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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고양이] 검은 고양이

2008.01.31 21:5801.31

<검은 고양이>

  누나는 뒤에서 으스러지도록 내 몸을 끌어안았다. 어찌나 세게 안았는지 누나의 기다란 손톱들이 내 살갗을 뚫고 들어올 것만 같았다. 나는 극렬한 고통을 느끼면서도 가느다란 신음 한줄기조차 내뱉지 않았다.
  이제 갓 해가 저물기 시작할 무렵이었지만 하늘은 먹구름으로 뒤덮여 어둡기 그지없다. 잠시 후면 저 잿빛 하늘에, 곧 시커멓고 거대한 연기가 가세하게 되어 하늘은 끝없는 어둠으로 가득 차게 될 터였다. 찬바람이,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고 말해주듯 머리카락을 살며시 흔들고는 사라졌다. 누나의 엷은 금발머리가 내 뺨을 간질였다. 오싹한 기분이 내 뒷머리를 스쳐지나갔다.
  굳이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피가 배어나올 정도로 입술을 꽉 깨물고 있을 누나의 모습이 그려진다. 아니, 사실 내게 뒤를 돌아볼 여유 따윈 없다. 그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바라보기에도 벅차다. 정말 그랬다. 한시도 눈을 돌릴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커다란 나무기둥에 묶여 얼굴을 축 늘어트린 광경에서.
  사람들이 가득 모여 있다. 그들은 어머니를 둘러싸고 있다. 모두 적의를 가득 담은 눈길로 어머니를 향해 으르렁거린다. 어머니는 보기에도 육중하고 소름끼치는 쇠사슬에 단단히 묶여 나무기둥에 결박되어 있다. 한 아름의 장작더미 위에 올라선 어머니는 한 번도 고개를 들지 않는다. 그저 예전엔 매혹적일정도로 새까맣고 윤기 있던 긴 생머리를 늘어트리고 고개 숙일 뿐.
  어머니의 얼굴이 보고 싶다. 큰 소리로 부르고 싶다. 어머니를 저런 꼴로 만든 인간들을 모조리 때려눕히고 싶다. 내겐 충분히 그럴 힘이 존재했다. 하지만 내 몸을 속박하듯 끌어안은 누나가 그 모든 충동을 저지하고 있었다. 누나는 나를 구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바람이 불어왔고, 이번엔 한층 거세진 바람에 머리가 흩날려 순간적으로 어머니의 얼굴이 보였다. 굳게 다문 눈과 입. 그리고 입 주위의 핏자국. 다시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자!”
  어머니 앞으로 한 걸음 나아선 자가 큰소리로 외쳤다. 원흉. 어머니를 저런 꼴로 만든 실질적 인물. 성직자이자 이단 심문관으로 널리 이름이 알려진 에드문트 베커. 이미 노망이 날 정도로 늙어서 볼 살은 축 쳐졌고, 눈은 자글자글한 주름 속에 파묻힌 자가 또렷한 광채를 띠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누나와 나는 감히 그 군중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갈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익명의 신뢰할 수 있는 제보자에게서 마녀로 지목된 에멜라 트렘멜의 화형식을 이제부터 시작할 것이오.”
  그는 잠시 뜸을 들인 후 말을 이었다. 조용하지만 육중한 힘이 실린, 실로 좌중을 압도할 만한 그런 목소리였다.
  “작고 평화로운 우리 마을에 이런 마녀가 존재했다는 사실에, 주의 종의로서 무한한 아픔을 느끼는 바입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마을이 이 지독한 마녀의 저주로 인한 파멸의 길로 나아가기 전에 이렇게 막을 수 있었다는 사실은 또한, 아직 우리 마을이 전능하신 주의 품에 안겨있다는 증거가 될 것이기에 안도를 느끼며 다시 한 번 주를 찬양하나이다.”
  베커의 말을 듣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맨 앞줄에서 횃불을 들고 고래고래 악을 지르고 있는 거친 남자들의 목소리가 가장 높았다.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토하고 싶었다. 내 안에 있는 모든 정체 모를 기분 나쁜 것들을 모조리 게워내고 싶었다.
  베커는 계속해서 혼이 실린 목소리로 연설을 이어갔다. 어찌나 크게 부르짖던지 내겐 넋이 나간 미친놈으로 밖엔 보이질 않았다. 내가 증오의 눈길로 이곳에 모인 이들을 천천히 둘러보고 있을 때 갑자기 주위가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끔찍한 적막에 나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이 침묵의 의미는 마지막 순간의 도래를 뜻하는 바. 에드문트 베커가 외쳤다.
  “마녀여! 너의 모든 사악한 죄를 끌어안고 지옥불로 떨어질 지어다!”
  그가 앞에 있던 남자에게서 횃불을 받아 제일 먼저 어머니가 밟고 있는 장작더미 위로 던졌다. 내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할 만큼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불은 어둠속에서 빙그르르 아름다운 호를 그리며 정확히 어머니의 발밑에 떨어졌다. 그리곤 일제히 모든 이들이 횃불을-그리고 뒤에 있는 힘없는 것들은 돌맹이를-어머니에게 던졌다.
  불은 순식간에 타올랐고, 누나의 손톱이 내 양 팔로 파고들어 상처를 만들고, 피를 흘러  내리게 했다. 커다란 불길이 발밑에서부터 타오르는 데도 어머니는 비명 지르지 않았다. 그저 처음과 같은 변함없는 자세로 화염에 휩싸여갈 뿐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불꽃이 어머니를 완전히 집어 삼킬 것이다. 내 눈에선 새빨간 피눈물이 흘러 내렸다. 어머니의 모든 고통을 함께 하지 못한 속죄의 피눈물.
  아아, 어머니가 고개를 들었다. 화염 속에 묻혀가면서 어머니는 마지막으로 고개를 들어 누나와 나를 바라보았다. 어머니는 한없이 떨리는 보랏빛 입술을 열고 우리에게 뭔가 말했다. 나는 하나도, 아무 것도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보이니?”
  누나가 흐느끼는 목소리로 내 귀에 속삭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지도, 젓지도 못했다.
  “사랑해. 너희들을 정말로 사랑한다. 그렇게 말하고 있어, 엄마는….”
  누나는 울음을 터뜨리며 내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나는 누나의 손에 내손을 포개며 꺼질 줄 모르는 불꽃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어머니는 화염 속으로 사라져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자 사람들의 환호만이 광장에 남겨졌다. 아니, 미약하게나마 살이 타는 고약한 냄새도.

  *             *             *  

  시간은 신비롭고도 가증스러운 존재다. 어머니를 잿더미로 만들었던 불길보다도 더 크게 타오르던 내 마음의 분노도 며칠이 지나자 슬며시 가라앉고 있었다. 그 날 하늘을 뒤덮었던 검은 연기는 아직 내 마음 속에서 걷히지 않았지만, 이제 내겐 세상에 대한 분노보다는 앞으로의 삶에 대한 문제가 더 절실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다만 걱정이 되는 것은 누나가 아직 슬픔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늪의 밑바닥까지 가라앉아 질식한 것도 아니고. 누나는 하루 종일 낡은 침대에 벽을 향해 몸을 돌려 누운 채 눈물 흘렸다. 어떤 때는 오열에 가깝다가도, 잠시 후면 새벽녘의 소나기만큼이나 작은 흐느낌으로 변해 있었다. 변함없는 건, 누나가 울고 있다는 사실 뿐.
  나는 마녀로 낙인찍힌 자의 자식들이 어떻게 이 삶을 헤쳐 나갈지, 또 언제 누나가 모든 슬픔을 훌훌 털어내고 예전과 같은 모습으로 돌아올지, 깊이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내 걱정 또한 시간의 거대한 힘 앞에서 자연스레 허물어졌으니, 내 걱정의 한 축을 무너트린 건 작은 고양이 한 마리였다. 어느 날 늦은 저녁 누나는 울다 지쳐 잠이 들었고, 나는 무거운 몸을 움직여 간단한 저녁식사를 준비했다. 나는 먼저 빠르게 허기를 채운 다음 아직 식지 않은 죽을 한 그릇 퍼서 침대에 걸터앉아 누나를 깨웠다. 하지만 아무리 애원해도 누나는 음식을 입에 넣지 않으려 했다. 누나는 이대로 굶어죽어서 어머니의 곁으로 가고 싶어 하는 사람처럼 보였다.-어머니의 영혼이 지금쯤 어디에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에밀리누나, 제발 부탁이야. 조금만이라도 먹어 봐. 이대로 가면 진짜 쓰러지고 말 거야.”
  울다시피 애원해도 누나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억지로 몸을 돌려 눕히려 해도 누나는 완강히 저항했다. 놀라운 일이다. 나는 나이에 비해 신기할 만큼 힘이 세기로 사람들에게 조차 널리 알려져 있는데 뼈밖에 남지 않은 가냘픈 소녀가 내 힘에 굴복하지 않다니.
  한참을 구슬려도 아무 소용도 없자 나는 이윽고 이 모든 행위를 포기하고 죽 그릇을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어쩐지 서글픈 기분이 들어 어서 잠들고만 싶었다. 다행스럽게도 이제는 꿈속에서 불타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이 반복되어 나타나지 않았기에.
  나는 램프의 불을 끄고 누나의 발밑에서 뒹굴고 있는 얇은 모포를 하나 끄집어 내리고는 바닥에 누워 덮었다. 등이 바닥에 닿자 오한이 밀려들었다. 추위는 쉽사리 사라지지 않아 입술이 떨리고 이빨이 부딪혔다. 모포를 덮었지만 쉽사리 잠들지 못한 나는 창밖의 하현달을 바라보았다. 달의 은은한 빛은 내게 공포로 자리 잡은 어떤 불꽃에 대한 상처를 치유해주는 것만 같았다.
  “…들리니?”
  나는 생각지도 못한 누나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상체를 번쩍 일으켰다. 한 밤중 무덤가에서 염소의 머리를 가진 악마와 마주쳤더라도 이렇게 놀라지는 않았으리라.
  “응? 누나, 뭐라고 했어?”
  그럴 필요가 없음에도 내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들려?”
  누나는 다시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의도했건, 기력이 없어서건 누나의 작은 목소리를 알아듣는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뭐가?”
  나는 어느 방향으로 귀를 기울여야 될 지조차 감을 잡지 못한 채 대꾸했다. 그 순간, 누나가 몸을 번쩍 일으켜 침대를 내려왔다. 며칠을 굶은 사람치고는 매우 생기 넘치는 동작에 나는 어안이 벙벙해져 그저 그 모습을 쳐다만 볼 뿐이었다.
  누나는 문 쪽으로 다가갔다. 나는 그제야 황급히 누나의 팔을 잡으며 제지했다. 지금 누나가 밖으로 나간다는 것은 자살행위에 불과했다. 앙상한 모습의 누나는 겨울 들판의 죽어가는 나무라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였다.
  “왜 그래? 무슨 소리가 들린다는 거야?”
  당황한 나머지 목소리가 자연스레 높아졌다. 내가 붙잡자 누나는 한걸음 물러나며 휘청거렸다.
  “문. 문 좀 열어줘, 마르틴. 울음소리가 들려.”
  “울음소리?”
  나는 반문하면서도 넋이 나간 듯한 누나의 모습에 기가 눌려 순순히 문을 열었다. 문을 여는 순간 늦은 밤의 차가운 바람이 내 뺨을 베듯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눈을 찌푸렸다. 그 때 누나가 손으로 가까운 곳을 가리켰다. 밖이 너무 어두워서-하현달은 밤을 밝힐 힘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처음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이내 나는 어떤 형체와 어떤 소리에 대해서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누나처럼.
  고양이 한 마리가 집 근처에서 가느다란 울음소리를 내며 배회하고 있다. 그 녀석의 몸은 어찌나 새까맸는지 밤의 어둠에 동화되어 일부분처럼 보일 정도였다. 신기하게도 눈이 마주치자마자 고양이는 아무런 경계심도 가지지 않고 쪼르르 우리를 향해 달려왔다. 거친 황무지를 배회하던 녀석치고는 매우 우아하면서도, 기억할 순 없지만 내가 알고 있는 누군가를 떠올릴 만큼 친숙한 몸짓이었다.
  누나가 무릎을 꿇고 두 팔을 벌리자 고양이는 순식간에 누나의 품에 안겼다. 누나가 머리를 쓰다듬자 고양이는 기분이 좋은 듯한 소리를 냈다. 누나 역시 마치 예전에 교회에서 찬송가를 부를 때처럼 황홀한 표정으로 고양이를 쓰다듬었다.
  “마르틴, 알겠어?”
  뭘? 나는 묻고 싶지만 어쩐지 질문이 입 밖으로 빠져나오질 않는다. 아무 말도 못하고 있자 누나는 천천히, 그리고 신중히 고개를 들며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본 누나의 눈동자는 마치 고양이의 그것처럼 보였다.
  “이 고양이는 엄마의 화신임이 분명해. 엄마는 우리 곁으로 돌아온 거야. 나는 똑똑히 느낄 수 있어.”
  다시 날카로운 바람이 등 뒤에서부터 나를 샅샅이 찢어발기려는 듯 강하게 불어왔다.

  그 주인 없는 고양이에 대해 누나가 어떤 터무니없는 생각을 가지고 있건, 누나의 슬픔이 얼마간 가셨다는 점은 내게도 큰 도움이 되었다. 이제 나는 또 다른 문제에만 신경을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관한 것.
  어머니는 누명을 벗지 못했고, 변명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마녀임을 시인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실제로 마녀가 아니니까. 하지만 이미 이 마을의 모든 이들은 어머니를 마녀로써 화형 시켰고, 그것은 분명 남겨진 누나와 나에게도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내가 가장 염려하는 부분은 자식이라는 이유만으로 우리 역시 마녀로 몰리는 것이다. 나는 어릴 때 봤던, 어떤 남자가 악마와 거래했다는 이유로 끔찍하게 죽임을 당했던 장면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그의 항문으로 들어가 정수리를 뚫고 나온 창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나는 며칠 밤낮을 고민한 끝에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찾아냈다. 하지만 내 노력만으론 불가능한 일이었다. 절대로.
  결심을 굳히고 나서 이틀이 지나 주일이 찾아왔다. 나는 새벽부터 일어나 옷차림을 단정히 하고 예배 갈 준비를 끝마쳤다. 누나가 아직 고양이를 끌어안은 채 잠에 빠져있는 사이, 나는 마을의 정중앙에 위치해 있는 교회로 향했다. 언제나 그랬듯이 교회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아니,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보였다.
  내가 모습을 드러내자 모든 시선이 일제히 내게로 쏠렸다. 그들의 표정엔 경악과, 분노, 놀라움이 뒤섞여 있었다. 나는 애써 태연한 표정으로 사람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 교회로 들어갔다. 교회로 들어가기 위해 발을 내딛는 순간 심장소리가 온통 내 귀를 뒤덮었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교회 안으로 들어서자 당연하게도 에드문트 베커 신부와 눈을 마주쳤다. 그의 눈에도 일순간 놀라운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것은 이내 철저하게 위장된 표정 너머로 사라져갔다. 나 역시 그에게 느꼈던 모든 감정을 추스른 채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는 내 인사를 받아주었다.
  예배를 드리는 동안에도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쏠려 있음을 뒤통수 너머로 실감할 수 있었다. 그들은 주의 이름을 읊조릴 때마다, 찬송가를 부를 때마다 나를 쳐다봤음에 틀림없다. 나는 그 모든 시선에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맞서야 하느라 진이 다 빠지고 말았다.
  이윽고 모든 예배가 끝나고 사람들은 하나둘씩 교회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우두커니 서서 베커가 다른 사람들을 모두 돌려보낼 때 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는 내 쪽을 쳐다보지 않으려 애썼지만 신경 쓰는 기색이 역력했다. 마지막으로 긴 행렬의 끝에 일흔을 넘긴 노파가 교회 밖으로 나간 뒤 나는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마침내 그에게로 다가갔다.
  “신부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제야 그는 예배가 끝난 뒤 처음으로 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래, 잘 지냈니. 생각보다 건강해 보이는 것 같아 정말 다행이구나. 에밀리는?”
  가증스런 미소. 그 안에 숨기려 노력하는 공포와 경계심.  
  “누나는 몸이 좋지 않아서 못 왔어요.”
  “그렇구나, 저런. 누이가 어서 낫기를 기도하마. 그래, 하고 싶은 말은 뭐지?”
  나는 숨을 깊게 내쉬고 난 뒤 말을 꺼냈다.
  “제가 신부님의 일을 도울 수 있도록 허락해 주세요. 이단을 심문하시는 일은 분명 육체적으로도 엄청 고된 일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신부님은 이 마을뿐만 아니라 지역을 통틀어서도 가장 유명한 이담심판관이시고, 그 누구보다 훌륭하고 뛰어나시지만 슬프게도 이제는 너무 나이가 많으시죠. 그러니 마녀사냥에 수반되는 고된 육체노동은 전부 저에게 맡겨주십사 합니다. 신부님도 잘 알고 계시겠지만 저는 나이가 어려도 이 마을 남자들 그 누구보다도 힘이 세다고 소문이 낫습니다. 아시죠?”
  신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다. 열다섯 살에 불과하고, 체격은 호리호리 하지만 나는 어릴 때부터 알 수 없는 괴력을 발휘해 사람들을 놀래키곤 했다. 내겐 타고난 힘이 존재했다. 신부가 내 말을 저지하지 않았기에 나는 용기를 가지고 말을 이었다.
  “생각하시는 것보다도 저는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사악한 무리들이 어떠한 위협을 한다 할지라도 제게는 어림없죠. 저는 주의 이름을 걸고 마녀를 잡아낼 것이며 신부님에게로 향하는 온갖 위험을 막아내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도울 수 있도록 허락해주세요. 저희 어머니가 그런 모습으로 죽은 뒤-나는 이 부분에서 표현을 극도로 신중히 해야만 했다-저와 제 누나가 받을 의심의 눈초리를 제 힘으로 없애 버리고 싶어요. 마을 사람들 모두 저희 남매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잘 알고 있습니다. 만약 제가 변하지 않는 깊은 신앙심으로 신부님이 가시는 고된 길을 따르고, 나중에 신부님께서 인정해주신다면 마을 사람들도 저희 남매가 주의 종임을 인정해 주겠죠.”
  하고 싶었던 모든 말을 마쳤음에도 베커는 팔짱을 낀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걸 수 있는 모든 패는 이곳에 쏟아 부었다. 만약 그가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 남매는 한밤중에 마을에서 도망쳐야 할지도 모른다. 결국엔 마녀로 몰려 쫓기는 신세가 되겠지만.
  베커가 고개를 들어 내 눈을 응시했다. 늙어서 힘이 빠졌을 텐데도 상당히 날카로운 눈매였기에 그를 겁내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눈에 힘을 줘야만 했다.
  “그렇게 하자. 마르틴, 정말 힘든 결심을 했구나. 하지만 현명한 생각이다. 모두들 기뻐할 게다. 너의 신앙심을 사람들에게 증명할 날이 꼭 오리란 걸 믿어 의심치 말자꾸나.”
  베커가 바싹 오그라든 것 같은 팔을 뻗어 내 어깨를 두드렸다. 그 순간 모든 긴장이 풀려 주저앉을 뻔 했다. 발에 아무런 힘도 들어가지 않았다. 해냈다. 나는 평온한 삶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게 되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은 상당히 가벼웠다. 나는 베커에게서 ‘마녀와 망치’라는 책을 받아 옆구리에 끼고 집으로 내달렸다. 그 책은 마녀의 색출방법에서부터 유죄판정방법에 이르기 까지 마녀 사냥의 모든 지침이 기록된 책이라고 신부는 말했다. 그는 마치 성서를 다루듯이 그 책을 내게 조심스레 넘겨주었다.
  나는 집으로 향하는 언덕을 단걸음에 치고 올라가 문을 열었다. 이미 나를 괴롭혔던 모든 고민들은 이제 기억조차 하기 힘든 과거의 일이 돼버렸다.
  문을 여는 순간, 누나와 눈이 마주쳤다. 얼이 빠진 듯한 누나의 눈빛에 나는 언제 그랬냐는 듯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하마터면 소중한 책을 떨어트릴 뻔 했다. 누나는 무릎을 꿇고서 자기 앞에 있는 고양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것 봐, 마르틴.”
  누나가 시키는 대로 고양이를 쳐다봤다. 고양이의 입엔 낯선 물건이 물려 있다. 누나는 떨리는 손으로 조심히 고양이의 입에서 물건을 빼냈다. 그리곤 내게 물었다.
  “이게 뭔지 알겠어?”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의 손에는 작은 팬던트가 들려있을 뿐이다. 그게 뭔지, 도대체 무엇이기에 누나를 저토록 긴장케 하는 걸까.
  누나는 내가 잘 볼 수 있게끔 팬던트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들어 보였다.
  “이건 다니엘 치비히 씨의 팬던트야.”
  다니엘 치비히. 다시 한 번 내 가슴이 절벽 너머로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맨 처음 어머니를 마녀로 신고한 인간이다. 베커는 익명의 제보자라고 했지만 모든 이들이 다 알고 있다. 우리도, 심지어 어머니도. 단지 우리가 몰랐던 것은 그가 어머니를 고발한 동기뿐이었다. 그들은 분명 누나와 내가 잠든 밤중에도 종종 만날 만큼 친했었는데.
  “마르틴. 이게 뭘 상징하고 있는 것 같아? 엄마는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거야. 어머니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인간들에게 복수하라고. 그들의 가슴속에도 지옥불을 일으키라고. …엄마는 첫 번째 목표를 정해주셨어. 그렇죠?”
  누나는 고양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양이는 기분이 좋은 듯 기묘한 울음소리를 냈다.
  발끝에서부터 오싹한 기분이 나를 스멀스멀 감싸 안기 시작했다.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는 누나를 따끔히 질책하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마른 침을 삼킬 수밖에.

  그리고 다음 날, 다니엘 치비히가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             *             *

  그토록 기다리던 마녀재판이 열릴 조짐이 보였다. 내가 바라마지 않던 기회였다. 많은 사제들이 깊은 밤중에 긴급히 교회로 모여 들었다. 집에서 자다 말고 불려온 나는 에드문트 베커의 뒤에 서서 회의에 참석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매우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마녀로 지목된 것은 옆 마을의 아이나 카닉. 서른 한 살의 비교적 젊은 여인이었다.
  “…지금까지 언급한 여섯 가지 이유로 페트릭 잔더는 아이나를 마녀로 고발했습니다.”
  젊은 축에 속하는 페르난도 신부가 발언을 끝마쳤다. 순간적으로 실내는 조용해졌고, 자연스럽게 모든 이들의 눈이 베커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다음 발언이 나온 곳은 예상치 못했던 방향이었다.
  비쩍 마른 모습이 안쓰러워 보이기까지 한 앙겔로프 신부가 말했다.
  “물론 지금 열거된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그녀에 대한 재판이 성립될 수 있다는 데에는 반론의 여지가 없겠지요. 하지만 주의해야 할 점은….”
  그는 잠시 숨을 돌렸다가 이어 말했다.
  “그녀의 남편인 루착 카닉입니다. 그는 지능이 남들보다 다소 떨어지는 편입니다. 사고가 원활하지 못해 자신의 아내에게 많이 의존하는 편이지요. 때문에 루착은 아내를 깊이 따르고, 한시도 곁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가 괴력의 소유자로 이름 높다는 것이죠. 힘에 관해서라면 명성이 드높은데다가 머리까지 좋지 못해 한 번 화를 내면 제어한다는 건 불가능할 정도입니다. 그런 그가 아이나를 마녀재판에 세우려 할 때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 아닐까요.”
  그의 발언이 끝나자 여기저기서 나지막한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의 힘이 두렵다고 아이나 카닉을 재판에 회부하지 않을 수는 없잖습니까!”
  페르난도 신부가 말했다. 역시 젊은지라 그는 자신의 혈기를 숨길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다시 침묵이 흘렀다. 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모두들 난감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한심한 작자들. 힘만 센 머저리를 이렇게까지 두려워하다니.
  “물론….”
  회의가 시작된 이후 처음으로 베커가 입을 열었다.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로 쏠렸다. 이단 심문관으로서의 그의 위치는 절대적인 것이었다.
  “사탄과 그의 사악한 종을 대하는 우리의 의지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마녀를 정화의 불속으로 인도해야만 합니다. 어떠한 시련이 있더라도.”
  베커는 말을 마치면서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나는 기분이 좋아져 하마터면 무례하게도 큰 소리로 웃을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아냈다. 내가 나설 차례가 다가오고 있다.

  “너무 무모하군!”
  페르난도 신부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필요 이상으로 커서 내 신경을 건드렸지만, 잔뜩 긴장을 한 탓에 애써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나는 손에 쥔 단단한 나무 막대기를 만지작거렸다.
  아이나 카닉이 있는 옆 마을로 왔을 때는 벌써 긴 밤을 건너 새벽이 다가오는 중이었다. 재판이 열리기까지는 며칠 더 기다려야 하겠지만 마녀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신변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기에 우리는 행동을 서둘렀다. 착수하기도 전에 소문이 퍼져나가기라도 한다면 일은 한층 어려워질 터였다. 지금 이곳엔 비밀을 지킬 수 있는 소수의 인원만이 존재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온갖 위험에 대처할 수 있는 젊고 힘이 센 사제들만이 행동에 나섰다고 볼 수 있다.
  “걱정 말아요, 신부님. 익숙지 않은 무기를 잡는 것보다 제겐 이 나무막대가 훨씬 더 위협적인 무기입니다.”
  뒤를 돌아봤다. 사제들은 잔뜩 긴장한 모습이었다. 이렇게 꾸물대다가는 날이 새도록 그녀를 포박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그럼 갑니다.”
  나는 그들의 허락도 구하지 않고 성큼성큼 나아가 아이나가 살고 있는 집의 문을 두들겼다. 가급적 큰 소리가 나지 않게끔. 얼마간의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내가 채 침을 삼키기도 전에 육중한 발소리가 문 너머에서 들려왔다. 잠시 후 문이 열리며 거대한 얼굴이 나타났다. 어둠 속에서도 그 얼굴과, 문 뒤에 가려져있는 몸집의 크기가 얼마만큼이나 거대한지 충분히 짐작되었다. 새삼스레 전율이 일었다.
  “누…누구?”
  루착 카닉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나는 그의 커다란 몸집에 정신이 팔려 대답하지 못했다.
  “여보? 누구에요?”
  그때 루착의 등 뒤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둠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군지는 생각할 필요조차 없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내게 알 수 없는 용기를 가져왔다. 나는 큰 소리로 외쳤다. 이 살아있는 거대한 벽 너머로 그녀가 똑똑히 들을 수 있게끔.
  “아이나 카닉! 당신이 마녀라는 숨길 수 없는 정황들을 가지고 찾아왔다. 만약 결백을 자신한다면 재판을 받게끔 우리와 함께 가는 게 좋을 것이다.”
  물론 재판이 벌어지면 그걸로 끝이다. 우리 어머니가 그랬듯이. 아이나는 현명한 여자인지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듯 했다. 그녀는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내질렀을 뿐 문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오! 하나님 맙소사.”
  루착의 가랑이 사이로 그녀가 털썩 주저앉는 모습이 보였다.
  “당신은 결백이 밝혀질 때까지 신성한 주님을 찾을 권리 따윈 없어. 나오지 않겠다면 내가 끌고 가주지.”
  나는 한 발짝 더 다가섰고, 내 생각보다는 덜 멍청했던 루착이 즉각 반응을 보였다. 그는 괴성을 지르며 곧바로 오른팔을 휘둘러 내 오른 뺨을 후려쳤고, 나는 그 충격에 사제들이 서있는 곳까지 굴러가고 말았다. 만일 그들의 몸이 쿠션이 돼주지 않았더라면 크게 다쳤을 아찔한 상황이었다. 나는 그다지 충격을 받지 않았다고 과시하기 위해 벌떡 일어났지만 골이 흔들리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입안에서 무언가 왈칵하고 뜨거운 느낌을 불러 일으켰다. 비린 맛과 함께 이빨 하나가 혀 위를 굴러다니는 게 느껴졌다. 그 일격에 내 목뼈가 부러지지 않은 것은 신의 도움이 틀림없었다. 그만큼 강력한 힘이었다.
  “꺼, 꺼져! 아, 아내한테서 떠, 떨어져!”
  루착은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으로 울부짖었다. 마치 짐승의 포효를 연상시키는 괴성이었다. 아직 내가 우위에 있다고 과시하기 위해 씨익 웃으며 조금씩 다가갔다. 아니, 분명 나는 그보다 우위에 있었다. 머리도, 힘도.
  거대한 상대를 공략하는데 있어서는 아래중심부터 무너트리는 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그가 우물쭈물하며 바라보고 있는 동안 나는 맹렬히 달려들어 머리 숙여 그의 두 다리를 붙잡았다. 힘에 비해 속도가 느린 루착의 가랑이 사이로 파고드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미처 그를 엎어트리기 전에 그가 두 손을 맞잡고 내 등을 내리찍었다. 입에서 자연스레 피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고통의 비명도.
    일단 뒤로 물러나 정신을 가다듬고 싶었지만 그럴 순 없다. 체구에서 차이가 난다면 한 순간의 틈을 파고들어 단번에 끝내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정신이 아득했지만 나는 그의 두 다리를 붙잡은 채로 몸을 일으켰다. 온 몸의 피가 목 위로 쏠렸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루착은 중심을 잡지 못하고 그대로 공중에 떴다가 머리부터 고꾸라졌다. 순간, 아이나의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뼈가 부러지는 둔탁한 소리를 뒤덮었다.
  분명 효과적인 일격이었다. 루착은 떨어지는 순간 머리를 살짝 숙여 즉사를 면했지만 어깨 어딘가가 부러졌음에 틀림없었다. 나는 그대로 그의 몸에 올라타 주먹으로 얼굴을 내리찍었다. 주먹을 한번 뒤로 젖혔다가 뻗을 때마다 그의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어버버 거리는 그의 일그러진 입도, 귀를 틀어막은 채 꽥꽥 비명을 질러대는 그녀도 내겐 중요치 않았다. 내가 원하는 것은 압도적인 힘의 과시, 그 뿐이었다. 신의 뜻을 수행할 압도적인 힘.
  루착이 더 이상 반격하기 힘들어졌다는 생각이 들자 나는 몸을 일으켰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 사실이 신기할 정도였다. 하지만 확실히 마무리 질 필요가 있었다. 여기 있는 모든 이가 내 힘을 확인할 수 있도록, 또 이 광경을 보지 못했던 이들에게 확실히 증명할 수 있도록 각인 시킬 필요가 있었다.
  나는 오른손을 뻗어 루착의 목을 꽉 쥐었다. 그리고 오른손에, 내가 가진 모든 힘을 쏟아 부었다. 팔이 떨리고 뻘건 힘줄이 돋았다. 그러자 천천히, 천천히 그의 거대한 몸이 조금씩 들리기 시작했다. 루착은 반쯤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도 팔을 저어 벗어나려 했지만 숨을 켁켁 거릴 뿐 내 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의 얼굴은 점점 파랗게 질려가고 있었다. 이윽고 내가 손을 쫙 피자 루착의 두 발이 지면에서 떨어졌다. 그의 발은 공중에 떠서 바둥거렸다.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토해내는 소리가 뒤편에서 들려왔다. 마치 신의 기적을 목도한 자들의 그것처럼.
  “믿을 수가 없군.”
  짜증날 정도로 큰 목소리의 수다쟁이인 페르난도 신부가 흐느끼듯 내뱉었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로써 나의 입지는 탄탄해질 것이다. 나의 올바른 선택은 누나와 나를 삶의 길로 돌려놓았다. 어머니가 불타오르던 죽음의 광장에서 벗어나, 수많은 마녀들의 가녀린 몸을 밟고 조금 씩 조금 씩 위로.

  영광스럽게도 나는 베커의 침소에서 휴식을 취하라는 명을 받았다. 나는 포근하고 좋은 냄새가 나는 베커의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다른 이들은 지금쯤 아이나가 마녀인지 아닌지 검사하고 있을 터였다. 아마도 기적이 없다면 그녀는 마녀로 판명날 것이고, 오늘 중으로 그 사실이 마을 전체에 공표될 것이다.
  지난 새벽 내가 했던 일을 돌이켜보자 슬며시 웃음이 난다. 그래, 나는 할 만큼 했고 훌륭한 성과를 거뒀어. 이걸로 충분해. 눈을 감아보지만 잠이 오지 않는다. 대신 통증이 나를 감싼다. 루착의 주먹에 터져버린 입에서는 침을 삼킬 때마다 피 맛이 낫고, 허리는 욱신거려 한 자세를 오래 유지하기 어려웠다. 이렇게 육신의 고통이 심할 때면 어쩐지 어머니가 생각났다. 어머니의 품이 그리웠다. 오래 전의 일이다. 내가 일곱 살도 채 되지 않았을 무렵, 나는 영웅심에 휩싸여 많은 아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마을에서 가장 큰 나무를 오르기 시작했다. 나무는 가장 컸지만, 이미 죽어가는 나무였다. 나는 슬슬 겁이 나기 시작했지만 멈추지 않았다. 아니, 멈출 수 없었다. 결국 내가 미처 다른 가지를 잡기도 전에 내 몸을 지탱하고 있던 나뭇가지가 부러졌고, 나는 땅으로 곤두박질 쳤다. 지금 기억하기엔 너무 오래전의 고통이지만, 루착의 커다란 주먹과 비교해서도 그다지 밀리지 않을 정도의 고통이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일어서지도 못한 채 어른들의 등에 업혀서 집으로 갔다. 그리고 침대에 누워 어머니의 손을 잡았을 때, 그제야 너무나도 고통스러워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어릴 때부터 누군가의 앞에서 우는 게 죽기보다도 싫었지만 그때만큼은 어쩔 수가 없었다. 내 울음이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자 어머니는 내 등을 어루만지면서 조용히 미소 지었다.
  아가야, 이 차를 마시고 잠시만 좋은 꿈을 꾸렴. 그리고 잠에서 깨어나면, 아픔은 꿈처럼 사라지고 없어질 거야. 엄마가 약속할게.
  나는 엄마가 시키는 대로 쓰디쓴 녹색즙을 들이켰고-즙은 끔찍할 정도로 써서 그 덕분에 잠시 고통을 잊을 정도였다-, 곧 잠이 들었다. 잠이 든 동안에도 어머니가 내 등을 한시도 쉬지 않고 어루만지면서 나지막이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아니, 콧노래 같기도 하고 기도를 읊는 것 같기도 했다. 어쨌거나 너무 작은 목소리여서 정확히 기억할 수는 없지만.
  그리고 내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거짓말처럼 모든 아픔이 사라져 있었다.
  지금 나는 너무나도 어머니가 보고 싶고, 어머니의 손이 그립다.

  *             *             *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졌음을 확실히 실감한다. 얼마 전까지 같은 요일, 같은 장소에 있던 나를 쳐다보던 사람들의 눈빛이 어디론가 사라져, 이제는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공식적으로 에드문트 베커의 바로 뒤에 서서 그를 수행하기 시작했다.
  분명 그날의 일은 극비리에 행해진 일이었지만 목격자가 한 명도 존재하지 않을 리 만무했다. 아이나와 루착이 그렇게 괴성을 질러댔으니. 그리고 목격자의 입에서 나온 믿기 힘든 광경의 목격담은 사람들에게 경이로움으로 전파됐다. 그들은 내가 가진 힘을 신의 은총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예배가 끝나고, 몇 가지 볼 일을 처리한 뒤 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집으로 향했다. 빨리 처리한다고는 했지만 시간이 오래 걸려 날은 이미 저물어 있었다. 간간이 마주치는 사람들은 빠짐없이 내게 밝은 미소로 인사했다. 나 역시 품위를 지켜 그들에게 답했다. 집으로 향하는 언덕을 빠른 속도로 뛰어 올라갔다. 몸은 너무나도 가벼워 언덕을 달려 내려가다 점프하면 하늘을 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누나의 이름을 부르며 문을 열었을 때 집은 어두웠고, 고요했다. 누나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집을 오랫동안 비운 적이 없었다. 아니, 집 밖을 나간 적조차 거의 없었다. 마을과 그곳에 사는 모든 이들을 피하고 싶은 듯 그저 고양이를 안고 집을 서성일 뿐이었다. 걱정이 앞서 밖으로 나가 누나를 찾으려고 하는 순간, 어둠속에서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인기척이 들렸다.
  누나는 집안에 있었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자 누나의 모습을 확실히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여느 때처럼 고양이를 품에 안고 침대에 기대 앉아 있었다.
  “누나, 왜 불도 안 켜고 그러고 있어?”
  내가 말하자 누나와 고양이가 동시에 나를 쳐다봤다. 날카로운 둘의 눈동자는 매우 흡사해서 어쩐지 오싹한 기분이 들어 잠시 숨을 멈출 정도였다. 자세히 보니 누나의 손에는 못 보던 물건이 들려 있었다. 그것은 기다란 갈색 머리끈으로 왠지 모르게 눈에 익은 물건이었다. 나는 동요하지 않기 위해 애써 태연한 척 탁자 위 램프에 불을 붙였다. 손이 떨렸다.
  “마르틴. 이게 뭔 거 같아?”
  누나의 목소리는 어딘지 얇은 웃음이 섞여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돌리기 싫었지만 어쩔 수 없이 누나를 쳐다봤다. 누나는 머리띠를 앞으로 쭉 내밀고 있었다. 누나의 팔은 너무도 창백한 색을 띠고 있어 새벽녘의 달을 연상시켰다.
  “머리띠잖아.”
  누나는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아니, 그걸 묻는 게 아니잖아. 봐봐. 익숙하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누나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확실히 누나는 웃음 짓고 있었다.
  “하지만 너는 이게 누구의 것인지는 모르겠다는 표정이구나. 잘 생각해봐. 기억 안나?”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누나는 잠시 실망스런 표정을 짓다가 말을 이었다.
  “이건 말야… 루디 퀸첼의 머리띠야. 오늘, 어머니가 이걸 가져 왔어.”
  마른 침이 고통스럽게 목을 타고 넘어갔다. 루디 퀸첼. 어머니의 가장 친했던 친구로서 어머니가 마녀로 지목되었을 때, 어머니가 마녀이미 확실하다고 증언했던 여자. 그러고 보니 누나 손에 들린 갈색 머리띠는 그녀가 좋아하던 머리띠가 틀림없었다. 순간 머리가 핑 돌아 주저앉을 뻔 했지만 가까스로 버텨냈다.
  “에밀리 누나.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내 목소리는 거의 울음소리에 가까웠다. 나는 진심으로 울고 싶었다. 반대로 누나는 만면에 미소를 띠고 대답했다.
  “아니, 아무 것도. 다만 이제는 네가 내 말을 이해할 때도 되지 않았나 싶어서.”
  “제발 그만해!”
  나는 소리 질렀다. 욕이라도 퍼부어 주고 싶었지만 그럴 순 없었다. 대신 침대 위로 올라가 모포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더 이상 어떤 말도 듣고 싶지 않았다.
  “괴로워마, 마르틴. 그저 현실을 직시하면 될 뿐이야.”
  미친 소리. 누나는 머리가 어떻게 된 게 틀림없다. 어머니의 죽음에 너무나도 큰 충격을 받은 나머지 실성했는지도 모른다. 누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아니, 콧노래라고 하기엔 너무 나지막했고, 음이 일정치 않았다. 그저 아무렇게나 중얼거리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러면서 고양이의 머리를 쓰다듬기라도 하는지 가끔 고양이는 기분 좋은 소리를 냈다. 저 빌어먹을 고양이.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내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조금씩, 조금씩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다니엘 치비히의 죽음이 떠올랐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누나의 노래를 듣지 않기 위해 귀를 막았다. 오늘 밤, 잠들지 말고 누나를 감시해야 하리라. 믿고 싶진 않지만 내가 생각하는 최악의 상황이 일어날 지도 모른다. 이미 모든 일이 돌이킬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을지도 모르겠다. 단지, 그렇지 않기 만을 바랄 뿐. 나는 잠든 척하고 있다가 누나가 만약-상상만으로도 끔찍하지만-집밖으로 몰래 나가려한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하지만…졸음이 엄습해오기 시작했다. 밀려오는 잠에 대항하기가 힘들었다. 평소 잠이 들 때 서서히 잠속으로 빠져드는 것과는 달리 이름 모를 약초라도 먹은 듯이 갑작스레 정신이 몽롱해지고 어질어질해졌다. 나는 쏟아지는 잠에 대해 거부할 한 줄기 의지조차 남겨놓지 않고 흐름에 몸을 맡긴 채 눈을 감았다. 어쩐지 미소가 흘렀다.
  아. 언젠가 지금과 비슷한 경험을 했던 것이 불현듯 떠오른다. 그래, 그건 꽤 오래전의 일. 너무 오래 돼서 이제는 내 기억의 잔재 속에서 녹아버리기 직전까지 와 버린. 하지만 다시 그 경험이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머릿속에 그려진다.
  나는 어렸고, 누나도 마찬가지다. 그날 밤 따라 어머니는 안절부절 못한 채 좁은 집안을 서성거린다. 간혹 완전히 멈춰 서서 동상처럼 굳어버린 모습으로 창밖을 바라볼 때를 제외하고는. 어머니의 눈은 아무 것도 살지 못할 것 같은 너무나도 어두운 밤하늘에서 만개한 보름달을 향해 있다. 어머니는 보름달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이내 다시 방안을 서성인다.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누나와 나 역시 불안해한다. 그런 어머니의 모습은 처음 보는 것이다. 누나와 나는 오늘 세상이 끝나는 건 아닌지 두려워하며 서로의 손을 맞잡는다. 창밖에선 매서운 바람이 마녀의 기괴한 웃음처럼 대지를 흔든다. 벌써 잠이 들었어야 하는 시간이지만 우리는 그러지 못한다. 그리고 어머니는 자신만의 생각에 잠겨 우리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하지만 밤이 깊어지던 어느 순간,
  너희들! 왜 아직 안자고 있는 거지?
  라며 어머니가 고개를 홱 돌리며 날카로운 눈으로 묻는다. 누나와 나는 묘지를 헤매는 유령을 만나기라도 한 것처럼 화들짝 놀란다. 누나는 급기야 울음을 터트리고 만다. 그러자 어머니는 금세 우리가 알고 있는 상냥한 어머니로 돌아와 미소 지으며 누나를 안는다.
  이런, 이런. 엄마가 너희를 놀라게 했구나. 걱정 마. 무서워할 건 아무 것도 없어. 자, 엄마가 노래를 불러줄게 어서 잠들 거라.
  어머니는 모포를 우리 목까지 바싹 끌어 덮어준 다음 곁에 앉아 노래를 흥얼거린다. 하지만 노래라고 하기엔 소리가 너무 작고 음이 불분명하다. 어머니는 냉정을 되찾은 것 같았지만 내 마음 속 한 구석엔 아직 사라지지 않은 불안함이 남아있어 잠들기를 거부한다. 이대로 눈을 감으면 영영 어머니와 누나를 보지 못할 것만 같다.
  하지만 나는 잠이 든다. 바로 지금처럼. 마치 끌려가기라도 하듯 잠의 늪으로 빠져들 때, 그날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것은 문이 삐그덕 소리를 내며 열린 것과 바람소리인지 어머니의 웃음소리인지 분간하기 힘든 소리가 내 귀에 아른거렸던 것뿐이다.
  나는 또 다시 잠이 든다.

  그리고 다음 날, 루디 퀸첼이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저녁이 가까워지자 먹구름이 몰려들고, 바람이 거세졌다. 나는 정적이 감도는 교회에 남아 어두워진 하늘을 바라봤다. 금방이라도 비가 세차게 퍼부을 것 같았다. 이미 감지했는지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마치, 마을은 흑사병이 휩쓸고 지나간 것처럼 고요하고 황량했다. 기분 나쁜 적막감이 검은 구름과 함께 넘실넘실 마을로 흘러들어왔다.
  몸이 떨린다. 겨울로 접어드는 비에 흠뻑 젖은 것도 아닌데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몸이 떨린다. 나는 한겨울에 맨몸으로 황야에 버려진 사람처럼 두 팔로 내 몸을 끌어안았다. 이빨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메아리처럼 침묵에 잠긴 교회 안에 울려 퍼졌다.
  베커가 개인적으로 만나자고 한 이유는 무엇일까. 루디 퀸첼이 죽은 후 나는 세 번의 마녀재판에 더 동참했고, 마을사람이 변사체로 발견된 것을 두 차례 목격했다. 두 사람 역시 어머니의 죽음에 관련이 있는 인물들이었다. 이따금 모든 것을 수습하기엔 너무 늦었다는 생각이 들어 가슴이 철렁 내려앉곤 한다.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에 이미 한쪽 발은 늪의 가장자리에 담근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루디 퀸첼의 죽음이후에 그런 생각이 부쩍 늘었다. 모든 것을 제자리에 돌려놓고 싶었다면 그녀의 죽음을 막았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고, 이제는 내가 속해있던 세계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 것만 같다. 이미 나는 강을 건너와 이전 세계 너머에 서있는 것이다.
  에드문트 베커. 그는 왜 나를 보자고 했을까. 이유는 너무도 분명했고, 그 사실을 자각할수록 내 몸은 더욱 더 심하게 떨렸다.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느릿느릿하지만 또렷이 들려오는 발소리. 어둠 너머에서 베커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주위가 너무 어두워서 특유의 발소리가 아니었다면 그가 맞는지 확신하기 어려웠을지도 모르겠다.
  “오래 기다렸니.”
  “아닙니다.”
  내가 떨고 있다는 사실을 그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과장된 큰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다행이구나.”
  그는 잠시 침묵했다. 그 사이 내 이가 부딪히는 소리와 심장소리가 교회를 무너트릴 정도로 커질까봐 나는 진심으로 두려웠다. 제발.
  “요새….”
  어둠 속의 눈이 나를 바라본다. 어쩐지 내 발밑에서 마른 장작들이 불타고 있는 듯하다.
  “에밀리는 어떻게 지내고 있지? 통 교회에 나오질 않는구나.”
  베커의 눈을 살핀다. 그의 눈은 흡사 마녀를 심문할 때의 그것과 매우 닮았다는 느낌이 든다. 나는 절벽 아래도 떨어지지 않기 위해 가까스로 버티며 대답했지만 입안이 바싹 말라 말이 쉽게 나오질 않았다.
  “예… 아직, 몸이 좋지 않아서 집밖으로 나오기가 힘듭니다. 워낙 충격이 컸으니까요.”
  “에밀리가 밤중에 돌아다니고 있다는 것을 본 사람이 있다.”
  베커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무 감정도 실리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버티고 서있던 곳이 점점 무너지기 시작한다. 조금씩, 조금씩. 하지만 그곳은 언젠가는 필경 무너지고 말 것이다.
  “그, 그럴…리가요.”
  베커의 목소리가 점점 커진다.
  “한, 두 명도 아니고, 한, 두 번도 아니다. 한밤중에 마을을 배회하고 있는 모습을 봤다고도 하고, 보름달이 뜨던 밤 큰 소리로 웃으며 언덕을 헤집고 다닌 것 본 사람도 있다더구나. 고양이와 함께.”
  고양이.
  “잘못, 잘못 본 게 아닐까요. 제가 매일 밤 누나 곁에 있었는데요.”
  베커는 말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애초에 내 변명을 듣고자 나를 부른 게 아니었음을 절실히 깨닫는다. 나는 결국 할 말을 잃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도대체 언제. 누나는.
  “마르틴.”
  검은 고양이.
  “지금까지 네가 얼마나 주님께 큰 봉사를 했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베커가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큰 바윗돌을 짊어진 것 마냥 무릎이 후들거린다.
  실체가 보인다. 모든 일의 원흉이 서서히 내 머릿속에서 연기처럼 서서히 피어오른다.
  “그렇기에 내가 널 얼마나 아끼는지 이 자리에서 그 맘을 전하고 싶구나. 진작했어야 되는데 어쩐지 그러질 못했단다.”
  어둠속에서 시퍼런 빛을 반짝이며 나를 바라보던. 잠든 누나의 품안에서 조롱하듯 울음소리를 내던 고양이.
  “하지만 말이다, 마르틴. 만일, 그러니까 만에 하나 너의 누이가 잘못된 길로 나아가고 있다면….”
  그 빌어먹을 고양이.
  “마르틴?”
  나는 고개를 든다. 잠시 딴 생각에 잠겼었음을 베커가 눈치 챈 듯했다. 하지만 그는 내 눈을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잘못된 길로 들어선 게 확실하다면,”
  누가?
  “마르틴, 네가 누이의 잘못을 바로잡지 못했음을 너는 평생 후회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가슴 안에서 내 마음을 지탱하고 있던 얇은 유리가 산산조각 나는 소리가 들려온다. 너무나도 날카로운 그 소리에 굳이 유리에 베이지 않았음에도 피부가 찢겨 피를 흘리고 말 것만 같았다.
  침묵이 흐른다. 어둠이 베커와 나를 집어삼키려 서서히 다가온다. 하지만 베커가 내 손을 잡자 어둠은 흠칫하며 한발 물러나는 게 느껴진다. 신비한 기운이 나를 감싼다.
  “내 말 알겠니, 마르틴.”
  나는 어느새 내 입속으로 들어온 짙은 어둠을 뱉어내며 대답한다.
  “예…. 예, 신부님. 제가 할 일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 것 같아요.”
  나는 미소 짓는다. 그럴 생각이 없었음에도 자연스럽게 미소가 흘러나왔다.

  *             *             *

  빌어먹을 고양이. 씹어 삼켜도 모자랄 염병할 고양이.
  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집으로 향하는 언덕을 오른다. 오후 내내 어두운 표정으로 내 머리 위를 맴돌던 구름들은 저녁이 되자 마침내 어둠의 무게를 견뎌내지 못하고 비를 대지에 흩뿌리기 시작했다. 아직 빗줄기는 가늘었다. 그러나 언젠가는 거센 폭우로 변모할 준비가 끝마친 모습이다. 언젠가는, 분명 꼭, 폭우가 되리라.
  마치 작은 풀잎을 밟는 것 같은 빗소리만이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있을 뿐, 주위는 어둠에 잠식되어 있다. 나는 그 어둠 너머로 한눈팔지 않고 집을 향해 내달렸다. 언제나 어두운 밤이면 높은 언덕에 위치한 우리 집은 마치 망망대해의 등대같이 작은 빛을 내보였지만 지금은 집이 언덕위에 존재하고 있는지 조차 알기 힘들 정도로 어둡다. 나는 괴성을 지르며 마지막으로 남은 얼마 안 되는 거리를 뛰어 올라갔다.
  거세게 문을 열었다. 그러자 벽에 부딪힌 문의 위쪽 경첩이 떨어져 나가며 문이 기울었다. 나는 문을 손으로 다시 내리쳐서 완전히 뜯어내 버렸다. 그리고는 언덕 밑으로 굴려버렸다.
  문이 열리고, 안개 같은 어둠이 집 안쪽에서 스르르 밀려나왔다. 그랬다. 이 빌어먹을 집은 비가 내리는 저녁하늘보다도 어두웠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나를 응시하는 두 개의 빛이 존재했다. 낯선 빛이었다. 그 빛은 곧 익숙한 목소리로 짧게 울었다. 마치 어린 아기가 흐느껴 울듯이.
  그 울음소리가 나를 진정으로 분노케 했다.
  “이 빌어먹을 것!”
  나는 성큼성큼 집 뒤로 돌아가서 벽에 기대둔 녹슨 곡괭이를 집어 들었다. 곡괭이는 어찌나 차갑던지 집는 순간 내 손이 그래도 곡괭이의 날에 착 달라붙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나는 두 손으로 소중한 물건을 품듯 곡괭이를 들고 다시 문으로 향했다. 누나와 나의 안녕을 파괴하는 저 빌어먹을 미물의 머리를 반으로 쪼개놓을 심산이었다. 한층 거세진 빗줄기가 내 앞머리를 흘러내리게 해 순간적으로 시야를 방해했다.
  그때였다. 검은 고양이는 어둠속에서 튀어 나와 그대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거기 서!”
  나는 울부짖으며 곡괭이를 어깨에 걸치고 뒤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고양이는 재빨랐지만 나 역시 쉽게 뒤로 쳐지지 않았다. 다만 새까맣기 그지없는 저 작은 존재가 어둠속으로 모습을 숨기지는 않을런지 걱정이 되었다. 나는 더욱 속도를 높였다. 점차 숨이 가빠왔다.
  하지만 상황은 내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고양이가 달아나고 있는 방향은 절벽이 있는 쪽이었다. 아무리 고양이가 높은 곳에서 떨어져도 무사하다지만 비가 내려 물살이 거세진 강으로 떨어진다면 얘기는 다를 것이다. 절벽 밑에는 큰 강이 흐르고 있다.
  나는 큰소리로 웃었다. 조금 후에 벌어질 심판에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곡괭이 끝에 고양이의 목을 꽂고 나만의 마녀화형을 집행할 예정이었다. 몸뚱아리는 산산이 찢어발겨 흩뿌리고 목만 불태울 것이다.
  이윽고 절벽이 모습을 드러내고 순간 주위가 번쩍이며 환해졌다. 천둥을 예고하는 환한 불빛에 고양이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다시 큰소리로 웃어 제꼈다.
  “심판하겠노라! 불길함을 가져오는 미물이여!”
  나는 곡괭이를 들어 올려 나무자루를 가슴에 끌어안고 엄숙한 모습으로 한걸음 나아갔다. 그렇게 하니 곡괭이는 흡사 신성한 십자가처럼 보였다. 누군가 멀리서 보았다면 필경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번개가 구름 사이로 번쩍이며 다시 주위를 밝히고, 천둥소리가 하늘을 뒤덮었다. 절벽이 무너져 내려앉을 만큼 거대한 소리였다. 고양이는 절벽 바로 앞에 멈춰 서서 아래를 바라보고 있었다. 물살이 소용돌이치는 무시무시한 모습을, 자신의 운명이 소용돌이칠 무시무시한 미래를.
  나는 다시 한걸음 나아갔다. 이제 고양이와 나는 열 발자국 거리 안에 있었다. 일격이다. 일격에 두개골을 빠개놓지 않으면 저 빌어먹을 것은 절벽 가장자리에서 빠져나와 다시 줄행랑을 칠 것이 분명했다. 나는 신중히 거리를 가늠하며 곡괭이를 천천히 들어올렸다.
  “…마…르.”
  나는 멈춰 섰다. 오싹한 기운이 내 전신을 훑고 순식간에 머리끝까지 올라왔다. 내가 잘못들은 걸까? 하지만….
  “마…르…틴….”
  분명 그것은 고양이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였다!
  검은 고양이는 마치 휘파람을 부는 것처럼 조그마한 입을 벙끗거렸다.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온 힘을 쥐어짜듯 극심한 고통 속에서 나오는 기괴하기 그지없는 소리였다. 유리조각을 입에 잔뜩 털어놓은 뒤 신음으로 가득 찬 소리를 내뱉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고양이는 분명 내 이름을 부르고 있다.
   “마….”
  “그만! 그만해!”
  나는 두 팔로 귀를 막고 비명 질렀다. 정신이 혼미해져서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만 같았다. 고양이는 여전히 나를 부르며 내게로 다가오기 시작했고, 나는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만해. 그만하라고.”
  눈물이 흘렀다. 공포도, 슬픔도, 기쁨도 아닌 새로운 감정이 내 눈물샘을 자극했다. 그래, 분명 나는 겁에 질린 게 아닐 것이다.
  뒷걸음질차다가 발이 엇갈려 주저앉고 말았다. 고양이는 멈추지 않았기에 우리의 거리는 이제 꽤 가까워졌다. 가까이서 보니 고양이는 흡사 미소 짓고 있는 듯한 얼굴이었다. 분명 고양이는 웃고 있었다.
  “이제는 모든 걸 이해하겠니, 마르틴?”
  갑작스레 들려온 소리에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본다. 누나가 뒷짐을 지고 사뿐사뿐한 걸음으로 절벽 가까이 다가왔다. 빗줄기에 몸이 흠뻑 젖었지만 누나는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모든 걸 알고 있었다는 듯이, 모든 게 뜻대로 되었다는 듯이.
  “누나?”
  “마르틴.”
  누나는 바로 내 앞까지 와서 치맛자락을 부여잡고 무릎 꿇었다. 그리고는 차가운 손으로 내 뺨에 흘러내린 눈물을 닦았다. 누나의 손이 닿은 부위는 따뜻한 눈물이 사라져 금세 얼어붙을 것만 같이 차가워졌다. 옆으로 가늘게 늘어진 누나의 눈은 다시 묻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누나는 웃으며 말했다.
  “뒤를 돌아봐, 마르틴. 내가 말했잖아, 저 고양이는 엄마의 화신이라고.”
  그러자 고양이는 만족한다는 듯이 울었다. 그 소리는 내 이름을 부를 때만큼 거북하진 않았다.
  “엄마는 진짜 마녀야. 너는 몰랐겠지만.”
  ‘마녀라고.’ 누나는 확인사살 하듯이 되뇌듯 다시 말하고는 꺄르르 웃었다.
  마녀. 엄마가 진짜 마녀였다고?  
  “그 날 말야-”
  누나가 말하는 날이란 분명 어머니가 돌아가셨던 날임을 나는 알 수 있다.
  “엄마는 자신의 운명에 대해 알고 있었어. 자신의 정체가 탄로 났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다가올 파멸의 순간에 대해선 벗어날 수 없다고 짐작하고 있었나봐. 그래서 미리 나한테 자신의 계획에 대해서 말해줬지. 내가 엄마를 도울 수 있도록. 너한테는 말할 수 없었어. 너는 신기하리만치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거든. 마르틴, 도대체 너의 그 가공할 힘은 어디서 나왔다고 생각했니?”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내가 가진 전부였던 누나와 나의 힘. 그 모든 게 내 손에서 점점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그건 모두 엄마 덕분이야.”
  누나는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누군가의 추악한 비밀에 대해 남에게 은밀히 털어놓듯이.
  “어쨌든 엄마의 계획은 이랬어. 검은 고양이는 마녀의 화신이라는 옛 말은 알고 있니? 그건 전부 사실이야. 그래서 엄마는 고양이의 몸을 빌리기로 했어. 불에 타서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볼썽사나운 시체가 되기 전에 말야. 어머니는 베커가 장작더미에 불을 붙였을 때 재빨리 주문을 외워서 미리 준비해뒀던 주술에 사용될 고양이로 영혼을 옮겼지.”
  아아. 집밖으로 쏟아버렸던 물이 간밤에 꽁꽁 얼어붙듯, 지워버리려 노력했던 과거는 사라지기는커녕 더욱 적나라한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난다.
  
  어머니가 고개를 든다. 화염 속에 묻혀가면서 어머니는 마지막으로 고개를 들어 누나와 나를 바라본다. 한없이 떨리는 보랏빛 입술은 우리에게 뭔가 말하고 있다.
  보이니?
  누나는 흐느끼는 목소리로 내 귀에 속삭인다.
  사랑해. 너희들을 정말로 사랑한다. 그렇게 말하고 있어, 엄마는….

  어머니는 그 순간 주문을 외우고 있던 것이다. 누나는 내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그렇게 말했을 뿐이다. 어머니는 내게 사랑한다고 말한 적이 없다….
  날이 어둡고, 비가 내리는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참함으로 얼룩진 내 얼굴이 환한 달 아래에선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말았을 테니까.
  “마르틴. 기분이 어때?”
  토할 것 같아. 진심이었다. 한바탕 시원하게 모든 걸 토해낸 다음 깊은 잠에 빠져들고 싶었다. 다음 마녀재판이 있을 때까지. 에드문트 베커 신부가 내가 필요하다며 손을 내밀어 줄 때까지.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말을 꺼냈다간 진짜로 토할 것만 같았다. 어느새 고양이가-아니, 뭐라고 불러야 좋단 말인가-내 곁을 지나서 누나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흠뻑 젖었네요, 라고 누나는 고양이의 등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고양이는 그 말에 화답하기라도 하듯 몸을 털어냈다. 소용없는 짓이다. 아직 비는 그칠 준비가 안 돼 있다.
  “마르틴.”
  누나와 고양이가 동시에 나를 바라본다. 나는 내가 짚고 있는 곳의 여린 풀들을 움켜잡았다.
  “이제 모든 걸 이해하니? 이 모든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겠어?”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함께 행동하는 거야. 비록 말로 표현하진 않았지만 나는 누나가 뒤에 덧붙이고 싶었던 말이 무엇인지 똑똑히 알 수 있었다.
  나는 어머니가 화염 속으로 사라졌던 날을 떠올리고, 피투성이가 되고도 서로의 손을 놓지 않았던 아이나 카닉과 루착 카닉을 떠올리고, 내 손으로 잡아들였던 마녀혐의자들의 절망어린 표정을 떠올리고, 마지막으로 크고 따스한 손으로 내 어깨를 어루만지던 에드문트 베커를 떠올렸다.
  그리고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나는 크고 또박또박한 말투로 말했다.
  “이해하지도 않고, 믿을 수도 없어. 내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건 단지 누나가 단단히 미쳤다는 사실 뿐이야.”
  누나는 대답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실망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고양이를 쳐다봤다. 고양이는 마치 도망갈 곳을 잃은 구석에 몰린 생쥐를 탐닉하듯 나를 노려봤다. 세찬 빗줄기 속에서도 빛나는 두 눈의 강렬한 기운은 막을 수가 없었다. 나는 어쩐지 목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아 입을 벌려 내리는 빗물을 마셨다. 비에선 피 맛이 났다.
  누나가 눈을 떴다. 그리고는 내 이마에 손을 얹었다.
  “잠시 잠들도록 해, 마르틴.”
  나는 깜짝 놀라 누나의 손을 거부하려 했다. 하지만 늦고 말았다.
  나는 고꾸라지듯 누나의 품으로 쓰러졌다. 어쩐지 졸음이 쏟아졌다. 내 귀는 부드러운 고양이의 꼬리에 닿아 기분이 좋았다. 나는 아마도 미소를 짓고 있을 것이다. 서서히 잠속으로 빠져드는 것은 너무나도 황홀한 기분이었다. 총천연색의 그림 너머로 나는 걸어 들어갔다. 내 마지막 남은 한줄기 정신이 빠져나갈 때 누나는 뭔가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네가 잠에서 깨어나 눈을 떴을 때, 네 앞엔 마지막 시험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좋은 꿈꾸렴, 착한 내 동생.

  *             *             *

  눈을 뜬다. 어쩐지 몸을 일으키기가 힘들어 가만히 누워 눈만 깜빡이고 있자니 몽롱한 기운이 서서히 몸 밖으로 배출되는 느낌이 든다. 등이 축축하다. 손으로 더듬어 보자 주위의 풀잎들은 온통 젖어있다. 비가… 왔던가? 하늘은 맑다. 구름이 전부 녹아버린 듯한 맑은 날씨다.
  선뜻 내가 처한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몸의 감각들이 돌아오는 느낌이 들어 상체를 일으켰다. 등 부위는 흠뻑 젖어 옷을 벗어 쥐어짠다면 꽤 많은 물이 쏟아질듯 싶었다. 발가락을 몇 번 꼼지락거려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약간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그럭저럭 괜찮았다. 내 몸은 괜찮았다. 아니, 모든 것이 괜찮았다. 내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만 제외한다면.
  나는 왜 이런 곳에 누워있었던가. 왠지 모르게 누나가 걱정이 됐다. 누나를 마지막으로 본 건 언제였지? …역시 기억나질 않는다. 나는 절벽 아래로 콸콸 흐르는 강물소리를 뒤로 하고 집 쪽으로 발을 옮겼다.
  몇 걸음 앞에 곡괭이가 떨어져있다. 집어 들어 천천히 살펴보니 꽤 익숙한 느낌이 드는 것이 분명 내 곡괭이란 생각이 들었다. 내가 들고 온 걸까. 그렇다면 무슨 이유로? 발걸음을 서두른다. 뭔가 기분이 좋지 않다. 누군가 내 뒤를 줄곧 노려보는 것만 같은 기분 나쁨이다. 실제로 나는 집으로 가는 동안 몇 번이나 뒤를 돌아봐야만 했다. 하지만 그곳엔 바람 한 줄기 조차 지나가지 않았다.
  집이 보이자 나는 달리기 시작했다. 큰소리로 누나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집은 십년이상 방치되어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모습으로 침묵하고 있다. 아무도 살지 않는 집은 내내 침묵하다가, 무너질 때에만 마지막 단말마를 내지르는 법이다. 집이 당장이라도 무너지면서 비명 지를까봐 나는 선뜻 다가서지 못한다. 집안에도, 집밖에도 누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점점 알 수 없는 기분 나쁜 무언가가 나를 감싸 안기 시작한다.
  나는 곡괭이를 꽉 쥐고서 다시 마을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언덕은 풀들이 젖어있어서 미끄러웠지만 개의치 않고 뛰어 내려갔다. 내 눈의 가장 윗 지점에서부터 마을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마을 위로 피어오르는 여러 개의 시커먼 연기도.
  연기. 기분 나쁠 정도로 시커먼 연기들을 보는 순간, 발밑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심장은 급작스레 가파른 운동을 시작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저 연기가 뭔가 잘 못되었다는 사실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래, 저 연기는 확실히 어딘가 잘못되었다. 나는 뛰기 쉽게 곡괭이를 어깨에 걸치고는 언덕을 질주해 내려갔다. 연기는 분명 마을 광장 쪽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미로처럼 얽혀있는 집들 사이를 내달린다. 길가에는 단 한 사람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뛰는 와중에 곁눈질을 해보지만 역시 마찬가지다. 창 너머 어디에서도 사람의 그림자는 찾아볼 수 없다. 마을은 방금 전에 보았던 우리 집과 마찬가지로 죽어가고 있는 듯 보였다.  
  광장으로 향하는 마지막 코너 길로 접어든다. 여기까지 오자 어디선가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한, 두 명이 내는 소리가 아니다. 마을 사람들 전체가 모여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들의 웅성거림은 이제 내 바로 위에서 출렁이는 저 시커먼 연기들만큼이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지막 코너를 돌았다. 이제 광장까지는 일직선이다. 그리고…나는 보았다.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둘러싸고 있는 한가운데의 맨 앞에는 횃불을 들고 있는 에드문트 베커와, 그의 앞에서 고개 숙인 채 나무기둥에 매달려 있는 누나의 모습을!
  순간 모두가 누나를 우러러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착각이었다. 누나의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한 줄기 핏방울을 보는 순간 모든 기억이 되돌아왔다. 누나, 고양이, 어머니, 천둥번개가 내려치며 빗방울이 내 몸을 적시던 그 모든 기억이.
  베커는 누나의 죄명을 읊고 있었다. 사람들은 시커면 연기를 내뿜는 횃불을 든 채 하나같은 표정으로 그의 말을 경청하고 있다. 그 누구의 눈도 깜빡이지 않는다. 어머니의 품에 안긴 아무 것도 모를 갓난아기조차도. 이윽고 베커는 말을 마쳤는지 횃불을 높이 치켜들며 큰소리로 외쳤다. 숨을 헐떡이고, 내 심장소리가 너무나도 커서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가 지금 무슨 행동을 하려는지는 똑똑히 알 수 있었다.
  나는 괴성을 내질렀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토해낼 만큼의 큰 괴성을. 모두가 뒤를 돌아본다. 베커의 시선이 내게로 향한다. 그리고 누나가 고개를 들었다. 누나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 비명 지르며 곡괭이를 높이 들어올렸다. 누나는 다시 힘없이 고개를 떨어트렸다. 사람들 사이로 파고드는 건 순식간이었다. 먼저 다리 근처에 사는 민탈 씨의 두개골을 육중한 곡괭이로 두 조각내어 빠개버렸다. 곡괭이를 다루는 것쯤은 내게 손쉬운 일이었다. 민탈 씨의 머리에서부터 뿜어져 나온 피와 알 수 없는 내용물들이 내 얼굴을 적셨다. 그리고는 몸을 반 바퀴 돌려 바로 옆에서 비명을 질러대는 페니타 아줌마의 목 줄기를 꿰뚫어 버렸다. 그녀가 다시는 꽥꽥 거리지 못하도록. 횃불을 든 남자들은 눈을 동그랗게 치켜뜰 뿐 아무도 내게 다가서지 못한다. 나는 그들의 한가운데로 뛰어들어 차례대로 골통을, 갈비뼈를, 허벅지를, 팔다리를 분쇄시켰다. 비명이 솟구치고 피가 요동쳤다. 붉은 핏방울들이 뿜어져 나오며 주위를 화려하게 수놓는다. 여자와 아이들의 숨통을 끊는 것은 개미를 죽이는 것보다 쉬운 일이다. 그들은 도망갈 생각조차 못하고 소리만 빽빽 지른다. 나는 집중적으로 그들의 목을 노렸다. 여러 개의 목이 공중에 떠올랐다가 이내 피로 그림을 그리며 땅바닥을 굴렀다. 주위는 삽시간에 정리됐다. 그 누구도, 그 어떠한 인간도 감히 내 누나에게 횃불을 던지지는 못할 것이다.
  에드문트 베커의 모습이 보인다. 그는 아직까지 횃불을 든 손을 쭉 뻗은 채 경악에 가득 찬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다. 핏물이 그의 얼굴과 옷에도 흠뻑 묻어있다. 언제 보았던 모습보다도 그에게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내가 고개를 돌려 그를 보자 그는 입을 뻐끔거리며 뭔가 말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의 입에선 아무런 말도 나오지 못한다. 우린 눈을 마주쳤고, 나는 분노했다. 순식간에 그의 몸을 곡괭이로 내려찍고는 그대로 들어 올려 곡괭이 채로 던져버렸다. 그가 비명을 내지를 시간도, 그가 그토록 사랑하던 신의 이름을 입에 올린 시간도 주지 않은 채.
몸집이 거대한 그의 시체가 데구르르 구르다가 멈췄다. 마지막으로 그의 몸이 멈췄을 때 고개가 나를 향하고 있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눈을 마주쳤다. 그제야 나는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했는지 실감하고는 무릎 꿇고 주저앉았다. 세상에, 신이시여.
  바닥에 떨어진 횃불들이 순식간에 수많은 시체들을 먹이 삼아 불길을 일으킨다. 주위가 삽시간에 밝아진다. 불길은 순식간에 모든 걸 먹어치울 기세다. 자신에게 먹이를 제공한 나까지도. 눈물이 흐르고, 불길이 거세져 앞이 흐릿하다. 어서 기둥에 묶인 누나를 풀어 달아나야만 했다. 나는 비틀거리며 일어선다. 방금 전까지도 내 것이었던 흉포한 힘은 모두 어디로 사라졌는지 손발이 하염없이 떨린다.
  그때였다. 나를 둘러싼 화염이-누군가가 행했던 기적처럼-좌악 갈라지면서 어떤 존재가 그 사이에서 나타났다. 고양이. 질릴 정도로 새까만 빛을 가진 검은 고양이. 고양이는 불길이 만들어놓은 화려한 길사이로 우아하게 걸어 들어왔다. 그것은 마치 구세주가 온갖 역경을 뚫고 모두의 앞에 나타난 것만 같은 풍경이었다. 고양이는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 웃음은 어머니의 웃음과 똑같았다. 나는 그 웃음에 짓눌려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고양이는 나를 흘끗 쳐다보고는 그대로 스쳐지나갔다. 그리고는 기둥에 묶여있는 누나를 보더니 훌쩍 뛰어올라 누나의 어깨위로 올라섰다. 고양이가 속삭이듯 입을 귓가에 가져가자 누나는 눈을 떴다. 그리고는 고개 돌려 고양이를 바라봤다. 그들은 서로를 마주보며 미소 지었다.
  고양이가 서서히, 그리고 매우 자연스럽게 얼굴을 앞으로 내밀어 누나에게 키스했다. 그것은 매우 조심스럽고 오랫동안 이루어졌다. 이윽고 둘의 얼굴이 다시 떨어졌을 때, 고양이는 마치 낙엽처럼 축 늘어져 땅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나는 재빨리 고양이의 몸을 받으려 했지만 늦고 말았다. 고양이는 그대로 곤두박질 쳐서 다시는 움직이지 않았다.
  “마르틴. 이리 와서 이것 좀 풀어 주지 않을래?”
  나는 고양이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다가 감미롭기까지 한 누나의 말에 간신히 고개 돌릴 수 있었다.
  “…응. 응, 누나.”
  혀가 쩍 갈라진 것만 같은 소리가 났다. 나는 휘청거리며 다가가 하나씩, 하나씩 쇠사슬을 풀었다.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오랜 시간이 걸렸다. 마침내 모든 사슬이 누나의 몸에서 떨어져 나갔고, 누나는 쓰러지듯 내 품에 안겼다. 나는 누나를 떨어뜨리지 않도록 남은 모든 힘을 써야만 했다. 누나는 가만히 내 품에 안겨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는 내 귀에 속삭였다.
  “고맙다, 아가야.”
  내 안에서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팔로 누나를 밀치며 얼굴을 바라봤다. 누나는 웃고 있었다. 어머니와, 고양이와 똑같은 웃음을.
  “아이나는 나를 위해 자신을 희생했단다. 자, 아가야. 이제 나와 함께 가자꾸나. 우리가 섬기는 진정한 분의 뜻을 따르기 위해.”
  머릿속이 울린다. 누나의 얼굴에서 떨어진 내 것이 아닌 핏줄기가 이마를 타고 흘러 눈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러자 세상이 전부 핏빛으로 물들고, 주위는 꺼지지 않는 불길이 언제까지나 타오르기 시작했다.

  <끝>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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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oland님 글 오랜만에 뵙네요. 반가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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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키 08.02.16 11:44 댓글 수정 삭제
    뭐, 이 글은 정말 딱히 할 말이 없군요.

    콕 집어서 비판할 구석도 없고, 매력적이라고 칭찬 할 구석도 잘 눈에 띄지 않군요.
    제가 난독증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우선 무난한 구성과 심리의 표현등이 돋보인 작품이었구요. 결말도 약간 억지스럽긴 하지만 괜찮았습니다.

    다만, 이 단편의 필자께서도 이야기를 조금 자신만의 방향만으로 끌고나가는 경향이 있군요. 물론 글이야 작가가 자신만의 내면 심리를 구축해 창조해 나가는 문학이긴 하지만, 글을 읽는 독자들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채 써내려가는 글은 오히려 본래의 취지에서 훨씬 뒤쪽으로 밀려나갈 수도 있습니다.

    마치 소설중에 결말에 대한 복선을 깔아놓으면서 '얘들아. 이거 복선이야. 잘 봐. 꼭 잘봐야해. 나중에 정말 중요한 거니까' 라고 소리없는 아우성을 치는 듯한 느낌이라고나 할까요. 읽는 독자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니래 동화되도록 만들 수 있는 글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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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8 단편 까마귀를 위하여4 세이지 2008.01.18 0
1047 단편 용의 알2 세이지 2008.01.05 0
1046 단편 호수에서2 해파리 2007.12.31 0
1045 단편 도깨비 숲1 노유 2007.12.30 0
1044 단편 가래 노유 2007.12.30 0
1043 단편 크리스마스 선물 세뇰 2007.12.24 0
1042 단편 Velouria 파악 2007.12.24 0
1041 단편 뮤즈의 속삭임(본문 삭제) Inkholic 2007.12.2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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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9 단편 즐거운 나의 집 파악 2007.12.11 0
1038 단편 신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9 Mono 2007.12.03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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