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혼맞이

2021.07.19 12:3207.19

“이미 죽은 사람을 다시 죽이면 어떻게 되나요?”


나는 간절히 물었다. 저승 가는 길에도 흥신소가 있다는 걸 알고 꺼낸 첫마디였다. 장례식도 없이 세상을 떠나온 내 통장 속 아주 적은 돈 중 일부를, 나현 언니가 노잣돈으로 쥐여줬단다. 그렇게 가져온 노잣돈은 저승 가는 여정 중 쓰고 싶은 곳에 쓸 수 있다고 했다, 그가. 사람들은 보통 어디에 그 돈을 쓰는지 묻자, 그는 보통들 흥신소에서 찾고 싶은 사람을 찾는다고 했다. 나는 이곳의 흥신소도 사람을 찾고 나서 죽이는 일도 하는지 궁금했다. 그는 앳된 얼굴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경우는... 저도 아직 직접 보지 못해서요.”


“보지 못하셨어도.. 저승사자라면서요! 그러면 규정은 아실 것 아니예요.”


“...”


답이 없었다.


“그렇게 찾아서 죽이고 싶은 사람이 누구세요?”


“아버지요.”




사람이 죽으면, 생전 가장 사랑하던 사람의 얼굴을 한 저승사자가 저승으로 데려간다고 한다. 내가 영원히 눈을 감았다 다시 떴을 때, 앞에 있는 건 낯선 얼굴이었다.


“저... 원래는 선생님이 가장 사랑한 분의 얼굴을 하고 와야 하는데요, 생전에 사랑한 분이 안 계셔서 그냥 이렇게 온 점 이해해주세요.”


이해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고, 담담히 뒤를 따라갔다. 길을 걸으며 흥신소 이야기와 부친 이야기를 했다.


“부친이 먼저 돌아가셨군요.”


“네.”


“실례지만, 저승에서 찾아서까지 죽이고픈 이유가 무엇인지 여쭈어봐도 될까요?”




부친은 애매한 알콜 의존증이었다. 매일 술을 마시긴 했는데, 부친이 내게 행한 일들이 술 때문만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부친은 나를 탐하면서 동시에 증오했다. 왜? 라는 질문, 수도 없이 받았다. 성인이 되고도 심하게 얻어맞아 처음으로 경찰에 고소를 접수하러 갔을 때, 상담소를 찾았을 때, 어쩌다 상황을 알게 된 지인에게서... 친부가 어째서 그러더냐, 는 질문을 들었다. 나는 그 물음표 뒤에 숨길 의지도 없이 숨겨진 의도가 내 말에 대한 의심이라는 걸 알면서 모른 척 해야 했다. 그걸 부친에게 물어야지 왜 나에게 묻지? 가장 알고 싶은 건 나란 말이다. 이유를 찾자면 짐작해볼 수도 있었다. 불만족스러운 결혼생활, 불우한 성장과정, 같은 좆같은 핑계들을. 그렇지만 그게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집안을 저승처럼 쑥대밭으로 만들며 부부싸움을 끝내고 나면, 부친은 꼭 내 방으로 왔다. 캄캄한 방 안에서 부친의 손이 내 몸을 훑었다. 훑었다... 그렇게 느껴졌다. 방은 아주 어두웠고, 나는 겁을 먹은 채였다. 어쩌면 그래서 그렇게 느꼈을까? 어쩌면 부친은 술에 취해 감상에 젖었을 뿐이었나? 그래서 평소에 전혀 대화도 스킨쉽도 없던 딸을 그렇게 만진 것인데, 그 일에 이상함을 느낀 내가 이상한 걸까? 아니, 애초에 부친이 나를 만지기는 했나? 질문은 끝이 없었다. 분명한 사실 하나는 내가 아주 괴로웠다는 것뿐이었다.




내가 대답이 없자, 그도 말이 없었다. 말이 없는 채로 한참을 걸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만약 부친을 찾아내 죽일 수 있다면, 바로 죽이길 원하시나요?”


“네, 당연하죠...? 어, 바로 죽이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건데요?”


“그러니까... 만약에 죽이기 전, 마지막으로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거나요.”


나는 그 질문이 그가 아까 꺼낸 질문의 다른 표현임을 알았다. 왠지 이번에는 답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사람이 아닌 사자 앞이라도, 망설여졌다.


“지금 저한테 말하시는 게 좋아요.”


“왜요?”


“...아무튼, 선생님을 위해서 그게 좋아요. 무슨 말씀을 하시더라도 제가, 아무 탓도 하지 않고 들어드릴게요.”




“나는, 너 때문에 죽기 전까지 매일 악몽을 꿨어. 식은땀에 젖어 잠에서 깨면 방에 네가 없어도 있는 것처럼 무서워서 벌벌 떨었어. 남들이 멋대로 내 몸을 만져도 따지지도 피하지도 못했어. 사랑한다면서 추행 같은 키스와 강간 같은 섹스를 하는 남자들과 만나며 그걸 연애라 불렀어.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걸 몰랐어, 너 때문에. 사람을 제대로 믿어보지도 못하면서. 나는 너 때문에 속이 썩어서 젊은 나이에 병까지 걸렸어. 그런데 너는, 너는, 죽기 전까지 거짓말을 해 주변에 나를 미친년으로 만들었지. 네가 만든 새끼한테, 어떻게 그랬니 이 개새끼야?”


이승에서는 하지 못한 말을 처음으로 쏟아냈다. 이승에서는, 그래야 했다. 모든 게 부친 탓은 아니었을 것이다. 매일 강간을 당하며 자란 사람도 있는데, 나는 더 징징댈 수도, 그렇다고 내 이야기를 남들처럼 자유롭게 할 수도 없었다. 어딘가에서는 흔한 이야기이며, 어딘가에서는 듣는 것만으로 모골이 송연해져 거리를 두게 만드는 것이 내 삶이었기 때문이다.




말을 끝내니 울음이 북받쳤다. 이승에서는 잘 울지 않았다. 여기서 나는 엉엉 운다. 그가, 삼베로 된 손수건을 건넸다.


“망인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은 금기라서요...”


나는 흐린 눈으로 손수건 끝자락을 찾아 건네받았다. 까슬하니 아파서, 울음을 잦아들게 하기엔 딱이었다.


“손수건이 많이 까슬하네요.”


“그게, 써볼 일 없는 이들이 만든 거라서요...”


머쓱한 얼굴로 답이 돌아왔다.


“잠깐 쉬었다 갈까요?”


나란히 길에 앉았다.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저승길도 똑같이 걸으면 다리가 아프고, 바람이 불면 시원하구나.


“마음 놓고 거리를 걷고 싶고, 진정한 사랑을 하고 싶고, 사람들과 행복하게 지내고 싶으셨을텐데... 아프지 않은 몸으로요. 그러지 못하셨다니 마음이 아파요.”


그가 나를 가만히 쳐다봤다.


“다... 똑같은 사람으로 태어나는데 말이에요.”


“그런 게, 해보고 싶었어요. 내가 태어나 죽는 날까지 한 번도 누려보지 못한 것들이요. 왜냐하면... 너무 궁금했거든요.”




고르지 않은 말들을 마구 쏟아내고 나니, 아무래도 부끄러웠다. 사람이 아닌 존재라 생각했고, 이승도 떠나온 마당에 마음껏 털어낸 것이지만... 이 길은 너무나 세상 같고, 그는 너무나 사람 같았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그에게 그림자가 없다는 점이었다. 고개를 드니 해가 보였다. 뒤를 돌아보자 내 뒤에는 그림자가 있었다.


“그런데, 그림자가 없으시네요.”


“저는 사람이 아니니까요.”


“사람이 아니면 그림자가 없나요?”


대답이 없었다.


“죄송해요. 실례가 되는 말을 했나 봐요.”


“...저희는, 그림자예요. 한때는 사람이었겠지만.”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린 나와, 그림자 없는 그가 함께 걷는다.


“저, 하고 싶은 말을 너무 있는 그대로 한 것 같아요.”


“그러셨다면 다행이에요. 들어드릴 수 있어서요.”


“...욕해서 죄송해요.”


“제가 아니라 욕을 해야 할 대상에게 하신걸요.”


“저 나쁘죠? 부모 자식은 천륜이라는데, 아버지 욕을 하고 죽이고 싶어하기까지 하잖아요.”


“천륜이요... 여기서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떠나온 세상에서 부모 자식의 연으로 만난 것뿐인데, 그쪽이 먼저 도리를 깬걸요.”




버드나무 늘어선 길을 걷는데, 바람이 불어 늘어진 가지가 우수수 흔들린다.


“여기도 바람이 부네요.”


“선생님 마음에 바람이 지나가서 그렇습니다.”


그를 잠시 쳐다보고, 말없이 걷다 다시 입을 열었다.


“죽음 이후 같은 건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없던 일이 되었으면 했으니까요. 그렇지만 만약에 극락 비슷한 게 있다면, 내가 세상에서 해보지 못한 일들 마음 놓고 할 수 있는 곳이면 좋겠다, 뭐 그런 생각은 한 것 같아요.”


“아까 이야기한 것들을 말씀하시는 거지요?”


“네. 밤에도 겁내지 않고 산책하고, 아무 의심이나 계산 없이 사랑하고, 아플 걱정이나 돈 걱정 없이 맛있는 걸 배 터지게 먹고 싶었어요.”


이번엔 그가 나를 가만히 쳐다봤다.


“극락은 아니지만, 저승 가는 이 길에서 하실 수 있어요.”


“...그거 노잣돈 필요한 거죠?”


그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어떻게 하면 할 수 있는데요?”


“한 마디로 말씀드릴 수도 없고, 지금 다 말씀드릴 수도 없어요.”


“뭐예요, 그럼 그냥 알려만 주신 거예요?”


그가 옅게 웃었다.




“저승에는, 이승 사람을 저승으로 인도하는 저 같은 저승사자들이 있지요. 그리고 또 어떤 이들이 있을 것 같나요?”


나는 누가 내게 질문을 하는 걸 무척 좋아하기 때문에, 살짝 들떠서 대답을 생각해보았다.


“음, 선녀요?”


“하하, 바로 선녀를 말씀하시네요.”


“보통은 무얼 말하는데요?”


“그건 저도 몰라요.”


“저승에, 선녀도 있지요?”


“...네, 있어요.”


“선녀는 무슨 일을 하나요?”


“선녀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해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한다고? 그런 끝내주는 꿀보직이 저승에도 있단 말인가.


“만약 선녀가 된다면, 무엇을 하고 싶으세요? 아까 말씀하신 것들?”


“네? 선녀들은 그렇게까지 그냥 본인이 하고 싶은 걸 하고 살아요?”


“선녀가 되어보시면 아실 텐데요.”


“제가 선녀가 될 수 있나요? 선녀는 어떤 사람들이 하는 건데요?”


“...눈을 내리면, 선녀가 되실 수 있어요.”


눈이 내리면, 이 아니고 눈을 내리면?




“흥신소까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네요.”


그 말에, 내가 할 일을 현실적으로 생각해보게 됐다.


“원하는 바는 변함이 없으신 건가요? 부친에게 아까 하신 말들을 전하고, 죽이는... 것이요.”


“... 네. 그런데 저승에서 죽이면 어떻게 되는 건지, 그걸 모른 채로 그냥 결정해야 하는 거예요? 그리고 혹시 죽이고 나서 벌 받아서 지옥 가고 그런 건 아닌가요...”


그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슬픈 눈이었다.


“아무도 선생님께 벌을 주지 않아요. 그런데, 선녀가 되고 싶으신 거면... 흥신소에 가기 전에 해결해야 할 일이 있어요.”


“선녀 그거 꼭 안 돼도 되는데... 뭐를 해야 선녀가 되는데요?”


그가 고개를 슥, 꺾어 내 뒤에 길게 늘어진 그림자를 바라봤다.


“저 그림자와 하나가 되셔야 합니다. 그래야 선녀가 될 수 있고, 선녀가 될 자격을 지닌 채 흥신소에 가면 흥신소에서 하는 일을 또렷이 보실 수 있어요.”


나도 고개 돌려 내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저것과 하나가 되라고...


“어떻게 하면... 그림자랑 하나가 돼요?”


“...그림자에게 물어보세요.”


그림자를 자세히 보려면 쭈그리고 앉아야 했다. 앉은 채로, 그림자 위에 손을 얹어보았다. 갑자기 몸이 덜덜 떨리며 눈물이 났다. 분노와 슬픔과 외로움이 통증처럼 온몸을 덮쳤다. 한참을 울다 보니 억울함이 터져 나왔다.


“씨발... 뭔데? 네가 뭔데 나를 이렇게 괴롭혀!”


손바닥으로 그림자를 마구 때리다 보니, 그림자가 나와 똑같이 생긴 것을 알아차렸다. 너는 뭔데, 나를 똑 닮은 채로 나를 괴롭혀, 네가 왜 나를 괴롭혀... 왜 나를 지켜주는 게 아니라 괴롭혀, 눈물이 뚝뚝 흘렀다.




때리고, 욕하고, 울었다. 멈췄던 심장이 점점 빠르게 뛰고, 숨이 가빠지는 걸 느꼈다. 나는 마치 부친을 때리듯 그림자를 때렸다. 멈출 수 없었다. 아니, 멈추고 싶지 않았다. 어느 순간, 내가 그림자에게 화를 내는 것이 하나의 춤처럼 느껴졌다. 무서웠다. 잠시 멈칫한 순간, 무슨 소리가 들렸다. 아주 작은 소리였다. 다시 그림자를 때리려다가 숨을 고르며 귀를 기울여보았다. 울음소리였다. 그림자가 울고 있었다, 나처럼. 듣기 싫은 소리였다. 다시 춤추듯 그림자를 때리며 악을 쓰고 싶었다. 그런데 그림자는 너무나 아이처럼, 나처럼 울고 있었다. 마음이 흔들리는 순간 그림자의 소리가 느껴졌다.


‘안아줘...’


들린 것이 아니라 느껴졌다. 기분이 이상했다. 그림자가 나에게, 안아달라고 한다.


‘한 번만 안아줘.’


그림자를 안지도, 때리지도 못한 채 한참이나 가만히 앉아있었다. 문득, 안을 인형도 없어 혼자 무릎을 끌어안고 울던 어린 내 얼굴이 스쳤다. 그래서 나는 울음소리를 외면하지 못한다.


‘하지만 저승에서마저 그래야 하나...?’


대답보다 빠르게, 손끝으로 그림자를 쓰다듬었다. 뚝, 그림자가 울음을 그친다. 그림자의 떨림과 울음이 멈추자, 나를 휘감았던 거친 감정들도 잠잠해졌다. 기다렸다는 듯 그림자가 나에게 폭 안겨온다. 아주 따스한 기분이 들었다. 안긴 것은 그림자인데, 내가 따스한 기분을 느낀다.




“이상하지요? 그림자와 하나가 되어서 그래요.”


어느새 그가 뒤에 와 있었다.


“잘 기억해두세요. 이제 흥신소로 가야 해요...”


그림자에게 악을 쓸 때보다 더 후련하게 걸음을 옮겼다.


“다 왔습니다. 여기가 말씀드린 흥신소예요.”


그가 가리킨 곳은 뜻밖에도, 작은 정자였다.


“아무도 없잖아요...?”


그는 갑자기 굳은 얼굴로 목을 가다듬었다.


“이리 오너라!”


그 소리에, 정자 기둥 사이 뻥 뚫린 공간에 비치던 하늘이 갈라지며 한 사람이 나타났다. 처음에는 그것이 사람인지 몰랐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몹시 기괴한 모습의 사람이었다. 그의 남근은 아주 길어 정수리 위로 휘어지며 넘어갔는데, 그는 허리를 움직여 그것을 스스로의 뒤에 밀어넣었다. 그러면 그는 고통스러운 얼굴을 했다. 그러다 다시 화를 내고, 흥분한 얼굴로 허리를 흔들어 자신의 것을 자신의 몸에 넣었다. 더 자세히 보니 그것의 얼굴이 보였다. 부친이었다.


“저렇게, 끝없이 스스로에게 고통을 주고 있어요.”


“...지옥에 있는 건가요?”


“글쎄요, 지옥은 아닙니다. 그냥, 혼자 저러고 있도록 놔두는 겁니다.”


“지옥에 가지 않았으면, 무얼 잘못했는지 모를 거 아니에요?”


“...그래서 더 고통스러운 겁니다.”




나는 한참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흉측하지만, 이상하게 짜릿했다. 그림자를 때릴 때와 비슷했다.


“죽이시겠습니까...?”


“네? 죽이겠다고 아까... 아니, 누가 죽여주는 것 아닌가요?”


“흥신소에서 눈앞에 데려와 드리면, 직접 죽이셔야 합니다. 왜냐하면요... 선생님 손으로 죽이셔야 더는 선생님을 괴롭히지 못합니다.”


수많은 감정과 생각이 스쳤다.


“마음이 어지러우시지요? 그래서 미리 말씀드리지 않은 겁니다. 미리 말씀드리면, 대개 여기까지 오지 않으시거든요.”


“저승에서 죽이면... 그러면 저를 괴롭히지 않는다는 게, 저승에서 죽는 것의 의미인가요?”


“순서가 중요합니다. 우선, 원하신 대로 전하려던 말씀을 해주세요.”


나는 울 듯한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전해준다며! 나보고 전하라고?


“이승의 육신이 하고 싶던 말, 그 피맺힌 말을 전해주세요. 이제 평범한 인간이 아니시니까요. 그러니 저희는 약속을 지킨 겁니다.”


그건 이해한다 쳐도 막상 입을 떼려니, 어린 날처럼 몸이 벌벌 떨렸다.


“아까, 저한테 하신 것처럼 하시면 됩니다. 말씀하셔도 아무 일이 없었지요? ...그래도 무서우시면, 손을 잡아드려도 될까요?”


“망인의 몸에 손대는 건 금기라면서요.”


“이제 더는 망인이 아니시지 않습니까.”


나는 조용히 손을 내밀었다. 그가 부드럽지만 단단하게 손을 잡아주었다. 나는 사자 앞에서 했던 것처럼, 아니 그와는 다른 차원으로 악다구니를 썼다. 그 악다구니는 어느새 호통으로 변했다. 하고 싶은 말을 마치고 나니 숨이 헉헉 차올랐다. 잠시 숨을 고르는데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죽이시겠습니까?”


망설여졌다. 그가 저렇게 고통받는 모습을 계속 보고 싶기도 했다. 그것은 보기 싫으면서도 보고 싶은 풍경이었다. 망설이는데, 어디서 그림자가 까르르, 웃는 소리가 들렸다. 사랑스러운 소리였다. 그가 내 손에 은장도를 쥐여주었다.


“찌르시면, 죽습니다.”


저런 것 계속 보아서 무엇하나. 나는 은장도를 단호하게 휘둘렀다.




그것이 사라지고,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가슴에서 무언가 차가운 것이 스르르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어 발밑을 내려보니, 내가 디딘 구름 사이로 펄펄 서리가 내리고 있었다. 차가운 서리가, 빗발치듯 가슴에서 흘러나왔다.


“이승에서도, 저승에서도 사라지면 어떻게 되는 거지요? 없던 일이 되는 건가요?”


“세상에 난 이상 어떤 것도 없던 일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군요...”


슬펐지만, 이제는 슬퍼도 괜찮았다.


“그런데 눈이 참 많이 내리네요.”


그가 허리를 굽혀 세상을 내려다봤다.


“선녀님, 하고 싶은 게 무엇이세요?”


“밤을 걷고 싶어요.”


“손을 내밀어 보세요.”


손을 뻗자, 주변이 온통 캄캄해졌다. 처음으로, 어둠이 무섭지 않았다. 그가 물었다.


“손을 잡아도 될까요?”


웃음이 나왔다. 살포시 손을 잡았다. 나를 사랑하나요? 묻고 싶지 않았다. 그가 나를 사랑함을 알 수 있었다. 왜 사랑하는지도 묻지 않았다.


“...언제부터 나를 사랑했나요?”


“당신의 모든 삶을 읽었을 때...”


사방이 캄캄하고, 평화롭고, 자유로웠다. 발밑에선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만, 눈을 멈추고 싶었다. 나현 언니는 비탈에 살거든. 눈이 멎었다.


“비를 내리고 싶으면 비를 내리고, 눈을 멈추고 싶으면 눈을 멈추세요. 여기선 아무도 선녀님을 막지 않습니다.”


그와 손을 잡고, 환한 어둠 속을 그림자처럼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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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빗물 21.07.19 12:33 댓글

    혼맞이란, 진도 씻김굿의 막바지에 부르는 무가로, 혼을 달래기 위해 당골이 독창으로 특정한 장단 없이 노래하는 것을 말합니다. (출처: 한국 콘텐츠 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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