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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숲의 방문자

2021.07.29 22:1707.29

  굽이굽이 물결 치듯 올라가는 나무줄기에 부옇고 따스한 햇살이 옅게 드리웠다. 햇빛을 받아 촉촉하게 빛나는 잎사귀들이 신록을 발하고 있었다. 그 사이로 새하얀 원피스를 입은 금발의 작은 소녀가 높은 가지에 걸터앉아 얼굴을 내밀고 생글 웃어 보이며 말했다.

  “안녕! 너 되게 오랜만이다!”

  소녀는 오랜만에 마주한 얼굴이 굉장히 반가운 듯 얼굴 한가득 미소를 머금고 그 얼굴의 주인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 얼굴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무신경한 표정만을 취하자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닌가? 내가 잘못 봤나? 모르겠네! 다들 비슷비슷하게 생겨서 말이야. 아무렴 어때! 너 안 바쁘면 나랑 좀 놀아주라! 너무 심심해.”

  소녀가 말을 걸고 있는 사람은 커다란 키에 잘 그을린 구릿빛 피부, 우악스런 근육에 날선 이목구비, 그리고 뒤로 길게 땋은 청회색 머리카락을 지닌 남성이었다. 마치 거대한 고목, 혹은 바위 같은 인상을 지닌 남자였다. 길다란 금발과 하얀 옷 덕에 천진한 나비 같은 소녀와 어둡고 차분하며 육중한 고목 같은 남자는 서로 이상스러우면서도 어딘가 균형 잡힌 대비를 이루었다.

  소녀의 갑작스런 요청에 남자는 생긴 대로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럴 시간 없다.”

  그러자 소녀는 더욱더 생글거리며 말을 이었다.

  “왜, 너도 오랫동안 혼자 걸어와서 심심할 거 같은데! 나 신기한 거 되게 많이 갖고 있단 말이야. 너 살아있는 은구슬나비 본 적 있어? 나랑 놀아주면 특별히 보여줄게! 은색 날개가 진짜 예뻐!”

  소녀의 순진무구한 열의에 남자는 아주 살짝 곤란한 기색을 비치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시간을 내기가 어려울 것 같군. 해야 할 일이 있다.”

  소녀는 남자의 대답에 궁금한 듯 눈을 동그랗게 뜬 채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물어봤다.

  “무슨 일을 해야 하는데?”

  남자는 짐짓 대답할 필요가 없다는 듯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운반해야 할 짐이 있다. 나의 군주께서 내게 맡기신 짐이다.”

  남자는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았다. 남자의 말이 덜 끝난 줄 알고 기다리던 소녀는 결국 그에게 궁금한 걸 직접 물어봤다.

  “…뒤에 멘 가방에 들어있는 게 그 짐이야? 어떤 짐인데? 금화? 보물? 보석? 말할 수 없는 거야?”

  남자는 소녀의 질문에 잠시 뜸을 들이다 대답했다.

  “…사람이다.”

  그 말을 듣고 소녀는 여전히 궁금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이며 되물었다.

  “사람인데 짐이라고 하는 거 보면, 노예야? 몇 명이나 운반하는데? 아, 그게 아니면 혹시 관짝이라도 옮기는 거야? 괜찮아! 나한테는 말해도 돼. 솔직히 말해봐. 당신 왕의 명령으로 사람을 죽인 거지, 그렇지? 그것도 아니면…”

  아무렇지 않게 묻는 소녀의 소름 끼치는 질문에도 남자는 크게 동요하지 않고 대답했다.

  “모두 아니다.”

  그러고는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 소녀에게 보여주었다.

  “이것이다.”

  남자가 준 것을 받아 든 소녀는 잠시 말없이 그것을 쳐다보더니 말했다.

  “…카드잖아.”

  “그렇다.”

  소녀는 남자가 건네 준 것의 의미를 이해하려 애쓰며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면서 마저 말했다.

  “아르틸로쟌 카드잖아. 방패자리… 6번이네. 이게 무슨… ‘내가 사람 데리고 있어요’ 하는 증서 같은 건가? 아니면… 음… 대체 뭐야?”

  남자는 대답하지 않고 소녀에게서 카드를 도로 가져와 품속에 다시 집어넣은 다음 그대로 떠날 채비를 했다. 소녀는 됐어, 알 게 뭐람 하고 혼자 중얼거리더니 그 짐에 대해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잠시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다 떠나려는 남자의 등 뒤로 소녀가 물었다.

  “당신, 결국 나랑 놀아주지 않을 거야?”

  그러자 남자는 잠시 멈춘 뒤 고개를 살짝 돌려 소녀에게 대답했다.

  “고대여인숲의 주인이 나의 놀음을 필요로 하지는 않을 거라 생각한다.”

  남자가 소녀를 낯선 호칭으로 부르자 그녀는 여태 보여주던 생글맞은 웃음과는 전혀 다른, 기쁨과 슬픔이 동시에 어려 있는 신비한 미소를 얼굴에 띄우며 말했다.

  “그렇지… 그렇네. 오랜만에 너무 들떠서 실례를 범했어. 나를 잘 알아봐줬구나. 당신, 보는 눈이 있네.”

  소녀는 햇살을 받아 휘황하게 빛나는 길다란 금발을 뒤로 넘긴 후 마지막으로 말했다.

  “당신 말이 맞아. 그만 가도 좋아.”

  소녀의 허락에 남자는 깊이 허리를 숙이며 감사의 인사를 했다.

  “고맙소. 숲을 통과하게 해줘서.”

  소녀 또한 허리를 숙이며 화답했다.

  “고마워. 나의 숲을 방문해줘서.”

  서로 짤막하게 인사를 주고받은 후 남자는 싱그러운 나무들 사이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5월의 햇살이 은은하게 내리쬐는 숲 속에서, 그는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숲을 벗어나 왕국의 유서 깊은 수도로 발걸음을 옮겼다.

  남자가 떠난 자리에는 아름다운 은빛 날개를 지닌 나비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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