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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잉여의 입맞춤

2009.07.31 23:3407.31


 이 아이한테서 눈을 뗄 수가 없어요. 같은 반 친구. 판다초등학교 3학년 4반 13번, 잉여. 아, 잉여는 이 아이의 이름이에요. 참 예쁜 이름이지요? 잉여. 잉여. 이 두 글자가 도무지 제 머릿속에서 사라지질 않아요. 네, 저는 잉여를 사랑한답니다.

 잉여는 예뻐요. 한 줄로 땋아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 반에서 가장 작은 키. 분필처럼 하얀 피부. 한 번도 올라간 적 없는 입꼬리. 불이 꺼진 방에서 두 눈을 감은 것보다 검은 눈동자. 바라만보고 있어도 한겨울 내리는 눈을 맞는 것처럼 소름이 돋지요.

 하지만 우리 반에서는 아무도 잉여가 예쁜 것을 몰라요. 누구도 잉여에게 다가가지 않기 때문이겠지요.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에요. 반을 둘러보면 잉여가 서 있는 곳만 흑백필름으로 찍은 것처럼 어둡고 차갑거든요. 아마 잉여가 조용히 지내서 그런 것 같아요.

 잉여는 어른스러워요. 뭐든지 알고 있다는 듯 바라보고만 있지요. 저 같은 주근깨 가득한 말라깽이 왕따랑은 달라요. 전 아이들의 놀림감에 친구라고는 컴퓨터밖에 없는 못난이예요. 잉여는 어른스럽고 예쁜 조용한 아이구요. 둘 다 친구가 없지만 이유는 정 반대지요.

 이렇게 다가가기 어려운 잉여한테도 아이들의 시선이 모인 적이 있어요. 잉여 때문은 아니에요. 학기 초, 희강이가 시비를 걸었거든요. 희강이는 우리 반 짱이었어요. 주근깨를 없애준다며 대걸레로 제 얼굴을 뭉갠 적도 있는 악동이지요.

 넌 이름이 왜 이렇게 웃겨? 왜 맨날 가만히 있어? 뭔 생각을 하고 살아? 희강이는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던 잉여 앞에 서서 질문을 퍼부었지요. 재미난 장난이라도 친다는 듯이요. 아이들은 또 야단이 났구나 혹은 구경거리가 생겼구나 싶은 듯 바라만 보았고요.

 내 말 씹냐? 왜 씹냐? 그러니까 좋냐? 내가 그렇게 띠껍냐? 희강이의 목소리는 점점 커져만 갔어요. 반 아이들은 숨을 죽이고 잉여가 받을 폭력을 기다렸어요. 주먹으로 때릴지, 의자를 던질지, 목을 조를지. 아이들은 매우 흥분했지요. 물론 저도 마찬가지고요.

 희강이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랐어요. 반면 잉여는 흰 피부 그대로. 언제나 내려가 있는 입꼬리 그대로였지요. 그저 깊은 눈으로 바라 보고만 있을 뿐이었답니다. 희강이는 그만 참지 못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어요. 잉여는 여전히 차분히. 아주 차분히.

 다행히 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왔어요. 그 덕에 큰 일 없이 끝났지요. 며칠 뒤 희강이는 집안사정 때문이라며 인사도 없이 전학을 갔어요. 그게 잉여가 주목받았던 유일한 사건이에요. 몇몇 아이들이 잉여가 소름 끼친다며 흉을 보기는 했지만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죠.

 이후로는 별일 없었어요. 잉여는 숨을 들이켠 고래가 깊은 바다로 돌아가듯 다시 조용히 지냈거든요. 네, 초등학교 3학년 마지막 날인 오늘까지 잉여는 단 한 번 소란의 중심에 섰을 뿐입니다. 저 말고는 아무도 잉여가 어떤 아이인지 모르고 있을 거예요.

 단 한 번이라도 꼭 잉여와 이야기해보고 싶어졌어요. 반이 갈리면 만날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 반 아이들 몰래 잉여 책상에다 작은 쪽지를 넣어두었지요. 오늘 수업이 끝나고 학교 소각장에서 만나자.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이렇게 적은 쪽지를요.

 종업식이라 반 친구들은 서로 껴안고 이별을 슬퍼했어요. 물론 저와 헤어지는 것을 아쉬워할 아이는 없어요. 덕분에 빨리 빠져나와서 잉여를 기다릴 수 있으니 잘 된 일이지요. 소각장은 외진 곳에 있어요. 스산한 바람, 뿌연 겨울 하늘을 보니 눈이 올 것 같습니다.

 손이 차가와요. 몸은 부들부들 떨리고 머릿속은 뒤죽박죽. 더 두껍게 입고 올 것을 왜 이런 실수를 했는지. 자꾸 시계를 꺼내보지만 어찌 이리 시간이 더딘지. 잉여가 올 때까지의 10분을 보내지 않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지.

 혹시 쪽지를 보지 못한 것이 아닐까요? 어쩌면 잡동사니와 함께 쓰레기통에 버렸을지도 몰라요. 무슨 이런 정신병자가 다 있어 하면서 무시한 걸지도 모르지요. 그럴 법 하지요. 오만 걱정을 하고 있는데 아! 저기 잉여가 와요. 다행이야. 재판관 입장. 어서 판결을.

 잉여는 천천히도 빠르지도 않은 걸음으로 다가왔어요. 언제나처럼 아무것도 관심 없다는 표정으로요. 한 걸음 한 걸음. 잉여가 다가오자, 이상해요. 시계의 초침이 빨라졌어요. 5미터, 3미터, 1미터. 그리고 한 발짝 더. 어색한 간격. 어색한 사이.

 오늘 춥네. 이러다 1+1은 2라고 하겠어요. 내가 많이 버벅대지? 설마 그걸 모를까요. 바보 같다 나. 굳이 강조할 필요 없는 것 같은데 말이죠. 갑자기 이렇게 불렀으니 황당하겠다. 횡설수설 멈추지 않아요. 너한테 고백하려고 불렀어. 판결은 사형이 좋을 것 같아요.

 잉여는 아무 말 없이 저를 바라보기만 해요. 희강이를 바라보던 그때처럼요. 딱딱딱 이가 부딪치기 시작해요. 잉여의 표정은, 맙소사. 그대로예요. 눈꼬리가 올라가지도 입꼬리가 내려가지도 않은. 하루 같은 10초가 지나가자 잉여는 입을 열었어요. "눈 감아."

 눈을 감으라니, 무슨 뜻일까요? 어쨌든 잉여가 시키는 대로 하였어요. 조용히 집행을 기다려야 하는 처지니까요. 눈꺼풀에 온 힘을 다 주어 눈을 감았어요. 슈퍼맨이 와도 제 눈꺼풀을 뒤집을 수 없을 정도로요. 왜 저더러 눈을 감고 있으라는 것일 퍽! 퍽?!

 잉여가, 아, 잉여가! 눈을 감고 있던 저의 콧대를 짱돌로 힘껏 내리친 것이었습니다. 코뼈가 깨문 사탕처럼 부스러진 것 같습니다. 입술 위에 뜨거운 것이 느껴져요. 코피인가? 뭐지? 왜지? 너무 아파 어쿠, 희뿌연 하늘이 보여요. 뒤로 넘어졌나.

 갑자기 배 위에 묵직한 무언가가 느껴져요. 얼굴을 들어보니 잉여가 제 몸 위에 올라탄 것이었어요. 손에는, 아, 여전히 짱돌을 굳게 쥐고 있구요. 퍽! 한 번. 퍽! 두 번. 퍽! 세 번. 잉여는 천천히 짱돌을 제 얼굴에다 내리쳤습니다. 잉여는 여전히 차분히. 아주 차분히.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었어요. 그저 힘없이 신음만 흘렸지요. 코는 계속 켜놓은 라이타마냥 달아올랐고 입은 코피가 흘러들어와 비릿함으로 가득해요. 고개를 돌려 옆을 보니 희강이가 들어간 소각로가 보였습니다. 잉여는 멈추지 않아요.

 눈을 감고 있는데 갑자기 차가운 것이 닿았습니다. 그 순간. 시간이 멈추었어요. 코에 차가운 것이 닿은 그 순간부터. 잉여의 입맞춤. 눈을 떠보니 잉여는 피로 흥건한 제 코에 입을 맞추고, 아니 제 코를 집어삼켜 흐르는 피를 빨아대고 있었습니다.

 잉여는 제 코와 인중 곳곳을 핥았어요. 잉여의 혀가 제 콧구멍 구석구석 들어오는 것이 느껴집니다. 그 아이는 제 입으로 흘러들어 간 피마저도 한방울 한방울 혀로 찍어 마시더니, 급기야 제 코를 잘근 씹어 혈관에 고인 피마저 쏙 빼내어 남김없이 마시는 것이었어요.

 잉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꿈일까요? 아닙니다. 그 아이의 입술에는 제 코피의 찌꺼기가 묻어 있거든요. 그러더니 잉여는, 아, 잉여는! 미소를 지었답니다! 혀끝까지 소름이 돋는 그 예쁜 미소를!

 하지만 곧바로 평소의 그 표정으로 돌아왔어요. 그러고는 소각장을 유유히 걸어나갔지요. 아픔과 쾌감으로 영문을 몰라 쓰러져 있는 저를 두고서. "좋아."라는 말 한마디만을 남기고서요. 이 한마디를 이해하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답니다.




덧//
다시는 보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작품이지만, 시리우스 문학상 공포 분야에 응모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예전에 쓴 글을 살짝 퇴고했습니다. 그런데 마감 착각...거울에 올려도 분량 미달이라 평 못 받음...OTL

덧2//
왜 공포냐면...어...성년이 된 사지 멀쩡한 사람이 이런 글을 쓴 것이 공포라고 하지요 핫핫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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