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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깊은 우물

2012.06.12 16:0606.12

문담
tengo22@naver.com





진(辰)시(오전7~9시)도 되기 전에 출발했던 가마행이었다. 어느덧 해가 지고 가마꾼들이 곧 파루가 울릴 시간이라며 걸음을 재촉하자 가뜩이나 온종일 가맛멀미로 시달렸던 은(恩)은 가마꾼들의 걸음에 맞춰 들썩이는 가마 안에서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다. 그래도 은은 가마요강을 꼭 끌어안은 채 다시 한 번 어머니의 당부를 떠올리며 울렁이는 속을 다스리는데. ‘대대로 정승 판서가 끊이지 않는 명문가라는구나. 딸 첩살이 보내는 애미가 무슨 할말이 있겠니.. 그저 애비없는 집안이라고 책잡히지 않게 채신 잘하고 부디 잘 살거라.’  


“작은 마님 뫼시고 왔네” 대답이 없다 싶을 즈음 윤참판 댁 문이 열리는데 육중한 대문이 삐걱이며 만드는 기괴한 소리는 어찌나 큰지 그때까지 가마안에서 긴장한 채 꼿꼿이 앉아있던 은은 그만 자세를 흩뜨리며 고개를 숙인 채 두 귀를 막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가마가 문지방을 넘자 이제 주위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그 고요함이 오히려 더욱 은의 마음을 불안하게 한다. 허나 그때 마당에는 이미 윤참판 댁 노비들이 모두 나와 별채로 향하는 은의 가마를 쳐다보고 있었는데 그중 한 늙은 여종이 “뉘집 규순지 겁도없이..” 하며 고개를 내젖는다.


“이리 오거라. 내 너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느냐?” 은을 반기는 윤참판의 모습에 은은 모든 여독과 긴장이 일시에 풀림을 느낀다. 합환주(合歡酒) 한잔에 얼굴이 빨개진 채 윤참판의 품에 안긴 은은 간신히 “불을 꺼 주셔요.. ” 한 마디를 하고는 그에게 온전히 몸을 맡기고.. 달 없는 그믐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별채 안에는 윤참판의 점점 거칠어가는 숨소리만 들린다.


처음에 은은 자신이 환청을 들은 것이라 여겼다. 어디선가 아기가 웃는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는 처음엔 윤참판의 거친 숨소리 사이로 장난처럼 들렸다. 하지만 일단 은이 아가의 존재를 인식하고 주의를 기울이자 점점 또렷이 들려온다. 오히려 바로 눈앞에 있음에도 달빛도 없는 어둠속 얼굴도 보이지 않는 윤참판의 거친 숨소리보다 아가의 맑고 또렷한 웃음소리가 은에겐 더 큰 존재감을 가진다. “나리, 나리..”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생각한 은이 윤참판의 땀으로 번들거리는 등을 두드려 보지만 윤참판은 오히려 더욱 거칠게 은을 애무하며 다급한듯한 신음을 토해낼 뿐. 그때였다 은의 눈에 동자귀신이 보인 것은. “까르르 까르르..” 웃음소리와 함께 문창지 너머 툇마루 위로 아가가 기어 다니는 것이 보인다. 이 칠흙같은 어둠에 그것은 너무나 선명해서 은은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그저 그 모습을 바라볼 뿐인데 급기야 동자귀신은 발딱 일어서더니 그 작은 그림자를 키우며 은을 향해 다가오더니 대뜸 문 앞에 서서는 문창지에 구멍을 뚫는다. 작은 손가락이 문창지를 뚫고 나와 꼼지락 거리는 모습에 은은 그만 참지 못하고 “나리!”하고 소리를 질러버린다.


“아니 이 밤중에 아기라니. 무슨 소리 하는 거요!” 짜증이 난 윤참판이 속적삼도 안 걸친 맨 몸으로 벌컥 방문을 열어젖히고. 은 역시 되는 대로 차림을 수습하며 고쳐 앉아 불을 밝히지만 아이 소리는커녕 오히려 윤참판의 고함 소리에 조용히 잠자던 동네의 개들이 놀라 짖어댄다. 무안해진 은, 무안하고 죄송한 마음에 고개를 숙인 채 앉아 있고 그 모습을 노려보던 윤참판, 화풀이 하듯 부서져라 도로 문을 닫는데. 닫힌 방문엔 작은 구멍이 뚫려있다.  


“마님, 인사드립니다. 은이라 하옵니다.” 잔뜩 긴장한 채 은은 윤참판의 부인 장씨에게 첫 아침 문안을 드린다. “어디서 근본도 없는 천한 것이..” 떨리는 목소리에서 살기마저 느껴지는 장씨의 말에 은은 고개도 들지 못하고 그저 죄인처럼 고개를 폭 숙이고 있는데 내내 한참을 그렇게 은을 노려보기만 하는 부인 장씨. 정실부인으로서 첩에게 보여야할 기본적인 인사나 당부의 말 한마디 대신 그녀가 던진 말은 “그래 첫날밤은.. 나리께서 흡족해 하시더냐?”  


핼쑥해진 얼굴로 안채를 다녀온 은에게 오늘부터 자신의 몸종이라며 또래의 계집아이가 다가와 넙죽 인사를 한다. “덕실입니다요.” 작고 다부진 몸매하며 콧등엔 땀이 송글송글 맺힌 채 수줍게 웃는 모습이 은에게 떠나온 고향에서 지내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겨우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하지만 은에겐 그 하루사이에 자신에게 많은 변화가 일어났음을 실감한다. 산골 처녀에서 참판의 후처라는 일신상의 변화뿐 아니라 기쁨과 설렘에서 왠지 모를 불안만이 가득한 심신상의 변화까지... 어색한 말투로 은은 덕실에게 부탁한다. “집을 한번 둘러보고 싶어”


멋대로 웃자란 잡초 밭 사이에 쓸쓸하게 위치한 우물을 가리키며 은은 저만치 도망치듯 앞서 가버리는 덕실을 불러 세운다. “이 우물은 왜 막아놓았어?” 아이를 낳다 죽었다는 한씨부인이 지내던 별채를 둘러보던 중이었다. 오랫동안 돌보지 않아 폐가와 다름없는 흉물스런 모습의 별채와 그 옆에 위치한 우물은 다른 이들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판석으로 덮고 그 위에 부적까지 붙여놓은 다음 동아줄로 친친 감아놓았다. 아무리 그렇다해도 덕실이 이 별채에 들어선 이후 보이는 모습은 은이 보기에 참으로 이상하다. 한씨부인의 이야기를 들은 은이 관심을 보이며 조금 둘러보려 하는데 덕실은 안절부절 못하며 이곳은 더 볼 것이 없으니 다른 곳을 둘러보자고 채근이다. 은이 이렇듯 불안해하는 이유가 무어냐 물어도 덕실은 그저 “아무것도 아닙니다요.”라는 대답 아닌 대답만 하고는 이내 입을 꽉 다물어 버린 채 저만치 앞서가 버린다.


그날 밤, 윤참판의 곁에서 잠이든 은의 꿈에 어제의 동자귀신이 또 나타난다. 동자귀신을 봤다는 말을 은은 윤참판 외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다. 실제 은의 별채 문창지에 구멍이 난 것을 은은 윤참판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문창지의 구멍쯤이야 은이 직접 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대신 오후에 덕실과 죽은 한씨 부인의 별채에 들른 이후 이 집에 자신도 모르는 비밀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느낀 은은 꿈에서 어제의 동자귀신이 나타나자 내심 반가울 정도였다. 그래서 은은 꿈속에서 동자귀신을 따라 나선다. 짙은 안개를 해치고 놓치지 않겠다는 마음만으로 바짝 동자귀신의 뒤를 쫓아간 은이 이윽고 동자귀신이 멈추어 선 곳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자 그곳은 바로 낮에 덕실과 갔었던 그 한씨부인의 별채 우물 앞이었다. 동자귀신은 용케도 그 작은 몸으로 거미처럼 우물벽을 타고 우물을 막아놓은 판석위로 올라가 앉더니 은을 향해 오라는 듯 판석을 손바닥으로 두드린다. 그 모습에 홀리듯 다가선 은, 동자귀신은 은에게 무어라 옹알이를 한다. 그 소리를 들어야겠다고 생각한 은이 동자귀신을 안아든다. 무게도 체온도 느껴지지 않는 동자귀신, 가까이 들여다보니 인중에 작은 흉터가 보인다. ‘어린것이 어디서 다쳤을까..’하고 겁도 없이 한가한 생각을 하는 은에게 동자귀신은 좀 전의 옹알이와는 다른 또렷한 목소리로 은의 귀에 속삭인다. “엄마를 꺼내줘요.”


은은 윤참판에게 꿈 이야기를 한다. 동자귀신이 은에게 엄마를 꺼내 달라 했다는 말까지 들은 윤참판은 기이한 일이라며 첫날밤 은의 말을 무시하던 태도와는 달리 당혹스런 태도를 보인다. 그 모습에 은은 윤참판을 채근한다. 첩이라 해도 엄연히 식구인데 자신만 모르는 비밀이 있을 수 있냐며 닥달하는데야 윤참판도 당해낼수가 없었는지 윤참판은 은에게 죽은 한씨부인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실은 한씨는 아기를 낳다 죽은 것이 아니었소. 유월 열하루였나? 아주 더운 날이었는데 유산으로 아이를 잃은 거요. 이미 만삭인 상태에서 아기가 숨졌으니.. 산파며 의원이며 다들 한씨가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 거라고 했지만 부인은 강했소. 그 죽은 핏덩이를 낳고는 손에서 놓아주지 않는 바람에 하루가 지나서야 겨우 아기를 떼내고 묻을 수 있었지. 그 후로 부인은 충격으로 아예 정신 줄을 놔 버렸소. 그렇게 아이를 잃고 한 석 달쯤 지났으려나? 부인이 그만 별채 옆 우물에 빠져 죽은 거요. 그 우물이 또 어찌나 깊게 파놓았던지 시신을 수습해야겠는데 아무도 그 안으로 내려가려는 사람이 없었소. 워낙 깊고 오래된 우물이라 언제 무너져 내릴지 모른다며.. 그래도 억지로 한 놈 두레박에 실어 내려 보냈더니 글쎄 줄이 닿지 않을 때까지 내려가도 끝을 모르겠다는 거요. 괜히 엉뚱한 놈 하나 더 생매장 시키게 생겼더군.  그래서 어쩌겠소. 동네 무당을 불러다 굿을 하고는 그냥 그대로 장사까지 지내고 우물을 덮어 버렸소.”  


사실을 알게 된 은은 한씨 부인의 기구한 운명에 마음이 아팠다. 불쌍한 한씨 부인을 생각하면 할수록 은의 머릿속엔 꿈속에서 동자귀신이 자신에게 부탁했던 엄마를 꺼내달라는 그 말이 귓전에 생생하게 울린다.


어느 날 부인 장씨가 은을 부른다. “나리께 들었네. 자네가 요즘 통 먹지도 못하고 밤엔 잠도 못 이룬다지? 내 특별히 용하다는 곳에서 약을 지어왔으니 다려 드시게나.” 이전과 다른 장씨의 태도에 어리둥절해 하며 받아온 약재를 은이 덕실에게 다려달라 하자 덕실은 한사코 거부한다. “안됩니다요. 한씨 아씨가 어떻게 돌아가셨는데요.” 은은 무슨 소리냐며 한씨 부인의 일은 윤참판에게 들어 알고있다 하자 덕실이 말한다. “나리께서도 모르시는 일이 있습니다요.”


“저희 아랫것들 사이에선 한씨 아씨가 그리 된 것은 모두 큰 마님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요. 한씨 아씨가 회임을 할 무렵부터 큰 마님이 부쩍 사찰에 다니셨는데 알고 보니 그것이 불당이 아닌 무당의 사당이라는 소문이 마을에 돌았고 또 마님이 그때부터 따로 찾아가시는 의원이 있었는데 마님은 그곳에서 지은 약을 아랫것들을 시켜 한씨 아씨가 드시도록 했지요. 이래도 모르시겠어요? 한씨 아씨가 유산한 이유를요? 이것이 다가 아닙니다요. 그렇게 아가를 잃고 정신 줄마저 놓은 한씨 아씨를 우물에 빠뜨린 게 누군지 아세요? 그건 바로 마님의 몸종 귀란이란 말입니다요. 귀란이 마님의 지시로 한씨 아씨를 우물 속에 빠뜨려 죽였다는 것을 저희 아랫것들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라 이 말씀입니다요. 아씨, 그래도 이 약을 드시겠어요?”


덕실의 예기는 아랫것들의 예기일 뿐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아랫사람에게 특히 혹독하게 대했던 장씨 부인에 대해 노비들의 반감이 심하다는 것을 은은 이미 알고 있었기에 그것이 모두 사실이라고는 은도 믿지 않았다. 하지만 매일 아침 은이 부인 장씨에게 문안인사를 드리러 갈 때마다 두려움으로 감히 고개도 들지 못한 채 겨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부인의 묻는 말에 몇 마디 대답을 하고 안채를 나올 때면 이미 은의 이마와 손바닥은 식은땀으로 축축할 정도였다.  


덕실은 행랑채 옆 창고에서 귀란에게 흠씬 두들겨 맞는다. 은에게 약을 다려 먹이지 않았다는 것이 이유였다. 머리가 땜통이 나도록 뽑히고 몸에는 온통 시퍼런 멍투성이가 된 것도 몰랐던 은은 별채 밖에서 혼자 쭈그리고 앉아 우는 덕실을 보고 캐물은 후에야 그 사실을 알았다. “나리에게 이를 거야” “아씨 제발 그러지 마세요. 그러시면 저는 정말 죽을지도 몰라요.”    


그날 밤, 은은 가슴이 터질 것 같은 답답함에 벌떡 일어나 옆에서 윤참판이 자고 있는 잠자리를 박차고 밖으로 나간다. 속곳차림에 은장도만 품고 나설 땐 이미 갈 곳은 정해진 것이다. 은은 주저함이 없이 죽은 한씨 부인의 별채 옆 우물가로 곧장 걸어간다.  


품고 있는 은장도로 우물에 둘러쳐진 동아줄을 끊고 판석에 붙은 부적을 떼어낸 다음 세 개의 판석 중 가운데 판석을 겨우 밀어내 우물 밖으로 떨어뜨린다. “쿵” 잡풀위로 판석이 떨어지는 묵직한 소리에 그만 은의 마음도 같은 소리를 내며 덜컥 겁이 난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지?’ 조심조심 은은 다가가 떼어낸 판석 사이로 드러난 우물 속 어둠을 들여다본다. 깊은 밤, 주위가 어둡기도 하거니와 판석 사이의 어둠은 너무나 검어 마치 간장이 담긴 장독 안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실감이 나지 않는다. 주위를 둘러보던 은은 작은 돌 하나를 주워서는 판석 사이의 어둠속으로 떨어뜨린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이상하지 않은가? 아무 소리가 안 들리다니? 의당 우물물에 돌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와야 되는 것이고 그것이 아니라면 우물에 물이 없다면 어찌됐든 바닥은 있을 것이 아닌가? 기다려도 기다려도 정말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은은 다시 주위를 둘러보더니 이번엔 조금 큰 돌을 주어서는 판석 사이의 어둠을 향해 정확하게 떨어뜨린다. 그리고 판석 사이로 귀를 가까이 댄다. 확실히 돌이 공기를 가르며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 소리는 이내 작아지더니.. 순간 판석 사이로 귀를 대고 있는 은의 등에 오싹 한기가 느껴진다. 또다시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기다려도 기다려도 아무리 기다려봐도.. 은, 겁먹은 얼굴로 일어나 천천히 판석 사이로 보이는 우물속을 내려다본다. 그 끝없는 깊이의 어둠뿐인 우물 속을.


다시 방안으로 뛰어 들어온 은이 두려우면서도 한편으론 후련하기도 한, 알 수 없는 불안한 마음으로 억지로 잠을 청하던 그때, 판석이 떨어져나간 우물위에는 부인 한씨가 앉아 있다. 하얀 소복에 산발을 한 머리로 동자귀신을 꼭 끌어안은 채. 그렇게 은에 의해 이제 우물 밖으로 나온 부인 한씨는 동자귀신을 부둥켜안고 서럽게 울고 있다.


다음날, 마을은 간밤에 숨진 의원의 예기로 온통 시끄럽다. 부인 장씨가 부탁해 약을 지어온다는 의원이었다. 두 눈을 부릅뜨고 빳빳이 굳은 채 죽었다는데 그 공포에 사로잡힌 얼굴 표정 때문에 죽기 전 귀신을 본 것이 아니냐는 소문이 돈다고 한다. 덕실은 은에게 그 소식을 전하며 “천벌을 받은 거지 뭡니까요? 의원이란 것이 죽을 사람도 살리진 못할망정 멀쩡한 뱃속 아기 명줄이나 끊는 약을 팔아먹고 살았으니...” 하지만 은은 그 소식을 듣고 두려운 마음에 안절부절 못했다. 혹 자신이 우물을 열어둔 탓에 우물 밖으로 나온 한씨 부인이 의원을 해코지 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에.


전날 밤 의원을 죽인 한씨 부인은 다음날 또다시 밤이 되자 동자귀신을 안고 마을을 돌아다닌다. 그녀가 안고 있는 동자귀신의 울음소리를 들은 동네 개들이 그녀가 지나갈 때마다 짖어대는 통에 동네는 온통 그녀가 움직이는 발길 따라 시끄럽다. 그 시간 바느질을 하며 소일하고 있던 은과 덕실은 동네 개들이 짖어대는 소리를 듣는다.  


잠시 후, 한씨부인이 동자귀신과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윤참판 댁의 행랑채에 위치한 귀란의 방이다. 이 사실을 알 리 없는 귀란이 곤히 자고 있는 방문이 동자귀신의 재잘대는 소리와 함께 열리고 동자귀신을 안은 한씨부인이 들어온다. 천천히 걸어 들어와선 귀란의 머리맡에 선 한씨, 가만히 곤히 자고 있는 귀란을 내려다본다. 자 이제 복수의 시간. 한씨부인은 귀란의 꿈속으로 들어가 귀란을 과거의 시간 속으로 끌고 간다.


한씨부인이 귀란을 끌고 간 과거의 시간에서 귀란은 부인 장씨와 함께 아기를 잃고 정신 줄을 놓은 채 별채 툇마루에 앉아 멍하니 먼 산을 바라보고 있는 한씨 부인에게 다가간다. “어유 얼굴이 많이 상했네. 한씨, 내 누군지 알아는 보는가?” 부인 장씨는 한씨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마치 눈앞의 한씨를 없는 사람 취급하듯 옆의 귀란에게 말한다. “뱃속에 아이만 때어 내랬지 누가 이렇게 실성까지 하게 만들라 하였느냐 말이다.” 그 말에 귀란이 웃으며 답한다. “참으로 용한 의원이지 뭡니까? 새끼 잃은 애미의 슬픔을 덜어주려 아예 애미를 백치로 만들어 버렸으니까요. 안 그렇습니까 마님?” “오라.. 아하하하 그래 니 말이 옳다. 그런 깊은 뜻이 있었구나.” 자신의 면전에서 그러한 이야기를 나누는 부인 장씨와 귀란을 쳐다보는 한씨. 그런데 그때까지 동공이 풀린 채 이리저리 흔들리던 한씨의 눈동자가 갑자기 정확히 부인 장씨의 눈동자와 시선을 맞춘다. 그리고는 “지금.. 뭐라고?” 하고 묻는다. 순간 부인 장씨와 귀란의 얼굴에 웃음기가 싹 가시고 그런 둘에게 한씨 부인이 다시 묻는다. “지금 뭐라고 했어?”  


한씨 부인은 이제 귀란의 머리맡에 서서 귀란을 내려다본다. 귀란의 꿈에서 빠져 나온 한씨 부인, 옛 생각에 눈에 눈물이 맺히더니 그 눈물 한 방울이 귀란의 얼굴위로 “똑” 떨어진다. 그 바람에 귀란이 잠에서 깬다. 부스스한 눈으로 한씨를 올려다보는 귀란, 이윽고 정신이 든 귀란이 머리맡에 서있는 한씨를 알아보고 소스라치게 놀라 미친 듯이 몸부림을 치며 소리를 질러보지만 어찌된 일인지 몸도 움직여 지지 않고 소리도 지를 수 없다. 공포로 버둥거리는 귀란의 몸 위로 동자 귀신이 올라탄다. 올라탄 동자귀신이 깔깔대며 점차 귀란의 얼굴쪽으로 기어오자 온 몸이 굳어버린 채 파랗게 질려버린 귀란은 그만 코앞에서 동자귀신의 얼굴과 맞닥뜨리게 되자 혼절해버린다. 그러자 한씨 부인, 혼절한 귀란을 다시 과거의 별채 우물터로 데려가서는 이번엔 지난날 귀란이 자신에게 했던 것과 똑같이 복수를 하는데.


먼저 다듬이 방망이로 귀란의 머리를 내리친다. 한번 내리친 방망이질에 반쯤 정신을 잃은 귀란의 머리채를 잡고 우물터로 질질 끌고 간 한씨부인은 귀란을 머리부터 우물 속으로 집어넣는다. 그 순간 컴컴한 우물 속에서 머리가 들어간 채 귀란은 정신이 돌아온다. 다리를 버둥거리며 맹렬히 저항해보는 귀란, 하지만 한씨 부인은 그런 귀란의 버둥거리는 두 다리를 잡아 휙 들어 세우더니 “잘 가게”하고는 귀란을 끝없는 깊이의 우물 속으로 떨어뜨린다. 이미 방망이질에 금이 간 두개골이 온몸의 하중이 실린 채 거꾸로 처박히며 무수히 우물 벽에 부딪치며 떨어진다. 끝없이 끝없이...  


그렇게.. 추락과 함께 무수히 우물 벽에 부딪친 머리는 산산조각이 나고 온몸 또한 우물 벽에 쓸려 가죽이 벗겨진 채 말 그대로 벌건 피덩이의 모습이 된 귀란이 이불위에 누워있다. 그 모습에 동자귀신이 깔깔대며 웃는다. 그런데 그 순간 문 밖에서 소리가 들린다. “귀란언니” 동자귀신도 한씨 부인도 놀라 방문 쪽을 쳐다보는데.


행랑채로 돌아온 덕실이 자기 방으로 들어가다 귀란의 방에서 들려오는 아기 소리에 무슨 소리인가 하여 들른 것이다. 한씨 부인은 동자귀신을 품에 안고 문 앞으로 다가가고 덕실 역시 귀란의 방 문 앞에 귀를 쫑긋 세우고 다가서고 결국 문창지를 사이로 마주 보고 있는 덕실과 한씨 부인이다. 다시 한 번 더 불러봐도 아무 기척이 없자 덕실은 고개를 갸우뚱 하더니 문창지에 구멍을 뜷고 안을 들여다본다. 뚫어진 구멍으로 눈을 갖다 대는 덕실, 한씨 부인도 그 구멍으로 눈을 갖다 대는데. 그렇게 이제 덕실과 한씨 부인 서로 눈동자를 마주한 상태로 문창지를 사이에 두고서로의 호흡마져 느껴질 정도인데 결국 참다못한 한씨 부인이 짓궂게 입을 연다. “덕실이니?” 생전의 한씨 부인의 목소리를 기억하는 덕실, 그만 그 자리에서 혼절하고 만다.


이제 모든 것이 명백해졌다. 혼절에서 깨어난 덕실이 귀란의 방에서 죽은 한씨가 자신을 불렀다는 이야기에 저간의 윤참판 댁 사정을 아는 이들이라면 누구든지 의원의 죽음과 귀란의 죽음은 모두 죽은 한씨 부인의 원혼이 복수를 한 것이라 여겼다. 더구나 포도청에서 나온 관원들이 죽은 한씨가 쓰던 별채의 막아놓은 우물이 판석이 벗겨진 채 열려있는 것을 발견하자 놀란 부인 장씨는 무당을 부른다. 무당 역시 장씨의 사람으로 한씨 부인이 유산에 이르는 동안 장씨부인에게 한씨를 대신할 재웅을 만들어 주며 온갖 주술을 부려 죽은 한씨와 뱃속 아기를 고통스럽게 했었고 한씨를 빠뜨린 우물을 덮을 때 굿을 해주었던 무당이었다. “귀신이 빠져 나왔습니다. 지금 이 집안에 있군요.” “그럼 어찌 하면 되는가?” “굿을 해 내쫓아야지요.” “그럴 것이 아니라 다신 내 앞에 나타나지 못하게 죽여주게나.” 귀신은 죽이는 것이 아니라 내 쫓는 것이라는 무당의 말에 그만 부인 장씨는 이성을 잃고 소리친다. “내 쫓으면 또 올 것이 아닌가. 그러지 못하게 내 앞에서 조각조각 찢어죽이던지 태워버리든지 하란 말이다!”  


굿판이 벌어진다. 은은 물론 윤참판을 제외한 거의 모든 식솔들이 그동안 버려진 채 방치해 두었던 한씨의 별채에 모여 무당이 벌이는 굿판을 지켜본다. 우물 앞에 설치된 재단 옆에 서서 무당의 알 수 없는 주문을 들으며 은은 이 모든 일이 자신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는 생각에 죄송한 마음과 함께 한편으론 이로서 한씨부인도 동자귀신의 영혼도 마지막인가 하는 생각에 무엇보다 가슴이 아팠다.


재단에서 주문을 외던 무당은 부인 장씨와 은에게 팥이 담긴 박을 주며 자신과 함께 우물 주위를 돌며 팥을 뿌리라고 한다. 은은 부인 장씨를 따라 무당이 하라는  대로 우물가에 팥을 뿌린다. 쏟아지려는 눈물을 꾹 참으며. 그러던 중 갑자기 무당이 별채 쪽을 바라본다. 수북이 자란 잡풀너머 보이는 별채, 아무도 드나들지 못하게 문에는 판자를 대어놓고 못질까지 해놓아 거미들이 마음 놓고 사방에 거미집을 쳐놓은 그곳, 그 안에 지금 한씨부인이 있다. 시끄러운 사물소리에 고통스럽게 울어대는 동자귀신을 꼭 끌어안은 채 그렇게 다가오는 종말을 기다리고 있다.


노비들이 판자들을 뜯어내자 별채의 문 앞에 선 무당은 부인 장씨에게 복숭아 나뭇가지를 건내며 “저 안에 있을 것이니 이것으로 때리시면 됩니다.” 한다. 은에겐 “마님은 계속 팥을 뿌리시고요.” 그리고는 문을 벌컥 열어젖히는 무당. 문 앞엔 이미 각오한 듯 한씨 부인이 서있다. 방 안으로 들어오려는 무당을 막아서며 버티는 한씨 부인. 그렇게 처음엔 무당에게 맞서던 한씨이지만 곧 요령을 흔들며 악을 쓰듯 주문을 외는 무당에게 적수가 되지 못한다. 고통스러운 듯 귀를 막고 비틀거리는 한씨에게 부인 장씨가 복숭아 가지를 들어 한씨의 몸에 내리친다. 그것이 채찍이나 되는 양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한씨. 무당은 쓰러진 한씨와 울부짖는 동자귀신이 있는 방구석으로 부인 장씨를 잡아끌더니 그들에게 계속 복숭아 가지를 휘두르라 한다. 그러자 “네 이년!” “네 이년! 여기가 어디라고” “네 이년!” 부인 장씨는 두 눈이 뒤집힌 채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며 미친 듯이 복숭아 가지를 휘두른다. 이 모든 광경이...은에겐 보인다. 동자귀신을 꼭 품에 안은 채 온몸으로 부인 장씨가 휘두르는 복숭아 가지를 맞는 바람에 한씨의 하얀 소복이 피로 빨갛게 물드는 것이 은의 눈엔 생생하게 보인다. 순간 무당이 은에게 외친다. “뭐 하십니까? 팥을 뿌리시래두요!” 울먹이는 은, 마침 고개를 들고 자신을 쳐다보는 한씨와 눈이 마주친다. 팥을 쥔 채 차마 뿌리지 못하는 은을 이제 모든 것을 포기했다는 듯 웃으며 쳐다보는 한씨 부인. 은, 결국 팥이 든 박을 팽개치고 오열하며 별채 밖으로 뛰쳐나간다.


그 후로 1년이 지났다...


떠들썩했던 당시 의원과 귀란의 급사사건을 포도청에선 그저 두 사건 모두 원인모를 급사라고 속 편하게 결론을 내려버렸다. 다른 용의자가 있는 것도 아니고 모두들 귀신이 범인이라 단정하는 사건이니 오히려 포도청에선 부담이 없었던 것이다.그리고 당시 굿판을 벌였던 무당은 그날 이후 신기가 사라졌다하여 다시 신기를 받는다며 산에 올라가더니 어느 비오는 날 벼락을 맞고 죽었다한다. 윤참판은 문제의 우물은 물론 한씨 부인의 별채까지 모두 허물어 버리고 그 위로 흙을 다져서는 그곳을 국궁터로 만들어 버렸다. 종종 윤참판과 친구들이 그곳에서 활을 쏘며 크게 웃는 소리가 들려올 땐 언제 그곳에서 그런 끔찍한 일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이후 윤참판댁의 분위기도 밝아졌다. 은은 그 사건이후 재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해 몸을 많이 상했었다. 덕실 역시 충격으로 제정신이 아니었으나 은이 겨우 몸을 추수를 무렵부터 덕실을 데리고 가까운 사찰에 들러 죽은 한씨 부인과 그의 아가의 명복을 빈 것이 효과가 있었던지 둘은 이후 마음의 안정을 찾게 되었다. 그래서인가? 이후 은의 꿈엔 동자귀신도 한씨부인도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부인 장씨가 회임을 했다. 은이 아닌 부인 장씨가 회임을 한 것이다. 이 놀라운 소식은 윤참판이 이제나 저제나 고대하고 고대하던 은의 회임이 도통 기미가 없어 애를 태우던 차에 벌어져 더욱 집안사람들을 놀라게 했는데 이후 윤참판네 집안은 온통 부인 장씨의 태기에 맞춰 들썩여 나이어린 노비 녀석들까지 장씨의 출산일을 손꼽아 따질 정도였다. 그렇게 수개월을 윤참판 뿐 아니라 온 집안 식솔들의 마음을 졸이더니 결국 부인 장씨는 출산을 한다. 그것도 아주 건장한 사내아이를.  


“어이구 우리 도련님. 여기 누가 왔는지 보세요. 삼칠일이 지났다고 별채에서 인사를 드리러 왔답니다.” 출산 이후 부쩍 야윈 부인 장씨가 강보에 쌓인 아가를 어르며 말한다. 눈가의 주름이 펴질 틈이 없는 미소하며 연신 아가에게 쫑긋거리며 입술을 내미는 모습하며.. 세상을 다 가진 행복한 여자의 얼굴이다. 은은 부인 장씨의 그 모습에 또 한 번 자신이 얼마나 쓸모없는 존재인지 뼈저리게 느낀다. “자네에게도 우리 도련님 구경을 시켜드려야지? ”  “예” 조심히 강보에 쌓인 아가를 은에게 보이는 부인 장씨. 이 순간에도 장씨는 은의 반응은 안중에도 없이 그저 옹알거리는 아가와 눈을 맞추고 연신 아가에게 무어라 말을 건네느라 정신이 없다. “어떠냐? 나리를 쏙 빼닮지 않았느냐? 호호호”  은은 대답을 못한다. 아니 은은 장씨가 묻는 것을 듣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면 은의 앞에 있는 아가는 부인 장씨가 자기 자식이라며 내미는 강보 속의 아가는... 죽은 한씨 부인의 아가이기 때문이다. 인중의 흉터까지. 충격으로 말문을 잃은 은이 장씨를 쳐다보자 장씨는 도로 아가를 챙겨 안으며 “에구구구 우리 도련님 어떠세요? 별채 아씨를 보신 소감이 어떠세요? 호호호 가만 가만 손가락을 빠시는 게 벌써 배가 고프신 겝니까? 네? 그래요? 호호호” 부인 장씨가 스스럼없이 가슴을 풀어 헤치며 그 쭈글쭈글한 가슴을 자랑스레 내밀자 아가는 왕성한 식욕을 자랑하듯 “빽” “빽” 소리가 들리도록 맹렬히 이미 쪼그라들 대로 쪼그라든 부인 장씨의 가슴을 움켜쥐고 빨아댄다. 그 모습을 보고 있는 은에게 문득 죽은 한씨 부인의 마지막 모습이 떠오른다. 모든 것을 포기한 듯 자포자기한 얼굴로 힘없이 웃던 그 모습.  

“보시게 어찌나 애미 젖을 좋아하는지” 은을 보며 활짝 웃어 보이는 부인 장씨의 모습에 은은 그만 고개를 돌려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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