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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ingfantasy.pe.kr   여기까지 온 건 사실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이야

   너는 목말라하며 왔지만 막상 목을 축이면 물 같은 건 추구할 가치가 있는 무엇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돼

   다만 네 몸뚱이가 살려져 있기 위해 요구되는 것뿐이라고.

   이제부터 나의 인생은 물을 갈구하는 일의 연속일지 모른다. 평생토록 물보다 중요한 무엇을 갈망할 기회를 박탈당한 채 놓여 있을지 모른다. 내가 아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이 손 안에서 빠져나가는 물방울의 사소한 반짝임에 고개를 끄덕이는 정도의 퇴폐만이 치명적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이런 생각을 털어놓아봐야 비웃음만 사리라 생각했다. 나는 몹시 두렵고 화가 나 있었다. 어쩌면 고독했다. 내가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는 항상 불분명했다. 가장 강렬하고 뚜렷한 것은 감정 이전의 것들, 욕정, 불안, 신경질 뿐이었다.

   “일단 포기해 두는 게 좋아.”
   “무엇을?”

   돌파구를 찾겠다는.

   인정받겠다는.

   친구를 얻겠다는.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을 거야. 목적하는 바로 그것을 포기해.
   아니, 절망하기 위해서가 아니야.
   받아들이는 거야.
   아마 너는 받아들인다는 게 뭔지도 모를 거야.”

   플레이어의 말이 맞다.

   이곳에서 얻으려던 희망을 포기하라는 요구는 새로운 계기를 얻는다는 설레임을 죽이라는 말과 같았다. 가짜 신 게임은 내가 변할 계기가 아니라는 말이었다. 나는 당혹도 실망도 하지 않았다. 절망과 비슷한 감각이 스멀거렸으나 확신할 수 없었다.

   “절망은 책 속에나 있어.”

   플레이어는 재미있어하는 것 같았다.

   “절망은 간접경험할 수는 있어도 직접경험할 수는 없는 거야. 그러니까 절망하고 싶다면 절망하는 인간을 창조해봐.
   창조는 골치아픈 짓이야. 에너지와 스테미너를 소모하는 짓이지.
   지금의 네 힘으론 창조를 감당할 수 없어.
   너는 단지 누군가의 부산물이야.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배설물일 뿐이지.”

   플레이어는 웃었다. 나는 플레이어의 대사에 그다지 상처입지 않았으므로, 그가 내 반응을 보고 재미있어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플레이어는 악의적인 말을 내뱉는 자체가 즐거운 모양이었다. 악의적인 말이 어떤 쾌락과 연결될 수 있을까?

   그때, 내 가슴의 돌이 확 달아올랐다. 플레이어는 그 붉은 열기를 느끼고 멈칫했다.

   “너, 궁금해하고 있군? 호기심을 느끼고 있군? 목적과 희망을 포기하고도 네겐 그게 남는군?
   하지만 벌써 꺼져가는군. 역시 너에겐 힘이 없어. 괴롭나? 발버둥치고 싶나? 그것조차도 제대로 못하는군.”

   플레이어가 소란스러워졌다. 그 소란이 의견을 주고받는 소리라고 알아차린 나는 플레이어를 이대로 단수취급할지 복수로 고쳐 대해야 할지 조금 혼란스러웠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 정도 호기심은 누구에게나 있어. 호기심을 자존심의 근거로 삼지는 않도록 해.”

   플레이어의 대사는 여전히 악의적인 기운이 묻어 있었으나, 환부를 깨끗이 도려내는 날카로움 때문에 기분 좋았다.

   “인사는 이쯤 해 두고, 본론으로 들어가지.
   네가 이 곳에 온 건 별 것 아니야.
   이제부터 너는 테스트를 받게 돼.
   테스트의 결과는 모든 게 끝나봐야 알 수 있을 거야.”

   모호함이 모호함의 꼬리를 무는 플레이어의 화법은 의문감을 오히려 막아버렸다. 나는 수긍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테스트는 가불가를 판가름하지 않아.” 다행히도 플레이어는 부연 설명을 해 주었다. “네가 어떻게 치르든 넌 가짜 신 게임에 참가하게 될 거야. 이 첫 테스트의 의미가 맨 마지막에 드러난다는 건, 만약 네가 성공적으로 테스트를 넘긴다면, 네가 겪는 모든 과정들이 의미있게 될 테지만, 그렇지 못한다면 네가 어떤 과정을 겪든 결국 모든 게 시간낭비였다는 게 드러나게 된다는 뜻이야.”

   부조리하다고 생각해? 마치 주최측에 의해 이미 질 것으로 예정된 선수가 온갖 고생을 하며 시합을 치러가는 꼴과 비슷하다고 생각해? 아니야. 네게 내려진 테스트는 좀 더 질이 나빠. 왜냐고? ‘주최측’이 네 외부에 있는 무엇이 아니기 때문이야.

   플레이어는 테스트를 판단하지 않아. 문제를 제시하는 게 고작이지. 판단은 너 스스로 하는 거야. 안색이 안 좋군. 네 예상보다 훨씬 질이 나쁘지?

   하지만, 사실 이건 아주 쉬워. 너 스스로에게 잘 했어, 됐어 하고 한 마디만 하면 되거든. 타인에게 칭찬받기와 스스로에게 칭찬받기, 어느 쪽이 쉽겠어? 타인의 의지는 타인의 것이지만 네 의지는 네 거야. 입을 열어. 그리고 스스로에게 호의적인 대사 한 마디만 하면 돼. 아주 간단한 일이야.

   한번 해 봐.

   해 봐.

   …….

   넌 떨고 있군.

   이것 봐, 벌써 결정나 버린 것 같지 않아? 굳이 테스트를 받을 여지도 없지 않을까? 넌 알고 있어. 지금의 너라면 무엇을 해도

   “하겠어.”
   “…….”
   “난 할거야.”

   그것 외에는 다른 할 일이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지, 하고 플레이어는 조소했다.

   네가 이미 포기했다는 사실을 잊지 마.

   “문제라는 게 뭐야?”

   진실이야.

   뭐?

   문제는 단 하나다. 진실이야. 어느 정도의 진실이 담지되어 있는가,

   혹은 어느 정도의 진실로 커나갈 수 있는가

   다시 말하지만 포기하는 게 좋아

   반석 위에 아름다운 건물을 짓겠다는

   네가 하는 일은 진흙탕 안을 방황하는 것과 같을 뿐이니까

   네 주위를 둘러봐

   네 실어증을 직시해

   내가 할 수 있는 조언은 여기까지야.

   네가 최고로 잘 해낸다고 해도, 변하는 건 없어,
  
   여전히 진흙탕 안을 방황하는,
  
   고독한, 실어증을 앓는,

   ‘그것’일 뿐이야.



   아, 어쩌면 이렇게 좁을까, 내 세계는? 최상의 가능성과 최하의 가능성이 바로 지금과 마찬가지로 ‘진흙탕’일 뿐이다.

   별볼일없다, 이 표현이 이렇게까지 어울릴 수 없다.




   가짜 신 게임에 대해, 나는 막연한 선지식밖에 갖고 있지 않았다. 게임의 방식은 프리 라이팅이다. 그렇기에 시나 논문이나 설명문보다는 소설에 가까운 형식이 된다. 플레이어라 불리는 게임 참가자들은 서로에게 주제나 소재를 제시하고, 결과물을 돌려 읽으며 평가한다.

   플레이어는 작가가 아니다. 작가 지망생조차 아니다. 플레이어와 글쓰기의 관계는 평범한 사람과 그 인생의 관계와 비슷하다. 평범한 사람이란 자기 인생에 대해 아무 비전도 목적도 없이 그저 일단 주어진 것인 한 어떻게든 좋아졌으면 하고 바란다. 그것뿐이다.

   ‘가짜 신 게임’이라는 기묘한 명칭에 관해서 추측해본다. 아무래도 소설가와 작품의 관계가 창조신과 세계의 관계와 비슷하다는 데 착안하지 않았을까. 일리 있는 작명이지만 역시 주제넘는다. 가짜 신 게임의 플레이어들은 무슨 생각으로 자신들을 신이라 칭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플레이어다. 나를 신이라고 칭해 본다. 의외로 그다지 감상이 없다. 스스로를 신이라고 칭하며 가슴을 펴는 인종은 애초에 어떤 식으로든 스스로에 대해 자신감이 있어야 한다. 가짜 신 게임의 플레이어는 그런 인종이 될 수 없다. 나는 내가 아무것도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스스로를 신이라 칭하는 일은 아무 의미가 없거나, 고작 자학하는 뜻밖에 없다.

   나는 게임을 할 테지만 게임을 통제할 수 있으리라 믿지 않는다. 나는 이기기 위해 게임을 하지 않는다. 즐기기 위해서도 아니다. 나는 무엇 때문에 게임을 하는 걸까.

   가짜 신 게임은 차라리 막다른 골목의 게임이라고 불려야 한다.

   아니다. 막다른 골목의 게임은 어쩐지 필사적인 느낌이 든다.

   진창 속에서 죽어가는 게임이다.

   아니다. 우리들은 이미 죽어 있다.

   더이상 독백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갈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관심사를 외부로 돌리자. 하지만 어디가 내 외부일까? 플레이어는 포기하라고 했다. 포기해, 라는 목소리가 절절하게 들려온다. 많은 걸 포기해도 너는 호기심만은 간직하고 있군. 하지만 호기심을 자존심의 근거로 삼지는 않도록 해. 자존심은 외부가 있어야 가능하다. 호기심 역시 마찬가지이다. 자존심과 호기심에 필요한 외부의 강도는 다르다. 호기심은 최소한의 외부만 있으면 된다. 최소한의 외부란 단지 거기 놓여 있는 외부이다. 자존심이 없는 나는 외부에 내 능력을 행사하고 외부가 나에게 복종할 수 있다는 것을 모른다. 나는 그런 외부를 갖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포기해야 한다. 포기해라.

   포기하면서 플레이어들은 도대체 무엇을 얻으려 하는 걸까. 어째서 가짜 신 게임일까.

   패배자들의 게임이군. 패자들끼리 시작해서 패자들로 끝나지. 인생의 패배자라는 민망한 표현을 쓸 수밖에 없어. 이 녀석들은 자기 인생을 통제할 능력이 없으니까 가상 공간에서 통제력 비슷한 걸 느껴 보겠다는 것뿐이야. 가짜 신이란 그런 의미라고.

   원래 내가 글을 쓰는 이유가 그런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이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지금 무엇을 하는지 너무나 무지했다. 숨이 막힐 지경으로. 그래서 도망쳤다. 가짜 세계의 가짜 신 노릇을 하며 만족한 것이다. 앞으로 내가 살아갈 길도 그런 무지몽매의 안개가 가득하고 잠깐 깜박이는 환영만이 위안거리가 될 것이다. 구제의 여지가 없다.

   플레이어는 ‘진실’이라는 단 하나의 조건을 말했지만 나는 자신없다. 이제와서 진실이라니…….

   나의 모든 것을 수식으로 정리해버렸으면 좋겠다. 수식으로 정리될 수 없음이야말로 인간적이고 고귀하다는 논리는 지긋지긋하다. 그런 논리를 펴는 인종은 한물 간 관점을 답습하고 있는 나와 닮은 패배자들일 뿐이다. 어째서 모든 것이 말끔하게 정리될 수도 있고 그렇게 하려는 게 훨씬 고상할지 모른다는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을까? 이놈들은 자살도 할 수 없어. 인간의 삶은, 생명은, 주변 사람들의 심정은, 에트세트라. 결정적인 순간이라는 걸 한 번도 접해 본 적 없는 놈들이나 그렇게 변명을 늘어놓지.
  
   진실이 요구하는 것은 결국 “1+1=2”와 같다. 간명하지 않은 진실 같은 건 필요 없다. 간명하지 않은 진실은 도대체 얼마나 많은 허위를 허용하고 있을까.

   진실이 요구하는 것은 결국 예스/노 일 뿐이다.

   “지금의 나로는 역시 무리예요.”

   그래도 나는 예스를 선택했다. 노였더라면, 적어도 수치스럽지는 않았을 텐데.




   테스트 게임 :


  

   “너는 글을 쓰는 사람들을 믿지 못하는군?”
   “다 그런 건 아니에요. 그 중 일부만 불신하죠.”
   “왜 못 믿는 거야?”
   “그 사람들의 허위가 무서우니까요.”
   “허위가 무섭다?”

   나는 마치 엘리자 프로그램과 대화하는 기분이 들었다.

   “일단 나는 소설가 소설이나 그 비슷한 걸 혐오해요.” 나는 팔의 닭살을 쓸어내렸다. 과장이 아니었다. “그런 건 왠지 미심쩍어요. 전혀 상관 없는 세계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내 얘길 들어라, 내 얘기야말로 들을 가치가 있다고 주장하는 듯한 장르가 소설가 소설이라는 물건이라고요. 왜 다른 사람들이 정말 재미있게 시간을 보낼 만한 이야기를 쓰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 거죠?”

   “글쎄, 그건 오해가 아닐까. 소설가 소설이란 오히려 대중독자의 비위를 맞추는 소설보다 고차원적인 것이야. 스스로를 성찰하는 일만큼 고상한 게 어디 있겠어?”
   “그런 논리는 고리타분해요. 스스로를 성찰하라니, 어째서 그런 말을 태연하게 할 수 있는 거죠? 건강한 인간에게 성찰 같은 건 필요 없어요. 느끼고 행동하는 단순한 삶이야말로 가치가 있는 거죠.”

   어쩌면 내가 품는 소설가 소설에 대한 불만은 그 장르 자체라기보다는, 그 장르에 기대는 여러 무능한 작가들에게 향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나는 그렇게도 쉽게 자기 이야기를 해 버리는 작가 같은 건 정말 못 믿겠어요.
    
   자기 신세타령이나 줄줄 늘어놓는 것, 그건 너무나도 쉽죠. 자기 신세타령이라는 걸 감추기 위해 알레고리를 장치하는 것은 그보다는 어렵지만 어차피 쉬워요. 무엇보다 쉽냐고요? 정직한 독자들의 혼을 홀랑 빼 놓을 만큼 가슴 벅찬 스토리를 쓰는 것보다 쉽죠. 불가능한 살인사건에 대한 완벽한 해법을 고안해내는 것보다는 쉽죠. 현세계와 전혀 다른 논리를 가진 다른 세계에서 벌어진 대전쟁에 대해 쓰는 것보다는 쉽죠.

   그런데도 자기 얘기나 쉽게 쉽게 늘어놓는 주제에 잘난척하는 작가들을 보면 화가 치밀어요. 저 자식들은 자기가 하는 일이 정말로 어렵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그렇다면, 그 일이 어려운 게 아니라 단지 자기 능력이 딸려서 그렇게 느껴질 뿐이라는 가능성은 생각해 보았을까?

   분명 네 관점도 일리가 있지만, 하고 플레이어는 말했다. 그는 귀에 착착 감겨들 듯한 맑은 저음을 갖고 있었다. 그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보호받는 기분이 들었다.

   그건 기본적으로 네가 비난하는 작가들과 너의 소설관이 다르기 때문일 거라 생각해. 네가 기분 좋게 생각하는 소설들은 말하자면 현실적이지 않아.

   현실적이지 않다고요? 이번에는 내가 엘리자가 되었다.

   모험이나 환상이 주축이 되는 이야기들이라는 거야. 현실세계엔 모험도 환상도 없지. 네가 비난하는 작가들은 자기가 발 딛고 있고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현실의 문제에 천착하는 거야. 소설가 소설의 작가는 이 현실에서 자신이 소설가라는 것과 소설 그 자체에 무슨 의미를 갖고 있는지 고민하고 그 과정이나 결과를 작품화하는 사람들이야.

   그래서 그렇게 작품세계가 비좁은 거군요. 나는 비웃을 심산이었지만, 내 목소리는 어리광처럼 들렸다.

   오히려 문제는 그 작가들이 비난 받을 만한가가 아니라, 네가 왜 그들을 비난하는지에 있어.

   무슨 뜻이죠?

   네 비난의 전제를 잘 생각해봐.

   전제요?

   소설이 어때야 한다고 생각해? 플레이어는 내 대답을 잠시 기다린 후, 말을 이었다. 네 전제는 비현실적이고 강렬한 이야기가 진정한 소설이라는 거야. 이게 무슨 뜻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네가 원하는 게 그런 비현실적이고 강렬한 이야기라는 거지. 이것 자체가 나쁘다는 말은 아니야. 문제적인 건 그 원인이야.

   원인요?

   플레이어는 투명한 눈으로 새삼 나를 쳐다보았다. 그가 내 모습을 무엇으로 보고 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입을 열며 내게서 눈을 돌렸다.

   그 원인이란, 너에게 네 현실이 재미가 없다는 거야. 살 만한 가치는커녕 이유조차 알 수 없도록 말이야. 그런 상태의 인간에겐 적어도 그런 현실을 잊을 만한 대리현실을 주는 매체가 선이겠지.

   플레이어의 두 손은 그의 무릎 위에 올려져 있었다. 가볍게 깍지 낀 손모양이 편안해 보였다. 그는 자기 손을 보며 말하고 있었다. 사람과 눈 마주치기를 꺼려하는 내 성미를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어쩌면 그의 시선처리는 나의 주의를 자신의 손에 돌리기 위해서일지 몰랐다. 그는 자신의 손모양이 발휘하는 힘을 알고 있었을까?

   느닷없이, 도망치지 마, 하고 플레이어는 말했다. 놀라서 고개를 드니 플레이어는 나를 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했어? 도망치지 마.

   죄송해요. 아니, 나는 아무 것도…….

   당신 말이 맞아요. 하지만 그게 어쨌다는 거죠? 사람들은 모두 어느 정도 다른 현실을 꿈꾸며 살아요.

   사람들이 모두 그런가 안 그런가 따위가 논거가 될 수 있나? 사람들에 맞춰 살아도 된다는 생각은 포기해.

   플레이어는 다시 무릎께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기다렸지만 그는 말하지 않았다.

   나는 받아들였다.

   그건 당신 말이 맞아요. 내가 무서워하는 허위는, 나는 잠시 숨을 끊었다, 자기 현실에 불성실하면서 다른 것을 찾는 사람들의 허위예요. 별볼일없는 현실을 사는 주제에 휘황찬란한 대리현실을 찾고 쓴다는 게 견딜 수 없어요. 소설가 소설이라는 건 내 머릿속에서 그런 불성실함의 상징인 것 같아요.

   플레이어는 웃었다.

   손등의 섬세한 근육이 잔물결을 탔다. 곧 그는 어깨를 떨며 웃었다. 우후후후후후, 하는 웃음이었다. 그렇게 음악적인 웃음은 처음이었다.

   왜 기뻐하죠?

   기뻐하는 것처럼 보여? 플레이어는 반문하고, 곧 스스로 답을 내놓았다. 아니 아니, 네가 정확히 봤어. 나는 기뻐하고 있어. 너는 네 그런 생각이 쓸데없고 멍청하고 왜곡되었다고 생각하지?

   그렇게 정곡을 찌를 필욘 없잖아요.

   아하, 아니야. 그건 네 생각만큼 쓸데없고 멍청하고 왜곡된 게 아니야. 하지만, 플레이어는 내 쓸데없는 기대감을 잘랐다, 대단한 것도 아니지. 말하자면 아주 평범한 거야.

   어떤 면에서요?

   평범함을 ‘어떤 면에서’ 설명한다는 건 무척 어려워. 딱 집어 말할 수 없음, 이 평범함이라는 거니까. 굳이 말하자면, 여기서 평범하다는 건 착상이 대단한 것도, 도출과정이 어려운 것도 아닌 아이디어라는 뜻이라고 해 두겠어. 그냥 그렇다는 거지. 너의 그 생각이 딱히 네 열등함의 증거인 건 아니야. 그렇다고 우월함의 증거도 아니고. 네 개성의 증거는 될 수 있지만 너의 개성 자체는 열등하지도 우월하지도 않고, 다른 개성들에 대해 미세한 차이를 가질 뿐이야.

   다른 개성들에 대해 미세한 차이를 가질 뿐인 개성이 평범한 건가요?

   그렇지, 오히려 다른 개성들과 똑같은 개성 같은 거야말로 몬스터러스. 갑자기 플레이어는 이상한 어법을 썼다. 무언가 동요하고 있는 걸까? 그렇게 보이지는 않는데도 말이다.

   그런 건 말장난일 뿐이지만, 하고 플레이어는 중얼거리고, 곧바로 대화를 진행시켰다. 너의 생각은 그걸 누가 갖느냐에 따라 달리 평가될 거야. 만약 훌륭한 사람이 생각했다면 훌륭한 생각이겠지. 하지만 너에겐 부정적인 것 같군.

   어째서죠?

   복잡하지만, 첫째로 그 생각은 너 자신의 불성실함과 허위의 반동현상이야. 둘째로 그건 너 자신과 능력은 없지만 죄도 없는 문필가들을 쓸데없이 증오하는 근거가 돼. 셋째로 그 생각 때문에 넌 다른 생각을 할 여지를 빼앗겨. 산 하나를 망치는 아카시아들처럼 뿌리도 깊고 용량도 크니까.

   당신은 나의 그 생각을 끌어내서 무엇을 어쩌려는 거죠, 하고 나는 떠오르는 대로 말했다. 그걸 분석해서 내 마음을 치유라도 할 생각인 건가요.

   내가? 플레이어는 어깨를 으쓱했다. 난 할 수 없어. 나는 엘리자니까.

   엘리자…….

   내가 네 상처 같은 걸 보듬어 줄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포기해. 말했지? 넌 포기해야 한다고.

   앞으로 네가 무언가를 기대할 때마다, 네 가슴에 희망이 떠오를 때마다, 포기하라고 말할 거야. 이곳은 기대할 것도 희망할 것도 없어. 네가 기대할 만한 것, 희망할 만한 것은 외부에 있어.

   외부?

   가짜 신 게임의 외부.






   그러니까 이 곳에 너무 자주 오지 않도록 해.






   아름다운 엘리자와 헤어지고 나는 혼자가 되었다. 무척 씁쓸한 기분이었다. 엘리자는 많은 도움을 주었지만 나는 아무 도움도 받지 못했다. 불길했다. 나는 이미 실패하고 있을까? 그럴지도 모른다.

   한편, 나는 소름끼치는 생각을 떠올렸다. 어쩌면.

   어쩌면 내가 이곳에서 실패를 해도, 결국 아무 상관없을지 몰라.

   내가 이곳에서 실패만을 거듭해도, 결국엔 모든 게 좋았더라고 끝날지도 몰라.

   플레이어는 말했다. 테스트 게임의 결과는 모든 사태가 끝나 봐야 알 수 있다고. 그 말은 곧, 테스트 게임의 결과가 어떻든지 결과는 그 결과대로 갈 거라는 뜻이나 같다. 테스트 게임의 결과가 사태의 결과를 좌우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둘은 아무 상관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지금 비참하다고 느끼는데도, 끝나는 순간 모든 게 좋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지금 순조롭다고 생각해도, 끝나는 순간 나락에 떨어질지 모른다.

   아아, 포기해야 하는 거구나. 테스트 게임의 결과에 기대하는 것조차.

   신경 쓰지 말라는 의미였구나. 무엇을 해도 소용없으니까.

   다른 사람 같으면 속 터져 죽을지도 모르는 기묘한 논리에서 나는 신적인 것을 느꼈다. 신적인 힘이라기보다는, 신적인 무엇의 존재감이었다. 인과와 순서를 구분할 필요가 없는 세계에 신은 있었다. 나는 신에게 기대하기를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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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ICKY 님은 현재 문학공부를 하고 있는 대학생입니다. 많은 문제작들을 쏟아내지만 도통 결말을 볼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발간 예정인 [환타지 읽기 중단편선 Ⅲ]에 기나긴 중편글을 하나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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