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구토수첩

2012.05.22 15:5105.22

  그는 기차를 타지 않았다. 구토를 할 것 같아 오히려 역을 빠져나갔다. 역 앞에는 오징어 따위를 파는 가판대가 줄을 지어 서 있었다. 마치 밤바다의 오징어잡이 배처럼 어둠 속에서 노란빛들이 흔들렸다. 더욱 속이 울렁거렸다. 허리를 숙이고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셨다. 그렇게 속을 진정시키자 아스팔트 위로 우중충하고 지저분한 비둘기들이 눈에 들어왔다. 다시 구역질이 올라왔다. 눈물까지 고였다가 사라졌다. 열기 어린 눈가로 차가운 겨울바람이 쉴 새 없이 부딪쳤다. 그는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문득 아스팔트 바닥에서 올라오는 한기가 느껴졌다. 양손을 무릎에 댄 채 운동화의 밑창을 들여다보았다. 차라리 군화가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치료차 나온 특별 병가였다. 그는 몇 개월간 구토에 시달리고 있었다. 별다른 징후 없이 괜찮다가도 느닷없이 뱃속이 울렁거렸다. 하지만 막상 화장실에 달려가도 대부분 헛구역질만 나올 뿐이었다. 누렇게 때가 낀 변기에 일부러 얼굴을 붙이고 억지로 구토를 하려 해도 걸쭉한 침과 눈물만 변기 속으로 떨어졌다. 그런 증상이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나 정상적인 생활이 어려웠다. 그런데도 정확한 이유조차 알 수 없었다. 스트레스 때문일 거예요. 병원의 의사는 군의관과 똑같은 말을 했다. 그보다 나이가 어린 신참 군의관처럼 나무라는 듯한 투로 충고를 덧붙였다. 이제 전역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마무리를 잘해야지.
  어쩌면 여자 친구 때문일 수도 있었다. 스트레스 때문이라면 그게 틀림없었다. 그는 의사의 말을 들으며 그렇게 생각했었다. 몇 달 전, 그는 여자 친구였던 J와 헤어졌다. 일방적인 이별통보. 정확히 말해 이별통보 뒤로 유지되고 있는 어정쩡한 관계. 다시 말하자면 그가 가끔 J에게 전화를 걸고, J는 그보다 더 가끔 전화를 받는 식.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수화기를 들고, 역시나 음성사서함 안내 메시지를 들을 때마다 그는 참을 수 없는 분노에 휩싸였다. 마지막 통화에서 J가 한 말을 자꾸 떠올렸다. 정말 아직도 모르겠어? 그는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보다 그 차가운 말투가 떠올라 머릿속이 저려왔다. 무력한 절망감이 들었다. 씨발. 어쩌라고. 나보고 어쩌라고! 언젠가 그는 변기를 부여잡은 채 그렇게 소리친 적도 있었다.
  그는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일단 담배를 한 대 피우며 여행을 떠날지 말지 생각해볼 작정이었다. 어차피 충동적으로 결정한 일이었다. 병가 내내 방에만 박혀 있다가 바람이라도 쐬고 싶은 마음에 나선 것이었다. 그는 담배에 불을 붙여 연기를 깊게 들여 마셨다. 그제야 속이 조금 편해지는 것 같았다. 기분도 조금 나아졌다. 그는 작은 흰색 수첩을 꺼냈다. 손바닥에 닿는 차가운 종이의 감촉이 새삼스레 낯설게 느껴졌다. 수첩을 빠르게 넘겼다. 까만 글자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수첩은 이제 두 어장 정도의 여분밖에 남지 않았다. 특히 지난 몇 개월간의 기록이 대부분이었다. 그는 스스로 편집증이라 느낄 정도로 늘 수첩을 챙겨 다니며 자주 이것저것을 적었다. 때로 부질없는 짓이라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메모를 하고 있으면 드는, 왠지 속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듯한 느낌이 좋아서였다. 그는 빈 페이지를 펼쳐 몇 문장을 휘갈기듯 써내려갔다.
  떠난다, 라는 단어에 언제나 대단한 각오나 결의가 묶여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세상에 얼마나 많은 일들이 목적을 상실한 채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나는 편지를 쓰고 싶다. 찬란한 추락을 조금이라도 늘여보려는 희망을 품고.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적고 보니 왠지 언젠가 책에서 읽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상관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저 흰 여백이 무언가로 채워지는 느낌이 좋을 뿐이라고. 무작정 무언가 남기고 싶은 충동일 뿐이라고. 그는 다시 몇 문장을 끼적거렸다. 하지만 그것은 여전히 종이일 뿐이었다. 종이일 뿐이었다. 이번엔 수첩의 다른 페이지를 펼쳤다. 펼쳐진 장에는 '하수구 청소를 하다. 지독한 절망이 주는 안식.' 이라고 적혀 있었다. 낄낄낄. 너무도 진지한 단어 탓에 그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웃는 바람에 역한 기운이 올라와 코가 시큰거렸다.
  그는 두 번째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담배연기를 보자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날 아침, 취사장 앞에 모인 수십 명의 입김도 눈앞의 연기처럼 하얗게 피어올랐다. 각 중대에서 모인 사람들은 대부분 그처럼 이등병 아니면 일병이었다. 그는 그들을 바라보며 분명히 저 사람들도 어젯밤 자신처럼 제가 하겠습니다! 하고 소리쳤을 것이라 생각했다. 작업인원배정은 보통 그 전날 밤 점호시간에 지원형식으로 결정되었다. 점호 내내 우리는 정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부동자세로 앉아 있다. 일정을 발표하는 당직사관의 목소리는 마치 출발을 알리는 총성과 같다. 탕!탕!탕! 총소리에 맞춰 우리는 경주마처럼 뛰쳐나간다. 그는 자대에 배치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날, 수첩에 그렇게 적어 놓은 적이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한편의 희극과 같다고도 생각했다. 힘들고 더러운 일일수록 더 빨리 손을 들고 소리치지 않으면 나중에 더 힘들어진다는 것을 그때의 그는 잘 알지 못했다.
  그날 작업은 하수구의 격자 덮개를 들어내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쇠로 된 격자 덮개는 서로 얼어붙어 잘 떨어지지 않았다. 한참이나 지난 뒤에야 격자 덮개들이 깡! 하고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여기저기서 욕설이 함께 터졌다. 하수구는 황갈색 오물로 가득 차 있었다. 구수한 냄새가 풍기기 시작했다. 어느새 그의 곁으로 다가온 선임 P가 오물 표면의 살얼음을 삽으로 쿡쿡 찔러 보았다. P가 말했다. 슬리퍼로 갈아 신어라. P는 아침에 중대 작업인원들을 따로 불러 모아 슬리퍼를 챙기라고 지시했었다. 그러면서 원래 하수구 작업할 때는 나중에 닦기 힘든 군화 대신 슬리퍼를 신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모두가 신발을 갈아 신는 동안 정작 P는 멀찌감치 떨어져 담배만 피워대고 있었다. P는 슬리퍼를 가져오지 않았다. P 말고도 군데군데 섬처럼 우두커니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모두 슬리퍼로 갈아 신은 뒤 오물을 퍼 하수구 옆에 미리 쌓아둔 모래 위로 던지는 작업이 시작됐다. 그와 함께 욕설도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삽만으로는 아무리 조심해도 오물이 어디론가 튀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군대에서는 어떤 작업이든 삽 한 자루로 다 해결해야 했다. 삽을 뜰 때마다 그는 얼굴이 찌푸려졌다. 특히 오물이 발등 위로 떨어질 때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피부에 닿는 따듯하면서도 척척한 느낌에 본능적으로 발가락이 오므라들었다.
  씨발 년아, 빨리 안 할래?
  뒤에 서 있던 P가 갑자기 삽의 날로 그의 다리를 찌르며 소리쳤다. 그 바람에 그는 균형을 잃고 하수구 속으로 떨어졌다. 어어. 그는 가까스로 양팔을 땅에 짚었지만 이미 몸의 절반 정도가 오물 속으로 빠진 뒤였다. 씨발 년아. 그러니까 진작 알아서 하면 좋잖아. 낄낄낄. 뭐가 그렇게 좋은지 P는 낄낄거렸다. 낄낄낄. P를 따라 사람들이 함께 낄낄거리기 시작했다. 그 웃음소리를 들으며 그는 난생처음으로 누군가를 죽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삽을 쥐고 있는 손이 벌벌 떨렸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그렇게 몸을 담그고 나자 이내 마음이 편안해진 것이었다. 부패한 오물 속이 따듯하다는 생각까지 스쳤다. 그러자 거리낌 없이 오물을 퍼낼 수 있었다. 이 새끼 봐라? 낄낄낄. 그 모습을 보며 P가 다시 낄낄거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몸에 열이 오르고 어떤 이상한 감정이 몸 안에서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낄낄낄. 그는 자신도 모르게 P의 웃음소리를 조그맣게 따라 해 보았다. 작업을 마치고 돌아온 뒤 그는 부패한 오물 속은 따듯하다. 라고 수첩에 적어 넣었다.


  쉬었다 갈래? 
  그가 고개를 돌리자 나이가 마흔은 넘었으리라 짐작되는 여자가 서 있었다. 까만 오리털 점퍼와 나팔청바지 차림의 여자였다. 홀쭉한 양볼 위로 꼭 젖은 미역처럼 어색하게 붙어 있는 긴 생머리가 눈에 띄었다. 어딘지 모르게 묘한 인상이었다. 그는 여자의 말을 정확하게 들었으나 그 의미를 이해할 수가 없어 잠시 동안 멍한 표정을 지은 채 가만히 서 있었다. 
  내가 예쁜 아가씨로 싸게 해줄 테니까 쉬었다가 가. 혼자지?  
  여자는 종이를 씹은 것 같은 탁한 목소리를 내며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는 그제야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은 더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거부감과 함께 덮쳐오는, 늦은 밤 기차역 앞에 혼자 나와 서성이고 있는 군인에게 주어진 어떤 의무감 같은 것을 느꼈다. 사실 그는 여자 친구에게 이별을 통보받은 뒤 아무하고도 자지 않았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지만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아 내린 결정이었다. 대신 그는 모두가 잠든 새벽에 화장실로 갔다. 난방이 들어오지 않는 차가운 화장실 칸에 선 채로 수음을 했다. 담배연기처럼 하얀 입김을 내뱉고, 가끔 발등 위로 따듯하면서도 척척한 정액을 흘리기도 했다. 뭐, 굳이 피할 것도 없잖아? 차가운 화장실의 모습이 떠오르자 그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안될 것 없잖아? 라고 그는 수첩에 적어 넣었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내키지가 않았다. 씨발. 그런데 왜 반말이야. 머릿속이 복잡해진 그는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여자에게 대꾸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여자는 끈질겼다. 한 손으로 그의 팔을 잡은 채 계속 말을 걸어왔다. 아이, 뭘 부끄러워하고 그래. 군인 아저씨 맞지? 휴가 나왔으면 몸도 좀 풀고 그래야 나라 지킬 힘도 나고 그러는 거지. 잘해줄게요, 응? 여자는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그를 계속 설득했다. 그 목소리를 듣자 그는 고개를 돌린 채 애써 외면을 하는 자신의 모습이 왠지 초라하게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 여자를 바라보았다. 여자는 눈을 동그랗게 떠 자신의 의견에 동의를 구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불빛을 등지고 서 있는 여자의 각진 턱이 도드라져 보였다. 그 모습이 너무나 위압적이어서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자연스레 머릿속에 P의 모습이 떠올랐다.
  P는 휴가나 외박을 하고 들어온 사람들에게 꼭 여자를 따먹었느냐고 물어보곤 했다. 따먹었냐? 그 표정이 너무 당당해서 그는 정말로 군인이라면 마땅히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사실 P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누구나 휴가를 마치고 돌아오면 무용담처럼 여자들과 잔 얘기를 늘어놓았다. 할 얘기가 없으면 최소한 그런 척이라도 하는 것이 암묵적인 법칙이었다. 언젠가 J가 면회를 와 외박을 하고 온 날도 그랬다. 따먹었냐? 한 선임의 질문에 그는 여자는 먹는 게 아니라 사랑을 나누는 존재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었다. 순간, 공기가 싸늘해지는 것을 그는 느꼈다. 씨발 년이. 말대꾸는. 침상에 누워 있던 P가 차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자리에 들면서도 불안함에 쉽사리 잠이 오지가 않았다. 야, 일어나. 아니나 다를까, 자리에 누운 지 얼마 되지 않아 한 선임이 그를 깨워 화장실로 끌고 갔다. 구석에선 P가 담배를 피우며 서 있었다. 그들은 십분 정도 그를 때리고 나서 좁은 화장실 칸으로 그를 구겨 넣었다. 입에서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그를 바닥에 무릎 꿇게 했다. 그는 순간 이것이 마치 연극 같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다시 내무실로 돌아가면 마치 한 편의 역할 극 같다, 라고 수첩에 적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낄낄낄. 퍼뜩 현실로 돌아온 그는 발작적인 웃음을 터트렸다. 자신도 모르게 터진 웃음이었다. 여자가 놀라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어쨌든, 어쨌든.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더는 복잡하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그가 대문을 박차고 나온 그 순간부터, 온 세상이 오늘 밤 그와 이름 모를 여자가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또 그보다 아주 조금 더 오랜 시간 동안 정사를 벌이도록 몰아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마치 명령처럼, 그는 그것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모두가 지나간 일 아닌가? 모두가,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하고 그는 생각했다. 낄낄낄. 우스웠다. 자꾸만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여자는 조금만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그를 두고 방을 떠나버렸다. 할 일이 없어진 그는 침대에 앉아 방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방은 전체적으로 평범해 보였다. 침대 바로 앞에는 텔레비전이 놓인 화장대가 있었고, 오른쪽으로 두꺼운 자주색 커튼으로 가려진 작은 창문이 있었다. 창문 아래에는 유리로 된 조그만 탁자가 놓여 있었다. 다만 침대 머리 쪽에 있는 그림이 조금 특이해 보였다. 나체의 여자가 말을 탄 채 긴 머리를 휘날리며 초원을 달리고 있는 그림이었다. 벽면을 가득 채울 만큼 큰 그림이라 침대 정면의 거울에는 말의 얼굴과 그 뒤로 멀리 떠있는 작고 하얀 달만 비쳤다. 그는 거울 속 그림을 보며 맥주 캔을 하나 집어 들어 홀짝거리기 시작했다. 빈속에 먹은 약에 술기운까지 겹치자 갑자기 견딜 수 없이 어지러워졌다. 졸음이 무겁게 밀려왔다.  
   그는 화장실로 갔다. 옷을 벗고 욕조로 들어갔다. 욕조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얼룩과 머리카락이 붙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그는 구역질이 또 올라왔다. P가 다시 떠올랐다. 차가운 화장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그의 앞에 서서 바지를 내리던 P. 그 모습이 마치 지금 보고 있는 것처럼 눈앞에 그려졌다. 지나치게 무성하던 음모. 마치 벌초를 오랫동안 하지 않은 산소처럼 보이던 털 속에 축 처져있던 성기가 떠올랐다. 빨아. 씨발 년아, P가 목소리를 깔고 말했다. P에게 맞아 욱신거리는 그의 등에 서늘한 기운이 흘렀다.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탕!탕!탕! 그는 왠지 모르게 P의 목소리가 출발을 알리는 총성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벌벌 떨며, 그러나 출발 신호를 들은 경주마처럼 본능적으로 P의 성기에 입을 가져갔다. 갑자기 P가 그의 가슴을 걷어찼다. 미친 새끼가 하란다고 진짜로 하네? 낄낄낄. 뒤에 서 있던 다른 선임과 함께 P가 미친 듯이 웃어대기 시작했다. 한참을 웃던 P가 다시 말했다. 바지 벗어. 그는 순순히 바지를 내렸다. 혼자 해봐. 그는 자위를 시작했다. 화장실의 찬 기운이 엉덩이로 스며들며 그의 몸이 돌처럼 굳어갔다. 씨발 년. 존나 좋나 보네? 그것도 사랑을 나누는 거냐? 낄낄낄. 그의 성기에 미지근한 액체가 나오는 것을 보며 그들은 또다시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과장스럽고, 집단적이고, 그래서 소름 끼치는 웃음! 그는 애써 이것은 마치 연극과도 같다고 생각했다.
  낄낄낄. 씨발 년! 현실로 돌아온 그는 얼굴에 흐르는 물줄기 속에서 P의 목소리를 흉내 냈다. 문득 지금 나는 누구를 욕하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알 수 없었다. 그는 허리를 숙이고 다시 한 번 헛구역질 했다. 아직도 모르겠어? J의 목소리가 잠시 떠올랐다 사라졌다.
  그는 다시 침대에 앉았다. 새로 맥주 캔을 하나 꺼내 홀짝거리기 시작했다. 이대로 속이 뒤집혀 다 토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남은 맥주를 한꺼번에 들이켰다. 급격히 취기가 올랐다. 텔레비전을 켰다. 텔레비전에서는 오래 전에 인기 있었던 짝짓기 연애 프로그램을 재방송하고 있었다. 연예인들이 춤을 추고 묘기를 부리며 파트너에게 자신의 매력을 하나하나 선보이는 프로였다. 운동선수 출신의 프로그램 MC는 출연자들이 무언가 할 때마다 큰 몸집을 비틀며 호들갑을 떨었다. 출연자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가 텔레비전을 통해 좁은 방을 가득 채웠다. 그도 그들을 따라 같이 웃고 싶었지만 잘되지가 않았다. 그는 소리를 줄이고 다시 수첩을 꺼냈다. 처음부터 찬찬히 훑어보았다. 무언가 더 적고 싶은 마음도 들었지만 그전에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수첩의 내용은 기대와는 달리 별다른 내용이 없었다. 첫 혹한기 훈련 때 산속에서 텐트도 없이 침낭만 깔고 누워서 보았던 달이라든가, 새벽 근무를 마치고 막사로 복귀해 거울을 봤을 때의 생경한 느낌, 한밤중 몰래 일어나 수화기를 통해 듣던 여자 친구의 목소리 같은 것들뿐이었다.
  그는 수첩을 도로 집어넣었다. 지갑을 꺼내 가진 돈의 액수를 확인했다. 그때 지갑에 끼워져 있는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J의 사진이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와 J가 얼굴을 맞대고 웃고 있는 셀프사진이었다. 그는 관물대를 정리하며 그 사진만 지갑에 챙겨두었던 사실을 떠올렸다. 사진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사진 속의 연인은 여전히 완벽해 보였다. 시리도록 파랗게 펼쳐진 하늘을 배경으로 해맑게 웃고 있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순간적으로 마치 지금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는 자신이 찍힌 영화를 보는 배우처럼, 그저 행복한 구경꾼에 머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실감했다. 머리가 더욱 지끈거렸다. 그는 그들이 마치 하늘 높은 곳에서 바라본 두 개의 점처럼 느껴졌다. 하나의 점은 하늘에서 지상으로 다가갈수록 두 개의 점으로 바뀌어, 점점 더 명백히 그 사이의 간격을 드러내고 있었다.

  찰칵. 그가 지갑에 다시 사진을 넣고 있을 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돌리자 가슴이 깊게 패인 까만 원피스 위에 까만 점퍼를 걸친 여자가 웃으며 신발을 벗고 있었다. 빠르고 신속한 몸짓과는 상관없이 깡마른 몸 때문에 어딘가 지쳐 보이는 모습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그다지 매력적인 용모는 아니군, 하고 그는 생각했다. 아니, 그런 게 중요한건 아니지, 하는 생각이 뒤따랐다. 하지만 그는 곧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역 앞에서 만난 여자가 말한 예쁜 아가씨가 실은 짙은 아이섀도와 색조 화장을 한 여자 자신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는 당황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최대한 노력해도 그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마네킹처럼 가만히 서 있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는 동안 여자는 자연스레 점퍼를 벗으며 방으로 들어왔다. 여자는 문 바로 옆에 있는 거울에 자신의 얼굴을 비춰보았다. 그리고는 아무 말도 없이 어깨 위에서 연약하게 매달려 있던 원피스의 끈을 내려 바로 나체가 되어버렸다. 벗고 누워, 내가 다 알아서 할게. 여자의 쉰 목소리가 텔레비전 소리에 섞여 어색한 방 안의 공기 사이로 흘러들어 갔다. 그는 여자의 가슴 아래로 앙상하게 드러난 갈비뼈를 바라보았다. 꼭 걸을 때마다 달가닥거리는 소리가 날 것만 같았다. 그는 그럴 수만 있다면 그 자리에서 당장에라도 도망치고 싶어졌다. 그러나 갑자기 모든 일을 그런 식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이것이 어떤 시험과도 같은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괜히 애쓰지 마시고 다른 분을 보내주시거나 아니면 그냥 없었던 일로 하죠.
  그는 단어 하나하나에 꾹꾹 힘을 주어 말했다. 당신이 잘못한 거잖아,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여자는 대답 대신 다짜고짜 그의 바지를 벗기기 시작했다. 마치 묵묵히 철을 제련하는 솜씨 좋은 대장장이처럼. 우직하다 싶을 정도로 아무 말 없이. 그는 어째서 모든 일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가는가,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여자를 제지하기 위해 손을 뻗쳤을 때 이미 여자는 그의 그곳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 거침없는 손길이 왠지 거부할 수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냥 아무 생각하지 마. 난 괜찮아.
  그는 그 말이 여자 스스로 하는 것인지 자신에게 타이르듯이 말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강한 거부감과는 상관없이 그의 페니스는 벌써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그걸 보고 있자니 머리 위에서 이 장면을 지켜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온몸에 힘이 빠져나갔다. 마치 그림 속의 말처럼 자신의 하반신이 초원을 내달리는 것을 지켜보는 것 같았다. 잠깐만요, 하고 그는 내뱉었지만 그의 몸은 이미 침대에 눕고 있었다. 정신이 아득해지고 무기력한 느낌이 들었다. 자신의 페니스와 그것을 잡고 있는 여자의 손이 한 몸처럼 느껴져 이상했다. 차가운 여자의 손이 기분 좋게 느껴졌다. 마치 오물 속에 빠졌을 때의 느낌과 비슷했다. 어쩔 수 없잖아. 베게에 머리를 뉘이며 마치 결심이라도 하는듯한 투로 그는 중얼거렸다.
  여자는 먼저 조심스레 한 손으로 그의 페니스를 잡고 입안에 넣었다. 혀의 놀림도 그랬지만 그보다는 그에 맞춰 움직이는 손길이 그는 더 자극적으로 느껴졌다. 몸 구석구석을 어루만지는 여자의 손길에 그는 더욱 정신을 집중했다. 곧 그의 페니스가 저절로 고개를 까딱일 정도로 딱딱해졌다. 그는 여자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의 몸 위로 올라오는 것을 바라봤다. 여자가 한 손으로 그것을 잡고 몸속으로 집어넣기 위해 고개를 숙이자 그의 얼굴 위로 긴 머리카락이 마치 검은 폭포처럼 흘러내렸다. 얼굴에 닿는 감촉이 따가워 그는 머리를 틀었다. 그러자 머리카락 사이로 여자의 음모가 보였다. 거칠게 사방으로 뻗은 무성하고 새까만 음모였다.
  그 모습을 보자 그는 P의 성기가 떠올랐다. 문득 여자의 음모에도 꼭 P처럼 축 처진 성기가 달려 있어야만 할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소름이 끼쳤다. 갑자기 쿵쾅거리는 심장소리가 들리기 시작하고, 뱃속이 견딜 수 없이 뜨거워졌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애써 억누르며 아무 말 없이 천장을 바라보기로 했다. 여자가 몸 위에서 신음소리를 내는 동안 그가 할 일은 오직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는 것뿐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어쩌면 단순히 취해서 이러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는 가만히 누워 J의 모습을 떠올려보려 애를 썼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잘 생각이 나질 않았다. 얼굴은 또렷한데 전체적인 모습은 뿌옇게 떠올랐다. 대신 마지막으로 그녀와 섹스를 했던 날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팔을 잡아끄는 그의 몸짓이 무색하게 버티고 서 있던 J. 좀 참으면 안 돼? 도대체 요즘 왜 그래. 그는 그렇게 말하는 J를 반강제로 끌고 가다시피 모텔로 데려갔다. 침대 위에서도 한참 동안이나 실랑이를 했다. J는 기어이 자신의 몸 위로 올라온 그의 얼굴을 쳐다보며 빌듯이 말했다. 제발. 그가 억지로 비집고 들어간 J의 성기가 미지근하게 젖어 들어갔다. 그는 거친 숨결을 내뱉으며 J의 귓가에 속삭였다. 좋아? 사랑해.
  아직도 모르겠어? 그는 순간적으로 여자의 신음소리 사이로 J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은 느낌에 놀라 현실로 돌아왔다. 새삼스레 자신이 J에게 한 짓이 믿기지 않았다. 머리가 저려왔다. 왠지 자신의 몸이 두 개로 분리되어 서로 어색하게 마주 보고 서 있는 듯한 기분이 들어 오싹했다. 내장에서 목으로 신물이 되올라오는 것 같았다. 그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여자를 밀치고 일어났다. 여자를 침대 위에 뒤집어 눕혔다. 뒤에서 여자의 안으로 들어갔다. 모두 다 잊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다 잊어버릴 수 있다면. 그는 그런 생각을 하며 허벅지에 닿는 여자의 앙상한 엉덩이 촉감에 집중했다. 부드러운 감촉에 이어 딱딱한 뼈의 마디가 부딪쳐 왔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발가락을 살짝 오므렸다가 폈다. 여자는 고개를 숙인 채 기계적인 신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 소리를 들으며 그는 여자의 등을 내려다보았다.  
  여자의 등은 지나치게 하얗고 매끈했다. 그래서인지 왠지 허전해보였다. 그 모습을 보자 그는 순간적으로 그 등에다 사정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정액으로 여자의 등 위에 무언가를 적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하얀 정액을 뚝뚝 떨어트리고, 손가락으로 정액을 등 위에 펴 바른다. 그리고 얼룩처럼, 지울 수 없는 문신처럼 그녀의 등에 정액이 말라붙는다. 아니, 그게 무엇이든 그 하얀 공간을 채워 넣을 수만 있다면. 그는 머릿속을 꽉 채우는 괴기한 상상에 괴로웠다. 하지만 텅 빈 것은 무조건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이런 생각이 자꾸만 드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지금 미쳐가고 있는가? 멈춰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미칠 듯한 욕망과 두려움 사이를 오가는 감정의 변주곡을 참을 수가 없어 그는 눈을 감았다.

  탕!탕!탕!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난 것은 거울이 걸려 있는 쪽이었다. 그는 다시 눈을 떴다. 거울에 비친 여자와 여자의 뒤에서 거칠게 움직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자신의 상체에 반쯤 가려진 말의 얼굴도 보였다. 그는 잘못 들었는가 싶어 한동안 멍하니 거울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갑자기 말의 얼굴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그는 고개를 흔들고 다시 한 번 거울을 보았다. 도저히 믿을 수 없었지만 거울속의 말은 이제 입을 커다랗게 벌리고 있었다. 그리곤 말은 커다란 콧구멍에서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토를 하기 시작했다. 마치 꽉 막혀 있던 수도가 터지듯이 말의 입에서 토사물이 쏟아져 나왔다. 순식간에 누렇고 진득거리는 토사물이 침대를 적시고 사방으로 튀었다. 그는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여자의 엉덩이를 잡고 있는 손이 덜덜 떨렸다.
  그는 고개를 돌렸다. 더는 거울을 볼 수 없었다. 두려운 마음에 침대 쪽의 그림을 확인할 수도 없었다. 이것은 환상인가? 그는 시선을 여자의 등에 고정한 채 더욱 거칠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만약 이것이 환상이라면 사정을 하고 나면 깰 수 있을 것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곧 방 안에 진동하기 시작하는 역한 냄새를 느꼈다. 그 냄새 때문에 헛구역질이 나기 시작했다. 그는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손가락을 입에 집어넣었다. 어차피 환상이라면, 아니, 이미 토사물로 가득찬 방이라면 자신이 토한다고 문제 될 건 없을 것 같았다. 우욱. 하지만 이번에도 걸쭉한 침과 눈물만 나올 뿐이었다. 땀에 젖은 여자의 등 위로 그의 침과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씨발 년. 그는 공포감에 사로잡혀 욕을 내뱉었다. 낄낄낄. 이 말도 되지 않는 상황에조차 무기력하게 흔들리는 자신의 모습이 한심해 웃음이 나왔다. 이 모든 게 벗어날 수 없는 굴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절대로 예전의 모습을 찾을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 그는 여자의 등에 얼굴을 파묻은 채 격렬하게 사정했다. 머릿속이 백지처럼 새하얗게 변했다.    
  미친 새끼. 하여간 군인 새끼들이란.
  여자가 내뱉는 욕지거리에 그는 정신이 들었다. 그는 자신이 침대에 널브러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여자는 벌써 옷을 다 입고 그의 지갑을 뒤지고 있었다. 그는 재빨리 방안을 둘러보았다. 침대 바로 앞의 텔레비전과 화장대, 두꺼운 자주색 커튼으로 가려진 창문, 그 아래의 유리로 된 조그만 탁자. 마지막으로 침대 머리 쪽에 있는 그림을 확인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거울을 뚫어지게 쳐다보기도 했다. 하지만 방은 처음 들어왔을 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것 같았다. 그는 코트에서 담배를 꺼냈다. 누운 채로 불을 붙였다. 욱신거리는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러는 사이 여자는 들어왔을 때처럼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확인했다. 여자는 마지막으로 양손을 긴 머리칼 속에 넣어 파카 바깥으로 빼내었다. 다시 여자의 볼 위로 젖은 미역 같은 머리가 드리워졌다. 그는 그 모습을 보며 티셔츠에 프린트된 그림처럼 침대에 꼭 붙어 말없이 담배를 피웠다. 인사도 없이 조용히 문밖으로 사라져가는 여자 쪽을 바라보았다. 낄낄낄. 발작적인 웃음이 터져 나왔다.
  씨발 년, 좋나보네?
  그는 하얗게 피어오르는 담배연기를 보며 P의 목소리를 흉내 내어 보았다.  
  

  다시 나온 역은 더욱 쓸쓸한 모습이었다. 어둠을 벗겨 내던 역 주변 가판대들의 노란 불빛들이 사라지고 얼룩처럼 움직이던 비둘기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세찬 바람소리만이 텅 빈 광장을 떠돌고 있었다. 그는 코트의 한쪽 깃을 잡아 올려 바람을 막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아까처럼 담배를 피우면 기분이 조금 나아질 것 같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모든 것이 먹먹해진 느낌. 그는 자신도 모르게 탄식처럼 짧은 욕을 내뱉었다. 손이 시려 담배를 신경질적으로 집어 던졌다. 몸이 덜덜 떨려왔다. 그러나 그럼에도 왠지 모르게 허전한 느낌에 발길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벤치에 앉아 오랫동안 텅 빈 광장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탄 전철도 텅 비어 있었다. 그는 덜커덩, 전철이 흔들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꿈이라도 꾸는 듯 멍하게 앉아 있었다. 마치 몽유병에 걸린 사람처럼 어두운 밤을 배회하고 또 배회하는 느낌이었다.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땐 전철은 어느새 강을 건너고 있었다. 그는 창 너머에 펼쳐진 한강의 야경을 바라봤다. 어둠 속에서 조명들이 빠르게 춤을 추며 멀어져 갔다. 그는 그 점멸하는 불빛들을 보며, 순간 자신 안에 있던 무엇들이 엉터리로 뭉쳐 이제는 도저히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부드러운 진흙탕처럼 돼버렸다는 걸 깨달았다. 모든 것은 결국 사라졌다. 나는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하고 그는 중얼거렸다. 다만 지금 귀에 들리는 전철이 달리는 소리와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들만이 자신이 존재함을 알려주는 것 같았다. 아직도 모르겠어? 그는 이제 J가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녀가 실은 대답을 원치 않았다는 것도 함께 알 수 있었다. 그녀에게 돌아갈 방법은 없다. 그는 그런 생각을 하며 돌아갈 수 없다, 라고 수첩에 적어 넣었다. 부질없는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가 지금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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