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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2.길


0.


  겨울의 냄새, 어딘가가 찌르는 듯이 아파서 올려다보면, 얼음같은 나무가 흔들리고 있었다.

  겨울의 냄새, 어딘가가 찌르는 듯이 아파서, 병에 걸린 것처럼 고개를 들면, 얼음같은 나무가 흔들리고 있었다. 저온의 공기가 옷의 소매에 묻어있는 느낌, 구겨진 천에서 나는 냄새.

  겨울의 냄새, 어딘가가 찌르는 듯이 아파서, 병에 걸린 것처럼 고개를 들면, 아직 푸른 나무가 흔들리고 있었다. 저온의 공기가 새로 바꿔입은 옷의 소매에 묻어있었고, 구겨진 벨벳에서 나는 냄새, 옷장의 어두운 곳과 비닐 냄새가 난다.

  옷장의 어둠은 여름 내내 쌓였을 것이다. 이제 그 어둠은 물러나서 옷장 문이 만든 그림자처럼 되어버렸겠지. 하지만 그 냄새는 지나간 여름의 냄새가 아닌 겨울의 냄새다. 새 단어는 늘 이런 식으로 탄생한다.

  겨울의 냄새, 어딘가가 찌르는 듯이 아파서, 병에 걸린 것처럼 고개를 들면, 아직 푸른 잎이 많은 나무가 흔들리고 있었다. 저온의 공기가 새로 바꿔입은 자켓의 소매에 묻어있었고, 구겨진 벨벳에서 나는 냄새. 닫힌 옷장과 비닐 커버 냄새가 난다.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무한히 넓고 높은 하늘, 바람이 둥그렇게 빨려들어가고 있었고 질식할 것 같은 벨벳 자켓의 냄새가 났다.


1.



  볼펜을 내려놓고, 내가 최초로 기억해낸 것을 확인하려 했다. 책상 아래를 바라보았다. 볼펜을 집으러 기어올라오기 전까지 나는 그 곳에 누워 있었다. 나는 손목을 보았다. 그 동안 방이 빙글 돌았다. 다시 책상 아래를 보니 마룻바닥에 연녹색 깔개가 놓여 있었다.



  우리는 이 곳에서 일어난다
  흙으로 빚어진 채.

  무덤에서 태어나는 종족이 있다. 무덤이 아니라면 어느 썩은 흙에서도 좋다. 버려진 뼈에서도 좋다. 흐물흐물한 살에서도 좋다. 보통 안구가 가장 나중에 단단해지고 탄력이 붙는다. 눈을 뜰 수 있게 되면 장기는 갖추어진 상태다. 그러면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비틀비틀 일어나 걷다가 어느 사물인가에 손이 닿는다. 멀리 걸을 때도 있지만 보통은 가까운 곳에서 찾는다. 자신의 관이나 묘비, 누군가가 놓고 간 꽃다발, 차량의 파편, 벗어둔 신발, 약병, 첫 번째 기억을 찾고 나면 몸에서 흙과 먼지가 떨어져나간다.
  그리고 시선과 손길은 자신의 몸을 더듬는데, 이미 흔적은 사라져버린 후다. 이 몸과 몸의 만남이 두 번째 기억이 된다.
  우리는 자신의 무덤이 있던 곳으로 고개를 돌린다. 그 동안 지구는 이미 빙그르 돈다.
  이 두 가지로 우리는 살아가는 방식을 익힌 것이다.



  우리 종족은 서로 만나지 못한다. 어딘가에서 각자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그래도 고독하다고 여기지는 않는다. 이야기들을 만지면 서로 직관적으로 알 수 있는 경우가 있다. 우리 종족만이 올바르게 읽어갈 수 있는 책이 있는 것이다.



  볼펜을 들 때마다, <내가 지금 무언가를 쓰는 거면 좋을 텐데>하고 생각한다. 우리 종족은 대부분 그럴 것이다. 나는 가끔 우리와 반대로 사는, 그러니까 우리가 걸음마다 마주치는 저 사람들, 저 다른 종족은 우리가 어떻게 사는지 알면 그것 참 편리하겠다고 투덜거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들은 열심히 써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볼펜을 들고 노트에 손을 대는 순간 무언가를 실컷 내갈겼던 기억이, 프린터에서 찍어내듯이 머릿속에 훌렁 튀어나오는 것이다. 기억은 너무나 선명해서 노트가 있을 필요도 없다. 덕분에 노트도 아예 사라져버린다. 곧 그 볼펜으로 더 이상 썼던 것이 아무것도 없으면 볼펜도 사라져버릴 것이다.
  몸에 있어서도 비슷하다. 책상 위에 팔을 올려놓으면, 양 팔은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그러면 팔들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 곳으로 멀어져버린다.


                                    
  이야기들이 내 동족의 것인가 아닌가를 판별하는 것은 간단하다. 우리 아닌 자들 - 그 종족이 고개를 돌릴 때는 지구가 돌지 않는단 말인가?


2.



  아니면 그들의 지구는 밤낮과 관계없이 혼자서 돌고 돌았던 것일까?



  나는 도서관에서 꽤 일찍이 내 동족을 찾아냈다.



  나는 걷는다. 한 걸음 걸을 때마다 겨울이 다가온다. 겨울 바람을 맞으며 걷고 있으면 천천히 겨울 냄새가 난다. 목도리 냄새, 자켓 냄새, 하얀 입김, 누군가의 살 냄새, 솟구친 나무의 냄새, 사막같은 하늘의 냄새, 길을 걷노라면 내 발로 지구를 돌리고 있노라면 사물과 풍경이 내게 하나씩 다가온다. 너무 가까이 다가와서 질식할 것 같이 되어 있노라면, 이 시선과 손에 닿아, 사물들은 하나씩의 기억을 수행하고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그렇게도 많은 것을 썼던 볼펜처럼.
  첫 기억을 되살려주었던 그 볼펜은, 이 겨울날 길을 걸어 세 번째 가로수를 지나치면서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계절도 사라져버렸다. 휑한 길이 남았는데, 멀리에 꽃더미가 피어 있는 것이 보인다. 거기까지 걸을 수 밖에.
  그리고 내 몸은 더 가무스레해지고, 더 따스해지고, 더 가늘고 작아졌다.
                          

  20살의 겨울, 나는 펜을 놓고, 너의 따뜻한 머리를 감싸안았다.

  18살의 여름에 태양은 미치도록 이글거렸다. 바닷 바람이 축축했고 조개들이 살다가 오래 전에 죽어서 부서져 있었다. 너의 몸은 갈색을 띄고 있었고 기름과 물로 미끄덩거렸다. 너는 내 등을 한 대 때리고 나를 앉히고 내 발을 잡았다. “피가 나잖아.” 너는 무척 화를 냈다. “왜 매번 그렇게 덜렁거려.” 너는 눈 사이를 찌푸리고 있었다. 눈썹 아래로 물이 흘러내려 너는 한쪽 눈을 꽉 감아야만 했고, 그러면서도 위엄있게 신경질을 내느라 애를 먹었다.

  16살의 가을에 너는 잠시 내 손을 놓고 걸었다. 그러나 벽돌담이 시작되는 지점을 통과할 때 너는 가로수에 내 등을 밀치고 입술을 맞대었다. 그러더니 왠지 한숨을 쉬었다. 금방 표정이 바뀌어 밝게 웃었다. “그렇게 할께.” 웅얼거리더니 내 등을 두드렸다. 네 안색은 변하지 않았지만 네가 쑥쓰러워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갑자기 내 손을 꽉 잡았고 너는 천천히 조심스럽게 걸어갔다.
                                    
  15살의 봄, 나는 시험을 끝내고 부츠를 신은 채 봄비 웅덩이를 발에 채며 걸어다녔다. 네가 빌려준 책이 가방 속에 들어있었다.                        



                                            

  그들의 지구는 밤낮과 관계없이 돈다는 것 같다.
  오직 홀로 돈다. 그런 식의 움직임이 가능하려면 어떤 세계에 어떤 물질로 이루어져야 하는지 나는 짐작할 수조차 없다. 그들이 고개를 돌릴 때 지구가 함께 돌지 않는다. 그렇다면, 걷다가 고개를 돌리면 그들은 그들이 걸어왔던 것을 볼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그들에게는 길이 없고, 온 사방의 풍경 뿐이다. 나는 단순히 그런 이야기를 읽을 수 없을 따름이지만, 이야기를 남긴 나의 동족들은 그들의 이야기를 경멸한다.
                        
  볼펜은 너에게서 받은 것이었다. 주머니에 꽂고 다닐 수 있는 편한 물건이었다. 펜대는 대리석 무늬가 있는 녹색이고 핀 부분은 도금되어 있는. 첫번째 기억은 그 볼펜으로 썼던 기억이다. 완벽한 여덟 획. 구부러지거나 휘거나 닫힌 모양을 이루었는데, 그 어느 부분도 직각으로 구부러지지 않았고, 원은 끝까지 닫히지도 않았으며 정원형인 것은 하나도 없었다. 나는 노트 반 쪽이 꽉 차도록 적어나간 것 같은데, 어느 획도 서로 같지 않았고 펜은 흐려지고 있어서 나중에는 자국만 남아 있었다. 원래 줄이 없는 노트에 써 둔 것이라 비스듬했고 나는 여러 번 겹쳐썼고 자국 사이의 여백을 이용했다. 나는 그 노트를 보고 내 인생이 얼마나 완벽할 것인지 짐작했다. 그 기호들은 너의 이름이었다.

  그래도 가끔은 네가 없는 기억을 상상한다. 내가 무엇을 기억할 수 있었을지 상상한다. 상상할 밖에는 다른 수가 없다. 무엇을 상상해야 할지 알 수 없다. 그래도 나는 상상한다. 돌아오기 전의 계절을. 내가 사랑했을지도 모르는 겨울을. 즐거워했을지도 모르는 나를.

  네가 아직 없었던 나를. 그 때의 나는 어땠을까. 아직 그 바다에 가 닿지 못한 내가 맡은 바다 냄새는. 아직 그 꽃을 알아보지 못한 내가 본 분홍색의 꽃더미는. 아직 그 벽돌담 곁을 걷지 않은 내가 넘겨다 본 그 담쟁이는. 나는 어디에 있었을까. 네가 내 입술에 기대었을 때 나는. 네가 내 발바닥을 들췄을 때 나는. 네 책을 가방에 넣은 나는. 가로수에 기대선 나는. 가로수에 기대 서 있었다고 해서 꼭 너의 거울이었을 이유는 없다. 눈을 감고 있었다고 해서 꼭 너와의 첫 입맞춤이었을 이유는 없다. 가방을 젖지 않게 애쓰며 메고 걸었다고 해서 꼭 너의 책이 들어있었을 이유는 없다. 그 날은 그저 비가 왔다. 봄비가 촉촉하게 왔다. 어쩌면 그 날의 나는 그것이 그저 좋았을지도 모른다. 봄비가 여기저기 괴어 있었다. 반지르르한 거품이 표면으로 올라왔다가 터지면서 반짝거렸다. 그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나는 사실 그것을 사랑했을지도 모른다. 그 바다는 그저 뜨겁고 바짝 말라 있었다. 나는 그 바다를 뛰어다녔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 모든 것을 사랑했을지도 모른다. 그래, 나는 그 와중에 너의 얼굴을 보았을지도 모르지만. 사실 그 모든 것은 아무 상관없는지도 모른다. 모든 돌과 모래와 모래성과 흰 포말을 보듯이. 나는 양 팔을 쫙 펼치고 뛰어다녔을지도 모른다. 물방울과 땀이 섞여 아무렇지도 않게 등을 흘러내리고 또 바람에 내 머리카락처럼 흩날렸을지도 모른다. 나는 힘껏 웃었을지도 모른다. 양 손을 허리에 짚고 벽력같이 소리를 질렀을지도 모른다. 바다에 대고. 지거나 떠오르는 태양에 대고. 세상에는 내가 지르는 소리와 소리치는 만큼 더 높게 솟구치는 바다와 내 양 팔 위로 날개를 펼친 하늘이 있어서, 나는 어디까지라도 어디로라도 날았을 지도 모르겠다. 나는 어느 먼 거리보다도 빨라서,
                                    

지퍼 부분이 고장난 검은 색 가방.

  벽돌담이 시작되는 지점을 통과할 때 잠시 가로수에 기대선다. 조금 비틀거리면서 전보다 작은 보폭으로 걸어간다.

쥐똥나무 새하얀 꽃 냄새.                                    

모래가 젖어있는 곳에는 부서진 조개 껍질이 튀어나와 있다.                         

부츠를 신은 채 봄비 웅덩이를 발에 채며 걸어다닌다. 가방을 한쪽 어깨에 매고 가슴 쪽으로 끌어당긴다.
                                                                 
그 바다에서 드러난 배가 완전히 갈색으로 변할 때까지 누워있었다.



  그렇게 누구더라도 상관없는 수많은 동작들을 내려다본다.        


  그러나 거기에서 살아있었던 건 너였다. 이 곳이 아닌 거기에서. 너와 태양. 뜨거운 태양. 미지근한 바다. 바짝 마른 모래. 어느 수식어도 너희들을 위한 것. 어느 표현도 내 어느 마음도 너희들에 속한 것. 네 입맞춤에 속한 것. 다가오던 너의 얼굴에 속한 것. <아름다움, 아름다움> 되뇌이면 그것은 네 눈꺼풀 위로 흘러내리던 너의 땀방울. 너의 바다. 너의 하늘. 너의 봄.


4.



  이야기는 끝없이 너를 향해간다.



  연녹색 깔개 위에 앉아서 나는 커터칼로 조심스럽게 손목을 잘랐다. 얇은 가죽에 틈새가 생겼다. <괜찮은데!> 나는 생각했다. 손등에 묻은 것을 핥아본다.



  나는 펜을 놓고, 너의 따뜻한 머리를 감싸안았다. 나는 할 수 있는 한 다정하게 속삭인다. 네 귓바퀴가 차갑고, 귓불에서부터 빨갛게 달아올라 있다. 너와 헤어졌다. 연녹색 깔개 위에 앉아서 나는 동맥을 잘랐다.



   18살의 여름에 태양은 미치도록 이글거렸다. 바닷 바람이 축축했고 조개들이 살다가 오래 전에 죽어서 부서져 있었다. 너는 내 등을 한 대 때리고 내 발을 잡았다. “피가 나잖아.” 너는 무척 화를 냈다. “왜 매번 그렇게 덜렁거려.” 너는 눈 사이를 찌푸리고 있었다. 눈썹 아래로 물이 흘러내려 너는 한쪽 눈을 꽉 감아야만 했고, 그러면서도 위엄있게 신경질을 내느라 애를 먹었다. 마침내 눈을 비비며 제풀에 웃어버리며, 네 아름다운 얼굴. 마음이 깊이 출렁거린다. 희미하게, 나도 잘 모르는 향기가 났다.
  스무 살, 나는 펜을 놓고, 너의 따뜻한 머리를 감싸안았다. 너는 화를 잘 낸다. 나는 할 수 있는 한 다정하게 속삭인다. 네 귓바퀴가 차갑고, 귓불에서부터 빨갛게 달아올라 있다.
  너와 심하게 싸웠다. 너와 헤어졌다. 연녹색 깔개 위에 앉아서 나는 동맥을 잘랐다.



  열 여섯 살 때, 네가 다가와서 내 손을 잡았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너는 그런 소문 믿지 말라고 했다. 나는 소문을 믿지는 않지만, 네가 나를 좋아하지 않을 때는 언제든지 헤어져도 된다고 했다. 아니, 나를 더 이상 좋아하지 않으면 확실히 헤어져 주어야만 한다고 했다. 그렇게 약속해주지 않으면 같이 다니지 않겠다고 했다.
  “들어봐, 너는 너무 착한 애야.” 내가 달랬다. “넌 진짜로 다른 애를 좋아하게 된다거나 해도 말 못하고 나랑 계속 놀러다닐걸. 난 네가 나랑 있을 땐 진심이길 바래.”
  네 귓불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너는 잠시 내 손을 놓고 걸었다. 그러나 벽돌담이 시작되는 지점을 통과할 때 너는 가로수에 내 등을 밀치고 입술을 맞대었다. 너는 왠지 긴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할게.” 웅얼거리더니 내 등을 두드렸다. “하지만 지금은 널 정말 좋아해. 정말이야.”
  18살의 여름에 태양은 미치도록 이글거렸다. 바닷 바람이 축축했고 조개들이 살다가 오래 전에 죽어서 부서져 있었다. 너는 내 등을 한 대 때리고 내 발을 잡았다. “피가 나잖아.” 너는 무척 화를 냈다. “왜 매번 그렇게 덜렁거려.” 너는 눈 사이를 찌푸리고 있었다. 눈썹 아래로 물이 흘러내려 너는 한쪽 눈을 꽉 감아야만 했고, 그러면서도 위엄있게 신경질을 내느라 애를 먹었다. “너 정말 이러면 안 돼.” 네 표정을 보며, 나는 네가 속삭이길 기다린다. 버스로 돌아가는 길에 너는 내 손을 잡고 내 어깨를 감싸안고, 그 가로수길에서처럼, 내 귀에 대고 속삭인다.
  나는 펜을 놓고, 너의 따뜻한 머리를 감싸안았다. 너는 화를 잘 낸다. 늘 나 때문에 화를 낸다. 나는 할 수 있는 한 다정하게 속삭인다. 네 귓바퀴가 차갑고, 귓불에서부터 빨갛게 달아올라 있다. 그래도 내 손을 거부하지 않는다.
  너와 심하게 싸웠다. 너를 좋아한다. 무척 좋아한다. 너도 나를 사랑한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연녹색 깔개 위에 앉아서 나는 동맥을 잘랐다.



   열 네 살 때 네 옆얼굴이 예쁘다고 생각했다. 열 다섯 살 때, 네가 빌려준 책이 가방 속에 들어있었다. “잘 읽어.” 네가 말했다. 나는 그 말을 곰씹으며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그 책을 읽어보지 못하고 돌려주었다. 너는 실망한 얼굴이었다.
  열 여섯 살 때, 네가 다가와서 내 손을 잡았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너는 그런 소문 믿지 말라고 했다. 나는 소문을 믿지는 않지만, 네가 나를 좋아하지 않을 때는 언제든지 헤어져도 된다고 했다. 아니, 나를 더 이상 좋아하지 않으면 확실히 헤어져 주어야만 한다고 했다. 그렇게 약속해주지 않으면 같이 다니지 않겠다고 했다.
  “들어봐, 너는 너무 착한 애야.” 내가 달랬다. “넌 내가 싫증나거나 해도 말 못하고 나랑 계속 놀러다닐걸. 난 네가 나랑 있을 땐 진심이길 바래.”
  네 귓불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너는 잠시 내 손을 놓고 걸었다. 그러나 벽돌담이 시작되는 지점을 통과할 때 너는 가로수에 내 등을 밀치고 입술을 맞대었다. 너는 왠지 긴 한숨을 쉬었다. “어쩌겠어.” 웅얼거리더니 내 등을 두드렸다. “그렇게 할게. 하지만 지금은 널 정말 좋아해. 정말이야. 앞으로도 그럴 거야.” 너는 그날 내내 내 손을 꽉 잡고 걸었다. 나는 네 숙인 고개를 가끔 돌아보았다.
  18살의 여름에 태양은 미치도록 이글거렸다. 바닷 바람이 축축했고 조개들이 살다가 오래 전에 죽어서 부서져 있었다. 너는 내 등을 한 대 때리고 나를 앉히고 내 발을 잡았다. “피가 나잖아... 너 정말 이러면 안 돼.” 네 표정을 보며, 나는 내가 언젠가 돌아보았던 네 고개숙인 옆모습을 떠올린다. 남은 시간동안 모래를 가지고 놀며 나는 네가 속삭이길 기다린다. 버스로 돌아가는 길에 너는 내 손을 잡고 내 어깨를 감싸안고, 그 가로수길에서처럼, 내 귀에 대고 속삭인다.
  나는 펜을 놓고, 너의 따뜻한 머리를 감싸안았다. 나는 할 수 있는 한 다정하게 속삭인다. “미안해. 다들 아는 줄 알았어. 다들 이미 당연히 아는 줄 알았지. 네가 나한테도 말했으니까. 말하면 안 되는 줄 몰랐어.” 네 귓불은 빨갛게 달아올라 있지만, 내 손을 말없이 받아들인다. 너는 늘 그렇듯이 조용히 고개를 떨구고 있다. 나는 너무 너를 자주 상처입히는 것 같다. 나는 네가 속삭여 주기를 기다린다. 모든 것을 회복시키는 힘을 안고, 다시 한번.
  너는 더 이상 속삭이지 않는다. 내가 속삭여야 할 차례다. 그러나 나는 그런 말을 하는 데에 익숙하지 못하다. 열 여섯 살 때처럼. 맺고 끊는 일에 익숙하고 편하게 여길 뿐이다.
  너와 헤어졌다. 내가 헤어지자고 말했고 너는 이번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뿐이다. 언제까지나 네가 나를 구할 수는 없는 법이다. 원래부터 내가 나를 구할 수는 없었다. 나는 내가 잘 하는 일을 하기로 한다. 연녹색 깔개 위에 앉아서 나는 동맥을 잘랐다.



   아홉살 때, 너희들이 내 얼굴을 실내화로 문질렀다. 입술이 찢어졌는데 너희들은 피가 신기했는지 돌아가면서 살펴보았다. 내가 입술이 부어서 말을 잘 하지 못하자 너는 내 뺨을 때려서 넘어뜨렸다. 열 살 때는 옆반에 네가 있었는데, 너희들은 함께 내가 화장실에 가는 걸 감시했다. 결국 교실에서 오줌을 싸자 너희들은 나를 앉혀놓고 벌을 주었다. 열 한 살때까지 너는 나를 따라다녔는데, 화장실에 가게 해 주는 댓가로 돈을 받으려고 했다. 너는 그걸 거래라고 말했다. 거래에 응하지 않자 너는 나를 똑바로 보며 선생은 이미 네가 저능아인 줄 안다고 말했다. 그렇게 말할 때 네 푸른 눈자위. 갈색의 또렷한 눈동자. 언제나와 같은 날렵한 이목구비. 졸업식 때 네가 말했다. “벗어날 수 있을 줄 알아?”
  열 네 살 때 누군가를 좋아했다. 어떤 아이의 옆얼굴이 예쁘다고 생각했다. 열 다섯 살 때, 그 애가 빌려준 책이 가방 속에 들어있었다. “잘 읽어.” 그 애가 말했다. 너는 무언가가 내 손에 닿는 것만으로도 더럽혀지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나는 책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열 여섯 살 때부터 그 애와 같이 있게 되었다. 그 애가 청한 일이다. 그 애가 내기를 걸고 나와 사귀고 있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 애는 간곡하게 아니라고 말했다. 어차피 한번도 그 애가 나를 정말 좋아하리라고 믿었던 적이 없다. 혹시 착각했다 하더라도 곧 알아차리리라. 그 애는 믿어달라고 했다. 나는 그렇다면 나를 좋아하는 한 계속 말해달라고 했다. 네 말을 들을 필요가 없도록. 그러자 그 애는 정말로 끊임없이 나를 좋아한다고 말해주었다.
  그 애는 내가 다치면 걱정을 했다. 내 눈을 들여다보고 내 손을 잡았다. 너와는 전혀 다른 얼굴로. 따뜻한 손길. 그게 신기해서 나는 자꾸 다쳤다. 그러면 그 애가 날 떠나지 않을 것 같았다. 늘 그 애가 내 어깨를 감싸고, 내 귀에 속삭였다. 어느날 조금 싸웠다. 내가 그 애의 친구들에게 그 애의 비밀을 말한 것이다. 나는 해명했다. “미안해. 다들 아는 줄 알았어. 다들 이미 당연히 아는 줄 알았지. 네가 나한테도 말했으니까. 말하면 안 되는 줄 몰랐어.”
  <너한테도 말했으니까?> 그 애가 되묻듯이 중얼거렸다. <네가 내게 뭔데.>
  어느날부턴가 그 애가 더 이상 속삭이지 않았다. 나는 아무 힘이 없었기 때문에, 다시 혼자가 되었다. 나는 그 애를 행복하게 해 줄 수는 없다. 내가 행복해질 수도 없다. 너와 같은 인간을 즐겁게 해 줄 수 있을 뿐이다. 그런 용도로 태어난 인간이다. 네 얼굴을 다시 보기 싫다. 네 즐거워하는 갸름한 얼굴이 내 속에 있는 게 싫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한다. 연녹색 깔개 위에 앉아서 나는 동맥을 잘랐다.



  다섯 살 때, 당신은 나를 혼자 내버려두었다. 할 일이 없어서 당신의 책들을 읽었다. 당신은 거의 나와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글자를 신문에서 배웠다. 당신이 받아보는 신문들. 당신은 신문을 세 가지는 받아보았다. 가끔 내가 단추를 잘 못 끼우면 말없이 채워주었다. 가끔 당신이 혼자 울고 있을 때는 무서워서 곁에 가지 못했다. 당신은 몇분 뒤 서재에서는 멀쩡한 얼굴로 책을 읽으며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서재의 노란 불빛. 당신의 머리만 비추었다.
  일곱 살 때, 나는 집에서건 학교에서건 책만 읽으면서 하루종일 시간을 보냈다. 여덟 살, 여름 방학이 끝나고 조를 짜야 했는데, 나는 애들 이름을 서넛밖에 몰랐다. 그 애들도 나와 친하지 않았다. 과제를 그냥 혼자 하기로 했다. 선생은 내 그림을 뒷 벽에 걸었다. 억지로 생물 과제를 같이 한 적도 있는데, 다른 애들은 내게 방해가 된다고 느꼈다.
   아홉 살 때, 따돌림을 받았다. 그들이 내 얼굴을 실내화로 문질렀다. 나는 화를 내려고 했지만 입술이 부어서 말을 잘 하지 못했다. 그들이 네 뺨을 때려서 넘어뜨렸다. 나는 그 애들 얼굴에 피가 섞인 침을 뱉었다. 선생한테 이르지는 않았다. 스스로 해결할 문제였다. 졸업식 때 그 애들 중 한 명이 말했다. “벗어날 수 있을 줄 알아?” 나는 희미한 연민의 감정을 느끼고, 언젠가 그 애도 철이 들 거라고 생각했다.
  열 네 살 때 나는 누군가를 좋아했다. 어떤 아이의 옆얼굴이 예쁘다고 생각했다. 책을 빌리면서 그 애와 친해졌다. 열 여섯 살 때부터 나는 그 애와 같이 있게 되었다. 그 애가 청한 일이다. 쓸데없는 소문이 났을 때 나는 확실해 말해두었다. 나는 소문을 믿지는 않는다. 멍청한 녀석들이나 남의 일에 상관하는 법이야. 하지만 네가 나를 좋아하지 않을 때는 언제든지 헤어져도 된다. 아니, 그 애가 나를 더 이상 좋아하지 않을 때는 확실히 헤어져 주어야만 한다고 했다. 그렇게 약속해주지 않으면 같이 다니지 않겠다고 했다.
  “들어봐, 너는 너무 착한 애야.” 내가 달랬다. “넌 내가 싫증나거나 해도 말 못하고 나랑 계속 놀러다닐걸. 난 네가 나랑 있을 땐 마음놓고 진심이길 바래.”
  나와 그 애는 손을 잡았다. 나는 자꾸 다쳤다. 어차피 웬만큼 다치는 건 아프지도 않다. 그보다는 그 애의 얼굴을 보는 게 훨씬 더 재미있었다. 여린 생물. 우습고 이상한 표정. 가끔 싸우기도 했지만, 잘 지냈다. “미안해.” 내가 말했다. “다들 아는 줄 알았어. 다들 이미 당연히 아는 줄 알았지. 네가 나한테도 말했으니까. 말하면 안 되는 줄 몰랐어.” “너한테도 말했으니까?” 그 애가 되묻듯이 중얼거렸다. “네가 내게 뭔데.” 내가 대답하려고 했지만 그 애가 고개를 떨군다.
  알고 있다. 내가 그 애에게 무엇이건 내게는 문제되지 않는다. 무엇이든 얼른 내게 말해주기만 하면 나는 알아서 처리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입을 닫아버리자, 혼자가 될 만큼 강한 것으로는 그 애에 대한 죄책감을 해결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나는 어릴 때의 주동자를, 주동자를 따르던 어리고 어두운 얼굴들을, 늘 동감할 수 없던 그의 표정을 연이어 떠올린다. 문득 당신의 얼굴마저 울컥 떠오른다. 끔찍한 연민.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을 나는 깨닫는다. 연녹색 깔개 위에 앉아서 나는 동맥을 잘랐다.



  이야기는 내가 네가 되는 지점까지 간다.


5.



  내 동족이 그 이야기를 썼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그가 실제 우리 동족이 된 후로는, 그것을 자신이 썼다고 받아들이는 일 밖에 할 수 없었을 테니까.

  도서관에서 찾아낸 동족의 이야기를 되씹을 때가 되었다. 내가 아직 대학에서의 내 기억을 찾고 있었을 때. 그 고대의 왕이 아직 눈이 멀었을 때, 향기로웠을 두 사람의 눈물에 대해. 그 왕이 처음 눈을 얻었을 때 그 눈에 담겨있었을 아름다움에 대해. 그 여인의 찬연했을 얼굴에 대해. 그런데도 태어나야만 했던 그의 길에 대해. 내 동족이 아닌 자가 이 이야기에 관해 이야기하며 선언했다. 이것이야말로 내 동족의 신화이며 가장 행복한 신화라고. 왜냐하면 그 왕은 다름아닌 바로 그 여인에게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 종족의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나의 동족들이 이야기 속에서 그들을 경멸하는 이유는 이해한다. 우리는 너에게로 간다. 우리는 점점 쫄아드는 몸으로, 스스로는 어떤 자유도 허락되지 않은 채, 이것이 짐승인지 인간인지 도덕인지 상관하지 않는 너에게로 간다. 가졌던 어떤 추억도 빼앗긴 채로, 감동도, 아름다움에 대한 믿음도, 사랑할 수 있었다는 유일한 시선도 상실한 채로. 누구라도 상관없는 너에게로 간다.


6.



  회전의 중심에 거의 도달한 것 같다. 아무리 걸어도 이 방 안을 돌게 된다. 작은 사물들이 가까워졌다가 멀어질 뿐인데, 이제 점점 가까이 다가와서 내 주변을 꽉 채우고 있다. 걸음을 옮기기가 힘들다. 나는 포동포동한 내 양 팔을 내려다본다. 이제 기어야 한다. 창 밖에서 깜박거리듯이 계절이 돌아온다. 무서운 속도로 계절이 돌아온다. 방이 무서운 속도로 빙글빙글 돌고 있는 것 같다.
                                    
  더 이상 거의 움직일 수 없게 되자, 왕의 이야기를 떠올리려 한다. 나는 다른 이야기들도 떠올리려 한다. 내 동족들의 이야기. 나는 내가 읽었던 모든 이야기들을 끄집어낸다. 이야기들. 다른 사람의 이야기들. 우리의 동족이 우리의 눈으로 읽을 수 있는 것들. 결코 네가 될 수 없는 것들. 영원한 그들. 축복받은 생애.

  불멸의 그들. 장면들이 깜박거리며 위태롭게 머릿속을 지나간다. 나는 그들의 모습을 떠올리려 한다. 창 밖의 계절을 몰아내듯이. 밤색 말을 탄 왕의 아들. 등자를 시험해보는 늙은 공작. 살해되는 유목민. 사막의 핏방울. 성벽에 나타나는 유령. 제왕절개로 태어난 자식들. 두리번거리는 양치기. 양들을 위해 우물물을 길어올리는 처녀. 나는 말을 타 보려고 한다. 초원을 달리려고 한다. 말머리를 돌려보면 내가 보살피는 양의 무리가 따라오고 있다. 지팡이를 들고 걸음을 옮겨본다. 길을 열어주는 힘이 깃든 지팡이. 베레모를 삐뚜름하게 쓰고 배를 타려고 해 본다. 여섯 개의 기둥에서 증기가 피어오른다. 무시무시한 기적소리. 검은 머리에 눈이 푸른 여자들이 서 있다. 개중에서도 약간 매부리코인 처녀의 얼굴이 나는 마음에 든다. 나는 기차를 타려고 해 본다. 내 아기를 품에 안고. 양치기가 언덕을 올라간다. 아기가 우는 소리를 죽이려고 애쓰며. 내 남편이 내 아기를 버리라고 해서 나는 울음을 참지 못했다. 아기는 출생지와 다른 왕국에서 잘 먹고 쑥쑥 자라서 여행을 떠난다. 길 한가운데 멈춘 마차, 그 잘 자란 젊은이가 떡 벌어진 어깨를 겨누고 노려보는 모습. 마차의 주인을 죽여버린다. 괴물은 머리로 바위를 들이받고 자살한다. 나는 사랑하는 여인을 만난다. 왕비는 갓난 자식을 잃은 기억이 있지. 나는 새로운 왕이 되어 그날 밤 그녀와 침상에 눕는다. 여인의 작은 손이 손 안에 들어온다. 나는 그만 미소짓는다. 그녀의 이름을 부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녀의 검은 눈동자. 나이든 신중한 얼굴에 아이같은 웃음이 번진다. 내 입술이 그녀의 귓가에서 급박하게 움직인다. 그러나 말을 하지는 못한다. 나는 무덤에서 나온 자인 것이다.

  나는 침묵한 채 장면들을 계속 더듬는다. 그녀의 단단한 손과 손톱. 전염병이 번져가는 도시의 풍경. 갑주를 걸친 전령이 왕 앞에 무릎을 꿇고 있다. 갑주가 덜커덩거리는 소리를 낸다. 침묵이 나를 계속 따라다닌다. 침묵이 그들을 계속 따라다닌다. 그런데 이것은 누구의 침묵이던가? 그의 갑주를 흔드는 것은? 장면들에 숨어있는 이것은? 장면과 장면들을 타고 넘쳐 흐르는 것은?

  여기에 없는 자는?

  전령이 입을 연다. 침묵이 흘러다닌다 - 나는 더 이상 도망칠 수 없게 된다. 네가 계속 쫓아오고 있다.

  <형제여!> 우리의 침묵이 외친다. <형제여, 형제여!> 내 동족이 외친다.

  읽는 자들이 외친다. 우리는 벽력같이 침묵한다. 우리는 거대한 합창으로 침묵한다. 우리는 너를 위해 침묵한다. 이름도 꽃도 관도 없는 너의 무덤.

  나는 두 팔을 활짝 펼치고, 내 동족에게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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