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자유의지는 없다

2021.07.30 02:2107.30

 

<자유의지는 없다>

 

 

1부 리벳 실험

 

 

 "초면이네만, 우리 대화가 끝날 땐 자네가 날 죽일 걸세. 장담하지. 내기를 해도 좋네."

 

 모니터 화면 속에서 필립이 말했다. 그는 칠십이라는 나이만큼 노쇠해 보였으나 눈빛은 형형하게 빛이 났다. 삶에 미련이 없는 듯 축 늘어진 어깨와는 대조적인 것이었다. 마치 허무를 통해 이치를 깨달은 현자의 모습 같았다.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는 청년은 당황하고 있다. 내가 저 자를 죽인단 말인가. 물론 그럴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청년은 이 마을의 경찰이니까. 그리고 산 속에 수상한 자가 살고 있다는 신고를 받고 여기까지 출동했으니까. 그리고 그 수상한 자가 하필이면 저 유명한 희대의 테러리스트 필립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저 노쇠한 테러범을 죽인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필립과 청년은 모니터로 대화를 하고 있는 중이다. 둘 다 이곳 폐산장 안에 있음은 분명하지만 둘 사이의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다. 필립이 어느 방에 있는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폐산장은 고성처럼 거대했고 방문과 복도는 미로를 암시하듯 셀 수 없이 놓여 있었다. 청년경찰이 산장의 응접실에 다다랐을 때는 텔레비젼만이 그를 반겼을 뿐이고 그 화면 속에 필립이 보였다. 그리고는 다짜고짜 청년에게 예언한 것이다. 본인을 죽일 것이라고.

 

 "내가 왜 당신을 죽여야 하죠? 아니, 그건 됐고. 신고가 접수됐으니 순순히 협조해주시죠."

 

 청년은 모니터를 보며 어색하게 말했다. 술취한 주민, 도박판의 싸움꾼 등 별의 별 사람들을 대응해 보았지만 모니터를 보며 공권력을 행사하게 될 줄 꿈에나 알았을까. 그것도 테러리스트를 상대로 말이다.

 

 "그러지 말고 자네 뒤에 거기, 소파에 앉게. 나처럼 말이야.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청년은 잠시 고민했다. 강하게 협조를 권고할 것인가. 아니면 그의 말을 따를 것인가. 고민은 길지 않았다. 어차피 그의 위치를 알 수 없는 이상 대화를 통해 협조를 유도하는 수밖에. 최소한 그가 어디에 있는지 힌트를 얻을 수도 있으니까. 청년은 못 이기는 척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는 산장 밖에서 대기하고 있을 동료에게 무전을 날렸다. 잠시 대기하라는 그의 목소리에 신중함이 실렸다. 무전을 날리는 청년의 모습을 본 노쇠한 테러리스트는 대화의 승낙으로 받아들였다.

 

 "자네, 경찰이니까 총은 갖고 있겠지? 실탄도 말이야."

 

 필립은 자신의 죽음을 장담하기라도 하듯 복선 같은 질문을 던졌다. 청년은 일단 응수해보기로 한다.

 

 "그야 물론. 하지만 쏠 일은 없을 겁니다."

 

 청년이 단호하게 대답했지만 필립이 가볍게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자네가 경찰이라 다행이군. 나는 내 스스로 죽을 생각이 전혀 없거든. 아니, 생각이라고 하면 안되겠어. 이건 선택의 문제가 아니니까. 스스로 죽을 만한 상황이 아니라는 것만 알아두게."

 

 필립의 말은 도무지 의미를 알 수 없는 것이었다. 대화를 시작한 이상 장단을 맞춰야겠다고 결심한 청년이 입을 열었다.

 

 "내가 왜 당신을 죽인다는 겁니까? 그래야 할 이유라도 있습니까? 당신이 테러리스트이긴 해도 내가 당신을 죽일 권리는 없습니다."

 

 목을 쭉 빼고 긴장한 듯 내뱉는 청년의 말에 필립은 여유있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보게, 젊은이. 질문이 틀렸네. '왜'가 아니라 '그럼에도'라고 해야 하네. 자네는 '그럼에도' 이 노인네를 죽인다, 이게 맞는 말이지."

 

 이 테러리스트는 무수한 세월을 쫓기며 살다가 결국 정신이 이상해지기에 이르렀다. 그런 생각이 청년의 머리를 스칠 때 필립이 다시 입을 열었다.

 

 "왜 '그럼에도'이냐. 내 몸 속에는 폭탄이 심어져 있거든. 심장이 멎는 순간 이 마을, 아니 이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들 엄청난 폭탄이지. 알겠나? 그럼에도 자네가 날 죽인다는 말이네. 폭탄이 터질 거라는, 이 노인네의 말을 듣고서도 말이야."

 

 청년은 착실한 경찰공무원이었다. 매사에 신중한 선택을 하는 것은 물론 사회에 불만도 없었다. 계속 되는 승진누락에 몹시 지쳐있긴 했지만 자신의 의무를 소홀히 하지는 않았다. 상대가 범죄자라 하더라도 유사시가 아닌 이상 폭력을 행사할 사람이 아니었다. 더구나 그것이 도시를 날려버릴 폭발로 이어진다면 말할 것도 없다. 반면 저 노인의 말은 진심인 것으로 보인다. 정말로 폭탄이 심어져 있을 것이다. 그는 충분히 그럴 만한 테러범이니까.

 

 "그럼에도 내가 당신을 죽인다고? 어처구니가 없네요. 그럼 어디 시험해 보죠. 과연 내가 당신을 죽일 지 그곳으로 안내해보시라고요. 거기가 어디죠?"

 

 "때가 되면 오게 되어 있네. 아직 한 시간 정도 남았거든."

 

 노인이 아홉 시를 가리키고 있는 괘종시계를 보며 말했다. 아직 한 시간이 남았다니. 한 시간 뒤에 내가 저 노인을 죽인단 말인가? 청년은 속이 거북해졌다.

 

 "협탁에 차가 있네. 한 모금하게. 해두는 게 좋을 거야. 독은 없네. 있다면 여기에 들어 있었겠지."

 

 "됐습니다. 얘기나 어서 하시죠."

 

 청년이 재촉했다. 필립은 청년이 차를 마시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이미 예상한 것처럼 시큰둥한 모습으로 차를 홀짝거렸다. 그는 모니터 너머에 있었지만 마치 청년의 모든 행동을 꿰뚫고 있는 것 같았다. 귀를 기울이지 않고도 정확히 청년의 말을 이해했고 곱씹을 시간도 없이 다음 말을 꺼냈기 때문이다. 잠깐의 정적이 이어진 뒤 필립이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

 

 그렇게 필립의 본격적인 화두가 던져졌다. 발광하는 눈빛과 함께.

 

 "자유의지를 믿는가?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해서 행동하는 것을 믿냐는 말이네."

 

 필립의 뜬금없는 질문에 청년경찰은 짜증이 날 만도 했지만 압도하는 필립의 눈빛 때문에 순순히 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마치 거부할 수 없는 무언가에 끌려가는 기분이다.

 

 "그야 당연합니다."

 

 청년이 명료하게 답하자 필립이 담담하게 반박했다.

 

 "아닐세. 자유의지란 없네. 내가 오늘 아주 중요한 걸 가르쳐 주는 구만. 수업료는 공짜. 단, 충격을 받아도 보상은 없음! 하하."

 

 필립의 말에 청년은 당황하면서도 호기심이 일었다. 필립의 말이 허투루 던지는 농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테러리스트 필립은 한편으로는 철학가이며 과학자임을 청년도 익히 알고 있었다. 삼십여년 전 필립이 각국의 기밀재산을 훔칠 때도 나름의 명분이 있었고 각국의 주요기관을 폭파할 때도 나름의 상징성이 있었다. 옳은 일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신출귀몰한 그가 겸비한 기술력과 고차원적인 사상은 세상에 강한 인상을 남기기에 충분했다. 따라서 그가 이런 질문을 한 데에는 지금의 상황과 결부된 모종의 의미가 있으리라.

 

 "자네 리벳 실험이라고 들어본 적이 있나?"

 

 필립의 말에 청년은 고개를 갸웃했다.

 

 "못 들어본 모양이군. 예컨대 자유의지가 존재하는가에 대한 논란을 일으킨 실험이지. 피험자의 앞에는 버튼이 놓여있네. 누르고 싶은 시점에 자유롭게 누르면 그만이야. 이때 피험자의 몸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과정을 관찰하는 거라네. 여기서 질문. 피험자가 버튼을 누르는 순간까지 일어나는 몸의 반응을 순서대로 말해보게."

 

 필립은 청년의 답을 기다리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청년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어안이 벙벙했지만 머뭇거림 끝에 입을 열었다.

 

 "그야 당연히 누르겠다는 생각을 하고 뇌에서 신호를 보내 손가락을 움직였겠죠."

 

 "좋은 답변이네. 상식적이고 논리적인 사람의 답변이야. 신선한 답을 할까봐 조마조마했네. '먼저 버튼을 눌러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뉴런의 전기신호를 손가락으로 보낸다. 버튼을 누른다.' 자네의 예상, 아니 모든 사람들의 예상이 그랬겠지. 하지만 실험의 결과는 달랐네. 피험자에게서 버튼을 눌러야겠다는 의지가 일어나기 전에 운동뉴런의 전기신호가 먼저 발생했지. 생각은 그 뒤에 일어나고 비로소 버튼이 눌러졌어. 이제 이 실험의 의미를 알겠나?"

 

 이번에는 청년의 대답에 머뭇거림이 없었다.

 

 "자유의지로 선택한 행동이 아니라는 얘기군요. 행동을 지시하는 게 본인 의지가 아니라 뉴런이라고?"

 

 청년의 말에는 비소가 섞여 있었다. 하지만 필립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진지하게 말했다.

 

 "그렇다네. 뉴런. 운명이라는 단어로 바꾸어 말한다고 해도 문장에 지장은 없지. 결국 자유의지란 존재하지 않고 우리는 운명의 노예일 뿐이라는 걸세."

 

 청년은 필립과의 대화에 회의를 느끼면서도 서서히 빠져들어가고 있었다. 그런 자신의 모습에 내심 놀라며 반박의 말을 꺼냈다.

 

 "하지만 그런 결론을 내리는 것은 비약인 것 같군요. 인간은 무수히 많은 고민과 선택을 합니다. 그 실험보다 훨씬 복잡한 상황을 하루에도 수십번 겪는다고요. 단순한 손가락 운동이랑은 비교도 안되는 상황들을 말입니다. 그럴 때마다 뉴런의 신호로 행동을 한다는 게 말이 안되죠."

 

 실로 그러했다. 청년이 이 폐산장에 당도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선택이 필요했을까. 수년 전 그는 심취했던 물리학을 내려놓고 경찰이 되기를 선택했다. 몇 달 전에는 애인과의 결혼을 결심했고 레스토랑에서 멋지게 프로포즈를 했다. 최근에는 결혼이 무산될 만큼 심하게 다투었다. 예식과 관련된 양가 부모님의 상이한 의견 사이에서 현명하게 대처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결혼절차에 대해 무신경했던 것도 사실이다. 어쩌면 그것 역시도 청년의 선택이었다. 승진에 대한 고민이 더 컸기 때문이다. 다툼이 커지던 중 그녀의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해 휴양지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계획에 맞춰 휴가일정을 잡았으며 그에 따라 야간근무 편성표를 조정했다. 그렇게 오늘이 야간근무일이 되었고 주민신고를 받아 이곳에 당도한 것이다. 자신이 아닌 동료경찰을 차에 남겨두기로 결정했으며 지금은 필립의 말을 순순히 들어보기로 결심한 상태이다. 이 모든 것은 복잡한 경우의 수들 사이에서 고민 끝에 내린 선택들이다. 모든 것이 의지의 산물인 것이다.

 

 "자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할 때가 된 것 같구만."

 

 필립이 담담하게 말했다. 청년은 이제 더할 나위없이 궁금해졌다. 저 노쇠한 테러범의 인생이 자유의지 따위와 어떤 관련이 있단 말인가. 또한 이 대화가 어째서 그의 죽음, 그것도 나로 인한 죽음으로 이어진단 말인가.

 

 "알다시피 나는 테러리스트로 불려왔네. 삼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말일세. 하지만 나는 테러가 아니라 혁명을 일으키려 했어. 세상을 보게. 정치는 제대로 된 가치 위에 세워져 있지 않아. 반대세력을 헐뜯고 적으로 만들어 그 위에다 세워 놓았지. 종교는 또 어떤가. 코흘리개 아이 때부터 공포를 주입하고 이분법적인 맹신을 신앙으로 여기게 만드는게 무슨 신성이란 말인가. 그게 어찌 선의이고 지성이겠나. 전쟁은 줄어들었을까? 천만에. 교묘해졌을 뿐이지. 하지만 그 누구도 이런 것을 입에 올리지 않아. 본질을 아는 자들조차 말이야. 마치 마녀사냥을 묵인하는 빈민가의 농부들처럼 말일세. 국가의 은밀한 조직이 뒤에서 움직이고 있어서만은 아니네. 이미 인간은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있지. 그게 더 편하니까. 이번 달에는 뭐가 유행하는지, 집값은 올랐는지 떨어졌는지 그런 게 더 중요해진 거야. 알겠나? 인류는 고인 물처럼 썩어가고 있단 말일세. 그리고 썩은 물은 덜어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었어. 모두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만이 인류에게 살 길이라 믿었지."

 

 필립의 격앙된 목소리는 여전히 테러리스트로서 건재함을 증명하는 듯했다. 청년은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들어야 할까,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역시 내키지는 않았다. 필립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게 내 여정은 시작이 되었네. 자네도 알겠지만 각 나라의 정부들은 자신들의 이권을 지킨답시고 여러가지 기밀재산을 쌓아두고 있지. 나는 그것들을 훔치길 좋아했네. 그걸 테러라고 부르다니. 물론 훔치는 과정에서 몇번은 폭파범이 되어야 하긴 했지만. 자네도 공무원이니 근현대사는 열심히 공부했을 테고, 익히 알고 있겠지. 내 활약상을 말이야. 하하."

 

 청년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거두절미하고 모든 이권에는 명분이 필요해. 국민들을 수긍시키고 적국을 고립시키기 위해서지. 명분을 만들기 위해서는 수단이 필요하고 그 수단은 대체로 기밀재산으로 보관되어 있어. 적국이나 반대세력에 침투해서 거짓정보를 심는 프로그램 같은 것, 우리의 치부나 저들의 치부가 기록된 기밀문서 같은 것들도 다 그런 예라고 할 수 있네. 레이더에 잡히지 않는 무시무시한 드론을 만들어 세상을 감시하기도 하지. 그런 걸 훔쳐서 세상에 까발리면 모두가 믿어왔던 시스템이 사기었음이 드러나는 거야. 나는 언제나 그것이 즐거웠네."

 

 열변을 토하던 필립이 잠시 뜸을 들이기 시작한 것은 그 무렵이었다. 그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도 쉽게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중요한 본론으로 넘어가려 하고 있음을, 청년은 직감할 수 있었다.

 

 "20년 전이었던가. 나는 세계비밀정부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냈어. 그리고 그들로부터 '그걸' 훔쳐버리고 만 거야. 완전히 우연으로 말이지."

 

 모니터 너머의 필립은 청년이 앉아있는 응접실보다 더 먼 곳을 바라보는 듯했다. 그가 이어서 입을 열었다.

 

 "양자컴퓨터로 만든 '타임뷰어'를 말일세."

 

 

2부 타임뷰어

 

 

 청년경찰은 귀를 의심했다. 생각지도 못한 단어가 나왔기 때문이다. 필립이 테러리스트로 활동하면서 훔친 기밀재산이 어떤 것인지는 대체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타임뷰어는 예상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민간인 사찰이나 역사조작에 관련된 문서와는 다르다. 국민감시프로그램이나 핵미사일 버튼과도 다르다. 타임뷰어라니. 지금 제대로 들은 것이 맞기는 한 걸까.

 

 "놀랄 것 없네. 자네가 들은 것이 맞아."

 

 필립이 담담하게 말했다. 정말로 타임뷰어를 훔쳤단 말인가. 아니 그 전에, SF영화에나 나올 법한 타임뷰어가 실제로 존재한단 말인가. 타임뷰어는 쉽게 말해 미래를 보는 장치이다. 양자컴퓨터를 통해 세상의 모든 정보를 저장하여 인과관계를 도출한다. 그리고 미래를 오차없이 예견한 뒤, 그 정보를 시각화한다. 한 마디로 예언자의 눈인 셈이다. 이것이 음모론자들의 입으로 전해지던 타임뷰어였다.

 

 "언뜻 생각해보면 경우의 수가 너무 많아서 미래를 점치는 게 불가능하다 여길 지도 몰라. 하지만 셀 수 없이 많은 사건들이 서로 얽혀 있다면. 인과는 하나의 경우로 이어지고 또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거지. 텅 빈 체스판을 생각해보게. 퀸 하나가 그 위에 놓여있다면 그것이 움직일 수 있는 경우의 수는 무수히 많지. 하지만 앞길을 차단하고 있는 나이트가 다른 싸움을 하고 있고 뒷쪽에선 킹이 위태롭게 버티고 있다면. 퀸이 움직일 수 있는 경우의 수는 좁혀지지 않는가. 무수히 많은 사건들이 얽혀서 만들어지는 미래도 이와 같네."

 

 필립의 말에 혼란스러워진 청년은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 팔짱을 끼고 있었다. 간신히 생각을 정리한 그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체스에는 기보가 있죠. 기보가 있다는 건 어떻게 수를 두느냐에 따라 무수히 많은 결과물이 나올 수 있다는 뜻입니다. 미래가 결코 하나로 정해질 수 없듯이 말이죠."

 

 청년의 말에 필립이 감탄하듯 미소를 지었다.

 

 "흠! 꽤 멋진 응수구만. 내 비유가 빈약했던 걸 용서해주게. 자, 그럼 이건 어떤가. 생명이 없는 체스 말이야 자네 말대로지만. 만약 그 말이 생명체라면 어떨까. 고유하면서도 복잡하게 나열된 DNA, 조상으로부터 이어져 온 본능, 트라우마로 형성된 습관 따위로 얽힌 생명체라면 말일세. 그 말의 움직임은 극도로 한정되지 않겠나?"

 

 청년은 여전히 반박하고 싶었다. 강한 반발심이 그의 머리를 죄어오고 있었으나 딱히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그저 혼란이 가중될 뿐이었다.

 

 "자네가 이쪽으로 넘어오기도 전에 머리가 터져 죽으면 나만 곤란하지. 어려운 얘기는 여기까지만 함세. 잊어버리게. 중요한 건 내가 타임뷰어를 훔쳤다는 사실이야. 정확히는 타임뷰어를 원격으로 조정하고 볼 수 있는 수신장치지만 말일세. 타임뷰어 본체에 해당하는 슈퍼컴퓨터를 끌고 나갔다간 고속도로 몇개가 개간지가 됐겠지."

 

 청년은 묵묵히 필립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필립의 말은 혼돈 그 자체였다. 하지만 서서히 질서를 잡아가는 것 같기도 했다.

 

 "타임뷰어 때문에 내 인생은 완전히 바뀌어 버렸네. 나는 미래의 노예가 되었어. 정확히는 노예임을 깨달은 거지만. 그때부터 내가 살아온 이십 년의 세월은 죽은 삶이 되어 버렸지. 자네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걸세."

 

 "타임뷰어를 열어봤습니까?"

 

 청년은 이 질문이 문법적으로 맞는 것인지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이미 억누를 수 없는 호기심이 그를 사로잡고 있었다.

 

 "물론이지. 나는 미래를 보았네. 자네와 내가 있는 이곳, 이 도시가 쑥대밭이 되어버린 미래 말이야."

 

 흐릿했던 이야기의 윤곽이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그것을 느낀 청년은 왠지 모를 오싹함을 느꼈다.

 

 "방금 자네는 알게 됐을 걸세. 그래. 미래에 이 도시가 쑥대밭이 된 이유는 내 몸 속의 폭탄이 발동했기 때문이야. 내가 죽는다는 말이지. 덤으로 자네도. 바로 이곳에서. 바로 한 시간도 남지 않은 미래에 말이야."

 

 이 거대한 이야기 속에 자신이 속해있다니, 청년에게는 거북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필립의 말을 믿을 수는 없었으나 그래도 거북한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청년은 이야기의 윤곽을 잡기 위해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어째서, 몸 속에 폭탄을 심은 겁니까? 그 말을 어떻게 믿어야 할 지 모르겠군요."

 

 이어서 필립이 망설임 없이 입을 열었다.

 

 "나는 타임뷰어를 훔친 그 날부터 공격적인 추적에 시달려야 했지. 사실 좀 힘들었네. 나는 보기보다 죽기 싫어하는 타입이거든. 세상을 바꾸기 전에는 특히나 말이야. 그래서 폭탄을 몸에 심었네. 그리고 세상 기관이란 기관에는 다 떠벌이고 다녔지. 날 죽이면 폭탄이 터진다고 말이야. 그 와중에도 나는 타임뷰어를 통해 미래를 봤어. 호기심을 억누를 수가 없었거든. 누군들 안 그렇겠나. 미래를 볼 수 있는 장치니까 말일세. 엄밀히는 타임뷰어 원격장치이기 때문에 내가 그걸 사용할 때마다 세계비밀정부의 감시망에 걸리곤 했어. 쉴 새 없이 도망쳐야 했지. 도망친 뒤에 타임뷰어를 엿보고, 다시 도망치는 삶의 연속이었네. 그때마다 내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게 바로 폭탄 때문이었고."

 

 필립이 자랑스럽다는 듯이 배를 어루만졌다. 그 안에 폭탄이 잠들어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확인한 미래는 도움이 됐습니까? 폐허가 된 도시만 보진 않았을 텐데요. 그보다, 미래를 바꾸려는 노력은 해봤습니까?"

 

 "나는 그 지옥의 장면을 보고 또 봤네. 원하던 모습은 아니었어. 어느 시점엔가, 폭탄이 터지지 않는 미래를 만들고 싶어지더군. 그때는 나도 자네처럼 순진했지. 미래를 바꿀 수 있다고 믿었으니까. 심어둔 폭탄을 제거하려고 해봤지만 그건 너무 위험해서 실패로 끝났어. 그래서 괜히 예정에 없던 행동을 해보기도 하고 외딴 섬에서 은둔생활을 해보기도 했지. 이곳으로는 돌아오지 않을 작정으로 모든 인력망을 끊어버리기도 했다네. 그런데도 미래가 바뀌지 않는 거야. 타임뷰어의 결과는 오차 없이 같았어. 이 도시와 함께 자폭하는 결과가 반복됐지. 그래서 용기를 냈다네. 사건의 직접적인 연결고리. 즉, 폭탄이 터지는 바로 이 순간을 확인해보기로 말일세."

 

 필립이 확인한 이 순간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지금 현시점을 말하는 것이리라. 그 예견된 상황이 지금과 오차없이 같을까. 청년은 의문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그런 생각도 잠시, 필립의 다음 말이 이어졌다.

 

 "화면 속에서 나는 이 도시의 작은 마을에 있었어. 역시나였지. 결코 돌아오지 않으려 했던 이 도시로 돌아와버린 거야. 정확히는 산속 깊은 곳에 버려진 폐산장 같았지. 웬만한 별장보다 큰 데다 미로같은 문들로 가득했고 말이야. 며칠이 지났을까. 소박한 시골 경찰이랑 모니터로 대치하고선 거창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더군. 끝내 경찰은 늙은 혁명가를 죽이고 말지. 그런데 말일세. 화면을 다 보고 나니까 한 가지 의문이 들더군. 이 상황을 전부 본 내가 이 상황을 반복할 리가 있겠냐는 의문 말이야. 이미 상황을 인지한 내가 이 장면을 피하지 못할 이유가 있겠냐는 말일세. 결론은 자네도 알고 있겠지. 우리 둘 다 여기 있잖나. 피할 수가 없었네."

 

 "어째서, 피할 수가 없단 말입니까?"

 

 청년이 상기된 표정으로 물었다.

 

 "이 장면을 확인한 뒤로 몇 번이나 실험을 해 봤지. 추적 당할 걸 알면서도 그때부턴 좀 과감해졌다네. 거의 한 달 단위로 타임뷰어를 확인했으니까. 먼 미래가 아니라 당장 몇 보 앞의 미래를 여러 번 확인해 본 걸세. 약간의 미래라면 바꾸는 게 더 수월할 지도 모르니까. 그럼 나비효과처럼 많은 것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

 

 필립이 다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하지만 바뀌는 게 없었네. 나는 화면에서 본 대로 네바다에 있었고 우한에 있었고 가자지구에 있었지. 그리고 예정된 사람을 만나고 있었네. 행동의 목적도 대화의 내용도 바뀌는 것이 없었어. 내 실험은 더 과감해지기 시작했네. 당장 몇 주 뒤, 그리고 하루 뒤, 결국엔 몇 분 뒤까지 확인해 보았네. 이제 세계정부에 붙잡히든 말든 그런 것은 안중에도 없었거든."

 

 청년은 필립의 다음 말을 예상할 수 있었다. 믿을 수가 없다. 하지만 소름이 끼쳐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자네도 예상할 수 있겠지. 아무 것도 바뀌지 않았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걸까. 나는 내가 확인한 미래에 관해서는 어떻게든 바꾸려고 노력했네. 말 그대로 어떻게든 말이야. 차가 쌩쌩 달리는 도로에 뛰어들려고도 해봤고 고성방가를 지르려고도 해봤지. 그 무엇도 되지가 않았네. 내 발은 예정대로 움직이고 내 입은 예정대로 말을 했지. 나라는 생명체가 할 법한 딱 그만큼의 행동만이 반복될 뿐이었네. 마치 뇌 속의 뉴런이, 아니 운명이라는 놈이 나를 조종하는 것 같았지."

 

 청년은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그때부터 알게 되었네. 이십 년 가까이 전에 나는 깨달아버린 거야. 자유의지란 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청년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자유의지가 없다면, 왜 내가... 아니 모든 사람이 그걸 못 느낀다는 겁니까? 지금도 나는 분명하게 내 의지로 말을 하고 있는 걸 느끼고 있습니다."

 

 청년의 말에 필립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자네 그걸 진정으로 확신하나? 자네가 지금 스스로의 의지로 놀라고 있고 놀란 것을 말의 형태로 내뱉고 있다는 것을 진정으로 확신하느냔 말일세. 자네가 자네 감정을 통제하는 게 가능할 거라 믿나? 자네는 사랑을 결심하면 그때부터 사랑을 하고 타성에 젖겠다 결심하면 그때부터 지루함을 느끼나? 일개 뉴런 하나 마음대로 통제할 수 없는 자네가? 인간이?"

 

 청년이 생각하기에도 필립의 말은 설득력이 있었다. 하지만 강력한 반발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청년은 자유의지를 분명하게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립은 청년의 희망을 무너뜨릴 기세로 말을 이었다.

 

 "그럼에도 자유의지를 느끼고 있다? 그 말이 하고 싶은 건가? 그렇게 느끼는 이유는 단 하나일세. 자네가 미래를 본 적이 없기 때문이지. 알 수 없는 미래가 펼쳐져 있다는 믿음 때문에 스스로 내린 결정이라 착각하는 거라네. 매순간 뇌는 작동을 하고 있으니 온전히 자신의 판단이라 믿는 거야. 하지만 리벳 실험을 기억하는가. 뇌라는 것은 이미 내려진 명령을 구체화하는 도구에 불과하네. 그것을 자발적인 선택이라고 믿는 거야. 하지만 우리의 행동은 이미 정해진 기보 위에 놓여있네."

 

 청년의 혼란은 극에 달했다. 가능하다면 이제 호기심을 내려놓고 싶었다. 그게 의지로 가능한 일이라면 말이다. 잠깐의 정적이 이어진 뒤 필립이 입을 열었다.

 

 "자! 슬슬 다음 단계로 넘어갈 때가 된 것 같군. 내가 있는 곳을 찾아 보게! 짐작하다시피 이 산장은 미로처럼 얽혀 있네. 정해진 미래라면 자네가 내 방을 찾지 못할 가능성은 없지. 그저 몸이 이끄는 대로 문을 선택하고 내가 있는 곳까지 찾아와보게. 뭐, 미래가 바뀐다면 그것도 좋지. 이 방을 찾은 자네가 날 죽이지 않고 조용히 연행해 간다면 그거대로 좋은 일이 아니겠나.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말일세."

 

 청년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고민의 여지가 없었다. 그리고는 수 없이 많은 방문들 사이에 멈춰 섰다. 테러범의 손 안에 놀아나는 꼴이 된 것 같아 거부감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다. 이 미로 속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연행할 대상을 찾는 것이 경찰의 의무여서만은 아니다. 이미 그는 필립과의 대화에서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린 것이다. 맹신이라고 해도 될 만큼 굳건하게 믿어왔던 것들을 필립이 뒤흔들어 버린 것이다. 어떤 결과가 펼쳐지든 확인해야만 한다. 청년이 비장한 마음으로 방문 하나를 선택했다. 열고 들어가니 또 하나의 방문이 보인다. 그곳으로 들어가니 복도가 나온다. 복도는 또 다시 두 갈래의 길로 나뉘고, 선택한 길에서 또 다시 펼쳐지는 여러 개의 방문. 열고. 또 연다. 들어가기를 반복한다. 막힌 방에서는 도로 나온다. 들어가고. 나오고. 선택의 연속이다. 점점 방문의 수가 줄어들고 하나의 방문만이 보이기 시작한다. 청년은 직감했다. 바로 이곳이다.

 

 

3부 오컴의 면도날

 

 

 청년이 한 손으로 총을 잡고 한 손으로는 문고리를 잡았다. 진짜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은 지금부터일 지 모른다. 긴장이 그의 몸을 감쌌다. 심호흡을 한 번 한 뒤 황급히 문을 젖히고 총을 겨누었다. 예상대로 그의 눈앞에 응접실이 펼쳐졌다. 모니터에서 본 장소 그대로였다. 가운데에 보이는 소파에 필립이 앉아 있다. 그가 입을 열었다.

 

 "순진한 행동은 하지 말게. 자네 의지대로라면 총을 겨누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청년은 여전히 긴장하고 있었다. 필립의 말이 머리로 들어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 천천히 주변을 살펴보니 위협이 될 만한 무기나 장치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내가 들고 있는 이 총이 우리 모두에게 위협이 될 뿐이다. 이상한 말이지만 총을 쏘지 않기 위해 이곳까지 왔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천천히 총을 내려 놓았다. 하지만 긴장은 계속 이어진다. 화면을 통해 비현실적인 얘기를 들었던 청년은 지금 이 공간이 환상인 것처럼 느껴졌다.

 

 "어떤가. 내 말대로 자네는 결국 나를 찾아왔네."

 

 필립의 말에 청년이 숨을 가다듬은 뒤 말했다.

 

 "시행착오가 많았습니다. 예언대로라면 문을 틀리는 실수는 하지 않았을 텐데요."

 

 청년의 말에 필립은 괘종시계를 가리켰다.

 

 "보게. 자네는 정해진 시간에 맞춰서 도착했어. 시행착오까지 포함해서 예정대로 된 걸세. 상이라도 주고 싶구만. 차 밖에 없네만."

 

 시계는 열 시가 되기 이십분 전을 가리키고 있었다. 왠지 이번에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싶어졌다. 긴장을 누그러뜨리고 싶었다. 뿐만 아니라 이제는 필립이 적이자 동지인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들기도 했기 때문이다. 청년은 조용히 차를 들고 맞은 편 소파에 앉았다. 차를 한 모금 마시니 긴장이 조금 누그러졌고 주변이 더 잘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모니터 한 대가 범상치 않게 생겼음을 알 수 있었다.

 

 "설마 저게..."

 

 "눈치 챘나? 저게 바로 타임뷰어 원격장치일세."

 

 정말로 여기에 있었다. 미래를 볼 수 있는 눈이 말이다.

 

 "이제 마지막 관문이네. 자네는 지금부터 저 모니터의 영상을 보게 될 거야. 최후의 십 분간 일어날 일들이지. 과연 자네가 이걸 보고 미래를 바꿀 수 있을까."

 

 필립이 잠시 허탈하게 웃은 뒤 말을 이었다.

 

 "이상하구만. 이십 년간을 그 지옥 속에서 살았는데. 이상하게 또 기대를 하게 돼. 이 기대 역시 내 의지는 아니겠지."

 

 필립이 리모컨에 손을 가져갔다. 타임뷰어의 원격모니터를 조종하는 용도인 듯하다. 그것을 만지작거리던 필립이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입을 열었다.

 

 "자네는 태엽이 감긴 인형일세. 정해진 행동만을 할 뿐이지. 어느 날 자네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어. 다른 힘에 의해서 움직이는 껍데기에 불과하단 것도 알게 되었지. 감당할 수 있겠는가? 나는 이십 년을 그렇게 살았네. 이제 자네 차례일세. 자네는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을까."

 

 필립이 리모컨을 들어 모니터의 화면을 재생시켰다. 예상대로 이 방 안의 모습이 나오기 시작했다. 역시 필립과 청년이 마주 앉아 있었는데 행동이 지금과는 미세하게 달랐다. 아마도 십분 뒤의 상황이라 그럴 것이다. 화면은 여러 각도로 구현이 되는 것 같았다. 필립이 리모컨으로 각도를 조정하자 보기 좋은 구도가 완성되었다. 자세히 보니 화면 속 청년은 자신의 휴대폰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벨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청년은 곧바로 수신버튼을 눌렀다. 화면으로 보기에도 전화를 예상한 움직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화면 속 청년이 휴대폰 너머의 목소리와 대화를 하기 시작한다.

 

 "응, 자기야. 응… 그래. 근무 중이지. 말했었잖아. …응. 나도 웨딩촬영 알아 보는 중이야. 내가 뭘 하면 될까? …하지만 근무 중이야. 상황을 알잖아. 절대 그럴 수 없는 거."

 

 화면 속에서 통화를 하던 청년이 잠시 말이 없다. 하지만 곧이어 다시 대화가 이어진다.

 

 "…어떻게… 이해해야 할 지 모르겠네. 부모님을 어떻게 설득하지? …잠깐만 시간 좀 줄래? 우리 결혼이니까 더 신중하게 정하고 싶어. …하지만 내가 꼭 정해야 되는 건 아니지 않아? 자기가 직접 알아봐도 될 것 같은데. …자기도 확인해 봤어? 그것 말이야. …알았어. 신중하게 결정하도록 할게."

 

 잠깐의 침묵.

 

 "내가 결혼 준비에 소홀했던 거 알아. 하지만 말이야. 이번 일만 잘 마무리가 되면, 혹시라도 정말 잘 마무리가 된다면, 자기를 더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 지도 몰라. 일단 지금으로선 이 말만 할게. 정말 사랑해. 자기를 만난 건 내 인생에서 가장 잘 선택한 일이야. 어서 보고싶다. 끊을게."

 

 전화가 끊어진다. 그리고 청년은 자리에서 일어나 맥락없이 필립에게 총을 겨눈다. 그 모습은 정말 자신의 의지가 아닌 것만 같았다. 화면을 보고 있던 청년은 이해할 수가 없다. 애인과의 통화는 여느 때와 같은 일상적인 대화였다. 마지막 몇 마디가 조금 의미심장하긴 했으나, 그가 할 만한 평범한 말들이었다. 어떤 것도 필립을 향해 총을 겨눌 만한 동기가 될 수 없었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한단 말인가.

 

 "몇 번이나 돌려봤던 장면이네만, 나도 이해할 순 없네. 이게 대사건의 연결고리야. 이제 곧 시작이지. 어서 준비하게."

 

 "뭘…"

 

 어리둥절한 청년에게 필립이 말했다.

 

 "뭐냐니. 전화 안 받을 겐가?"

 

 그렇다. 타임뷰어의 영상대로라면 이제 곧 전화를 받게 될 것이다. 청년이 자신의 휴대폰을 꺼내 바라보기 시작한다. 곧이어 휴대폰에서 벨이 울렸다. 수신버튼을 누른 뒤 귀에 가져다 댔다. 이번에는 리허설이 아니다. 실전이다. 대화의 내용보다 대화의 방향이 중요하다. 예언과 다른 대화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미래를 바꾸는 지름길이 열릴 것이다.

 

 "응, 자기야."

 

 청년이 자신의 말에 조금 놀란다. 타임뷰어로 확인했던 자신의 첫마디와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애인과 전화를 할 때면 늘 그렇게 시작했다는 것을 상기하자 조금 진정이 될 수 있었다. 오히려 정말 놀란 것은 전화기의 반대편에서 들려 온 목소리 때문이었다.

 

 "계속 애인과 통화를 하듯이 말하면서 들으십시오."

 

 반대편에서 들려 온 목소리는 애인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자신보다 조금 나이가 많을 것 같은 중년남자의 목소리였다. 약간의 다급함과 단호함이 묻어 있었다.

 

 "나는 세계비밀정부요원입니다. 시간이 없으니 여러가지를 생략하고 말하겠습니다. 적당히 대답하며 들으세요."

 

 이제 타임뷰어에 이어 세계비밀정부까지 자신 앞에 정체를 드러냈다. 오늘이 대사건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날이긴 한 가보다. 그렇게 생각한 청년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그게 가능한 지는 모르겠지만.

 

 "응… 그래. 근무 중이지. 말했었잖아."

 

 청년이 대답했다. 하지만 대답만 했을 뿐, 머릿속은 새하얘졌다. 전화를 받기 전만 해도 당연히 애인과의 통화가 될 줄 알았다. 그리고 타임뷰어에서의 상황과 다른 방항으로 나아갈 수 있을지에 대한 궁금증으로 가득했었다. 의도적으로 다른 대화를 유도해 보겠다는 의지도 있었다. 하지만 예상하지 못한 전개에 두뇌회로가 멈춰 버린 것이다. 게다가 애인과 통화하는 척을 하라니. 이래서야 다른 대화를 연출할 수가 없지 않은가.

 

 "지금 당신 앞에 있는 필립은 심각한 테러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아마 타임뷰어와 관련된 이야기를 했겠죠. 그가 한 말은 어느 정도는 사실이고, 어느 정도는 거짓입니다. 듣고 있습니까?"

 

 "응. 나도 웨딩촬영 알아 보는 중이야. 내가 뭘 하면 될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필립을 당장 죽여야 합니다. 당신 총으로요. 그가 긴 대화를 유도한 이유는 시간을 끌기 위해섭니다. 최근에 그는 생각만으로 조종할 수 있는 최첨단 드론을 훔쳤습니다. 그 드론이라면 그는 통제가 불가능한 학살범이 될 겁니다. 하지만 아직 시간이 있습니다. 필립이 드론과 동기화가 되려면 시간이 걸리는데, 아마 열 시부터 가능해질 것 같군요. …십 분도 안 남았네요."

 

 청년은 혼란스러웠다. 이젠 필립을 죽여야만 하는 상황이라니. 하지만 신중하게 대화를 이어갔다.

 

 "하지만 근무 중이야. 상황을 알잖아. 절대 그럴 수 없는 거."

 

 말을 하고 보니 이번에도 타임뷰어 상에서 자신이 했던 말과 같았다. 하지만 이것이 최선임을 청년도 부정할 수가 없다.

 

 "필립 몸 속에 있는 폭탄을 말하는 거군요. 그건 거짓입니다. 그런 위력적인 폭탄을 몸에 심고 수 십년을 살 수 있는 인간은 없습니다."

 

 역시 그랬단 말인가. 전대미문의 테러리스트에게 자신도 당한 것이란 말인가. 청년은 무의식적으로 필립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필립의 눈빛이 범상치 않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마치 눈동자로 자신에게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속지 마라.'

 

 라고 말이다.

 

 "어떻게… 이해해야 할 지 모르겠네. 부모님을 어떻게 설득하지?"

 

 "시간이 없습니다. 그냥 믿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드론이 당신을 죽이고 도시도 쑥대밭이 될 겁니다. 필립은 유유히 사라지겠죠. 한 가지 정도는 보장할 수 있겠네요. 우리는 세계비밀정부이고 절대적인 힘이 있습니다. 당신은 몇년 째 승진이 누락되었던데 일개 승진 그 이상을 드리죠. 바라는 것이 무엇이든 말입니다. 당신이 필립을 죽여주기만 한다면요."

 

 쉴 새 없이 폭격하는 중년남자의 말에 청년은 쉽게 답할 수 없었다. 그 와중에도 필립은 강한 눈빛으로 청년을 바라보고 있다. 청년은 지금 시험대에 올라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한단 말인가. 세계비밀정부라면 테러리스트보다는 신뢰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세계비밀정부가 이렇게 쉽게 신분을 노출하는 것이 가당한 일인가. 어쩌면 타임뷰어의 실체를 덮기 위한 수작이 아닐까. 내가 필립을 쏘도록 유도하고 도시가 폭발한다면 타임뷰어와 자신들의 존재를 손쉽게 숨길 수 있으니 말이다. 세계비밀정부라면 그 정도의 일을 벌일 만하지 않을까. 하지만 세계비밀정부의 말이 사실이라면? 나 역시 공익을 위해 이곳에 있는데 테러범을 믿는 멍청한 짓을 저지르는 바람에 일이 커진다면? 군사드론이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걷잡을 수 없는 학살로 이어진다면? 그런 우려와 동시에 한 가지 기대가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일개 승진과 비교할 수 없는 것을 준다니. 늘 그가 원했던 기회란 이런 것이 아니었던가.

 

 '맙소사…….'

 

 청년은 당혹감을 느끼면서도 기가 찼다. 일개 시골 경찰인 자신이 이런 엄중한 사건 속에 던져질 수 있단 말인가. 역사를 뒤흔들 수 있는 절체절명의 순간, 그 한 가운데에 말이다. 순간 애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내가 얼마나 가치있는 인간인지는 몰라도 내게는 지킬 것이 많이 있다. 그렇게 생각한 청년이 다시 신중해지기 위해 애를 썼다.

 

 "잠깐만 시간 좀 줄래? 우리 결혼이니까 더 신중하게 정하고 싶어."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어쩔 수 없군요. 하지만 서둘러야 합니다. 열 시가 되면 되돌릴 수 없습니다. 혼란스러울 수록 단순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하지만 내가 꼭 정해야 되는 건 아니지 않아? 자기가 직접 알아봐도 될 것 같은데."

 

 청년이 그렇게 말을 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왜 자신의 손으로 결판을 지어야 된단 말인가. 세계비밀정부가 직접 나서지 않는 이유는, 역시 도시가 폭발하기 때문일까. 청년에게 있어 이 문제만 해결이 된다면 세계비밀정부를 믿고 싶었다.

 

 "우리는 비밀정부입니다. 웬만해선 직접 나서지 않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이미 결정을 한 것 같은데요. 당신은 우리를 믿기로 이미 결정했을 겁니다. 지금 당신이 머리로 하고 있는 고민은 결정을 위해서가 아니라, 어떻게 합리화할지에 대한 고민이죠. 선택은 이미 끝났을 겁니다."

 

 "자기도 확인해 봤어? 그것 말이야."

 

 청년이 말한 '그것'이란 타임뷰어를 의미했다. 휴대폰 너머의 중년남자도 그 뜻을 곧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조금의 정적이 있은 후 중년남자가 입을 열었다.

 

 "저희는 타임뷰어를 쉽게 확인하지 않습니다. 최고위층들만 확인을 하지요. 다만……."

 

 중년남자가 한숨을 쉬며 뜸을 들인 뒤 말을 이었다.

 

 "이 말은 할 수 있겠네요. 아마도 일개 요원인 제 선에서 이 사건이 맡겨졌다는 것은, 상황이 심플하게 돌아갈 거라는 예견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아마도 당신은, 필립을 쏠 겁니다."

 

 역시 그런 건가. 저 타임뷰어라는 판도라의 상자는 절대적인 것인가. 청년은 지금까지의 통화를 반추해 보았다. 타임뷰어 상의 자신과 다른 것이 있었던가. 모든 것이 같았다. 상황을 반전시킬 꾀를 부릴 마음의 여유도 겨를도 없었다. 그럼 이 모든 것은 역시 내 머리의 판단이 아니었단 말인가. 이미 정해져 있을 뿐, 뉴런의 작용에 불과하단 말인가. 그럼 내가 고민하고 있는 이 모든 것은 무슨 소용이 있는 거지? 거북하다. 이대로라면 삶의 목적을 잃어버릴 것만 같다.

 

 "이제 정말 전화를 끊어야 합니다. 당신과의 대화는 모두 녹음 되고 있습니다. 정당방위의 증거로써 당신 국가의 최고위층만 확인하게 될 겁니다. 마지막으로 할 말 있습니까?"

 

 중년남자의 말에 청년은 모든 걸 내려놓고 이 순간에 몸을 내맡기기로 한다.

 

 "알았어. 신중하게 결정하도록 할게. 내가 결혼 준비에 소홀했던 거 알아. 하지만 말이야. 이번 일만 잘 마무리가 되면, 혹시라도 정말 잘 마무리가 된다면, 자기를 더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 지도 몰라. 일단 지금으로선 이 말만 할게. 정말 사랑해. 자기를 만난 건 내 인생에서 가장 잘 선택한 일이야. 어서 보고싶다. 끊을게."

 

 청년은 스스로의 감정에 따라 서슴없이 말을 흘려보냈다. 그리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필립에게 총을 겨눈다. 청년은 더 이상 이 모든 상황이, 자신의 행동이 놀랍지 않다.

 

 "역시 거역할 수 없는 건가. 타임뷰어는."

 

 필립이 낙담하듯 말했다.

 

 "미래라는 건 말일세. 역시 다시 쓸 수가 없네. 모든 건 정해져 있으니까. 타임머신이 생겨서 과거로 간다해도 과거를 더 잘 이해하게 될 뿐 바꿀 수는 없지. 사람들은 언제나 시간여행을 바랐어. 과거를 바꾸고 싶은 욕망 때문이지. 하지만 시간여행에는 언제나 역설이 존재해. 신이 내려와도 절대 해결할 수 없는 역설 말이야. 자신이 과거로 돌아와 미래를 바꾸면 더 이상 미래의 자신은 존재할 수 없어. 그럼 시간여행을 한다는 전제조차 사라져버리지. 이 모순을 해결하려고 사람들은 복잡하기 짝이 없는 가설들을 만들었지. 미래를 바꿀 때마다 우주가 분기한다느니, 부분적인 것만 바꿀 수 있다느니. 예외가 있다느니. 하지만 진리는 언제나 단순해. 미래는 바꿀 수가 없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자유의지가 없다. 과거로 돌아가도 같은 상황을 만들어낼 뿐이다. 이것만 받아들이면 모든 것이 깔끔해지지. 진리란 그런 거야. 자네의 총이 그걸 말하고 있어."

 

 오컴의 면도날. 청년은 총을 겨눈 채로 그 단어를 곱씹었다. 예전에 물리학도였던 당시 자주 인용했던 논리법칙이었다. 면도날로 군더더기를 베어낸 듯이 단순한 가설일 수록 사실에 가깝다. 복잡한 전제와 예외법칙을 덧대야 한다면 그것은 이미 진리에서 멀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사람 눈의 신경다발이 비효율적으로 생긴 건 불완전함을 상기하라는 신의 가르침도 아니고 복잡한 사건이 생겨서도 아니다. 그냥 진화의 흔적인 것이다.

 

 청년이 눈을 감았다. 여전히 총구는 필립을 향하고 있었다. 이제 그는 한 가지 생각만을 하고 있을 뿐이다. 돌아가고 싶다. 리벳 실험이니, 자유의지니, 그런 이야기를 하기 전의 시간대로. 자유의지가 없다는 사실을 모르던 그때로. 자유롭게 결정을 할 수 있다고 믿었던 그 때로 말이다. 모르기만 했다면, 사는 데에 아무 지장도 없었을 텐데. 방아쇠에 맞닿아 있는 그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간다. 이 역시 자신의 의지가 아닌 걸까. 잠시 부질없는 생각을 해 본다. 조용한 산속의 밤. 시계는 열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댓글 0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2637 단편 먼지보다 가벼운 기록 히로 2021.08.09 0
2636 단편 江巨村 (관찰사 이제팔) 키미기미 2021.08.07 0
2635 단편 창귀 (관찰사 이제팔) 키미기미 2021.08.07 0
2634 단편 쿨 포테이토 킥더드림 2021.08.03 0
2633 단편 돌려주세요 유중근 2021.07.31 0
단편 자유의지는 없다 잉유신 2021.07.30 0
2631 단편 숲의 방문자 Hilaris 2021.07.29 0
2630 단편 혼맞이1 빗물 2021.07.19 0
2629 단편 태풍의 눈 아래 슬픈열대 2021.07.16 0
2628 단편 주름 쾌몽 2021.07.14 0
2627 단편 배타적 사랑 도제희 2021.07.03 0
2626 단편 낯선 행성으로의 추락 킥더드림 2021.07.03 0
2625 단편 에일리언 에일리언.1 논바논바 2021.06.30 0
2624 단편 남쪽눈때기: 뭐가 보입네까?(본문삭제) 진정현 2021.06.25 3
2623 단편 이상하고 아름다운 꿈 빗물. 2021.06.25 0
2622 단편 사건번호 J-276B41 히로 2021.06.23 2
2621 단편 배심원 kongkongs 2021.06.06 0
2620 단편 불안은 잠들지 않는다 킥더드림 2021.06.03 3
2619 단편 힙과 뽕의 싱커페이션 : 우스개 오누이와 아인슈페너 듀오의 사례를 중심으로1 소울샘플 2021.05.30 1
2618 단편 한 걸음에 삼백리1 오메르타 2021.05.13 2
Prev 1 ...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 147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