 필요하지 않을까?"

내 기억에 건희는 그렇게 눈치가 빠른 녀석은 아니었는데, 사회생활을 몇 년 한 덕분인지 내 말의 의도를 빨리 알아차렸다.

"너 우리 집 생각하고 있구나. 그렇지. 나 같아도 그렇겠다. 우리 집 쓰는 거 진짜 나는 상관 없는데, 너는 괜찮겠어? 기억 안 나는 척 했지만 나 너한테 다 얘기한 거 같은데."

"알지알지. 나도 다 기억하고 있어. 누가 너희 집에 자꾸 찾아온다는 거. 그러고 아이 돌려 달라고 한다는 거. 야 근데 세상에 귀신이 어디있냐. 괜찮아. 사람이겠지. 네 집 멀쩡하게 놔두고 계속 기숙사 생활 할 수는 없는 거니까 이참에 나랑 같이 문제를 해결해보자. 사람이면 해결 할 수 있겠지. 뭐 귀신이어도 전문가들이 있으니까 해결할 수 있을 거야."

나는 해결에 포인트를 잡고 건희를 설득했다. 자기 집에 들어가지 못하니 건희도 안달이 났을 것이다. 우리 집에 와서 했던 얘기를 생각해 보면 건희는 분명 집에 다시 들어가고 싶어 했다. 큰돈을 들여 내집 마련의 꿈을 이루었는데 당연한 일이다. 집을 생각하면 내가 아니어도 언젠가 해결해야 할 일이다. 

내 말에 건희는 마음을 다잡은 모양이었다. 자기 집을 써도 된다고 허락했다.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하고. 너 있을 때 또 찾아오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혹시 또 찾아왔는데 네가 무섭지 않으면 해결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진짜. 집세는 안 받을게. 미안하다"

"아니 뭐. 공짜로 재워 준다는데 뭐가 미안해. 괜찮아. 그리고 내가 고맙지. 집주인도 없는데 나 혼자 들어가 산다는데 조금 걸렸는데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다 야. 내가 한번 해볼게. 내가 이래 보여도 겁이 없어요."

나는 그때, 얼마나 철부지 였는지. 당해보지 않아서 사태의 심각함을 몰랐다. 요즘 세상에 귀신이 어디 있냐고 큰 소리 쳤지만 집주인도 내쫓을 만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집이었다. 나는 그 날부터 악몽을 꾸기 시작했다. 꿈속에서 나는 항상 건희의 집으로 보이는 곳에서 여자와 함께 있었다. 

건희와 집 이야기를 하고 그다음 날에 바로 업무 관련 미팅이 이어졌다. 계약서는 다음 주에 학교에서 받기로 했지만 이미 반쯤은 업무에 투입된 상태였다. 지금 와서 일이 파투 나거나 내가 그 프로젝트에서 튕겨 나갈 일은 없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나는 그제야 짐을 싸기 시작했다.  

내려가기 위해 꾸린 가방에는 귀신이 무서워 할만한 물건들을 잔뜩 챙기고 있었다. 복숭아나무, 팥, 소금 등. 지난 주말엔 본가(부모님 집)에 들려 현관 위에 붙어있던 부적까지 떼왔다. 건희에게 그렇게 큰소리를 땅땅 쳤지만 흡사 귀신체험을 하러 가는 기분이 들었다. 귀신 아니다 사람이다 생각했지만 계속되는 악몽 때문인지 무서움은 커져만 갔다. 

건희가 사는 도시로 짐을 싸서 내려온 건 목요일 오후였다. 느지막이 일어나 서울역에 있는 맥도날드에서 점심을 먹고 KTX를 탔다. 도착한 역은 한산했다. 건희 아파트는 역과도 가까워서 택시를 타고 이동해도 금방이었다. 짐이 좀 많았는데 다행이었다. 급할 때에는 택시도 이용할 수 있고 KTX도 다니니 생각할 수록 위치가 괜찮은 것 같았다. 

건희는 평일 낮이라 일하고 있기 때문에 마중을 나오진 않았다. 대신 문자로 자신의 집 주소와 현관 비밀번호, 분리수거 하는 방법까지 자세하게 알려 주었다. 주인 없는 집에 혼자 가는 게 쑥스럽고 어색하긴 했지만 건희는 정말 그건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오히려 내가 오는 게 반가운 것 같았다. 나는 약간 어깨가 무거워졌다. 

택시가 한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섰다. 서울이나 신도시만큼 아파트가 빼곡하게 들어서 있진 않았다. 성기게 서 있는 아파트 몇 동 가운데 건희의 집이 있었다. 넓은 주차 공간과 놀이터 너무 높지 않은 아파트의 높이가 지방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 같았다. 가방을 고쳐매고 아파트 안으로 들어섰다. 가운데에 통로가 있고 좌우로 5개씩 세대가 있는 요즘엔 잘 보이지 않는 복도식 아파트였다. 엘리베이터에 타고 층 버튼을 누르니 긴장이 됐다. 문에 난 창으로 한층 한층 올라가는 모습이 보였다.

경쾌한 종소리와 함께 안내 목소리가 6층 도착을 알렸다. 무서운 느낌은 없었다. 친구 집에 놀러 온 기분이었다. 친구 중에서는 집을 산 사람이 없어서 또래가 사서 꾸민 집은 어떤 모습일까 궁금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왼쪽으로 세 번째 집이었다. 오래 비워 둔 집이라 멀리서부터 티가 났다. 문 앞에는 온갖 전단들이 형형색색으로 붙어 있었고 건희가 확인하지 않은, 중요하지 않아 보이는 택배들이 쌓여 있었다. 

지저분한 문 앞을 보니 약간 을씨년스러운 기분이 들긴 했다. 짐을 대충 내려놓고 문 앞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전단을 떼고 택배 상자들을 옆으로 밀어 놓고 건희가 미리 문자로 알려준 번호로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다. 현관문을 반쯤 열어 놓고 짐들을 가지고 들어왔다. 

현관은 깔끔하니 슬리퍼 하나와 우산 하나만 놓여 있었다. 현관을 지나 바로 왼쪽과 오른쪽에 마주 보는 방들이 있었고, 조금 더 들어가면 왼쪽에 식탁이 있었다. 현관에서부터 거실이 보였다. 그리고 현관의 정면으로 안방 같아 보이는 큰 방이 보였다. 현관에서 들어와 오른쪽에 있는 방과 안방 사이에는 화장실이 있었다. 

위치는 대충 그러했고 인테리어는 그저 깔끔했다. 흰색과 회색 톤으로 버물버물한 느낌이었다. 역시 색깔 맞추기 힘들면 무채색이 좋지. 거실에는 나름 신경을 쓴 티가 나는 밝은 남색 페브릭 소파가 있었다. 색이 없는 집에 유일하게 컬러 가구로 포인트를 준 것 같았다. 아마 더 소파가 주된 내 생활영역이 될 것이다. 

건희가 마지막에 급하게 짐을 챙겨나갔는지 슬리퍼나 옷들이 좀 흩어져 있는 것 말고는 있는 게 없었다. 집을 얻은 지 얼마 안 돼서 나갔다고 하더니 집에 가구나 가전들을 채우기도 전에 나간 모양이었다. 그래도 세탁기, 냉장고 같은 기본적인 가전은 있었다. 건희는 그런 가전들도 마음껏 쓰라고 했다. 안방에 있는 침대도 쓰라고 했지만 신세 지면서 어떻게 집에 없는 집주인의 침대까지 쓸 수 있겠는가. 소파에서 자겠다고 했다. 

평일에는 일을 하느라 대학교에 있을 것이고, 밥도 거의 사 먹을 것이다. 부엌은 별로 사용하지 않고 식탁이나 거실, 화장실 정도만 사용하지 않을까. 그래도 건희한테 들은 게 있으니 집을 수색했다. 집에 뭐가 있는지 알고 있어야 덜 무서울 것 같았다. 집을 구석구석 살폈다. 베란다에는 세탁기가 있었고 안방에는 조그만 서랍장과 침대가, 작은 두 방에는 각각 시스템 옷장과 책상이 있었다. 집안을 살피고 문을 다 닫아 두었다. 문을 열어 둘까도 생각했지만 열린 문틈 사이로 예상치 못한 것이라도 본다면 나도 건희처럼 뛰쳐 나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집 청소를 시작했다. 오랫동안 관리하는 사람이 없었던 집에는 먼지가 많이 쌓여있었다. 구석구석 먼지를 털어내고 청소기를 돌렸다. 물티슈로 바닥까지 닦고 나니 시간은 벌써 저녁이 다 되어갔다. 

7시 30분

시간을 보는 순간 느낌이 싸해졌다. 건희가 말했던 그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해가 남기고 간 붉은 노을과 어둠이 겹쳐져 멀리 보이는 실루엣이 개인지 늑대인지 구분하지 못한다는 그 시간.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는 시간.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건희가 집을 꽤 오래 비워두어서 그 여자도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얼마지 않아 내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았다. 

"똑똑똑"

누가 문을 두드린 것이었다. 티비도 켜지 않은 집은 너무 조용했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천둥처럼 집을 울렸다. 그 소리에 너무 놀라 크게 숨도 쉴 수 없었다. 온 몸의 털들이 쭈뼛 섰다. 청소를 끝내고 소파에 널브러져 쉬고 있던 그 자세 그대로 나는 굳어 버렸다. 

어렸을 때 강시 영화를 본 적이 있다. 거기에서는 강시가 가까이 오면 숨을 멈췄다. 그러면 강시는 사람을 인식하지 못하고 지나쳤다. 나는 건희의 집 문을 두드리는 것이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왜 강시 영화가 생각이 난 것일까. 그리고 왜 나는 그 순간 숨을 멈추었을까.   

 다시 한번

"똑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안에서 기척이 없자 조그만 발소리가 문에서 멀어졌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밀린 숨을 몰아 쉬었다. 티셔츠의 겨드랑이와 뒷덜미가 젖어 있었다. 왔다. 진짜 왔어. 누군가 집을 찾아왔어. 나는 다급하게 건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야, 진짜야! 진짜 왔어. 누가 왔어!!!!!!"

건희도 내심 이제는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아직도 오는 거냐고 소리쳤다. 사람이 없는 집에 누군가 계속 찾아오고 있었다. 안에서 아무런 대답이 없어도 꾸준히 문을 두드리고 있던 것이다. 소름이 돋았다. 밤이 되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건희가 말하길 그 시간에만 찾아온다고 했지만 자는 중에도 누군가 현관을 두드릴 것 같았다. 티비를 보다가 어슴푸레 잠이 들었나보다.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이번에는 문밖이 아니라 집 안에 있었다. 나는 소파에서 잠들기 직전에 누워있던 그 상태 그대로 누워 있었다.

"똑똑똑"

현관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저녁에 그랬던 것처럼 그가 지나가기를 숨도 쉬지 않고 기다렸다. 하지만 꿈속에서 현관 밖의 발소리는 멀어지지 않았다. 대신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현관 쪽으로 머리를 두고 누워있어 고개를 돌려 그쪽을 봐야 했지만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현관부터 쇠가 끌리는 듯한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끼이익거리는 소리가 내 머리맡까지 왔을 때, 나는 간신히 고개를 들어 올려 위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머리 위로 누군가의 머리카락이 쏟아졌다.

소리를 지르면서 몸을 일으켰다. 현관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누군가 들어 온 흔적도 없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베란다 창문으로 새벽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오지 않을 것 같은 내일이 왔다. 편히 쉬지 못해 피곤이 몰려왔다. 

그 상태로 해가 뜰 때까지 기다리다가 아침 일찍 일을 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 다행히 업무 첫날의 긴장감과 헐렁한 분위기가 지난 밤의 일을 잠깐이나마 잊게 만들어줬다. 

프로젝트 매니저로부터 업무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각자 직무에 맞게 역할을 나눴다. 이제 각 팀별로 회의를 한 후 전체적인 타임라인이 나올 것이다. 회의 중간중간엔 각자의 컴퓨터에 프로젝트에 필요한 프로그램을 깔았다. 

그날 저녁은 자연스럽게 회식이었다.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위해 낯선 사람들이 모였기 때문에 어느 정도 라포를 쌓을 필요가 있었다. 고깃집에서 고기와 술을 마시면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위해 낯선 사람들이 모였고 그중에는 여러 번 같이 일을 했던 사람들도 있었다. 

회식 자리는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잠도 못 자고 늦게까지 회식이 이어지니 조금 피곤했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있어서 그런지 안심이 됐다. 낯선 사람이 집에 찾아오는 시간을 피해 집에도 가벼운 마음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조금 피곤하겠지만 몇시간 늦게 들어간다고 죽는 것도 아니니 이런 패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그런 생활을 이어나갔다. 일을 마치고 카페에 가서 시간을 보내거나 산책을 하며 늦게 집에 들어갔다. 평일엔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주말이 왔다. 늦잠 자고 일어나 아침을 먹고 티비를 보며 뒹굴거리다가 이른 저녁을 먹었다. 배가 부르니 초저녁에 잠깐 잠이 들었나보다. 일주일 동안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아서 긴장이 풀렸다. 

얼마나 잤을까.

"똑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비몽사몽 하는 상태로 문을 열었다. 

"건희야? 웬일이야 연락도 없이."

문 앞에는 건희 대신 낯선 여자가 서 있었다. 옆집 사람인가, 아니면 아랫집 사람? 내가 너무 시끄러웠나? 저녁에만 잠깐 돌아다녔는데 조금 억울하네. 

"누구세요?"

"..."

여자는 답이 없었다. 번뜩 정신이 들었다. 해가 지고 있었다. 반팔 아래로 소름이 돋았다. 그 사람이었다. 이 시간에 오는 낯선 방문자. 그런데 왜? 오늘은 금요일이 아닌 토요일이었다. 나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 여자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따듯했다 피부가 손 끝에서 느껴졌다.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니 이유가 궁금해졌다. 왜 같은 요일, 같은 시간에 문을 두드리고 사라지는 것인지.

"저기 왜 이러시는 거예요."

내 물음이 끝나기도 전에 그 사람은 큰소리로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며 집에 들어왔다. 

"희준아! 희준아! 이제 집에 가자! 희준아! 엄마랑 집에 가자!"

집에 나 이외의 사람은 없었다. 그 사람은 누군가의 이름 부르며 집안을 둘러봤다. 정말 아이를 찾으려고 왔어? 좀 정신이 온전치 않은 사람인가? 수 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저기요. 여기 아이는 없어요. 희준이? 희준이 여기 없어요. 여기 저 혼자에요."

내 말에 여자가 고개를 들어 나를 봤다. 눈빛이 번뜩였다. 그 여자는 나를 밀치고 집 안으로 아예 들어섰다. 신발도 벗지 않은 채였다. 나는 온 몸으로 그 여자를 막아섰다. 그러자 그 사람은 더 큰 소리로 이름을 부르며 들어가기 위해 용을 썼다.

"희준아!!! 희준아!!!"

비명에 가까운 소리였다. 이웃들은 이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일까? 언뜻 본 아파트 복도는 조용했다. 일렬로 늘어선 다른 집들에서는 작은 미동도 없었다. 누구도 이 상황에서 나를 돕지 않을 것이다. 믿을 수 있는 건 나밖에 없었다. 

그 여자의 어깨를 잡고 밖으로 밀어냈다. 악에 받쳐 있는 모습을 보니 대화는 통하지 않을 것 같았다. 우선 집에서 쫓아내는데 주력했다. 무서웠다. 안에 들이면 안될 것 같았다.

"여긴 저 말고 아무도 없어요. 돌아가세요!!!"

"여기 희준이 있는 거 알아! 희준이 내놔!!! 희준아! 희준아!!!"

밖으로 밀려나면서도 그 사람의 눈은 집 안을 훑었다. 계속해서 비명 같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완전히 집에서 내쫓고 문을 잠근 후에는 문을 두드리며 한참을 그 앞에 있었다. 

 문 앞에서 인기척이 사라지자마자 바로 건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사람이 오늘 왔었어. 그래 사람이더라. 나 귀신인 줄 알고 팥이고 소금이고 바리바리 싸 왔는데 사람이더라고. 네가 말한 것처럼 아이를 찾았어. 희준이라는. 그 이름을 부르면서 막 들어오려고 하는 거야. 눈빛이 정상은 아니었어. 너 미친 사람 눈을 본 적이 있어? 난 이번에 본 것 같아. 진짜 무섭더라. 근데 금요일에만 찾아온다고 했잖아. 오늘 토요일 아니야?"

"세상에 사람이었어? 사람이 그럴 수 있나. 몇개월 동안이나 안에서 대답도 하지 않는 집을 꾸준히 찾아올 수 있냐는 말이야. 그리고 오늘 토요일 맞아. 사실 내가 토요일에는 본가에 가느라 거의 집에 없었어. 금요일에만 오는 줄 알았는데 토요일에도 왔나보네."

"일단 내보내고 문을 잠그니까 다시 가긴 했어. 내가 있다는 걸 알았는데 그냥 갔어. 나는 그게 더 무서워. 내가 안에 있다는 걸 들켰잖아. 또 찾아올 거야."

건희는 자신의 집 문을 두드렸던 게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는 크게 안심한 모양이었다. 이제는 농담까지 했다.

 "물어보지 그랬어 왜 왔냐고. 아이는 없다고. 뭐 차라도 한잔하지 왜."

이 상황에 너는 농담이 나오냐.

"뭐야. 나 진짜 무서워. 또 올 거 아냐. 매주 금요일에 왔으니까 다음 주 금요일에도 오겠지. 그전에도 올지 모르지만 금요일엔 확실하잖아. 그때는 너도 같이 있어 줘라. 같이 물어보자 왜 그러는지. 너도 빨리 집에 들어오고 싶잖아."

건희는 웃음기 쫙 뺀 내 목소리에 얼어붙었다. 그리고는 금요일날 오겠다는 말을 남겼다.


금요일에 건희는 나보다 먼저 집에 들어와 있었다. 금방 온 모양인지 아직 양복 차림이었다.

"별일 없었냐?"

나를 보고 머쓱했던지 건희가 물었다. 보아하니 이미 집안을 다 살펴본 모양이었다. 방문이 다 조금씩 열려 있는 게 보였다. 처음 이 집에 들어와서 내가 했던 일들이 생각났다. 나도 집에 들어와 이렇게 하나하나 다 살펴봤었는데, 그때 내가 했던 생각을 지금 건희도 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편한 옷차림으로 갈아입고 맥주맛 용기를 한 캔씩 충전했다. 없던 용기도 생기는 기분이 들었다. 오늘은 무섭다고 자리를 피하는 일은 없으리라. 

해가 지고 있었다. 이제 곧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릴 것이다.

"똑똑똑"

올 게 왔다. 우리는 재빨리 몸을 일으켜 현관으로 다가갔다. 문구멍으로 엿보니 문 앞에 여자가 서 있었다. 갈색 구불거리는 긴 머리가 보였다. 7부 남방에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나이는 30대 중반? 

누가 옆에 있다는 것에 용기가 났는지, 아니면 평범한 차림새의 여자를 보니 긴장이 풀렸는지 현관문을 쉽게 열어줬다. 하지만 그 사람은 저번에 봤던 여자와 다른 사람 같았다. 외모는 비슷한 것 같은데 눈빛이 달랐다. 저번에 봤던 그 광기 어린 눈빛이 아니었다. 

"누구세요. 누군데 맨날 와서 문을 두드리시는 겁니까. 누구를 찾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런 사람 여기 없어요. 저 여기 이사 온 지 한참 됐습니다. 이러는 거 정말 민폐에요. 제가 얼마나 불편했는지 아세요? 이유가 뭡니까 도대체."

 건희는 기다렸다는 듯 말을 다다다 뱉었다. 나도 당하고 나니 그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됐다. 여자는 우리들의 반응에 조금 당황하는 듯 싶더니 우물쭈물 말을 하기 시작했다. 

"저기 그게 아니라."

말이 길어질 것 같았다.

"들어오세요. 할 이야기가 많은 것 같은데 들어와서 차나 한잔 하시며 이야기 하시죠."

건희와 눈이 마주쳤다. 동의를 구하는 눈빛이었다. 내 눈빛의 의도를 알아차렸는지 건희도 끄덕거리며 여자에게 말했다. 

"들어오세요. 들어오셔서 확인해 보세요. 정말 여기 아무도 없습니다. 집에 들어와서 확인해보시고 차 한잔하시면서 계속 왜 여기 찾아왔었는지 이야기 좀 해주세요."

여자는 조심스럽게 집으로 들어왔다. 왠지 이 집이 익숙한 것 같았다. 능숙하게 벽을 잡고 신발을 벗었다. 왼쪽에 있는 방부터 문을 열고 하나하나 살피기 시작했다. 망설임이 없었지만 조심스러웠다. 놓치는 부분이 하나라도 있을 새라 꼼꼼히 방 구석구석을 훑었다. 친구의 서재 방, 부엌과 거실, 안방, 화장실, 그리고 드레스룸까지 다 훑어본 여자는 현관 근처에 거실 바닥에 주저 앉았다. 그리고 울기 시작했다. 

"진짜네. 진짜 없네. 진짜 없어. 나는 어떡하라고."

그는 허망한 듯 보였다. 주인 바뀐 집에서 도대체 무엇을 찾고 있었던 걸까.

여자가 방을 둘러보는 사이 나는 커피포트에 물을 올려 놓았었는데 타이밍 좋게 끓기 시작했다. 탁하고 버튼이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건희는 여자를 부축해 식탁에 앉혔다. 나는 티백을 담은 컵에 뜨거운 물을 부어 여자 앞에 놓았다. 여자는 컵을 멍하니 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뭐라도 해야 해서 그랬어요. 아무것도 안 하면 미칠 거 같아서. 이미 미친 것처럼 보이겠지만요. 작년까지 저는 여기에서 살았어요. 남편이랑 아이와 같이."

여자는 예전 기억이 나는 듯 주변을 휘휘 둘러보다가 다시 고개를 떨궜다. 그리고 뜨거운 차를 후후 불어 한 모금 마시더니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생각보다 이른 결혼이었어요. 아이가 생겨서 급하게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결혼하고 나니 남편이 많이 달라지더라고요. 예전엔 하늘의 별이라도 따다 줄 기세더니 신혼 후에는 집에 늦게 들어오는 날이 많았어요. 매일 야근 한다고, 회식이라고. 주말에는 골프를 친다고 안 들어오더라고요. 

그러더니 아이 낳을 때에도 오지 않았어요. 아이가 좀 자라면 그래도 아이 보는 재미에 일찍 들어오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제 착각이었죠. 그는 아내와 아이를 원했던 게 아니었어요. 그럴 거면 왜 결혼은 한 건지. 

그렇게 결혼 생활을 지지부진 끌다가 이혼을 했어요. 그 사람이 여긴 자기가 마련한 집이니 저와 아이보고 나가라더군요. 그래서 따로 집을 구해 나오게 되었죠. 아이는 당연히 제가 길렀어요. 그 사람은 아이 생일도 모를 거예요. 양육비라도 제때 줬으면 아빠 도리는 하는구나 생각했을 텐데, 양육비도 주지 않았어요. 

결혼 전에 하던 일은 아이를 낳고 기르느라 그만둔 상태였어요. 돈을 벌려면 일을 해야 하는데 아이 기르면서 일하기가 쉽나요. 어린이집에 아이 맡기고 그 시간에 맞춰서 일을 구하려니 정규직은 안 되겠더라고요. 비정규직, 계약직 전전하며 일을 했어요. 

아이를 기르기가 힘들었어요. 아이만 없었으면, 그랬으면 내가 이 고생을 안 해도 됐을 텐데. 나중에는 그런 생각까지 하게 되더라고요. 저 편하게 하자고 아이를 남편에게 몇 번 보냈어요. 양육비라도 안 줄 거면 아이라도 봐달라고. 그러다가 이 사달이 벌어진 거에요. 

그 날도 그렇게 아이를 맡기고 나갔다 왔어요. 저녁에 아이를 데리러 여기로 왔죠. 그런데 아무리 불러도 반응이 없는 거예요. 아이 아빠가 아이를 데리고 사라졌어요. 그 이후로 계속 여기에 왔어요. 아이 아버지가 있을 거 같은 금요일, 토요일에. 그 사람이 금요일은 집에 들어왔어요. 피곤했는지 토요일 저녁까지 잠을 잤었죠. 집이 팔린 지는 몰랐어요. 여태 아무도 나온 적이 없었거든요."

"회사에는 찾아가 보셨어요? 아이 할머니, 그러니까 시댁은요? 아이 아버지랑은 연락이 안 되는 거에요? 제가 부동산 통해서 번호를 알아볼 수 있어요."

건희가 안타까운 마음에 이런 저런 것들을 여자에게 물어봤다. 

"연락이 안 돼요. 제 번호는 당연히 받지 않고 지인의 휴대전화로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아요. 회사도 그만뒀다고 하더라고요. 시댁은 해외에 있고요. 정말 찾을 길이 없었어요. 

경찰에 신고도 해봤죠. 법적인 자문을 받으라고 했어요. 가정 폭력이 아닌 한 적극적으로 뭔가 해 줄 순 없다고. 아이 아버지인데 무슨 일이야 있겠냐고 신경 쓰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변호사도 찾아가 봤어요. 결론은 상담비만 날렸죠. 아무 진척이 없었어요. 아무도 저를 도와주지 않았어요. 

심지어는 가족들도 저를 도와주지 않았죠. 아이는 없는 게 낫지 않겠냐고, 이참에 새 출발 하라고. 하지만 어떻게 그래요. 저는 아이를 찾아야 했어요. 그래서 계속 여기에 왔어요. 여기에 아이가 있을 것 같아서."

"제가 여기 들어온 게 꽤 되었습니다. 아이는 여기에 없어요."

건희가 말했다. 아이 엄마는 고개를 들어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맞아요. 여긴 그 전에 아이 아빠와 제가 살던 곳이 아니네요. 눈으로 확인해보니 알겠어요. 제 아이는 여기에 없을 거예요. 아이 아빠와 이곳을 떠났겠죠. 죄송합니다. 사정도 모르고 제가 폐를 끼쳤어요. 이렇게 집을 확인 시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집에 대한 미련은 없을 것 같아요. 다시 찾아오지 않을게요."

여자는 그 말을 끝으로 더 울지 않았다. 조용히 일어나 인사를 하고 현관을 향해 갔다. 우리는 일어서서 그 여자를 배웅했다. 주변은 이미 깜깜해져 있었다. 그 여자가 가고도 우리는 한참을 현관에 서 있었다. 나간 사람의 꼬리가 길게 남은 것처럼 차마 문을 닫을 수 없었다. 

아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아이 엄마는 다시 아이를 찾을 수 있을까. 

아이를 찾으면 엄마는 행복할까. 

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 날, 건희는 자신의 방에서 잠을 잤다. 잠자리가 편한지 쌕쌕거리는 숨소리가 거실까지 들렸다. 하지만 나는 잠을 잘 수 없었다. 신경을 거스르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소리는 여기 온 뒤로 한 번도 신경 쓰지 않았던 부엌 옆에 작은 다용도실에서 들렸다. 

"듥듥듥"

뭔가가 문을 긁는 듯한 소리였다. 소리는 문 안쪽, 손잡이 아래 부분에서 들렸다. 작은 아이의 손이 닿는 그 위치였다. 

나는 무서워서 부엌 쪽으로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고개를 돌리면 그 문을 열고 잃어버린 아이가 나올 것 같았다. 엄마를 잃어버린 아이. 그 아이가 오늘 찾아왔던 엄마와 같이 가기 위해 문을 열고 나올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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