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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엽편] 찬가

2012.06.24 16:5306.24

너는 너무도 빨리 지나가 버린다. 덧없고 허망하며 찰나에만 존재한다.
너는 자작나무 껍질 별자리 주머니의 주인이 태어난, 첫 아침의 시냇물에서 보글대는 물거품 위에 어룽거리는 색채이다. 너는 산산히 흩어져 불씨들 위로 꽃피는 수천갈래 전광의 번뜩임이다. 햇빛을 받은 안개가 곧 사라지기 전 띄워 올리는 무지갯빛이고, 굴러떨어지는 물방울의 완벽한 구형 형태이며 그 안에 거꾸로 맺히는 상이다. 잠든 아이가 가볍게 코를 골다 문득 긴 숨을 뿜어낼 때 그 위에 한숨처럼 어리는 흐릿한 꿈이다. 곧 져 버릴 꽃같은 연인들 사이에서 박동하는 심장 속의 심장이다. 얇은 수면에 파문도 발자국도 없이 내려닫는 달빛이고 붉은 여명 속에 어렴풋해지는 새벽별이며 지평선으로 넘어가기 직전 손톱보다 적게 남은 해의 끝부분이다. 마음마저 아물거리게 하는 봄 아지랑이, 소나기로 부서져 내리는 한 여름의 먹구름, 서리에 바래는 젖은 단풍,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고 오직 지금 이순간 그러나 다음 순간은 뭉그러질 눈의 섬세한 결정이다. 눈꺼풀 안에 잔상으로 남은 얼룩짐, 형체도 없는 입김의 가장자리, 아무도 없는 때에만 자객처럼 엄습하는 갈비뼈 안의 자상이다. 춤추는 불꽃과 연기의 소맷자락 사이 쯤에만 있는 빈 틈이고 마지막 촛불이 꺼지기 직전의 흔들림이고 부서진 숯 안에서 빤히 바라보는 불씨이고 덴 손가락 끝에 아직도 남아 어른대는 열기이다.
눈을 깜빡이는 사이 보지 못하는 것이며 보았어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고 알아차렸어도 기억할 수 없는 것이며 기억하고는 반드시 잊고 마는 것이다. 너는 어리석음이고 세상이며 붙잡을 수 없지만 그걸 알면서도 손을 뻗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시인, 작곡가, 예술가 따위로 불리는 그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너를 갈망하고 결국 붙잡지 못했는가? 누구 한 사람이라도 성큼 성큼 걸어가는 시간의 옷자락을 잡아 찢어 손 안에 가질 수 있었단 말인가? 한 번도 쓰여진 적이 없는 책들의 도서관이여, 불려 본 적이 없는 노래, 빛을 본 이가 없는 별이여! 너는 달콤한 미소처럼 내 넋을 빼놓고, 허망한 손가락 사이로 너의 향기 한 줌 만을 남긴 채 빠져나가 버린다. 내가 어찌 너를 감히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게 오라! 내게로 오라! 네가 없는 곳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너는 한 마리 작은 새처럼 포르르 날아가는구나.
흰 종이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비단 네가 분명히 거기 있는데도 볼 수 없기 때문이 아니다. 네가 잠시 얼굴을 보였다가 사라져 버리면 나 홀로 우두커니 그 자리에 남아 있으리라는 것을 아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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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일기에 썼던 글을 옮겨봅니다. 글쓸 짬을 내기 힘들고, 글쓰기도 힘드니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원래 사는 게 힘든 일이긴 하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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