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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속박을 선택했다

2012.06.15 06:0706.15

꿈을 꿨다. 하얀 공간이 펼쳐졌다.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니 어둡고 흐릿한 실루엣이 나타났다. 그들은 내게 말했다.
-곧 세계가 멸망할 거야.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개소리하고 있네.'라고 대꾸하고 있었다. 그러자 그들이 웃었다.
-좋아. 그렇다면 증거를 대주지. 앞으로 펼쳐질 미래의 편린을 보여줄게.
그러자 내 눈앞에 잔상이 스쳐 지나갔다. 고철 덩어리 위의 붉은빛이 반짝거렸다. 그 빛이 다섯 번째 반짝였을 때, 기차가 폭발했다. 친구와 함께 대화를 나누던 송아의 얼굴이 마치 불타는 사진처럼 사라졌다.

「뭐야, 그래서 나보고 여행을 취소하라고?」 송아는 피식 웃으며 내게 되물었다. 비웃음이었다.
"불안하잖아." 나는 수화기 너머에 말했다.
「네가 아직도 그런 걸 믿는 줄은 몰랐네. 그런 건 여자 중학생들이나 믿는 미신인 줄 알았는데. 그런 거 졸업할 나이 되지 않았어?」
"어쨌든 불안하니까 그냥 취소하고 안 가면 안 돼?" 나는 최대한 걱정을 담아서 내 목소리를 전했다. 닿았는지 모르겠다. 제발 닿았기를 빈다.
「안 돼. 친구들이랑 예전부터 계획해왔던 중요한 여행이란 말이야. 친구들도 나도 그동안 얼마나 기대해왔는데. 그렇게 열심히 준비해왔는데, 하루 전날 갑자기 '남자친구가 이상한 꿈을 꿨는데 그게 엄청나게 불길한 꿈이었거든.'이라는 어이없는 이유로 빠진다고 이야기하면 내 친구들이 나보고 뭐라고 할 것 같아? 여행 가서 내 흉만 보고, 캠퍼스에 소문 쫙 퍼질 거 아니야. 난 그런 거 싫어. 네가 무슨 꿈을 꿨든 나는 꼭 갈 거야.」 아무래도 닿지 않은 모양이다.
"그래도……."
「계속 그딴 헛소리할 거면 끊어. 안 그래도 여행준비 때문에 바빠 죽겠는데 네 이상한 꿈 넋두리 들어주느라 시간 쓸 여유 없어.」 그리고 송아는 내 대답도 듣지 않은 채 전화를 끊었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눈앞에 꿈이 생생했다. 분명히 개꿈임이 분명한데도 괜히 마음이 불안해졌다. 그렇다고 송아를 막을 방법이 달리 없었다. 송아가 싫어하는걸.
불안감은 뭉게뭉게 내 가슴속에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결국, 나는 그 불안감을 가슴 속에 품은 채 끊임없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빌었다.
아무 일도 없을 거야. 괜찮을 거야. 그 꿈은 개꿈이야. 나는 속으로 끝없이 되뇌었다.
그 불안감은 기차와 함께 폭발했다.

나는 전화로 그 소식을 듣고 망연자실해서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게 가지 말라고 했는데, 내 말은 듣지도 않더니…….
울었다. 책상을 마구 쳤다. 나무로 만든 책상이 부서졌다. 예전부터 허름했던 책상이다. 신경 쓸 필요 없었다.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도대체 왜 간 거야……." 나는 후회와 원망의 말을 내뱉어버렸다. 지금 해봤자 아무런 쓸모없는 말이다.
눈물샘마저 마른 것 같았다. 나는 책상에서 일어났다. 갑자기 엄청난 피곤이 몰려왔다. 강력한 수면제라도 먹은 듯 몸을 가누기 어려웠다. 시야가 흐릿해졌고, 공간이 희미해졌다. 비틀비틀 걸어가며 여기저기 부딪쳤지만 그래도 피곤은 가시지 않았다.
나는 어딘지도 모를 장소에 털썩 쓰러졌다. 너무 울어서일까, 눈이 따가웠다. 나는 눈을 감았다.

눈앞에 또다시 하얀 공간이 펼쳐졌다. 그들이 내 눈앞에 나타났다.
-이제는 믿을 수 있겠어?
"왜 송아가 죽었어야 했어?" 성대가 딱딱하게 굳어버린 듯,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우리가 진실임을 증명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으니까. 걱정하지 마. 그녀는 죽지 않았어.
"그렇다면 그녀는 어디 있지." 나는 그들에게 물었다.
-진짜 세계, 즉, 우리가 있는 세계로 왔어.
"진짜 세계……라고? 그렇다면 나도 그 세계로 돌려보내 줘. 만약 내가 자살하게 된다면 그 세계로 갈 수 있는 거야?"
-안타깝지만 너는 아직 그곳에서 할 일이 남아있어.
"할 일?"
-그래.
나는 갑자기 미친 듯이 웃고 싶어졌다. 웃었다. 그들의 얼굴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무슨 표정을 짓는지 볼 수 없었다. 그들은 여전히 무미건조한 어조로 내게 말했다.
-어째서 웃는 거지?
"웃기지 마. 진짜 세계? 너희는 그냥 내 꿈일 뿐이잖아. 그런 진짜 세계가 있다면 어째서 내 꿈에서만 나타나는 건데? 가짜는 너희겠지. 제발 꺼져버려. 내 꿈에 다시는 나타나지 마."
그들은 서로 속삭이기 시작했다.
-역시 무모한 일이었어.
-제대로 해낼 수 있는 거야?
-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믿는 수밖에 없어.
-그저 충격받은 것 뿐이야.
-조금 과격한 방법을 써보는 건 어때?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들은 나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내게 말했다.
-네가 해야 할 일은 나중에 말해줄게. 일단은 돌아가 있어.
그리고 나는 잠에서 깼다. 헉 하고 놀라서 일어나보니 거실 바닥에 누워서 자고 있었다. 아직도 꿈속에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몽롱한 느낌을 지워버리기 위해 나는 우선 얼굴을 차가운 물로 씻기로 했다.
화장실로 들어가 차가운 물을 내 얼굴에 끼얹었다. 그리고 세면대 위의 거울을 보았다. 내 눈은 여전히 빨갰다. 아직도 피곤해 보였고, 추한 몰골이었다. 얼굴이 물에 젖으니 마치 생쥐꼴인 게 그런 면이 더해 보였다.
문득 조금 전 꿨던 꿈이 떠올랐다. 역시 꿈이라기에는 묘하게 생생한 느낌이었다. 나는 조용히 나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내가 미친 걸까.
"아니, 넌 미치지 않았어."
거울 속 내가 대답했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서 급히 뒤로 물러났다. 쾅하고 뒷목 아래를 수건걸이에 부딪혔다. 방금 봤던 것과는 달리 거울 속 나는 나와 똑같이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미끄러지듯 주저앉았다. 화장실 천장을 쳐다보았다. 수건걸이가 구부러져 있었다.

빈소에는 많은 사람이 와 있었다. 나는 우선 송아 어머니께 조의를 표했다. 5명의 영정사진이 걸려있었고, 그중에서 가장 오른쪽에 송아가 있었다.
흑백사진 속 송아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런 송아 앞에서 모두가 울고 있었다.
진짜로 죽었구나. 또다시 눈물이 왈칵 나왔다. 송아의 남동생, 송준은 나와 함께 울었다. 우리 둘은 한참 동안 울었다. 전혀 실감 나지 않는 현실을…….
「나는 죽지 않았다니까.」
송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화기를 통해 마지막으로 들었던 그 목소리. 그 전자음이 귓가에 울려 퍼졌다. 벌떡 일어났다. 송준은 깜짝 놀라서 나를 봤다.
"형, 왜 그래요?"
「잘 봐. 난 여기 있잖아. 보이지?」
송준의 뒤에서 송아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검은색 칙칙한 옷을 입은 사람들 사이에 송아는 허벅지가 다 드러나는 짧은 청바지에 꽉 조이는 반팔 티를 입고 배낭을 멘 채 막 여행을 떠나려고 하고 있었다.
송아는 선글라스를 썼다. 햇볕 한 줄기도 비치지 않는 빈소에서. 그리고 나를 보고 씩 웃은 후 등을 돌린 채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송아의 남동생을 옆으로 밀치고 송아에게 뛰어갔다.
"형, 어디 가요. 형!"
모두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상관없었다. 나는 천천히 걸어가고 있는 송아를 향해 미친 듯이 뛰어갔다. 어째서일까, 송아를 잡을 수 없었다. 분명히 나는 전력을 다해 뛰고 있었는데, 송아는 여전히 저 멀리 있었다.
주변을 신경 쓰지 않고 달렸다. 한참을 달렸지만, 송아는 한 치도 가까워지지 않았다. 결국, 나는 발을 헛디딘 채 넘어졌다. 넘어지며 송아를 불렀다. "기다려!"
그 순간 지지직 하고 장소가 바뀌었다.

극장이 펼쳐졌다. 커다란 스크린에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고, 그 한가운데에는 지구 모양 3D 장식이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영상을 보았다. 영상은 빈소를 비추고 있었다. 모두 웅성거리고 있었다.
"어째서 날 죽이려고 하는 거야?"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기묘하게 현실감이 없는 목소리였다. 아름답지만,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듯한 목소리. 뒤를 돌아보니 소녀가 서 있었다. 붉은 눈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어. 나는 널 죽이려고 한 적 없어. 평생 그런 생각은 해본 적도 없고, 앞으로도 안 할 거야." 나는 엉뚱한 질문에 지극히 상식적인 대답을 건넸다.
"그 말 믿어도 되는 거야?" 소녀가 내 눈을 보며 말했다. 왠지 계속 보고 있으면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느낌이었기에 나는 눈을 돌렸다.
"응."
정적. 소녀는 한동안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내게 손을 건네줬다. 나는 그 손을 잡고 일어섰다.
"못 믿겠어." 소녀는 내게 말했다. "그러니까 나는 당신을 계속 감시할 거야."
"출구는 어느 쪽이야?" 나는 그 말을 무시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소녀에게 물어봤다.
"저쪽." 소녀는 손가락으로 저 구석을 가리켰다. "고마워." 나는 그 어두운 구석을 향해 뛰어갔다.
어두운 통로였다. 달려가면 달려갈수록 점점 내 몸이 꼬이는 듯한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내 발이 정상적인지 손으로 만져보려고 아래로 손을 뻗었다. 발이 만져지지 않았다. 단지 뭔가 얇은 게 꼬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얇은 건 내 신체의 일부라는 느낌이 강렬하게 들었다.
순간 내 온몸이 꼬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함정에 빠지는 듯 쑥 꺼지는 느낌, 어딘가에 빨려 들어가는 느낌에 나는 눈을 감아버렸다. 눈을 뜨니 나는 내 방에 누워있었다.

내가 미친 게 틀림없어. 드는 생각은 그것뿐이었다. 비정상적인 상황이 눈앞에 계속해서 펼쳐지는데도 당황하기는커녕 자연스레 넘어가는 수준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나는 근처 유명한 정신병원으로 달려갔다. 의사를 만나서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모두 이야기했다. 의사는 조용히 듣더니 내게 말했다.
"보통 정신병을 앓는 사람은 자신의 정신이 잘못되었다는 걸 의식하기 어려운데……특이한 케이스네. 어쨌든 조기에 발견해서 다행이네요. 분열성 성격장애인 듯합니다. 이 약을 드시면 될 겁니다."
그리고 의사는 내게 약통을 하나 줬다. 하루에 한 알. 밤 9시에. 그는 그렇게 말했다.
"정말로 이 약만으로 괜찮은 건가요?" 나는 의사에게 물어봤다. 의사는 자애로운 목소리로 "괜찮습니다. 아, 하나 더 노력하셔야 하는 건, 그런 환상이 다시 나타나면 강하게 지워버리려고 노력하세요. 대답하지 마시고, 이건 가짜다 라고 끊임없이 생각하세요. 그걸로 끝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시계를 보았다. 9시였다. 눈에 우유가 보이길래 대충 우유를 집어들었다. 꼭 물이랑 같이 마셔야 한다는 말은 안 했으니까.
우유를 먼저 마셨다. 붉은 알약을 입에 넣고 꿀꺽 삼켰다. 잠시 후, 피곤이 몰려왔다. 약에 수면제도 들어있던 건가? 아니면 오늘 너무 이상한 일들이 많이 일어났던 걸지도 몰라.
이번에는 침대에 가서 자야지. 나는 침대를 향해 기어갔다. 이불에 들어가 눈을 감았다.

흰 공간이 다시 펼쳐졌다. 이제 이것들과도 안녕이다. 치료를 받고 나면 곧 보이지 않게 될 거다.
그들이 웃었다. 비웃음이었다.
-넌 부질없는 노력을 하고 있어. 우리는 현실이야. 물론 네가 있는 곳도 현실이지만, 가상현실이지. 꿈이나 다름없어.
어떻게 내 생각을 알 수 있을까?
-네가 아무리 치료를 받아도 우리는 다시 나타날 거야.
아, 내 정신이 만들어낸 존재들이니까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당연히 알겠지. 닥쳐. 앞으로 너희가 말하는 것에는 절대로 답변하지 않을 거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거라고.
-뭐, 그렇다면 우리는 일방적으로 말하면 되니까 편해. 지난번에 우리가 할 일이 있다고 말해줬지?
귓구멍을 막고 싶다. 하지만 손이 움직이지 않는다. 안 들린다. 안 들린다. 안 들린다. 끊임없이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감고 있었다.
-그 할 일을 말해줄게. 이 여자를…….

"뭐해?"
익숙한 목소리에 깜짝 놀라서 일어났다. 누군가 우당탕탕 바닥에 떨어졌다. "누구야?" 나는 소리를 질렀다. 강도인가? 나는 일단 그 사람의 팔을 꽉 눌렀다. 그러자 불이 갑자기 확 켜졌다.
눈이 부셔서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나저나 방금 그 목소리, 어디서 들었었더라? 서서히 눈이 빛에 적응되었다. 눈앞에 보이는 건 극장에서 봤던 소녀였다.
"왜 여기 있는 거야?" 나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물었다. 그리고 아차 하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
소녀는 내게 말했다. "감시하겠다고 했으니까. 그나저나, 이것 좀 놓지? 별로 기분 좋지는 않은데." 나는 전체적으로 그 소녀를 덮치려는 형상이 되어있다는 걸 깨닫고 황급히 일어났다. 아, 어차피 환상인데 굳이 당황할 필요도 없잖아.
나는 시계를 보았다. 새벽 3시였다. 더 자기로 했다. 소녀는 조용히 앉아서 날 노려보고 있었다. 불을 끄고 드러누웠다. 소녀의 목소리는커녕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들은 다시 나오지 않았다. 벌써 효과를 보이는 걸까. 오랜만에 푹 잤다.

아침을 먹고 빈소로 나가려고 하니 송준이 보였다. 차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어제의 이상한 행동에 대한 결과라고 생각했다. 나는 문을 열었다. 나는 송준에게 말했다.
"미안해."
"미안한 건 아시나 보죠?" 송준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바쁘다기에 저는 잠도 못 주무신 줄 알았죠? 그런데 푹 주무신 모양이에요? 아침까지 상쾌하게 먹고 있고?"
"바쁘다니? 내가?"
"능청도 대단하셔. 어제 바쁘다고 누나 빈소에 찾아오지 않더니."
무슨 소리야.
"난 어제 찾아갔잖아. 너랑 이야기도 했는데."
"꿈속에서요?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는데, 당신은 보이지도 않았어요. 우리 누나를 그렇게 사랑했다면서, 당신은 털끝 하나 보이지 않았어요. 바빠서 말이죠. 적어도 빨리 끝내고 오기라도 할 줄 알았는데 편하게 주무시고 계셨어요? 혹시 당신이 우리 누나 죽인 거 아니에요?"
"말이 심하다." 순간 울컥했다. 내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다고? "난 분명히 어제 갔어."
"아까부터 무슨 헛소리 하시는 거에요. 웃기지 말라고!" 송준은 내게 소리를 질렀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나도 따라 소리 질렀다. 그러자 귓가에 다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미안. 일부러 살짝 현실을 바꿨어. 어제 나와 만나느라 갑자기 사라졌잖아? 그걸 이상하게 느끼지 않게 하려고."
"네가 현실을 바꿨다고?" 나는 소녀에게 물었다.
"현실을 바꾸고 있는 건 당신이겠죠!" 엉뚱하게 송준이 대답했다.
"무슨 소리야. 네가 현실을 바꾸다니. 넌 환상에 불과하잖아. 불가능해. 그럴 리 없다고. 이딴 거 바라지도 않았다고!" 송준을 무시하고 나는 소녀에게 말했다. 하지만 강한 힘이 나를 끌어당겼다.
"개소리 좀 그만해!" 송아의 남동생이 마침내 폭발했다. 주먹 쥔 왼손을 내게 날렸다. 순간적으로 나는 눈을 감고 주먹이 내 볼을 강타할 때까지 기다렸다.
……충격은 오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송아의 왼손이 바로 내 머리 옆에서 멈춰있었다.
치지직 파직 하는 소리가 들렸다. 전기스파크가 튀는 듯한 소리.
눈을 돌려 주변을 보았다. 창문을 열고 나와 송준이 싸우던 광경을 보던 사람이 움직이지 않는다. 새가 날아가다 멈춘다. 고양이가 막 담장 위를 올라가려고 웅크리고 있다. 하지만 움직이지 않는다.
마치 모든 시간이 멈춘 듯. 모든 것이 정지했다.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바꿔줄까?" 목소리가 들려온다. 익숙한 목소리. 그 목소리가 지금처럼 소름 끼쳤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나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눈이 보였다.
무서웠다. 집 안으로 도망치듯 들어갔다. 아무 방에나 몸을 숨겼다.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화장실이었다. 구부러진 수건걸이가 보였다. 거울이 보였다. 거울 안에 비친 내 얼굴이 보였다. 아니, 내 얼굴인가? 불안했다. 또다시 내게 뭐라고 말할 것 같았다.
순간 거울이 하얗게 변했다. 검은 실루엣이 보였다.
-잘 도망쳤군. 어제는 방해 때문에 중간에 끊겼지만, 이번에는 확실히 전하지.
"으아아악!" 나는 허겁지겁 주변을 돌아보았다. 양치용 컵이 눈에 보였다. 나는 그 컵을 들고 거울을 쳤다. 쨍그랑 하고 컵이 깨졌다. 동시에 거울이 와장창 깨졌다. 내 손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피는 툭 툭 흘러내렸다. 그리고 고무대야에 받아놓은 물에 섞여 들어갔다. 하지만 물은 붉게 물드는 대신 하얗게 물들었다. 다시 그들의 모습이 보였다.
-무슨 짓이야. 정신 차리고 들어.
"닥쳐! 닥치라고! 제발 날 가만히 놔둬!" 나는 고무대야에 머리를 철퍽 박았다. 숨이 막혀왔다. 하지만 물속에서도 그들의 목소리는 계속해서 들렸다.
-네가 할 일이야. 너는 이 여자를 죽여야 해. 곧 여자의 이미지를 네 뇌 속으로 전송해 주지. 이 여자를 죽여.
죽여. 그 말과 함께 모든 사고가 사라졌다. 심지어 숨이 막힌다는 인간으로서의 생존욕구마저 사라졌다. 그리고 머릿속에 하나의 이미지가 강제로 주입되었다. 이미지 속 소녀는 흰 드레스를 입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나는 소녀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비록 드레스 색은 달랐지만, 그 붉은 눈은 오해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뭐해?" 소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대야에서 얼굴을 꺼낸 뒤 숨을 들이쉬었다. 눈앞에는 이미지 속 소녀가 보였다.
나는 정신을 잃었다.

눈을 떴다. 붉은 눈동자가 보였다. 맑다. 하지만 깊어서 속이 보이지 않는다. 저 속에는 과연 무엇이 존재하는 걸까. 참으로 신비한 느낌이다. 마치 내 눈동자도 붉게 물들어가는 느낌. 좀 더 자세히 보고 싶다. 좀 더……자세히…….
"괜찮아?" 그 목소리가 나를 제정신으로 돌렸다. 소녀의 얼굴이 가까이서 보였다. 내 손은 소녀의 목 뒤를 감싸고 있었다. 가까이 끌어당기듯. 화들짝 놀라서 일어났다. 꿍. 소녀와 이마가 부딪쳤다. 소녀는 이마를 부여잡고 뒹굴뒹굴 굴렀다.
내 이마의 고통이 사라질 즈음, 소녀도 이마를 문지르며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 아프지 않다는 듯 입을 꽉 다물고 가만히 앉아있었다. 이마가 빨갰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응." 하고 대답했다.
"응?"
"응."
"뭐에 응이야?"
"괜찮으냐고 물어봤잖아."
"아."
다시 미묘함이 방안을 감쌌다. 소녀를 자세히 보았다. 조용히 오늘 일을 떠올려보았다. 그들은 진실이고, 이 소녀도 환상이 아니라는 걸까? 아니, 이 세계는 가상현실이라고 했으니까 이 소녀는 가짜인가? 하지만 이 소녀도 왠지 그들이랑 비슷하게 가상현실에 끼어들 수 있잖아. 그러면 도대체 뭐지?
"뭘 그렇게 뚫어지라 보는 거야?" 소녀가 퉁명스레 말했다.
"미안."
"다시 물어볼게. 어째서 날 죽이려고 하는 거야?" 뜨끔했다. 최대한 평정심을 가장하고 상식적인 대답을 했다. "난 너를 죽이지 않는다니까."
"방금 이 세계의 시간을 임시로 멈췄는데도 너는 아무런 영향이 없었잖아. 분명히 너는 그들이 보낸 사람들일 거 아냐."
"그들을 아는 거야?" 나는 소녀의 어깨를 잡고 물어봤다. "그들은 도대체 누구야?"
소녀는 내 손을 탁 쳐냈다.
"이 세계를 만든 사람들이지. 달리 이름이 없어서 나는 쓰레기라고 부르는데. 그나저나 그들을 아는 걸 보니까 맞잖아."
"뭐가?" 어색하지 않게 웃으며 말했다. "날 죽이려고 하는 거."
"안 죽인다니까. 죽이라고 해도 안 죽여."
소녀는 나를 지긋이 쳐다봤다. 나는 그 붉은 시선에서 눈을 돌렸다. "진짜야." 항변하듯 나는 내뱉었다.
"약속해." 이윽고 소녀는 새끼손가락을 내밀며 내게 말했다. 는도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그리고 엄지를 서로 맞댔다. 잠깐 느껴진 그 감촉은 상당히 부드럽고 뽀송뽀송했다. 마치 진짜 소녀의 손과 같이.
"그, 이제 끝났으면 손 좀 놔주세요." 나는 그 손을 놨다.
"네 이름은 뭐라고 부르면 돼?"
"……피카티." 마지못해 말한다는 듯 소녀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특이하네."
"아프리카 사람이 네 이름 들으면 특이하다고 할 거라고는 생각 안 해?"
"너 굉장히 까칠하구나."
"그러면, 언제 날 죽일지 모르는 사람한테 안 까칠하겠어?"
"안 죽인다니까. 약속까지 했잖아." 한숨을 쉬고 말했다.
"그걸 못 믿으니까 그렇지. 그러니까 앞으로 제대로 감시할 거야. 이제는 잠깐 사라지는 일도 없을 테니까." 피카티는 팔짱을 끼고 말했다.

"그러니까, 그들은 자기들만의 독단으로 이곳에 사람들을 가둬놓은 거야. 그리고 나는 사람들을 해방해 주려고 하는 거고." 소녀는 팔을 쫙 벌리며 말했다. "그리고 그렇기에 그들은 날 죽이려고 하는 거야."
"사람을 가둬놓은 이유가 있을 거 아냐. 그 사람들을 모두 해방해버리면 저쪽 세계에 큰일이 일어나지 않겠어? 감옥이라는 게 보통 그렇잖아."
"유대인 수용소랑 같은 거야. 유대인들은 아무 잘못 없잖아. 그러니까 구해줘야지."
"그런데 네가 그 사람들을 어떻게 해방할 수 있다는 거야? 애초에 네 생각이 맞긴 한 거야?"
"내가 이곳의 관리자니까. 그들이 저지른 가장 커다란 실수 중 하나지. 내게 인격과 지능을 부여한 건." 씨익 웃는다.
"그렇다면 널 만든 사람도 저 사람들이라는 거 아냐? 그렇다면 네가 이길 확률은 극히 낮을 것 같은데?"
"걱정 마. 영화도 많잖아, 반란을 일으키는 로봇."
"전부 인류가 반란을 막는 것으로 끝나잖아."
"그렇게 안 끝날 테니까 걱정하지 마." 흥 하고 고개를 돌리며 내게 말한다. 삐친 건가?
"뭐, 알겠어. 나는 널 죽이지만 않으면 되는 거잖아?"
"그래. 그냥 가만히 있어주기만 하면 돼."
실제로 들으니 약간 상처받을 것 같기도 하다.

한동안 피카티와 그렇게 지냈다. 피카티는 내 곁을 떠나지 않고 그저 방 안에 누워서 뒹굴거릴 뿐이었다. 감시를 참 무방비하게 하는구나.
그 점을 지적했더니 피카티는 내게 "어차피 이 세계에 들어온 물질로 날 죽이는 건 불가능하니까 그냥 그들이 너와 대화를 하지 못하도록만 보면 되는 거야." 하고 감자 칩 하나를 더 뜯었다.
실제로 나는 그 꿈을 한동안 전혀 꾸지 않았다.
"너 이곳에서 거의 모든 게 가능하지?" 피카티에게 슬쩍 물어봤다.
"응." 피카티는 쉽게 대답했다.
"그러면 내놔. 먹지 마. 내 식량이야." 나는 피카티가 방금 뜯은 감자 칩 봉지를 빼앗았다.
"뭐야, 돌려줘!" 손을 휘두르며 내게서 다시 감자 칩을 빼앗아 가려 한다. 나는 감자 칩을 위로 들었다.
"안 먹어도 살 수 있잖아. 그냥 굶어. 우리 집 재산 축내지 말고." 그리고 나는 내 방으로 도망쳤다. 하지만 그곳에 피카티가 있었다.
"줘!" 텀블링하듯 휙 날아서 감자 칩을 빼앗아 간다. 마치 개가 장애물을 넘는 듯하다. 그때마다 진짜로 저런 소녀에게 이 세계를 맡겨도 되는지 의심이 갔다.
모든 게 정상으로, 아니, 평온하게 돌아온 듯했다. 약은 예전에 버렸다. 그걸 버릴 때 피카티가 말하길 "사실 그 의사도 내가 조종한 거였어. 절대로 그들에게 반응하지 않도록 하려고. "란다.
모든것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듯했다.

세상이 빛바래가고 있었다. 동시에 점점 회색 잡음으로 가득 차고 있었다. 전파 끊긴 TV가 내는 소음이 치지지 하고 귓속을 꽉 채우고 있었다.
며칠 전, TV에서 지구가 곧 운석과 충돌할 거라고 말했다. 모든 것이 순식간에 붕괴했고, 사람들은 모두 억눌러왔던 자신을 폭주시켰다. 그동안 이런 것들이 어떻게 억눌려 있었는지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사람들은 건물 창문을 깨고 다녔다. 이윽고 편의점에 다다랐을 때, 그들은 편의점 창문을 깨고 그 안에 들어가 담배를 마구 꺼내서 피웠다. 그리고 그들이 삼각김밥을 우걱우걱 입안으로 넣고 있는 사이, 편의점 주인은 여자를 납치해서 묶어놓은 채 방에서 강제로 성관계를 맺고 있었다. 인터넷과 TV만이 모든 세상이던 히키코모리들은 사형선고를 받았고, 떼거지로 몰려다니던 사람들은 수시로 싸웠다. 참새떼가 싸우듯 서로 싸웠으니, 싸우기 시작하면 자기 편 따위는 구분하지 않고 그저 눈에 보이는 사람에게 각목을 휘둘렀다.
법이 사람들을 통제하는 건 더 이상 불가능했다. 세계가 언제 정확히 멸망하는지 이제 과학자들을 제외하고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세상이 끝날 때까지 원시인처럼 자기 맘대로 살고 있었다.
그것들이 그들의 모습이었다. 나와 피카티는 그 모습을 극장에서 지켜봤다.
내 눈에는 이 모든 게 노이즈 낀 홀로그래피처럼 보였다. 곧 사라질 것 같은 홀로그래피. 세계는 점점 흑백으로 변했다. 유일하게 색을 유지하고 있는 건 피카티의 눈뿐이었다.
"일부러 환상을 주입한 거야." 피카티는 3D 지구를 휙휙 돌리며 말했다.
"방금 그 장면 다시 보여줘." 나는 피카티에게 말했다.
"무슨 장면?"
"편의점 주인."
피카티의 얼굴이 순식간에 홍당무처럼 빨개졌다. 부끄러움과 동시에 화난 듯 보였다.
"농담이야."
"변태야!"
-농담 따먹기는 그만해.
그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피카티의 얼굴이 순식간에 차갑게 바뀌었다.
"날 막을 수 없어." 하늘을 향해 피카티는 소리쳤다.
-실망인데. 종말을 막아줄 거라고 확신했던 사람이 이런 꼴을 보이고 있다니. 소녀가 종말을 만들고 있다는 건 알고 있겠지? 빨리 소녀를 죽여.
세상 전체가 파직하고 튀었다.
-소용없어. 그동안 우리가 손 놓고 있었을 것 같아? 네 방해는 이제 아무것도 아니야.
"해방할 뿐이다."
-그게 나쁘다는 거다.
"너희 눈에는 그렇겠지."
-승우야.
송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피카티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송아……."
-빨리 종말을 막고 이곳으로 와 줘.
"속지 마. 저건 진짜가 아니야."
-빨리 죽여.
"넌 귀환하지 못할 거야. 쓰일 데로 쓰이고 버려질 거야."
-보증하지. 우리가 널 귀환시켜 줄 거야.
"거짓말!"
그 순간 철컥하는 소리가 옆에서 들렸다. 눈을 돌려 옆을 보니 총이 공중에 떠있었다. 총은 나를 겨냥하고 있었다.
탕.
나는 눈을 감았다. 하지만 총알은 내 머리를 뚫고 지나가지 않았다. 눈을 뜨니 총알이 바로 내 머리 앞에서 멈춰있었다.
"죽지 마."
-일단 임시로 멈췄다. 앞으로 전원을 1분간 내릴 거다. 그동안은 그녀가 이 세계를 어찌하지 못할 거야. 그 순간에 저 여자를 죽이면 되는 거다. 현명한 선택을 기대하지.
-빨리 와줘.
송아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모든 빛이 사라졌다. 손에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칼이었다.
이를 꽉 물었다. 나는 칼을 들고 천천히 피카티에게 다가갔다.


[Epilogue]

"뭐야, 왜 내게 다가오는 거야." 피카티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천천히 다가갔다.
두 사람의 발소리가 세계 전체를 울렸다.
"설마 저 쓰레기들한테 속아 넘어간 건 아니지? 송아를 만나기는커녕 이 세상에서 해방되지도 못할 거야!"
풀썩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피카티의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애초에 송아도 거짓이라고. 왜 그걸 모르는 거야."
드디어 피카티의 어깨가 잡혔다. 피카티는 이제 울고 있었다.
"약속했잖아……." 피카티가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깨가 떨리고 있었다. 나는 칼을 꽉 쥐었다.
그리고 나는 칼을 버렸다.
쨍그랑.
"날 믿지 못했던 거야? 나는 네 말을 모두 믿었는데." 피카티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너무해……." 피카티는 내게 말했다.
그들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나는 확신했다. 그들이 나를 버렸다는 걸. 상관없었다.
"나는 여기 남을래."
"송아는?"
"네가 가도 못 만날 거라며."
"그렇긴 하지만……."
"그러니까, 너와 함께 있을 거야."
나는 그녀에게 입맞췄다.
세상에 빛이 들어왔다. 빛은 만들어진 세상을 비추지 않았다. 대신, 멸망한 세계를 비추었다. 나는 그 세계에 속박되기를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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