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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오랜 만남





#1



햇살이 예쁘게 반짝인다.

강물을 바라보던 세이렌은 그렇게 생각했다.

정말로 흐린 곳 하나 없이 파랗기만 한 하늘이었다. 새파란 하늘 사이로 티 없이 반짝이는 햇빛이 예쁘다. 좁다란 강가에는 크고 작은 바위들이 빼곡히 들어차 햇볕만큼이나 따뜻하게 빛나고 있었다.

둥근 아치의 돌다리가 짙은 그림자를 물 위에 비추고, 세이렌은 딱 기분 좋을 만큼 따뜻해진 바위 위에 드러누운 채였다. 밝은 햇살에 새하얀 긴 머리가 강물처럼 빛나고, 그는 가는 바람에 푸른 눈을 살짝 감으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너무 너무 좋은 날씨야.”

혼잣말을 중얼거린 그가 만족스러운 듯 싱긋 웃어 보인다.

“봄이 오긴 오는구나.”

“황자님! 황자님!”

갑작스레 멀리서부터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고, 세이렌은 고개를 살짝 들어 소리가 난 쪽을 바라봤다. 회색빛 돌다리 한 가운데 하얀 말의 고삐를 쥐고 선 채로 자신을 부르는 또래의 소년이 보인다. 세이렌의 얼굴에서 떠날 줄 모르던 미소가 슬며시 지워졌다.

“윽······.”

“몰래 이런 데로 빠져나오시면 어떻게 해요, 황자님!”

할 말이 영 없는 것은 아니었기에, 세이렌은 소년을 향해 당당한 목소리로 되받았다.

“오늘은 쉬는 날이라고 했잖아!”

“저는 데리고 가셨어야죠!”

“윽······.”

할 말이 영 없지 않은 것은 소년 역시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호위도 없이 몰래 이렇게 나오시면 어떡해요! 어서 황궁으로 돌아가세요, 황자님!”

황자는 귀찮다는 듯 바위 위에서 부스스 일어나며 새하얀 머리를 긁적였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볼멘소리가 흘러나왔다.

“다시 말하지만 말야. 오늘은 쉬는 날. 이잖아?”

“손님이 찾아오셨어요!”

“손님? 나한테? 무슨 손님?”

소년은 말의 고삐를 바투 쥐며 더더욱 크게 소리쳤다.

“금발의 손님이요! 폐하께서 어서 모시라고 할 만큼 높으신 분 같은데, 저는 도무지 어떤 분이신지를 모르겠어요! 그 손님이 황자님을 찾으세요!”

소년의 그 말에, 세이렌은 굉장히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가 이렇게 갑작스레 서두르는 모습에 당황한 소년이 무어라 말을 더 꺼내기도 전에, 그는 소년이 있는 곳으로 날듯이 달려가 말의 고삐를 가로챘다.

사락······.

밝은 햇빛에 눈부실 만큼 빛나던 하얀 머리카락이 소년의 콧잔등을 스치고, 빠르지만 기품 있는 움직임으로 말에 오른 세이렌이 말머리를 급히 돌렸다.

“화, 황자님!”

“미안, 구르탕! 천천히 와!”

말마따나 ‘바람같이’ 사라져가는 황자의 뒷모습을 처연히도 바라보며, 소년이 풀죽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게······ 제 이름은 구르틴이라니까요······.”



문이 벌컥 열리고, 누군가 다급히 뛰어 들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황자의 허락조차 없이 마음대로 소파에 앉아있던 남자는 신경 쓰지 않는 듯한 모습으로 문을 등지고 앉은 채 읽던 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로엘!”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 어떤 ‘이름’이 불렸고······.

와락!

“반가워, 반가워, 반가워!”

소파에 앉은 채인 그를, 뛰어 들어왔던 누군가가 등 뒤에서 안아버렸다. 아니, 달려와 매달렸다고 하는 편이 옳을 지도 모른다. 그의 손에 들려있던 책이 힘없이 바닥으로 툭 떨어지고, 백색 머리카락이 그의 금빛 머리와 섞여 예쁜 조화를 만들어냈다.

그는 멀리서부터 뛰어온 듯 뒤에서 자신을 안은 채 오랫동안 숨을 고르는 황자를 향해 무덤덤하게 첫마디를 건넸다.

“무거워.”

“반가워, 반가워!”

“알았으니까.”

“정말 보고 싶었어, 로엘!”

“이름 좀 제대로 불러.”

“응응, 잊지는 않았어. 로제니엘! 아하하.”

세이렌은 그러고도 한참을 움직이지 않았고, 로제니엘이라 불린 남자는 더 이상 아무 말 하지 않은 채 가만히 그렇게 앉아있었다. 세이렌은 턱까지 차오르던 숨이 조금은 편해진 다음에야 팔을 풀고 로제니엘의 맞은편으로 걸어가 앉았다. 그의 얼굴에 만연한 웃음을 보던 로제니엘이 떨어진 책을 주워들고는 입을 연다.

“우리 본 지 얼마 안 지났어.”

“아니야. 몇 달이나 지났잖아.”

“하.”

세이렌의 어쩔 도리 없는 대답에 로제니엘은 맥없이 웃어버렸고, 비로소 미소를 지었다.

“그래.”

“뭘 보고 있어?”

“그냥 책.”

책을 들고 있는 그의 하얗고 긴 손가락 사이로 『딱 1년, 드래곤 슬레이어 되기』라는 제목이 눈에 띄었다. 어이없으리만치 재미있는 책 제목에 세이렌이 웃으며 물었다.

“그런 게 있었어?”

“······ 네놈 집이야.”

“아, 황궁 도서관에 책이 워낙 많아서······. 하하. 그치만 그거, 로엘이 좋아할 만한 것도 아닌걸.”

“뭐, 그럭저럭.”

성의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그 대답에 도리 없이 웃던 세이렌이 자리에서 다시 일어서며 말했다.

“조금만 기다려, 로엘. 차라도 가져올게.”

자리에서 직접 일어서 밖으로 직접 나가 자신이 직접 준비한 차를 내오는 황자. 평범한 황자에게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을 그런 모습에도, 로제니엘은 별다른 내색 없이 읽던 책 위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잠시 후 세이렌이 가지고 나온 것은 대체 며칠 전에 구운 것인지에 대한 의심이 들 만큼 잔뜩 말라버린 쿠키와 흐린 빛의 홍차였다. 직접 만들었다는 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괴상한 모양에다 군데군데 까맣게 타있기까지 까지 한 황자의 어쩔 도리 없는 작품이었지만, 로제니엘은 스스럼없이 ‘그것’을 입에 넣어 조용히 씹어 넘겼다.

“······ 여전하군.”

로제니엘의 첫 마디에, 세이렌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의 감상을 물었다.

“어때? 늘었어?”

“맛없어. 땅콩이 탔어.”

“······ 그건 건포도 쿠키야, 로엘.”

자신이 먹던 쿠키에서 발견한 ‘땅콩’이라는 것의 실체가 건포도였다는 믿기 힘든 사실에도, 로제니엘은 별다른 표정 없이 다시 대답했다.

“······ 어쨌거나 맛없어.”

“하긴, 그때처럼 ‘끔찍해, 제길’이 아니어서 다행이야. 이것도 먹어봐. 이건 사과 쨈이 들어간 거고, 이건 아몬드, 그리고 이게 땅콩이야, 로엘. 에 또······. 응, 이건 로엘이 좋아하는 초콜릿 칩.”

쿠키를 씹고 있던 입속에서는 모든 쿠키가 다 같은 맛이라는 주장을 강하게 펼치고 있었지만, 로제니엘은 거절할 생각도 않은 채 세이렌이 권하는 모든 쿠키들을 하나씩 맛보고 있었다.

싱거움에도 불구하고 쓴 맛이 나는 괴상한 홍차 한 모금으로 마른 목을 적신 그에게 세이렌이 생긋 웃는 얼굴로 물었다. 로제니엘을 만난 뒤로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입 속에 맴돌던, 세이렌으로서는 꺼내기 힘든 질문이었다.

“이제······. 완전히 온 거야?”

로제니엘은 대답 없이 쿠키 하나를 더 집어 입에 넣었고, 세이렌은 이번엔 좀 더 진지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다시 물었다.

“마지막으로 가는 여행이라고, 다녀오면 여기서 계속 머물 거라고 약속했잖아?”

그런 세이렌의 말에도, 로제니엘은 여전한 표정으로 홍차 한 모금을 더 마시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금빛 머리가 잠시 물결 이는 듯 흔들린다.

“잘래.”

“응? 로엘, 어디에 또 가야 하는 거야? 아니지? 여기에 계속 있을 거지? 응? 응?”

어린아이 같은 투정 어린 다그침에, 로제니엘은 못이기는 척 심드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안 가.”





* 문학 커뮤니티 베스트셀러를 꿈꾸다 ( http://cafe.daum.net/Besel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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