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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빈 달 잡아라

2007.03.30 22:2303.30

  무사 장설은 평생을 바쳐 완성한 검법으로 드디어 달을 버혔다. 그러나 정말로 달이 아주 갈라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가 달을 벤 것은 정말이다. 그의 하나뿐인 제자가 그 순간을 목격했다. 세상은 사람에게 무심치 않다고 믿는 것도 그다지 불가능해뵈지는 않던 순간이었다.
  지금 우리에게 세계의 이름은 불필요하다. 세계의 이름이 필요하다는 것은 이 (아직 명명되지 않은) 세계가 어떠한 '이름' 없이는 불완전한 상태라는 뜻이다. 강조는 결핍의 증거일 수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말해야 결핍도 아니고 부정도 아닌, 그저 건강한 긍정일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 남는다. 어떻게 해야 더는 원할 필요가 없는 상태로 옮겨갈 수 있는가.
  이른바 낙원으로.
  문사 요하는 한 조각 시로 반란군의 우두머리를 죽이고 귀신을 쫓아내고 폭풍을 뒤집었다. 그렇다고 세상의 반란이 아주 그쳤다는 말은 아니다. 모든 귀신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모든 폭풍이 잠잠해진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가 한 많은 귀신을 성불케 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때 요하가 타고 있던 배를 흔들던 폭풍은 정녕 방향을 바꾸었었다. 세상에 평화가 이루어지는 일이 아주 힘들지만은 않다고 말할 수 있을 법도 했다.
  명기 금선은 대금 하나를 들고 천하를 떠돌았다. 금강산도 가고 봉황산도 가고 장강도 가고 흑룡강도 가고 남해도 가고 이어도도 가고 백년고개도 넘고 구룡폭포도 가고 적벽도 가고 동정호에도 갔다. 서왕모에게 부름을 받아 흰 난새를 타고 요지연에 갔다고도 하고 우화등선했다는 말도 있었다.
  그늬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과거 어떤 때, 그늬 대금 소리가 강산의 신령을 감동시키고 하늘을 울린 적이 있기야 했다. 그러나 지금은 옛 사람도 옛 소리도 옛 귀신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늬 이후로 태어난 이들은 그 소리를 들어본 적 없다. 영원도 때를 가리는 겐가.
  *
  그 동네는 서기 1992년 서울 어딘가에 속한 곳이었다. 그 근처 다른 동네와 다를 것이라고는 없는, 평범하고 특색 없는 장소였다. 동네는 뒤로는 관악산 줄기로 이어지는 작은 산을 업었고, 앞으로는 경사도가 꽤 급한 언덕을 두었다. 단독주택과 빌라가 별 일관성 없이 늘어서고 올라서서 자칫 잘못하면 수많은 골목 속에서 길을 잃기 일쑤였다.
  그 동네가 다른 많은 동네들과 다른 점이라고는 단 하나밖에 없었는데, 그것이 무엇이었는가 하면 바로 달이었다. 그 동네에서는 매년 첫날마다 뒷산 봉우리에서 달이 솟았다. 달의 '모습'이 떠오른다는 것이 아니라, 정말 달- 손으로 쥘 수 있고 가져다 벽에 걸어둘 수 있는 그런 달이 떠오른다는 말이다. 그래서 새해를 앞둔 날 동네 사람들은 한 명도 남김없이 산을 올라가 달잡기 행사를 벌였다. 달을 잡아 창고에 넣어둔다 해도 어김없이 세상에 달이 떠오르는 연유는 아무도 몰랐으며, 여전히 아무도 모른다.
  1992년의 마지막 날, 그 동네에서 암묵적으로 인정된 유력한 달잡이 후보는 날백수 동수와 자칭 백기사 승훈, 백수 겸 화투고수 천환, 이 셋으로 좁혀졌다. 이 셋의 달잡이 결심을 소개해 보자면,
  날백수 동수: "아, 내가 말이지, (담배를 잘근잘근 씹는다) 그노무 달을 잡겠다고 매년 미친년마냥 밤 산행을 한 것도 말이지, 벌써 구 년째인데 말이지, 도대체 지금까지 한 번도 잡아보지를 못했으니 말이지, 이 어찌나 속터지는 일이겠냐고, 말이지, 안 그래?"
  자칭 백기사 승훈: "미리씨를 향한 제 마음은 변함없습니다. 다가오는 새해에는 기필코 달을 잡아서 미리씨께 바치겠습니다. 미리씨께 평생 잊을 수 없는 기념비적인 청혼을 할 겁니다. 미리씨 사랑합니다!"
  금천구에서 알아주는 화투고수 천환: "결심은 무슨, 잡고 난 후에 뭔 말을 하든지 해야지. 안 그러우?"
  공식적으로 인정된 후보들 말고도 달을 잡으려는 결심을 한 이들은 많았다. 욕심내는 사람은 많은데 매년 떠오르는 달은 단 하나뿐이었으므로, 달잡이 행사에는 엄격한 규칙이 있었다. 대략의 행사 순서는 이렇다.
  1. 참가 희망자는 적어도 달날 일주일 전까지 촌장을 찾아가서 달잡이 행사 참가자 리스트에 이름을 올린다.
  2. 촌장 측에서 참가자들에게 달잡이 행사의 시작 지점과 시간을 적어도 달날 사흘 전까지 통보한다. 참가자들이 길을 잃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나무마다 방향을 표시하는 야광 표지를 묶는 등의 준비가 완료된다.
  3. 달날 당일 참가자들은 미리 통지된 시합 장소에 모인다. 활동하기 편한 옷과 신발을 착용해야 하며 일체의 다른 장비, 이를테면 등산 장비 같은 것들은 가져갈 수 없다.
  4. 촌장이 참가자들의 출결 상황을 점검하고 사전 동의서를 돌려 확인도장과 서명을 받는다. 사전 동의서는 올해의 달을 '제일 먼저,' '양손으로' 잡은 이에게 '평화롭게' 양도하겠다는 내용이다. 도장을 잊고 온 이는 지문으로 대신해도 무방하다.
  5. 동사무소 직원이 깃발을 휘두름과 함께 시합이 시작된다. 예전에 이미 달을 잡은 적이 있는 이들이 달 뜨는 곳에 미리 가서 대기하고 있다. 아무리 동의서에 서명을 했단들 일단 달을 직접 보면 마음이 흔들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왕왕 폭력 사태가 일어나기도 하므로 만일의 경우 증인 역할을 할 수 있는 이가 필요하다. 작년부터는 혹 일어날 수도 있는 불미스런 사태의 증거자료 확보를 위해 캠코더까지 동원되었다.
  이렇듯 달 잡기 행사 준비로 온 동네가 떠들썩했지만 안도는 그런 일에는 영 관심이 없었다. 아홉 살 소년에게는 달을 잡는 일보다 늘 붙어 다니던 단짝 여자아이와 벌인 싸움이 훨씬 심각한 문제였다.
  첫째로, 안도는 미연이를 참 좋아했다. 둘째로, 안도는 미연이를 주로 놀리거나 시비 거는 일로 좋아하는 마음을 표시했다. 셋째로, 미연이는 안도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듯했다. 그 결과 안도는 참 자주 미연이에게 서운했다.
  둘이 싸운 일은 이러하다.
  안도가 여느 때처럼 옆집, 즉 미연이네 집으로 놀러 갔을 때였다. 어제 같이 놀자고 해놓고 막상 가 보니 책을 펴 놓고 안도는 거들떠보지도 않는 미연이었다. 놀자며, 가자, 그렇게 몇 번이고 잡아 끌었는데도 쳐다보지도 않았다. 안도는 발을 마구 굴렀다. 미연이가 하다못해 쳐다보기라도 했으면 발까지 그렇게 막 구르지는 않았을 테다. 그렇지만 미연이는 여전히 책만 쳐다보면서 소리만 질렀다. 시끄러워, 그만해! 너 니네 집에 가! 니가 어제 놀러오라고 했잖느냐고 항의하는 안도에게는 찌푸린 얼굴만 잠깐 들어보였을 뿐이다.
  그래서 안도는 미연이가 보던 책을 잡아챘고, 달렸고, 환상적으로 넘어졌다. "만화로 보는 조선시대"는 온몸을 던져 안도를 지켜냈다. 말인즉슨 안도 대신 두쪽으로 갈라졌다는 뜻이다.
  그 뒤는 처참하여 차마 표현할 수 없다. 어쨌든 노력해 보자면 미연이는 안도의 옆구리를 걷어찼으며, 안도는 그깟 책 좀 망가졌다고 차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굴러다녔으며, 미연이는 아빠가 선물해준 것이라며 또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고, 안도는 그만 책을 집어던지며,
  "맨날 다락방에나 숨어서 음산하게 햇빛도 안 보고 일도 안 하고 펑펑 노는 버섯백수아저씨가 준 책이 뭐가 좋다고-"
  하고 소리쳤다. 이후 미연이 뒤에서 벼락이 다섯 개쯤 내리치는 환영을 보았다. 책은 날아가다가 벽에 부딪혀 주르륵 미끄러져 내렸다. 미연이는 한동안 씩씩거리다가 돌아서서 책을 주웠다.
  미연이 피의 복수를 감행했음은 물론이다.
  "너넨 뭐야, 느늬 아빠는 맨날 술만 마시고 고래고래 이상한 노래만 부르잖아! 아줌마들이 맨날 장씨 아저씨더러 뭐라는 줄 알아? 인간이 맨날 술먹고 사고치니 마누라가 도망갔다고 그러더라! 적어도 우리 아빠는 엄마한테 무지 잘해! 너 빨리 가!"
  이렇게.
  둘은 그 이후로 말을 않고 있었다. 설령 마주쳐도 못본 척 하거나 그냥 지나쳤다. 동네 애들이 다 모여서 얼음땡을 하고 놀 때면 둘은 부러 서로에게 얼음도 땡도 하지 않아서 (말하면 안 되니까) 영 이상하게 되었다. 그렇게 달잡는 날까지 어영부영 지냈다. 중간에 둘을 화해시키려는 주변인들의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다지 효과는 없었다.
  안도와 미연, 즉 마을의 소문난 단짝이 서로 말을 안 한 지 한달 째 되던 날, 드디어 대망의 달날이 밝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달잡는 행사에 미처 주의를 기울일 틈이 없었다.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그 동네를 가로지르는 큰길이 있었는데, 한쪽에는 가정집들이 즐비하게 늘어섰고 그 맞은편에는 사용하지 않는 빈 땅이 있었다. 잡초가 드문드문 자라고 가끔은 쓰레기도 무단투기되는 심심한 공터였는데, 몇 달 전에 누가 아무도 모르게 차를 버리고 튀었다. 폐차하기 귀찮아서 그런 모양이었다.
  낡고 더러운 밴이었다. 본디 흰색이었을 차는 거의 회색이었다. 호기심 많은 애들도 가까이 가지 않을 정도로 볼품이 없었다. 그 차에 불이 났다.
  그렇다, 불이 났다.
  그렇다.
  지금 문제는 도대체 왜 그 차가 갑자기 분신자살을 꾀했는가 하는 게 아니라, 폐차에 불이 붙으면 과연 그 차가 폭발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있다. 무서울 정도로 강력한 질문이었다. 느긋이 뒷짐 지고서 "근디 저 차 이제 곧 터지지 않겠는감?" 하고 천진히 물어보시는 촌장어른 덕분에 막 불을 끄려고 가던 이들도 얼른 다시 돌아와 섰지 않은가 말이다.
  불보다 말이 더 빨랐는지 금세 마을 사람들이 어른아이 할 것 없이 다 모여서 불구경을 했다. 그 속에는 올해의 유력한 달잡이 후보 하나 둘 셋은 물론이고 안도와 미연이도 있었다. 더욱 놀랍게도 장씨까지 나와 구경을 했다. 술은 취하지 않은 모양이었지만 (조용하면 제정신이라는 뜻이다) 코는 어쨌든 자존적으로 빨갰다.
  시간이 갔다.
  시간은 가고, 차는 좀처럼 폭발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손바닥만하게 일어나는 불길을 바라보며 어서 차가 터지기를 기다렸다.
  "아까 얼릉 껐으면 되얐을 걸," "인자 오래 태워가지고 더 크게 터질거여, 저게." "근댜 저 차 대체 누가 버리고 간 거랴?" "원래 있등 거 아니여?" 같은 대화가 오갔다.
  그 이후는 조금 복잡하다. 일인즉슨 구경하다 지친 달잡이 후보 셋이 각자 슬그머니 빠져나가서 산에 올라갔는데 이미 달은 누가 가져간 지 오래였고, 그래서 셋이 서로 의심하다가 대판 싸움이 났으며, 마을 사람들은 날이 한참은 깜깜해진 이후에야 달잡을 것을 기억해내고 준비를 서두르려 했는데, 또 사정이 생겼다.
  그 사정인즉슨, 장씨가 갑자기 집으로 불쑥 들어가더니 불쑥 나왔다. 양동이에 물을 가득 채워서 말이다. 그러더니 차야 폭발을 하든 말든 성큼성큼 걸어가서 불에 물을 한껏 끼얹었다. 당연히 불이 꺼졌다.
  이것은 엄청난 일이다. 왜냐하면 장씨의 그 행동은 마을 사람들을 충격의 도가니탕으로 몰아넣어 끓였기 때문이다.
  장씨를 바라보는 마을 사람들의 시선은 그야말로 놀라움 그 자체였다. 하는 일이라고는 술을 마시거나 술신부름을 시키거나 노래를 고래고래 부르거나 남의 집 개와 싸우거나 유치장 신세를 지는 일밖에 없던 사람이 폭발하려는 차의 불을 한방에 끈 것이다.
  그야말로 홍해를 가르는 모세처럼, 무덤에서 걸어나오는 나사로처럼, 돌아온 탕아를 바라보는 아버지처럼, 사람들이 장씨를 바라보는 시선에 담긴 감정은 다양하기 그지없었다. 이전에 장씨 흉을 보았거나 탐탁치 않게 여겼던 사람들은 괜히 불편했고, 장씨가 비록 술꾼이긴 해도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말해온 사람들은 괜히 흐뭇했다. 정작 장씨는 자신의 평판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그는 빈 양동이를 덜렁대며 집으로 들어갔다.
  뒤에 남은 마을 사람들은 왠지 힘이 빠진 기분이었다. 그러고보니 달은 어떻게 된 건지 알 길이 없었는데, 동사무소 직원이 허겁지겁 달려와서 유력 후보자 셋이 싸우고 있다는 말을 전하자 집에 가던 사람들까지 다 싸움 구경하러 몰려갔다.
  안도는 산길 쪽이 아니라 집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사실 지금 가장 혼란스러운 것은 바로 안도였다. 술 마시지 않은 날에는 하루종일 한 마디도 없고, 술 마신 날에는 혼자 방방 날뛰거나 아니면 헤벌쭉 해서 자신의 머리를 박박 쓰다듬거나 하던 아버지가 아닌가. 불 끄는 아버지는 난생 처음이었다.
  그때 미연이가 안도 앞을 타박타박 지나갔다. 가뜩이나 복잡하던 안도는 더 복잡해졌다. 노란 원피스에 양갈래 땋은 머리가 평소보다 배는 이뻤다. 안도는 지금 말을 걸어도 괜찮을까고 고민했다. 쌀쌀맞게 들은 척도 안 하고 가버리면 자신은 정말이지 너무나도 복잡해질 것이다. 머리 터지게 고민하던 안도는 조금 늦게 미연이가 자신을 마주보고 선 것을 알고 눈을 크게 떴다.
  "옆구리 찼던 거 미안해."
  뭐라고?
  "니네 아빠도 멋있어. 우리 아빠가 더 멋있긴 하지만."
  응?
  안도가 뭐라 말할 틈도 없이, 미연이는 돌아서서 산길 쪽으로 뛰어갔다. 안도는 입을 벌리고 눈을 크게 뜬 채 한동안 원피스 자락 팔각이며 뛰어가는 미연이만 쳐다봤다. 소년은 도대체 오늘 뭐가 이렇게 복잡한지 알 수가 없었다. 알 수가 없었지만 그래도 자꾸 실실 웃음이 나왔다.
  실실실. 안도는 산길 쪽으로 뛰었다. 실실실실. 누군가 잡아간 달과는 상관없이 하늘에 두둥실 달이 떴다. 싸움구경 하기에 더할나위 없이 밝아 흐뭇한 밤이었다.
  공터 왼편에 얼마 전 새로 들어선 빌라로 이삿짐 트럭이 털털거리며 등장한 것 역시 그날 밤 일이다. 흰 난새가 트럭 위를 떡 하니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트럭 조수석에서 내린 것은 왕년의 히트가수였는데, 한창 때 미모가 아직도 빛을 발하는 미인이었다. 그늬는 또각또각 굽소리를 내며 큰길을 가로질렀다. 이삿짐을 옮기기 전에 할 일이라도 있는 듯했다. 손안에 든 주소를 확인하던 여자는 곧 장씨네 집 앞에 섰다. 대문은 열려 있었다. 돌아오는 일은 아주 어렵지는 않았다. 열린 문 제치고 걸어들어가는 일만큼.
  미연이네 아빠는 어쩌다 보니 잡아오게 된 달을 책상 위에 두기로 했다. 불을 켤 필요 없이 환했다. 달빛 아래서 그는 되는 대로 첫 달글을 썼다.

  지금 우리에게 세계의 이름은 불필요하다. 많은 이들이 세상을 지나갔다. 많이도 하늘을 때리고 땅을 두드리고 강을 내고 절벽에서 뛰어내려 날아오르고 눈물로 꽃을 피웠다. 요컨대 우리는 꽤 많은 수의 기적을 발현해냈다. 장한 일이다. 그러나 기적마저 우리를 세상에 붙잡아둘 수 없었다. 이 역시 장한 일이다.
  모험의 끝에 이르러서야 뒤늦게 천사, 신, 마왕, 천국이나 지옥, 세상의 생멸이나 구원, 지극한 고통이나 눈물의 기적, 깨달음이나 혁명의 순간 중 그 무엇도 해답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은 모험가는 어떻게 해야 할까.
  구원이 끝나면 영웅은 어디로 가야 할까? 지옥을 넘어선 지혜는 그 후 어디로 가야 할까. 세상을 구하지 않기로 결심한 영웅들은 또 어디로 갔을까.
  낙원을 지나간 이들은 어디까지 가서야 만족했을까.
  한 잎 칼로 달을 벨 수 있고 한 자락 글로 귀신을 울릴 수 있단들 떠나는 사람을 어쩔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뿐일까. 소리도 눈물도 여행도 구도도 칼도 글도 할 수 없는 일이 세상 어딘가에 있음직은 하다. 아직 어떠한 단어로도 명명되지 않은, 아무도 알지 못하는 비밀스런 구원의 방식이. 그렇다면 그것은 무얼까. 애써 스스로를 뛰어넘고 한계를 부수고 세상까지 부수는 일과는 상관없는, 어쩌면 더욱 효과적인 것.
  구원이 해낼 수 없는 일을 가능케하는 무언가.
  어쩌면 그것 때문에 우리는 불을 넘고 물을 건너고 용을 죽이고 성을 함락시켜온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모험이 끝나고 축하연이 마무리된 후 남는 것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일 뿐이다. 때로는 귀향이 출향보다 몇 배 더 고통스럽다. 때로는 귀향이 귀향일 수 없다. 과연.
  오디세우스는 성공적으로 귀향했지만 그것은 모험의 완전한 끝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또다른 모험이 남아 있었다. 포세이돈의 분노를 달래기 위한 의식으로서의 여행이. 바다, 세계, 시간, 오래도록 페넬로페가 발끝으로 눌러 고정시켜 두었던 세월의 한을 풀어내야 하는 임무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우리에게 없다. 아니지, 우리에게 그 이야기는 없는 줄 알았다.

  여기까지 쓴 후 미연이네 아빠는 달을 두어 번 쓰다듬었다. 싸움구경 간 아내가 돌아오면 달을 보여주고 자랑할 심산이었다. 달잡이 행사가 끝난 줄 알고 뒤늦게 산에 올라갔는데 실은 아무도 없었다는 것, 떠오르는 달을 그냥 보낼 수가 없어서 품고 왔다는 것, 장씨네 마누라가 난새 얹고 돌아왔다는 것 등 이야기 거리가 무진장 많았다. 곧 돌아올 이쁜 아내와 마주앉아 수다 떨 생각을 하니 절로 실실 웃음이 나왔다.
그가 그렇게 실실 웃는 동안 마을 사람들은 재미있게 싸움 구경을 했다. 미연이와 안도는 촌장 할아버지가 가져온 약과를 받아 나눠 먹었다. 빌라 앞 이삿짐 트럭 위에서 흰 난새가 잠을 청했다. 사람은 달을 쓰다듬고 낙원이 느리게 서쪽으로 흘러가고 가수는 또각또각 무사에게 다가갔다. 정말이지 너무나도 복잡한 무사는 앵두나무 아래 엉거주춤 서서 그저 웃고 있었다. 세계는 다른 세계를 좋아한다. 특히 입맞추기를. 장씨네가 이사온 이후 한 번도 잠겨본 적 없는 대문 위로 휘영청 월홍 높았다. 그 밤, 지극히 너그러운 보름달 아래 구원이 무색한 순간에.
  그러므로, 지금 우리에게 세계의 이름은 불필요하다. 곧 막이 내리고 세상은 겹쳐지고 밤마저 퇴장하리라. 더불어 우리는 더는 이곳에 없을 것이다. 후에 다음 세상이 열리면 아직 지옥도 낙원도 겪지 않은 어린 손이 솟아 가장 어린, 가장 오랜 달을 어루만질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되리라.
  우리는 전에도 여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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