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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승차하자마자 그녀가 무섭게 훑은 건 물론 빈자리의 여부
다. 새벽 열한시 남으로 가는 심야버스에 그 이상의 미덕
은 없다. 카드 단말기에 대충 부비듯 핸드백을 대면서 눈
은 빈자리를 찾는데 저기 저 뒷자리 구석… 말고는 웬
사내가 앉은 2인용 좌석 하나밖에 없으니 앞으로 30분간
은 젠장이군. 그녀는 낯모르는 남자와 비좁게 어깨를 들
이밀며 내내 조는 척 하고 싶진 않았다. 그녀는 어디에도
앉아있기를 단념한다.  

버스가 5분쯤 구르고 나서 그녀는 5분전 선택을 후회했다.
길이라기보다는 고도 몇 센티라고 불러야 적당할 힐굽이
그녀에게 오늘 하루 미친 거리를 미친 듯이 걸어 다닌 대
가를 요구했다. 아무래도 힐굽이 발꿈치를 꿰뚫어버린 모
양이군. 게다가 그녀가 올라 탄 것은 고객이 가장 방심했
을 때 급출발하는 취미를 지닌 고약한 버스였다. 멍청하게
나가떨어질 수도 있었지만 그녀는 간신히 오른팔로 손잡이
를 나꿔챘다. 정신적으로는 신은 힐로 버스 기사의 머리통
을 박살내면서 그녀는 자신을 구원한 오른팔에 검은 생머
리가 철철 흐르는 머리를 기댔다. 너 오른팔이여. 오늘 하
루 주인을 배불리 먹이고도 한 번 더 나를 구하는구나.

자부심을 지닌 여류 소매치기의 오른손 넷째 손가락에는 찬
란한 호사인 듯 은반지가 걸려 있다. 남의 것도 내 것도 잃
으면 잃고 얻으면 얻고 그뿐. 이라는 주의를 지닌 그녀가 특
별하게 아끼는 예외 사례가 바로 그 반지였다. 가장 신경이
날카로운 문정동 노파의 손가락에서 쥐도 새도 모를 솜씨로
훔쳐냈지. 직업 정신의 기념품이랄까. 이름도 없어 무명지(無
名指)라는 손가락에 낀 그 은반지는 항상 장식용으로 생각하
고 있지만 오늘은 조금 다를 모양이다. 급정거라는 카드가
남아있는 만큼 손잡이를 꽉 쥔 채로 열어본 핸드폰을 세 번
쯤 다시 열어보던 그녀는 언뜻 은반지에 비친 어떤 남자의
윤곽을 보았고, 아무 생각 없이 그 남자를 확인했다. 첫인상
까지는 무신경하게 규정되었다. 평균치 보다 반반? 아하, 아
까 그 유일하게 옆자리가 비어있던 사내. 강남에서 제법 후
리다가 왔을 법한, 말쑥 자르르 반반에 노는 티 나는 20대
후반의 남자다. 거기에 한 가지만 더해지지 않았다면 그녀는
심야버스가 액션 카처럼 사거리에서 한바퀴 돌아버린대도 꾹
참고 앉지 않았을 요량이었다… 왼편 앞섶, 짙은 와인레드
톤의 벨벳 손수건 하나. 눈이 확 뜨였다.

미친놈이 아니고서야 코도 푸는 손수건을 벨벳 소재로 장만
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그가 희귀한 미친놈이라 그녀가
플립을 딱. 닫고 그를 노려보냐면 그건 아니다. 그녀도 좋은
본보기가 되는 미친년이니까. 적어도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고
(말로는) 170만원짜리 (라는) 핸드백을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2년 전 자신과 같은 년들을 하루 따먹고 날아가는 제비들이
조금 멋있지만 다 죽여버려야 한다고 생각하고도 있었다.
2004년의 그 죽일 놈은 강남의 점잖지 못한 바에 드나들 때
슈트 안주머니에서 와인레드 톤의 벨벳 손수건 하나를 꺼내
흔들어 보여 주곤 했다. 몇몇 순진한 여자들한테 말고, 강남
의 몇몇 바나 가라오케 웨이터들 사이에서만 통용된다는 그
손수건의 의미를 아는 사내놈들에게만. 그 의미는 이른바
‘꾼’이라는 뜻이다. “나 많이 열심히 심도 있게 후렸소.”

제 3자의 입장에서라면 그녀도 얼마든지 그 유치한 수컷들의
거시기 자랑에 대해 따사롭게 웃어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어떤 유치한 장난도 자기의 일이 되면 웃을 수 없는 법이다.  
그녀는 그 제비새끼를 다시 만난다면 상상할 수 있는 최대치
의 방법으로 그를 죽여 놓겠다고 콱 다짐했다. 뭐 2년이 지나
다보니 거의 잊어먹기는 했지만 놈이 꽂고 다니던 그 코 풀기
힘든 소재의 손수건만은 기억에서 치워지지 않았다.

알맹이는 다르지만 틀림없이 손수건은 그 손수건이다. 그녀는
누가 알아볼지도 모르는 그 손수건을 꽂고 유유히도 심야버스
를 타는 눈앞의 사내가 참 2년 전의 그 개새끼와 닮았다고 생
각한다. 뻔뻔함까지도. 그녀는 사내의 옆에 턱 앉았다. 원래
심야버스에서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윤리는 유행 지난 개그쯤
으로 취급되었다. 남자는 줄곧 서 있던 여자가 덜컥 옆에 앉
는데도 놀라지 않았다. 창밖만 볼래? 이 새끼야.

「어디까지 가요?」

남자의 눈동자가 빙그르르 슬라이딩. 네? 하고 물어라.

「죽전 갑니다. 그쪽은요?」

역시 구제할 수 없는 제비새끼구나. 상시 혀가 찰랑찰랑.

「호호... 처음 보는 여자가 말을 건네는데도 안 놀라시네요」

「특별히 여자 분이라 그런 건 아닌데」

「왼 종일 힐을 끌고 다녔더니 도무지 서 있기 힘들더라구요.
입은 심심하고 다리는 심심할 필요가 있고. 그래서 둘 다 해
소해 버리기로 했죠」

「그러셨군요」  「아. 대답을 해야지. 전 양재까지 가요」

「허. 네 정거장 다음인 양재까지 시외버스를 타신다고」

「늦게까지 놀다보니 이 시간엔 다른 버스가 없더라구요. 그
래도 택시보다는 이게 더 싸게 먹히니까요」

「걷기엔 날도 춥고」

「제 말이 그거죠」

남자는 고속 스캔하듯 그녀를 훑는다.

「강남은 나도 좀 아는데... 어디서 놀다 오시는 길이죠?」

「N바요. 이곳저곳 돌아다녀 봤는데 거기가 제일 괜찮더라
구요. 뭐 시원찮은 직장 다니면서 J바나 M바 같은 데에 몇
장씩 붙이고 나올 수도 없는 노릇이니 맘 편히 놀려면 거길
가게 되더라구요. 좀 시시하지만」

「시시한 바는 안 가느니만 못한데. 저도 자주 가는 건 아니
지만 친구들 말을 듣고 거기는 시마이했어요. 쏘는 이 조명
부터 자동차 헤드라이트를 박아놓은 것처럼 멍청해서 영 아
니라던데」

「그래요? 아이. 그럼 더 나은 데로 옮겨볼까」

「원래 그쪽 골목이 다 그래요. 깊숙이 못 들어오는 애기들
푼돈이나 모으려고 역 앞에 훤히 내놓고 차려놨지, 좀 아는
사람들이 가는 데는 코 묻은 돈 취급 안 하죠. 어디 저 이태
원에 배 나온 중늙은이들이 가는 데처럼 퇴폐적이지 않으면
서도 그렇게 빵빵 터지는 데가 가다 보면 다 있어요. 아... 뭐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제가 자주 가는 건 아니고」

「거짓말. 발로 뛰면서 체크해본 언변인데요 뭐」

「거 뭐 좋은 사업이라고 발로 뛰면서 합니까. 이녁 먹은
남자들은 앉아 있어도 술술 들어오는 얘기가 이거죠」

「흠... 나이가 몇 살인데요?」

남자는 이것 봐라, 하는 눈빛이다.

「작업하시는 겁니까? 미안하지만 난 피곤한데」

「장난치지 말고요. 저랑 비슷한 또래 같은데」

「스물일곱」

「스물일곱? 호, 저도요」

「어쩐지 이름이라도 물어볼 태세인데」

「물어주길 바라는 눈치인데요」

「헛다리 놓는 걸 보니 춤출 때 스텝이 엉망이겠어요」

「이름은 왜 싫어요? 빵빵 터지는 바 얘기는 잘 해놓고」

「그건 나에 관한 얘기가 아니었으니까. ESSE 골드의 맛이나
여성부가 저지른 멍청한 짓들에 대해선 누구한테나 떠들 수
있죠」

「정말이지 남자들은 자기 얘기를 제일 싫어한다니까」

「헤어진 애인이 도통 자기 얘기를 안 했었나보군요」

「좋아요. 항복. 그쪽도 나도 이름 같은 건 말할 수 없는 거라
고 치죠」

「근데 언제부터 ‘나’라고 한 겁니까?」

「어차피 이 버스가 하나씩 뒷문으로 토해 놓고 나면 못 볼
인연이잖아요? 그쪽은 죽전 하차, 나는 양재 하차. 우리의
시간은 5분도 안 남았어요. 밀도 있게 친해지고 훌훌 아디오
스 하는거죠」

「좀 다른 방식으로 사고하는군요. 나 같으면 그렇게 시간이
짧으니 남남으로 헤어지고 말아야지 생각할 텐데」

「사고라니, 어려운 말 쓰네요. 이런 심야버스 안에선 사고라
는 걸 할 수 없어요」

「놀랍도록 단정적인 데가 있는 분이네요」

「나 같은 여자가 흔하진 않을걸요」

「자아도취가 취미인가」

「당신은 평-생 겪어보지 못할 경험을 하고 있는 거예요. 일
단 나는 지금 당신이 내일 출근길에 처음 만난 친구에게 우
쭐거리며 말할 수 있는 화젯거리를 제공하고 있잖아요. “이
봐, 어제 구제할 할 수 없는 년을 하나 만났는데…” 」

「곁들여서 마조히스틱한 취미도 있네」

「똑똑한 말을 잘 쓰시네. 나도 한마디 하자면 관계의 일회
성이란 소중한 거예요」

너 같은 녀석들이 가장 듣기 좋아하는 말을 해주고 있는 거야.

「한번 만난 이상 일회적이라고 말할 순 없지요. 우연이 우릴
또 같은 장소로 집어던질 수 있으니까. 이를테면, J바나 M바
로ㅡ」

「2분도 지나기 전에 이름난 바마다 발로 뛴다는 사실을 고백
하셨군요」

「맘대로 해석해요」

「그렇다면 새로 만나서 다시 밀도 있게 친해져요. 난 그쪽이
맘에 드니까」

「원래 잘 들이댑니까?」

「원래 냉소적이에요?」

「누가 등뒤에서 구토할지 모르는 칙칙한 심야버스 안에서는」

「나랑 정반대의 취향이군요. 바에서는 너무 들큰해서 오히려
신이 안나요」

「신이 나 보이긴 하네요」

「어머나. 이제 뱅뱅사거리에요. 사오분도 채 안 남았네. 우리
말 놓을래요?」

「이보세요. 우리 만난지 십여 분도 안 됐어요」

「그쪽이 ‘우리가 만났다’는 식으로 사건화해주니 기쁜데요」

「대학에서 뉘앙스 비틀기를 주제로 논문이라도 발표했겠군」

「중얼거리지 말고요. 난 그냥 서로의 존재를 깡그리 부정한
다는 식으로 따분하게 눈꺼풀 안쪽을 노려보며 집에 가고 싶
지 않아서 그래요. 내가 이런 식으로 손 내미는 게 불쾌하거
나 싫은가요?」

「싫다기 보단, 뭐」

곧 내릴 여자는 못 벗기니까 그렇겠지.  

「그러면 곧장 곯아떨어지고 싶은 사람처럼 불퉁거리지 말
구요」

「알겠어요, 알겠어. 내 하해처럼 마음을 열지」

「슈트가 멋진데 그쪽도 어디 다녀왔나 봐요? 강남?」

「아, 나도 그냥 바에서 적당히...」

관심에도 없는 소리가 어쩌고 저쩌고.

「아하하, 아. 하. 근데 둘 다 놀다온 사람치곤 술을 별로 안
마셨네요」

「어디 취하려고 가나요. 흔들러 가지」

「아무리 봐도 그쪽은 시시하게 논 타입은 아니라니깐. 나,
직업이 직업인만큼 사람 한번 척 보면 잘 빗나가질 않거든요」

「무슨 바람직한 직업을 가지셨길래」

「막상 명함 내밀면 쑥스러운 직업이에요. 부지런히 사람 만
나고 이 사람 물건을 저리, 저 사람 물건을 이리 옮겨놓는 정
도랄까」

「몸이 고단한 일이군요. 여자 분이 서른 넘어서 까지 가지고
갈 일이 아닌 것 같은데」

「놀랍도록 단정적이신 데가 있군요」

「그거 내가 아까 썼던 말 아닙니까?」

「정말이지 여자란 모든 걸 다 기억하는 동물이라서요」

「아무튼 주변에 비슷한 케이스가 있어요. 혼기가 다 찰 때까
지 연수다 사업차 조사다 자기 몸만 죽어라 옮겨놓다가 정작
결혼식장엔 못 옮겨다 놨죠. 혹시 그쪽이 독신주의라면 모르
겠지만」

「아뇨. 늘 독신주의는 개나 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럼 다른 일 한번 찾아봐요. 힐 구두를 신고 그런 일 하려
니까 집에 가는 버스에서 서 있기도 힘들지. 몸 망가지면 결
혼할 때 돼서 후회합니다」

「어머, 지금 걱정해주는 거예요? 울어도 될까요?」

「……」

「왜 대답이 없어요? 혹시 나한테 끌리고 있다면 곤란한데」

「그쪽에겐 두손 두발 다 들 수밖에 없군요. 그만 내릴 준
비나 하시죠」

「아?」

「지금 말죽거리잖아요. 안 일어나면 중앙차로를 지나칠지도
모릅니다」

「그러게요… 아쉬워 죽겠네」

「만남은 진하게, 이별은 쿨하게」

「알겠어요. 멋대가리 없는 남자 같으니라구」

「잘 가요」

그녀는 엉덩이를 들었다가 주저하는 척 다시 앉았다.

「근데 있잖아요」

「차비는 나도 없는데」

「따라 내리지 않을래요?」

남자는 기가 막혔기 때문에 그녀가 바라마지 않던 대답을
했다.

「미쳤군요」

「좀 더 진한 만남이 될 수도 있을 텐데」

그녀는 웃음기 없는 얼굴로 빤히 남자의 눈을 들여다본다.
갑자기 진지해진 그녀의 태도 때문에 남자는 어안이 벙벙
해진 모양이다. 남자는 장성한 남녀가/충동적으로/밤에 만
나서 할 수 있는 일에 대해서라면 상당히 제한된 항목 외
에 교육받은 적이 없었다. 남자는 신중히 대답을 생각했다.
갖가지 대응책이 생각났다. 「부저 눌러라, 미친년아」라
든지… 아니, 꼭 거칠게 대답할 필요는 없지. 그녀의 짐작
처럼 남자도 쪽팔릴까봐 잡아먹지 못하는 타입은 아니다.
그의 신조란 본래 “내것이라 짐작되면 차선이라도 취한다“.

「장난이에요, 장난. 까르르」

그녀가 남자의 가슴팍을 팍 치면서 그렇게 웃어버리지 않았
다면 남자는 어떻게 행동했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녀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유쾌하게 웃어버리고
일어나는 바람에 남자는 아무 행동도 할 수 없었다… 로 끝나
야 유효한 스토리가 된다고. 그녀는 생각했지만.

남자는 거의 무심결에 그녀의 야들야들한 오른손목을 턱 잡는
다.

그녀는 살짝 놀라서 어깨를 움츠리고, 어정쩡하게 그녀를 잡
고 있는 남자와 어정쩡하게 서 있는 그녀가 탐색하듯 서로의
눈을 들여다본다. 까맣고 빛나지 않는 눈이다. 그녀는 아주
힘들여 피식 웃고는 천천히 손목을 비틀어 빼냈다. 남자는
잠자코 자신의 손아귀 안에서 빠져나가는 여자를 보고 있다.

어느새 버스 문이 열리고 앞 귀퉁이에서는 웅성웅성 취객들이
타기 시작했다. 자신이 당연히 우선순위로 앉아서 가야한다고
생각하는 어떤 노인이 앉지도 일어서지도 않은 그녀를 험상궃
게 노려보았다. 자리를 내놔. 그녀는 몸을 돌렸고, 버스에서
내렸다.

남자는 입맛을 한번 다시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버스에
서 내린 여자가 거기 서 있었다. 내릴 때와 딴판으로 그녀는
환히 웃고 있었다. 저건 거의 상냥하다고 표현해도 될 지경인
데. 한 번 더 입을 다시며 남자는 손이 1천 톤 무게는 된다는
듯이 낮게 들어 인사했다. 고개를 돌려 다시 무관심 속으로
침잠하려는 찰나, 남자는 한 가지를 발견했다. 환히 웃으며
작별인사를 하는 여자의 오른손에 들려 있는 건 다름 아닌
자신의 와인레드색 벨벳 손수건. …?

남자는 자지러지게 튀어 일어난다.

「뭐, 뭐!」

잘못 보진 않았다. 그는 정신없이 왼편 앞섶을 더듬었다. 없
었다. 감쪽같았다. 그 빌어먹을 년이 자신의 손수건을 들고 있
다는 사실이 전부였다. 순식간에 빌어먹을 년으로 격하된 그
여자는 보란 듯이 손수건을 흔들며 핸드백에서 운동화를 꺼내
고 있었다. 그는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망할, 망할, 어쩐지… 저 망할!」

옆에 새로 앉은 노인이 험악하게 입을 오물거렸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27년 평생 이렇게 입을 헤벌리고 당한
적은 없었다고 그는 믿었다. 그 믿음이 지금 그를 정신 흘린
고자로 만들고는 옆에서 신명나게 낄낄거리고 있었다. 신발
갈아 신는 그녀를 멍청하니 바라보면서  도대체 언제 빼내
갔지? 저년은 그럴 틈이 없었고 눈치로 하루 네끼도 차려먹
을 내가 그것쯤 몰랐을 리가 없는데. 하긴 하도 괴상한 접근
이라 경계할 생각도 못하긴 했지. 모조리 싹 망할!

그러는 사이에 버스는 출발하기 시작했다. 강간의 조금 더 순
화된 표현으로 ‘관광’이라는 말이 있다. 결단코 부정하고 싶었
지만 남자의 모든 감수성은 지금 자신이 저 여자에 의해 관광
버스를 태워져 집에 보내지고 있다고 외쳤다. 틀려! 나는 그런
멍청이가 아니야. 그러자 그 섬세한 감수성이 대꾸했다.  

「그렇담 당장 뛰쳐나가 저 여자 잡아!

한편 일류라 자부하는 여류 소매치기는 하이힐을 핸드백에
처넣은 다음에 남자를 향해 빙그레 웃어주었다. 아무 말도 하
지 않는 대신 그녀는 다음에 해당하는 손짓을 해주었다.
“쪽팔리면 쫓아와 보시지.” 그 손짓은 검지 중지를 오만하게
쳐든 채 안쪽으로 까닥거리는 동작으로 구현되었다. 젠더 상
남자라면 자신이 지상 최대의 멍청이가 되었다고 생각하게 만
들기에 부족함이 없는 동작이었다. 그러면 그 시각 버스 안에
있던 한 마리의 남자는 어떻게 했을까…

아마도 한 마리 여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며, 이를 한번 부
드득 갈고 나서, 이렇게 말했으리라.

「아저씨... 여기 손님 하나 내립니다








30






「장난이에요, 장난. 까르르」

그녀는 기술 좋게 남자의 가슴팍을 치고 돌아오면서 손수건을
빼냈다. 손수건을 왼손으로 바꿔치고 슬그머니 퇴장하려는 찰
나, 남자가 척 손목을 붙드는 통에 머리끝이 쭈뼛 일어서긴 했
지만 그 둔탱이는 딴 데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Game Over.

자존심 하나에 죽고 못 사는 짐승들, 한번 죽지 않기 위해 겨
울밤 체조를 해보는 건 어떠실까요? 그러기 위해서는 잘 단련
된 다리가 있어야 하겠지요. 왜?

「날 쫓아오려면 그 정도로는 안 되지!」

하얀 입김으로 부서지는 말들이 통쾌하다. 남자는 구두굽이
박살날 만큼 달려오고 있었지만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아무려면 네가 잔뼈 굵은 지하철 공익보다 빠르겠니? 그녀는
경찰에게 쫓기던 솜씨로 강중강중강중 뛰어갔다. 물론 열 살
때부터 분당토박이이니 양재역 쪽이 집이라는 말은 거짓말이
다. 하지만 그녀는 이 일대를 눈 감고도 다닐 수 있었다. 날
아간 옛 제비새끼가 한철 둥지를 틀었던 곳이 여기였거든.
여기서 데이트를 하고 여기서 사랑을 하고…  

「잡히기만 하면 따 먹어버린다」

「자기 주장이 늘 강한 양반이라니깐」

남자가 이를 가는 소리가 한 블럭 건너서까지 날아오는 듯
하다. 그녀는 느물거리면서 모퉁이를 돌았다. 여기서 키스를
하고. 숨어진 기억 속의 자취가 살아나려는 것을 피하려고
그녀는 살짝 편의점 속으로 들어갔다. 얼어버린 볼과 반대로
전기히터 속의 호빵은 말랑말랑 잘 익은 볼처럼 보였다. 적당
히 진열대 안쪽에 서서 새하얀 호빵을 뜯어 먹으며 그녀는
유리 창밖으로 죽어라 달려가는 남자를 관찰했다. 너는 나를
그냥 지나쳐… 누구 노래더라. 빵 부스러기까지 남김없이 우
겨넣은 그녀는 편의점 문을 열고나오며 들으란 듯이 말했다.

「어머! 웬 놈이 흘리고 간 꼬추를 밟았어」

한 블럭쯤 지나쳐 달리다가 그 소리를 들은 남자가 얼마나 상
심했을지는 짐작이 어렵지 않다. 남자는 노호하며 뒤를 돌았
고,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는 늘어붙은 개똥을 처리할 때처럼
신발밑창을 바닥에 대고 쓱쓱 문지르는 동작을 선보였다. 남
자는 과장 없이 돌아버렸다. 남자는 저년이 자기를 약올리기
위해 지하차도에서 기어 나온 멥피스토라 생각했다. 남자는
7대 악마처럼 포효하며 쫓아갔다. 그녀도 승천예정일이 멀지
않은 선녀처럼 나풀나풀 날아갔다.  

「이봐! 스톱! 얘기 좀 하자!」

생각다 못해 그가 외쳤다. 과연 여자는 그 말을 듣자마자 빙그
르르 돌아서며 과연 그가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하다는 듯이 그
를 쳐다보리라… 는 건 제길. 야무진 착각이군. 여자는 들은 체
도 하지 않고 나풀인지 너풀인지 뛰어 가고만 있었다. 그는 이
를 악물고 뛰어가며 한 호흡 당 한번씩 외쳤다.

「멈춰- 멈춰봐- 제발- 이- 아리따운- 아가씨야-!」

그러자 여자가 딱 멈췄다. 맙소사. 그녀들의 허영에 저주 있으
리라. 남자는 현기증을 느끼며 남은 두세 발짝을 마저 털고 멈
춰 섰다. 지축을 울리던 구둣소리가 멎자 그녀도 예의바르게
뒤를 돌았다. 최초의 휴전협정이 서명되려는 찰나였다. 지나가
던 빌딩 하나가 몹시 궁금하다는 듯이 둘 사이를 굽어보았다.  

(정신적으로) 그녀가 남자의 볼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진작 그렇게 불러봤어야지」

(정신적으로) 남자가 그 손을 물어뜯으며 말했다.

「너는 미친 게 틀림없어」

「다시 뛸까?」

「아, 좋아, 좋아요, 아가씨. 도대체 아가씨의 목적이 뭐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자존심을 뺏어 달아나네. 목적이 뭘까요?」

「너 진짜 나 좋아하는구나」

그녀는 쿡쿡 웃으며 손수건을 흔든다.

「로맨티시스트에겐 복이 있으리. 하지만 사실을 알려줄게요.
난 베테랑 소매치기이고 널 먹잇감이라고 생각했어. 얼빠진
생각이나 하고 있으면 곤란하지」

남자는 아랫니에 바람을 쏘였다.

「배부른 고양이처럼 가르릉거리고 있군 그래. 비싼 물건 아냐.
땀 빼지 말고 돌려 줘」

「고작 이걸 돌려받으려고 그렇게 쫓아오셨다?」

「물론」

「그리고 이걸 돌려주면 고이 돌아가시겠다?」

「물론」

「멋없는 놈들. 가끔은 유물론 이외의 방식으로 살아봐」

그녀가 한걸음 뒤로 걸었다. 똥줄이 타는 기분을 느낀 남자는
급히 한걸음 따라 걸었다.

「좋아 잠깐! 레이디가 좋아하는 방식에 대해 듣길 원하오」

「웃는 얼굴로 남의 가슴에서 빨간색을 뽑아가는 식이랄까」

「고약한 방식인데」

「네 방식이기도 해」

남자가 말을 안 한다. 예의바르게도 그녀가 대답을 훔쳤다.

「그러니 나도 훔칠 거야. 아무 양해 없이. 억울하면 내 팔을
뒤로 꺾은 다음 도로 훔쳐 가봐」

「날 알고 있어?」

「비슷한 놈은」

그녀가 두 걸음 뒤로 걸었다. 남자는 난처하게 웃었다. 지난
15분간의 교훈을 되새겨 볼 때 저 여자와 심폐지구력을 견주는
일은 최하수(最下數)였다. 켕기는 구석이 있는 모든 남편들이
그러는 것처럼 남자는 점잖게 대화를 시도했다.

「봐 줘」

「휴전 회담 끝났어」

「뒤로 걷지 마. 분명 더 좋은 해결책이 있을 거야」

「난 할말 다 했는데」

「이봐, 나 말고 어떤 놈에게 데였던 모양인데 그걸… 」

「나 이제 뛴다?」

「잠깐, 잠시, 조금만! 어… 사실 널 사랑해왔어! 제기랄, 스톱!」

「나 잡아봐라!」

「매우 사실적으로 죽일 년!」

기어코 남자의 울분이 터졌다. 남자는 길길이 날뛰며 그녀의
등 뒤에 폭언을 쏘아댔지만 그녀는 헐리우드 여주인공처럼 그
단어들에 한대도 맞지 않은 채 골목으로 잠입하는 데 성공했
다. 닳은 느낌이 나는 골목은 이제야 오냐는 식으로 무지근히
그녀를 통과시켰다. 수세에 몰린 가로등이 소극적으로 골목 한
켠에서 불빛을 켜들고 있는 아래, 사람들이 찬 입김으로 마법
을 부리고 있는 광경이 거기 있었다. 그녀는 거기 뛰어들어
댄서가 되었다. 조금 점잖지 못하긴 하지만, 그녀에게 뜨거운
고백을 전달하고 말리라는 일념(「거기 서지 마! 태워버릴테니
」)으로 불타는 또 하나의 남성 댄서도 있었다.

어느 한 골목을 노려보며 남자가 외친다.

「실연후유증을 이런 식으로 해소해선 안 돼」

어림없는 방향에서 그녀가 대답했다.

「혼잣말 하니?」

남자는 고개를 홱 돌렸다. 전신주 몸통에서 자라난 그녀의 머
리가 보였다. 둘 사이의 거리는 스무 발짝도 안 된다. 그녀는
여차하면 전신주를 타고 올라 F.M.라디오전파처럼 사방으로
방송(放送)되어버리겠다는 기세였다. 그렇다면 남자는 최초로
광속을 붙잡으려는 사나이에 도전할 것인가. 빛에 들키지 않으
려고 남자는 골목 벽에 복병해있던 그림자를 먼저 보냈다. 슬
금. 슬금. 묘한 장난기에 사로잡힌 네 개의 눈이 암실에서 이
루어지는 그림자놀이를 노려본다. 그리고 마침내, 구척 장신의
그림자가 그녀를 덥석 끌어안기 전에, 그녀는 전희 도중 빠져
나가는 깍쟁이처럼 질컥 뒤를 돌아 도망쳐버렸다. 남자는 한숨
을 길게 쏘고는 또 한번의 체포극을 개시한다.

뛰고,
둥둥둥, 뛰고 또 뛰고.

아주 길고 긴 골목길에서 지쳐버린 둘은 꼭 20미터의 간격을
두고 터벅터벅 걷기도 하였다. 덜 지친 건 그녀 쪽이지만, 그
녀는 이 도주극을 아주 끝장 내버리는 대신 보란 듯이 아슬
아슬한 간격을 유지하며 걷고 있다. 저벅하면 저벅. 저벅저벅
하면 저벅저벅 그녀는 두 팔을 엇갈려 자기 어깨를 폭 껴안고
걸었다. 휘발하기 쉬운 요 불안과 흥분, 시큰한 미련 따위를 다
가슴에 감금해두고 싶었다.          

「통속적이야」

「뭘 말이야」

「미모의 결혼적령기 여성과 그녀를 추적하는 호색한」

그녀는 뛸 준비를 했다. 하지만 남자는 성내지 않았다.

「사람 사는 게 통속적이야. 지금 존나게 일탈적인 이 상황은
아닌 것 같지? 그러니까 시답잖은 농담이 나올 테지만」

「지금 숨찬 상태인데 너 말 그렇게 붙여서 해도 돼?」

「헥헥헥」

「통속성을 싫어하는 로맨티시스트 살려」

「헥. 아무튼 이놈의 체조도 내일 아침이면 깨끗이 봉합되고
말걸. 무지막지한 끼니 식사에 밀려」

「그래서 이름난 바마다 발로 뛰시고」

「그래서 이름난 외투마다 손을 넣어보시고」

「농담하지 말자. 그래서라니, 역겨워서 토하고 말겠네.」

「입버릇 정말 까칠하시군」

「버스 안과는 사뭇 다르지? 내가 이렇게 공사가 엄밀하단다」

「그래. 아주 십년지기 같아서 껴안아 으스러뜨리고 싶구나」

「힛 더 포인트!」

「뭐?」

「친하단 건 상대에게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할지 확실하게 안다
는 거야.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겠다? 싶으면
그게 흔히들 말하는 예의상의 관계라는 거고」

「갑자기 웬 개소리야」

「요는 내가 너에게 친밀함을 강요했다는 거지」

「알아듣게 말해」

「골룸아, 내가 니 프레시어스를 훔쳤으니까 너는 버스 안에서
처럼 이리 재고 저리 재며 쩔쩔매지 않아도 돼. 순수하게 으스
러뜨리고 싶다는 분노만 느끼면 되니까」

「그래서 우리는 친해졌다?」

「미친 소리」

두 사람은 소리내어 웃었다.

「다시 뒤돌아라. 너 그러다 잡힌다」

그녀는 코방귀도 뀌지 않았다.

「남자 놈들의 근거 없는 자신감은 늘 신기하단 말야. 백이면
백 지는 주제에 항상 상황을 자기가 통제하고 있다고 여겨버
리는 그거 있잖아. 갈 데 없는 오만함」

「내일은 꼭 이혼전문의를 찾아가 봐」

「미녀는 미혼이거든, 잡놈아? 모르냐」

「금시초문이야… 양재 산다는 늙수그레한 사모님이 독신주의는
개나 줘야 한다고 말했던 건 기억나지만서도」

「지금 니가 나 잡으러 오는 거 맞지」

「반대로 하고 싶어졌냐?」

「이리 와서 내꺼 뭐 하나 훔쳐가. 죽기 직전에 체포한 다음
좀 느긋하게 패고 싶네」

남자의 눈에 이채가 떠오른다.

「너도 남을 쫓아갈 용의가 있다는 건가」

「그럼. 죽여 놔야지」

「입술을 훔친다면 대나무밭(竹田)까지라도 쫓아오시겠네?」

「자빠지고 있네. 결단코 네 입에선 방금 썩은내가 났을거야.
어쩌다가 저 지지리도 못난 놈에게 내 비급을 알려줬을까」

「비급이라」

「채고치인 내 인생사를 직업정신으로 승화시킨 내용이야. 굳
이 말하자면 스틸의 미학 정도랄까」

「좀 전에 저기 있는 개가 웃지 않았니?」

「원래 훔치는 건 이별을 막는 차선수거든. 그리고 드라마
같은 내 인생사에 최선수는 별로 본 적이 없는 것 같아」

남자는 갑자기 중얼거렸다. “끊임없이 서로의 것을 훔치며
떠나지 못하게 하는 것.” 작은 소리라 잘 들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미간을 찡그리며 물어보았다.  

「뭐라고 했지?」

「아무것도. 지껄여지는 말들에 목을 매는 성미니?」

「전혀」

「널 잡을 거야」

그녀는 흠칫 하고는 걸음을 멈췄다. 남자는 이상하다는 듯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10초 후, 남자는 경쾌하게 호령했다.    

「뭐해? 널 잡는다니까. 존나게 뛰어!」

미터 단위가 즉각적으로 그녀를 배신했다. 20m 떨어져 있던
남자는 한번 퉁기는가 싶더니 그녀의 지척에 와 있었다. 가
까스레 몸을 돌린 그녀는, 한 백 미터쯤 얼떨떨하게 달리다가,
치밀어 오른 괘씸함이 이내 그 얼떨떨함을 흔적도 없이 분해
해놓자마자 발빠르게 거리를 벌려 나가기 시작했다. 어딜 감히!
그녀의 튀기는 기술적이다. 아마도 남자는 그녀의 뒤를 쫓아
오다가 몇 번이나 행인들과 부딪힐 뻔했으리라.  

뒤도 돌아보지 않는 달리기는 계속된다.





또,15





「장난이에요, 장난. 까르르」

여자는 기술적으로 그의 가슴팍을 치고 돌아오며 손수건을 빼
냈다. 딴 생각에 골몰해 있던 그는 조금어치도 짐작하지 못했
다. “내것이라 짐작되면 차선이라도 취한다”. 먹잇감이 눈앞을
빠져나가는 상황에서 그는 또 그 나름대로의 실리를 두드려보
느라 바쁜 처지였다. 아무튼 그는 여자의 오른손목을 턱 잡았다.  

「오, 그대의 이름은 라비앙 로즈. 나의 심장을 삼킨 베아트리
체… 이년아, 빨리 그것을 던지지 못해」

그는 속았다. <종생기> 식으로 말하면 속고 또 속고 또 또 속고
또 또 또 속았다. 그렇지 않고서는 똑같이 골목길을 빠져나온
처지에 그는 개천가에, 여자는 다리 위에 올라와 있을 까닭이
없지 않은가. 다리 위 한복판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저 불여시
같은 년은 그가 떠들어대는 무수한 애원과 사탕발림을 은근히
즐기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러면서 그가 거의 줄리엣에 대한
헌정 세레나데를 한 2막 2장 정도 읊어대는데도 능청을 떨고
앉아 있지. 그는 부르르 떨었다. 추워서는 아니다.

「대체 언제 올라간 거냐아앗」

여자는 난간에 고개를 디밀고 싱글싱글 웃는다.

「여자의 비밀에 대해 많이 알려하지 마. 올라오시지?」

「힘들어서 이제 더는 못 해」

「떠들다가 제풀에 지친 꼴이로군」

「맘껏 비웃어. 내가 졌다. 갖고 튀든지 나르든지 니 알아서 해」

마리오네뜨 끊어지듯이 털썩 앉으면서 그가 말했다. 시외버스
로 장장 두 정거장 되는 거리를 빙빙 돌며 뛰어왔으니, 슈트와
구두가 망가진 건 그렇다 치고 어디 굴러들어가 내일 정오까지
푹푹 잠들어 버렸으면 하는 소망만 간절했다. 여자는 록다운 걸
린 그를 곰곰이 내려다보고 있는 눈치였다. 망할 것아. 상대가
항복했으면 건물 부수지 말고 깔끔하게 End Mission 눌러라.
그는 아무 곳이나 응시하면서 아무렇게나 생각했다. 어디 가서
소문도 못 내고 다닐 오늘날의 상황은 되새겨 보는 것만으로도
인체에 유해할 것 같았다.

그런 상태로 시간이 적지 않이 흘렀다. 5분? 10분? 지금 담배
를 꼬나물면 국보급 처량남이 되는 거다. 어쩌고 하는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여자가 다리 위해서 말했다.    

「올라와」

천사가 말했다.

「가져 가라구」

그는 자신의 귀를 거의 믿을 수 없었다.

「뭐야?」

「돌려준대도 못 알아듣고 지랄이야」

여자는 그렇게 말하고는 난간에서 몸을 뗐다. 그는 눈을 껌뻑거
렸다. 진짤까? 정말로 돌려주고 사태를 종결짓자는 거야? 하지
만 그는 이내, 근 45분 간 자신이 저 여자에게 속은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해보지 못했다는 것을 상기해냈다. 따라서 그는 반신
반의했고, 동시에 자신이 반신반의한다는 사실을 감추려 했으며,
결과적으로는 숙제 안 해온 날 발표를 호명당한 아이처럼 쭈뼛
거리면서 간이계단을 하나씩 밟아 수직을 오르기 시작했다.

여자는 도망가지 않았다.

다리의 시작지점에 서서, 그는 오른손에 붉은색 벨벳 손수건을
붙든 여자를 바라보았다. 한산한 양재천 일대에는 지랄맞게도
아무것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달이 예쁘다는 게 기가 막히고
화가 났다. 원치 않았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어떤 문장이 구체화
되었다. “월광이 아름다운 밤, 한적한 다리 위에서 한 여자의
손수건을 얻으려…“ 작작하자. 도망치면서도 이상한 소리만 늘어
놓는 여자와 근 한 시간을 보냈더니 나까지 이상해졌잖아. 저
손수건은 저 여자 것도 아냐. 그제서야 그는 곰처럼 씩씩거리며
여자에게 걸어갈 힘을 얻었다. 당연한 권리 행사를 자꾸 움츠러
들게 만드는 힘에게 촙을 먹이며 그는 걸어갔다.

「……!」

열 걸음쯤 남았을까. 별안간 여자는 손수건 든 오른팔을 난간
밖으로 확 쳐들었다. 엄지와 검지만으로 집힌 채 휙휙 나부끼
는 붉은 손수건을 보며 그는 새삼 다리 위를 날아다니는 강
바람의 존재를 인식했다. 손수건으로서는 목숨이 명재경각에
달리게 된 셈이었다. 이를테면 깃대가 두 손가락의 결합만
떼어버리면 영영 수장(水葬)될 노스탤지어의 처지랄까.

그러면 네 그렇지. 그가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끝까지 약을 올리는구나. 좋겠네, 재밌겠어?」

하지만 여자는 넉살좋게 맞받아치지 않는다. 손수건 인질극이
발발한 이후 한 호흡이라는 장구한 세월이 흘렀다. 그가 쏘아
보낸 독설은 아직도 들어갈 구멍을 찾지 못하고 이리저리 헤
맨다. 할 말이 없다. 여자가 돌연 받아치지 않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눈들이 마주쳤고, 그는 그럼에도 여자가 무슨 말인가
하려 한다는 것을 알았다. 여자는 입을 열었다.

여자는 아, 까지 말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인지 아닌지는
모른다. 그냥 아, 에 해당할 만큼 입을 벌리다가 목소리를 채
싣지 못하고 관두었을 뿐이다. 그는 답답했다. 신들린 듯이
조잘거리다가 이제 와서 실어증 흉내를 낸다는 건 언어도단
이었다. 27년 평생에 적용되는 그의 오래된 답답함이 또 한
번 문장으로 구체화되었다. “이 여자가 왜 이러는 거야?” …
그는 고따위 생각이나 하고 있다가 여자의 말을 거의 놓칠
뻔 했다.  

「… 가져가기 전에, 키스해 줘」

실루엣을 삼키며 암전.

달빛이 꺼진 오프라이트에서 남자는 문득 생각했다.  

그러면 이 여자는 처음부터 무슨 생각이었을까. … 그는 새
삼스레, 하나의 충동을 가장하고 누군가의 삶에 개입하기로
결정지은 여자를 생각하여본다. 아니면 한시적 유희가 성에
차지 않아 더 위험한 장난에 손대려는 여자를 생각하여본다.    
이 모두가 착각일 수 있다. 끔찍한 건 사실, 착각이고 아니
고가 그에겐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아무 데서나 지
퍼 열었다가 훌훌 떠나버리는 생물에게 진실이란 것, 하차할
때 두고 내리는 물건쯤 되면 다행이지. 45분, 장하구나. 진실
과 허위가 서로의 탈을 바꿔 쓰고 놀아나는 짧디짧은 파란만
장이여.  

그는 주의 깊게 남은 거리를 걸었다. 여자는 꼼짝하지 않았다.
도저히 달아날 수 없는 거리로 좁혀질 때까지도 여자는 꼼짝
하지 않고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남남인 남녀가 유지하는 오
오라 범위 안에 그가 성큼 들어왔을 때도 여자는 꼼짝하지 않
았다. 그가 허리를 잡았을 때에도, 여자는 꼼짝하지 않고 있었
다.

그의 입술이 닿기 직전에 여자는 그의 뺨을 후려쳤다.

착! 드라마에서 나오는 소리는 나지 않았다. 붉은 손수건이 붙
은 그 오른손바닥으로 쳤기에, 순전히 그의 턱이 돌아갔다면
뺨에 감기는 매서운 손맛의 데미지 탓은 아니었으리라. 난간
밖으로 완전히 배제되었다고 느껴진 오른팔이, 그가 다가들 때
까지 고요히 수평만을 유지하며 지켜보고 있던 그 오른팔이
회수되면서 눈앞의 남자를 밀쳐내고 덤으로 전리품마저 야유
하듯 그의 발치에 내어던졌던 것이다.

그는 비틀거렸고, 두 세 걸음 떨어지다가 불안하게 멈췄다.

「이게 뭐…!」

항의해야 했지만 여자가 틈을 주지 않았다. 고작 몇 초 지켜
보다가 뒤돌아서 걸어가 버렸으니까.

그는 맞은 뺨을 감쌌다. 아프다는 느낌은 없었다. 다만 이 거대
한 사기극을 완수하고도 아무 감흥 없이 사라지는 여자의 걸음
걸이를 멍하게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다리는 아치형이었다.
떠나가는 여자는 낮아지다가 사라졌다.

거센 밤바람이 불어, 임자가 신경 쓰지도 않는 손수건은 아무렇
게나 구르다가 난간봉을 한번 애무하곤 휘, 날아갔다. 기록적인
종말이었다.    




「왜 따라왔어?」

인도변에서 심야버스를 기다리는 이삼십 명의 무리들은 마치
도강(渡江)하려는 무리들처럼 보인다. 시무룩한 인파들 사이에
끼어 있던 그녀는, 무심코 자기 뒤에 따라와 서 있는 그를 발
견하고는 냉정하게 묻는다. 더 말하지 않음으로써 훨씬 많은
말을 하는 종류의 물음이었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절친한 친구들이 본다면
배알 쑤셔 넣어주리? 라고 제안해올 만큼이나 멍청한 웃음을
지어보일 뿐이었다. 그녀는 구질구질한 느낌이 혈관으로 스며
드는 것 같아 숨이 막혔다. 제일 싫어하는 류의 결말이야.
이따위 건 싫어.

분당행 버스가 오고, 그녀가 뒤도 없이 올라탈 때에도 그는 시
종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간신히 자리를 차지한 그녀
가 흘낏 내다보았을 때에도 그는 그 모양이었다. 내가 사람을
잘못 본 모양이군. 저렇게 피가 빨리 끓는 철부지라고는 생각
하지 않았는데. 하지만 자기를 한 시간 가량이나 조뺑이 치게
한 다음 뺨까지 때리고 떠나간 여자에게, 아무 해꼬지할 요량
도 없이 저렇게 헤벌리고 있는 건 사랑이라는 멍청한 증후군
이외의 어떤 증상으로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과감하게도,
그 꼴을 보고 있느니 차라리 잠들기로 결의하고는 자세를 편
하게 고친다. 아닌게 아니라 그녀도 많이 지쳐 있었다.

이상한 하루였어. 눈이 스르르 감긴다. 꾸역꾸역 올라타는 승차
객들의 소음을 들으며, 그녀는 잠들 것이다. 그리곤 내일 아침
이면 어젯밤의 그 기이한 소동에 대해서는 깨끗이 잊어버리겠
지. 자장자장. 그녀가 막 외부와의 연결을 끊으려는 때였다.

톡톡톡. 어떤 손이 그녀가 앉은 창가의 창을 두드린다.

그 멍청이인가. 곧장 짜증을 내며 그녀는 머리를 쳐들었다. 예
상대로 그였다. 그는 창을 세게 두드려 그녀의 주의를 끈 다음,
자신이 잘 보일 수 있도록 뒤로 슬슬 물러났다. 그녀는 아주
예의바르게 웃어준 다음 신경을 치우려고 했다. 한 가지만 아니
었다면 결단코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가 오른손 무명지(無名指)
에 끼고 흔들어 보이는 자신의 은색 은반지만 보지 않았다면.

그녀는 벌떡 일어섰다.

「엄마야!」

막 들어오던 승차객들이 그녀를 대단히 미친 사람으로 보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녀는 정신없이 자신의 두 손을 들어
은반지를 수색했다. 분명코 아름다운 자태로 자신의 오른쪽 네
번째 손가락, 무명지에 끼워져 있어야 할 반지가… 거기 있을
리가 있나. 저기 창밖의 남자가 흔들어 대고 있는 저 은반지가
문정동 노파에게서 쥐도새도 모르게 훔쳐낸 그녀의 은반지가 맞
는걸.

저 개자식이 그녀의 은반지를 훔쳐갔다는 사실이 전부다. 참말
로 그것만이 그녀 사정의 전부였다. 반면에,

"그의 사정"? … 어렵지 않다. 한 시간 전에 어떤 여자가 자신에
게서 빠져나가고 있었고, 그녀의 손목을 붙들었으며, 손목을 놓
아주는 척 하면서 고가의 은반지를 슬쩍 빼낸 밖에. 나중에 알
게 된 사실이지만, 그때 여자는 여자 나름대로 손수건을 빼내간
뒤라서 정신이 없었다나 뭐라나.

그녀는 배신감이 충천한 표정으로 창밖을 노려보고 있었고, 그는
아까 전부터 짓고 있던 의미심장한 미소를 심화 확대하여 아주
본격적으로 킬킬거리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카운터 스트라이크에
어느 정도 도취되어 있기도 했다. 그녀의 생각과는 달리 달밤의
난데없는 체조는, 애초에 아주 일방적인 추격전은 아니었다니깐.

확확 분기가 치솟는 가운데에서도 그녀는 침착하려고 애썼다.
그 시도는 거의 성공할 뻔 했다. 고쳐 말하자면 창밖에서 그가
아주 겸손한 표정으로, 검지 중지를 쳐든 채 안쪽으로 까닥거
리는 제스처만 취해보이지 않았다면 성공했을 확률이 높았다.
그 의미는 명명백백했다. 실제로도 그는 입을 벌려 이렇게 말
했다.

「쪽.팔.리.면.쫓.아.와.보.시.지.요」

그녀는 미쳐버렸다. 젠더 상 여자라면 자신이 행위무능력자가
되었다고 느낄 그 동작을 눈 뜨고 편안히 볼 수는 없는 노릇이
었다. 그러면… 그 시각 버스 안에 있던 한 마리 여자는 어떻게
했을까.

부저를 부수듯이 누르며 앙칼지게 외쳤겠지.

「아저씨! 여기 손님 하나 내려욧!」

아하, 끔찍한 생이여 다시 한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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